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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 힐러는 네크로맨서-5화 (5/226)

5화

자판기 옆에 세워진 화분으로 다가가 나뭇가지 하나를 뚝 꺾었다.

그것을 걸귀가 뿜어낸 검은 물에 찍어 붓처럼 이용해 화분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일찍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공부에 소홀했던 은석이, 지금 장문의 한자를 수려하게 써 내려가고 있었다.

‘김은석이 지식이구나.’

긴 문장을 다 쓴 후에 일어나 화분의 양쪽을 잡았다.

하지만 허약한 김은석의 몸은 크지 않은 화분조차 쉽게 들 수가 없었다.

“퇴원하면 운동부터 해야지. 이십 대가 어떻게 이런 몸을…….”

은석은 허리를 뒤로 크게 젖혔다.

헙!

기합을 한 번 넣고 온몸에 힘을 줬다.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화분을 들었다.

콰광!

죽을힘을 다해 든 화분을 걸귀의 머리 위에 떨어뜨렸다.

화분에 쓰인 글자가 번쩍이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걸귀는 그대로 화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휴게실 바닥의 검은 물과 썩은 냄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아……. 힘들다. 화분이 이렇게 무거울 일이냐.”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음료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자판기 뒤에서 떨고 있는 아이를 불렀다.

“승호야, 형이야. 이제 나와도 돼.”

승호가 눈을 껌뻑이며 은석을 향해 천천히 기어 나왔다.

“혀엉……. 날 구해 주러 온 거예요?”

“그래, 형이 나쁜 귀신을 없애버렸으니까. 이리 와 봐.”

일어난 아이가 은석에게 다가오자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었다.

아이는 양손이 없어졌는데도 해맑게 은석을 바라보고 웃었다.

은석이 아이의 남은 팔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 어?”

낯선 기운에 아이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걸귀에게 먹힌 아이의 작은 손이 자라나 다시 꼼지락거렸다.

기적 같은 상황에 아이는 토끼 눈을 뜨고 은석을 바라봤다.

귀신이 그렇게 원한다는 은석의 생력이었다.

“와! 형. 저 손이 다시 생겼어요.”

“형 대단하지? 인마, 형이 이런 사람이야.”

“우아…… 형, 진짜…….”

아이가 말을 이었지만, 은석은 들을 수 없었다.

빙글-

순간 휴게실이 크게 돌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써 보는 생력에 기운을 빼앗긴 은석.

눈앞에 뜬 메시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 * *

병실의 하얀 천장이 보였다.

‘무한 반복 영화도 아니고, 매번 눈떠 보니 병실이야.’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호가 아직 안 가고 병실에 있는 건가?’

“우리 석이, 깨어났구나.”

따뜻한 손이 다가와 은석의 머리를 쓰다듬고 천천히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김은석의 엄마.’

순간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김은석의 엄만데……. 왜 내가 눈물이 나는 거냐.’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코를 훌쩍 들이켰다.

자신을 한없이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김은석의 엄마.

은석은 어려서부터 늘 궁금했다.

엄마라는 존재가 어떤 것인지, 왜 아이들은 그렇게 엄마를 찾아 대는지 말이었다.

“석아, 집에 가자. 선생님이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어.”

아직 그녀를 엄마라고 부를 자신이 없었던 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때 누군가 은석의 이마를 세게 내려쳤다.

“아야!”

“얘들이, 아픈 애를 왜 때려!”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랑카랑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야! 은돌. 빨리 안 일어나? 의사가 아무 이상 없다는데 어디서 환자 코스프레야.”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봤다.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이 서 있었다.

막 자신의 이마를 때린 여자가 다시 칠 듯 손을 치켜들었고, 그 뒤에 미간을 찌푸린 여자가 서 있었다.

‘김은석의 쌍둥이 누나들.’

김은석의 기억이 없었더라도 은석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누나가 둘. 위험하다.’

“얘가 병원에서 왜 이래. 조용히 안 해!”

엄마가 누나의 손을 잡아서 내렸다.

