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그로부터 3개월 뒤, 아이언 포트리스.
어느덧 총 반년이 지났고, 유성원 일행은 약 100일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특히 중점을 둔 것은 성좌와의 교섭 및 장비 개발로, 코어 엔진은 금방 되지 않지만 성좌 종말자가 남긴 소재들을 이용한 냉병기 및 방어구 제작은 공정 라인만 만들면 되는 거라서 생각보다 빠른 생산을 보이고 있었다.
“소재를 가공할 제작 스킬을 가진 헌터를 구하는 게 어려웠을 뿐이지, 구하고 나니 문제는 전혀 없습니다. 어차피 쓰시는 게 전부 구조가 단순한 냉병기랑 갑주들이라서 말이죠.”
“다들 ‘기사’들이니 말이지. 오히려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에이~ 헌터의 시대부터 얼마나 지났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지는 거나 다름없죠. 하하핫!”
일단 목표는 1년째가 될 때까지 유성원 아래의 기사들과 천검군 병사들, 그리고 사령 군단의 완전 무장과 바다에서 싸울 것을 대비한 함선에 성좌 종말자급 전략, 전술 무기들의 장착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안전과 안보를 위한 투자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헌터들을 끌어모으는 올림푸스 길드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어차피 견제나 실제로 난리 피우나 그게 그거니까……. 아무튼 유청, 새 장비는 어때?”
“음, 아직 어색합니다. 일단 너무 가벼워서 말이죠. 새로 받은 검도… 마찬가지이고요.”
“가벼우면 좋은 거지.”
종말기장의 소재로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검은빛이 감도는 갑주로 새로이 무장한 유청은 새로운 무장에 대해서 적응이 안 된다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디자인부터가 중세식 갑옷에서 갑자기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강화복 같은 걸로 바뀐 것도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그렇다 한들 가지고 있는 것보다 좋으니 불평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쓸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말아야지.”
“예, 맞습니다. 불평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 하는 법이죠.”
“수영이랑 재영이도 돌아왔으니 걔네들 무장도 챙겨 주고. 다행히 걔네 둘은 좀 멀쩡한 성좌랑 계약한 모양이더라.”
“수영 아가씨가 성좌 비탄하는 흑마법사, 재영 도련님이 성좌 농식신(農食神)이었습니다.”
“그래도 성좌 산거정보단 낫지.”
‘성좌 비탄하는 흑마법사’는 끝없는 마법의 탐구를 위해서 사도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실험이나 의뢰 혹은 마정석을 받으면 은총을 주는 성좌였고, 성좌 농식신은 농사와 요리에 관련된 성좌였다.
솔직히 성좌 농식신도 처음에는 묘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직접 요리한 것을 먹어 본 유성원은 그 요리에서 오는 버프를 느끼곤 재영이의 선택이 신의 한 수라며 금방 태세 전환을 하며 반성했다.
“식사에 대해서 너무 우습게 봤지. 맛있는 식사가 그 정도일 줄이야. 난 버프 하면 도핑 물약 정도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런 것도 있었지.”
“저희야 폐하의 마력으로 움직이지만, 확실히 식사의 힘이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게다가 식량 생산은 결국 보급의 기본 중의 기본이자 국가 운영의 기반입니다. 나쁠 게 하나도 없는 성좌님입니다.”
“맨날 싸움만 하니 그쪽 생각을 못한 거겠지. 후우~ 이제 남은 건 우리 누님이랑 아영이뿐인가?”
아직도 성좌와 계약을 못한 사람이 2명. 그러나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그거 이외에도 지금 다방면으로 준비하는 것이 많기도 했고, 두 사람을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반년. 철두철미한 계획과 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가는데, 모든 일이 그렇듯 방해물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하아~ 자재 회수에 자꾸 방해물들이 나타난다고?”
“신형 갑주와 무기의 정보가 유출된 건지 아니면 종말기장의 소재가 뛰어나다는 내용을 입수한 건지, 날이 갈수록 방해자가 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가차 없이 처리하곤 있지만 역시 여기저기 몰래 흘러들어가는 건 어떻게 할 수가…….”
