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필요하신 게 있다면 저희가 직접 공수도 해 드릴 거고… 아! 아니면 그… 밤 시중을 들 아이들을 보내 드리는 건 어떨는지요? 취향만 말씀해 주시면…….”
“저기, 진정하시죠. 저 이래 보여도 엄연히 가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말씀하셔도 저는 ‘일’을 위해서 온 거지,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계약서 상향을 하실 거면 새로 보내 주시면 되니, 저는 일단 본래 있던 저택에 가 있겠습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한 성좌 바유의 브라만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렇게 새로이 공수한 차량을 타고 유성원과 레그혼은 그 자리를 떠났고, 운전을 하던 레그혼은 자신들만 있는 것을 확인하자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에 감탄하며 웃기 시작했다.
“계획이라곤 하지만 정말 가관이네. 하하핫, 이래서 인간들이 서로를 놀리고 기만하는 것을 좋아하나 보군.”
“본의는 아니지만 말이지. 아무튼 절박하게 만들긴 성공한 것 같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다른 곳에선 거래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잖아. 그거 연출이라도 해야 하나?”
“상관없지. 어차피 브라만님들의 상황을 대략 보니 기술이나 물건 같은 건 크샤트리아나 바이샤에게 맡겨 두고 자신들은 성좌님만 바라봐서 아무 문제없어. 지금까지 알아봤잖아.”
현재 인도의 계급은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찬달라의 5개로 나누어진 카스트 제도로, 거주구부터 분리돼서 살고 있고 생활양식도 전부 달랐다.
그래서 늘 신전에서만 거주하는 것이 브라만이었는데, 안에는 문명의 이기나 전자 기기 같은 도구는 일절 없었고, 마정석을 사용한 마법 물품 같은 것들이 생활의 주를 이루고 있다.
그나마 브라만 계급의 조리사가 가스레인지, 오븐, 냉장고 같은 기계들을 쓰고 있었지만 첨단 기기나 문명의 이기 같은 것은 최대한 배제하는 느낌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지금까지 든든하게 승리를 챙겨 주던 붉은 왕자님이 다른 데 가 버린다니까 우왕좌왕하는 암컷의 모습이 참 볼만하던걸?”
“그야 당연하지. 강한 크샤트리아가 없으면 또 성좌 바유의 도박질에 다시 잃을 재산이니 말이야.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더군.”
“그러면 차라리 다른 성좌를 섬기면 되지 않나?”
“성좌마다 가치관이 다르고, 성좌 바유의 브라만이었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도 브라만 취급을 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인지라 말이지.”
“아, 그렇군.”
“그래서… 과거 인도에 성좌의 시대가 열린 뒤에는 엄청난 혼란이 있었다고 하더라.”
같은 카스트 제도를 사용하지만 성좌의 생각과 의향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기에 기존의 카스트 제도는 싹 무너지고, 다시 브라만부터 찬달라까지 재정립해 버린 것이었다.
과거 브라만 계급이었던 남자가 갑자기 찬달라가 되고, 어제까지 찬달라였던 여자가 오늘 갑자기 브라만 계급이 되는 등등 큰 혼란이 있었지만 결국 제도는 같은 것이고, 신적 존재가 임명한 것이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정립이 끝냈었다.
“덤으로 피바람이 엄청 불었지.”
“그거… 아쉽군. 멋진 파티였을 텐데… 젠장!”
“…너는 진짜…….”
강화된 카스트 제도. 거기에 하루아침에 신분이 역전되고 재정립되니 기존에 낮은 계급이었던 자는 그동안 받은 굴욕을 풀기 위해서, 또 기존에 높은 계급이었던 자는 낮은 계급이 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서로 칼을 들고 저항하고 싸워 대면서 큰 분쟁이 일어났었다.
“그렇게 바뀌고 난 뒤로 수십 년.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로 고착화되었지. 아무튼 여기 사정은 둘째 치고, 우리 계획엔 지장이 없으니 문제없겠지.”
“저 안달 난 모습을 보면 확실하지.”
자신들이 접근하는 게 아니라 상대 쪽에서 오게 한다는 방법.
