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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 힐러는 네크로맨서-6화 (6/226)

6화

도미노처럼 촘촘히 서 있는 빌라 사이를 빠르게 걸어 들어가는 은석.

막다른 골목에서 걸음을 멈췄다.

회색으로 칠해진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다른 건물보다 더 허름해 보이는 빌라 앞.

“들어갈 수 있을까?”

입구에 서서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삼 층까지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외벽과 크게 다르지 않은 허름한 301호 문 앞에 섰다.

천천히 도어락을 열면서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켰다.

“내가 미쳤지. 마력이 안 맞으면 손가락을 자르게 설정해 놓다니.”

그는 과거의 자신이 한 어이없는 짓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손가락을 든 채 서 있는 301호는 이전의 은석이 살던 그의 집이었다.

마력을 감지해 문을 열 수 있는 도어락을 설치해 놓은 집.

각자 지문이 다른 것처럼 마력 역시 그랬다.

은석은 현찰과 각종 아티팩트를 집 안에 보관해 놓았다.

그 때문에 마력 도어락 실패 시 어마어마한 페널티를 걸어 놓았다.

바로 손가락 절단.

염라대왕을 만날 때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았다.

“후우. 실패라고 뜰 때 바로 빼면 괜찮지 않을까?”

천천히 손가락을 집어넣자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마력 감지가 시작됩니다. 셋, 둘…….]

엉덩이를 뒤로 빼며 손가락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붉은색이 뜰 거 같으면 바로 빼자.’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도어락 창을 노려봤다.

[하나……. 띠리릭.]

“허억.”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아 한 손으로 문을 잡고 잠시 서 있었다.

“심장이 쫄깃쫄깃하구만.”

다른 육체였지만 다행히 마력 파장은 같았다.

문이 열리자, 은석은 조심스레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불산 길드 던전에 가느라 바쁘게 나온 그 시간에 멈춰 있었다.

자신의 집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다시 들어왔다.

마치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거실을 돌아다니며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말라비틀어진 그릇에 물을 채워 두고 방으로 들어가 몇 벌 없는 외투가 걸려 있는 장롱 문을 열었다.

외투를 한쪽으로 휙 밀자, 작은 문 하나가 더 나타났다.

문에도 역시 마력을 이용한 잠금 장치가 걸려 있었지만 이번에는 여유롭게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곳은 그의 비밀 금고였다.

은석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부터 통장에 돈을 넣어 두지 않았다.

보육원 원장이 현찰과 금을 몰래 보관하던 금고를 본 이후부터 비밀 금고는 그의 로망이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산 것이 두꺼운 금고였다.

각성자가 된 이후에는 누구도 훔쳐 갈 수 없는 마력 잠금 장치도 설치했다.

그 안에는 마흔다섯까지 살다 간 김은석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첫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 명세서부터, 처음 몬스터를 죽여서 빼낸 손톱만 한 마나석, 그리고 그가 매일 적은 일기와 던전에 관해 공부하던 노트까지.

“돈이랑 아티팩트는 나중에 와서 다시 정리하고. 보자……. 그게 어디 있더라?”

여러 권의 노트를 뒤지던 은석이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이제 던전 구하러 가 보실까.”

* * *

빌라를 나온 은석이 향한 곳은 한국 각성자 협회 본부였다.

다시 F급 힐러가 되었으니, 길드에 들어갈 방법은 사라졌다.

센터 입구에서 만난 매니저들의 제안처럼 홍보용 헌터가 된다면 모를까.

하지만 은석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윤혁과 싸우려면 나도 그 녀석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뛰어난 헌터가 되어야 한다.”

5년 전에도 F급 힐러로 각성한 은석이 들어갈 수 있었던 던전은 거의 없었다.

길드는 욕심 낼 수도 없었던 시절, 각성자 협회에서 알선해 주는 용병밖에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은석보다 레벨이 높은 E급이나, 아니면 같은 F등급이라도 전투계 헌터에게 기회가 먼저 돌아갔다.

입구가 닳도록 찾아가 허리가 아프도록 조아렸던 곳.

