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원정을 위한 준비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사단의 성소’라는 압도적인 이차원 저장 공간 및 수송 능력이 있는 덕분에 딱히 수송기나 다른 기동 능력 없이도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유성원이 정보를 얻는 사이 출동 준비는 끝나 있었고, 유청에게 다가간 유성원은 현황을 확인했다.
“이제 거의 다 끝났습니다. 이미 성좌 영원한 분노의 공세가 있을 때 미리미리 준비해 둔 덕분에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오케이. 휴우~ 그럼 나는 먼저 가서 그곳의 상황을 보고 있을게.”
“알겠습니다, 폐하. 저희는 함대를 출격시켜서 바로 인도해서 출동하겠습니다.”
“보자, 그 배 속을 제외하고 태평양 한가운데와 가장 가까운데 있는 애가… 찾았다.”
기사단의 성소의 이점을 십분 활용한 유성원은 성소로 들어간 다음 도착 장소에 있는 기사가 열어 준 포탈로 나가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도착한 곳은 인도 남부 해안가. 뜨거운 바람 속에 바다 냄새와 뭔가 꾸릿한 냄새가 아우러져서 다가왔다.
도착한 유성원은 지체하지 않고 엘드라엔을 불러 곧바로 하늘을 날아올라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성좌 영원한 분노… 후우~ 이번에도 정말 만만치 않겠네. 아무튼… 이게 진짜 마지막 멸망급이려나?”
[아직 ‘성좌 티탄의 복수’와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도 남아 있지 않나?]
“성좌 티탄의 복수는 올림푸스 길드만 없어지면 되고,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는 그냥 변태 새끼고. 애초에 잡을 수 없는 존재이지. 결국 4대 멸망급 중 진짜 인류의 위협은 둘뿐이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 하나가 너무 막대하게 강하지. 진체(眞體), 말 그대로 실존하는 신의 존재이며, 저건 살아 있는 재앙 그 자체.]
“…그래. 보면 알겠다.”
크오오오오오오오!
어찌나 그 존재감이 큰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태평양 저 멀리에서 지각과 바다를 먹어 치우며 즐거워하는 성좌 영원한 분노의 포효가 아주 작게나마 들려오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포효에 압박을 느끼면서 유성원은 또다시 찾아올 싸움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계속해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
“가까이 가니까… 괴수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군. 근데… 덤비진 않네?”
[본능이 우선인 놈들인 것 같다. 강자를 자연스럽게 피하는 거지. 이기지 못할 상대에게 덤비는 건 멍청한 짓이니 말이야.]
“과연, 길을 알아서 열어 주니 편하군.”
[아니면… 오히려 길을 열어 줘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 그러려나? 그렇지만 쟤네들, 야생 동물 같은데. 후우우우~”
그렇게 싸움 없이 조용히 바다를 가로지르면서 성좌 영원한 분노에게 다가갔지만, 상당히 먼 거리인 만큼 시간이 남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속 마법 패키지까지 결제해서 속도를 올렸지만 그래도 족히 4~5시간은 가야 하는 상황. 긴장되는 가운데 유성원의 머릿속엔 여러 가지 상념이 흘렀다.
‘…어르신은 무사하려나? 아직도 내 기사가 살아 있다고 반응은 나오고 있긴 한데… 무사하실지가 걱정이네. 하아아~’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어떤가?]
“아냐. 그러다가 기습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하아아… 아무튼 진짜로 이번 거만 잡으면 이제… 이제… 끝나는 게 아니네. 하아아~”
보통 이런 최강의 적을 쓰러뜨리면 ‘그 뒤로 오래오래 평화롭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현실은 녹록지가 않았다.
성좌 영원한 분노 때문에 잠시 멈춘 인류끼리의 분쟁과 혼란을 막아야 했고, 남은 성좌들 중에서 인류에 위협되는 존재들도 아직 많았다.
인류 멸망이라는 큰 산을 치워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것이다.
“근데 말이지…….”
[뭔가?]
