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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무장을 새롭게 하고 나온 잉글랜드 선수들이지만 이는 스페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대회 2연패를 눈 앞에 두고 있었고 그들의 이름을 역사에 새길 수 있는 찬스를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전반보다 더 거세게 잉글랜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점유율은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한 수준으로 벌어졌고 잉글랜드는 최전방의 데이빗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들의 진영에 틀어 박혀 수비에 임했다.
"흐름이 끊어졌으면 했는데..."
안타깝다는 듯 카펠로 감독이 한숨을 쉰다. 전반전에 선제골을 넣은 이후, 계속 수비 일변도의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점유율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수비적인 축구를 지향하는 카펠로 감독이라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얻어 맞는 경기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잘 버티고는 있습니다만..."
코치가 말 끝을 흐린다. 지켜보는 사람이 절로 불안해 지는 경기 흐름이었다. 다행히 위협적인 슈팅은 아직 그리 많이 나오고 있지는 않았지만 원래 공격하는 쪽보다 수비하는 쪽이 먼저 지치는 법이다.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도 훨씬 어렵다. 이들은 선수들이 부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버텨주길 기원했다.
'익숙해, 이런 거.'
외로이 최전방에서 홀로 공을 기다리며 데이빗은 쓴 웃음을 지었다. 바르셀로나와의 경기,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 등에서 종종 겪었던 일이다. 동료들은 후방에서 죽어라 공을 빼앗기 위해 뛰어 다니고 있었고, 자신은 가만히 서서 그들이 패스해 주길 기다리는 일은 익숙하다고는 해도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래서 체력이 중요한 가봐.'
아마추어 시절에 비해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체력이 강해졌다. 하지만 지금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있는 루니와 같은 활동량으로 한 경기를 소화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렇게 뛰어서는 길어봐야 60분 정도를 소화하고 뻗어 버릴 것이다. 그의 막강한 공격력을 생각한다면, 그를 그런 용도로 사용할 감독은 아무도 없었다. 최소한 달글리시 감독과 카펠로 감독은 그랬다.
'이렇게 혼자 편하게 있어서 미안하지만...'
가시 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계속해서 수비의 위치 변화와 아군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패스만 연결해 주면, 반드시...'
리버풀에서 데이빗이 이런 밀리는 상황에서, 동료들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필사적으로 빼낸 공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연결시켜 준다. 이것은 신뢰의 증거였다. 자신이라면 반드시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 줄 거라는 기대와 믿음, 그것을 배신하고 싶지 않은 데이빗이었다. 이번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번만, 절대 실수하지 않을테니까 딱 한 번만 패스해줘요. 그럼 저 망할 스페인 녀석들의 희망을 끊어 버릴테니까.'
동료들을 사정없이 몰아 치고 있는 스페인 선수들을 보는 눈길이 곱지 않다. 데이빗은 입술을 깨물며 때를 기다렸다.
때리는 쪽과 버티는 쪽의 인내심 싸움이었다. 한 골을 뒤지고 있는 스페인은 빠른 시간 안에 동점골을 넣길 희망했고 잉글랜드는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리드를 지키고자 했다.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고 그라운드 위를 뒹구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페널티 박스로 투입되는 공을 존 테리가 몸을 날리며 사이드 라인으로 걷어 낸다. 이니에스타의 돌파를 막지 못한 글렌 존슨이 유니폼을 잡아 당기며 파울로 끊어 낸다. 치열한 공방전, 전반에 웨인 루니, 그리고 스콧 파커가 옐로우 카드를 받았다. 후반 15분 만에 추가로 스티븐 제라드와 글렌 존슨에게 경고가 주어졌다. 이것으로 카드를 받은 인원은 넷, 카펠로 감독은 지나친 경고 누적은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고 스튜어트 다우닝과 스콧 파커를 교체시키며 포메이션을 전환하였다. 왼쪽 사이드의 애슐리 영을 오른쪽으로, 스튜어트 다우닝을 왼쪽 미드필더로 배치시켰고 스콧 파커의 자리에 제임스 밀너를 이동시켰다.
"조심해. 절대 퇴장 당해서는 안돼."
프리킥 수비를 위해 벽을 서는 제라드가 루니에게 이야기한다. 루니는 문제 없다는 듯 소리쳤다.
"스티비야 말로. 걱정하지마. 퇴장도 조심해야 하지만 카드를 두려워하느라 소극적인 플레이를 해선 곤란해."
"당연하지. 이제 30분도 안남았어. 30분만 버티면 돼."
심판이 벽의 위치를 조정한다. 너무 가깝다는 판정, 잉글랜드 선수들은 1초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조금 밍기적 거리며 뒤로 물린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약이 오를 만한, 비매너라고 욕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팀이나 하는 플레이였다. 골키퍼가 골 킥을 늦추고, 넘어진 수비수가 큰 부상이 아님에도 시간을 끄는 것 모두 권장할만큼 좋은 플레이는 아니었지만 프로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후우."
