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그 친구 귀차니즘을 생각해 볼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올림푸스와 교섭에 들어갔다곤 했지만, 저희도 이렇게 빨리 승낙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한국과 일본에게서는 거액을 받아야만 일하던 인간인 유성원이 올림푸스 길드와 회담 한 번 가졌다고 해서 엄청난 위험성을 가진 코어 던전을 가는 것이 더 이상한 현실이었기에 다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건 클리어가 돼도 문제, 안 돼도 문제군요.”
“성공하면 일본은 악 성향 성좌가 없는 청정 지역이 되고, 실패하면 SS급 헌터를 잃게 되고…….”
“좀 상의라도 하고 갈 것이지. 아니면 차라리 도살왕 쪽을 가든가……!”
“그래도 가능하면 이기는 쪽을 기원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지면 지는 대로 귀한 SS급 헌터가 사라지는 거잖습니까?”
그래, 비록 개X끼라도 우리 개X끼가 더 낫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일본만 해도 S급 헌터를 구하기 위해 인류를 배신했을 정도인데, 그 정도로 SS급 헌터의 가치는 엄청 높으니 실패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성공하면 일본만 이익을 보는데…….”
“그래도 코어 던전 클리어 헌터라는 이름값은 생기니 그것만으로도 존재감이 다르죠. 더구나 성좌 66천마급이면…….”
“그러면 과연 일 한번 시키려면 얼마나 지불해야 할까요?”
그 순간, 말문이 완전히 막혀 버렸다.
지금도 백억 단위의 돈을 지불해야 움직이는 걸로 아는데, 이 이상으로 위상이 높아지면 유성원 고용비로 말도 안 되는 액수가 깨질 것이다.
계산기를 두드려 볼 수준을 넘어서게 되는 만큼 이제는 고용했다가는 정말 국가 파산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레벨이었다.
“고용할 일이 없게 하는 게 최선이겠네요. 다들… 일이나 하러 갑시다.”
“그가 들어간 덕분에 목포 전선이 여유로워진 만큼 투입된 장병과 헌터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동안 발목 잡혔던 C급 던전 독점 문제에 관한 것은 새로운 던전 관리법의 유예 기간이 끝났음으로 본격적으로 시행이 될 테니 각별히 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다들 주의를…….”
“아, 아카데미에서도 지금 개선안이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신분제 비슷했던 등급별 클래스를 폐지하는 한편 성좌뿐만 아니라 헌터 기본 장비와 무장에 대한 교육도 다시 추가하고, 스캐빈저들을 배제하기 위한 각종 방안을 모색…….”
그렇게 코어 던전 공략에 대한 논의가 끝나자, 비상 회의는 다시 본격적으로 각종 개선안과 정책들을 논의해 나갔다.
원래 같았으면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지금까지 유성원이 행했던 모든 업적과 전선 도시의 부흥, 거기에 코어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오면 높아질 위상을 생각하면 차라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나라를 고쳐 가는 게 훨씬 더 편하다는 걸 깨달은 그들이었다.
***
‘성좌 66천마’의 코어 던전 내부.
하염없이 고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유성원은 말들을 올리고 ‘성좌 66천마’의 화신과의 게임을 시작했다.
세세한 룰 같은 건 각성자의 상태창에서 설명이 나오고 능력치와 스킬 같은 것도 정리해 주었기에 유성원은 말을 옮겨 공격과 방어 스킬을 선언하고 주사위를 굴리는 것이 전부였다.
“주사위가… 4. 그러니까 데미지가 21로 용인 기사 크록베인이 별의 사령 41231번을 처치. 이걸로 턴 종료.”
“훌륭해, 훌륭해. 좋아, 그러면 내 차례. 나는 별의 사령 41232번을 배치하고, 별의 사령 41211번 말들을 전진시키고 들고 있던 활로 원거리 공격을 하지. 주사위가… 오, 운이 좋군. 8이야. 적중했군. 그리고 데미지는 3이군. 또 다음 별의 사령 41212번으로 같은 공격. 이건… 오! 10. 크리티컬이군. 데미지는 6일세. 그리고…….”
‘하나하나 피해는 크지 않지만, 누적되니까 이거 골치가 상당히…….’
기묘하게도 성좌 66천마가 쓰는 말들은 생각보다 크게 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숫자가 엄청났고, 전투가 주사위와 주사위로 이루어지다 보니 아무리 강맹한 크록베인이나 기사들과 천검군 병사들에게도 데미지가 누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걸 대체… 어떻게 이겨야 하는 거지? 진짜 이걸 다 이겨야 하나?’
