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이게 뭡니까? 어르신? 저 잡상인 안 받는다고 했잖아요.”
“잡상인이 아니니 들여보냈지.”
“아무리 봐도 잡상인이구먼.”
아이언 포트리스의 중앙 통제실로 오자마자 유성원이 발견한 것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는 중년 사내들의 모습이었다.
백가연에게 그들에 대해 물은 유성원은 이내 관심을 끊고는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앉아 태연하게 휴대폰 게임을 시작했다.
“유, 유성원 헌터님, 지금 북쪽으로 성좌 도살왕 세력을 토벌하러 간 이들의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아크데몬 비스트들이 갑자기 이상한 힘을 사용하는 바람에 지금 퇴로가 막힌 채로 매우 큰 위기가…….”
“이상한 힘? 어르신, 내가 분명 걔네들 ‘승천’이라는 비장의 카드 있다는 거 알려 주지 않았나요? 얘네 못 들었어요?”
“…….”
기껏 알려 준 주의 사항까지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에 유성원은 표정을 구겼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 심하다고밖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총 소집에서 그 개판을 쳤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이렇게 안면 몰수하고 와서 부탁하는 것부터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뭐, 그래. 그거 알았어도… 당할 수도 있지. 쩝, 비장의 수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고 내용은 모르니 말이야. 그래. 그래서 개판 나서 나한테 도와 달라고 지금 빌러 오셨다는 거지?”
“그, 그렇습니다. 유성원 헌터님이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습니다.”
“나밖에 해결 못한다라? 그러면 꽤 비싸게 받을 수 있다는 거네요. 얼마 들고 오셨어요?”
“어느 정도 원하십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국가적 위기 상황을 빌미로 너무 많은 액수를 요구하시면…….”
“100조.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렸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지.”
유성원의 미친 요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협회와 정부 요인이었다.
물론 조필성 대장은 10조든 100조든 투자해서 데려오라고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의 다급함을 나타내는 것뿐이었고, 정부로서는 아무리 그래도 예산이라는 것이 있기에 유성원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아, 일시불이 부담이면 할부로 내도 돼. 대신 그러면 선금을 30퍼센트 받을게. 올 마정석으로 말이지.”
“30조? 심지어 마정석?”
“너희가 현금 계좌로 장난친 게 있어서 못 믿겠더라. 나 아직도 지난번 1조도 다 못 받은 거 알지? 싫으면 뭐~ 아포칼립스 준비나 해야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정부와 협회에서 온 사람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유성원의 조건을 알리면서 이걸 OK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토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국가의 위기임에도 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유성원의 태도가 탐탁지 않았는지 백가연이 슬쩍 와서 한마디를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100조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우리나라 총예산이 얼마인지 알 텐데?”
“그 정도 상처는 입어야 다시는 이런 일 안 당하도록 뭔가 열심히 할 생각을 하죠. 사람은요. 손해가 생겨야 그제야 움직이는 게으른 생물이에요. 공짜로 구해 주면 또 다음에도 구해 주겠지~ 하고 은근슬쩍 넘어갈 텐데, 100조나 쓰면 다음에는 함부로 요구 못하겠죠.”
“…모르겠군. 모르겠어. 과연 이게 맞는 건지. 지금 올라가 있는 헌터와 길드, 군대를 모두 잃으면 장기적으로 대한민국에 큰 타격이 올 거네만? 인구는 둘째 쳐도 각성자는 쉽게 늘릴 수 있는 게 아니라네.”
“알게 뭡니까. 자기들이 도박처럼 꼬라박아 놓고는 왜 나한테 징징대는 건지 그게 더 이해가 안 가네요. 게다가 3국 협조라면서요? 위의 잘나신 분들에게 도움 요청 안 하나요? 그리고 거기도 SS급 있다고 했잖아요.”
듣기로는 성좌 용봉왕 쪽과 러시아 연방과 합세해서 3면으로 공격한다고 했었다.
그렇게 서로 협조를 했으면 이런 사태가 나면 도와 달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대체 뭐가 어떻게 진행되었기에 자신에게 이렇게 빌고 난리가 난 건지 이해가 안 가는 유성원이었다.
“하아~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이해가 쉽겠지. 보게나.”
『으아아아아아아!』
백가연이 리모컨을 조작해서 화면을 돌리자 거기엔 바로 전쟁의 참상이 보이고 있었다.
도살왕의 악마형 몬스터들과 스캐빈저들의 공격에 군인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먹잇감이 되고 있었고, 헌터들은 열심히 저항할 뿐이었다.
