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87)
월터 부국장
주변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 CIA 요원들.
그들이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차은성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 개 팀 열다섯 명의 요원이라면.
나타나더라도 차은성이 뭘 어떻게 할 수 없다.
저격수가 계속 겨냥 중일 테니깐 말이다.
* * *
한편.
월터 부국장은 걸어오는 차은성을 바라보며 만면에 미소 지었다.
빙긋.
그러며 오른손을 가슴 상단 높이로 들어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방가, 방가.
그렇게 무언으로 말하듯.
보기에 꽤 장난스러운 손짓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차은성을 무척 반기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월터 부국장은 걸어오며 거리를 줄이는 차은성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대단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NIS 사상 최고의 요원일 거야. 하하하.”
월터 부국장이 차은성을 보며 낮게 웃었다.
역대급이자 레전드급 요원 차은성.
한마디로 말해 미국을 들었다 놨다.
과거 냉전 시대에도 차은성처럼 미국을 뒤집어 놓은 스파이는 없었다.
뭐, 30년 이상 장기 암약하다 걸린 KGB 요원이 있긴 하지만.
차은성처럼 대놓고 정보 관련 미국의 전 기관을 긴장시킨 정보 요원은 단연코 없다.
* * *
차은성이 월터 부국장 앞에 이르러 섰다.
“오랜만입니다. 부국장님.”
차은성의 말에, 월터 부국장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씨익.
차은성이 재차 말했다.
“봐하니 절 기다리신 것 같은데. 이렇게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유가 넘치는군. 지금 자네 때문에 전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에 비상이 걸린 것을 알고는 있나?”
“그런가요?”
차은성이 반문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절 어떻게 찾아내셨습니까?”
차은성의 물음에, 월터 부국장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자네를 찾기가 어려워도 너무 어렵더군. 그렇게 꽁꽁 숨어 있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랐네. 게다가 그런 와중에도 거침없이 사람들을 사살하고 다니고…….”
월터 부국장이 경탄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용케 절 찾아오셨습니다.”
차은성이 미소 짓자.
“사자방!”
월터 부국장이 툭 던지듯 말했다.
의외였다.
설마 월터 부국장이 사자방을 언급할 줄은 까맣게 몰랐다.
차은성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대만에 있을 때.
CIA가 자신의 뒤를 바짝 추적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상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 정보가 월터 부국장의 귀에 들어간 것 같다.
한데.
차은성은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꽤 놀랐지만. 그 놀란 마음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사이.
월터 부국장이 이어 말했다.
“대만 삼합회의 거두 양승조를 지켜봤지. 그런데 미국 화교 조직과 접촉하더군. 그래서 다시 화교 조직을 유심히 지켜봤더니 자연스레 자네와 접촉하더군.”
차은성은 리샤오를 생각했다.
아무래도 리샤오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리샤오와 접선한 자신이 월터 부국장의 이목에 띌 수밖에 없다.
차은성이 월터 부국장을 바라보았다.
“가시죠.”
말하며 퍼시피카로 다가서려 했다.
월터 부국장이 그런 차은성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당당해도 너무 당당한 차은성이다. 그 때문에 월터 부국장은 내심 황당해했다.
* * *
부우우우웅.
도로를 주행하는 퍼시피카.
운전석에 월터 부국장이, 조수석에 차은성이 앉아 있었다.
“뜻밖입니다.”
“뭐가?”
“수갑을 채울 줄 알았습니다만…… 그리고 명색이 전 CIA 부국장이신데 직접 운전까지…….”
차은성이 심중 느끼는 진한 의문의 감정을 내색했다.
양손으로 핸들을 잡은 월터 부국장이 조수석의 차은성을 힐긋거렸다.
“자네에게 수갑을 채운다면.”
“자네가 그대로 수갑을 차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지 않나?”
“…….”
“보나 마나 몇 초 안으로 수갑을 풀고 도주하려고 할지도 모르는데. 번거롭게 왜 자네에게 수갑을 채우겠나?”
월터 부국장의 말에 차은성은 그를 돌아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터 부국장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쯤은 자네도 충분히 알고 있지 않나?”
“…….”
“현재 자네와 관련된 모든 것이 일급 기밀 취급을 받고 있네.”
월터 부국장의 말에 차은성은 AOA를 생각했다. 자신이나, 자신이 한 일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며 막는 중인 것 같다.
‘으음…….’
차은성은 내심 침음을 흘리며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차창 밖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명색이 부국장님이신데, 직접 핸들을 잡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다 자네 덕분이지.”
“…….”
“자네 때문에 비밀리에 움직이려다 보니…… 어쩌겠나? 내가 운전대를 잡아야 하면 잡을 수밖에. 그리고 내가 운전하는데, 설마 자네가 날 때려눕히고 도망을 치진 않겠지? 응?”
월터 부국장의 말에 차은성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풋.”
이어 말했다.
“절 너무 믿지 마십시오. 부국장님.”
말하며 차은성이 계속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못 볼 광경이군.’
틀림없이 CIA 소유의 모처로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간단한 조사에 이어 심문이 시작될 것이다.
아마도.
살짝.
양념을 치듯이.
심문 중간중간에 고문이 곁들여질 것이고. 자백제 역시 주입될 것이다.
그 뒤.