선전을 하고 있긴 했지만 주변에 먹구름을 이루고 있는 영체들을 보며 유성원은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밖에서 무한의 병력을 쏟아 내는 것처럼 성좌 66천마의 이 코어 던전 전투 방식은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끝없이 주사위를 굴리고, 또 굴리고, 때론 10이 떠서 큰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1이 뜰 때는 아무리 크록베인이더라도 별의 사령 하나 잡지 못하고 턴을 넘길 때도 있었다.
‘…게다가 크록베인이 누적 데미지를 많이 받기도 하고… 물론 천검군 병사들을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버티긴 하지만… 큭!’
“…이걸로 나는 턴 종료. 자네 턴일세.”
“으으음…….”
마음대로 슉슉 말을 다루는 성좌 66천마의 화신과 다르게 유성원은 자신의 차례가 왔지만 쉽사리 턴을 진행할 수 없었다.
상대에 비하면 적은 숫자의 말이기도 하고 한 턴, 한 턴 실수 없이 최대한 좋은 수를 찾아야 했기에 생각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원체 지략이 뛰어난 것도 아닌 만큼 계산도 인벤토리에서 종이를 꺼내 거기다 끄적이면서 할 정도였지만, 추하든 말든 소중한 기사들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끄으으으으응~”
“한 턴, 한 턴이 오래 걸리는군. 그래서야 어느 세월에 이길 생각인가? 네 수명은 한 천 년쯤 되는 겐가?”
“저기, 말씀은 안 하시면 안 되나요?”
“아니, 나도 가만히 있기 그래서 떠드는 것뿐이야. 애초에 이곳은 내 영역인데 혼잣말도 못하나? 그리고 말로 하는 방해 또한 상대를 굴복시키는 수단이라서 말이지.”
한 턴, 한 턴 오래 걸리는 유성원에게 또 하나의 고난은 바로 자신이 계산하고 머리 굴리는 데 계속 방해를 하는 성좌 66천마의 속삭임이었다.
그만하라고 해도 그만두지 않으니, 정신적 고통을 가중시키기 위한 일종의 던전 패턴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최대한 무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는 계속해서 필드 위의 숫자와 주사위 확률과 씨름을 해 나갔다.
“끄으으응… 저기서 +5가 나와야 하는데 이걸 확률로 하면… 60퍼센트니까 다른 수를 쓰는 거랑… 끄으응…….”
“참 신기한 인간이군. 보통 이곳에 들어올 정도면 나름 지혜와 무용을 모두 겸비하고 있어야 할 텐데…….”
“각성 빼곤 아무것도 없는 몸이라서요. 아, 잠깐만. 이거 맞나? +6에서 그러니까 스킬 디버프로 –1이고, 또 장거리 페널티로 –1이고, 또… 또… 아! 다시!”
“참 열심히 발버둥 치는군. 하나 그렇게 한 수, 한 수 열심히 확률 계산을 한다고 해도 이 ‘주사위’로 나오는 눈의 결과는 굴리지 않는 한 알 수 없지. 그리고~ 그 굴린 눈의 결과는 굴리는 사람의 기대를 배반하는 일이 더 많고 말이지. 사는 것도 결국 같지.”
“…….”
“물론 재능과 지혜를 겸비한 친구라면 이 10면체 주사위를 멋대로 3면체로 바꾸고 거기다가 8, 9, 10으로 바꾸는 등등… 불합리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고칠 수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오히려 20면체, 30면체를 들고 거기서 30을 띄우는 것만큼 힘든 삶을 살지.”
악마의 속삭임 같은 성좌 66천마의 말. 인간의 삶은 모든 순간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지만 그 선택과 결정이 언제나 생각한 대로, 또 원하는 대로 딱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최선의 선택을 해도 주사위가 1이 뜨면 최악의 결과가 나타나고, 최악은 그대로 최악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생명체는 모두 부족한 삶을 살지. 좋은 순간은 10이 뜨는 순간이거나 저열한 쾌락과 즐거움을 느낄 때뿐. 아무튼 대부분의 생명들은 부족하게 살아간다. 너희 인간도 마찬가지이지. 그래서 전쟁과 분란, 싸움이 생기는 거고 말이야.”
“휴우~ 그럼 일단 진행할게요.”
