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오랜만에 몬스터를 잡아 보니 다시 살아난 것 같았겠지. 그런데 나는 매번 생력을 네게 줄 수 없어. 그러니까 소원도 이뤘으니 저승에 가서 심판받고 환생이나 해.”
은석이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생력 말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고블린 던전에서 당신의 명령을 받아 김호철을 잡고 있던 지박령처럼 말입니다.”
이문성의 말이 맞았다.
은석에게 귀속되어 그의 권속이 되면 생력을 받지 않아도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은석은 그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인간이 죽으면 저승에 가는 것이 순리다. 이미 자연스러운 순리를 거스른 이문성이었다.
‘하……. 잠시 같이 있었다고 그새 정이라도 든 거야?’
이문성이 은석을 따라오며 끈질기게 그의 곁에서 싸우고 싶다고 졸라 댔다.
그를 계속 무시하며 앞만 보고 걷는 은석의 눈앞에 메시지가 떴다.
[망자 이가(家)의 굳은 의지가 영원의 충성을 맹세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뭐? 영원의 충성?”
은석이 인상을 팍 쓰며 이문성을 돌아봤다.
“그동안 헌터로 싸웠으면 됐지. 얼마나 더 싸우고 싶은 거야? 너 살육에 미친놈이었어?”
“각성자가 되면서 제 꿈은 던전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아픈 바람에 목표가 바뀌었지요. 몇 년 동안 정령의 보석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녔고.”
은석이 이문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네 말처럼 목표는 늘 바뀌게 마련이야. 아내도 건강해졌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고블린과 싸우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예전의 목표가 다시 떠올랐고, 죽었는데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니 놀라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문성이 잠시 말을 멈췄다.
“보답하고 싶습니다. 제가 악귀로 변하기 전에 저와 아내를 구해 주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은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충직한 성격의 놈들은 이래서 도와주면 안 된다니까.’
[망자 이가(家)의 굳은 의지가 영원의 충성을 맹세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더 뜨는 메시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문성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 은석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야. 귀속하게 되면 해제를 하지 않는 이상, 내가 죽기 전까지는 내 명령에 따라야 해. 알고는 있어?”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꾸 존댓말이야?”
병원에서부터 이문성은 은석에게 존댓말을 썼다.
왜 그런지 묻고 싶었지만, 분위기 때문에 그냥 병원을 나온 은석.
“당신, 나보다 나이도 많잖아.”
이문성이 멋쩍은 듯 두 손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그렇지요. 음, 너무 고마워서 저도 모르게…….”
은석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혼자 서서 갑자기 웃는 은석을 보며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한참을 그렇게 웃기만 하던 은석.
“좋아. 앞으로 계속 그렇게 깍듯하게 말해. 이제 내 부하가 될 테니까.”
은석의 말에 이문성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그럼…….”
이문성을 바라보며 은석이 메시지에 대한 답을 말했다.
“수락한다.”
[망자 이가(家)가 귀속령이 되었습니다. 귀속령에 대한 이름을 정해주십시오]
“응? 이름?”
하급 귀물인 지박령을 귀속할 때와 달리, 이문성을 어떻게 부를지 정하라는 알림이 떴다.
이문성이라는 이름은 살았을 때의 것. 죽은 다음 모든 망자는 성으로만 불린다.
은석의 귀속령이 된 지금, 그에게 새로운 이름이 필요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환생한 건 아니지만 일반 망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인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문성에게 물었다.
“이름을 새로 정해 주라는데, 불리고 싶은 이름이라도 있어? 없으면 원래 이름 그대로 하고.”
은석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이문성이 말했다.
“해머. 해머라고 불러 주십시오.”
단순했지만 왠지 그의 커다란 덩치와 묵직한 성격에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았다.
“그래, 해머라고 부르지.”
[귀속령 망자 이가(家)의 새로운 이름은 ‘해머’입니다]
동시에 이문성, 해머의 온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은석이 눈을 찌푸릴 정도로 밝은 빛이 사그라들자, 해머의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죽었을 당시에 입었던 꾀죄죄한 옷에, 얼굴에는 머리가 뚫려 흘러나온 피가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변한 그의 모습은 새롭게 구입한 신체 강화복을 입은 듯 깔끔한 차림새였다.
무엇보다, 상처가 사라져 깨끗하고 멀끔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스스로도 변한 자신의 모습에 놀란 듯 얼굴을 더듬거렸다.
은석이 웃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해머, 새롭게 태어난 걸 축하한다. 앞으로 잘해 보자.”
이문성이 악수 대신 은석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해머의 질문에 은석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죽을래?”
“그럼, 뭐라고 불러야…….”
“이렇게 된 거 팀이나 하나 만들지 뭐. ‘팀 고스트’ 어때? 앞으로 같은 팀원이니 그냥 대장이라고 불러.”
“네, 대장님.”
“대장.”
해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대답했다.
“네, 대장.”
* * *
은석의 귀속령이 된 해머는 저승의 훈련장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를 소환해제 한 후, 은석은 집에 도착했다.
휴대폰으로 아이템 거래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아직 황희준에게 준 고블린 주술사의 해골이 올라오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빨리 팔라니까.”
은석이 황희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꽤 오랫동안 신호음이 이어진 후 전화를 받았다.
“황희준! 뭐야? 주술사 해골 왜 아직 안 팔아?”
은석의 질문에 아무 대답이 없는 황희준.
“여보세요? 황희준 씨 핸드폰 아닙니까?”
다시 묻는 은석의 말에도 조용했다. 은석은 순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문자로 주소 찍어서 보내.”