말리는 엄마 때문에 은석을 때릴 수 없는 누나가 발로 침대를 걷어찼다.

“새끼야! 빨리 일어나. 주차비 올라가.”

은석이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김은석 군, 당신을 괴롭힌다는 귀신이 혹시 누나들은 아니겠죠?’

“은돌, 빨리 옷 갈아입는다. 실시.”

탁-

일어선 그의 등을 때리려는 누나의 손을 은석이 잡았다.

“그만하시죠.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나라고 해 봤자 이십 대의 여자들이다.

40년 넘게 살아온 은석이 그녀들에게 휘둘릴 리가 없었다.

그렇게 믿었는데…….

따악!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누나가 그의 뒤통수에 강한 딱밤을 날렸다.

“으윽!”

던전에서 윤혁이 날린 돌멩이 못지않은 타격감이었다.

설마 각성자?

“돌으셨어요? 어디 감히 누나들한테…… 버르장머리가 리셋되셨어요?”

그녀들의 머리 위에 뜬 정보창.

[김은석의 누나 1, 김은희]

[김은석의 누나 2, 김은영]

그리고 이름 옆에 반짝이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위험한 상대입니다. 그녀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경고 문장과 함께 은석의 머릿속에 김은석의 추억, 아니 고통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식은땀이 삐질 새어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나가 이런 존재였어? 독립할까…….’

은석은 조용히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쌍둥이 누나들이 그의 뒤에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만 놀려. 아픈 애한테.”

“애정 표현이야. 애정 표현. 우리가 은돌이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지이?

“그럼! 우리 표현이 좀 과격해서 그렇지. 우리만큼 하나뿐인 동생 은석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쌍둥이 누나는 서로 마주 보며 개구지게 웃었다.

* * *

“오! 은돌. 오늘도 운동 갔다 오는가?”

“동네 한 바퀴 뛰고 왔지.”

김은영이 은석을 문밖으로 다시 밀어냈다.

“한 바퀴는 부족하다. 백 바퀴는 뛰어야지.”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벨을 눌렀다.

그를 내보낸 김은영이 다시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게 재미있어? 사이코패스냐?”

뭐가 재미있는지 그의 퉁명스러운 반응에도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 모습에 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빨리 와서 아침 먹어. 오늘 엄마표 된장찌개가 아주 죽여요.”

식탁에 앉아 서둘러 아침을 먹고 있던 김은희가 소리쳤다.

“아들, 빨리 씻고 와. 밥 먹자.”

“아버지는요?”

“벌써 출근하셨지.”

“네, 씻고 올게요.”

은석의 인생에서 더없이 만족스러운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 은석은 체력 단련을 시작했고 김은석의 책장 가득한 책을 읽으며 귀(鬼)에 대한 공부도 했다.

마르고 병약한 몸에 적당한 근육이 붙었고 규칙적인 생활에 혈색도 좋아졌다.

김은석의 말처럼 귀신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 또한 적응해 가고 있었다.

은석이 원래 겁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엄마.”

“왜? 뭐 더 줘?”

“저 오늘 각성자 센터에 좀 다녀올게요.”

밥을 먹던 누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석을 바라봤다.

“각성자 센터? 너 각성했니?”

고약한 장난도 스스럼없이 걸던 누나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각성이라는 것이 누구에게는 그토록 바라는 영광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조깅하던 중 은석은 뭔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5년 전에 경험해 본 그 기분.

‘각성했구나. 드디어.’

가족들은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냈지만, 은석은 오늘만을 기다리며 체력을 키우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각성했다고 모두 헌터가 되는 것도 아니니.”

‘두 번째네.’

각성자 등급 센터에 도착한 은석. 테스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A급 나오면 어쩌지.’

김은석에게서 귀안과 생력이라는 능력을 받았고 아직 미개방이지만 네크로맨서라는 히든 클래스도 있었다.

내심 높은 등급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F등급입니다. 클래스는 음…… 힐러네요. F라도 마력이 너무 낮아서 힐러로 활동하시기에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힘내십시오. 헌터님.”

