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다음 날, 전선 도시 북문.
이제 예전과는 권력 레벨이 다른 만큼 유성원의 지시 하나에 동원될 수 있는 전력의 규모도 남달랐다.
일단 대의명분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성좌 도살왕의 토벌이기도 했고, 동아시아에는 유성원의 심기를 거스를 자가 없었기에 한국, 중국의 전력을 동시에 지원받을 수 있었으며, 러시아 정부도 기꺼이 그에게 협력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상, 공중, 해양을 안 가리고 공세 준비를 마친 휘황찬란한 군대.
이 모든 이들이 자신의 명령 하나에 다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남다른 유성원이었다.
“와아아… 현실감이 전혀 와닿질 않네. 그나저나 협회 헌터들도 엄청 왔네? 거의 2천 명?”
“주변국이 안정화되고, 또 위에 사령 군단으로 벽이 둘러쳐진 덕분에 한국 내부는 거의 안전해져서 더 돌 던전도 없다네. 가끔 나오는 야생 던전은 포탈 감지기에 뜨는 걸 보고 가면 될 정도이니 말이지.”
“그렇군요. 오위에게서도 연락이 왔고… 러시아 정부에서는 성좌 도살왕 소속 스캐빈저들을 탐색 및 사냥하기 시작해서 정보를 보내 준다고 했고… 아무튼 성좌 도살왕의 코어 던전에 가기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좋아. 가 보자고……!”
뚜둑!
손을 풀고서 유성원은 자신과 기사들을 기다리는 수송기에 탑승하였다.
이번 전쟁은 섬멸전으로 올라가면서 성좌 도살왕의 부하들이 살던 언더시티와 던전을 하위 헌터들의 힘으로 쭉쭉 밀어낸 다음 성좌 도살왕의 코어 던전에 갔을 때 유성원과 기사들이 돌입하는 전략이었다.
설사 코어 던전 공략에 실패하더라도 외부에서 철저하게 때려 부숴 놓고 모조리 추적해서 추종자들을 없애 두면 적어도 몇 년간은 다시는 설치지 못하리라.
“그럼 전군 출진! 다들 몸조심하고! 성좌 도살왕의 부하들은 죄다 게릴라 전술에 능하니까 적 수색 및 덫, 부비트랩 탐지까지 철저히 하면서 이동한다. 우리의 목표는 기존 대한민국 영역을 되찾는 거니까 그 이상은 무리하지 말자! 이상!”
전군에 명령을 내리자 전차와 트레일러들이 각자 맡은 영역으로 일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유성원은 그대로 수송기에 올라타고 진군을 시작, 중앙 통제실에서 던전들의 상태를 보면서 혹시 모를 이변에 대비하고, 또 거물이나 사도급이 나오면 언제든 출동할 수 있게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실전인 애들이 많으니까… 확실히 일러뒀죠?”
“걱정 말게. 아주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말했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다치거나 죽을 테지만 말이야.”
“예, 뭐… 그건 어쩔 수 없죠.”
“생각 외로 태연하구먼.”
“아무리 대단해도 주사위가… 1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걸요. 누구나 살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할 때가 있는 거죠. 그게 쟤네한테는… 오늘일 수도 있구요.”
성좌 66천마와의 ‘게임’에서 절실히 느꼈다.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 가도 난감한 상황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막강한 기사들이라고 할지라도 주사위 1이 뜨면 실수한다는 것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 무기를 들고 서로를 해하려는 이상 누군가는 죽거나 다치는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아무튼 출진은 했는데… 보자.”
[여기는 23번 팀! 도살왕의 악마와 교전 시작했습니다!]
[선행 부대, D급 던전에 돌입. 공략을 시작.]
[제3번 팀, 폐허가 된 언더시티 진입. 수색 절차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스캐빈저 발견! 추적합니다!]
출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곳곳에서 전황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다.
아무렇지 않게 전쟁은 시작되었고, 던전에 돌입한 헌터들의 보고와 클리어 보고, 중국 쪽에서 진입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에서 시베리아로 도망친 상위급 스캐빈저들이 있다는 정보까지 들어왔다.
“으음… 박숙자를 비롯해서 주요 성좌 도살왕계 스캐빈저들은 모두 러시아 시베리아 쪽을 떠돌며 약탈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쪽으로 누군가를 보낼까요?”
