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결국 가족들과 함께 성좌들을 모으는 일을 하게 된 유성원은 걱정스러웠기에 일을 나가거나 각자 어디 갈 때, 기사들을 한 명씩 대동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어린애냐고 반발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도 이번엔 성좌를 상대하는 일인 만큼 위험하다는 걸 모두 인지하고 있어 군말하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나는 이제…….”
“일단 중심이 될 사람은 사령부에서 일하셔야죠. 너무 오래 비워 두셨어요. 아무리 포탈을 이용해서 돌아다닌다곤 하지만 너무 활약하고 다니면 올림푸스 길드에서도 수상하게 여길걸요?”
“…윽!”
“일단 근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운 건 휴가라고 속이긴 했어요. 수련 겸 다른 업무를 본다고 말이죠. 멸망급을 잡고 난 이후이니 충분히 납득 가능한 범위죠. 고로 반대로 이제는 모습을 여기저기 보여 주면서 상대를 안심시켜야겠죠?”
이렇게 사령부의 자리에 유성원이 다시 앉게 되었고, 본래 그가 해야 할 서류 업무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아영 및 가족들은 어떤 성좌를 노릴지 각종 자료를 보면서 회의로 넘어갔고, 유성원은 자신이 밖으로만 나돈 대가를 치르는 느낌을 받으면서 열심히 서류를 체크해 나갔다.
“…아니, 나도 동시에 성좌님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럼 누가 결재해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교대식으로 해야죠. 그리고 언젠가는 그 자리에 복귀할지 모르잖아요?”
“그, 그래.”
“그리고 참고로 정부 사람들이랑 기업 사람 만나는 임무들이랑 스케줄도 꼭 확인해 주세요. 평양 시찰도 잊지 마시고요. 알았죠?”
“어, 어어…….”
아영이의 똑 부러지는 말에 포기한 유성원은 업무들과 스케줄을 이어받기로 한다.
그래, 성좌들의 일도 중요했지만 사람들 위에 선 이상 이 일도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올라온 일들을 주욱 들여다보니 만만한 게 하나도 없어서 미칠 노릇이었다.
“간만에 책상에 앉아 있으려니 되게 힘드네. 그냥 한 달간 걷는 게 더 편했겠어.”
“저는 오히려 고향에 온 기분이군요.”
“그나저나 복잡한 용어들이 너무 많아서 눈이 돌아 버릴 것 같아. 다른 스킬을 찍을 수 있는 게 있다면 나는 행정이나 사무력을 찍고 싶네.”
“하하하, 기사에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너 있잖아, 너. 아… 야, 이 용어 좀 알려 줘.”
그나마 유청이 옆에서 도와준 덕분에 어찌어찌 서류를 처리할 수 있었다.
지식에 한계가 있는 그에게 이런 정치, 경제 쪽 문서는 정말 쥐약과도 같은 거라서 유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유청이 더 대단한 것은 유성원의 것을 봐주면서 자기 서류를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유성원은 괴로워하면서도 계속해서 일을 해 나갔다.
***
하지만 기묘하게도 유성원이 평양 사령부와 아이언 포트리스에 남아 있자 오히려 좋은 효과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신아영이 남긴 공식 일정들은 대부분 정부와 헌터 협회 사람들, 재벌계 사람들과 만나는 임무들뿐이었는데, 그것만 하는데도 기묘하게 일이 술술 풀리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서울에 있는 고급 호텔에서 얼굴 볼 겸 회의하러 온 것이었는데, 딱히 그가 한 일이 없었음에도 각종 안건들이 자동으로 하이패스된 것이었다.
“보자… 의원님? 전에 말씀 주신 건에 대해서 말인데…….”
“예. 물론입니다, 유성원 헌터님. 그리해야죠. 그, 그냥 한번 던져 본 의견입니다.”
‘뭐야, 이거?’
신아영이 대리로 있을 땐 전선 도시 입장 및 신평양 이동에 대한 규제를 풀어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었고, 그동안 여러 권한과 기술 협조에 대한 압박을 해 왔었는데, 유성원이 그 협상 자리에 나타나자마자 그냥 깨갱 하고 물러나 버린 것이다.
