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클리어하시죠. 헌터님.”
“아니, 이걸 제게…….”
은석이 던전핵을 김정훈에게 내밀었다.
“고스트 던전은 김정훈 헌터님의 솔로 플레이입니다. 그러니 헌터님이 마무리하셔야죠.”
“클리어! 클리어!”
어느새 다가온 윤꽃샘이 호들갑을 떨었다.
김정훈이 눈물을 글썽이며 은석이 내민 던전핵은 받아 들었다.
손바닥 위에 놓인 반짝이는 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던전에 떨어진 후 홀로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짜, 제가 던전을 클리어한 건가요?”
죄책감에 어두웠던 그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클리어하셨습니다. 이제 던전을 나가야지요.”
“나도! 나도 해 보고 싶어요. 던전 클리어.”
폴짝거리는 윤꽃샘의 모습에 은석이 도끼눈을 떴다.
“하하. 함께해요. 두 분이 도와주셔서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윤꽃샘은 김정훈 헌터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더니 은석에게 얼른 시작하라고 재촉했다.
은석이 왼손은 김정훈의 손 아래에 받히고 오른손을 들어 던전핵을 내려쳤다.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유니크 아이템은 최초로 던전핵을 잡은 자의 소유입니다.]
고스트 던전의 보스는 여왕개미가 아니라 순간이동을 하는 던전핵이었다.
핵을 깨는 것이 바로 클리어의 조건.
던전핵이 파괴되자, 동시에 여왕개미 굴 전체가 암전된 듯 깜깜해졌다.
여왕개미의 미라가 있던 서 자리에 커다란 입구가 나타났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 던전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고스트 던전을 탈출했다.
“후-아! 콧속을 파고드는 이 더러운 공기. 드디어 돌아왔구나.”
은석이 주변을 돌아봤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국도변 어디쯤인 것 같았다.
“클리어되면서 마력이 사라졌으니, 각성자 협회에서 알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은석의 말에 김정훈이 빙긋 웃었다.
“……저는 그 전에 제가 가야 할 곳으로 가야지요.”
“알고 계셨습니까?”
김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어느 날 바닥에 누워 있는 제가 보이더군요.”
“힘드셨겠군요.”
“스스로 되뇌었습니다. 난 살아 있다. 난 살아서 여길 나갈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저의 죽은 몸이 보이지 않고 진짜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김정훈이 헛헛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저승차사가 나타났다.
“저기, 잠시만 김은석 헌터님과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눌 수 있을까요?”
저승차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모두 헌터님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으신 김정훈 헌터님 덕분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헌터님께 감사할 겁니다.”
“만약에 저를 보지 못하셨다면 영원히 고스트 던전 안에 갇혀서 괴로워하며 살았겠지요. 저를 알아봐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정훈이 악수를 청했다.
은석이 맞잡자, 두 손을 감싸고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망자 김가(家)가 스킬 전달을 원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스킬 말고……. 저와 함께 몬스터와 싸우시는 건 어떠십니까?”
죽었으면서도 헌터의 의무를 다한 김정훈이 마음에 든 은석은 자신과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김정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피곤합니다. 이제 좀 쉬고 싶군요. 이것은 저의 선물입니다. 앞으로 몬스터와 싸우시는 데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그가 어떻게 고스트 던전에서 버텨 왔는지 알기 때문에 은석은 김정훈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건네는 은석의 손안에 푸른 화염이 일렁이며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고맙습니다. 저는 이제 편안하게 긴 잠을 자야겠습니다.”
김정훈이 환하게 웃었다.
저승차사의 망자 확인 절차가 끝나고 그는 사라졌다.
남은 차사 한 명이 은석에게 다가와 물었다.
“저분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왜 여기에 계시는 건가?”
“제가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으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은석이 윤꽃샘을 향해 걸어갔다.
“어르신, 이제 자녀분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셔야죠.”
은석이 바라보는 윤꽃샘은 더 이상 여고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손도끼를 넣어 둔 배낭도 사라졌다.
교복 대신 환자복을 입고 새하얀 커트 머리를 한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백발의 숏 커트가 잘 어울리는 세련된 할머니였다.
