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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멕세스는 조금씩 초조해 지고 있던 차였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1999년 AJ 오세르에서 프로 데뷔를 하였는데 안정감 있는 플레이를 선보이며 자리를 잡았다. 몇 년 동안 큰 기복 없는 활약을 펼쳤고 2004년에 빅 클럽 중 하나인 AS 로마로 이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에서의 생활 역시 순탄했다.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몇 번의 시기를 제외하면 언제나 주전은 자신의 몫이었다. 비록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인테르의 리그 5연패에 가려 준우승만 4차례 거두며 자신의 커리어에 우승이란 장식을 추가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로마에서 괜찮은 시간을 보냈고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국가대표에서도 점점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AS 로마보다 더 높은 수준의 클럽, AC 밀란으로 이번 시즌 이적하게 되었다. 로마는 분명 좋은 클럽이었지만 그는 슬슬 우승이라는 타이틀에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마보다는 밀란이 더 나은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비록 2003년 이후 우승은 커녕 준우승도 없는 밀란이었지만 2007년에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을 정도로 저력이 있는 팀이었다. 이미 노장의 반열에 올라선 알레산드로 네스타의 대체자로 자신을 점 찍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밀란에 합류하면서 자신이 있었다. 같은 세리에 A의 무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자신이 예전에 상대하던 팀이 이제 자신의 소속팀이 되었고 원 소속팀을 상대로 경기를 펼쳐야 한다는 것만 다를 뿐, 크게 적응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동료들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해결될 일이라 여겼다. 자신이 인격적으로 크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다면 그들이 자신을 거부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합류한 뒤, 조금씩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현실을 느껴야 했다. 자신보다 두 살 어린 브라질 국적의 수비수 티아구 실바의 자리는 확고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충분히 괜찮은 녀석이었다. 스스로 실바란 녀석에 비해 크게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요는 인정할 만한 선수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것은 밀란에 합류하면서 자신과 센터백 조합을 맞출 선수가 바로 티아구 실바라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리는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던 알레산드로 네스타, 그의 자리였을 것이다.
"큭!"
그 기대는 배신당했다. 밀란에서는 자신을 주전 선수로 취급하지 않았다. 은퇴할 때가 다 된, 나이가 35세가 넘은 노땅에게 자리를 유지시켜주고, 자신에게 준 역할은 백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네스타는 전 경기 출장이 어려웠고 그때가 바로 자신이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시간이었다. 프로에 데뷔한 이후 언제나 주전의 자리에 익숙했던 멕세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제기랄!"
더욱 화가나는 것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일 모레 은퇴해야할 노인네의 실력이 자신보다 낫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도 눈이 있었고 머리가 있었다.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 챔피언스 리그 16강의 2차전,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서게 된 그는 굳은 각오로 임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리라, 그래서 반드시 주전 자리를 차지하고 말 거라 생각했다.
"빌어먹을!"
그 생각은, 경기가 시작된 지 5분만에 산산히 박살이 나 버렸다. 자신의 상대가 데이빗 장이라는, 최근 각광받는 선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심 자신이 있었다. 기록이야 어마어마했다.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제외하면 그와 기록으로 비벼 볼만한 선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난 경기에서, 비록 벤치에서 지켜본 것이지만 자신의 팀 수비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근 몸 상태도 괜찮았기에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경기를 직접 치르게 된 이제서야 그 생각이 오만이었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전반 5분, 아마 상대 공격수의 첫 번째 터치였을 것이다. 딱히 한 눈을 팔던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을 등지고 있던 그가, 측면에서 날아온 크로스를 터치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크로스의 코스가 페널티 박스 바깥쪽으로 향한 터라 사전에 잘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은 크게 실수한 것이 없었다. 마크를 놓치지 않았고 그를 끈질기게 쫓아갔으니 말이다.
하지만 원 트랩, 단 한 번의 트래핑에 자신은 혼란을 느껴야했다. 도대체 저 빌어먹을 놈의 몸뚱아리는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분명 상대의 동작은 다른 방향을 의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트래핑이 이루어 진 방향은 달랐다. 자신은 중심을 잃고 그에게 반 발자국의 공간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고, 단지 그것 하나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것을 받아 들여야 했다.
오른쪽 사이드에서 올라온 크로스를 골대를 등진 상태에서 오른 발로 터치하려는 듯 했다. 당연한 일이다. 왼발로 터치한다면 아웃사이드로 터치해야 하는데 이는 상당히 불안한 동작이다. 정상적인 선수라면 당연히 오른발 안쪽으로 안전하게 공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데이빗 장이라는 녀석은 그런 동작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공이 가까이 오자 순식간에 왼발을 들어 올려 공을 받아 냈다. 이 동작에 자신은 반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왼발로 공을 슬쩍 옆으로 민 상대가 그대로 터닝 슛을 시도하는 모습을 지켜 보아야 했다. 슈팅을 예상할 수 없었던 골키퍼 역시 자신처럼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전반 5분만에 선제골을 허용해야 했고 그는 자신의 계획이 5분만에 박살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젠장!"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상대 공격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공을 몰고 달려 왔다. 정말 눈 돌아가게 빠른 발이라며 투덜댈 시간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헛다리를 집는 상대의 동작에 말려들 뻔했다.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지 못했다면 선제골을 내준 뒤 3분만에 추가 실점을 허용할 만한 위기로 연결되었으리라.
"뭐야?!!"
