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뭐지? 주변에서 경보?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마스터, 거기서는 소금과 설탕을 각각 한 숟갈 더 넣으시고, 더불어 기름을 좀 더 쓰셔서 볶아야 야채가 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닥까지 긁어 올린다는 느낌으로 힘을 주셔서 볶으십시오.]
“비상 명령인 줄 알았더니 요리 조언이었냐?”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 창에는 아칼론의 조언이 나타나 있었다.
적습이나 비상경보 같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지만, 굳이 이런 조언까지 할 건 없는데 괜한 참견 같았다.
어차피 짬밥은 짬밥이고, 그냥 전투 식량 팩에 있는 걸 쏟아서 그대로 볶는 게 전부인데 훈수라니 어이가 없었다.
[식사와 수면은 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맛있는 식사는 스트레스를 줄여 주고 사기를 유지시킵니다. 그러니 조리에 좀 더 신경 쓰십시오, 마스터. 냄비를 좀 더 힘 있게 올리면서 후려친다는 느낌으로 볶으셔야 합니다.]
“굳이 꼭 그래야 하냐?”
[아유! 지가 많은 걸 부탁한 것도 아니잖아유? 소금, 설탕, 기름 조금으로 맛과 풍미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데! 그걸 왜 안 한대유? 1의 노력으로 10의 맛을 챙길 수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해야지. 안 그래유?]
갑자기 아칼론 녀석의 말투가 평소의 무미건조한 음성에서 유명한 요리 사업가(?)의 음성으로 변하면서 투덜대는 말투가 나와 순간 깜짝 놀란다.
거기서 백씨 아저씨가 왜 나와?
“뭐냐, 지금 건?”
[보다 더 큰 설득력을 위해 X튜브에 나온 유명 요리 전문가이자 사업가의 음성 데이터를 이용하고 합성해서 조언을 드렸습니다.]
“아, 그렇군. 기술 참 좋구먼.”
[혹시 선호하시는 보이스가 있으면 그것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마스터의 휴대용 통신 단말기와 연산 도구 안에 들어 있던 것들 중 가장 재생 수가 많은 ‘노홍철, 주미숙 배우의 신작, 선생님과의 뜨거운 일대일 야간 자율 학습’에서 배우분의 목소리를 따서 요리 브리핑을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
이 미친 깡통 새끼는 왜 멋대로 남의 휴대폰과 노트북을 뒤지는 것인가?
나한테 이리저리 도움 되는 건 알겠는데, 이 또라이 같은 깡통 새끼의 참견이 정말 도를 넘어섰다.
“저기… 내 사생활은 좀 놔두면 안 되냐?”
[저는 KMG(나이트 메탈 골렘) 시리즈로서 마스터의 신변과 사생활을 보좌하고 모든 사항에 대해서 도움을 드리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혹시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까? 그럼 원하시는 배우가 있다면…….]
아무래도 아칼론 녀석에게는 ‘사생활 존중’이라는 단어와 개념에 대해서는 입력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청소, 빨래, 요리 다 해 주는 편리함의 대가인 것인가? 아무튼 일단 당장 내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존중에 대해서 입력해 줄 필요가 있는 건 확실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어이, 땜빵! 조리하는 데 뭐가 그렇게 시끄러워? 뭐 문제 있어?”
“아뇨. 아닙니다. 다 했습니다!”
젠장, 여기서 방해가 들어오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땜빵 스태프로서의 일을 제대로 해야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아칼론의 사생활 침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완성된 저녁 식사를 꺼낼 준비를 했다.
***
7시간 뒤, 새벽 2시.
마인 토벌대 야영지에서 서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곳.
새벽 2시, 사방은 어둠으로 물들고 가장 조용해서 기습하기 좋은 시각.
정민수 또한 그것을 잘 알기에 이 시간대를 선호했다. 그는 멀리서 굶주린 시야 스킬로 야영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물든 눈으로 야영지를 살피던 그는 경계를 하는 보초들과 하늘에 떠 있는 드론들을 살피면서 어떻게 기습할지 궁리한다.
“으음~ 생각보다 방비가 잘되어 보이지만… 방비가 잘된 게 전부는 아니지.”
[크르르릉……!]
[키에엑!]
정민수가 손을 튕기자 던전의 포탈이 열리면서 안에서 도살왕 휘하의 악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불러낸 것은 D급, E급의 하위 악마들로 포인트도 매우 싸서 얼마든지 불러낼 수 있는 무리들이었다.