키커로 나선 것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이드 쪽에 치우친 위치라 직접 때리기에는 쉽지 않은 위치, 거리도 상당했기에 크로스나 짧게 내주는 패스로 이어줄 것이 분명했다. 스페인은 코너킥 상황에서도 로빙 볼을 올리지 않는 팀이었으니까.
예상대로 중앙 지역의 사비에게 빼주는 이니에스타, 사비는 곧바로 파브레가스에게 전진 패스를 찔러 주었다. 애슐리 콜과 존 테리의 사이를 파고드는 움직임, 파브레가스는 공을 끌지 않고 공을 중앙 쪽의 다비드 실바에게 연결 시킨다. 제임스 밀너와 경합 하며 공을 받아 내는 실바, 다시 한 번 터지는 원 터치 패스, 최종 목적지는 다비드 비야였다. 계속되는 원 터치 패스의 향연에 순간적으로 다비드 비야에 대한 마크가 반 박자 늦었다. 졸리온 레스콧이 따라가 보지만 이미 슈팅 동작에 들어간 비야였다.
"나이스!!!"
"잘했어 조!!! 너 이 자식아 진짜 잘했어!!"
이번 대회에서 그리 좋은 컨디션이 아닌 다비드 비야의 슈팅은 강렬했지만 코스가 아쉬웠다. 노마크나 다름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리고 다비드 비야라는 이름 값을 생각하면 부족함이 있는 슈팅이다. 골키퍼 조 하트가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고 간신히 펀칭에 성공한 조 하트를 향해 잉글랜드 선수들이 격한 고마움을 표시한다.
[스페인이 선수 교체를 진행합니다. 다비드 비야가 빠지고 그 자리에 9번, 페르난도 토레스가 들어갑니다.]
[다비드 비야 선수가 이번 대회 내내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죠. 그래도 워낙 큰 무대에 강하고 국제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선수라 결승전에서도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의 신임을 받았지만 자신의 몫을 다 해내지 못했습니다.]
[페르난도 토레스 선수는 소속 팀, 첼시에서는 본인의 커리어 최악의 시간을 보냈습니다만 이번 대회에서는 살아나는 모습입니다. 후반 조커 카드로 활용되고 있는데 두 골을 뽑아내며 쏠쏠한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클래스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겠죠. 순간 스피드가 좋고 이를 활용하여 뒷공간을 파고드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지금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데이빗 장 선수에 의해 깨졌지만 리버풀 소속으로 최단 경기 50골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결정력도 뛰어난 선수입니다. 잉글랜드 선수들이 반드시 경계해야 할 선수죠.]
[남은 시간은 이제 20분, 잉글랜드가 이대로 스페인의 추격을 뿌리 치느냐, 스페인이 역전해 내느냐는 이제 20분 내에 결판이 나겠습니다.]
양 팀 모두 한 명의 선수만을 교체하며 경기를 이어 나갔다. 스페인이 공격하고 잉글랜드가 막는다. 그 양상은 변하지 않았다. 간간히 데이빗 쪽으로 공이 날아가긴 했지만 대부분 부정확한, 대충 걷어 내는 공이었던지라 데이빗이 받아 내기 전에 먼저 수비에게 잘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잉글랜드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쨌거나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리드하고 있는 것은 잉글랜드였으니까. 전광판의 시계가 조금씩 움직였고 어느새 남은 시간은 15분 안쪽, 스페인 선수들 슬슬 조급해 질 시간이었다.
축구라고 하는 스포츠는 결국 골이 들어가야 하는 스포츠다. 점유율, 유효슈팅, 패스 성공률...이런 것들이 아무리 높다고 해 봐야 골이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점유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상대의 공격 기회를 제한하고 자신들의 공격 찬스를 늘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 자체만으로 점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만큼 잉글랜드 선수들의 수비력이 빛났다고 볼 수도 있다. 이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마치 약 팀이 강 팀을 상대하는 것처럼 수비 일변도의 자세를 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지난 유로 2004를 석권한 그리스와 비슷한 모습, 차이가 있다면 잉글랜드는 스페인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을 상대로 해서는 대등, 혹은 그 이상의 공격성을 보여준 반면 그리스는 상대를 불문하고 선 수비, 후 역습의 전술을 취했다는 점이다.
우승에 대한 잉글랜드 선수들의 열망을 엿 볼수 있는 장면이다. 이대로 우승한다고 해도 떠들기 좋아하는 일부 언론과 소위 '아름다운 축구', '공격적인 축구'의 신봉자들에게 욕을 먹을 만한 경기 운영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평가가 우승컵을 가져다 주는데 1%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순순히 얻어 맞고만 있을 만큼 잉글랜드가 얌전한 팀은 아니었다. 수비 일변도로 보이나 그들의 의식 한 편에는 언제나 역습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 물론 그 의지를 현시로 만들 최고의 카드도 준비되어 있었다.
