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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빨래는 했고...내일 돌려주면 되겠지...?]
모포를 팡팡 털어 건조대에 올리는 데이빗, 아까 카페에서 데이빗이 덮고 있던 그 모포였다. 카페에서 깜박 잠들어 버리고 눈을 뜨고나니 이미 시간이 꽤나 흐른 뒤였다. 일어난 뒤 웬 모포가 덮어져 있길래 의아해 했었는데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니 앞 타임에 일하는 사람의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맡겨놓고 올까 생각했었는데 깨끗이 빨아서 돌려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들고 오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계속 신세를 지게 되네.]
다른 이로부터 호의를 받아 본 기억이 거의 없는 데이빗이었기에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의 두근거림과 함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큰 건 아니더라도 답례를 준비해야 하나.]
모포만 주고 입을 닦기에는 뭔가 개운치 못한 느낌이 든다. 큰 호의를 입은 건 아니더라도 받은 만큼 무언가 해주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받았기에 돌려준다는 계산적인 마인드가 아니더라도 뭐라도 해주고 싶은 기분이랄까, 데이빗에게는 이 또한 생소한 느낌이었다.
[근데...뭘 해주면 좋지...?]
누군가에게 뭘 해준적이 있었나 싶다. 그러고보니 티티나 제임스로부터도 받기만 해왔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에는 그동안 데이빗에게는 가진 것이 너무 적었다.
[갑자기 뭔가 나 인생 헛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데...]
피식 웃으며 자조해본다. 그동안 자신의 인생은 참 불운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행운을 얻게 되어 축구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또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일단 친구들에게 뭐라도 해주자.]
만난 자리에서 조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데이빗은 핸드폰을 꺼내 티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오랜만이야 데이빗! 이자식 이거 폼이 좀 나는데?]
대충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갔는데 무슨 폼이 난다는 건지, 데이빗은 여전한 제임스의 호들갑에 밝게 웃으며 제임스가 내민 주먹을 살짝 마주쳐 주었다.
[표정도 밝아진 것 같고, 그쪽 생활이 확실히 좋긴 좋나보네.]
'...좋다고 말하긴 좀 그렇다만...'
갑자기 아까 자신을 열심히 굴리며 즐거워(?)하던 미소악마의 모습이 떠오르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제임스는 여전히 껄껄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즐거워했지만 말이다.
[며칠 안지난 것 같은데 굉장히 오래 못본 기분이야 데이빗. 그쪽 생활은 어때? 할만해?]
[응, 훈련이 좀 힘들긴 한데 못버틸 정도는 아니야. 애초에 이제 시작인데 뭐.]
벌써 죽는 소리를 할 수는 없지-라고 중얼거리는 데이빗의 모습에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는 티티였다.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거야.]
티티의 덕담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근데 데이빗, 거기 손에 들고 온건 뭐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데이빗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기웃거리는 제임스, 데이빗은 웃으며 친구들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너희들에게 주는 선물이야. 매번 너희들에게 받기만 한 것 같아서 나도 뭔가 주고 싶었어.]
말을 하고 조금 쑥스러웠는지 코를 긁는 데이빗, 제임스와 티티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티티는 살짝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데이빗, 우리가 딱히 너에게 해준건 없어. 만약 있다고 해도 뭔가 보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니야.]
[알고 있어. 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그냥 받아줬으면 좋겠어.]
난감한 표정을 짓는 티티, 하지만 데이빗의 말에 어쩔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제임스는 선물이라는 말에 이미 신나서 쇼핑백을 받아들고 내용물 확인에 들어갔고 말이다.
[자, 우리 리버풀의 예비스타 데이빗이 가져온 선물은 과연 뭘까나?]
희희낙락하며 포장지를 뜯는 제임스, 그의 선물은 바로
[로얄 살루트? 38년산?]
[제임스 선물은 고르기 참 쉬웠어. 시계를 살까 하다가 제임스 성격에 분명 잃어버리겠다 싶어서 그냥 술이 낫겠다 싶더라고. 시간이 없어서 고민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고.]
