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식물들의 공세에 딱히 피해를 입은 건 아니지만, 생명력과 마력을 빨아들이는 성질 탓인지 몇몇 기사들이 피해 때문이 아니라 마력 소모량 때문에 유성원이 역으로 지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물론 그때마다 포션을 들이켜서 어떻게든 천검군 기사들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이 식물들의 공세는 끊임이 없었다.
“결국 진군해야 한다는 거군. 아예 하늘로 내가 먼저 날아갈까?”
“이곳에서 성소를 못 쓰지 않습니까? 혼자서 가시다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 맞다. 젠장… 그럼 저길 어떻게 가야 하지?”
“단장님, 아까 보고를 안 드렸는데, 제가 살짝 날아가서 보니…….”
정찰을 나갔던 섬멸이 자신이 보러 나갔을 때 저 멀리 위에 있는 광원의 바로 아래로 거대한 기둥 같은 건축물이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려 줬다.
즉, 저 태양 같은 광원을 향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었고, 고개를 끄덕인 유성원은 기사들과 함께 진군 방향을 그쪽으로 잡고 끝없이 달려드는 풀과 나무를 비롯한 이 기괴한 식물들을 처리하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약하지만 끝없이… 게다가 조금씩이지만 소모를 유발하고 있어. 이거 자칫하다간 큰일 나겠어. 거기다 약해서 경험치조차 되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네.’
[계약자여, 역시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만?]
“알고 있어. 최대한 돌파해서 저 기둥으로 간다! 후우우우~”
아직은 여유로웠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 없는 상황. 저 기둥으로 가서도 문제인 게 기둥을 타고 올라가야 하고, 또 그다음 그 은색의 용인과 싸우는 것까지 생각해야 하는 만큼 가능한 한 빠르게 돌파해서 가야만 했다.
‘코어 던전치고… 뭔가 격렬하게 빡세진 않지만 이건 이것대로 짜증 나!’
딱히 힘들진 않은데, 아주 지겹고 끝이 없는 몬스터들의 향연이었다.
두려움을 주려고 살기를 뿌려도 이놈들은 그것도 못 느끼는 건지 그저 본능대로 잡아먹으려고 계속 달려들기만 했다.
그리고 체력, 정신, 마력 모두 끝없이 소모전만 하면서 나아가는데, 끝없는 갈대밭을 혼자서 추수하면서 지나가는 느낌을 받는 유성원이었다.
‘…대체 뭐지, 여기는? 멸망급이면 좀 더 다이내믹하거나 힘든 고난 같은 게 튀어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설마 이런 던전이라는 건가?’
지난 한 달간 살덩이 동굴을 뚫고 온 것은 그래도 그냥 벌레들 때문이라고 납득할 수 있었지만, 이곳까지 이러니 의심은 이제 확신이 되었다.
이 던전 자체가 힘들지만 ‘지루함’을 콘셉트로 한 것이 확실하다 생각되기 시작한 유성원은 이를 악물고 수없이 달려드는 이 식물과 나무를 계속해서 베어 넘기며, 한시라도 빨리 저 ‘기둥’에 도달하길 바랄 뿐이었다.
***
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시티.
세상사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라는 게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아무리 좋은 의견이나 이성에 호소한다든가, 그 반대로 감성에 호소를 해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도 그것이 실행되기는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오늘 아무리 좋은 동기 부여 영상이나 세계적인 명연설을 보아도, 내일 당장 운동을 시작하거나 변화하려고 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
사람들 개개인도 그런데 한 국가, 조직의 수장, 사회 정도 되는 거대한 곳이면 그 변화가 더 쉽지 않다.
“그깟 계집의 이야기에 혹할 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라고? 모를란테 부장이 배신이라고?”
“예, 예! 그렇습니다. 갑자기 시민들은 물론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 사(社)의 헌터들과 함께 반전(反戰) 운동을! 심지어 우리와 상의도 하지 않고 몰래 시민들은 물론 그 동양인 계집과 연락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한번 변화하고자 마음먹으면 마치 구멍이 나고 금이 간 댐처럼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도 인간의 이성과 의지였다.
일단 신아영의 연설 이후 세계 여론의 흐름은 모두 그녀의 말대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천만 이상이 죽은 유럽 전선의 현실이 영상과 사진으로 많이 알려져 있었고, 더 큰 전쟁으로 확전되어서 정말 세계 멸망으로 향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작동했지만 ‘신의 뜻대로’라면서 성좌라는 절대적 존재를 핑계로 대면서 전쟁을 멈추지 못했었는데, 마침 신아영이 그것을 막을 빌미를 준 것이었다.
지위 고하 및 부가 많든 적든, 전쟁의 공포와 파괴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같으니 말이다.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프리카는 그래도 성좌의 명령이라는 핑계 아래에 여전히 결속을 강화하고 내부 불만을 억눌러 왔지만 갑자기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체 모를란테 부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병원에 누워 있기만 하던 양반이! 일어나자마자 왜?”
“심지어 일어나자마자 우리 일을 돕는 척하더니 갑자기 뒤통수를……. 아이고! 게다가 눈치챘을 땐 이미 킬리만자로 시티는 방위 체제를 갖추었고… 모를란테 부장의 요청으로 유럽과 아시아, 인도의 지원군이 대서양을 건너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아영의 연설 이후 우왕좌왕할 때, 병석에서 막 일어난 모를란테 부장이 이런 짓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완벽하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었다.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가 배신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4개의 회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체 모를란테 부장이 왜 그렇게 변한 거지?”
“이쯤 되면 전에 유성원 헌터에게 침략당했을 때 세뇌당한 게 아닐는지요? 마법이라든가, 물약이라든가. 그렇지 않고서야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의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 님이 강림하셨지 않소? 그런 상황에서 뭘 하겠다고?”
