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하아~ 먹을 땐 감사히 먹었는데, 뒷감당은 되게 귀찮네.”
호텔 로비를 마치 왕좌처럼 개조해 놓고, 정민수는 같은 도살왕의 마인(魔人)과 스캐빈저들을 모아 둔 채 고심하고 있었다.
B급에서 순식간에 S급 마인이 된 건 좋았고, 정찰병도 제거했지만 역시 청룡 길드 놈들은 기세 하나 꺾이지 않고 토벌대를 꾸려서 온다고 한다.
까놓고 말해서 귀찮아 미칠 지경인 그였다.
“그 새끼들, 언제 온대?”
“4일 뒤라고 합니다.”
“염병, 빨리도 오네. 개새끼들…….”
“어떻게 할까요?”
“잠깐만. 고민 중이잖아. 하아~”
보통 길드라면 그냥 도망치거나 잠시 외국으로 떠서 잠수 좀 타면 조용해지는데…….
하지만 문제는 역시 상대는 죽어라 싸울 거라고 소문난 청룡 길드라는 점이었다.
그놈들이 쫓는 이상 세계에서는 도망칠 곳이 별로 없었다.
“애초에 도망쳐도, 그곳에 있는 애들이 S급 마인(魔人)을 가만 놔둘까요? 에휴~”
마인(魔人)이라는 카테고리로 구별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도살왕 성좌의 마인이다.
S급 마인의 존재는 세계 모든 국가를 자극하기에도 좋았기에 다른 악(惡) 성향 성좌의 영역에 들어가면 거기 있는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성좌 도살왕만큼 다른 악(惡) 성향 성좌들도 인간 기준에서 보면 사이코패스나 미친놈으로 여겨질 만큼 괴랄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보자… 위에는 얼어붙은 죽음, 서쪽엔 시황제, 동쪽은 일본 놈들, 아니면 66천마(天魔), 그거 넘어가서 태평양에는 영원한 분노. 어딜 봐도 청룡이 제일 할 만하네요.”
“그걸 빼더라도 여기를 지키는 게 훨씬 낫지.”
행여나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텃세와 눈총, 그리고 자신의 성좌를 버리고 다른 성좌의 터에 갔기에 양쪽으로 시달릴 게 뻔하다.
게다가 여기서는 성좌의 뜻만 거스르지 않는다면 왕처럼 살 수 있다.
마음껏 약탈하고, 돈과 보물을 모으고, 술과 여자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다. 지금도 당장 이런 회의 따위 집어치우고 어제 스캐빈저 상인에게 새로 사 온 여자와 떡치고 싶은 게 그의 속마음이었다.
“아~ 이러면 그냥 B급으로 있는 게 더 나았잖아. 염병!”
“아무튼 서울에 있는 정보상에게서 들은 결과 A급 각성자 10명, S급 1명을 민수 형님 상대로 구성하고, 나머지는 청룡 길드 외 5개 길드가 연합한 토벌대라고 하네요. 총 규모는 스태프, 다른 각성자, 용병 부대까지 족히 1천 명은 넘을 겁니다. 참고로 마정석 엔진 전차랑 헬기, 서울에서 지원 포격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것 같네요.”
청룡 길드의 원한과 더불어 S급 마인의 위험성과 또 성장할 경우 더 큰 위협이 되기에 모인 대규모 토벌대였다.
심지어 군사 병기까지, 동원할 수 있는 걸 죄다 동원한다는 점에서 진짜 전쟁과 차이점이 없었다.
“어휴~ 도망 못 간다는 걸 아니까 더더욱 난리군.”
“하지만 다른 성좌 영역에 가서 마인,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1만 배 낫죠. 그리고 이길 가능성이 없거나 뭔가 재미 볼 일이 없었으면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도 않았을 거 아닙니까?”
“짜식들, 눈치 죽이네. 키키킥!”
“이 바닥에서 저희가 하루 이틀 삽니까? 안 그러냐? 얘들아?”
“푸하하하.”
“낄낄.”
부하와 정민수는 서로를 보며 썩은 미소를 지었고, 회의에 참여한 다른 스캐빈저들과 마인들도 피식 웃는다.
스캐빈저와 마인. 다들 이 바닥에서 썩을 대로 썩은 만큼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 탈이었다.
즉, 정민수에게는 청룡 길드를 겁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비장의 수단이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눈치 하나로 이 바닥에서 먹고산 이 하이에나 같은 스캐빈저들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흐흐흐, 새끼들~ 멍청하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아까 전까지 투덜대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정민수는 냉혹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옥좌에서 일어난 그는 무기를 들고 내려가며 스캐빈저들을 슥 둘러본다.
각자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엔 충성심 따위는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바닥에 있으면 이게 오히려 더 믿음직스러운 것이었다.
