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하데스, 하데스 길드로 하고 싶습니다.”
“하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명계의 신 말인가?”
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야. 대장이 영혼을 볼 수 있으니 잘 어울려. 그런 의미로 한국적인 염라 길드는 어때?”
순간 영화배우의 얼굴을 하고 큰 소리로 웃는 염라대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은석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하데스가 좋습니다.”
“그래, 길드 주인이 좋다면 된 거지.”
윤꽃샘이 직원을 불러 금화를 보관하라고 말한 뒤, 먹다가 만 삼각 코뿔소 고기를 다시 입 안에 넣었다.
그제야 은석도 포크를 집어 들었다.
“일류 셰프가 요리하셔서 그런지 던전에서 먹던 것보다 맛있습니다.”
은석의 말에 윤꽃샘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몬스터 고기는 던전에서 사냥을 마치고 먹는 게 제일 맛있는 거지.”
그녀의 표정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된 레이드에 한 번 모시겠습니다.”
“하하, 기대하지.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기억해 두겠네.”
접시가 모두 치워지고 마지막으로 커피가 나왔다.
“그럼 나는 이제부터 하데스 길드 설립을 준비하겠어.”
“아! 그리고 저 말고 길드에 들어갈 사람이 있습니다.”
“귀신?”
은석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귀신도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사람부터.”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랍군. 대장이 추천하는 사람이라니, 나도 기대되는데.”
“조만간 어르신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런데 계속 어르신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요? 무려 태황 그룹 회장님이신데요.”
윤꽃샘이 손사래를 쳤다.
“됐어. 대장 아니라도 회장이라는 말 지겹게 들어. 어르신이 싫으면 너라도 불러도 되네. 특별히 대장에게는 허락하지.”
은석에게 찡긋 윙크를 날렸다.
“절대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녀 특유의 화통한 웃음이 한참 동안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럼 빠른 시일 내에 연락하겠네.”
“네, 기다리겠습니다. 어르신.”
* * *
띠링- 띠링-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문자 도착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길드에 돈을 얼마나 받아먹었길래 이렇게 안달이 난 거야.”
각성자 협회 이상균 부장의 문자였다. 그는 은석이 던전에서 나온 후부터 끈질기게 연락을 해 댔다.
물론 그의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이상균뿐만이 아니었다.
현기주의 뉴스가 나간 뒤부터 백재현과 다른 길드의 연락도 늘어났다.
공식적으로는 던전 내 살인 미수와 정욱 헌터의 자백으로 그의 죄가 밝혀졌다.
하지만 던전 안에 함께 있었던 용병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을 모두 막을 수는 없는 법.
이미 돈을 받고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용병들도 있었다.
은석에 대한 소문은 영상보다 더 빨리 퍼지기 시작했다.
“원래 눈보다 귀로 듣는 소문이 빠른 법이지.”
이상균 역시 돈을 받았던 길드의 압박을 받고 있을 것이다.
레이드에 참여해 달라는 그의 문자에 간절함이 흘러넘쳤다.
은석은 한숨을 내쉬며 바로 삭제 버튼을 눌러 버렸다.
“다녀왔습니다.”
다들 나갔는지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안만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들어오는 은석을 반쯤 뜬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나갔어?”
“그래, 이 몸이 드실 음식을 구하러 나갔다.”
“저장된 게 많은 돼지 고양이라 1년은 굶어도 될 텐데.”
청안이 기분 나쁜 듯 꼬리를 딱딱 내려쳤지만, 행동과 달리 말투는 느릿느릿했다.
“이 몸의 위대함을 그렇게도 인정하기 싫은가. 인간.”
은석은 냉장고에서 콜라 하나를 꺼내 마셨다.
“또 무슨 영화를 봤길래, 말투가 그따위야. TV 좀 그만 봐. 뚱보 고양이야.”
한마디 툭 던지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은석에게 말했다.
“인간, 훈련 변태가 왔다. 염라대왕이 널 부른 모양인데…….”
“그래?”
“저승에 가게 된다면 저승화 말린 잎을 좀 가져오지 않겠나? 오랜만에 저승화 차를 마셔 보고…….”
탁-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은석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청안의 말대로 최성운 차사가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차사님.”
