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207)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후, 안전한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
라센느 2층으로 갈까 생각했었지만 자신 때문에 변종수와 라센느 직원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정가연의 아파트를 찾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자신이 정가연의 아파트에 있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 * *
차은성은 급히 차린 아침 밥상을 앞에 놓고 서둘러 수저를 움직였다. 그런 한편으로 부지런히 씹으며 입안의 음식을 꿀꺽꿀꺽 삼켰다.
―갓 지은 밥.
구운 스팸, 계란 프라이, 오징어 채, 멸치 볶음. 장조림 등.
차은성은 입에 넣은 것을 씹으며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역시 장모님 음식 솜씨 하나는 끝내줘. 그치?”
맞은편에 앉아 밥을 깨작거리는 정가연을 바라보았다.
정가연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 죽여 줄까?”
“응!”
차은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왕이면 침대에서 죽여 줘!”
“야아아! 차은성!”
정가연이 고함쳤다. 그 바람에 정가연의 입안에 있던 밥알과 음식들이 마구 튀었다.
“이크!”
차은성이 급히 왼손으로 밥과 반찬들을 가렸다.
도저히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듯.
정가연이 앉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더니 옆으로 돌아섰다.
차은성은 그런 정가연에게 물었다.
“어디 가?”
정가연이 걸음을 멈추며 차은성을 돌아보았다.
“널 쏴 죽이려고 총 찾으러 간다. 왜!”
“베개에 있던 총의 탄환은 내가 숨겨 뒀거든. 그러니깐 니 허벅지 총을 꺼내서 쏴.”
차은성의 말에, 정가연이 멈칫했다.
“이 죽일!”
격한 표정을 지으며 살기등등한 눈으로 차은성을 쏘아보았다.
“아……. 그리고 도어 록 비밀번호 좀 바꿔. 생일이 뭐냐? 응?”
“너, 너어…….”
“그리고 너 말이야. 자꾸 그렇게 날 못 살게 굴면, 그때 그 사진들, 장모님에게 확 보내 버린다. 나, 장난 아니야.”
“이 개자식아!”
정가연이 차은성을 향해 고함쳤다.
“내가 왜 그때! 널!”
후회하는 정가연이었다.
차은성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집으며 정가연에게 말했다.
“넌.”
“…….”
“영원히 내 밥이야.”
“닥쳐!”
정가연이 재차 고함쳤다.
차은성이 숟가락으로 밥을 떴다. 입에 한가득 밥을 넣은 후, 다시 젓가락을 집었다.
그리고 장조림 하나를 집어 입에 쏙 넣고는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쩝쩝.
차은성은 아주 맛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장모님!”
“우리 엄마가 왜 니 장모야! 말 가려서 안 해?”
정가연이 차은성에게 소리쳤다.
차은성이 조금 전에 정가연이 앉았던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앉아. 너와 할 얘기가 있어.”
진중한 목소리였다.
정가연이 흠칫하더니 말없이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박 과장님.”
“…….”
“살해당하셨어.”
차은성의 말에, 정가연이 아연실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동그랗게 부릅떴다.
* * *
잠시 뒤.
차은성과 정가연은 커피를 마시며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 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확실해?”
정가연의 물음에 차은성이 대답했다.
“확률 90% 이상이야.”
“으음…….”
정가연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차은성은 커피를 마시며 정가연을 보았다.
“회사 내부 동향과 사정에 관해 말 좀 해 줘.”
차은성의 말에.
정가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차은성을 바라보며 갈등의 눈빛을 띠었다.
차은성은 정가연을 마주 보며 씨익 웃었다.
“여보, 부탁해.”
장난치는 차은성의 태도에 정가연이 인상 썼다.
“너어…….”
“가연이 넌, 딴 남자에게 시집 못 가.”
“미친!”
“내가 네 상견례 자리에 가서 깽판 칠 거거든. 사랑하는 남자가 가난뱅이에다가 백수라고 뻥 차 버리고 딴 남자와 결혼하려고 한다고…….”
정가연은 기가 막혀도 너무 막혔다.
맞은편에 앉은 차은성.
한다고 하면 진짜 할 미친놈이다.
박영광을 죽인 이중 스파이이자 배신자를 아마 죽이려 할 것이다.
그리고 관련 정보와 안전한 숙소 때문에 자신의 아파트로 숨어들었다는 것을 모를 수 없다.
“너…….”
“가연아, 도와주라. 응?”
차은성이 정가연에게 말하자 정가연이 방바닥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쉬더니.
“휴우우우.”
중얼거렸다.
“내가 미친년이지. 그때 술에 취해서 널……. 그때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너와 이렇게 얽혀서…….”
진한 후회를 감추지 않는 정가연이다.
차은성은 그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거든.”
“닥쳐라! 응!”
돌연.
“가연아.”
차은성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정가연을 불렀다.
그러자 정가연이 움칫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의자에 앉은 정가연이 몸을 흠칫거렸다.
“왜, 왜 그래?”
“그게 말이야. 어젯밤에 네 침대에서 자다가 우연히…….”
“너, 너어…… 서, 설마?”
정가연이 기겁했다.
“나도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설마 했었어.”
“…….”
