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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말을 잘 들으라고. 일단 내일 경기 끝나고 만나자고 해. 뭐? 경기장에서? 제정신이야? 땀내 풀풀 풍기면서 무슨 고백을 하겠다는 거야?'
데이빗은 경기를 마치고 쏜살같이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중대한 거사가 있는 날이다. 경기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몇배는 중요한 일이 말이다. 경기 중에 집중이 안되어 처음으로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잖아.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인걸!'
애써 스스로 납득시키며 기숙사로 돌아온 데이빗은 빠르게 탈의를 마치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머리를 감고 구석구석 꼼꼼히 씻었다. 아침에 면도를 했기에 면도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속옷을 갈아 입었다.
위이잉-
거울 앞에서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왜 욕실에서 거울을 보면 평소보다 괜찮아 보일까.]
신기한 미스테리라고 데이빗은 생각했다. 얼굴을 돌려보며 여러 각도에서 보아도 그럴듯해 보였다. 이만하면 쓸만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얼마전 책에서 본 문구가 생각났다.
-남자들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이만하면 괜찮은데?' 라고 생각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부족한 점을 찾고는 한다.
그럴싸한 문구라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데이빗의 시선이 어제 파체코의 집에서 돌아오며 사온 물건을 향했다.
[사기는 샀는데 이런걸 발라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헤어 스타일링을 도와주는 물품, 왁스였다. 이럴줄 알았으면 누군가에게 좀 사용법을 물어볼 것을 그랬다. 한숨을 쉬며 뚜껑을 열었다. 데이빗은 검지와 중지로 적당히 왁스를 퍼서 손에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머리에 발랐다.
[...제기랄.]
애초에 처음 발라보는 사람이 괜찮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리 만무했다. 데이빗은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머리에 욕설을 내뱉었다.
[이꼴을 에리카가 본다면 자살해버릴거야.]
한숨을 쉬며 샤워기를 다시 트는 데이빗, 안타깝게도 오늘 왁스를 써먹지는 못할듯 싶었다.
머리를 한번 더 감고 다시 드라이기로 말린 데이빗은 왁스를 멀리 차버리고는 평소처럼 손으로 정리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간단히 로션을 바르고 옷장을 열었다.
-일단 네가 가진 옷좀 보자. 얼마나 있...야...이게 뭐야. 트레이닝 웨어를 빼면 남는게 없잖아? 어휴 이 답답한 자식아.'
파체코의 집에서 함께 나온 스피어링이 자신의 방에 쳐들어와 옷을 검사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옷장을 열고는 경악을 금지 못했고 말이다. 그나마 괜찮은 평을 받은 셔츠와 청바지를 꺼냈다. 깨끗이 씻고 깔끔한 옷을 차려 입으니 그럭저럭 볼만 하다고 느꼈다. 정장을 입으면 어떨까-하고 물었더니 스피어링은 '오버하지마. 오히려 나이들어 보여서 마이너스일걸' 이라며 가볍게 일축했다.
[좋아. 이만하면 됐어.]
애초에 평소 에리카를 만날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데이빗은 자연스러운게 좋은거라며 스스로 위안삼았다. 신발장에서 어젯밤에 깨끗하게 닦아 놓은 구두를 꺼내 신고 문을 열고 나섰다.
-아 물론 경기 중에 골을 넣고 프로포즈하는 것도 꽤 멋있긴 할거야. 근데 이렇게 썰렁한 리저브 경기장에서 하기엔 좀 그렇지 않냐? 그리고 생각해봐. 골 넣고 존나 달려가서 웃통이라도 깔거야? 언더셔츠에 메세지 적어놓고? 그러지말고 내 얘기를 들어보라고. 내가 아는 분위기 아주 괜찮은 바가 있어. 그곳 홀 중앙에 노래를 부를 수 있게 설치가 되어 있거든? 너 괜찮은 노래 아는거 없어? 렛잇비? 너 지금 제정신이야?
한소리 듣고 나서 다른 노래는 없냐고 물어보는 스피어링에게 You'll Never walk alone 이라고 답했을때 그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굉장히 기분 나쁜 시선이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좀 그랬기에 참고 넘어갔다.
-어휴 한심한 자식, 누가 리버풀 선수 아니랄까봐. 그나마 렛잇비 보다는 가사가 괜찮으니 그걸로 하자고. 뭐? 자신없다고? 그럼 프로포즈가 쉬울줄 알았어?
