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간만에 안 좋은 과거의 기억들이 꿈속에서 나타났다.
부모를 잃는 사고를 당했을 때, 그리고 이어서 보호 시설에 있을 때의 기억들.
하지만 너무도 생생해서 꿈이라는 걸 알기에 오히려 평온했다.
이미 모든 걸 포기했으니까.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남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아픔도 언젠가 무뎌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인간, 일어나라. 인간!]
[결국 이 방법뿐인가?]
[살아남으려면 이것뿐이다. 꾸에엑! 꾸에엑!]
“…음? 어휴! 시벌! 뭐야, 이 새는? 몬스터? 아! 새라서 부비트랩을! 젠장! 맞아. 백안조의 수하이니까 조(鳥)류 계열이지?”
그렇게 잠에 빠졌다가 시끄러워서 눈을 뜨자, 거기엔 약 높이 3미터의 머리가 셋이나 달린 거대한 새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티탄의 말뚝을 들고 휘두르려 하는데, 놈은 갑자기 머리를 숙이고는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면서 떠들기 시작한다.
[기다려라, 인간! 싸울 생각 없다!]
[맞다. 나는 죽기 싫다. 싫다!]
[성의를 표할 테니 여기서 나가라는 제안을 하러 온 거다!]
“…뭐?”
제안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나가라고 해? 이제 막 천막 쳤고, 여기 공사해서 살 곳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왜 내보내려는 건데?
“아니, 왜? 꼭 나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너는 이 던전에 맞지 않는 자다.]
[마음이 메마른 자!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자! 쓰레기 같은 자! 절망한 짐승! 인간의 탈을 쓴 가축! 사는 김에 사는 자! 죽음을 거부하지 않는 자!]
[나가서 좀 행복하게 살아라.]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냥 여기서 평온하게 보내려는 것뿐인데… 해라 마라 하고 자빠졌어.”
심지어 나가서 행복하게 살라니, 어처구니가 없네.
더 황당한 건 대체 몬스터라는 놈이 왜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건지, 기가 막혔다.
이 던전은 대체 뭐 하는 곳이고, 이놈은 뭐 하는 놈인 거지?
이렇게 나오니 나도 오기가 생긴다.
“안 나갈래. 밖에 나가 봤자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아니다, 인간아. 사는 건 분명 고통이지만, 그 이상으로 좋은 일도 있다.]
[있다! 있다!]
[그래! 좋은 일이 있어야 고통도 커지는 법이지! 희망과 절망의 낙차!]
“일단 저기, 대가리 하나만 말하면 안 될까? 알아듣기도 힘들고, 머리 아픈데?”
[어우, 실례했다, 인간. 아무튼 네가 여기 있어서 우리 모두에게 좋을 게 없다, 인간. 여긴 도피처도, 안식처도 아니다. 그만큼 강하면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밖에서 보면 누구나 기겁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던전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인간과 몬스터가 인간을 위로해서 밖으로 내보내려는 풍경.
그를 집어넣은 백가연도 내막을 알면 놀라리라.
“알기는~ 무슨, 전투력 높으면 정신적 경지가 높은 걸로 착각하는데? 그렇게 치면 핵폭탄 스위치에 손가락 올리고 있으면 대현자이게? 아니! 성좌 밑에 있는 S급 헌터들 인성들 보면 몬스터 저리 가라지. 어휴~”
[하! 기가 막힐 노릇이군. 그런가? 그러니까 밖의 놈들이 내 던전을 안 오는 모양이군. 쯧쯔~]
“확실히 여기가 더 속 편해. 조용해서 말이야. 근데 뭐가 보이기에 보이는 숲이라는 거야?”
[그거 그냥 상상력을 위한 이름일 뿐이다. 불안의 싹이 트면 인간은 스스로 그것을 마구 키워 나가기 마련이지.]
“즉, 아무것도 없는 던전이라는 건가? 보스 몹 너 혼자고?”
[그래, 맞다. 낮에는 조용히 있다가 밤에 꿈을 건드려서 고통을 주는 걸 반복하지. 근데 네놈은 너무 썩어서 고통을 줄 수가 없어서 문제지만!]
“아이고, 그게 내 탓은 아니지. 세상이 쓰레기통인데~ 그럼 쓰레기밖에 안 남는 게 당연하잖아? 여긴 그래도 으음~ 공기는 맑고 조용한 숲이지만 말이야.”