지금 유성원과 다시 계약을 이어 나가지 않으면 결국 성좌 바유의 꼬라박는 도박에 성좌의 세력은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용해서 유성원 측에게 유리한 계약 혹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었고,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근데 자꾸 생각이 바뀌려고 해.”
“왜?”
“여기 꼴이… 내 생각 이상으로 엉망진창이라서 말이지. 뭔가… 보기 괴로워. 안 보려고 최대한 노력했는데. 하아~”
한숨을 쉬며 차의 천장을 바라보는 유성원. 아무리 외면하려고 애써도 여기저기 다닐 때나 하늘에서 문득 도시 전경이 눈에 들어오거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어오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이 인도의 현실. 그래, 참혹하다.
과거 인간들이 스스로 카스트 제도로 나누었을 때보다 더 잔혹했다.
신적 존재인 성좌가 나누어 놓은 영역과 생활은 물론 인간들 사이에서 그것으로 인한 차별과 괴롭힘은 사회의 정글보다 더 가혹했다.
‘…하아아아, 내가 인도주의자가 되려는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심해.’
그나마 성좌의 시대 이전에는 국가가 직접 바꾸려고 노력했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카스트 제도의 의식이 흐릿해져서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브라만과 크샤트리아는 진짜로 성좌에게 선택을 받아 각성한 자들이다.
신화가 아득히 머나먼 상상의 이야기로 사라져도 카스트 제도는 절대적 진리였는데, 지금 이 시대의 진짜 신적 존재에게 선택을 받은 사실은 과연 얼마의 세월이 지나야 바래질 것인가?
‘지금 새롭게 자리 잡은 카스트 제도는… 아마 수백 년… 수천 년… 아니, 어쩌면 인류 멸망까지 가겠지?’
좋은 습관은 자리 잡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나쁜 습관은 아주 쉽게 자리 잡는다.
남을 차별해서 쉽게 이익을 얻는 카스트 제도는 이미 수십 년 만에 절대적 진리로 자리 잡았고, 이 세계에서 모든 성좌가 사라지더라도 이 사회에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겠는가?
‘…머릿속에서 찬달라와 수드라 사람들의 모습이 떠나질 않아.’
천막을 친 빈민가에서 사는 찬달라, 나무로 된 허름한 곳에서 사는 수드라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뇌리를 맴돌았다.
자신이 아까 전 머물던 저택과는 천지 차이인 모습. 신적 존재가 재정립한 질서 속에 그들은 예전보다 더 잔혹하고 철저하게 소외와 차별, 가혹한 노동 등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거주하는 주택뿐만 아니라 식사, 교육, 의료 모두 가혹할 정도로 차별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맛이 쓰고 인상이 절로 써졌다.
‘…하도 기사도, 기사도 거리니 나도 물들었나? 젠장…….’
“왜 그러쇼? 일이 잘 풀렸다면서?”
“어, 혹시나 하는 변수를 생각하고 있었어.”
“정말로?”
“마음대로 생각해. 아무튼 나 잠깐 눈 좀 붙인다.”
그렇게 유성원은 눈을 감고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사라져 가던 카스트 제도가 성좌들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부활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고, 그냥 내버려 두고 인도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막상 실상을 살펴보니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성좌의 장난감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모습. 신의 인정이라면서 더 가혹하게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괴롭히는 모습, 그리고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 현실.
‘하아~ 어떻게 해야 좋을까?’
모자란 지식을 쥐어짜서 이리저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는 유성원이었다.
성좌를 하나만 남기고 모든 세력을 없애서 인도를 통일한 다음 카스트 제도를 폐지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고 와서 인도를 밀어 버린다?
오히려 외적의 침입으로 인해서 신성 전쟁이나 하던 도박쟁이 성좌들이 하나로 뭉쳐서 대항할 것이며, 그로 인한 피해와 시간 소모는 감당할 수 없을 레벨로 뻗어 나가고 자칫하면 세계대전까지 일어날 수 있다.
‘하아아~ 그럼 답이… 아!’
