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그리고 다시 성좌 영원한 분노의 배 속에선 유성원 일행이 지루한 벌초 작업을 하며 전진해 나가는 모습이 계속됐다.
숫자만 많고 피곤하기만 한 적들을 상대하면서 ‘기둥’이 있는 곳까지 열심히 나아가길 어언 반년.
갑자기 엄청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덮친다든가, 다른 액시던트가 일어나나 긴장했지만, 전혀 그런 거 없이 어제 오던 그놈들이 또 오고, 또 오고, 또 오고, 또 오고… 반복할 뿐이었다.
“나 지금… 그냥 밖에 있는 괴수랑 싸우러 가고 싶어졌어. 이거 분명 지루함으로 날 죽일 셈인 건가?”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식물들과 나무들, 먹을 수 있는 거라서 식량 걱정은 덜하다는 것이겠지요. 더불어 마력 회복 능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너는 어느새 그런 걸 연구했니?”
“다른 거 할 게… 없잖습니까? 저 식물과 나무들을 베는 일 외엔 말이죠. 심지어 저 식물과 나무들… 한참을 베니 또 가끔 쉬기도 하고 말이죠. 아, 이 잎이 다섯 갈래인 식물만 마력 회복 능력이 있습니다, 폐하.”
묘하게 납득되는 말에 유성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유청이 내미는 식물을 받아 들었다.
전투를 진행하던 중 식량 문제와 마력 문제가 역으로 회복되었기에 지루함은 더더욱 배가되었다.
그나마 이 지루함을 달래 주는 것은, 점점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고 내일이면 도착할 것 같은 저 하늘로 솟은 ‘기둥’이었다.
“하나 더 다행인 건… 여기 이렇게 먹고살 방안이 있으니 어르신이나 다른 헌터들이 사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거네.”
“예. 그거 하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기둥’에 이제 곧 도달할 것 같으니 폐하, 긴장하시길 바랍니다.”
“그래. 후우우~ 이제 좀 지겨움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만. 진짜… 풀과 나무만 베는 건 이제 질색이야. 이게 무슨 ‘코어 던전’이야.”
처음엔 그래도 식물들과 몬스터들로 인해서 소모가 있었지만, 식량 수급과 마력 요소 회복으로 인해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지옥의 던전이 되어 버린 이 성좌 영원한 분노의 ‘코어 던전’이었다.
1년째 감동도, 보람도 없는 무미건조한 전투와 사냥만 반복하다 보니 이건 또 다른 의미로 정신이 미칠 것 같았다. 그에 유성원은 빨리 내일이 오길 빌면서 잠이 들었다.
***
그리고 다음 날, 새로운 환경을 맞이한다는 기분에 빠르게 움직인 유성원과 기사들은 약 반나절 만에 드디어 ‘기둥’ 앞에 도착했다.
이 ‘기둥’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풀과 나무, 그리고 벌레만 상대하던 지긋지긋한 나날과 작별하게 되는 것만큼은 반가운 일이었기에 곧바로 다가갔고, 한 바퀴 돌아서 입구를 찾아냈다.
새하얀 기둥에 있는 문. 재질을 만져 보니 단단하면서 반질하지만 살짝 따스한 것이 금속은 아닌 듯했고, 뼈로 추정되었다.
“뼈인가? 아무튼 친절하게 입구까지 있네. 외벽을 타고 올라가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저 비룡들 떼와 싸우면서 가는 건 적어도 재미는 있겠지. 흠하핫.]
“재미라……. 지겹긴 했나 보구나, 가울프.”
[나만 그럴까? 하하하. 차라리 농사가 더 재미있을걸? 그건 그래도 곡식이 자라는 걸 바라볼 수 있으니까.]
“동감이긴 해.”
1년간 이 던전에서 진행한 거라고는 보람도, 즐거움도 없는 지겨운 몬스터 처리뿐이었다.
멸망급의 코어 던전이라기엔 너무나 수수하고 지루한 곳이었기에 이제는 차라리 좀 힘들더라도 적과 제대로 싸우고 싶다는 욕망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새하얀 문을 열고 ‘기둥’ 안으로 들어가자 안엔 딱히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쓰레기장의 쓰레기처럼 불규칙하게 쌓여 있는 더미만 수없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뭐야… 이게?”
