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당신은 현재 ‘코어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어? 힘이?”
그와 동시에 눈앞에 상태창이 다시 뜨면서 힘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주변의 경치도 변했는데, 아까 전 하늘에 떠 있던 먹구름 같던 영혼들이 모두 내려와서 자신과 성좌 66천마를 약 100미터의 간격을 두고 둘러싼 상황이었다.
어쨌든 힘이 돌아왔기에 유성원은 다시 갑옷을 착용하고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려 했지만, 이상하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어라? 어디 갔지? 이게 안 잡힐 리가 없는데?”
“이 던전엔 더 이상 ‘전쟁’의 도구는 존재하지 않네.”
“…아까 전쟁한다면서요?”
“물론 그건 해야지. 자, 여기 앉게.”
틱!
칼과 총알로 된 손가락을 튕기자, 황무지의 땅이 일어나서 성좌 66천마의 화신과 유성원의 사이에 흙으로 된 탁자와 의자가 만들어졌다.
탁자는 매우 거대했는데, 그 위엔 체크무늬로 칸 같은 것이 쫙 표시된 필드가 그려져 있었다.
유성원이 의자에 앉자, 눈앞에 돌로 된 체스 말들이 놓였다. 한데 자세히 보니 어딘가 익숙한 모습들이었다.
“이, 이거 크록베인? 가울프? 우리 애들… 지금 뭘 하자는……?”
“여기서 전쟁을 할 걸세. 바로 이렇게 말이야.”
촤라라라라라라라라라락!
자신의 기사 여섯이 각자의 탈것을 탄 채로 포즈를 잡고 있는 모습과 드래곤인 엘드라엔은 물론 천검군 병사들까지 나온 것과 반대로, 성좌 66천마의 앞엔 주변에 있던 어두운 빛으로 된 영체들이 하나둘씩 모이면서 마찬가지로 체스 말이 되었다.
유성원은 아직도 이해를 못한 얼굴로 탁자와 장기말 같은 것이 된 기사들을 둘러보며 성좌 66천마의 화신에게 물었다.
“이걸로 뭘 하려는 겁니까?”
“뭐긴, ‘전쟁’이지. 이게 이 평화와 화합이 깃든 ‘코어 던전’의 전쟁 방식일세. 룰은 매우 심플하네. 이 필드에서 ‘전쟁’을 벌이고 ‘장기말’이 모두 쓰러지거나 혹은 포기하는 쪽이 지는 거지. 참고로 저 영체들 모두 내 ‘장기말’일세.”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자네는 모든 것을 걸고 내 던전에 도전해 왔지 않은가? 또 이미 알고 있었지?”
그래, 애초에 코어 던전 안에서 불합리한 싸움이 있으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하나 이렇게 명확하게 불리한 싸움일 거라곤 예상치 못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앞에 자리한 기사들과 병사들의 장기말과 상대측에 잔뜩 쌓여 있는 말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유성원의 앞에 10면체의 주사위가 여러 개 놓였다.
“주사위?”
“그럼 이 ‘전쟁’의 룰에 대해 설명하지. 간단해. 자네는 자네의 말을 배치하고, 나는 내 말을 배치하고 ‘전쟁’을 하는 걸세. 각자의 능력은 ‘각성’과 ‘별의 기록’에 나와 있는 그대로 반영해서 이 ‘전쟁’에 맞게 나올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네.”
“그럼 이 주사위는?”
“그게 이 ‘전쟁’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무기’다. 가장 중요한 거지. 필드에 있는 말들이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공격과 방어, 모든 것을 그걸로 정한다. 물론 자네의 기사들은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낮은 숫자가 나와도 방어나 공격에 성공할 확률이 높겠지. 오오~ 보게. 이 가울프라는 기사는 검과 방패까지 들고 있어서 주사위 2 이상이면 모든 공격을 방어 성공으로 취급할 정도로 매우 뛰어나군. 체력도 높고 말이지.”
10면체 주사위 기준 2 이상이라고 한다면 1 외의 모든 숫자가 성공이기에 90퍼센트 확률로 방어한다는 것이지만, 현실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반대로 보면 가울프 정도의 뛰어난 기량을 지닌 기사를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인간이 10퍼센트 확률로 공격에 성공한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싸운다면 백 번, 천 번을 시도해도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게 가울프의 기량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이 ‘전쟁’에 제한 시간은 없네. 중간에 쉬고 싶으면 얼마든지 쉬고 식사, 수면도 마음껏 취하게. 자네의 수명이 ‘제한 시간’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게임에서 절대 도망쳐선 안 되네. 그러면 패배로 간주하여 자네 또한 이곳의 주민이 될 걸세.”
“…후우!”
심호흡을 크게 한 유성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동의했다.
코어 던전의 불합리함을 몸소 느끼고 있는 상황. 물러날 곳이 없으며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기에 유성원은 기합을 넣고 거대한 바실리스크를 탄 크록베인의 말을 필드에 놓았다.
그러자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나며 능력치가 나왔다.
[용인 기사 크록베인]
Str:128(SS+) Dex:32(A+) Vit:128(SS+) Mag:45(C-)
무장:파마(破魔)의 대부(大斧)
상대가 언데드, 사령일 시 주사위 수치 +2 추가
[보유 스킬]
용인의 괴력-다음 공격 시 주사위 수치 +3
용의 포효-자신을 중심으로 15칸 범위 내 적의 공포심을 부추겨 5턴간 공격 주사위 수치를 –2(쿨다운 10턴)
바실리스크 돌진-직선거리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 내의 모든 적에게 공격. 단 주사위 수치는 –1로 공격해야 한다.