“가끔 드는 생각이긴 한데… 내가 좀 더 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게 좀 들긴 해. 평소엔 후회 같은 건 안 하지만… 지금 아프리카가 폭주한 건 솔직히… 내가 아프리카가 폭주하는 걸 용인해서 그런 거잖아? 그게 지금 사태까지 이어지게 된 거고 말이지.”
평소엔 바쁘고, 또 가능한 한 주변에 있는 기사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하지만, 지금은 엘드라엔밖에 없고 잠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라 생각이 많아져서인지 후회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아, 굳이 대답 안 해도 돼. 그저 그냥… 생각나던 걸 털어놓고 싶을 뿐이니까 말이지. 그… ‘실수했다!’라는 생각이 들면 말이지, 이유 같은 걸 찾고 싶어지니까… 하아아~”
인도의 경우도 만만치 않게 사람들의 희생과 분쟁이 컸지만 그래도 ‘성좌’의 장난감보다는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있고, 결과가 따라 주었기에 마음의 혼란이 크지 않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성좌 종말자와 달리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는 쓰러뜨릴 수 있는 타입이 아니고, 또 아프리카 사람들을 실제로 발전시키고 그들의 성좌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3차 대전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전쟁이었다.
“…가장 문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거지. 하아아~”
미친 듯이 웃는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가 생각이 났다.
어쩌면 성좌보다도 더 위험한 게 인류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휴전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성좌 영원한 분노를 잡지 않을 수도 없다.
‘모든 게… 내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야. 아니, 잘못했잖아.’
그 결과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자신의 탓을 하게 된다.
예전 같으면 신경도 안 썼을 문제이지만 지금은 한 조직의 수장, 아이들의 아빠, 책임이라는 것을 배우고 알게 된 몸이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아프리카의 폭주를 막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진짜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그냥 아프리카를 날려 버려야 하나? 아냐. 그랬다간 결국 또 끔찍한 증오만 남게 된다. 다른 쇼라도 할까? 아니면 진짜로 유청 말대로 인류 통합을 위한 대전쟁이라도 해? 이거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야?’
더 갑갑한 것은 해결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해결 방법이 있긴 했다.
그냥 현존하는 인류 최강 전력으로 거역하는 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고 제압하고 점령해서 복속시켜 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게 쉽게 될까? 지금이야 다들 그래도 전쟁 후를 생각해서 일정 ‘선’은 지키면서 싸우자고 하고 있을 텐데, 전쟁을 멈추겠답시고 그랬다가는 폭주해 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싶지가 않네. 저기, 엘드라엔… 카운슬링 비용 낼 테니까,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건 일단 ‘성좌 영원한 분노’를 이기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쪽이야 오히려 결론은 쉽잖아. 싸워서 이긴다. 어렵긴 하지만 방안은 단순하지. 하지만 이건 반대야. 쉬우면서도 복잡해. 그리고 어쩌면 역사에 끔찍하게 기록될 일이 될 수도 있어. 아니면 인류가 멸망한다거나… 특히 그게… 내 탓인 것 같으면 더더욱…….”
그리 말하며 유성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멀리 바다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슴에 커다란 돌을 얹은 것 같은 무거움이 느껴지며 그는 앞으로의 미래도 두렵고, 과거 자신의 실수가 후회스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서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지금이라도 폭시에게 물어볼까? 하하, 카오스 아티팩트에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회귀한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설사 있더라도 별로 좋진 않을 거다.]
“어째서……?”
[네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한들, 이 시간과 차원은 갈라진 세계로 남기 때문이지. 결국 그건 너 혼자만의 도피다.]
“그래. 후우우우…….”
유성원은 결국 상념과 죄책감만 얹은 채로 계속 날아갈 뿐이었다.
그래도 서서히 성좌 영원한 분노의 진체가 점점 다가오면서 커져 가자, 인류의 미래는 모르지만 일단은 이 지구를 살리는 일이 우선이었기에 유성원은 상념을 간신히 털어 버리고 눈앞의 진체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때도 엄청났지만… 역시 굉장하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멀리 있는데도 마치 자연 경관처럼 거대한 성좌 영원한 분노의 진체의 모습. 거대한 동굴 안으로 바닷물이 흘러들어가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들어간 바닷물과 바다 생물들은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맙소사… 저거 고래지? 무슨 고래가 새우만 하게 보일 정도지?”