“뼈군요.”
툭… 투두둑… 툭툭… 툭!
그 더미들을 자세히 보니, 위에서 ‘뼈’들이 계속 떨어져서 일정한 영역에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튼튼한 뼈들의 산을 딛고 올라가서 주변을 살펴보는데, 이 ‘기둥’ 내부는 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밖에서 보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넓었으며, 위를 보니 아득히 멀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전에 보았던 광원의 빛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일단 뚫려 있는 것 같긴 했다.
“…뭔가 불안한데? 여기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올라오면 된다, ‘별의 수호 기사’여. 이 ‘탑’이야말로 이 ‘머리’ 부분의 ‘두뇌’에 향하는 유일한 길이지.]
“그거 하나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지금 당장 날아서…….”
[하나 그렇게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얌전히 걸어서 올라오도록 해라. ‘걸어서’ 말이다.]
“저건 또 무슨 망발이야? 엘드라엔!”
이미 1년이나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구른 유성원은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엘드라엔을 불러냈다.
기사들을 부르진 못하더라도 먼저 정찰을 한 다음 안전한 장소나 적절한 높이로 운반하는 방법을 생각하며 올라가려는데, 엘드라엔을 타고 올라간 지 3초 만에 그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이거 왜 안 올라가?”
[뭔가 이상하다. 여기… 비행이 되지 않는다.]
“뭐? 야, 잠……!”
힘차게 날갯짓하며 올라가던 엘드라엔은 이내 급브레이크가 걸린 것처럼 멈추더니 땅으로 그대로 추락해 버렸다.
묵직한 소리를 울리면서 추락한 유성원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아까 전 ‘은빛 용인’이 한 말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분명 저 망할 용이… ‘걸어서’ 올라오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근데 여기서 어떻게 걸어 올라가? 계단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면 재주껏 벽을 타고 질주해야 하나?”
“…아뇨. 그게 아닐 겁니다. 있는 거라곤 계속해서 뼈가 쏟아지는 이 탑과 ‘걸어 올라와라.’라는 소리로 봤을 때, 아마… 만들어서 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마, 만들어?”
끄덕.
유성원의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에 유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뼈들이 계속 쏟아지는 산을 가리켰다.
만져 보고 또 단단함과 튼튼함을 재 보니 나름 이 탑의 벽면과 같은 재질이라는 것을 어필하며 잘 쌓고 다듬어서 계단으로 만들어서 올라가면 될 거라는 게 그의 의견이었지만, 유성원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이 탑의 벽면을 기준으로 이렇게 붙이기만 해도 계단이 되니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구조로 만들면 충분할 겁니다. 이 쏟아지는 뼈 자체도 튼튼하며, 또 우리가 가진 무장이나 능력이면 이 벽면에 구멍을 뚫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아니아니, 어느 세월에 만들어서 올라갈 건데? 식량이나 그런 건?”
“식량은 이 탑 밖에 널려 있지 않습니까? 식수도… 식물 몬스터의 수액이면 충분합니다. 또 영양소의 불균형이 문제라 생각되지만… 저 뼈들 사이에 보면 뼈만이 아니라 죽은 지 얼마 안 된 비룡의 시체들도 군데군데 있더군요. 그리고 이 기둥 주변에 저희가 올라왔던 것 같은 벌레 통로도 있고 말이죠.”
쿵!
말하자마자 뼈의 산에, 몸체가 반 토막이 난 비룡의 시체가 떨어졌다.
유청의 말대로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피가 뚝뚝 흐르는 신선한 용이었다.
육류, 채소 모두 있으니 식량 보급도 문제가 없어서 내부에서 공사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이 던전… 진짜 뭐야?”
“아무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일정 시간 이상의 비행은 금지이지만 그래도 뛰어오르는 건 허용이 되는 듯하니, 인원을 나누어서 곧바로 공사에 들어가지요. 폐하.”
“…하아아~ 그래. 씁! 그러자.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면… 하는 수밖에 없지.”
딱히 다른 방법이라든가 수단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대로 조를 나누어서 작업에 들어갔다.
뼈를 다듬는 팀, 벽에 구멍을 내는 팀, 식량을 구하는 팀과 조리팀 등등……. 인원을 분산한 뒤 곧장 탑의 벽에 뼈를 박아 넣으면서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하는 유성원과 기사들이었다.