도저히 아무 방안이 없다고 생각하던 중 무언가 확! 하고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나라 대한민국의 역사. 왕정 시대였던 조선 시대에도 당연히 신분제는 존재했고, 양반, 중인, 평민, 노비 및 천민으로 나뉘어서 당연히 그에 따른 차별을 받았다.
약 500년을 내려온 그 신분제는 국권을 빼앗긴 일제 강점기 때도 이어졌고, 조금씩 약화되면서 나라에서도 노력했지만 결국 그것을 부순 것은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한국전쟁이었다.
‘…….’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고, 가장 아래에서부터 가장 위까지 밀고 당기는 거대한 싸움이 휩쓸고 지나가며 피난 및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그곳에서 더 이상 양반, 상놈, 천것, 백정이라는 경계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절레절레.
그렇다면 그것을 그대로 인도에 적용한다면? 이라는 생각에 다다랐을 때 유성원은 급히 부인하기 위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앞으로 적어도 수백 년 가까이 이 카스트 제도에 고통받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비록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지금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하더라도 대체 무슨 방법으로… 는… 방법이… 있구나. 젠장! 이런 건 금방 떠오른다니까!’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선 성좌 종말자에 대한 지식이 흘러 들어와서 조각을 맞추었다.
그래, 동남아 전선에 성좌 종말자의 군대를 막아 내는 곳이 있다.
그리고 그곳이 무너지면 동남아의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중국 공산당과 인도 쪽으로 몰려갈 것이다.
“…야, 레그혼.”
“눈 붙인다며? 왜 끙끙대다가 일어나서 날 불러?”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누군가를 희생으로 밀어 넣어 파괴해도 괜찮을까?”
“그딴 거 알게 뭐야. 하지만 ‘이 목사’가 한 말은 있었지. 원래 선지자들은 다소의 희생이 있어도 그 결말에 밝은 미래와 희망이 있다면 기꺼이 사람들을 이끕니다.”
인간을 요리해서 신에게 바친 이 목사에게서 나온 말이기에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말에 끌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인구 약 10억. 단순 비율로 카스트 제도의 인구를 따져도 4억이 고통받는 상황.
이것을 끝내기 위해서 과연 10억 인구 모두가 고통받도록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평화 속에서 스스로 자정되도록 해야 할까?
‘이미 계획대로 유리하게 잡혀 있어. 성좌 바유를 업고 그대로 일을 진행해도 괜찮고, 다소 견제를 받아도 문제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허허허, 세상일이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지.]
“이 목사?”
고민하는 유성원의 옆에 난데없이 이 목사가 불쑥 나타났다.
일단 그 또한 유성원의 휘하이기에 기사단의 성소를 들락거릴 수 있어 포탈을 열고 몰래 나타난 것이리라.
다만 명령 없이 나타난 게 문제였지만, 이 인간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놀란 유성원은 아랑곳 않고 자신의 할 말을 계속해 나갔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때론 더 욕심이 나거나, 혹은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많아서 고치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이 색이 아닌 것 같아 하면서 덧칠하고, 또 아닌 것 같아 하면서 덧칠하고, 지우려고 하지만 오히려 색이 번지거나 흐트러지고. 그렇게 결국 자신이 원하던 그림이 아니게 되는 결과가 나오지.]
“…그림… 인가?”
[그래.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나? 이 그림을……. 고치면 고칠수록 남은 건 멋대로 섞이고, 섞인 색들에 의해서 검은색으로 뒤덮이고, 종이는 찢어지고 말지.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겠나? 새로운 캔버스에 새롭게 그리는 거지.]
“새로운 캔버스… 그러면… 망한 그림은…….”
[손으로 찢어 버려야지.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손과 명성을 더럽히지 않고 그 일을 해 줄 악(惡)의 신도 존재하지 않는가?]
성좌 종말자에 대해 돌려서 말하는 이 목사였다.
그는 유성원의 이 계획이 마음에 든 건지 웃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유성원은 혈액 순환이 안 되는지 얼굴색이 어두워지고,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게 머리가 빠질 지경이라 짜증이 나고 있었다.
그 고민은 차량이 자신들이 묵는 저택까지 가는 동안 계속되었고, 차가 멈춘 순간 유성원은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