그는 책장에서 꺼낸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나갔다 오는 것이냐.”
“네, 약속이 있어서.”
“팀원들은 다들 열심히 훈련하는데 너는 왜 던전을 나와서도 훈련장에 오지 않는 것이냐.”
“지금 가려고 했습니다.”
곧바로 자작나무 그림 앞으로 걸어갔다.
“그럼 당장 저승 훈련장으로 가실까요?”
은석의 능청에 최 차사가 헛웃음을 뱉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 필요 없고. 오늘 내가 온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다.”
“염라대왕님께서 절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최 차사가 보던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다.
“해머나 창왕에게 말하면 제가 내려갔을 건데요.”
“푸른 눈깔 괴수 놈한테 볼일도 있고. 겸사겸사.”
최 차사가 차사 부채를 꺼내 휘두르자, 염라대왕의 집무실 앞으로 가는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 * *
“세 번째인가?”
저승 훈련장에는 자주 내려갔지만, 염라대왕을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다시 봐도 섬뜩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염라대왕은 노트북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대왕님, 김은석 헌터가 왔습니다.”
최성운 차사가 말을 하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 미안. 내가 요즘 좀 바빠서 말이지요. 하하. 거기 앉으십시오. 김은석 헌터님.”
염라대왕이 테이블 위로 팔을 휘젓자, 다기 세트와 향기 좋은 저승화 꽃잎차가 나타났다.
뜨거운 차를 따르며 염라대왕이 말했다.
“이번에 아주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현기주 헌터의 일 말씀이신가요?”
찻잔을 은석의 앞으로 쓱 밀었다.
“저승에서도 미처 알아내지 못한 악귀를 소멸시키다니……. 기대 이상입니다. 김은석 헌터님.”
“최성운 차사님의 훈련 덕분입니다.”
말을 하며 힐끗 쳐다보니, 최 차사의 턱이 위로 슬쩍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 최 차사의 실력이야 두말할 것 없지요.”
염라대왕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의자에 기대었다.
“악귀를 찾아다니는 차사들이 정말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자꾸 늘어나는군요. 이승의 마력 농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서 찾기 무척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마력 농도가 높아지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음, 이승에서는 마력 농도를 감지할 수 없나 봅니다. 처음 던전이 생긴 7년 전부터 마력의 농도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던전이라는 것이 생기고 2년 뒤 은석은 각성자가 되었다.
5년이라는 세월 동안 마력 농도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마력이 짙어지니 그 속에 숨은 악귀들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김은석 헌터가 숨은 놈 중에 하나를 소멸시킨 거지요.”
염라대왕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악귀도 잡고 살인마도 지옥에 갇혔습니다. 제가 보상을 하고 싶은데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지옥에 갇히다뇨? 현기주는 지금 교도소에 있습니다.”
최성운 차사가 대신 대답했다.
“현기주는 몇 시간 전에 사망하였다.”
“누가 죽인 건가요?”
“아니다. 그놈은 악귀와 오랫동안 육체를 공유했다. 김헌이 빠져나갔다고는 하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놈을 악귀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지.”
한 번 악귀가 들어갔던 육체는 빙의가 쉬운 몸으로 바뀐다.
특히 현기주처럼 오랜 시간 빙의된 경우라면 악귀에게는 문이 활짝 열린 집과 같았다.
최 차사의 말처럼 빙의할 인간만 찾아다니는 악귀들이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악귀뿐만 아니라 주변의 잡귀들까지 현기주의 육체를 차지하려고 했다.
수십 구의 혼령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으며, 그의 주변에는 늘 귀신들이 버글거렸다.
악귀들이 뿜어내는 탁한 기운을, 그의 심장이 더는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 현기주는 저승에서 심판을 받나요?”
염라대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 놈에게는 프리패스권이 주어지지.”
“프리패스권요?”
“지옥으로 가는 직행 버스입니다. 하하하.”
왠지 신나 보이는 염라대왕에게 최 차사가 체통을 지키라는 말을 건넸다.
“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저승차사들도 찾아가지 않는다. 저승차사의 역할은 죽은 자들을 저승으로 데려오는 길잡이와 같은 역할인데, 그런 놈들은 그것조차 아깝지.”
“그럼 혼자 저승을 찾아오는 건가요?”