그러면서 자신의 노래를 평가해주겠다며 불러보라고 시켰더랬다. 한참을 빼다가 어쩔수 없이 불렀는데 스피어링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괜찮네. 너무 멋있게 부르려고 할 필요없어. 잔잔하게, 진심을 담아 부르라고. 그럼 충분할거야.
덕분에 어제 자기전까지 계속 노래를 불러보며 연습했었다. 평소 렛잇비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기에 익숙했지만 고백을 하며 부를 노래라고 생각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스피어링이 알려준 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가볍게 흥얼거리며 다시 한번 점검해보았다.
[여긴가...?]
스피어링이 알려준 바가 있는 건물 앞에 도착한 데이빗, 고풍스러운 간판이 그럴싸해 보였다.
[지하인가 보네.]
계단을 내려가는 데이빗, 그런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꼈다.
[뭐가 이렇게 어두워?]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데이빗, 계단은 곧 끝났고 문이 보였다. 데이빗은 손잡이를 잡고 밀어보았다.
철컥-
[어?]
철컥철컥-
문은 잠겨 있었다. 당황한 데이빗은 계속 문을 돌려 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장소를 추천했던 스피어링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는 데이빗, 그때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복도였기에 보이지 않았다가 핸드폰 불빛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문에 붙여진 종이쪽지였고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부수리중
[......스피어리이이이잉!!!]
분노에 찬 데이빗의 고함이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이 빌어먹을 자식의 말을 듣는게 아니었어!]
이를 갈며 소리쳐보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스피어링을 찾아 족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프로포즈 계획에 중대한 변수가 생긴 것을 해결해야 했다. 데이빗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침착하자고. 일단 스피어링의 엿같은 의견은 쓸모가 없어졌어. 이 빌어먹을 문짝을 때려부수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딱히 아는 곳이 어디가 있더라.'
애초에 많은 장소를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초조하다보니 생각이 더 꼬이는 데이빗이었다.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고 갑작스러운 벨소리에 데이빗은 깜짝 놀랐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니 에리카였다. 데이빗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여보세요?]
-아 데이빗? 나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네가 알려준 장소가 어디였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전화했어.
[아, 안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인데, 확인해보니까 지금 그 바가 문을 닫았더라고. 그래서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할 것 같아.
-정말? 그럼 어디서 만날까?
'그래, 그게 중요한 건데 말이야.'
[일단 잠시만 기다려줄래? 내가 금방 다시 연락할게.]
플랜 B를 찾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했다. 데이빗은 일단 이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벗어나는게 좋겠다고 느꼈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핸드폰 불빛이 꺼진 복도는 좀 전보다도 더 어둡게 느껴졌다. 빠르게 지상으로 올라온 데이빗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딱히 아는 거리도 아니고...가본 곳도 없는데...]
조급한 마음을 가라 앉힐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근처 길가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본 데이빗은 앉아서 차분히 생각하기로 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4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제법 번화한 거리였지만 아직 피크 시간이 아니어서인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는 않고 있었다. 햇살은 적당히 따뜻했고 잉글랜드 날씨 답지 않은 쾌청한 하늘이 보기 좋았다. 이런 날에는 에리카와 함께 공원이라도 가서 산책을 즐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것을 찾았을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어느새 자신의 마음 안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데이빗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조금전까지 조급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행복한 마음이 자리잡았다. 어디서 만나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 무엇을 하는 것이 대수일까. 그녀와 함께 한다면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일 것인데 말이다. 어디에 가야하지- 와 어디에 갈까- 의 차이랄까. 미묘한 차이였지만 말이다. 데이빗은 마음을 정했고 핸드폰을 들어 전화하는 표정은 밝기만 했다.
데이빗이 에리카와 만난 곳은 인근 공원이었다. 공원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즐기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해가 지며 노을이 짙게 깔렸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산책하기에 아주 좋았다.
[시원하다. 오늘처럼 좋은 날씨는 정말 흔치 않은 것 같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좀 더 느끼려는 듯 크게 팔을 펴는 에리카였다. 그 말대로 오늘 날씨는 정말 좋았기에 데이빗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까 원래 만나기로 했던 바가 공사를 하는 바람에 좀 아쉬웠는데 이런 날은 밖에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더라고.]
[현명한 선택입니다. 만점을 주겠어요.]