“보자. 장관님은… 그… 신평양시와 전선 도시에 또 국군 배치에 관한 걸 여쭈시러 오셨던데?”
“아닙니다. 저도 혹시 도움이 필요하실까 봐 먼저 제안을 드린 것뿐입니다.”
‘…다 이러네?’
이어서 재벌 총수들과 대통령까지 모두 유성원을 바라보며 놀라거나 아니면 해 왔던 일들에 대해 얼버무리면서 쩔쩔매기에만 바빴다.
그 덕분인지 예상보다 일이 빨리 끝난 유성원은 호텔을 돌아다니면서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다니까…….”
“뭐가 신기하나? 당연한 일인 것을~”
“아, 어르신? 언제 오셨습니까? 협회 쪽에 일 보러 가신다면서요?”
혼자 창밖을 보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어느새 다가온 백가연 어르신이 유성원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자네가 참여한 회의가 있다고 해서, 혹시 사고 안 치나 해서 와 봤지. 다행히 그런 기색은 없어 보이는구먼.”
“예. 골치 아픈 일이고 저도 난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그냥 넘어가더군요.”
“그야 당연하지. 아시아의 제왕이 이제 멸망급까지 때려잡고 복귀해서 눌러앉았는데, 어느 안전이라고 까불겠나? 올림푸스 길드 아니면 불가능이지. 당장 자네가 내일 저 국회의사당 자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곧바로 정부에서 공사를 시작할걸?”
“에이, 설마요.”
“농담이 아닐세. 자네의 위상과 위치가 그만큼 높아졌단 의미야. 멸망급 성좌를 몰아낸 헌터는… 세계에서 오직 ‘자네’뿐이니까 말이지.”
돌아오자마자 일로 뛰어다니는 건 물론 올림푸스 길드 문제에 대해 생각하느라 체감을 제대로 못했지만, 그녀의 말에 이제야 자신의 위상을 이해하게 된 유성원이었다.
‘아시아의 제왕’, 세계의 약 3분의 1을 손에 넣은 남자, 멸망급 성좌를 쳐부순 자. 아시아권에서 이제 그의 말은 법도나 다름없으며 의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아마 이 상태로 10년만 있으면 정말로 달라질 걸세.”
“사실상 제 눈치 보려는 거지만요.”
“그거라도 어딘가? 허허허, 일단 한번 잘 만들어 두면 어느 정도 세월 동안은 견딜 테니 말이지. 한데… 나갔던 일은 잘 마치고 돌아온 건가?”
“아, 그거 말이죠. 예. 시간은 걸렸지만 어찌어찌 잘 풀렸습니다. 그리고…….”
유성원은 백가연 어르신에게 자신은 성좌 진황과 협약을 잘 맺었다고 했고, 그리고 가족들이 각자 흩어져서 성좌들을 모으러 떠났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놀란 얼굴을 하고 유성원을 바라보았다.
“허어, 그런 일이 있었구먼.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나?”
“다들 바쁘고, 그리고… 저도 엄청 바빴거든요. 그래서 말할 틈이 없었죠. 사실 오늘도 저 회의가 하이패스로 안 끝났으면 지금도 저 회의장에서 저 양반들이랑 입씨름하고 있었을걸요?”
“그렇구먼. 음~ 그러면 말이지. 나도 그 일, 도와도 되겠나? 충선이에게도 알리고 말이지.”
“예?”
“뭘 그리 놀라나? 자네 일을 돕는 게 우리 일인데 말이야. 허허허. 성좌라~ 따르는 건 그렇다 쳐도 거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백가연 어르신의 말에 유성원은 한 번 더 놀랐다.
평생 성좌를 따르지 않던 분이 갑자기 성좌를 따르니 어쩌니 하는 것부터가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듯 굳은 의지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야.”
“아니지. 사람이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 하는 법일세. 게다가 자네가 지금 하는 일은 이 ‘별’을 위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도와야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지금 하나의 성좌라도 더 모아야 할 판 아닌가? 그럼 얌전히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게.”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 할 일이죠.”
어르신의 말대로 올림푸스 길드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성좌가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
또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서 성좌 영원한 분노와 싸울 경우까지 대비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긴 했다.
그렇기에 유성원은 당연하다는 듯 승낙했다.
“솔직하니 좋구먼.”