A급, B급, C급의 최상급 악마들은 비장의 카드로 쓸 생각이었다.
“후우~ 그럼 어디, 던전에 있는 몬스터만 잡고서 S급이니 뭐니 착각하는 길드분들에게 마인(魔人)의 진짜 실력을 보여 줘 볼까? 흣챠.”
말과 함께 자신의 보우건을 꺼낸 그는 핏빛 화살을 메긴 다음, 소환된 하급 악마들을 돌진시키며 곧바로 적진을 향해 달려간다.
언뜻 보면 하급 악마들만 이끌고 가는 자살 공격 같았지만, 그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해서 기묘하게 느껴진다.
[경보! 경보! 서쪽 2킬로미터 지점에서 악마형 몬스터 무리가 돌진 중. 숫자는 약 2천!]
“첫날부터? 몬스터 무리인가? 아니면 기습인지 모르겠지만 드디어 올 게 왔군.”
위이이이이잉!
그리고 몬스터 떼거리가 달려오는 것을 빠르게 감지한 토벌대는 곧바로 대비 태세에 들어간다.
자고 있던 용병들과 스태프, 각성자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대응을 시작했다.
용병들은 악마형 몬스터에게 효과적인 특제 은탄이 장전된 현대 화기를 들고 쏘기 시작했고, 각성자들은 각자의 무장과 마법으로 현대 화기가 통하지 않는 급의 몬스터들을 응대한다.
“조명탄 발사! 몬스터 종류 판별은?”
“E급 살점 약탈자와 피를 먹는 개, D급 블러드 서커와 고기 탐식자를 위주로 한 몬스터들입니다. 전부 일반 화기로 처리가 가능한 놈들입니다.”
“좋아! 다진 고기로 만들어 버려!”
“예!”
투다다다다다!
성수와 마법으로 인챈트된 은탄은 각성자가 아닌 군인들의 화기로도 D급 악마형 몬스터에게까지 효과가 있는 물건이었지만, 탄약 가격의 문제 때문에 던전 공략엔 쓰이지 못하고 비축 물자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이렇게 토벌전에나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정석 전차의 탄두에도 신성 마법을 부여하여 터질 시 성스러운 빛을 터뜨릴 수 있는 신성 고폭탄이 악마들을 재로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진형을 지키면서 새어 나오는 놈들을 처리한다! 특히 D급들이 맷집이 좋으니 그놈들의 움직임을 묶는 걸 최우선으로 해라. 화력은 충분하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크아아악!]
[컹컹!]
[살점! 살점을!]
[쇠는 싫다. 고기를! 쿠엑!]
트레일러가 성벽이 되고, 용병 부대와 길드 각성자들의 화망에 악마들은 갈려 나간다.
그리고 이미 S급 마인(魔人) 정민수를 타격하기로 한 A급 각성자 10명은 고천용의 트레일러로 모인다.
“전원 모였군요. 현재 제 파티원들이 놈을 찾고 있으니 언제든 나갈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직접 달려서 제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분들은 제 청비룡(靑飛龍)에 미리 탑승하십시오. 아직 놈의 행방을 찾지 못했나?”
“찾았습니다. 이 멍청한 스캐빈저 녀석! 예상대로 악마들을 보내 놓고 숲에서 저격하고 있습니다! 서쪽으로 약 1킬로미터 거리입니다!”
S급 헌터 고천용의 파티원이 마법으로 숲속에 숨어서 저격을 일삼고 있는 ‘정민수’의 행방을 쉽게 찾아낸다.
자기 딴엔 수풀과 나무를 오가며 저격하고 있었지만, 청룡 길드 에이스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겁쟁이답게 안전거리에서 저격 중이군.”
“저놈이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니까요. 아무튼 사격하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이미 제 정령으로 위치 고정했습니다.”
“흥, 알아서 와 주니 너무 고맙군. 좋아. 그럼 다들 갑시다!”
고천용은 곧바로 자신의 길드와 타 길드에서 지원 와 준 각성자들을 이끌고 움직인다.
하나, 백야 길드의 장인 신소미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첫날부터 바로 기습을 걸어온 건 의외성을 노린 거라고 쳐도 S급 마인인 그자가 너무 쉽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었다.
“뭔가 이상하죠? 행적이 너무 빨리 잡히는데요?”
“음,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가능하면 두셋 정도는 여기에 남아 있으면 싶지만…….”