물론 이건 유성원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하지만 성좌도 잃고 던전 내에 홀로 남아 있는 트라이 헤드 버드로서는 바깥세상 소식을 듣지 못하기에 오직 유성원의 의견만 듣고 바깥을 파악해야만 했다.
[쯧쯔쯔, 그럼 이 ‘별’은 망한 셈인가? 하긴 ‘백안조’ 님보다 더 악질인 분들도 많이 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군.]
“…으음~ 도살왕 같은 거?”
[푸까까까깍! 그분은 그저 식도락만 즐기시는 분이야. 배만 부르면 조용한 분을 왜 악질이라고 해야 하나? 푸까까깍! 진짜 악하다고 할 수 있는 분은 격이 다르다고! 푸까까깍!]
“아~ 그 태평양에 계신 분인가?”
[아무튼 너 같은 자가 도망쳐 올 정도면 안 봐도 뻔하겠군. 여기 있는 게 더 평온하고 행복할 정도면 역시 내보내는 게 맞을 터. 흐흐흐. 밖에 있는 게 더 고통스러울 줄이야. 그러면 우리는 이 별에 있을 가치가 없겠지.]
스스스…….
그렇게 말을 하자 트라이 헤드 버드의 몸에서 깃털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깃털은 마치 돌이 가루가 되듯 땅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고, 그의 몸은 서서히 없어져 간다.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인간. 찾아온 것은 이곳을 악의 소굴이 아닌 안식처로 삼으려는 놈이니 말 그대로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것이다.
[홀로 낙원을 찾아 이곳에 온 인간이여, 아쉽지만 여긴 너의 낙원이 아니다. 아니, 결국 너는 이 ‘별’의 자식이다. 너의 별을 소중히 여기고, 그곳을 가꾸어라. 낙원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네 손으로 만들어야 하고 쟁취해야 한다.]
“…하다 하다 몬스터에게 위로도 모자라서 이젠 설교까지 듣네.”
[잊고 싶으면 잊어라. 하나 도망칠 수 없다는 것만 알아 둬라. 그러면 이제 나도 ‘고통’의 씨앗을 심어 볼까?]
촤라라라락!
트라이 헤드 버드가 허공에 날갯짓을 하자 각종 장비와 스킬 북, 마정석들이 쏟아져 나온다.
유성원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사라져 가는 트라이 헤드 버드와 수북하게 쌓인 물건을 바라본다.
본래라면 그와 싸워 이겨서 얻어야 하는 것인데, 이 ‘별’에 더 이상 관심이 사라진 그는 가치가 없다는 듯 내놓고 있었다.
[까악! 까악! 좋아하는군! 그래! 쓰레기라도 욕심은 있겠지! 재화와 보물! 너무나 사랑스럽겠지!]
[절망스러운 세계일수록, 추잡스러운 세계일수록 더욱 가치가 올라가지!]
[하나 그렇기에 이것은 ‘고통’의 씨앗이 된다. 더 큰 증오를 부르게 된다. 이 ‘별’의 자식이여! 괴로운 세상, 더 괴롭게 살아가서 끝을 보아라! 까악! 끼아아악!]
“뭐가 뭔지 모르겠네.”
그렇게 사라진 트라이 헤드 버드와 그가 남긴 물건을 바라보던 유성원은 어딘가 찜찜한 기분을 느낀다.
결과적으로 보면 자신은 손 하나 안 대고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고 B급 던전을 클리어한 셈이었다.
그런데 놈이 남긴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몬스터 주제에, 아주 말은 청산유수야. 하아~’
[때론 아군보다 강한 적이 좋은 조언자가 되어 주기도 한다. 오늘의 기억과 깨달음을 곱씹어라, 기사여.]
‘…이 새끼는 또 난리네. 하아~ 그래도 챙겨 가야지.’
아무튼 던전에서 얻은 마정석, 장비, 스킬 북 모두 유용하게 쓸 수 있기에 찜찜해하면서도 전부 다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잠시 뒤, 던전이 완전히 사라지자 나타난 숲의 모습은 이전과 유사했지만 자신을 던전에 밀어 넣은 할망구와 신소미와 아영이의 모습이 눈에 바로 보인다.
“오, 결국 클리어했나? 꽤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하고 나온 걸 보면 잘한 것 같은데…….”
“정말 아주 거지 같았습니다. 일단은 돌아가죠.”
유성원은 아직도 찜찜함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트레일러로 돌아가 내부에 마련된 샤워실에서 갑주를 벗고 씻었다.
