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205)
“운이 좋다면 하트가 조직에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일단 조직 내에서 하트의 힘을 빼 놓고 영향력을 약화시키면.”
“…….”
“왕자님이 하트에 의해 당하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물론 그 와중에 제가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만.”
“…….”
“왕자님에게는 별다른 타격이 없는 무관한 일이죠. 오히려 죽으면 왕자님이 정보를 주었다는 것이 감추어지죠. 이래저래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무샤드 왕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은성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는 AOA의 고위 멤버였다.
J 10!
하트는 반대 파벌에 속한 무샤드 왕자를 제거하려고 했었다.
그런 한편으로.
일종의 덤이라고 할 수 있는 와히브 왕국의 모든 유전.
그러니깐 국영 유전의 모든 지분을 자신의 파벌에 속한 정유 회사로 넘기려 하였다.
하트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처음에는 무샤드 왕자는 몰랐다.
하지만 뒤늦게 알았고. 그에 무샤드 왕자가 택한 패는 바로 차은성이었다. 그 때문에 하트에 관한 정보를 차은성에게 보냈다.
그걸 받아 본 차은성이 틀림없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에…….
차은성과 하트를 충돌시켜, 그 사이에서 자신의 목숨과 와히브의 국영 유전을 지키려 했다.
그런 한편으로 하트도 도모하고.
차은성이 진한 살의를 감추지 않았다. 진득한 살의가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 가지고 논 것에 매우 강한 불쾌감을 느낍니다.”
무샤드 왕자가 급히 차은성을 불렀다.
“차, 차 팀장.”
폰 너머에서 차은성이 말했다.
“대가를 치르셔야겠습니다. 왕자님.”
말과 함께.
퍽!
12.7×99mm 나토 탄이 무샤드 왕자의 뒤통수에 박혔다. 그러자 몇몇 핏방울이 허공으로 튀었다.
스르르.
무샤드 왕자는 귀에 폰을 댄 채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경호원들과 측근들이 고함치며 매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왕자님!”
“저격이다!”
“어디야!”
그들은 쓰러진 무샤드 왕자에게 뛰어가는 한편, 소지한 각자의 총을 꺼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쓰러진 무샤드 왕자의 머리에서 선혈이 줄줄 흘러나왔다. 선혈은 바닥을 붉게 물들이며 주위로 천천히 번졌다.
* * *
사흘 후, 모스크바 국제공항.
와글와글.
북적이는 입국장을 빠져나오던 차은성이 걸음을 멈추고 섰다.
정면.
일고여덟 걸음 떨어진 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마흔 후반의 중년인.
세르게이.
털털한 성격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소박한 차림이었다.
빙긋.
차은성이 말없이 웃더니 주저 없이 세르게이에게 걸어갔다.
그 모습에, 세르게이 역시 차은성에게 걸어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서더니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꽈악.
그리고 서로 힘껏 상대방을 껴안았다.
그 모습에, 주위를 오가던 공항 이용객들이 의아한 눈으로, 혹은 당혹스러운 눈으로 차은성과 세르게이를 힐긋거렸다.
동성애.
아무래도 이용객들이 그런 감정을 생각하는 것 같다.
* * *
도로를 따라 주행하며 공항에서 멀어지는 중형차.
운전석에는 세르게이가 앉아 있었고 조수석에는 차은성이 앉아 있었다.
“좀 놀랐네.”
세르게이가 운전하며 차은성을 힐긋거렸다.
“그렇습니까?”
차은성이 말하며 세르게이를 돌아보았다.
“왜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왔나? 은성.”
세르게이가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차은성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이고르 밸라노프!”
그러자 세르게이가 크게 놀랐다.
“은성!”
큰 목소리로 차은성을 부르며 돌아보려 했다.
“세르게이. 운전!”
차은성이 주의를 주었다.
세르게이가 흠칫하더니 급히 앞을 바라보며 이유를 물었다.
“왜?”
차은성은 침울한 기색을 지으며 박영광의 죽음을 언급했다.
정색하듯이.
세르게이의 낯빛이 변했다.
“그, 그런 일이!”