말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정말 얄미울 정도로 민첩성을 뽐내 듯, 한 차례 더 이루어지는 헛다리 집기, 그리고 자신의 몸이 균형을 잃은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공을 치고 나간다. 절대 실점을 허용할 수 없다며 이를 악 물고 쫓아가 보지만 기본적인 스피드 차이가 너무 심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을 손 쉽게 농락하는 상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열등감이 그로 하여금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을 날리게 만들었다.
삐익-!
심판의 휘슬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두 명의 선수가 쓰러진 곳을 향해 재빨리 발걸음을 옮긴다. 거칠게 숨을 몰아 쉬고 있는 필리프 멕세스와 자신의 발을 부여 잡은 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빗 장이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관중석에서는 어마어마한 야유와 욕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심판이 어떠한 조치를 취하기 전에 스티븐 제라드가 먼저 달려와 분노에 찬 표정으로 먼저 일어 선 필리프 멕세스를 거칠게 밀쳤다. AC 밀란의 선수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누가 잘못을 했건 경기 중에 동료를 보호해야 했다. 밀란의 주장 암브로시니가 다가와 제라드를 밀어 냈고 뒤이어 달려온 리버풀 선수들, 그리고 AC 밀란의 선수들과 한데 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삑 삑 삑 삐익!!!!!
거의 난투극 수준으로 치달을 듯한 분위기였기에 주심은 휘슬을 강하게 불며 선수들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 갔다. 이리저리 치이긴 했지만 간신히 선수들을 떼어 놓는 데 성공했다.
"괜찮아?"
머리에 열이 치밀어 올라 일단 동료들과 함께 상대 선수들과 몸싸움을 벌이긴 했지만 열이 좀 빠지고 나서야 데이빗이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르코 로이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 왔다. 다행히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켜 앉은 상태에서 발을 매만지고 있는 모습이 큰 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괜찮아. 걷어 차이긴 했는데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아."
살짝 인상을 찌푸린 상태긴 했지만 크게 통증을 느끼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마르코는 천만 다행이라며 허리를 굽히며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진짜 다행이네. 저 망할 자식 같으니. 완전히 눈이 돌아 간 거 같더라. 너한테 무슨 날아 차기를 하는 줄 알았어."
왼쪽 측면에서 데이빗의 돌파에 호응하기 위해 중앙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터라 상대의 미친 태클을 똑똑히 보았던 마르코 로이스였다. 그래서 데이빗이 큰 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일단 나가서 간단히 치료를 받고 오는 게 어때? 무리하지 말라고."
"괜찮을 거 같은데."
완전히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빗이 발을 이리 저리 돌려 보며 문제 없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미 피치 위로 올라온 의료진은 막무가내였다. 일단 그를 끌고 나가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괜찮다며 항변하던 데이빗은 포기하고 순순히 그라운드 밖으로 나갔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리는 제임스의 모습은 살벌했다. 좀 전까지 그와 희희낙락 떠들며 경기를 즐기던 에리카의 친구들이 움찔할 만큼 말이다.
"진정해 제임스."
티티 역시 화가 치밀어 오르는 지 온화한 인상은 온데간데 없었으나 친구에게 흥분을 가라 앉히라고 말했다. 확실히 예전과 달라진 제임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화를 털어내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멕세스에 대한 퇴장 콜에 동참했다.
"괜찮아요.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요."
얼음같이 굳어버린 에리카를 향해 티티가 위로의 목소리를 낸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손으로 가린 채 굳어 있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다행히 데이빗이 부축을 받지 않고 일어나 경기장 밖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조그만 탄식을 내뱉는다.
"괜찮...겠지요?"
한 방울 눈물을 흘리며 잠긴 목소리로 울음을 참으며 묻는 모습, 티티는 스스로 속상한 마음을 달래며 그녀를 달랬다.
"그럼요. 저렇게 멀쩡히 걷고 있잖아요. 아마 금방이라도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때 야유로 가득찼던 안필드에 함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악의적인 백태클을 가한 필리프 멕세스에게 레드 카드를 들어 보이는 주심의 모습과 그에 항의하는 AC 밀란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후우."
제라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페널티 킥을 준비했다. 평소보다 조금 흥분된 상태였기에 이를 가라 앉힐 필요성이 있었다. 방금 멕세스란 녀석을 밀치고, 암브로시니와 멱살 잡이를 하는 바람에 옐로우 카드를 받았다는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자신은 카드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달려나가 자신의 동료에게 위해를 가한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걱정되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동료가 경기장 밖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그 녀석이 이탈하게 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될거야.'
다행히 스스로 걷는 모습에 큰 위화감은 없어 보였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스레 제라드의 시선이 사이드 라인 쪽을 향했다. 그의 상태를 멀리서라도 확인하고 싶었고 그는 곧 눈을 크게 뜨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어느새 점검을 마친 데이빗이 사이드 라인 밖에서 입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제라드가 킥을 준비했다.
'빨리 넣어야 저 녀석이 들어 올 수 있을테니 말이야.'
실패따위는 머리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코스 따위 읽을 테면 읽으라지 라고 중얼거리며 강하게 공을 때려내는 제라드. 방향을 제대로 잡은 골키퍼였으나 워낙 공의 위력이 강했기에 미치지 못했고 그대로 골망을 흔들었다. 제라드는 세레모니를 생략한 채 손가락을 들어 데이빗을 가리키며 달려갔다.
============================ 작품 후기 ============================
-퇴장당하는게 차라리 속 편할거야.
-10분만 농락당하면 되잖..
-??!
-농락당하지 않는 선택지는 없나여?
-니가 주인공이 아니잖니?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