광포한 재생력-매 턴 한 번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수만큼 체력을 회복
‘역시 우리 크록베인! 이라서 강력하긴 한데… 결국 이걸로 결정이 나는 게 문제로군…….’
유성원은 손에 든 돌로 된 주사위를 바라보며 불안해했다.
그래, 아무리 강력한 기사인들 다루는 것이 자신이면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손이 떨리면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지? 이 주변의 영혼 모두가 즉, 말이라는 건데… 그걸 언제 다 쓰러뜨리지?’
“첫 배치는 그걸로 끝인가?”
“아, 아니… 잠깐만, 생각을…….”
“제약은 없지만 시간을 잘 생각해야 할 걸세. 여기서 천년만년 머무를 생각은 아니겠지?”
그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동시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이 났다.
무기와 무기를 직접 맞대서 하는 ‘전쟁’이 아니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혼자서 모든 생각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감과 압박감, 그러면서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되는 싸움이기에 막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나는 언제든 항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점을 명심하고 시작하게.”
“…후우… 후우… 후우…….”
호흡이 힘들고 식은땀이 멈추지 않는다.
‘각성’을 빼면 정말 무엇 하나 대단할 게 없는 평범한 인간인 유성원에게 기댈 곳 하나 없이 홀로 싸우는 것부터가 두려운 일인데, 그 어깨에 짊어진 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동안 함께 싸워 온 기사들은 물론, 밖에 있는 자신이 거둔 사람들의 존재가 마음을 엄청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일단 선턴부터 정하지. 배치는 그다음에 해도 되니 말이야. 나는 7이군.”
“하아… 하아… 나, 나는… 후우… 4…….”
“좋아. 내가 선턴이군. 그럼 준비가 끝나면 바로 말하게. 게임은 언제든 시작할 수 있네.”
“후우… 꿀꺽꿀꺽.”
도저히 견디지 못한 유성원은 인벤토리에 있던 물통을 꺼내서 급하게 들이켰다.
이런 도박판 같은 자리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생소한 것이었다. 그가 해 본 도박이라곤 기껏해야 로또 아니면 휴대폰 게임의 랜덤 박스를 까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게 더 속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유성원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거 이길 순 있나?’
포기하면 거기서 끝이기에 절대로 포기할 순 없다.
하나, 잠깐만 생각해 봐도 계산이 뻔히 보였다.
10면체 주사위로 결정되는 공격과 방어의 성공 실패. 독립 시행이라고 쳐도 저 무수한 숫자의 말들에게서 크록베인이 상처 입고 소모될 확률이 있다는 것이었다.
‘광포한 재생력’이라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 중과부적일 확률이 크다.
“어떻게 할 텐가?”
“후우~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요?”
“기꺼이.”
“이거 죽은 말… 들은 어떻게 되나요?”
“당연히 죽지. ‘전쟁’이지 않나?”
쿠궁……!
가뜩이나 크던 부담이 배가되었다.
그나마 기사들은 별의 기록에 있는 존재들이었지만, 만약 이곳에 누군가 다른 사람을 데려오기라도 했더라면 그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린 것이 되기에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서 기사들을 잃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1년 넘은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한 추억이 너무나 많았다. 이젠 거의 가족이라 해도 될 정도로 정이 쌓여 있었다.
‘…이런 식으로 죽게 하는 건 말도 안 돼. 내 기사들을… 내 기사들을 내 판단과 고작 이 주사위 따위로 싸우다가 죽게 한다니…….’
“언제든 시작한다고 말만 하게. 아니면 포기하는 것도 좋겠지.”
“…절대 포기하지 않아.”
“마음대로 하게.”
유성원이 갈등을 하든 뭘 하든 시간은 성좌 66천마의 편이었다.
무한한 시간을 지낼 수 있는 성좌와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의 차이.
게다가 가지고 온 식량과 식수는 한정적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게임을 시작해서 조금이라도 일찍 클리어하는 게 상식이었지만, 저 무수한 적을 모두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들어오기 전에 대비는 해 둬서 다행이야.’
자신의 부재에 대비해 둔 것만큼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유성원은 주사위를 잡고 움직이려고 했다.
중압감과 부담 속에서도 결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코어 던전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탁자 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전남 목포 전선.
유성원 일행의 입장으로 코어 던전이 닫히자, 밖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히 몰려와서 전투를 하던 사령들이 멈춘 것은 물론, 알아서 각자 던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변으로 다행히 전선은 안전해졌지만, 사람들의 긴장감은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되려나?”
“그, 글쎄? 그 유성원이라는 인간, 실력은 대단하니까 그래도 클리어하려나?”
“하늘에서 내려오던 모습은 완전 대박이었는데…….”
“이봐, 거기! 정신 빼놓지 말고 경계 잘해. 지금 당장이라도 저 몬스터들이 다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지뢰 하나라도 더 심고! 장애물 하나라도 더 만들란 말이야! 그래야 너희도 휴가를 갈 시간이 생기지!”
“예! 예.”
병사들과 헌터들은 코어 던전이 클리어되는 것에 대한 기대를 접어 둔 채로 계속해서 땅을 파면서 방어 시설의 확충을 서둘렀다.
그런 일상적인 그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비상 회의가 열린 곳이 있었으니, 바로 군 수뇌부와 헌터 협회였다.
현재 성좌 66천마의 대장군이 한국에 넘어왔지만, 본래는 일본에 그 위치를 두고 있는 성좌라서 큰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