“어르신 뜻을 어찌 말리겠습니까? 몸조심하시고, 사기 계약 당하지 마세요.”
“이 사람아, 엄연히 난 헌터 아카데미아에서……!”
한참 분위기 좋게 이야기하던 차에 갑자기 표정이 변하면서 경계심을 높이는 백가연 어르신. 그녀의 표정을 감지하자마자 유성원은 눈을 돌려서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엔 낯선 이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단 그들은 어디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전신을 완전하게 가린 갑옷과 투구, 망토를 걸친 이들로, 갑옷은 묘하게도 올리브색과 갈색으로 장식되었으며 화려한 청색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척 보아도 느껴지는 예리한 기운에서 보통 사람이나 헌터는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아직 그 정체에 대해 감을 못 잡은 유성원은 백가연 어르신에게 그들의 정체를 물었다.
“누구죠? 저 인간들은? 어디 기사단 같은 건가요?”
“…유피테르 가드(Jupiter Guard)일세. 성좌 제우스가 사도에게 보내는 친위대이자 경호대이지. 하나하나가 S급 헌터임은 물론 전원에게 성좌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무구를 지급한다고 하지.”
“그렇다는 건… 엄청난 거물이 다가온다는 거네요.”
“보고 못 받았나? 한국에 새로이 들어온 올림푸스 길드 사람에 대해 말이야. 아니, 올림푸스 길드한테 엿 먹인다는 사람이 지금 한국에 있는 담당을 몰라?”
“아, 받았기야 받았는데… 제가 너무 바빠서……. 그러니까… ‘뤼카이온?’”
“예. 그게 제 이름입니다.”
유성원이 그 이름을 언급하자, 유피테르 가드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며 대답했다.
진짜 순금을 녹여서 바른 듯 찬란하게 빛나면서 찰랑거리는 금발을 가진 장신의 미남. 와인 빛의 양복을 입고, 어디 호스트라도 되는 듯 피어싱에다가 금으로 된 목걸이와 보석이 붙은 반지를 잔뜩 끼고 있는 이 남자는 나름 미소 지으면서 다가왔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부감이 드는 자였다.
‘…제우스라는 성좌는 대체 무슨 취향인 거지?’
“정식으로 소개드리지요. 올림푸스 길드의 성좌 제우스의 사도, 뤼카이온입니다. 멸망급 성좌로부터 ‘별’을 구원하신 위대한 용사이신 유성원 님께서 이곳에 오셨다고 해서 인사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아, 예. 그… 반갑습니다.”
“제가 한국 담당이 된 지는 오래된 것 같은데… 이제야 뵙게 되었네요. 찾아가 보려고 연락도 드렸지만 늘 밖에 계셔서 말이죠.”
“뭐,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성좌들의 싸움에 이리저리 치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껄끄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유성원은 올림푸스 길드와 ‘지금은’ 척질 생각이 없기 때문에 노력해서 사무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소개와 명함 교환 등등을 마치고 헤어졌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느낌이 남은 듯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유성원은 표정을 찡그린 채로 그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기분 나쁜 놈이네요… 편견은 좋지 않지만, 대충 시설의 양아치 같은 놈들에게서 나는 그런 냄새가 나던데… 성좌 제우스의 사도라니, 참 기묘하네요.”
“사전 정보를 모르고 거기까지 느낀 걸 보면 자네 후각도… 보통이 아닌 것 같구먼.”
“음? 저놈에게 뭐 있습니까?”
“모두 쉬쉬하는 이야기라서 잘 입을 안 열긴 하지만, 그래도 자네급 정도 되면 오히려 알아야 정상이겠지. 뤼카이온, 성좌 제우스의 사도이긴 한데… 그의 좀 거시기한 면을 담당하는 사도일세.”
“거시기한 면요?”
“좀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거시기’라고 해야 할까?”
“제우스의… 거시기? 엑?”
몇 번이나 돌아서 간 끝에야 유성원은 그녀가 말하는 제우스의 거시기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었고, 직접 입에 담아내진 못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듯 어르신을 바라보자 백가연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뤼카이온. 성좌 제우스의 사도이자, 흔히 그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인… ‘씨를 뿌리는 자’로서의 면을 상징하는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