제임스 밀너는 소속팀 맨체스터 시티에서 주전 취급을 받지는 못하는 선수였다. 워낙 스쿼드가 화려한 팀이라 이름값에서 밀리는 그가 자리를 차지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활동량에 있어서 리그 최고 수준이었고 스페셜리스트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준수한 킥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즉, 균형 잡힌 미드필더의 전형이었다.
그는 중앙 지역에서 순간적으로 스티븐 제라드와 협력 수비를 통해 다비드 실바를 에워쌌다. 탈압박에는 일가견이 있는 실바였지만 스티븐 제라드와 제임스 밀너의 순간적인 움직임이 워낙 좋았다. 아슬아슬하게 반칙이 아닐 정도의 태클을 스티븐 제라드가 보여 주었고 흘러 나온 공을 밀너가 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최전방의 데이빗을 향해 롱 패스를 시도했다.
'조금 긴가...아냐, 충분해!'
아껴왔던 체력을 지금 모두 폭발시킬 작정으로 데이빗이 내달렸다. 급한 상황이고, 체력이 떨어진 상황이다 보니 밀너의 킥은 조금 부정확했다. 이대로 둔다면 그대로 왼쪽 사이드 라인을 벗어날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후반 내내 공 한 번 제대로 잡아 보지 못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한 골 정도는 실점해도 된다는 여유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오른 발을 박차며 점프한다. 그리고 슬쩍 몸을 틀며 머리를 이용해 라인을 벗어 나려던 공을 다시 안 쪽으로 돌려 보낸다.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데이빗의 몸은 사이드 라인 바깥으로 흐른다. 자신이 살려 놓은 공에 아르벨로아가 달려드는 모습이 보인다. 데이빗은 미끄러지는 몸을 추스리며 공을 향해 다시 박찼다. 아르벨로아도 망설임이 없다. 공을 사이에 두고 양 쪽에서 달려드는 두 선수, 이대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가는 충돌의 위험이 있었다.
'웃기지마.'
만약 여기에서 충돌로 인해 넘어진다면, 그로 인해 파울을 얻는다고 해도 손해였다. 결국 제자리 걸음을 한 셈이니 말이다. 데이빗은 마지막 순간에 발을 뻗어 먼저 공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목표는 죽자 사자 달려 들어 오는 아르벨로아의 다리 사이. 앞뒤 재지 않고 달리는 와중인지라 다리 사이를 신경쓸 수 있을리 만무했고 공은 가볍게 그 사이를 지나 뒤로 빠졌다. 그리고 간신히 다리를 회수하고 몸을 틀어 충돌을 피한다.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공방, 이 승부에서 이긴 것은 데이빗이었다. 그리고 승리에 대한 보상은 달콤했다.
'충분해!'
가속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졌다. 아무리 뛰어난 테크닉을 자랑하는 선수라고 해도 제 자리에서 상대를 제치는 일은 힘들다. 이건 데이빗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 아르벨로아를 제침으로 인해 다음 장벽인 세르히오 라모스까지의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데이빗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스피드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테크닉이 부족한 선수들은 빠르게 달리며 볼 컨트롤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수비가 없는 상황에서 혼자 달리다 실수하는 선수들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만큼 최고 속도로 달리는 와중에 볼을 컨트롤 하는 일은 쉬운 재주가 아니었다. 세계 최고 레벨에 이른 선수들, 그 중에서도 소수의 선수들 만이 할 수 있는 스킬, 물론 데이빗도 그 중 하나였다.
순식간에 세르히오 라모스와의 거리를 좁힌 데이빗이 상체를 크게 흔든다. 그와 동시에 왼발로 한 번, 오른발로 한 번, 공 위를 스치듯 움직인다. 세르히오 라모스가 움찔하며 반응하지만 크게 흔들림은 없다. 괜히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에서 주전으로 뛰는 선수가 아니었다.
'쳇, 끈질기게...'
이왕이면 헛다리 페이크로 나가 떨어져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현혹되지 않는 상대의 모습에 내심 혀를 찬다. 이제는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다른 스킬을 부리기에는 이미 거리가 너무 좁혀졌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강행 돌파, 데이빗은 방향을 꺾으며 어깨를 들이 밀었다.
데이빗으로서는 드문 플레이, 어깨와 어깨가 맞부딪히는 상황에서 비집고 들어가는 플레이는 그가 자주 하는 플레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데이빗으로 하여금 찬밥 더운밥을 가리지 않게 했다. 여기까지 와서 백 패스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큭...!"
예상은 했지만 상대로부터 느껴지는 반발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밀려나면 안된다.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데이빗은 이를 악물며 온 몸의 힘을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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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고 계실때 저는 콸라룸푸르 숙소에서 자고 있겠네요
-그리고 일어나면 호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