“지옥의 수문장들이다.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오는 즉시 괴수가 삼켜 지옥 감옥에 처넣어 버리지.”
은석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현기주가 김헌이 갇혔던 지옥 감옥을 함께 쓰는 거군요.”
최 차사와 은석의 이야기가 끝나자, 염라대왕이 손뼉을 짝짝 쳤다.
“자자, 그런 쓸데없는 놈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번에 고생하신 우리 저승 헌터님께 선물을 하고 싶은데, 뭐가 필요하십니까?”
비워진 잔에 차를 채우며 염라대왕이 다시 물었다.
은석은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대왕님, 숨어 있는 악귀를 차사들이 찾는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승에서 악귀만 찾아다니는 전담 차사들이 있습니다.”
“그럼 찾아낸 악귀의 존재는 어떻게 공유하는 거죠?”
염라대왕이 최 차사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차사 부채를 꺼내 허공에 휘두르자 전략실에서나 볼 법한 평면의 지도가 허공에 나타났다.
한 번 더 휘두르자 아무것도 없었던 지도 위에 점들이 떠올랐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에 반짝이는 작은 전구 같았다.
“저게 뭔가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악귀 현황판? 하하. 이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요.”
최 차사가 부채를 접어 지도를 툭 쳤다.
“이 점들은 현재까지 차사들이 찾아낸 빙의된 자들이다.”
지도 위에서 반짝이는 엄청난 점의 수에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이렇게나 많은데 왜 저에게 찾아서 소멸시키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최 차사 특유의 냉랭한 눈빛으로 은석을 쳐다봤다.
“네놈은 이제야 겨우 힘없는 악귀와 싸울 수 있게 성장했다. 이전의 너라면 아마 잡귀 몇 마리 잡다가 죽었을 것이다.”
맞는 말이었지만 왠지 기분이 나빠 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지금도 겨우 중급 악귀 정도밖에 상대하지 못하지. 그것도 네놈 팀원들이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니냐? 흉악귀가 나왔으면 나를 사부가 아니라 저승으로 가는 인도자로 만났을 테지.”
‘아, 네네.’
최 차사의 말을 듣고 있던 중 현황판의 특이한 점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색깔이 여러 가지네요?”
“악귀의 등급에 따라 표시한 것이다.”
지도 위에 나타나는 점의 색깔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할 수 있었다.
가장 낮은 단계인 귀물은 노란색, 원귀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었다.
악귀의 경우 하급, 중급, 상급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가장 수가 적은 점이 붉은색인데, 저게 상급 악귀인가요?”
“그렇다.”
“그럼 흉악귀는 무슨 색깔이죠?”
“검은색.”
은석이 씨익 웃으며 현황판을 가리켰다.
“저것을 주십시오.”
염라대왕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저게 왜 필요합니까?”
“어차피 제가 다 잡아야 할 악귀들이 아닙니까. 직접 보고 찾아서 소멸시키거나 지옥에 넣겠습니다. 이제 잡귀 정도는 잡을 수 있으니까요.”
“김은석 헌터님, 진정한 저승 헌터가 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염라대왕의 명령에 최 차사가 부채를 휘둘러 현황판을 사라지게 했다.
“저승 훈련장에 성 하나를 마련했다고 들었는데 그곳에 보낼까요?”
“아닙니다. 제가 매일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악귀라고는 하나 어쨌든 빙의된 인간을 찾아야 하는 일.
그들의 동선과 주소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황희준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저의 저승 시스템 안에 심어 주십시오. 언제든지 부르면 바로 볼 수 있게 말입니다.”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럼 악귀 현황판을 보내 드리지요.”
염라대왕이 손가락을 탁 튕겨 소리를 냈다.
[악귀에 빙의된 자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를 등록하려고 합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승인.”
눈앞에 뜬 메시지 창이 촤르륵 움직였다.
[지도가 등록되었습니다. 시동어를 정해 주십시오]
“맵.”
[시동어 ‘맵’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은석이 명령어를 내뱉자,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지도가 펼쳐졌다.
휴대폰에서 검색하듯, 손가락을 들어 지도 한곳에 대고 펼쳤다.
순간, 펼친 곳의 위치가 빠르게 확대되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