한국 각성자 협회 등록실 문을 열었다.

“여기는 5년이 지나도 그대로네.”

등록실 안은 자신처럼 헌터 등록을 하러 온 사람부터 직원들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사람들까지, 예전과 다름없이 시끌벅적했다.

“아직 있으려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겼나?”

은석이 입구에 서서 등록실 직원들을 살폈다.

천천히 돌아보던 그의 눈에 보이는 명패.

<부장 이상균>

은석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바로 찾은 다음 이름.

<실장 정종렬>

“역시 이런 알짜배기 직장을 나갈 리가 없지.”

은석이 문 옆에 놓인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신입 등록에 자신의 번호가 뜨자, 접수대로 가 헌터 등록증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헌터 등록하러 왔습니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여자 직원은 대답도 없이 헌터 등록증을 들고 가 바코드를 인식했다.

그의 사진과 개인 정보가 모니터에 뜨자, 여자가 고개를 돌려 은석을 바라봤다.

은석이 싱긋 웃으며 여자 직원과 눈을 마주쳤다.

“등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여직원이 다시 모니터를 보며 몇 가지 질문을 했다.

“F등급이고, 힐러시네요.”

여자의 말에 은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부끄럽지만, 고작 F등급이 나왔습니다. 길드에도 못 들어가고, 누가 각성자 협회에 가면 던전에 들어갈 용병이 될 수 있다고 해서…….”

“그렇기는 한데……. 흠. F등급이라고 해도 워낙 마력이 낮고, 보통 전투계를 선호하시는 편이라 용병 자리도 조금 힘드실 거예요.”

은석이 상체를 접수대 쪽으로 가까이 붙였다.

“어떻게…… 던전에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요?”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은석을 보며 여직원이 헛기침을 두어 번 내뱉었다.

“혹시 검도나 복싱 같은 운동을 하셨던 경험이나…… 아니면 등록할 만한 무기를 가지고 계시나요? 힐러지만 전투도 가능하다는 것을 어필하면 가끔 던전에 들어갈 수 있기는 하거든요.”

은석이 작은 목소리로 여직원에게 속삭였다.

“사실은 제가 얼굴이 무기입니다.”

잠시 은석을 멀뚱히 쳐다보던 여직원이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다른 여직원도 입을 막으며 쿡쿡 웃었다.

그녀들은 농담이라고 들었겠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예전 은석의 얼굴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설 만큼 험상궂었다.

덕분에 ‘넌 얼굴이 무기’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아재 농담도 이 얼굴로 하니 먹히네.’

여직원들의 웃음소리를 뚫고 갑자기 남자의 고함이 들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일 안 해? 여기 놀러 왔어?”

조금 전부터 은석을 눈꼴시게 쳐다보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직원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쿡쿡 찔렀다.

“최은별 씨, 지금 회사에 남자 꼬시러 왔어요? 내가 듣다가 어이가 없어서…… 뭐? 운동한 경험이 있거나 무기가 있으면 들어갈 수 있다고?”

과장의 큰 목소리에 최은별이라는 여직원은 귀까지 빨개졌다.

“이상균 부장님?”

은석이 놀란 척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응? 누구…….”

은석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꾸벅했다.

갑작스러운 은석의 인사에 이상균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은석 씨 모르십니까?”

“네? 김은……석요?”

은석이 주머니에서 이상균, 정종렬과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들었다.

“저의 삼촌이십니다. 5년 전부터 둘도 없는 사이였다고 하시던데.”

은석이 들고 있던 사진을 본 이상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은석을 데리고 실장실로 들어갔다.

급하게 실장실 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갑자기 이상균과 낯선 남자 한 명이 들어오자 정종렬이 인상을 썼다.

“뭡니까? 이 부장. 예의 없게 불쑥불쑥. 그리고 저 남자는 누굽니까?”

화를 내는 정종렬에게 은석이 들고 있던 사진을 빼앗아 보여 줬다.

“김은석 씨의…….”

이상균이 고개를 돌려 은석에게 물었다.

“김은석과 어떻게 되는 관계죠?”