동물의 본능으로 위험하다는 걸 눈치챈 고래 한 마리가 해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허우적거렸지만, 결국 성좌 영원한 분노의 진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걸 본 유성원이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다른 하나의 진체가 어디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 바다로 빠질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아래에서 거대한 괴수들이 몰려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그러니까… 테라 블루윙이라고 했던가? 그래, 다 눈치만 보고 있는 것도 질리던 참이었다! 어디 한번 해볼까?”
[잠깐, 뭔가 이상하다.]
“응? 뭐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SS급 몬스터 테라 블루윙을 보고 유성원은 싸울 태세를 갖추었는데, 순간 엘드라엔이 말렸다.
그러자 날아오던 SS급 몬스터 테라 블루윙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유성원의 앞에 머리를 숙인 채로 다가왔다.
“…뭐야?”
[아무래도 타라는 것 같은데?]
“뭘 믿고?”
[보다시피 적의는 없지 않은가? 사절 같은 느낌이니…….]
“으음…….”
엘드라엔의 말도 그렇고, 얌전한 테라 블루윙의 모습을 본 유성원은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는 테라 블루윙의 부리를 타고서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출발한다는 듯 크게 울음소리를 낸 테라 블루윙이 몸을 돌려 유성원을 태우고 빠르게 낙하했는데, 입을 벌려서 열심히 해수를 마시고 있는 성좌 영원한 분노의 입에 점점 가까워져 갔다.
‘후우… 근데 진짜 거대하다. 과연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키 카드도 챙긴 만큼 어떻게든 되겠지……?’
꾸아아아악!
[잘 왔다, ‘이’ 별이 선택한 자여.]
그때, 테라 블루윙의 울음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먼 거리임에도 귀에 쏙쏙 박히는 굵고 강한 목소리. 듣기만 해도 굳센 힘이 느껴지는 그 목소리를 좇아 시선을 돌린 곳에 있는 것은 자신보다 거대한 용인(龍人)이었다.
크록베인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전신을 두꺼운 갑주로 감싸고 등에는 두 자루의 대검을 맨 강해 보이는 전사였는데, 특이한 점은 갑옷은 물론 비늘 색까지 은빛인 용인(龍人)이라는 점이었다.
‘크록베인 친구인가? 하지만 외양만 그냥 비슷… 이 아니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
크록베인이 도마뱀이라면 눈앞의 저 용인은 용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느낌 자체가 달랐다.
엘드라엔을 볼 때보다도 더 큰 위압감과 기운이 서린 데다, 저 용인 주변에 다른 괴수들이 마치 경의를 표하듯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대체… 아니, 지금… ‘이’ 별이 택한 자라고 말했으니까 그러면…….”
[눈치가 빠르군. 그래, 나는 스스로 ‘지성’을 버리고 짐승이 되신 이 ‘별’을 대신하여 ‘위대한 사명’을 진행하는 사도회(Apostles)의 일원이자, 이 ‘별’이 선택한 수호자들 중 하나다.]
“…별의 수호자… 중 하나?”
[여기처럼 작은 ‘별’이면 몰라도 우리의 ‘별’은… 넓은 은하 전역과 수많은 ‘별’에 뻗어 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정체를 알자 유성원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코어 던전’이라든가 사도를 뛰어넘어서 성좌 영원한 분노의 ‘별의 수호자’라니. 일단 네임밸류로 치면 자신과 같은 격이지만, 문제는 ‘별’의 체급 차이였다.
이 지구의 선택을 받은 자신과 무수한 은하를 포식하는 멸망급 성좌인 성좌 영원한 분노의 체급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컸으니 말이다.
그 긴장감에 유성원은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흐르는 동시에 단 십 몇 분 전까지 고뇌하던 생각 모두가 사라져 버렸고, 그가 다시 입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