[크하하, 고마워 데이빗! 이거 예전부터 한번은 마셔보고 싶었는데! 역시 날 잘 알잖아? 시간 따위 옆에 있는 티티에게 물어보면 되는 걸. 귀찮게 뭐하러 그런걸 차고 다녀?]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는 제임스, 옆에서 데이빗이 '애초에 시계가 있어도 시간확인 잘 안할것 같고 말이야' 라고 중얼거리는 것은 들리지 않은 듯 했다.
[그나저나 티티의 선물은 내거보다 확실히 작은데? 뭘 산거야? 한번 뜯어보라고 티티!]
제임스의 재촉에 자신의 선물을 뜯기 시작하는 티티, 그의 선물은 시계였다.
[카시오(Casio)거네. G-Shock 프로그맨(Frogman)이잖아 이거. 정말 좋아하는 모델인데, 고맙다 데이빗. 잘 쓸게.]
[뭘, 사실 아날로그 형으로 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일하는데 차고 하기에는 이쪽 모델이 낫겠다 싶어서.]
[근데 이거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무리한 것 아냐?]
[괜찮아. 그리고 생각보다는 그렇게 비싸진 않더라고.]
'물론 예전 같았다면 엄두도 못냈겠지만.'
친구들이 자신의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자 데이빗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보답을 바라지 않고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하는 구나 싶었다.
[선물도 받았으니 저녁은 우리가 살게. 제임스, 괜찮지?]
[물론이야 티티, 뭐하면 방금 받은 이녀석을 개봉해도 좋다고!]
원래는 저녁까지 살 생각으로 나왔으나 친구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이 너무 많이 내는 것도 친구 사이에서 썩 좋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배고프다. 빨리 먹으러 가자. 먹으면서 너희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이봐 데이빗, 네 고민은 아주 간단한 문제야. 너도 알다시피 이 제임스님이 그런쪽으로는 프로 아니겠어? 일단 만나라고. 만나서 술을 한잔 해. 그리고 호텔로 직행하는거야. 한번 찐하게 눌러주면 게임 끝. 오케이?]
[......]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조금은 머뭇거리며 꺼낸 데이빗의 이야기에 둘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경청했다. 그리고 데이빗의 말이 끝나자 제임스가 끝내주는 방법이랍시고 이야기 한 것이 저런 말이었고. 애초에 제임스에게서는 이런 대답이 나올거라고 예상했었다. 아니, 자신의 질문은 호의에 대한 답례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인데 도대체 왜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건지 데이빗은 머리가 아파왔다. 티티는 제임스에게 잠시 좀 진정하고 있어봐 라고 이야기 한뒤 데이빗을 바라 보았다.
[얘기는 잘 들었어 데이빗, 나는 일단 네게 다시 물어보고 싶어. 너는 그 여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
티티의 질문에 잠시 고개를 갸웃한 데이빗,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이잖아. 당연히 호감이 있지. 그러니까 무언가 답례를 하고 싶은 거고.]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네 얘기를 들어봐도 단순히 종업원으로서의 친절함은 넘어선 것 같아. 사람이 정말 친절한 사람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너는 그 여성과 좀 더 깊은 교제를 하고 싶은거야?]
이번 티티의 질문은 데이빗을 침묵에 빠뜨렸다. 옆에서 제임스가 뭐가 그리 복잡하냐는 둥 일단 자기 말대로 해보라는 둥 궁시렁 거렸지만 데이빗은 침묵을 지켰다. 티티도 마찬가지였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제임스가 궁시렁거렸으나 둘 다 신경쓰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 사실 그런 감정이 아예 없다면 이렇게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을 거야. 어쩌면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 이야기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데이빗의 모습에 옆에서 열심히 떠벌리던 제임스도 조용해졌다. 티티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게 맞아 데이빗. 하지만 내 생각을 물어본다면 일단 별다른 생각을 안하고 그 여성과 인연을 이어 갔으면 좋겠어.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너는 그동안 우리들하고만 어울렸어. 그래서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일지도 몰라. 그녀와 만나봐 데이빗.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데 두려워할 것 없어.]
[너도 느낄거야. 지금 네 인생은 변하고 있어. 하지만 너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불행한 일이 될거야.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인연을 맺는데 주저하지마.]
티티의 말에 데이빗은 살짝 감동을 느꼈다. 역시 티티는 현명하다고 다시 한번 느꼈다.