그리고 새로이 SS급으로 승급했다고 하는 고천수 쪽도 비춰졌는데, 확실히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보이고 있었지만 문제는 혼자인 데다 또 유일하게 강한 자라서 그런지 아크데몬 비스트들이 모조리 그를 노리고 있었다.
『푸르륵! 아쉬운 대로 저놈이라도 잡아야겠군.』
『음머어어! 놈은 내 것이다!』
『크윽! 젠장!』
“집중 견제 당하고 있네. 일대일로 해도 힘든 판에 심지어 2마리가 저러면 난감하지. S급 2명은 뭐 한… 아, 걔네도 스캐빈저들 상대 중인가?”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청룡 길드가 무언가 해 보려고 분전했지만, 퇴각 길에 전투력은 급감하기 마련이다.
후미를 맡으면서 싸운다는 건 애초에 불리한 일이며 상대 전력이 더 우세하니 역전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봐도 이건 X 된 것 같은데… 아니, 나라도 X 됐을 거야.”
“원래 말리는 판은 무엇을 해도 말립니다. 다만 저희라면 목숨을 걸고 진행 방향을 돌려서 스캐빈저나 괴물들을 끌어들였겠죠.”
“아니면 아예 돌진해서 특공 박아 버리든가 말이죠. 여차하면 폐하의 성소를 쓰면 되니까요.”
유성원은 유청, 진석과 함께 영상을 감상하면서 만약 자신들이 지금 저기로 투입됐다면 어떻게 전투를 진행했을지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아직 지불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만약에’라는 주제로 생각해 보기엔 나쁘지 않았으니 말이다.
“만약 우리가 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은 스킬과 보상은 3개인데… 이걸로 뭔가 확! 하고 좋은 게 나올 것 같진 않고? 이대로 가서 지원해 준다고 해도 엄청난 난전이 예상되는데…….”
“저 아크데몬 비스트들 대부분이 나온 걸 보면 사실상 코어 던전을 버린 것 같군요.”
“…코어 던전? 아, 그렇지. 그랬어. 저 승천이라는 스킬도 본래는 코어 던전을 지키기 위한 거라고 들은 것 같아. 어? 잠깐만. 그러면……?”
남쪽에는 이베리코, 덕덕, 프르제발스키, 와규 넷. 북쪽에는 토사독을 비롯해 다른 한 마리의 아크데몬 비스트가 자리를 잡아서 총 6마리. 죽은 놈까지 치면 9마리나 되는 놈들이 나와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코어 던전을 지키는 아크데몬 비스트는 그리 많지 않다고 볼 수 있었다.
“성좌 도살왕이 내려보내거나, 아니면 사도들이 새로 소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그리 흔치 않습니다. 성좌들이 사도를 내려보내는 것에도 적잖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사도들을 소환하는 일에도 제물이 많이 필요한데…….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차라리 그럴 바엔 자신의 강함을 얻는 게 스캐빈저들이니까요.”
“즉, 코어 던전이 비었거나 보스 몹이 적다는 건가?”
“그런 셈이죠. 본래라면 저 밖에 나온 전원이 들어가 있어야 할 곳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들어가면 적은 수의 아크데몬 비스트와 성좌 도살왕의 화신(化神:Avatar)이 있을 겁니다.”
“성좌의 화신이라니,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
S급 몬스터를 뛰어넘는 최강의 보스 몬스터이자 성좌 본인이 직접 싸움터에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그걸 상대하라니 미친 소리인가 싶었지만, 유청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폐하. 직접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저희가 마치 거기를 들어가서 공략하는 척을 하는 겁니다. 적어도 상대 아크데몬 비스트들에게 폐하와 저희 군의 인상은 아마 자신들과 같은 이를 둘이나 죽인 최강의 인간 세력이겠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저희가 코어 던전 근처로 가기만 해도 놈들은 기겁할 겁니다.”
“오…….”
성좌의 사도들이며 코어 던전을 지키는 자들인 만큼 그곳에 누군가가 향하면 당연히 최우선으로 경계는 물론 부리나케 돌아갈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군대와 일반 헌터들을 공격하는 아크데몬 비스트들에겐 비상이 걸려 코어 던전으로 올 것이고, 남은 이들이 이제 스캐빈저나 잔챙이 몬스터만 상대하면 되겠지요.”
“근데 만약 안 오면? 혹시 안에 있는 아크데몬 비스트를 믿고 배 째라고 하면?”