땀은 씻겨 내려가지만 그 트라이 헤드 버드가 한 말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망할 놈이 한 말대로인가?”
그놈에게서 얻은 별, 성좌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맴돌면서 자기도 모르게 세계의 위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도살왕조차 온순한 생물로 취급해 버릴 정도로 악한 성좌의 존재라든가?
무관심하다고 해도 결국 이 별에서 살아가야 하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라든가?
가장 증폭되는 두려움은 ‘혹시 내가 다 살기도 전에 세상이 멸망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지만… 아!”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려 하지만 신강남에서 자신이 친 사고가 떠오른다.
명백히 자기 방어 행위로 한 짓이고 딱히 죄책감은 없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생긴 여파는 분명 이 족 같은 나라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다.
국가 신용도에 이바지해 주던 대형 도시 신강남이 붕괴되면서 벌어진 이후의 일들은 모두 한국에 악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런 고민은 또 처음이네.”
예전엔 ‘될 대로 돼라. 또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의식하지 않았는데, 이번 던전을 다녀오고 난 뒤엔 심각하게 신경 쓰인다.
하지만 결국 사람은 하던 대로 움직이게 된다.
“뭐, 그래도 남 똥 치우는 일은 할 수 없지. 으음~ 다만 안식처 구성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 휴우~ 아무튼 시원하다.”
“뭘 그리 구시렁거리면서 목욕을 해요?”
목욕하고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었던 아영이가 문 앞에서 유성원을 맞이한다.
어차피 던전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씻고 뭐라도 먹고 난 다음에 하기로 했는데, 이렇게 기다리니 유성원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물었다.
“뭐야? 뭐 할 말이라도 있어?”
“그냥 혹시 상태가 안 좋나 싶어서요. 던전 클리어했는데 그런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신경 쓰이죠. 나오자마자 한바탕 쾅! 싸울 기세였잖아요.”
“아, 확실히 그 할망구가 한 짓도 화나긴 했지. 설마 경험도 없는 사람을 난데없이 B급 던전에 혼자 처 밀어 넣을 줄은 몰랐으니까.”
그 배신을 당했을 때의 분노가 다시금 떠오르는 유성원이었다.
미지의 B급 던전에 사람을 밀어 넣고 잘해 보라는 듯 미소 짓던 할망구의 얼굴을 떠올리니 주먹이 우는 기분이었다.
“아~ 사실은 제가 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홀로 역경과 맞서는 것, 그것도 로망이잖아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내가 다음에 밀어 넣어 주마.”
“진짜요? 약속했어요?”
“아니, 그냥 해 본 말이니까 기대하지 마라. 진짜 그러면 너희 엄마 볼 면목이 없어져.”
그렇게 말하며 유성원은 트레일러 안에 있는 회의실로 들어간다.
안에는 그래도 나름 어려운 B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온 유성원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비롯해서 꽤 호화스러운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차 안에서 먹는 겁니까?”
“그럼 밖에다 동네방네 소문내 줄까? E+급 헌터 유성원, B급 던전 솔로 클리어! 라고 플래카드까지 걸고 말이야.”
“이게 다 할망구 때문이잖습니까! 그 던전 있던 자리에 무덤 세워 드릴까요?”
“나는 이미 묻힐 데가 있어서 말이야. 허허. 아무튼 식기 전에 들게나. 저기 길드장이 손수 만든 거니 말일세.”
할망구의 말에 유성원은 움찔하면서 신소미 길드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 건지, 불안한 건지 고개를 홱 돌리고 있었다.
그녀의 소녀 같은 반응에 유성원은 화낼 기운을 잃어버리고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생각 이상으로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으음, 오랜 시간 지나서 약속된 밥을 드디어 먹는데… 엄청 맛있네요. 좀 실패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만화 같은 데나 나오는 거죠. 솔직히 우리 엄마 성격에 맛없게 된 걸 내놓겠어요? 물론 매일 밤마다 피나는 연습을…….”
“크흠! 아영아, 조용히 하고 먹으렴.”
“오~ 이 맛은 그 유명한 천석정의 맛인가? 오, 잘 재현했군. 여기 재료도 많이 없었는데…….”
사람이 넷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왁자지껄 떠들면서 먹게 되었고, 맛까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
업무의 연장인 회식 때나 아카데미아 식당 내에서 말고는 다른 사람들과 식사 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유성원으로서는 이런 따뜻한 밥상이 너무 낯설었지만, 조금은 좋다고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