기특하다는 듯 데이빗의 머리를 살짝 토닥이는 에리카, 애 취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있잖아 데이빗. 어제 리버풀 홈페이지에 들어갔었는데 거기에 너에 관한 글이 올라왔었다? 혹시 확인해 봤어?]
[아니. 나 컴퓨터가 없는걸. 그런데 정말이야?]
[정말이야. 나도 깜짝 놀랐어. 글쓴이가 너를 칭찬하더라고. 기대할만한 선수가 나온것 같다고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었어.]
그러고는 신기하지?-라고 덧붙였다.
[아직 리저브에서 4경기밖에 안치렀는데 벌써 나를 아는 사람이 생겼다니. 참 신기하다.]
[난 내 얘기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좋아지더라니깐. 친한 사람이 그렇게 넷 상에서 거론되고 칭찬받는걸 보니까 정말 신기한 기분이 들더라구.]
그러면서 생각나는대로 글의 상세내용과 사람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이야기해주는데 정말 신이 난 모습이라 데이빗은 오히려 더 즐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데이빗의 반응에 에리카는 더 열성적으로 설명했고 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한적한 공터로 와버렸다. 새로이 무엇인가를 준비중인 장소인지 정지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주변에 몇종류의 자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데이트를 하는 도중에 올만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데이빗은 이 볼품없는 장소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이곳은 자신의 어린 시절, 혼자 공을 차고 놀던 자신만의 아지트와 아주 닮아 있었다.
[에리카.]
[응?]
데이빗은 오늘 에리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자신의 과거를 듣고 에리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좀 더 가까운 사이가, 특별한 사이가 된다면 언젠가는 이야기 해야할 것이다. 데이빗은 오늘이 그날이라고 느꼈다.
[한 소년이 있었어. 그 아이가 언제부터 리버풀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그 소년에게는 부모가 없었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장소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뿐이야.]
자신의 치부와도 같은 이야기였다. 고아였다는 사실, 검은 머리칼, 남들과 다른 피부색, 모든 것이 그에게는 컴플렉스였고 상처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데이빗의 어조는 담담했다. 슬픔이 느껴지지도 않았고 과장스럽지도 않았다. 담담히, 그저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하듯 그렇게 이야기했다. 오히려 이야기를 듣는 에리카의 눈시울이 조금은 붉어지고 있었다.
[아마 티티와 제임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야. 그 둘에게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야. 그리고 그 친구들보다 나를 더욱 바꿔준 사람을 만났어.]
에리카와 눈을 마주치는 데이빗, 눈물이 살짝 맻힌 에리카의 모습에 살짝 격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하루하루가 정말 행복하다고 느꼈어. 언제나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기대되는 하루였어.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생겼어. 멋진 영화가 새로 개봉한다고 했을때 함께 보고 싶은 사람, 괜찮은 레스토랑을 알게 되었을 때 함께 가고 싶은 사람, 그리고 기쁠때나 슬플때나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을 알게 되었어.]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짓고 있는 에리카를 보며 데이빗은 활짝 웃었다. 아마 태어나서 이렇게 환하게 웃어본적이 있나 싶을정도로 밝은 표정이었다.
[그게 바로 너야 에리카. 에리카, 내 연인이 되어줘.]
데이빗의 고백이 끝나자 에리카는 데이빗의 품에 달려들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그녀는 자신의 등을 감싸오는 데이빗의 손을 느끼며 마주 포옹했다.
[물론이야. 용기를 내줘서 고마워.]
한동안 둘은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안고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에리카가 데이빗의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며 울상을 지었다.
[나 지금 울어서 얼굴 완전 엉망됐을것 같아. 어떻해!]
데이빗은 그녀의 모습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눈이 살짝 빨갛게 부은 모습이 평소와 다르기는 했지만 이건 이것대로 귀엽다고 느꼈다. 그런 데이빗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데이빗의 가슴을 치며 떨어지려는 에리카, 하지만 데이빗은 그런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살짝 앙탈을 부리며 벗어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가볍게 마주치는 둘의 입술, 데이빗은 그녀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향기에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을 느꼈다. 풋풋하고 조금은 어설픈 키스가 끝나고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서 있는 둘, 데이빗은 용기를 내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사랑해 에리카.]
데이빗의 짧은 말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는 에리카, 이내 둘의 입술이 다시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