랭글리로 이송. 본격적인 심문과 각종 고문. 그리고 심리적 요법 등.
정보를 캐내기 위한 다양한 과정이 줄을 이을 것이다. 그것은 속한 세계의 암묵적인 관례이자, 잡힌 타국 정보 요원에게는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다.
그 때문에 차은성은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CIA의 고문은 정평이 나 있다.
그 고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백제다. 일단 주사액이 몸에 주입되면 자신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차은성은 창밖을 보며 불안한 눈빛을 띠었다.
그런데…….
“미스터 박이 죽었네.”
월터 부국장이 불쑥 말했다.
그 말에 차은성은 순간 움찔하며 엄청 놀랐다.
“헉!”
미스터 박.
월터 부국장이 지칭하는 이는 다름 아닌 박영광이다.
홰액.
차은성이 거칠게 고개를 돌리며 언성을 높였다.
“무슨 말입니까? 누가 죽어요?”
월터 부국장은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NIS 내부에…… 시먼스의 뒤에 있는 이들과 연결된 자가 있는 모양이야.”
월터 부국장의 말에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어떻게 할 수 없는 놀람이 차은성의 얼굴 한가득 번졌다.
동시에.
예의 놀람이 차은성의 두 눈동자를 뒤덮었다.
왕사탕처럼.
눈을 엄청 크게 치켜뜬 차은성.
학질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확연히 눈에 보이는 떨림이었다.
운전하는 월터 부국장이 그런 차은성을 흘겨봤다.
‘충격이 예상외로 큰가 보군. 하기야 직속상관이었고 보육관이었으니.’
월터 부국장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안타까운 눈빛을 띠었다.
NIS에서 보육관은 꽤 다양한 역할을 한다.
신입 요원을 직접 선발, 채용하기도 하고.
군대의 교관처럼.
요원을 직접 교육 및 훈련시키기도 한다.
회사에서 신입 사원을 가르치고 이리저리 챙겨 주는 멘토 역할을 하는 사수처럼.
보육관은 이것저것 신입 요원을 챙겨 주기도 한다.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영광이 죽다니.
그것도 NIS 내부에 있는 AOA의 멤버에게…….
‘더 있을 줄은 알았지만…….’
정재승 정보통신국장 외에 다른 이중 스파이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어, 그저 마음 한편에 묻어만 두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박영광이, 생각했던 자에게 당하고 말았다.
‘내, 내가…….’
차은성은 마음속으로 말을 더듬었다.
마음 한편에 담아 두지 말고 말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박영광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은성은 박영광의 죽음에 책임을 느꼈다. 자신 때문에 박영광이 죽은 것 같아 심적으로 이만저만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 삼촌…….’
자신에게는 아버지와 같았던 박영광이다. 그런 박영광이 죽었다는 것을 차은성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부정하고 싶었다. 박영광이 죽지 않았다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또 소리치고 싶지만…….
그렇게 현실을 부정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에 차은성은 덜덜 계속 몸을 떨었다.
머리가 멍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텅 빈 것 같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현실감이 없어지고. 뭔가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그런 기분이 든다.
차은성은 부서져라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
차은성은 양손을 힘껏 말아 주먹 쥐었다.
필사적으로 이성을 놓지 않으려 했다. 칼날처럼 이성을 세우고 또 세우려 하였다.
차은성은 두 눈을 내리감으며 천천히 앉은 시트에 몸을 기대는 한편, 머리를 뒤젖혔다.
주르르.
내리감은 차은성의 두 눈동자에서 가느다란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덜덜.
계속 몸을 떠는 차은성.
슬픔과 분노를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겨 내고 있었다.
* * *
운전하는 월터 부국장이 차은성을 곁눈질했다.
차은성의 모습에 월터 부국장은 놀라 눈을 부릅뜨더니 급히 시선을 바로 했다.
운전 중이다.
계속 한눈을 팔았다가는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 * *
차은성은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었다.
AOA와 전쟁 중이고. CIA에 신병이 억류된 상태다.
심문, 고문이 계속 반복될 것이고.
더 이상 자신에게서 알아낼 것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신원 미상의 이를 지칭하는 존 도어가 되어 영구 폐기 처분될 것이다.
차은성은 한국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처지였다.
* * *
시카고 공항 주기장.
세워진 비즈니스 제트기의 트랩을 하비에가 걸어 내려왔다.
뒤이어 휴고, 시빌라, 런드월, 수잔이 트랩을 내려왔다.
그들을 맞은 것은 시카고 경찰국에서 나온 리처드슨 경감이었다.
하비에를 포함하여 팀은 시카고 경찰국이 준비한 몇몇 차량에 분승. 공항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 * *
해가 진 밤하늘.
투투투투투투.
로터 소리를 울리며 미 해병대 헬기가 어두운 허공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은성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작고 둥근 창밖을 보았다.
밤의 어둠 탓에.
명확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흣.’
차은성은 내심 실소했다.
보나 마나다.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CIA 시설에 곧 당도할 것이다.
‘그런데…….’
차은성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힐긋거렸다.
월터 부국장을 제외하고 헬기 내에 앉아 있는 이들은 완전무장 한 미 해병대 대원들이었다.
‘언제부터 CIA가 타국 요원을 이송할 때 해병대 병력을 동원했지?’
차은성은 내심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의혹의 작은 눈빛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