예전과 변함없는 센터 직원의 영혼 없는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은석은 센터를 나와 입구에 놓인 쓰레기통 앞에 섰다.

그의 손에 따끈한 헌터 자격증이 쥐어져 있었다.

[김은석 등급: F 클래스: 힐러]

‘버릴까…….’

그때였다. 센터 앞에 모여 있던 길드 매니저 중 한 명이 은석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각성자 테스트 등급은 나오셨나요?”

“네.”

“어머! 헌터님. 그럼 이제 길드를 선택하셔야겠네요. 저희 길드로 오시는 건 어떠세요?”

여자 매니저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길드 매니저들도 달려왔다.

어느새 은석을 둘러싸고 서로 명함을 내밀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은석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저……기 뭘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제 등급은 에…….”

“호호호. 아유! 등급이 무슨 상관이에요. 이렇게 훈훈한 헌터님이 저희 길드 소속이라는 게 중요한 거죠.”

어깨를 흔들며 은석의 팔을 툭 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뭐가 재미있는지 여자가 까르르 웃었다.

다른 매니저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 때문이었어?’

은석의 주변에 있는 매니저들. 그들 모두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5년 전 은석이 테스트를 마치고 나온 후 먼저 길드 가입을 부탁했던 사람들.

모두 은석의 등급이 낮다고 무시했었다.

은석을 하찮게 바라보던 그들의 표정이 떠올라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는 홍보나 하려고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비켜 주시죠.”

매니저들이 무척 아쉬워했다.

은석의 뒤를 따라 센터 밖까지 걸어 나오며 치근거렸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은석의 주머니에 명함을 밀어 넣는 사람도 있었다. 꼭 연락 달라는 부탁과 함께.

* * *

“네, 그렇다니까요. 엄마. F등급이에요. 길드에 가입하고 싶어도 안 시켜 줘서 못 해요. 네, 네, 걱정 마세요. 그냥 몸이 조금 튼튼해졌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테스트를 받는 동안 보관함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엄마와 누나들로부터 온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

은석은 엄마에게 자신이 F급 힐러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알렸다.

휴대폰을 통해서도 엄마의 안도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뒤에서 다행이라며 엄마를 안심시키는 누나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들어가고 있는 중이에요. 네, 곧 들어갈게요.”

스무 살이 넘은 장성한 성인이지만 그들에게는 불안한 아들이자 동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조금 달랐던 아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김은석.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수양을 한다며 훌쩍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여러 번이었다.

은석이 그에게 빙의된 날에도 김은석은 쪽지 하나 남겨 두고 사라진 상태였다.

산속 동굴에 누워 있었던 김은석은 발견 당시 숨을 쉬지 않았다.

병원 이동 도중에 다시 맥이 뛰었고, 기적적으로 가족들 곁으로 돌아온 소중한 아들이었다.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꼈지만 죽었다 살아났으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 옆에 이전보다 건강하게 김은석이 살아 있다는 것뿐.

‘김은석은 몸을 내어 준 대가로 지금쯤 원하는 것으로 환생했으려나.’

가족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끼자, 은석은 문득 김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화를 끊고 천천히 거리를 걷고 있는 은석 앞에 늘 그렇듯 땅에 붙어 버린 지 오래된 지박령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저것들도 계속 보니까 나름 귀엽네.’

은석은 갤러리 안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듯 주변을 서성이는 귀물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달라졌지? 예전과 완전 다른 사람 같지 않아?”

“그러네. 근처에 가기가 왠지 꺼려지는데…… 왜 그렇지?”

“생력의 기운이 예전과 달라. 뭐지? 왜 저렇게 바뀐 거야. 만만하고 좋았었는데…….”

은석의 근처를 배회하는 혼령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라졌지. 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 바뀌었는데.’

이전의 김은석은 마음이 약하고 결이 부드러웠다.

귀신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던 그의 측은지심은 날카로운 부메랑이 되어 그를 괴롭혔었다.

‘나는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아니야. 귀신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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