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59 =========================================================================
"아우...머리야."
눈을 뜨자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이 밀려 왔다. 데이빗은 눈을 찌푸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직 머리가 잘 돌아가진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아 맞다. 호텔이었지."
확실히 제 정신은 아닌지 생각이 느렸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데이빗은 엉금엉금 기다시피하여 방에 비치된 냉장고로 향했다. 물병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야 조금 주변이 눈에 들어 왔다. 방에는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게 다 뭐야..."
두 개의 침대가 준비된 방이었다. 한 쪽 침대는 자신이 사용했던것 같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한 침대에는 무려 세 명이 쓰러져 있었고 바닥에도 굴러다니고 있는 두 선수가 있었다.
"어이 마르코, 일어나서 침대에서 자라고. 호세 너도 일어나. 바닥에서 뭐하는 거야?"
"끄응..."
데이빗의 손에 질질 끌려 침대로 향하는 마르코 로이스, 그리고 호세 엔리케였다. 두 명을 대충 침대위에 던져 놓은 데이빗은 일단 화장실로 들어 갔다.
"...갈아 입을 옷이 없잖아...라기 보단 내 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다행히 옷이 크게 지저분하거나 음식물 등이 묻지는 않았지만 씻고 나서 갈아 입지 못한다는 건 상당히 찝찝한 일이었다. 그렇다고해서 없는 옷을 만들어 낼 수도 없으니 일단 씻기로 마음 먹었다. 짐이야 누군가 알아서 챙겼겠거니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후우..."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니 한결 개운하다. 술을 마시면 다음날 왠지 피부에서도 알콜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다며 데이빗이 투덜거린다.
"어제...진짜 장난 아니었지."
광란의 밤이 있다면 바로 어제였으리라. 데이빗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제의 일을 회상했다.
"으랏차!"
개선 장군들처럼 보무도 당당하게 라커룸 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그리고 라커룸 한 가운데에 트로피를 놓기가 무섭게 어디선가 들고온 샴페인을 들고 뿌리기 시작한다.
"기분 죽이는데!"
"야 잠깐만! 눈에 들어 갔어!"
"잠깐은 무슨 잠깐! 이걸로 씻어!"
너나 할 것 없이 준비된 샴페인과 맥주를 서로에게 붓기 시작한다. 데이빗도 어느새 홀딱 젖은 생쥐꼴이 된 채로 병을 쥐고 이리 저리 퍼붓고 있었다. 달글리시 감독은 호세 레이나와 디르크 카윗에게 붙잡힌채 샴페인 세수랄까, 샤워를 하고 있었고 제라드 또한 신이 나서 괴성을 지르며 동참하고 있었다.
찰칵 찰칵-
그 장면은 고스란히 기자들에 의해(출입을 허락 받은) 카메라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런 샷 한 장, 한 장이 모두 기사 거리가 되기 때문에 그들의 손은 멈출줄 몰랐다. 기자들에게 있어 이곳은 지금 금맥이나 다름 없었다.
광란의 샴페인 샤워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뒤 다시 한 번 우승컵을 가운데에 놓고 단체 사진을 준비했다. 웃통을 벗고 있는 선수들, 샴페인에 홀딱 젖은 선수들 등 몰골들은 썩 보기 좋은 건 아니었지만 이런 사진이야말로 우승의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적격이었다.
"오케이! 이제 마시자!"
사진을 몇 장 찍고 기자들에게 이만 퇴장을 요청하는 스탭들이다. 그들은 내심 좀 더 이 자리에 머무르고 싶었던 눈치였지만 욕심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작은 욕심에 곤조를 부렸다가는 출입 허가가 취소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건진 사진만으로도 기사 거리는 차고 넘쳤다.
그리고 그들이 라커룸을 나서고 본격적인 술판이 시작되었다. 원래 공식적으로 구단에서 인근 호텔을 예약하여 우승 축하연을 준비해 놓았지만 이미 불붙은 선수들은 지금 당장 무언가를 마셔야 했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세요! 호텔에 충분히 많은 양이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구단 직원이 나서서 언질을 준다. 그는 선수들이 여기에서 너무 많이 마시고 뻗어 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여기서 먹고 거기가서 또 먹으면 되죠. 걱정 말라구요!"