몰랐던 모양이다.
차은성이 보기에 대경하는 세르게이였다.
“세르게이.”
“…….”
“전 단서가 필요합니다. 우리 NIS 내부에 이중 스파이가 있습니다. 그자가 박 과장님을 죽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고르 밸라노프에게서 이중 스파이에 관한 단서라도 찾으려는 건가? 은성.”
“네.”
차은성의 대답에, 세르게이가 다소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터 박은 좋은 친구였네.”
“…….”
“우리들 세계에서 좋은 친구는 믿을 수 있는 친구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지만.”
“…….”
“미스터 박은 예외였네.”
세르게이가 박영광과 각별한 사이였음을 돌려 언급했다.
“내가 자네를 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돕겠네. 그것이 죽은 친구에 대한 내 우정과 신뢰의 표시이니 말이야.”
“고맙습니다, 세르게이.”
“은성. 고맙다고 말하기에는 이르네.”
세르게이의 말에 차은성이 흠칫하더니 급히 물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세르게이.”
“얼마 전에 이고르 밸라노프가 루비앙카로 이송되었네.”
“예에?”
차은성은 깜짝 놀랐다.
이고르가 루비앙카로 이송되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다.
세르게이가 운전하며 이어 말했다.
“루비앙카가 어떤 곳인지, 자네라면 알고 있을 것 같네만.”
“압니다. 한 번 들어가면 죽어 시체가 되어서도 나오지 못하는 곳이죠.”
“맞네. 나도 이번에 결정된 이고르의 이송이 납득이 가지 않네만. 상부의 결정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네.”
세르게이의 말에, 차은성이 신음을 흘렸다.
“음…….”
이고르의 루비앙카 이송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 러시아 정부를 구성한 요인들.
그들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 알려지면 안 되는 치부!
이고르 밸라노프가 그것을 가지고 있고, 알고 있다.
러시아 정부 요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고르 밸라노프를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
이고르 밸라노프를 죽여 버리면 깔끔한데. 이고르 밸라노프를 암암리에 주시하는 이목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덜컥.
죽여 없앨 경우.
지켜보는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어떤 상황이 연출될지도 또한 모른다.
그리고 이고르 밸라노프가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다.
이고르 밸라노프는 그 나름 안전장치를 해 두었다.
일련의 것들 때문에 이고르 밸라노프를 죽이기 어려웠다.
결국.
러시아 정부 요인들이 선택한 것은 특수 시설인 루비앙카로의 이송이었다.
문득.
예전에 모스크바에 왔었던 때가 생각나는 차은성이었다.
―당시 공항에서 세르게이와 만났다. 그리고 시내 모 호텔 스위트룸에 잠시 머물렀다.
세르게이는 이고르의 개인 왕국이나 마찬가지인 디미토르프에서 타냐라는 FSB 요원의 탈출을 부탁했다.
차은성은 타냐와 이고르 밸라노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세르게이에게 요구했고 세르게이는 기꺼이 그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정보와 자료들을 살피던 차은성은 몇몇 의문을 느꼈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과하다 싶을 정도의 비호를 받은 이고르 밸라노프였다.
―세계적인 러시아 무기상인 이고르 밸라노프가 거래해서는 안 되는 자들과 거래를 했고, 그 때문에 군 장성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뒤에 이고르 밸라노프가 체첸 반군과 거래하였고, 과거 구소련 시절의 전략물자를 대거 체첸 반군에 넘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르게이가 이고르를 죽이려고 할 때, 자신이 나서서 극구 만류했다.
당시 자신이 보기에 이고르 밸라노프는 뭔가 감춘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러시아 정부의 비호도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이고르 밸라노프가 무엇인가를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안중에 없다는 듯 겁 없이 행동한 이고르 밸라노프였다.
그런 이유로 이고르를 살려 두어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알려 했다.
미국에서 AOA를 상대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렀다.
그 와중에.
JK. 시먼스로부터 이고르 밸라노프가 AOA 멤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고르에게서 NIS 내부에서 암약하는 이중 스파이.
박영광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단서를 얻으려 했다. 그 때문에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했다.
