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대칸은 그저… 에이전트나 선수들과 협상하듯이 말했다.
“솔직히 레이첼 스카우트도 아시겠지만, 우리 구단에서는 그 조건을 맞춰드릴 수가 없는데…….”
“하… 그래서요? 저 가요?”
레이첼의 약간 흥분된 목소리에… 대칸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대답했고.
“그 정도 조건이면… 우리가 아무리 상향해 드려도… 어쩔 수가… 제가 어떻게 더 해드릴 수가 없는데…….”
미지근한 대칸의 대응은… 그녀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요? 나를 이런 식으로!! 그냥 보내겠다고요? 네?”
“아니… 보내는 게 아니라…….”
“아니라면?”
레이첼이 거의 대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물었고…….
“그 정도 조건을 저희는 맞춰드릴 수가 없으니…….”
“없으니?”
“간다고 하면… 막을 수가 없어서…….”
대칸은 답답하게 레이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대칸은 그녀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대칸의 미지근한 반응에 어이가 없는 레이첼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래! 감독님 의중 아주 잘 알겠습니다!”
“아… 그게…….”
꽝!
평소와는 다르게 멍청하게 대응하는 대칸을 두고서 레이첼은 회의실의 문을 박살 내듯이 닫고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간 곳은 단장실이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아담 단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이첼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단장님, 저 지금부터 내일까지 휴가 사용하겠습니다. 아인트호벤에서 제게 수석 스카우트를 제안했습니다. 아주 좋은 조건으로요! 그런데, 대칸 감독님께서 저를 잡으실 마음이 별로… 아니, 전혀 없으신 것 같네요. 조금 쉬면서 다른 팀으로 갈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
갑작스럽게 많은 정보를 내뱉은 탓에 아담이 벙찐 표정을 짓자, 레이첼이 다시 물었다.
“저 내일까지 휴가 사용해도 되는 거죠?”
아담은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일단은 휴가 쓰세요. 자세한 건 휴가 갔다 와서 대화하시죠.”
아담은 레이첼이 흥분을 가라앉히면 다시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일단은 휴가를 허락하였다.
“감사해요. 단장님, 그리고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인수인계할 후임자도 지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
자신의 할 말만 남기고 레이첼은 단장실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아담은 감독실로 바로 달려갔다.
“대칸 감독! 무슨 일이야?”
대칸도 머리가 아픈지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었다.
레이첼이 폭탄을 터트린 그날 밤.
아담 단장은 대칸 감독과 자신의 집에서 술을 한잔하기로 하였다.
“오늘 우리 집에서 한잔하면서… 편하게 레이첼 수석 스카우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두 사람이 이제는 챔피언십 팀의 감독과 단장의 위치가 되다 보니, 일반 술집에서 이야기를 하다가는… 기자들이 언제 그들의 이야기를 기사화할지 모르기 때문에… 술집보다는 집에서 이야기하기로 한 것이다.
아담과 함께 그의 집에 같이 가던 대칸은 깜박하고 있었던 바커 부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바커 부인께서는 우리가 집에서 술을 마셔도 괜찮다고 하시던가요?”
“아, 우리 와이프? 다행히 친구들하고 여행 중이야. 아주 한 달짜리 아시아 투어! 장기 여행이지…….”
다행히 바커 부인은 부재중이었다.
아담의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에 먹다 남은 음식과 쓰레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바커 부인이 봤다면 경악할 모습…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집을 비웠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집이 조금 더럽지?”
“아… 네… 뭐…….”
대칸은 떨떠름하게 대답했고, 아담은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TV 주변만 조금 깨끗했는데… 그 이유는 TV 앞에서 에드워드가 콘솔 게임을 하고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 아버지 벌써 오셨어요?”
에드워드는 아담을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인사를 하였고.
“에드워드? 아침부터 게임하더니, 아직도 하냐? 게임 적당히 하지? 지금 벌써 저녁이다.”
“네~ 네~ 네~”
그러고는 거실 쓰레기를 가리키며 잔소리를 더했다.
“청소 조금 하고 놀라니까?”