“…이건 또 얼마나 해야 하려나? 차라리 밖으로 올라가는 건 어떨까? 여기서 뭉그적대는 것보다 비룡들 뚫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하늘로 날아갈 수 있는 전투원이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전투하다가 폐하가 쓰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자포자기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래. 후우우~ 그래, 하자! 까짓것!”
그렇게 유성원과 기사들은 기약 없는 탑의 계단 만들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탑’ 내부는 신성한 영역으로 인식되는 건지 밖에서 좀비처럼 몰려오던 식물과 나무들도 일정 영역 이상 쫓아오지 않아서 예전 이상으로 단조로운 공사 과정이 계속됐다.
공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벽에 구멍을 뚫고 계단이 될 뼈를 그냥 쑤셔 박는 식으로 과정을 최소화해서 생각 외로 하루에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곤 해도 아직 까마득한 높이였지만 말이다.
“그나마 떨어지는 착지의 감속은 돼서 좋네.”
“중간에 거점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휴대하고 있는 식량은 위에서 쓰고 말이죠.”
“그러자. 후우우~ 근데 여기 진짜… 코어 던전 맞는 거야? 참 나~ 이젠 아예 전투까지 없네. 흡!”
티탄의 말뚝을 망치처럼 써서 뼈 계단을 박아 넣으면서 유성원이 투덜거렸다.
대체 이 코어 던전이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뭘까?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계속 일은 진행해 나가는 그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계단을 만들어서 올라가고, 중간 거점을 만들고 또 계단을 만드는 것을 무수히 반복,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이제 계단이 될 ‘뼈’를 운반하는 일이 번거로워졌기에 작업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그리고 굳이 시간 계산을 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계속 작업을 하다 보면 수염이 나고, 머리카락도 길어지는 등등… 시간의 변화는 계속해서 드러났고, 어두운 탑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또다시 정신적인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냥… 날아서 싸우러 갈까? 와, 이거 진짜 얼마나 더 여기 있어야 해? 불확실이고 뭐고! 그냥!”
“폐하가 끝이 나면 저희 모두 끝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여기 엄연히 코어 던전입니다, 폐하.”
“아그으으윽!”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유성원은 유청의 말을 결국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래, 아무리 지겨운 공사만 한다고 해도 여기는 엄연히 성좌 영원한 분노의 ‘코어 던전’이자 신체 내부다.
게다가 도박수를 던졌다가 망하면 정말 뒤도 없으며 이미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왔기에 여기서 무르긴 아깝기도 했고, 오기가 생겨났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자! 산이 높아 봐야 결국 하늘 아래지!”
“바로 그 기세입니다, 폐하!”
유청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의 격려와 또 이 코어 던전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끝이 없을 것 같은 이 뼈의 계단 공사를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1년… 단 하루도 쉬지 않고서 꾸준히 5년째.
드디어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 더 이상 계단을 만들 필요가 없는 탑의 정상에 도달했다.
“후우우, 생각보다 얄팍한 기둥이었네. 하하하하하핫! 다 왔다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폐하, 감동하시는 건 좋지만 다른 사람도 올라가야 하니 일단 올라가시고 해 주시옵소서.”
“아! 맞다. 미안!”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이 있다는 걸 순간 까먹은 유성원은 유청의 말에 급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리고 올라온 기사들과 함께 도달한 탑 정상의 풍경을 감상했다.
일단 바닥엔 새하얀 대리석이 깔려 있었으며 그리고 앞에는 거대한 성과 함께 그 위에 빛을 뿜고 있는 광원(光源)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이 넓은 영역에 빛을 공급하는 만큼 빛의 광량이 엄청 나야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냥 맨눈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아주 훌륭하군.]
짝짝… 짝짝!
풍경에 감탄하는 사이 은빛의 용인, 성좌 영원한 분노의 ‘별의 수호자’가 박수를 치며 나타났다.
얼굴엔 만족감에 찬 미소를 띤 채로 유성원을 바라보면서 그의 앞까지 천천히 걸어왔고, 유성원을 비롯한 기사들은 긴장을 한 채 언제든 무기를 뽑을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