차은성이 회상하는 사이.
세르게이가 운전하며 차은성에게 물었다.
“이고르가 이중 스파이에 관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근거가 뭔가?”
차은성은 말없이 세르게이를 돌아보았다.
“세르게이.”
“응?”
“이중 스파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이중 스파이는 늘 불안이란 감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언제 자신이 이중 스파이라는 것을 들킬지 몰라 전전긍긍하죠. 물론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습니다만.”
“…….”
“이중 스파이를 심은 측은 이중 스파이를 관리하는 한편, 그가 배신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그가 수집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건네받으려 할 겁니다.”
세르게이가 운전하며 눈을 반짝였다.
“자네 말은…….”
“네. 연락망!”
차은성이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이고르 밸라노프는 AOA가 러시아에 숨겨 둔 이중 스파이였다.
―한국 NIS에서 암약 중인 이중 스파이.
예상이긴 하지만. 어쩌면 둘 다 동일한 연락망을 이용할지 모른다.
즉.
이고르 밸라노프의 연락망을 알아낸다면 NIS에서 암약 중인 이중 스파이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일 조직인 AOA에서 운용하는 동종의 이중 스파이!
차은성은 그 점을 언급했다.
세르게이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이라는 감정을 나타냈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것 같군. 알겠네. 내가 루비앙카를 방문할 수 있는지, 이고르를 면회할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네.”
“고맙습니다, 세르게이.”
차은성의 말에, 세르게이가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저번의 일도 그렇고. 내게 빚이 두 개 생긴 거네. 은성.”
차은성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반드시!”
“…….”
“이자까지 두둑이 붙여서 갚죠.”
그러자…….
“하하하!”
기분이 좋은 듯.
세르게이가 유쾌하게 웃었다.
* * *
이틀 후, 루비앙카.
구소련 연방 시절. 소련공산당 정부는 시베리아를 비롯하여 사람이 살기 매우 어려운 지형에 몇몇 특별한 시설을 세웠다.
해당 시설들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만큼이나 암암리에 악명을 널리 떨쳤다.
루비앙카는 해당 시설들 중 하나였다.
수감되는 그 순간부터, 숨이 끊어져 죽는 그 순간까지!
아니.
죽어 시체가 되어서도 나올 수 없는 곳이 바로 루비앙카다.
영원한 수감!
그것이 루비앙카다.
* * *
천장에 매달린 작은 백열전등이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내부는 단 한 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폐쇄된 곳이었다.
창문이 없다.
있는 거라고는 녹슨 철제 책상과 두 의자밖에 없고, 해당 책상과 두 의자는 바닥에 용접되어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앉은 두 사람.
차은성과 이고르.
차은성은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한데.
이고르 밸라노프는 정신병원 환자가 입을 법한 아주 특별한 복장이었다.
양팔은 몇 개의 가죽끈으로 단단히 결박되었다. 그 때문에 마음대로 양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또한.
두 다리는 굵은 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걷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천천히.
차은성이 상의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을 물더니.
찰깍.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천천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한편.
이고르는 차은성이 책상에 내려놓은 담배와 라이터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세르게이의 수중에 신병이 떨어진 이후, 술다운 술을 단 한 번도 마시지 못했다. 담배 역시 마찬가지다.
늘 피우던 쿠바산 고급 시가.
마치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이고르는 이런저런 어려움에 매우 힘들었다.
이고르는 가만히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하얀 담배 연기를 뿜는 차은성.
후우우우.
이고르는 마약중독자처럼 담배에 집착했다. 하지만 그 집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고르가 물었다.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가 뭔가?”
차은성이 이고르를 마주 보며 용건을 말했다.
“AOA와의 연락망, 접선 방법, 접선책 등등.”
이고르가 순간 몸을 움찔했다.
당황한다.
“너무 많은 것을, 무리하게 바라는군.”
이고르가 태연한 척하며 말하자.
“퀸, 킹, 에이스, 조커.”
차은성이 재차 말했다.
순간.
이고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다 죽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죠. 아…… 미국 정부가 지금 AOA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는 건 모르겠군요.”
차은성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