그가 하는 말을 무시한 채 유성원은 플레이를 계속해 나갔다.
하나 다시 턴이 돌아왔을 때는 공격을 한 만큼 자신도 맞아야 하는 현실이 닥쳐왔다.
“다시 내 턴이군. 그럼 나는 별의 사령 전사로 돌격을 시도하지. 주사위는 7이군. 돌격은 성공했는데 어떻게 할 텐가?”
“천검군 병사로 방어를 시도! 주, 주사위가… 그러니까 상대가 나온 수만큼 같이 뜨면 방어 성공인데… 아! 6……!”
방어를 시도하지만 주사위 눈 1이 모자라서 천검군 병사의 운명이 정해졌다.
그렇다고 돌진을 허용하면 진형 자체가 무너지거나 다수의 말들이 피해를 입기에 되도록 천검군 병사를 희생시키는 방향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천검군 병사들을 희생시킬 존재로 여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력한 전력인 기사들을 온존하는 게 이치에 맞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검군 정예 병사 33이 쓰러졌습니다.]
‘…으윽!’
“음, 숫자 차이가 1이기 때문에 돌진은 더 이상 지나가질 못하고 멈추게 되는군. 나름 최선의 희생이었지. 하나 방어에 성공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삶도 그렇고, 전쟁도 이런 것일세. 생각만으로 모든 게 풀리지 않고, 행복한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의 숫자가 많은 게 인생이지. 아무튼 이제 자네 턴.”
“저 일단… 밥 먹을게요.”
이미 모든 과정을 생각해 둔 것처럼 플레이하는 성좌 66천마의 턴은 빠르게 끝났다.
하지만 유성원은 식사를 핑계로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황무지 바닥에 깔개를 깔고 앉았다.
저쪽은 신적인 존재인 성좌라서 식사와 수면을 안 해도 되지만, 유성원은 살아 있는 인간이다. 그 두 가지는 무조건 챙겨야 했다.
“하아아~ 배고프다. 머리를 쓰니 더 배고프네. 냠냠.”
인벤토리 안에 있던 전투 식량과 음료수를 꺼내 먹으면서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휴대폰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하는 유성원이었다.
어차피 이 던전에서 결판을 내는 건 저 돌 탁자 위의 게임이니, 그 외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은 없기에 안심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좋긴 한데… 아무튼 진짜로 저걸 다 없애야 클리어되는 걸까? 이 영체들을 모두 다?’
주변에는 아직도 수많은 영체들이 보인다.
진짜 이것들을 저 주사위 게임으로 클리어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동이 소모될 것이다.
100년 남짓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냥은 포기 못하는 입장이라서 오기로 하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달성이 불가능한 승리 조건이었다.
‘그… 코어 던전들 중에선 뭔가 시험을 한다거나, 겉으로 드러난 목적과 실제 클리어 조건이 다른 곳도 있다고 했었는데… 그게 있는 걸까?’
다른 클리어 조건, 숨겨진 클리어 방법…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게 있길 바라서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 낸 오아시스 같은 신기루일까?
하지만 결국 헛된 망상이다.
‘…그런 게 있어도 내가 어떻게 알까?’
지금 하고 있는 주사위 게임도 확률 계산에서 삐끗해서 오판도 나오고, 꼬이면 빌빌대는 판국에 이 코어 던전의 추가적인 비밀이니 뭐니 하는 것을 성좌 66천마와의 대화로 캐낼 수 있는 지혜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을 ‘각성’시킨 ‘지구’도 참 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지구의 60억 인구 중에 똑똑하고 대단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성좌를 처리하는 역할로 택한 게 나라니, 참~ 우습네. 냠냠… 냠냠… 냠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무언가가 머릿속에 번뜩 떠올랐다.
그래, 지구에서 성좌들을 상대하기 위한 사도로 뽑은 것이 자신, 유성원이다.
보는 눈이 없다고 말은 했지만, 이 지구의 의지는 분명 그런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자신을 뽑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이 지구상에서 굳이 자신을 택해서 각성시킬 리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그걸 깨달았다고 해도 뭔가 뾰족한 수가 떠오르는 게 아니었다.
그저 유성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식사 후 수면을 취해서 컨디션을 돌려놓고, 다시 게임판에 올라서는 것뿐이었다.
특별할 게 없는 자신을 뽑았다면 자신은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그리하여 지더라도 끝까지 발버둥 치다 지겠다고 생각하며 유성원은 식사를 마저 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