“아무튼 우리 다섯 회사 중에서 배신자까지 나온 만큼 이 일은 수습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의 배신은 지금 이 전쟁 분위기를 계속해서 가져가려는 아프리카의 간부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미 시민들의 반전 여론이 높은 가운데 성좌의 사도가 있는 회사들 중 하나가 배신하였으니 이제는 아무리 성좌의 뜻이라고 우겨도 그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고 해도 이렇게 내부에 적을 둔 상태라면 내전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그러면 결국 아프리카 혼자 내전으로 피해를 보게 된다.
“젠장… 이러면 정말로 정전 협정에 사인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래야만 하겠지.”
“으으으음…….”
모를란테 부장 하나 때문에 진퇴양난이 되어 버린 이 상황. 가장 쉬운 해결책은 그를 암살하는 것인데… 이미 모든 대비를 끝마쳤을 것이기에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으로, 바로 성좌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4명의 간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각자 품에서 성좌의 계시를 받을 때 썼던 리모컨을 꺼내어 또 코드가 연결되지 않은 TV를 향해 겨눈 다음 눌렀다.
“신이시여, 부디…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소서.”
“한데, 우리 넷만으로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를란테 부장은 이미 배신했소. 그렇다면 진정한 사도는 이제 우리 넷뿐이지. 신께선 분명 대답하실 겁니다.”
지지지직… 지지지직!
확신에 찬 데스티니 타임즈 간부의 말과 함께 화면은 지지직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말대로 곧 그 안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 지지직… 를 불렀느냐? …지지직…….]
“예, 우리의 신이시여! 지금 당신의 인도가 필요하옵니다. 당신의 사도였던 모를란테 놈이 당신과 당신의 백성을 배신하고 흰둥이와 누렁이 놈들과 손잡았습니다. 당신의 심판이 필요합니다.”
[심판은… 치지지직… 내가… 치지지직… 하는 게 아니다. 한번 내린 나의 자비는… 사랑이니… 거두지 아니할 것이다…….]
“그, 그러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것은… 치지지직… 너희가… 치지지직… 직접… 심판… 하여야… 한다. ‘놈에게 너희가 재와 불로 심판하여라.’]
치지직거리다가 갑자기 또박또박 위용 있게 말하자 다른 네 간부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 성좌의 진심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고 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생각했는데,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불과 재’. 핵병기와 같은, 지금은 금지된 대량 학살 무기를 써서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사실 딱히 핵에 국한될 필요는 없었다.
마정석의 발견과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의 가호 아래 기술 발전을 하게 된 아프리카는 이미 핵폭발과 수소 폭탄에 맞먹는 위력을 가진 마법 공학 광역 섬멸 탄두를 개발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정말 할 겁니까?”
“그럼 신의 말씀이 있는데 안 할 겁니까?”
“재와 불로 심판하라. 재와 불로 심판하라. 재와 불로 심판하라. 재와 불로 심판하라. 재와 불로 심판하라. 재와 불로 심판하라. 재와 불로 심판하라. 재와 불로 심판하라. 재와 불로 심판하라…….”
“으으음… 하지만 이걸 하게 되면 되돌릴 수 없을… 텐데 말입니다.”
성좌가 원하는 것을 알아내긴 했지만 4명의 간부들 중 절반인 2명은 적극적으로 성좌의 의견을 따르려는 한편, 다른 절반인 2명은 갈등하면서 고뇌했다.
아무리 성좌의 계시라곤 하지만 이 수(手)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둘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성좌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둘은 그 입장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의 계시가 떨어졌는데! 지금 이걸 되돌리겠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재와 불이 뜻하는 의미가 다른 것이겠습니까? 당장 킬리만자로 시티에……!”
“아니! 그래도 거기는 우리 국민들이 사는 곳입니다.”
“배신자의 손에 떨어진 이상 배신의 땅입니다!”
찬성과 반대가 서로 치열하게 의견 대립을 하며 맞서 싸웠다.
찬성하는 측이야 성좌의 말대로 이때까지처럼 하자는 것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은 이건 그냥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최악의 선택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켰다.
심지어 같은 ‘검은 민족’ 동포가 사는 땅을 작살내자고 당당히 말하는 통에 더더욱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 짓을 저지르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피땀 흘려 만든 우리의 도시가 폐허가 될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성좌님의 은혜 덕분에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그분의 뜻으로 부수는 건데 뭐가 문젭니까?”
“그렇다고 해도 만든 것은 우리입니다. 더 이상 외세와 다른 인종에게 무시받지 않고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쌓아 올린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 파멸하자고 지금까지 노력한 게 아니잖습니까? 우리도 잘 살아보자고 한 거잖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여기서 물러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요! 당신들도 모를란테처럼 신의 뜻을 거스를 생각이오?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논쟁은 점점 격화되었고, 이야기할수록 성좌의 말을 그대로 따르자는 측도 결국 인간인지라 반대 측의 의견에 상당히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수십 년간 철저히 갈고닦은 광신의 굴레를 깨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였다.
[…이 맛에 지성체들을 갖고 놀지. 흐흐흐… 스스로 불구덩이로 들어가려는 어리석음! 이 혼란! 흐흐흐…….]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는 아직 켜진 모니터로 인간들의 촌극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수많은 세상과 ‘별’의 인간들에게 은혜를 주고 갈등을 만들고, 그것을 폭파시키는 맛으로 사는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는 이미 수많은 사례를 봐 왔기에 결국 이런 패턴에서는 광신도들이 우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설사 저 간부들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내부에서 반대자가 나올 수도 있고, 결국 누군가는 폭주해서 파멸의 스위치를 누를 것이라 보기에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는 슬슬 파멸로 향할 이 ‘별’의 운명을 기대하며 그들을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