“처음부터입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 늙은이의 유치한 연극 놀음에 맞춰 준다고 고생했네.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여고생이 된 것 같더라고.”
은석이 미소를 지었다.
“진짜 여고생처럼 느껴졌습니다.”
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할머니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여고생으로 변했다.
“그럼 이왕 시작한 거 마지막까지 꽃다운 윤꽃샘으로 있어야겠어. 병원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돌아다닐 수도 없는데 우리 병원까지 걸어갈까?”
국도를 향해 뛰어가려는 윤꽃샘의 배낭을 움켜잡았다.
“안 됩니다.”
은석이 아공간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공간을 처음 본 윤꽃샘이 눈을 크게 뜨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 황희준이 전화를 받았다.
울먹이는 그의 목소리.
“형님, 무사하십니까? 그렇게 사라지셔서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고맙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지도 찍어서 보낼 테니까 여기로 좀 와라.”
위치 정보가 나타난 지도를 황희준에게 보냈다.
“차가 올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리자.”
입구 근처에 놓여 있는 돌을 의자 삼아 앉았다.
윤꽃샘도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던전을 클리어하다니. 기분이 정말 좋아요.”
곧 새벽이 올 것 같은 어스름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짜 헌터가 되고 싶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던전이니 몬스터니 다들 세계가 멸망한다고 난리였지만, 난 이상하게 헌터만 보면 심장이 막 두근거리더라고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지. 막상 해 보면 위험하고 별로야.”
윤꽃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깔깔거렸다.
“일흔이 되도록 결국 각성은 못 했지만 아저씨 덕분에 소원 성취했어요. 던전에도 들어가 보고 은빛 개미도 죽이고. 아! 그런데 나는 지금 영혼인데 어떻게 몬스터를 죽일 수 있었던 거죠?”
“그게 지금에 와서 궁금해? 던전에 떨어지면서 내 힐을 얼마나 많이 흡수했는지 기억 안 나?”
“아, 그래서 내가 싸울 수 있던 거구나. 어쩐지 아저씨한테 붙어서 떨어지는데 기분이 색다르더라니. 꽤 특이한 힐러네요.”
윤꽃샘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 * *
“형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막 도착한 황희준이 콜라를 들고 은석을 향해 뛰어왔다.
“던전에서 나오셨으니 혹시 이걸 드시고 싶어 하시지 않을까 해서…….”
그의 말대로 은석은 탄산 가득한 음료를 들이켜고 싶었다.
‘새끼, 점점 센스가 좋아지는데.’
은석이 씩 웃으며 콜라를 받았다.
“고맙다. 안 그래도 던전 안이 사막이라 목이 텁텁했었는데.”
“형님 집으로 바로 가면 되는 거지요?”
“아니, 가는 길에 병원에 좀 들러야 해.”
“병원요?”
“그래. 잠깐이면 된다.”
윤꽃샘이 보일 리가 없는 황희준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병원에 도착할 때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바쁘게 걷고 있었다.
은석은 윤꽃샘과 그녀의 병실 앞에 섰다.
그녀는 다시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고맙네. 덕분에 즐거웠어.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즐거운 기억이 모두 사라질까 봐 걱정되지만…….”
“그런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기억나실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도 내가 자네를 찾아가지. 그때 아주 큰 선물 하나를 주겠네. 오늘의 보답으로.”
그녀의 말에 은석이 미소 지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은석이 윤꽃샘을 똑바로 바라봤다.
“헌터 윤꽃샘.”
자신을 헌터라고 부르는 말에 윤꽃쌤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턱을 치켜들었다.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었다.
“헌터 윤꽃샘, 고스트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수고했다. 다음 던전까지 휴식을 취하도록.”
윤꽃샘이 거수경례를 하며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대장님.”
뒤돌아 병실 안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VIP 병실이 분주해졌다.
특별한 이상은 없었지만, 이유 없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던 환자가 의식을 찾은 것이다.
“엄마? 내가 보여? 선생님, 우리 엄마 괜찮으신 거죠?”
급하게 달려온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순간.
“으하하하하!”
환자가 갑자기 병실이 떠나가라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의식 불명으로 누워 있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건강하고 시원한 웃음소리였다.
의료진과 보호자 모두 깜짝 놀랐다.