“네~ 네~ 네~ 알겠습니다~”
아담의 잔소리에도 에드워드는 ‘네’라고 성의 없이 대답하면서 계속 축구 게임을 하였다. 그러자, 아담은 익숙한 상황인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하… 누가 저 녀석을 잉글랜드 축구의 미래라고 했는지…….”
대칸도 알고 있었다.
“뭐, 솔직히 에드워드야… 축구 말고는 그냥 게임 폐인일 뿐이죠. 아주 지독한 게임 폐인!”
휴가 기간은 저번 시즌 체력 소모가 심하다 보니, 회복을 위해서 많은 휴식을 무조건 취해야 한다는 팀 닥터의 강력한 조언이 있었다. 그래서 간단한 스트레칭 외에는 축구를 하지 못하자, 하루 종일 집에서 축구 게임 하면서 보내는 에드워드였다.
아담과 대칸이 부엌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사람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아버지 오셨어요? 형님, 오늘 아버지랑 한잔하신다면서요?”
부엌에서 자신이 먹을 저녁을 요리하고 있던, 데이비드가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그래, 데이비드 너도 같이 한잔할래?”
대칸의 권유에 아담도 좋다는 의사를 보였고, 데이비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당연하죠. 저만 빼고 먹는다면 서운했을 거예요.”
그렇게 데이비드까지 술자리에 끼어든다.
데이비드가 저녁으로 요리하고 있던 것은 김치찌개! 그 음식은 바로 술안주로 변해버렸다.
“자, 김치찌개 나옵니다.”
“와… 영국에서 김치찌개라니… 정말… 이상하네.”
대칸은 어이가 없었지만, 반갑게 데이비드가 끓인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먹었다.
“캬… 그래도 맛있네. 잘했어?”
대칸의 칭찬에 데이비드는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소주?”
아담은 냉장고에서 소주를 들고 왔는데, 너무나 익숙한 듯이 말했다.
“김치찌개에는 소주지!”
“…그런데 아담 단장님, 괜찮으세요? 드실 수 있으세요?”
대칸의 걱정에 아담은 웃으며 말했다.
“나의 전 와이프가 한국 사람이잖아. 한국식 술과 음식은 익숙해.”
“아…….”
평소에 아담이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전 와이프… 데이비드의 어머니 덕분에 한국 문화에 익숙한 아담이었다.
하지만, 집 안의 누군가는 익숙하지 못했다.
“아나! 형!! 또 그… 이상한 김치로 뭐 이상한 요리 만들었지!!”
거실에서 김치 냄새를 맡은 에드워드가 크게 투덜거렸지만,
“네~ 네~ 네~”
두 사람은 형제였다. 에드워드가 아담의 말을 무시했듯이, 데이비드도 ‘네’라고 말을 하면서 그의 항의를 완벽하게 무시하였다. 서로서로 무시하면서 사는 바커 삼부자였다.
“자, 다들 건배하시죠.”
세 사람은 소주를 ‘짠’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고서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일단 술을 마셨다. 대칸이 술을 조금 먹어야 이야기를 제대로 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이 조금 들어가자, 대칸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대칸은 레이첼과 자신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요즘 묘했던 분위기를 슬슬 풀어놓았다. 술기운이 더해지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감정까지 조금씩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 이 멍청이!”
“형님, 정말… 어이가 없네요.”
대칸이 자신과 레이첼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말하자, 아담과 데이비드는 기가 찰 지경이었다.
“뭐야? 쌀이 익어서 밥이 된 지경인데…….”
거기에, 챔피언십 승격 파티 때 ‘키스를 했던 것 같다.’라는 말까지 하자!
“이거 진짜 뭐야? 그런데? 왜? 그러고 있는 거야?”
“승격 축하 파티 때! 키스까지 했다면서요? 그러면 참고 기다려 준 레이첼이 보살이네!”
“아니… 아니… 그랬던 거 같다고.”
그러고는 대칸은 다시… 또다시 조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아인트호벤의 조건이 너무 좋은데.”
대칸의 이 말에 아담은 폭발하듯이 말했다.
“이 멍청한 자식아! 레이첼이 바라는 건 조건이 아니잖아. 너의 의사라고!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데이비드도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형님! 축구는 도사더니… 연애는 정말 꽝이네요.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의 말에 대칸은…….