“이미 출발한 이상 늦었어요. 그리고 고천용 저 양반이 전력을 나누는 걸 허락할 리가 없죠.”
뭔가 불길한 예감을 받은 건 신소미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딘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S급 마인에게 대항하기 위한 전력을 너무 빡빡하게 준비해 온 탓에 안전하게 잡을 수 있는 11인 구성을 깨거나 쪼개자는 의견을 내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거기다 지휘권을 가진 고천용이 지금 막 출발한 시점에서 허가할 리가 없기에 따라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길드원들에게 조심하라고 일러두는 게 최선이겠군요.”
“그럽시다.”
“젠장! 공격이다!”
찜찜함을 느끼는 사이, 하늘에서 S급 마인 정민수의 화살 여러 발이 날아왔다.
핏빛 화살.
도살왕의 수하이자 마인들인 살점 사냥꾼들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생명력을 빼앗는다는 특징을 가졌지만 사용 마력이 많거나 도살왕에게서 공헌도를 주고 구입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토록 많이 날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그놈이 아니고서는 이만큼 핏빛 화살이 날아올 수가 없어요! 놈이 확실합니다!”
“기뻐하시는 건 좋지만 일단 방어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스캐빈저나 마인이 숨어 있는 것에 유의하라고 전하십시오.”
“알았네! 화염의 방패!”
화르르륵!
기뻐하는 것은 청비룡에 탄 일행뿐만 아니라 땅에서 E급, D급 악마들을 썰고 뛰어넘으면서 돌진하는 고천용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배짱으로 전투 첫날 가장 기력도 쌩쌩할 때 기습을 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그를 죽이고 돌아가면 새벽쯤 자신의 침대에 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이 너무 쉬우니 형님이 말한 지시를 지킬 필요도 없겠어.’
“뭐야? 뭐가 이렇게 빨라? 젠장!”
‘발견되었나? 그렇지만 이미 준비는 끝났다.’
고천용은 도망치는 정민수를 계속 쫓으면서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청비룡에 탄 지원 계열 클래스들은 각자 스펠을 준비한다.
물론 신소미는 기본적인 조명 마법 외에 지원할 게 없었기에 주변 상황을 보면서 혹시 무언가 있나 살핀다.
‘뭔가 이상한데?’
“아레나 오브 씰!”
“놈이 도망치는 길을 막겠습니다. 어스 바인드!”
“트랩 사이트! 덫을 조심하십쇼. 잔뜩 깔려 있습니다.”
한참 전투에 열중하느라 다들 깨닫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녀는 지금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보통 마인은 스캐빈저 다수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다면 주변에 아군을 잔뜩 두는 게 정상이다.
‘처음에 쏜 건 유인하기 위해서라고 쳐도! 지금 저렇게 도망치는데 주변에 다른 스캐빈저나 마인이 전혀 없다고?’
애초에 마인과 스캐빈저라는 존재는 이기적이고 자기 목적만을 생각하는 족속이다.
그런 놈이 자신에게 덤비는 이들을 모두 이렇게 정직하게 상대할 리 없었다.
“좋았어! 잡았다! 청룡의 이빨!”
콰득!
하나, 그러는 사이 고천용의 푸른 기운이 담긴 주먹이 정민수를 꿰뚫고 지나간다.
그의 육신은 부서져 뼈도 남지 않고 핏물만 뿌리면서 그대로 무너지는데, 거기서 고천용은 곧바로 위화감을 느꼈다.
S급 헌터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몬스터와 적을 죽였던 만큼 사람을 죽일 때의 손맛을 잘 기억하고 있는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느낌이 완벽히 아니었다.
마치 두부나 물주머니를 때려서 터뜨린 듯 너무 쉽게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설마! 이건 미끼? 속았……!’
(대장님! 본진 가운데에 A급 보스 몬스터 ‘용족 도살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B급, C급 보스 몬스터까지… 으아아아!)
“이런 제기랄!”
크오오오오!
깨달은 순간, 통신과 함께 본진이 있는 쪽에서 몬스터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가운데 거대한 몬스터가 달빛 아래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꼬맹이 놈들! 모조리 부숴 주마!]
A급 보스 몬스터 ‘용족 도살자’.
용을 사냥하고 잡아서 도살왕에게 바치는 아크데몬 중 하나였다.
20미터에 달하는 키에 거대한 검을 메고, 용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육중한 악마는 자비 없이 검을 휘둘러 트레일러를 부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