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그래서 자네, 그 B급 던전을 어떻게 돌파했나? 나름 고통의 성좌 백안조의 사도가 있는 던전이라 쉽지 않았을 텐데……. 시간이야 당연히 걸릴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 치고 말이지.”
“…….”
백가연 어르신의 질문을 받은 유성원은 순간 움찔한다.
이 던전 클리어에 자신이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기에 무어라 말하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아니, 말한다면 말할 수 있지만 그러는 것은 곧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거나 다름없기에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비밀입니다.”
“오, 좋은 태도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을 감추는 방법을 아는 친구군. 그래, 그래야지. C급 이상 고등급 던전은 그렇게 비밀 유지를 하는 게 유리하다네.”
‘이렇게 넘어가나?’
역으로 기밀 테스트 같은 게 되었지만, 아무튼 잘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유성원이었다.
“보고서는 뭐, 적당히 써 두겠네. 백안조 세력과 싸워 본 경험이 있으니 꾸미는 건 어렵지 않아. 또 공식 E+등급인 자네 혼자 해결했다고 하면 큰 사건일 테니, 여기 멤버 모두와 함께한 걸로? 어떤가?”
“뭐, 그러죠.”
“저, 저기요. 자, 잠깐만요, 학원장… 이 아니라 대장님! 저는… 저는 좀 내용을 다르게 해 주세요! 저 B급 던전 클리어 경력까지 들어가면 큰일 나요!”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아영이가 벌떡 일어나서 태클을 건다.
상황이 바뀌어서 이대로 돌아가면 그녀는 아카데미아의 대스타가 될 지경이었다.
45레벨에 A+급 스테이터스 승급, 거기에 S급, A급이 대동했다곤 하지만 공식적으로 4명이서 클리어했다고 하는 건 엄청난 업적이었다.
“음? 어차피 버스 받았다고 하면 그리 대단한 일로 치부 안 할 텐데? 너무 큰 걱정을 하는 게 아닐지?”
“게다가 그런 걱정을 할 거면 애초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게 먼저 아니냐?”
“그거랑은 별개로 레벨 업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아무튼 저 아예 빼 주거시나, 아니면 싸우다 쓰러졌거나 함정에 빠져서 고립된 걸 구출했다 정도로 써 주세요. 안 그래도 피곤한데 더 난리 나요.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아~! 아카데미아 돌아가기 싫어!”
신아영은 불평하면서 빈 탁자에 엎드려 칭얼댄다.
돌아가 봐야 또 S급 예정자랍시고 사방에서 들어오는 구애를 빙자한 괴롭힘에 시달릴 게 분명했으니 가기 싫은 게 당연했다.
신소미는 한숨을 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지었고, 전 학원장이었던 백가연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한다.
“이제야 내 맘을 좀 알겠냐? 어휴~ S급이 실제로 되지 않은 너만 해도 그 정도인데… 나는 밝혀지면 어떻게 되겠냐?”
“옛 전략에 나무는 숲에 숨기라는 말이 있죠. 그걸 써 볼까요? SS급 황금 마인 기사의 정체는! 두두등장!”
“그거 확실히 좋은 전략이구나. 뒷감당 생각만 하면 말이지.”
“장난이에요, 장난~ 설마 자신의 처지를 좋게 하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겠어요? 그거 완전 최악이잖아요.”
푸욱!
오히려 변명하는 후속타가 유성원의 폐부를 깊게 찌른다.
‘신강남 사태’만 해도 유성원 자신의 처지를 위해서 일부러 대형 사고를 저지른 것이니 찔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태연히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자신을 팔아넘기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말이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뭐, 상대 봐 가면서 일하라는 비겁한 말로 귀결되니 참아야지.’
“아무튼 B급 던전 클리어했으니 이제 C급 외 다른 B급도 수월하시겠네요.”
“아뇨. 그 B급 던전이 좀 특이한 케이스 같아서 말이죠. 결국 0회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성좌 백안조의 잔존 세력이었고, 그래서 다른 성좌의 세력과의 싸움엔 크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내용이 좀… 일반 던전 스타일과 너무 달랐습니다.”
“으음, 오히려 그게 더 부러운데요? 몬스터와 싸우고 해결한다는 방식에서 벗어난 던전 타입. 역으로 더 희귀해요. 헌터들 대부분이 그런 던전 타입에 약한데, 경험해 둔 건 큰 자산이 될 거예요.”
그저 던전 내에서 집 짓고 뒹굴거리자 보스 몬스터가 포기한 게 전부인데, 저렇게 고평가해 주니 유성원도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하나 그녀의 말대로 이형(異形)의 던전 체험은 상당히 귀중한 것으로, 항상 예상외의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 헌터의 침착함을 길러 주는 건 사실이었다.