[쳇, 소심하게 뭘 그렇게 복잡하게 구는거야? 내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기막힌 선물도 해줬잖아. 지금이 바로 그걸 쓸 때라고!]
[이봐 제임스, 네 방식대로 했다가는 너처럼 딱지 맞을게 뻔하잖아.]
[그리고 애초에 그런 걸 선물하는 이유가 뭐야?]
[그러니까 니들은 아직 애송이라는 거야! 남자는 한방이라고!]
[그 한방이라는게 무슨 복권수준이면 곤란하잖아 제임스.]
피식거리며 분위기가 가벼워진다. 이런게 제임스의 매력이라고 데이빗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야기로 듣기는 했지만 그 여자 생긴건 어때? 어떤 스타일이야? 이번 기회에 너의 여성 선호도를 알 수 있겠어.]
[선호도는 무슨. 아직 그런거 아니라니까.]
[어쨌든! 호감을 느꼈다는 건 생긴게 괜찮다는 거 아냐! 아무리 친절해도 니가 할머니 같은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진 않을거 아냐. 어서 이야기 해보라구~]
실실거리며 물어오는 제임스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데이빗이다. 옆에서 티티가 웃으며 동참해왔다.
[나도 궁금하긴해 데이빗. 어떤 여성이 데이빗의 마음을 들뜨게 했는지 말이야.]
[티티까지? 휴. 알았어. 일단...키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어. 보통정도라고 해야하나? 갈색 머리에 길이는 한...이정도?]
자신의 어깨어림에 손을 대며 '맞나?'하고 중얼거리는 데이빗, 그리고 계속 이야기하라는 제임스의 재촉에 말을 이었다.
[눈매가 살짝 처져있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둥그스름한 인상이라 순하고 착해보여. 굳이 이야기 하라면 섹시한 이미지라기보다는 귀엽다는 이미지야.]
뭔가 이야기를 하다보니 부끄러웠다. 바로 앞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이 말할때 마다 감탄사를 흘리는 두 남자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뭐 대충 그정도야.]
[몸매는 어때? 제일 중요한 걸 이야기 안하면 어떻해? 이왕이면 쓰리 사이즈를 읊어 보라구.]
[제기랄. 그걸 안물어보면 제임스가 아니겠지. 여자의 쓰리사이즈를 물어보는건 죄악이라고! 그리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애초에 난 내 쓰리 사이즈도 몰라!
[넌 여자가 아니잖아! 그리고 데이빗, 네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가 본데, 원래 한번 보면 견적이 바로 나오는 법이라고. 그리고 남자의 쓰리 사이즈 따위 알게 뭐야. 그런건 아무리 너라도 알고 싶지 않다고!]
[그래, 너 잘났다. 난 그런 신기한 재주가 없으니 이야기는 이제 그만 두겠어.]
치사하다며 더 이야기해보라는 제임스였지만 데이빗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티티는 그런 둘 사이를 정리하듯 끼어 들었다.
[네 말을 들어보니 정말 귀여운 여성일 것 같아. 잘해봐 데이빗.]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응원하는 티티의 모습에 멋적은 표정으로 뺨을 긁는 데이빗, 그리고 조그맣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친구들과 헤어져 기숙사로 돌아온 데이빗, 나갈때에 비해 한결 표정이 가벼워져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나는 그동안 너무 소극적으로 살아 온 것일까.'
자신이 미소를 보이는 대상은 방금 만나고 온 두 친구 뿐이었고,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심 혹은 거리를 두고 대했다. 불운했던 과거의 경험에서 우러난 방어 본능이랄까, 좋았던 인연이 거의 없었기에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심리적인 족쇄였다고 할 수 있었다. 데이빗의 마음을 단단히 잠그고 있던 자물쇠가 풀리려 하고 있었다.
거울 앞에 서서 웃어 보았다. 평소 조금 싸늘해 보인다, 냉막해 보인다는 평(그보다는 재수없어 보인다는 뒷담화를 더 듣긴 했다)이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밝아 보였다.
'내가 이렇게 웃었었구나.'
스스로가 어색할 만큼 낯설었다. 얼굴이 괜히 간질간질했다. 하지만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변하기로 한 만큼 익숙해지고 싶었다.
[앞으로는 웃을 일이 많아 질거야.]
그 말은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았다. 앞으로 변할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데이빗은 하루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