신뢰, 충성, 의리 같은 건 그저 상대를 속이기 위한 발판이나 수단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놈들이 노리는 건 나고, 니들은 그저 내가 그놈들이랑 치고 박고 있을 때 각자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하겠지. 어떤 놈은 돈 되는 물건을, 어떤 놈은 성 노예로 부릴 쌔끈한 청룡 길드의 여성 길드원이나 스태프를, 또 어떤 놈은 도살왕 님에게 제물을 바쳐서 강함을, 그 외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새끼들이 있겠지.”
농담 같지만 농담 같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정민수를 보며 모여 있던 스캐빈저들은 긴장한다.
물론 다들 틈만 나면 서로의 뒤통수를 치는 건 다반사였고, 그걸 자랑하고 다녔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말한다는 건……?
“…크억!”
한 스캐빈저가 영 좋지 않은 느낌을 감지하고 도망치려 하지만, 손에 보우건의 화살이 박히면서 움직이지 못한다.
정민수는 손에 든 보우건을 서부극의 리볼버처럼 후 불더니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야야, 내 말 안 끝났어. 적어도 준비~ 시작! 하면 하자. 응? 그래서 말인데, 어차피 뒤통수 맞을 거면 뒤통수 먼저 치는 게 좋고, 믿을 수 없는 놈들을 데리고 싸울 바엔 믿을 수 있는 놈들을 데리고 싸우는 게 정상이지.”
스르륵…….
그 말과 동시에 정민수의 좌우에 던전 입구 같은 게이트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도살왕 휘하의 악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도살왕 소속의 E급 던전에서 보스급으로 나오는 ‘살을 저미는 자’, ‘살점을 원하는 마견’이 일반 병사처럼 떼를 지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다 C급 던전 보스 ‘피를 짜내는 자’와 B급 던전 보스 ‘거인 도축자’까지 다들 천천히 나와서 정민수의 애완동물처럼 그의 좌우에 선다.
“도살왕 님에게 그놈들을 바치니 단숨에 위계가 올라서 자연스럽게 포인트로 고용할 수 있게 되었지. A급 악마는 너무 비싸서 많이 고용 못했지만. 아무튼 이 친구들은 고용한 이상 계약은 충실히 따라 주기 때문에 배반할 걱정은 없지. 다만 단점은 역시 먹이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줘야 하는 거지만 말이야. 흐흐흐!”
[으르르르릉!]
[피… 피를 마시고 싶다.]
[다 조그만 놈들뿐이다. 거인이 먹고 싶다.]
지금 포탈에서 나온 악마들에게 우호적인 대상은 오직 정민수뿐. 같은 도살왕의 사도라도 위계가 낮으면 그냥 먹이로 보는 게 일반적이었기에 소환자를 제외하곤 이 자리의 누구도 안심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달려들어서 자신들로 배를 채우려 할 것이다.
“근데 이 친구들은 언제나 선불제로 일해서 말이야. 알았지? 식사 시간이다, 얘들아.”
정민수의 신호와 동시에 포탈에서 나온 악마들은 일제히 주변에 있는 스캐빈저들을 향해 달려든다.
먼저 눈치챈 스캐빈저들은 이미 호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고 빠져나갔지만, 밖에 나오자마자 땅속에 숨어 있던 ‘살아 있는 덫’들이 튀어나와 도망치려는 이들을 덮친다.
“이, 이건 덫? 정민수 저 개새끼!”
“젠장! 언제 이런 걸? 으아악!”
“함정 탐색! 개, 개자식! S급이 되더니 무슨 덫 설치량만 늘어났나? 아주 지뢰밭으로 만들어 놨네!”
“미친 새끼 아니야? 덫을 이만큼이나?”
“으아아아악!”
“끄아아아!”
“죽여!”
펑!
스킬로 덫 지대를 알아챈 그들은 멈춰 섰지만 뒤에선 계속해서 전투와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벗어나지 않으면 지금 정민수가 불러낸 악마들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선택지가 얼마 없어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호텔 안에는 악마들의 포식 장면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자신에게 덤비는 다른 스캐빈저를 보우건으로 처리하는 정민수가 있었다.
“오오? 이건 처음 알았네?”
[Lv.79 41.33퍼센트]
[Lv.79 41.58퍼센트]
[Lv.79 41.69퍼센트]
[…….]
“내가 직접 손쓰지 않고 쟤네가 먹는 걸로 경험치가 들어올 줄이야.”
정민수는 스캐빈저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악마들과 계속해서 눈앞에 뜨는 상태창 메시지를 번갈아 보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짓는다.
물론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수만은 없는 게 지금 이 안에 있는 스캐빈저들 중에서도 나름 자신에게 타격을 줄 만한 놈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참에 네놈을 바치고 내가 S급이 되어 주지! 컥! 운이 좋아서 된 놈이!”