“쩝,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한국 정부에서 이쪽 기술 개발에 계속 관심을 가지는 터라 아이언 포트리스 쪽에 기웃거리기도 하고, 국방부 장관은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계속 거절해. 지금 우리 쓸 것도 만드느라 바쁜데… 뻔히 자기들도 좀 달라고 요구하는 거겠지.”
일단 한국 정부, 가까운 곳… 아니 한국 영토 내에서 독립적인 군사 세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거기에 무기 기술 개발까지 하고, 멸망급 성좌의 유산까지 독점하고 있으니 불안하기도 하고 배알이 꼴려서 뭔가 요구라도 하고 싶어 했지만, 순순히 줄 유성원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신뢰하고 있는 정부였으면 이렇게 독립적인 영역을 세우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 나물에 그 밥이고, 게다가 이번에 국토부가 아주 거하게 한 건 저지르기까지 했지?”
“예. 전선 도시로 들어가는 쪽에 신도시를 세우려 했는데, 거기 직원들이 내부 정보로 부동산을 투자하고는… 발뺌하면서 축소하려고 하는 상황 말이죠?”
“진짜 믿을 새끼가 없다. 국방부 새끼들도 여전하고… 에휴~ 이러면 절대 북한 쪽 영토 못 주겠네.”
물론 개혁이라는 게 늘 쉬운 일이 아니고 기존 권력층의 저항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눈치 볼 만한 세력이 있는 상황에선 알아서 몸 사릴 줄 알아야 하는데, 유성원이 관심을 안 가질 줄 안 건지, 아니면 그냥 무감각한 건지 어처구니가 없는 짓거리였다.
“가뜩이나 바쁜데… 방해만 하고 있어. 그냥 영원히 고사당하라고 그래. 그리고 전선 도시 철도 이어서 강원도 구석에 박아 버려. 미리 주변 땅부터 사 버리고 말이지. 어디 화나는데, 부동산으로 장난치는 거 나도 한번 해 보자. 아주 제대로 엿 먹여 주지.”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보자, 다음에는…….”
“폐하, 긴급 속보입니다!”
한창 바쁘게 일하는 와중,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면서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천검군 기사 중 하나로, 그는 땀을 뻘뻘 흘리는 채로 다급히 와서 유성원에게 경례하며 보고를 올렸다.
“음? 올림푸스 길드에 무슨 일이 일어났어?”
“아닙니다.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 쪽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뭐? …왜 거기서?”
“모르겠습니다. 일단 귀빈실에 모셔 놓았으니, 얼른 폐하께서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멸망급 성좌인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에 깜짝 놀란 유성원은 기사를 따라 얼른 귀빈실로 향했다.
그곳엔 양복을 입은 흑인 남성이 자리에 앉아서 유성원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오우!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에서 파견 나온 모를란테 부장이라고 해요. 유성원 헌터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
“우리 위대한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 님 아래에 있는 16개의 직속 회사 중 하나입니다. 주요 분야는 군수, 무기 개발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왜 여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희 성좌님께서 당신들에게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하핫!”
호쾌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모를란테 부장. 유쾌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유성원은 또 다른 멸망급의 협조 소식에 당황스러운 듯 잔뜩 경계하면서 살짝 물러났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서 그들의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쪽에선 대체 어떤 생각으로 저희를 지원하시려는 건지요?”
“아~ 그렇게 경계할 정도로 어려운 논리가 아닙니다. 올림푸스 길드는 아시다시피 미국과 붙어 있는 길드입니다. 미국의 국방력에 손을 보태고 있지요. 저희 스카이스크래퍼 블랙 레이더스는 장차 세계를 선도할 기업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경쟁이 될 미국 기업들의 역량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유성원 헌터님을 지원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게다가 20억 인구의 정점이신 분이니~ 시장 경제적으로 봐도 저희가 도울 이유가 충분하지요. 하하하핫. 고금동서 전쟁만큼 좋은 비즈니스도 없고 말이죠.”
속셈을 감출 생각이 없다는 듯 시원하게 까발리는 모를란테 부장이었다.
다만 아직도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가 무엇을 원하는 존재인지는 불명이기에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게 유성원의 처지였다.