“하하핫!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 한바탕 신명 나게 잘 놀았다!”
윤꽃샘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병실 밖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문 옆에 서 있던 은석이 싱긋 웃으며 걸어 나왔다.
“형님, 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가자.”
은석이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을 열었다.
김정훈의 이름이 나오는 기사 몇 개를 훑어봤다.
“희준아, 내가 감동적인 기사 소재 하나 제보해 줄까?”
* * *
며칠 뒤 인터넷에서는 사망한 헌터의 이름이 실시간으로 검색창을 도배했다.
[한국 각성자 협회에서는 고스트 던전이 클리어되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저승에서 온 헌터’라는 사이트에서 게시된 기사를 토대로 고스트 던전을 클리어한 헌터가 누구인지 밝혀졌습니다.]
기사 아래에 각성자 협회의 기자 회견 영상이 이어졌다.
“시민들을 위협한 고스트 던전이 클리어되었다는 것이 확실합니까?”
“네, 조사 결과 익명 제보자의 말대로 고스트 던전이 소멸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어떤 헌터가 클리어한 겁니까?”
“가람 길드의 김정훈 헌터입니다.”
“김정훈 헌터는 3년 전에 실종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3년이나 고스트 던전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겁니까?”
“던전은 개미굴과 흡사한 형태였습니다. 실종된 사람들의 시신들이 발견되었고, 멀지 않은 곳에 김정훈 헌터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신 옆에 김정훈 헌터가 조사한 개미굴의 형태와 동선이 적혀 있는 메모가 발견되었습니다.”
기자들이 서로 질문을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손을 들었다.
“개미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정훈 헌터가 죽인 게 맞습니까?”
“그렇다고 판단됩니다. 개미 알과 여왕개미를 불에 태운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또한 화염 마법사인 김정훈 헌터의 활약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이핑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협회 대변인은 말을 이어 나갔다.
“단, 마르고 건조한 날씨로 인해 김정훈 헌터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던전이 클리어된 다음 꽤 시간이 지난 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추측할 뿐입니다.”
기사와 영상의 댓글에는 김정훈 헌터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고스트 던전으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고마움이 넘쳐났다.
기사를 읽으며 은석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죽어서도 포기하지 않는 집념만은 정말 칭찬받을 만하지.’
김정훈 헌터는 고스트 던전에 떨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말처럼 3개월 정도 살아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죽음을 외면하면서까지 김정훈은 끊임없이 던전 클리어만을 되뇌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가 탈출할 수 있었고.’
은석이 손안에 조그마한 푸름 화염 하나를 만들었다.
“상태창.”
[상태창]
이름: 김은석
프로젝트명: 저승헌터
클래스: 힐러(F등급)
히든클래스: 네크로맨서(저승형 Lv12)
[특성]
귀안(승계)
생력(승계)
귀력: 1,200/1,200
[스킬]
정보탐색: Lv3
팔귀의 재생력
쉴드/하이드
푸른 화염
[귀속령]
+고스트형
+몬스터형
+인간형
“역시 인스턴트 던전이라 경험치가 쭉쭉 올라가네. 던전 한 번에 레벨 12까지. 어? 귀속령 스탯이 바뀌었네?”
카테고리로 정리되어 있는 귀속령을 클릭해 보니 그가 처음 잡은 지박령부터 은빛 개미 군단까지 현재 은석에게 귀속된 영을 보여 주었다.
“고스트형과 몬스터형으로 구분되었군. 귀속령이 많아지면 어떻게 관리할까 싶었는데, 알아서 정리해 주니 좋네.”
따르릉-
이상균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석 군?”
“먼저 전화를 주시다니, 무슨 일 있으십니까? 부장님.”
“우리 사이에 꼭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나요. 섭섭합니다. 은석 군.”
음흉한 이상균의 웃는 소리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새끼가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이래?’
“요즘 각성자 협회에 은석 군에 관해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은석 군의 활약을 들었는데……. 엄청나더군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은석의 활약을 본 헌터가 한둘이 아니니.
“그래요? 제가 들어간 던전이 몇 군데밖에 없는데.”
“이 바닥이 소문이 참 빠릅니다. 연락이 얼마나 오는지……. 은석 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하더군요.”
은석이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