“이 바닥은 운도 실력이라고!”
“죽어라! 죽어!”
도살왕의 영역은 이곳 개성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기에 저 위 만주, 평양 등등의 지역에서 힘 좀 쓰는 C급, B급 스캐빈저들도 이곳에 섞여 있었다.
놈들은 최근 자신이 S급이 되었다는 소식에 콩고물을 주워 먹으러 오거나, 아니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왔기에 방심할 수 없었지만 홈그라운드의 이점과 소환수를 통한 선제 기습 덕분에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길! 비켜! 비켜! 이 개 같은 자식… 크억!”
“너나 비켜!”
‘이 정도면 완전 거저먹기군.’
[크르르르… 알아서 찾아와 주니 고맙군. 크하하하!]
[간지럽구나. 벌레 같은 놈들.]
특히 거대한 악마인 ‘거인 도축자’와 ‘피를 짜내는 자’가 정민수의 좌우나 후방을 커버해 주는 덕분에 그는 편하게 보우건을 조준해서 쏘고 맞히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스캐빈저 사이에 연계나 협력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어서 혼란 상태에 있는 놈들은 절대 회복하지 못하고 각자 싸우는 건 물론 여차할 경우 자기들끼리 죽이는 등 아비규환을 보인다.
[크르르륵!]
[컹컹!]
[피와 내장을 뺀 다음 살코기만 챙깁니다. 물론 뼛속의 골수도 아껴선 안 되니 꼭 챙깁시다. 냠냠.]
[역시 뇌가 별미지. 히히히…….]
그렇게 잠깐이 지난 뒤, 결과는 뻔했다.
호텔 로비는 스캐빈저와 악마의 시체와 피로 가득했고, 정민수만이 고고히 선 채로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즐겁게 바라볼 뿐이었다.
“후, 후하하하하하하하하! 좋아. 좋아. 아주 좋아! 레벨 업! 새로운 특성 개방! 거기에 두둑이 쌓인 포인트! SS급도 금방이겠는걸?”
“암만 그래도 이번 건 심한 거 아닙니까?”
“오~ 너 살아 있었네?”
한참 성과에 만족하는 정민수의 곁에 그와 아까 전부터 신나게 떠들던 부관이 불쑥 튀어나온다.
옥좌 옆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에서 나온 그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시체들과 고기를 먹고 있는 악마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 채 투덜댄다.
“누가 여길 공사했는데요? 그나저나 이거 소문나면 여기에 애들 안 모일 건데,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겁니까?”
“스캐빈저 놈들이 그딴 거 신경 쓸까 봐? 그냥 대충 어떤 놈이 배신 때려서 정당방위 했다고 하면 그만이지. 처음부터 그러기로 했잖아? 79레벨이랑 80레벨은 격이 다르니까 말이야.”
“그야 그렇죠.”
처음부터 대비책 마련과 싸움을 위해 이 호텔에 모인 것부터가 정민수의 레벨 업을 위한 계략이었다.
그의 말대로 짝수 10단위 레벨에는 스킬 포인트가 주어지기 때문에 79레벨과 80레벨은 스킬 1개 차이였고, 그 상위 클래스의 스킬 하나는 최고급 아이템과 맞먹는 효과를 지니기에 일부러 이런 계획을 짠 것이다.
“이거 수습할 생각에 대가리 터질 것 같네요. 하아~ 치우는 것도 일이겠네.”
“그거 안 할 거면 너도 경험치감이지.”
“예. 합니다, 해요.”
“아무튼 난 이제 그 청룡 길드 자식들을 조지러 간다. 돌아오면 S급 마인에서 SS급 마인이 되어 있을 거니 기대하라고. 크흐흐! 흐하하하하!”
그렇게 부관을 놔두고 호텔을 출발하는 정민수였다.
시체를 먹던 각종 악마들과 몬스터들이 그의 뒤를 따라서 하나의 군세가 되었다.
정민수는 청룡 길드를 맞이하기 위해 던전과 숲으로 가득한 개성 남부로 향한다.
그에게 익숙한 홈그라운드이자, 살점 사냥꾼의 장점이 극대화되는 곳이기에 그곳을 전장으로 택한 것이었다.
‘보자. 4일이면 준비로 떡을 치겠군. 흐흐흐.’
다른 스캐빈저들을 속이기 위해서 징징거리는 척했지만, 그는 십수 년간 스캐빈저 일을 하고 나름 대규모 약탈과 전쟁도 경험한 베테랑이었다.
거기에 자기의 손발이 되어 싸워 줄 악마 군대까지 이끄는 데다 청룡 길드에 대한 정보까지 있으니, 사냥할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사냥으로 더 큰 힘을 얻고 노예들을 모을 생각에 미소가 절로 나오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