“흐음~ 아무튼 이걸로 제 B급 던전은 끝났으니 바로 다음 던전으로 가죠. 할매, 이번엔 뒤통수칠 생각 꿈도 꾸지 마시고요.”
“다음 던전을 가는 건 적어도 일주일 뒤라네. 알다시피 아무리 내가 있어도 B급 같은 상위 던전을 그렇게 팍팍 격파해 나갈 수는 없는 일이지 않나? 나름 준비와 대비를 하고서 가는 거라고 생각하게 해야지.”
“즉, 쿨 다운이 필요하다는 거네요. 뭐, 괜찮습니다. 그동안 할 일도 생각났으니까요.”
“오? B급 던전을 가서 헌터로서의 깨달음을 얻은 겐가?”
“아뇨. 산이나 사서 집 만들 생각인데요?”
유성원의 대답을 들은 백가연 어르신의 얼굴이 어이가 없다는 듯 굳는다.
기대하던 것과 다르게 이 남자는 B급 던전을 클리어하고도 헌터로서의 마음가짐은커녕 여전히 세상에서 숨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의지인지, 이 정도면 존경심이 나올 지경이다.
“집?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세상을 등지고 자연인이 되려고 하는 겐가?”
“그거 좋죠.”
“아이고, 이 사람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겐가?”
“못할 말은 아니잖습니까? 서민의 영원한 꿈과 희망이자,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출산율 저하의 최대 원인 중 하나이며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과제인데 말이죠.”
유성원은 나름 날카롭게 반박했지만, 헌터계에서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신소미 일가와 백가연 어르신의 시야와는 극명히 차이가 나기에 살짝 충격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가 금방 회복한다.
“그렇게 말하니 더 뭐라 할 말이 없군. 그래,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한 소리 할 줄 알았는데요?”
“사람마다 추구하는 게 다르지 않나? 나쁜 짓 하려고 마음먹는 것보단 낫지. 내 도와주지. 땅 구입해야 하지? 갑자기 일개 스태프가 비싼 땅을 구입하면 수상할 테니, 내가 같이 부동산 업자를 알아봐 주지.”
아무리 퇴물이라고는 해도 공식 S급 헌터를 상대로 매물 사기를 비롯한 각종 사기를 칠 간 큰 업자는 없는 만큼 그녀의 도움이 메리트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산만 구해 주세요. 건축은 직접 할 테니까요. 깡그리 직접 만들 겁니다. 재료 일일이 공수해서요.”
“호오? 자네에게 건축 지식이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가능하겠나?”
“제 기사 중에 유능한 친구가 있거든요.”
“아~ 그 친구들 말인가? 하긴 거기에 용까지 있으니 공사는 재료값만 들어서 문제없겠군. 문제는 건설 허가인데~ 뭐, 걸리고 해도 늦지 않겠지. 어차피 자네 마음대로 지을 거니 설계도 같은 거 받아도 쓸모없지 않나. 그보다 그 기사 친구들 소개는 안 해 줄 건가?”
“으음, 그 친구들은 나름 비장의 카드 같은 거라. 나중에 소개시켜 드릴게요.”
웃으면서 얼버무리는 유성원. 가능하면 이 할망구와 기사들을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껄끄러운 부분은 없고, 역으로 의기투합이 너무 잘될 것 같아서 감추고 싶은 게 본심이었다.
‘이 할망구 하는 짓을 보면 무모한 게 거의 돈키호테급이라 우리 기사단 놈들이 뿅 가 죽는 스타일이야. 그러니 절대로 의기투합하게 둬선 안 돼.’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기사도’, ‘명예’, ‘의무’, ‘정의’ 같은 걸 떠들어 댈 게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가끔씩 나오는 상태창의 ‘기사도’ 연발만 해도 머리 아픈 일인데, 이제 밖에서까지 의기투합해서 떠들기 시작하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가능한 한 늦게 하는 게 좋겠지. 하아~ 게다가 나중엔 던전 안에서 ‘그거’ 하는 것도 보여 줘야 하잖아.’
가뜩이나 기사도니 명예니 언급하면서 싸우는 걸 보여 줘야 하는 것도 골치 아픈데, 가능하면 최대한 미루고 싶은 게 유성원의 심정이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감출 수 있는 건 아니기에 가능하면 늦추는 게 최선이었다.
“뭐, 자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았네. 그러면 나와 자네는 곧바로 땅을 알아보고, 신소미 길드장과 아영이는 돌아갈 텐가?”
“예. 그러죠. 저는 길드 일이 있으니까요.”