“내가 그렇게 멍청한가?”
“네!”
“어!”
아담과 데이비드는 정말 미친 듯이 대칸이 답답했다.
두 사람의 말에… 대칸도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하죠?”
아담은 바로 말했다.
“야이…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잡아!”
아담의 말이 대칸의 머리에 박혔다.
아담과 데이비드는 계속해서 술을 마시며 대칸에게 연애 잔소리를 하였고, 아담의 ‘당장이라도 가!’라는 말이 머리에 박혀있던 대칸이 술기운이 오르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내가 가서 그녀를 잡으면 될까요?”
대칸의 갑작스러운 말에! 아담과 데이비드는 환호했다.
“그래! 지금이라도 가서 잡아!”
“형님, 레이첼이 싫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가서 고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냥 보내면 평생 후회한다고요!”
데이비드의 말처럼 평생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자, 가시죠!”
거실에서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드워드가 자신의 차 키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다들 술 취했잖아요. 제가 운전해 드리죠!”
“어디로?”
대칸이 멍청히 질문하자, 아담이 그의 머리를 한 대 때리며 말했다.
“당연히! 레이첼의 집이지!”
“악!! 미쳐!!”
에드워드가 운전하는 차… 거기에 대칸을 비롯한 아담, 데이비드까지 네 사람이 타고 달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운전 제대로 해!!”
“하하하… 아버지 미안! 운전한 지가 얼마 안 돼서…….”
“아니, 앞을 제대로 보고 가라고!!”
초보인 에드워드의 운전에 아담과 데이비드는 기겁을 했지만, 에드워드는 웃으면서 계속 차를 몰았다.
“제발 조심하라고!!”
데이비드가 소리쳤지만, 에드워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도착~”
에드워드의 차가 멈추고, 그들의 눈앞에는 레이첼의 집이 보였다.
“저 앞에 있는 집에 레이첼이 산다는 거지?”
“네. 내비게이션이 말한 주소입니다.”
에드워드는 윌리엄 팀장을 통해서 레이첼의 집 주소를 알아냈고, 내비게이션을 따라서 도착한 것이다.
작은 주택… 정원도 조그마하게 있는 예쁜 집이 레이첼의 집이었다.
“파이팅!”
대칸이 차에서 내리자, 바커 삼부자는 차 안에서 그에게 응원을 보내었다. 그리고 대칸은… 술기운에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고 손바닥으로 뺨을 한번 치고서는 레이첼의 집으로 향했다.
띵동띵동.
대칸이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에 레이첼이 밖으로 나왔다.
“감독님? …무슨 일이세요?”
레이첼은 살짝 놀랐지만, 그 감정은 감추고 싸늘하게 물었다. 그리고 대칸은 바로 말했다.
“가지 말아요.”
“네?”
되묻는 그녀에게 대칸은 솔직하게 말했다.
“아인트호벤으로 가지 말라고요.”
“…….”
레이첼은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았다.
“왜요? 웨스트 릴링에서는 그 정도 조건 맞춰줄 수가 없잖아요.”
“…….”
대칸이 다시 말이 없자, 레이첼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이만하죠.”
“아뇨! 그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죠?”
“저를 떠나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레이첼!”
대칸의 입에서 이제야 원하는 말이 나왔지만, 레이첼은 확인하고 싶었다.
“왜죠?”
“당신을…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대칸의 입에서 드디어 고백이 터져 나왔다.
레이첼은 그때서야 미소를 머금고서는 말했다.
“술에 취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저번에 승격 파티 때도 그렇고…….”
“술을 먹은 건 사실이지만, 진심입니다. 정말로!”
대칸의 말에 만족한 레이첼이 웃었다.
“저는 아직 그 진심 잘 모르겠는데… 안에 들어가서 진심을 더 자세히 말해볼래요?”
레이첼의 제안에 대칸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이스!”
“형님! 정말 잘했어요!!”
“대칸 감독님 이제야 인간답네요.”
차 안에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바커 삼부자는 성공했다는 의미로 서로 하이 파이브를 하며 자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