“아니. 코어 던전에 들어가면 자기가 받은 축복이랑 힘 잃을까 두려워서 부리나케 올걸?”
“그렇죠.”
“그보다 이 목사는?”
“그 정보는 아직입니다. 도저히 종적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가장 무섭고 두려운 놈이 행방불명이라고 하니 유성원은 불안해졌다.
일전에 만난 이후 성좌 용봉왕 문제 때문에 한동안 보지를 못했는데, 아마 그 인간 성격상 지금 어디에 짱박혀서 또 이상한 연구를 하며 자신을 조질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리라.
“그 인간이 제일 무섭긴 한데… 뭐, 조만간 만나겠지. 자신이 모시는 성좌의 코어 던전이 무너지는데 가만히 있을 놈이 있을까?”
“그렇긴 하죠.”
그렇게 생각한 유성원은 계속해서 작전 보고를 받고 지령을 내리면서 전술적 성과와 현황을 파악해 나갔다.
***
시베리아 동토, 박숙자의 야영지.
그리고 유성원의 원정 소식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 목사에게 전해졌다.
공식 채널이나 통신이 아니라 스캐빈저 간의 통신과 혈마법들을 거치느라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래도 소식이 닿은 것 자체가 다행인 일이었다.
물론 그 내용은 최악이었지만 말이다.
“뭐라고? 우리 코어 던전을 향해서 그놈이 진군을? 규모는? 숫자는? 뭐? 수만 단위가 넘어가고 중국에서까지 진격? 제정신이 아니네? 아시아의 제왕 새끼, 왜 갑자기 우리한테 지랄이야?”
“그야… 만만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요? 애초에 우리가 대한민국 제1의 적이잖아요.”
“성좌를 둘… 아니, 청룡까지 치면 셋이나 담갔으니 자신감이 붙을 만하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대규모 공격을 한 개인이 해 버릴 수 있다고? 젠장!”
“이미 우리랑 투닥거릴 때의 놈이 아니에요. 아시아의 제왕이라니까요.”
유성원의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 당황하는 야영지의 스캐빈저들.
유성원이 이미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어 차원이 다른 공세를 해 옴에 따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 왔다.
가장 무서운 건 역시 놈이 코어 던전으로 향할 것 같다는 정보였는데, 성좌 도살왕이 사라지는 건 최악 중의 최악의 사태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성좌 도살왕 님의 축복 없으면 나는 그저 활이랑 덫밖에 못 쓰는 잉여 쓰레기인데……. 아니, 그보다 누님은 축복 없으면 죽는 거 아닙니까? 반악마이신데…….”
“그게 문제야. 이런 젠장… 아니, 왜 하필 이 시대에 그런 미친 새끼가 등장한 거래?”
“알 리가 없죠. 그보다 이 목사 양반은?”
“열심히 먹은 다음 쉬고 있지. 먹고 소화시키고, 먹고 소화시키고. 사도님이 강해지려면 결국 인간 섭취가 답이잖아. 근데 문제는… 그 먹고 소화시키는 텀이 길다는 거지. 아무튼 깨워야겠다.”
한숨을 쉰 박숙자는 이 목사를 깨우러 그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나 알차게 먹은 건지 배가 산처럼 부풀어 오른 한우 수인 ‘이 목사’가 땅에 널브러진 채로 코를 드르렁 골며 자는 중이었다.
박숙자는 그런 그를 악마화된 팔로 후려쳐서 깨웠고, 머리를 긁적이며 이 목사가 일어났다.
[무으으으… 벌써 내가 말한 시간인가? 또 먹어야 하는 시간이 왔군. 아직 배에 잔뜩 남았는데 말이지.]
“아니, 비상사태라서 깨웠어. 지금 유성원 그 새끼가 군대를 이끌고 죽죽 밀고 오기 시작했어. 중국, 러시아와도 손잡고, 여차하면 일본의 화력 지원을 받을 준비까지 다 끝내고 수만 단위로 밀고 들어온다더군.”
[드디어… 우리에게 오는 건가? 무으으으… 생각보다 빠르군.]
“그래서 어쩔 거지?”