“저도 아카데미아에 돌아가야 하니 어쩔 수 없죠. 하아~ 또 치근덕대는 인간들 상대할 생각하니 한숨만 나오네요. 에휴~”
그렇게 던전 공략을 마친 이들은 각자 할 일을 마저 하기 위해 흩어진다.
유성원과 백가연만 트레일러에 남고, 신아영은 아카데미아 숙소로, 신소미 길드장은 백야 길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유성원이 살 집을 고르기 위해 지도를 보고 있을 무렵, 백가연이 그에게 슬쩍 조언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자네가 던전에 가 있을 동안 우리는 자네의 행적에 대해 총체적인 재검토를 했고 위험에 대해 체크했었네.”
“갑자기 또 왜 그런 이상한 짓을?”
“이상한 짓이라니. 이제 엄연히 우리도 자네와 한배를 탄 몸이란 말일세. 당연히 체크해야지. 황금 마인 기사의 자취를 쫓는 자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안 끼칠 거라는 생각을 했나?”
황금 마인 기사는 이제 SS급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 자취를 쫓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며 그와 관련되거나 정보를 가진 자가 있으면 분명 노림을 받을 것이다.
그것을 대비해서 유성원이 던전에 있는 동안 백가연은 신소미 길드장과 함께 모든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그럴 리는 없겠죠. 그래서 체크한 결과 어떤지요?”
“개별적인 조치는 잘했지만, 결국 종합적으로 보면 안 좋네.”
“예?”
“이걸 보게나. 자네의 행적일세. 우선 스태프로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쭈욱~ 근 몇 달간 일어난 사건에 모두 끼어들었지 않은가?”
신아영에게 찝쩍대던 고성준 사건부터 시작해서 S급 마인 정민수 사건, SS급 마인 인간 사육사 이 목사의 서울 공격, 이어서 신강남 사태까지. 근래 일어난 굵직한 사건에 계속 한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하면 누가 봐도 수상히 여기리라.
“…자네, 이 사건들에 다 관련되었지? 아, 그나마 S급 몬스터-레그혼 때만 빠졌군. 하지만 또 결정적인 게 있지. 자네가 그 황금 마인 기사 때 쓰는 무기, 그거 올림푸스 길드의 티탄의 말뚝이지? 다른 특성이나 옵션은 하나도 없는… 순수하게 강도와 무게만 괴물 같은… 본래 무기 용도가 아닌 물건.”
“그렇지만 상당히 쓸 만합니다.”
“무기가 자네에게 유용한 것과 별개로 아마 그거 때문에 행적이 잡혔을 가능성이 높네. 흔한 물건이 아니니까 말이야.”
“예?”
유성원에겐 전혀 의외의 소리였다.
자신에게 이걸 준 ‘성좌 헤파이스토스’의 장인은 성좌에게 맹세까지 하며 함구해 주기로 했는데, 대체 어떻게 자신이 이것의 주인인 걸 알아낸다는 것일까?
그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백가연은 한숨을 쉬며 세세히 알려 주기 시작한다.
“일단 올림푸스 길드의 간부들이라면 아마 한눈에 알아봤을 거고 당장 전수 조사했겠지. 자기네 성좌가 직접 만든 신물이 웬 놈팽이 손에 들려 있으니 말이야.”
“아! 과연 티탄의 말뚝을 추적하면서 제가 그 무기 상점에 들렀던 것도 알아냈겠군요.”
딱히 유성원에게 티탄의 말뚝을 준 헤파이스토스의 장인이 말하지 않았어도 그들은 티탄의 말뚝 소유자를 찾아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을 것이다.
우선 티탄의 말뚝이 사라진 매장을 찾아내고 그 주변의 모든 CCTV 자료 및 인적 사항을 조사하면 그동안 모든 사건에 나타났던 ‘유성원’이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다.
“어쩌면 이미 자네가 황금 마인 기사라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
“…젠장!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네!”
“아마 자네가 이러고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걸세. 운명의 손은 이미 그대를 끌어당기고 있을 테니 말이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그건 자네가 정할 일이지. 자네가 뭐 남이 말한다고 들었던 친구인가? 허허.”
왠지 그동안의 태도가 대가로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길드와 세상의 위협이 닥쳐온 것 같은 불안감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기껏 마음속에 묻어 둔 트라이 헤드 버드의 말이 다시 떠올라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아~ 으음? 전화? 왜 갑자기… 어?”
그리고 운명의 손은 그를 더욱 괴롭히길 원하는지 그가 아직 대비하지 못한 이 시점에서 또 다른 고난을 건네준다.
현재 유성원의 휴대폰에는 신소미 길드장에게서 온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 내용 없이 그저 백야 길드 입구에 주차되어 있는 청룡 길드와 올림푸스 길드의 차량 사진이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