“일부 여자들이 한창때의 자신의 아름다운 몸을 찍어…… 그 화보집을 평생 동안 간직하며 간간이…….”
“…….”
“그런데 가연이 네가 그런 취미 아닌 취미를 가지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정가연은 뒤통수를 쇠망치로 쾅! 맞은 듯 삽시간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몸에서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넋을 놓은 정가연이 일순 질끈 두 눈을 힘주어 내리감았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차은성, 이 개자식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네에에!’
동기가 아니라 웬수다.
그때 술에 취해서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런 어이없는 상황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그때 왜 술에 취해 가지고서는……. 빠드드득! 절대! 절대! 앞으로는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을 거야!’
마음속으로 맹세하는 정가연이다.
술 때문에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 그 실수 때문에 차은성이란 코뚜레를 그만 자신의 코에 꿰고 말았다.
* * *
닷새 후.
철거 예정지에 자리한 5층 폐상가.
차은성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과거 팀원들과 함께 사용하였던 일종의 집결지이자 거점이다.
이윽고 3층에 올라선 차은성이 곧장 복도를 걸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한 문에 이르러 섰다.
끼이익.
차은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컴컴했다.
너무 어두워 뭐가 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찰깍.
차은성이 스위치를 올리자.
파, 파, 팟.
불이 들어오자, 내부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런저런 설비가 있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과거 자신과 팀원들이 사용했던 장비와 설비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휴우.”
차은성은 한숨을 쉬며 창가로 걸어가 섰다. 그리고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곧이겠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흔적을 넌지시 흘려 두었으니.
죽은 박영광의 묘소도 다녀왔으니.
틀림없이 박영광을 죽인 이중 스파이가 자신을 죽이려고 올 것이다.
“슬슬 세팅을 해 볼까?”
차은성은 재차 중얼거리며 상의에서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 한 개비 피울 정도의 시간은 아마 있을 것이다.
그 후.
어렵사리 구한 장비들을 세팅. 모종의…….
* * *
10분 남짓 지났을까?
어둠 속에서.
5층 폐상가에서 멀찍이 떨어진 길가에 몇 대의 밴이 섰다.
드륵, 드르륵.
밴의 측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장 병력이 신속하게 내렸다.
그들 모두 대테러 장비를 장착했다.
머리에 쓴 헬멧, 헬멧에 부착된 무비 카메라, 통신기, 방탄조끼 등등.
각종 장비를 풀로 갖추고 중무장한 병력은 이내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5층 폐상가 옥상을 염두에 두고 이동했다.
다른 한 무리는 상가 정문 입구를 염두에 둔 듯 조심스럽게, 빠르게 접근했다.
어둠 속에서 슬금슬금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차은성의 눈에 착 붙은 적외선 망원경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차은성은 거칠게 중얼거렸다.
회사.
NIS!
타격 팀이다.
적어도 세 개 팀. 스물네 명의 팀원이 동원된 것 같다. 부여된 임무는 보나 마나 자신을 사살하라는 것이겠지.
“회사 직원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차은성은 중얼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쇼 타임!
시작이다.
* * *
얼마 있지 않아.
와장창창.
로프를 쥔 중무장 병력들이 발로 창문을 깨고 안으로 쏙쏙 빠르게 들어갔다.
그사이.
정문 입구로 역시 중무장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안으로 속속 진입했다.
곧.
타타타타타타타탕.
콩 볶는 듯한.
요란한 총성이 메아리쳤다. 또한 창문에서 알 수 없는 빛이 연거푸 번쩍였다 사라졌다.
몇 분 후.
고요해졌다.
5층 폐상가에서 열 명의 중무장한 이들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그리고…….
끼익.
몇 대의 밴이 주차되어 있는 길가에 한 대의 고급 승용차가 다가와 섰다.
덜컥.
뒷문이 열리고 장년인이 내렸다. NIS 국내 총괄 2차장 선우종.
이내.
중무장한 한 사람이 양손을 들더니 헬멧을 벗으며 차에서 내린 선우종 2차장에게 걸어가 섰다.
“차장님.”
선우종이 그를 바라보았다.
“선임 팀장.”
“예.”
“작전은?”
“총격전이 잠깐 있었습니다만. 성공입니다.”
“대상은?”
“현재 중상입니다. 총상이 심해서…… 두 대원이 응급조치를 하긴 했습니다만. 출혈이 너무 심해 생사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
“119를 부르고 싶었지만. 이미 사살 명령이 떨어진 터라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이대로 놔둘 경우?”
2차장 선우종의 물음에 선임 팀장이 몸을 움찔했다.
“2차장님.”
“놔둘 경우!”
2차장 선우종이 힘주어 재차 묻자.
“휴우. 곧 사망할 겁니다.”
선임 팀장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지금 어디에 있나?”
2차장 선우종의 물음에, 선임 팀장이 폐상가를 돌아보았다.
“3층 복도에 있습니다.”
“그래.”
2차장 선우종이 말하며 폐상가를 바라보았다.
* * *
잠시 뒤.
2차장 선우종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눈에 보이는 곳곳에 총탄 흔적이 역력하다. 흔적은 하나같이 매우 선명했다.
2차장 선우종은 말없이, 득의가 엿보이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씨이익.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