물론 선수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은 직원들이 준비해 둔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달글리시 감독을 바라 보았다.
"왜 날 보나? 마시자고! 오늘은 무조건 즐기는 거야!"
"오오오오!"
선수 출신답게 긴말하지 않고 잔을 들어 올리는 달글리시 감독, 그리고 기세 좋게 한 잔을 비워낸다. 선수들은 60대 감독의 패기에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서로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나누었다.
"캬 죽이는데?!"
평소 그들이 마시는 것과 별반 다를바 없는 평범한 술이지만 선수들에게는 마치 천상의 감로수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다들 탄성을 내지르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정말이야! 지금까지 마셔 본 맥주 중에 제일 끝내주는 맛이야!"
"우승컵에 부어서 마셨으면 더 죽여줬을텐데, 하필이면 뚜껑이 덮여있냐."
아직도 우승컵에 원샷하는 꿈을 포기하지 못한 것인지 레이나가 우승컵을 향해 아쉬운 눈빛을 보낸다.
"이거 뚜껑 한 번 따 볼까?"
"미쳤냐? 야 저 미친 자식 우승컵 근처에도 못가게 해!"
슬금슬금 우승컵 상단의 왕관을 만지작거리는 엔리케를 보고 기겁한 선수들이 뜯어 말렸다. 제라드는 먹던 잔도 내려 놓고 부리나케 달려와 우승컵을 빼앗듯 끌어 안았다.
"농담이라고. 그렇게 사람 무안하게 그럴 건 없잖아."
억울한듯 항변하는 엔리케, 하지만 동료 선수들로부터 가벼운 타박을 받고 침몰했다.
"어이 데이빗! 너 임마 한 시즌 동안 금주했으니 오늘 일 년치 몰아 먹는거야! 자 마셔 마셔!"
호탕하게 웃으며 데이빗에게 잔을 들어 올린다. 빨리 건배하지 않고 뭐하냐는듯한 모습에 데이빗은 픽 웃으며 잔을 마주했다.
쨍-
"좋아요. 오늘 페페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내가 시험해 보겠어요!"
"...패기있게 나선 것까지는 좋았는데..."
끙 하고 신음을 흘리며 샤워기를 끈다. 애초에 어제의 자리에서는 술 안 마시겠다고 뺄 생각도 없었다. 시즌 중에 금주하기로 한 것이지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우승 축하 파티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면 언제 마시겠는가.
"...기억이 안나..."
라커룸에서 신나게 들이 붓고 호텔로 자리를 옮긴 것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호텔에서 열심히 또 들이 부었던 것도 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가위로 잘라낸 것처럼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패기는 객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일단 호세 레이나는 자신의 머리속에서 괴물로 기억 변경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중간에 춤도 미친듯이 췄던 것 같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난리도 아니었던것 같다. 기억이 나질 않으니 영 찜찜했다. 다들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아 크게 상관 없을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이런 것도 추억 아니겠냐며 데이빗은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은 뒤 욕실 문을 열었다.
"어휴, 술 냄새."
씻기 전에는 자신도 저런 냄새를 풍기고 있었을 것이다. 데이빗은 테라스로 이어지는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다들 언제까지 잘거야? 슬슬 일어 나라고."
"아우..."
대답대신 알아 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이들이 일어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별수 없이 먼저 방을 나섰다. 자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봐야 할 것도 없었고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싶었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단아하게 꾸며진 복도가 눈에 들어 왔다. 나오고 나서야 여기가 몇 층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짓는다.
"하긴 내가 방으로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이 안 나니까."
일단 바람을 쐬어야 하니 로비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에 시계를 확인하는 데이빗.
"...뭐야, 7시 밖에 안됐잖아."
평소 일어나는 시간과 거의 비슷하게 일어난 것 같다. 이래서 버릇은 무섭다고 살짝 한숨을 쉰다. 더 들어가서 잘까 싶기도 했지만 굳이 복닥복닥한 방으로 들어가 부대끼고 싶지는 않았다.
"바람 좀 쐬다가 아침이나 먹어야겠다."
과음 후유증으로 그리 식욕이 돋지는 않았지만 거르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데이빗은 로비에 서 있는 직원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바(bar)로 향했다. 산책하기전에 마실거라도 좀 들고 나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사인을 요청하는 바의 직원에게 사인을 해주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시원하다. 날씨도 좋...진 않네..."