“아, 저희 삼촌이십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실장님.”

정종렬이 사진 속 인물이 자신임을 확인한 후 사진을 돌려줬다.

“아니, 이게 뭐라고 호들갑입니까. 당신이 김은석 씨 조카라고? 그래서 무슨 용건인가?”

‘오, 역시 실장. 일단 모른 척하겠다 이거지.’

은석이 주머니에서 종이 몇 장을 꺼내 건넸다.

그것을 본 이상균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냉정을 유지하던 정종렬 역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은석이 준 것은 그가 5년 전부터 이상균과 정종렬에게 입금해 준 돈이었다.

용병으로 던전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준 대가.

그리고 그들의 술값을 계산한 영수증을 복사한 종이였다.

‘분노의 영수증 모으기가 이렇게 쓰일지 나도 몰랐네.’

은석이 건넨 종이를 보던 이상균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종렬이 은석을 보며 물었다.

“이걸 보여 주는 의도가 뭔가.”

은석이 순수하고 훈훈한 이십 대의 미소를 지었다.

“의도는 없습니다. 저도 삼촌처럼 겨우 F급 힐러로 각성했습니다. 상심에 빠진 제게 삼촌이 비밀이라며 알려 주시더군요. 좋으신 분들이니 도와주실 거라고.”

은석의 말에 두 사람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상균이 들고 있던 종이를 찢으며 은석에게 다가왔다.

“한 시간만 있으면 퇴근일세. 협회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작은 포차가 하나 있는데, 거기 있으면 우리가 그쪽으로 가지.”

이상균이 찢은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조금 뒤에 뵙죠.”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실장실 밖으로 나왔다.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 짧은 고성이 오갔다.

“수고하십시오.”

접수대에 앉아 있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며 나오려는데 등록을 했던 최은별이 은석을 붙잡았다.

“혹시…… 전화번호…….”

수줍게 휴대폰을 은석에게 내밀었다. 은석이 씩 웃으며 모니터를 가리켰다.

“전화번호, 제가 이미 드렸는데요.”

최은별과 주변의 여직원들이 또 웃기 시작했다.

‘뭔 말만 하면 웃어.’

* * *

5년 전 한국 각성자 협회 등록실.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헌터님,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려요. F급 힐러는 들어갈 곳이 없다니까요. 일단 집에 가셔서 기다려 보세요.”

담당 직원이 은석의 헌터 등록증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쯧! 그러면 E급이라도 되던지. F급 주제에 어디서 용병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나 같으면 각성한 사실도 비밀로 하고 살겠다.”

직원의 비수 같은 말에 은석은 떨어진 등록증을 슬그머니 가져와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협회 등록실을 찾아와 부탁한 것이 며칠째였다.

몇 년 전, 다니던 직장은 문을 닫았고 친구라고 믿었던 놈에게 그동안 모은 돈을 사기당했다.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의 각성이었지만, 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F등급 힐러가 용병으로 뛰기란 쉽지 않았다.

힘없이 걸어가는 은석에게 남자 직원이 다가와 친한 척 어깨를 둘렀다.

“헌터님, 힘드시죠. 매일같이 오셔서 수모만 당하시고. 제가 커피 한잔 사겠습니다.”

남자의 손에 이끌려 직원 휴게실로 갔다.

자판기 커피를 건네며 남자가 자리에 앉았다.

“이상균입니다.”

“네…… 저는…….”

“김은석 씨죠? 잘 알죠. 매일 뵙는데. 하하하.”

“아…… 네.”

은석이 싱거운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담당 직원의 말이 좀 심하긴 했습니다. 기다리라고 좋게 좋게 말할 수도 있는데. 저 친구, 참…….”

끝까지 잠근 셔츠의 단추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당겨지고 있었다.

그것을 마주 보고 있던 은석이 의자를 슬쩍 옆으로 옮겼다.

“매일 찾아와서 부탁한 제 잘못도 있지요. 분수도 모르고.”

“헌터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적극적! 문제는 적극적으로 해결해야죠.”

은석이 이상균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네?”

“던전에 F등급 헌터가 없습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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