[곤란하군. 시간이… 아직 많이 모자라. 아직 족히… 200… 아니, 300명은 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
깨어난 이 목사의 주변으로는 열심히 요리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부서진 뼛조각, 핏방울, 그리고 멍한 눈으로 다음 조리 시간을 기다리는 트리토니아스의 복제들과 먹다 남은 것 같은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우윳빛 국물이 담긴 솥, 튀김기, 구이용 꼬챙이 등등 다양한 흔적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힘과 더 먹어야 할 것들을 가늠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모자랐다.
“그냥 힘만으로도 모자라긴 하지만, 당신… 전투 경험은 거의 없잖아. 반면 그놈은 전투의 화신이라고? 성좌만 둘을 전투로 쓰러뜨린 미친놈이란 말이야. 그거 감당할 수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감당이 어렵다. 시간이 모자라. 신중하던 놈이 갑자기 속도전을 펼칠 줄은 몰랐군.]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어쩌긴. 시간을 끌어야지.]
“시간을 어떻게 끌 건데? 지금 아주 그냥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고 있고, 언더시티들은 싹 초토화되고 막 지하까지 끄집어내고 있다던데! 아주 철저하게 우릴 없앨 생각인 것 같아.”
정화 작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철저하게 짓밟으면서 진군하는 유성원의 군대. 지상, 공중은 물론이고 4개국 정부의 협력을 받아서 정보전에서부터 앞서면서 철저하게 때려잡고 있었다.
던전은 클리어되고, 포탈 감지 장치가 설치되고, 길도 새로이 내고, 언더 시티는 모두 철거되고, 지하에 숨을 만한 공간이 있는지 없는지 스캔까지 해 가며 스캐빈저들을 초토화시키는 중이었다.
“개새끼, 돈을 악착같이 모으더만 이러려고……. 아무튼 시간이 부족해. 그 새끼들, 코어 던전에서 막을 자신 있어?”
[아직은 없다. 시간이 있어야 할 텐데… 으음…….]
“그럼 어떻게 하지?”
[으음! 좋은 수가 하나 생각났다.]
탁! 하고 손뼉을 친 이 목사는 자신의 인벤토리 안에서 한 장의 종이와 펜, 잉크를 꺼내더니 이리저리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곱게 접은 다음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에다 집어넣고 인장까지 녹여 찍어서 봉인한 뒤 붉은 천으로 감싸서 고급스럽게 장식된 상자에 꼬옥 넣어서는 박숙자에게 맡기며 말했다.
[이걸 놈에게 보내라. 투항한다는 식으로 가져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다. 대충 애들 중에…….]
“그럼 내가 갈게. 나 그 유성원이라는 녀석과 만날 일도 있거든.”
보통은 적진에 홀로 서찰을 가지고 가는 일을 반가워할 리가 없는데, 박숙자는 이 목사의 서찰을 자신의 인벤토리에 넣고는 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 번 더 확인하듯 이 목사에게 물었다.
“근데 안전한 거 확실하지?”
[성좌님의 이름에 맹세할 수 있다. 그… 뭐더라? ‘기사도’였나? 그것에 구애되는 놈이니 분명히 먹힐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아니, 내가 ‘코어 던전’으로 이동했다가 나가서 직접 너를 보내 주도록 하지. 그게 더 빠르겠군.]
“그냥 기왕 옮기는 거 거기로 싹 다 한 번에 옮기자. 어차피 성좌 도살왕 님 끝장나면 우리도 끝장인데~”
그렇게 박숙자와 이 목사는 야영지를 접고서 곧바로 코어 던전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을 통해 순식간에 러시아에서 북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 목사는 다시 트리토니아스의 복제들을 조리해서 먹기 시작했고, 박숙자는 저 멀리 공중에 떠 있는 수십 대의 수송기와 지상을 메운 유성원의 군대를 바라보며 긴장했는지 중얼거렸다.
“와, 썩을 놈. 진짜 단단히 준비해 왔네. 후우우~”
[이제라도 생각이 바뀌었으면 다른 녀석에게 맡기든가? 아니면 몬스터에게 맡겨도 된다.]
“아니, 괜찮아. 걱정 마. 나도 엄연히 밑바닥에서 올라온 스캐빈저인데 이것도 못할까 봐. 그럼 다녀올게. 아니면… 못 만날 수도 있겠지만~ 하핫.”
그렇게 웃으면서 인사를 한 박숙자는 유성원의 군대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이 목사는 다시 식사를 해서 힘을 키울 생각으로 트리토니아스의 복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열심히 먹고, 또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