우중충하게 구름이 끼어 있는 날씨,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뭐 잉글랜드에서야 비만 오지 않으면 좋은 날씨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 넓진 않은데, 그래도 잘 꾸며 놨네."
가볍게 산책할만한 정원의 모습에 만족했다. 선선한 바람을 쐬며 데이빗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라? 감독님?"
몇 걸음 옮기다보니, 저 앞에 비치된 벤치에 달글리시 감독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데이빗은 발걸음을 빨리하여 그에게 다가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감독님."
"음? 아, 자넨가? 일찍 일어 났군 그래?"
누군가 자신을 부를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살짝 놀란듯 보이는 달글리시 감독이었다.
"감독님이야 말로요. 설마 밤을 새신 건 아니죠?"
"설마, 이젠 밤을 새고 싶어도 못 샌다네. 늙어서 그런지 아침에 잠이 없어져서 말이야."
그러면서 자신은 어제 일찍 잤다며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는 자네야 말로,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인가? 어제 다들 미친듯이 놀았던 터라 오늘 10시 전에는 얼굴 보기 힘들 줄 알았는데?"
"하하, 저도 좀 의외네요. 평소 버릇이랄까. 피곤하긴 한데 눈은 떠지더라구요."
그 말에 납득했다는듯 피식 웃는 달글리시 감독.
"그것도 그렇군. 하긴, 자네는 매일 멜우드에 가장 먼저 출근하는 친구였지. 그래도 오늘은 좀 더 쉬는 게 나았을텐데 말이야."
"뭐, 잠도 깼고...굳이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친구들 사이에서 더 자고 싶지도 않고 말이에요. 그리고 일찍 일어났으니 감독님과 이렇게 함께 산책하는 행운도 얻지 않았습니까?"
"이 친구, 아부는 관두게. 아부해 봐야 나오는 거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기분은 좋은지 껄껄 웃는 달글리시 감독이다.
"속은 좀 괜찮나?"
"죽겠죠. 그래도 바람을 쐬니까 좀 나은 것 같기도 하네요."
들고 온 물을 한모금 마시며 알코올 기운을 내보내려는 듯 숨을 길게 토한다.
"한 시즌동안 고생했으니 하루 정도 이렇게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나?"
"그렇네요. 확실히요."
평상시라면 숙취가 기분 좋을리 없었지만 지금은 이 기분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우승을 했다는 실감이랄까, 어제 미친 듯이 놀았다는 사실이 그런 실감을 강하게 들게 해주는 느낌도 있었다.
"나도 현역 때 우승을 해봤지. 뭐 여러 번 해보긴 했지만 그때마다 새로웠어. 매번 동료들과 밤새도록 들이 부었지. 아직도 그때의 그 맛을 잊지 못해. 아마 자네도 나이가 들면 지금 이 노인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있을거야."
아련하게 옛 추억을 떠올리는 달글리시 감독이다. 데이빗은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제도 충분히 즐거워 하시던데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맛볼 겁니다."
"그래. 그게 중요한 거지. 어떤가? 데뷔하고 나서 처음으로 우승을 맛 본 느낌은?"
달글리시 감독의 질문에 데이빗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제가 말 재주가 있었다면, 아마 노래로 만들고 싶었을 거에요. 시로 쓰고 싶었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앞으로 매 년, 모든 우승컵을 들고 싶어요. 그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네요."
"사람들이 그것에 열광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말을 이어 나간다.
"왜 우승이 멋진 일인지, 최고가 되는 것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인지는 경험해 보지 못하면 제대로 알 수 없네. 경험해 보지 못하면 정말 그 감동을 알 수 없기에 계속해서 갈망하는 거야. 스티비나 캐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한 번 맛을 보면 헤어나올 수 없는 마력을 느끼게 되지. 자네가 지금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나는 앞으로도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과 함께 더 많은 감동을 함께 맛보길 원하네. 우리가 함께 하는 일이 모두에게 기쁨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데이빗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 주었다.
"내년에도, 그리고 내 후년에도, 우리는 이런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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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도 적기가 겁나네요
-예비군 얘기를 꺼내도 여군이라고 하니...
-으어어
-몰라 뭐야 이분들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