바로 전화를 끄고 문자 오기만을 기다렸다.
띠링-
짧은 주소만 적혀 있는 그의 문자.
은석이 택시를 불러 타고 주소가 적힌 아파트로 출발했다.
황희준이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한 은석은 굳이 몇 호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사는 곳을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집이 보였다.
“저기군.”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 도착했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회색의 연기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은석이 조용히 걸어가 황희준이 사는 805호 앞에 섰다.
손잡이를 잡으니 잠겨 있지 않은 문이 그대로 열렸다.
‘내가 올 거라고 열어 놓은 건 아닐 테고.’
문을 열고 들어간 황희준의 아파트 안은 복도처럼 회색빛의 연기로 가득했다.
환각을 일으키거나 독성을 품고 있는 연기는 아니었다. 냄새도 없었고 움직임도 없었다.
마치 흐릿한 꿈속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황희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반쯤 감긴 눈은 초점이 없었고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은석이 그의 앞에 서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의식은 조금 있는 것 같은데, 말은 하지 못하는 상태인가.’
은석이 황희준의 집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의 눈에 고블린 주술사의 작은 해골들이 보였다.
‘이 새끼, 팔라고 준 걸 장식품으로 쓰고 있어.’
컴퓨터 모니터 앞에 가지런히 놓아둔 해골을 본 은석은 어이가 없었다.
열 개의 해골 입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황희준을 괴롭히는 존재가 무엇이든 원인은 주술사의 해골임에는 분명했다.
털썩-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은석은 빠르게 거실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 흔들거리며 앉아 있던 황희준이 소파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 이빨을 박고 피를 빨고 있는 존재가 보였다.
‘몽마.’
[하급 악귀, 몽마 흡귀, 고블린 주술사의 사역마]
잠을 자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몽마 흡귀였다.
흡혈하면서 사람의 몸 안에 타액을 넣어 계속 반 가사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악귀.
깨어나고 싶어도 악몽 속에서 헤매게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원할 때 찾아와 피를 빨아 먹었다.
‘잠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전화를 받은 거군.’
흡귀는 은석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고 정신없이 황희준의 피를 빨았다.
피를 빨리는 황희준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변해 갔다.
은석이 흡혈에 정신 없는 악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 있는 헌터라 더 맛있지?”
흡귀가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은석을 놀란 듯 쳐다봤다.
그 모습에 은석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그만하지. 그 새끼, 죽으면 안 돼. 아직 써먹을 데가 많거든.”
입가에 피를 뚝뚝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흡귀.
작은 몸에 비해 긴 팔을 가진 흡귀가 뾰족한 손톱을 치켜세우며 은석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가볍게 팔을 피한 은석이 아공간에서 귀검을 꺼냈다.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귀검에 흡귀가 놀라 뒤로 물러났다.
“무섭지? 그러니까 얌전히 죽자.”
소리 없는 괴성을 지르며 은석에게 달려드는 흡귀.
은석이 칼을 사선으로 그어 흡귀의 두 팔을 한 번에 잘라 냈다.
입을 쩍 벌리며 비틀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흡귀의 목을 빠르게 내려쳤다.
[몽마 흡귀가 소멸하였습니다. 귀속하시겠습니까?]
“아니.”
은석이 빠르게 귀속을 거절했다.
“저런 건 포인트로 없애 버려야지. 가지고 있기도 찝찝해.”
[귀속을 취소하였습니다. 귀력이 증가하였습니다]
은석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귀검을 들어 장식해 놓은 열 개의 해골을 가로로 그어 버렸다.
반으로 잘린 해골 안에서 엄청난 연기가 뿜어져 나오다가 갑자기 다시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황희준의 집과 복도를 가득 채운 연기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말을 안 들어요. 말을.”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피를 빨렸는지 황희준의 온몸은 미라처럼 마르고 검게 변해 있었다.
은석이 그의 볼을 세게 쳤다.
“야! 정신 차려 봐.”
여전히 반쯤 감은 눈이었지만 조금 전과 달리 정신을 차린 듯 은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황희준이 입을 열어 은석을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몸 안 대부분의 수분이 사라진 상태. 바싹 말라 버린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뭘 모르는 너한테 저런 저주템을 열 개나 준 내 잘못이지.”
은석이 황희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에서 하얗게 빛이 나며 황희준의 몸 안으로 스며 들었다.
몸 안에 다시 생명력이 흐르고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황희준이 침을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아직은 꺼끌꺼끌한 목소리였다.
“혀……엉님.”
자신의 살려 준 은석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잠시 흐르자, 다시 예전처럼 기력을 되찾았다.
소파에 앉아 은석이 건네준 따뜻한 물을 연거푸 마셨다. 목에 깊이 뚫려 있던 두 개의 구멍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부터 그런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제 목에서 피를 빤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려고 했지만, 꿈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흐리멍덩하기만 하고…….”
“그러니까 빨리 팔라고 했잖아. 해골은 왜 안 팔고 장식해 둔 거야.”
은석이 황희준에게 버럭 화를 냈다. 기가 죽은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형님이 주신 첫 선물이라…….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서.”
은석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형님 전화 덕분에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말이 안 나와서 미칠 것 같았는데, 전화만으로 제 상황을 어떻게 아시고 문자를 보내라고.”
황희준이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은석을 바라봤다.
“형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제 목숨은 형님 것입니다.”
황희준이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충성 맹세.
은석은 피식 웃으며 비장한 표정의 황희준을 봤다.
‘죽은 놈이고 산 놈이고 다들 이렇게 충성을 하겠대. 고맙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