여러모로 비밀에 싸여 있는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 일단 아프리카를 개발하고 통일하는 데 열중한 그는 ‘검은 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 흑인 문화권에선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대체 목적이 뭘까? 일단 이 얘기만 들으면 우리가 미국에 타격을 주면 경제 쪽으로 치고 나갈 거라는 소리 같은데…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왜 그러시는지요? 저희 제안에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좀 고려해 볼 게 많아서 말이죠. 세상엔 순수한 선의라는 게 전혀 없지 않습니까?”
“하하핫, 그거 맞는 말이죠.”
“특히나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 님은… 일단 멸망급 스케일로 명명받은 성좌님이신데, 저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별의 수호 기사님이시죠? 이 ‘별’이 뽑은 인간. 하긴 그런 분이니 신중한 건 어쩔 수 없지요. 아무튼 덕분에 이 ‘별’이 저희에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뭐, 상관은 없지만요. 그러면……!”
뭔가 스쳐 가는 말로 기묘한 내용이 들려왔지만, 아무튼 모를란테는 계속해서 자신들이 어째서 미국과 올림푸스 길드를 적대하고 유성원 측을 돕는지에 대해 설득을 계속했기에 유성원은 깊이 생각할 틈이 없었다.
“자, 유성원 헌터님, 역사를 아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1차와 2차 세계 대전이 있던 제국주의 시기, 이곳 아시아와 저희 아프리카는 엄청난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때 기울어졌던 세계의 균형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고, 사실상 백인 중심 시대가 열리고 계속되고 있죠.”
“아… 예.”
“세계 평화니 질서니 경찰국가니 하지만 세계 대전이 끝나고 수십 년간 저희 아프리카 대륙은 어땠습니까? 나라는 분열된 채로 내전과 혼란의 연속이었고, 유성원 헌터님이 있는 아시아 또한 같은 민족끼리 분단되어 버리는 사태까지 일어났으며, 각성자의 시대가 될 때까지 계속 그 냉전 구도가 이어졌죠. 대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서겠죠?”
“정답입니다. 맞습니다! 예! 제국주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겁니다. 자유 경쟁, 자본주의라는 이름과 평화니 뭐니 하는 이상에 덮여진 채로 계속 이어져 온 겁니다. 우리는 각종 수단으로 계속해서 수탈과 약탈을 당했고, 또 이용당하기만 했죠. 이 한국도 마찬가지죠. 국력으로만 치면 분명 선진국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데, 위치가 안 좋아서 힘든 역사가 반복되었잖습니까?”
“…그래서 요점이?”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 님 덕분에 우리는 드디어 그 백인 중심 세계에 더 이상 조종당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문명과 경제가 발전이 되고, 과거 잔악무도한 짓을 했던 유럽, 중동과 맞설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그래도 백 년도 넘는 세월에 걸쳐 기울어졌던 차이를 좁히기란 쉽지 않은 법이니~ 다른 수단을 쓸 생각을 해야겠죠. 그러던 찰나에 유성원 헌터님의 움직임을 감지한 겁니다.”
“…과연, 대충… 이해가 갈 것 같네요.”
일단 한국에서 역사 교육을 받은 만큼 유성원도 쉽게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서 사죄하지 않듯, 지금 유럽 및 서방 국가들도 사실 모든 죄를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다 몰아넣어 버리고 자신들은 마치 깨끗하고 정의로운 척하며 이때까지 식민 지배를 했던 나라에 보상이나 사죄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하하, 역시 식민지 국가 출신답군요. 심지어 당신들은 같은 황인종에게 그걸 당했으니 더더욱 감정이 남다르겠죠. 아무튼 저희 목적은 이제 당신들이 올림푸스 길드를 쓰러뜨리는 걸 도우면서 거기에 살짝 힘을 더해서 미국 쪽에 혼란을 주고 싶은 겁니다.”
“…으음, 성좌님의 목적이 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썩 나쁘진 않군요.”
“그렇습니까?”
그래, 미국의 혼란을 부른다는 게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성좌 마천루의 습격자도 나름 멸망급이다.
같이 손을 잡는다면 분명 일이 엄청 쉬워질 게 분명하기에 이 제안을 거부하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어디에 쓰느냐인데… 유성원은 그것을 고려하기 위해 좀 더 모를란테 부장과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