“그럼 공략하는 거죠. 명예를 드높이면서 이지 모드로 도전할 수 있다니, 최고의 찬스 아니겠습니까?”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말하는 유청과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진석이었다.
그리고 그 의견에 경악하는 유성원.
아무리 던전 네임드를 패스해서 보스 몬스터에게 빠르게 갈 수 있다고 하지만, 성좌의 화신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그였다.
“왜 그러십니까? 코어 던전을 공략하면 아시다시피 이제 더 이상 도살왕의 세력은 이 지구에 강림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거면 최고의 성과 아니겠습니까?”
“아니, 아니아니아니! 성과도 좋고 명예로운 일이고 다 좋은데! 이길 수 있는 현실성 있어? 있어?”
“최강에게 도전하는데, 그게 뭐가 필요합니까? 심지어 그것이 처단해야 할 악성(惡性)을 지니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끄덕.
진석의 호탕한 말에 유청도 기세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원은 이 미친 기사들의 정신 구조가 여전히 이상하다고 느껴졌지만, 그래도 코어 던전을 가는 척하는 방안은 꽤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불리한 전장에 합류하는 것보다 새로운 전장을 짜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싸움이 가능하니 말이다.
“으음, 아무튼 코어 던전은 됐고… 가는 척하다가 움직이는 놈이 있으면 자르는 방향이 좋을 것 같네. 일단 아크데몬 비스트들부터 줄이면 어떻게든…….”
“유성원 헌터님! 스, 승인 났습니다. 100조를 내겠다고 합니다. 다만 조건을 일시불 30조에 연 10조씩 7년 분할로 해 달라고…….”
“…아니, 이걸 진짜 낸다고? 얼마나 상황이 개막장인 거야?”
자신이 내질렀지만 승인이 나는 것에 유성원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의 반쯤은 엿 먹어 보라고 질러 댄 건데, 이렇게 빨리 승인이 나니 역으로 황당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100조 거래, 지불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나온 만큼 이젠 움직여야만 했다.
“좋아. 근데 30조 선불은 마정석이랑 달러로 확실히 받고 움직일 거야. 계좌로 통수당했으니 내가 왜 이런지는 알겠지?”
“예, 예! 알겠습니다. 지, 지금 바로 은행과 협회에서 운반하겠다고 합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협회고 정부 직원이고 둘 다 속은 쓰라릴 만큼 타오르고 있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싸움이기에 결국 정부와 협회는 유성원의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 주게 된 것이다.
100조.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지만 그래도 죽어 가고 있을 10만의 군인과 헌터들을 생각하면 결코 바꿀 수 없는 가치였으며 주변국의 정세까지 포함하면 반드시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구해야만 했다.
“아무튼 뭐, 돈 내겠다고 했으니… 출동 준비나 하자. 돈 계산 끝나면 바로 나갈 수 있게. 소미 누님, 던전을 금방 다녀왔는데… 바로 나가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요.”
“아뇨. 그 던전… 솔직히 던전이라기보단… 휴양 시설 같았으니까요. 그렇지? 아영아.”
“응. 그 투기장 던전 소감은 잘 먹고 잘 쉬고, 그리고 마지막에 운동 좀 한 정도였고, 솔직히 개날먹이었어요.”
기묘한 신조어까지 사용하며 전혀 개의치 않는 두 사람이었다.
‘투기장 던전’은 정말 말 그대로 유성원에게 캐리받아서 잘 놀고 잘 먹다가 온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전투로 인한 손상이나 피로도 없으니 곧바로 다시 투입되어도 무리 없을 정도였다.
“이번엔 경우가 경우이니… 나도 전투에 참여해서 돕도록 하지. 노친네랍시고 날 무시하던 놈들이 많아서 화가 나던 참이거든.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코어 던전으로 직행한다는데, 육상으로 침투 못하는데 어떻게 할 겐가?”
“아, 맞다. 장벽으로 막혔지. 으음~ 저야 제 엘드라엔 타고 가면 그만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이동 수단은 저 양반들에게 빌려 달라고 하죠. 제가 호위할게요.”
“아……! 그렇군.”
그러고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면서 마정석과 현찰을 운반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정부와 협회 사람들을 보는 유성원이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투입되어야 상황이 해결되니 까짓것 공군 전력쯤 빌려도 괜찮으리라.
또 혹시나 등장할 수도 있는 공중 몬스터의 견제는 골드 드래곤을 타고 하늘로 이동하는 유성원이 직접 해 준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
결정되자마자 곧장 수송기를 요청하기 위해 유성원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