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132)
흔한 말로.
차은성에게 개무시당한 것 같아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렇다고 플레이어인 차은성에게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겉으로 심기 불편함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어찌 되었건.
차은성은 카지노를 찾은 고객이다.
딜러가 돈을 잃었다고 고객에게 싫은 티나 기색을 내보인다?
그런 카지노에 고객들이 몰릴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주 빠른 시일 내에 해당 카지노가 문을 닫을 것이다.
지금 차은성과 함께 게임을 했던 네 명의 플레이어가 지켜보고 있다.
카지노 내부 규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딜러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지금으로서는 하나도 없다.
* * *
잠시 뒤.
차은성은 카지노 내부에 있는 스낵바에서 천천히 샴페인을 마셨다.
그러곤 앞에 있는 아몬드를 집어 입에 쏙 넣고 여유롭게 씹었다.
오독…… 오도독.
그런 한편으로.
차은성은 주위를 힐금거렸다.
‘풋. 늦네, 늦어.’
하비에가 도착한 모양이다.
지금 앉아 있는 스낵바를 중심으로 인원수 미상의 FBI 요원이 주위에 있다.
다들 최정예 요원인 모양이다.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감시하듯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적의가 가득하고 살의가 충만한 시선은 하나둘이 아니다.
차은성은 기다리던 하비에가 FBI 요원들을 대동하고 카지노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왼쪽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은성은 슬쩍 좌를 곁눈질했다.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중년인, 하비에 스와레즈.
기다리던 그가 곧장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수여 초 후.
하비에, 차은성이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하비에는 가벼운 칵테일을 마셨고 차은성은 샴페인을 마셨다.
주위에 카지노 고객들과 직원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하비에와 차은성은 매우 낮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날 기다렸던 것 같은데…….”
확신하지 못한, 심증만 가진 하비에.
말끝을 흐리며 내심 차은성의 반응을 살폈다.
차은성은 태연하고 무표정했다.
일절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씨익.
차은성이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쥔 샴페인 잔을 바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비에가 오른손 엄지로 칵테일 잔의 테두리를 슬슬 문지르며 차은성을 흘낏거렸다.
“헬기.”
“…….”
“다행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아…….”
하비에는 말하며 차은성의 기색을 살폈다.
자신의 말에 차은성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려 했지만.
차은성은 무심했다. 일절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쏙.
아몬드 하나를 집어 입에 넣으며 말없이 씹었다.
“차 팀장.”
하비에가 돌아보았다.
“…….”
차은성은 말없이 샴페인 잔을 들었다.
“일부러 날 여기로 부른 이유가 뭔가?”
“…….”
차은성은 느긋하게 샴페인을 마실 뿐 뭐라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하비에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앉았다.
“세바스찬 박!”
힘주어 말하자.
차은성이 입에서 샴페인 잔을 떼며 하비에를 돌아봤다.
“미스터 하비에. 저는 그저 잠시 카지노에서 갬블을 즐겼을 뿐입니다.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메디컬 센터 옥상 헬기 착륙장.”
하비에의 말에 차은성이 샴페인 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하비에가 그것을 보곤 확신에 찬 눈빛을 띠었다.
“맞군. 날 일부러 여기로 불렀어!”
하비에가 재차 물었다.
“이유가 뭔가?”
“…….”
“이미 국외로 세바스찬 박을 빼돌렸나? 아님, 빼돌리는 중인가?”
“…….”
“나와 우리 FBI의 이목을 자네에게 묶어 두고 그 틈에 세바스찬 박을 국외로 내보내려는 건가?”
“…….”
“차 팀장.”
“…….”
“자네와 자네의 팀이 NIS 요원들과 주요 요인의 구조, 구난에 있어 한국 최고라는 건 인정하겠네.”
“…….”
“하지만 여긴 미국이네. 미합중국이라고. 알겠나?”
“자네의 행위로 한미 간에 매우 중대한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는 생각, 해 봤나?”
차은성이 하비에를 돌아보았다.
“미스터 하비에. 저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찾아오라고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았나? 차 팀장.”
하비에가 분노를 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화난 모양이다.
차은성이 말했다.
“미스터 하비에.”
하비에가 차은성을 똑바로 보았다.
“나나 당신이나 프롭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비에가 잠시 동안 말없이 차은성을 직시했다.
차은성은 하비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마주 보았다.
“내가 자네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줄 아나. 이미 각 국제공항에 우리 요원들이 배치되어…….”
하비에가 말하다 멈칫했다.
‘이런 멍청이!’
일순간.
스스로에게 화냈다.
뇌리를 스치는 한 상념!
미국을 벗어나는 데 굳이 공항을 이용할 필요가 있을까?
당장 LA 항구만 해도 하루에도 수십여 척의 한국 선박이 드나든다.
어쩌면 차은성이 자신에게 국제공항이란 메시지를 강하게 심어 주어 미처 항구를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비에는 자신도 모르게 사고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차은성은 그새 하비에가 뭔가 알아챘다고 생각했다.
생긋.
웃으며 하비에에게 말했다.
“미스터 하비에.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차은성이 말과 함께 천천히 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 세바스찬 박, 조영국, 신일권은 안전하다.
최라경, 이창희는 모든 탑승 수속을 끝내고 인천행 항공기에 탑승했을 것이다.
자신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하비에가 뭘 알아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비에가 조금만 일찍 카지노에 왔다면 그와 대화하면서 가능한 시간을 끌었을 것이다.
차은성이 우로 돌아서며 걸어가려는데.
“차 팀장.”
뒤에 앉아 있는 하비에가 불렀다.
멈칫.
차은성은 걸음을 멈추고 서며 뒤돌아보았다.
성난 눈으로 바라보는 하비에.
“자네를 지금 당장 체포, 구금, 심문할 수도 있네.”
하비에가 분기 어린 목소리로 위협했다.
씨익.
차은성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스터 하비에. 저는 대한민국 정부의 관용 여권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
“아무 이유 없이 타국 정부 관계자를 FBI가 과연 체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외교적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하비에가 거침없이 대꾸했다.
“증거가 없다고 생각하나?”
“그 증거. 누가 일부러 남겨 두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 보았습니까? 하비에.”
순간.
하비에가 움찔했다.
“자네…….”
“미스터 하비에. 미국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아시잖습니가? 부인을 죽인 OJ 심슨을.”
차은성의 느긋한 말에 하비에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일부러 차은성이 흔적을 남겼다.
지금 변호사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사전에 계획을 세워 둔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 역시 차은성의 계획에 들어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당했다!
하비에는 뇌리에서 번쩍이는 생각에.
‘이!’
격한 눈빛을 띠었다.
차은성에게 농락당한 기분이다. 화가 이만저만 치미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하비에가 차은성을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차은성을 사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자칫 한국 NIS와 FBI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둘째 치고. 한국과 미국 정부, 양국의 외교 문제가 되어 버린다.
아닌 말로 백악관이 골머리를 앓을지도 모른다.
이미 세바스찬 박은 놓쳤다. 그런데 보복으로 한국 정부 요원을 죽였다?
백악관에서 FBI를 믹서에 집어넣고 마구 갈아 버리려고 달려들 것이다.
하비에는 이를 악물었다.
으득.
참을 수밖에 없다.
차은성을 여기서 체포한다고 해도.
차은성의 말처럼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적으로 밀어붙인다면.
FBI로서는 결국 차은성을 풀어 줄 수밖에 없다.
현재 차은성에게 적용할 수 있는 혐의는 헬기 강제 탈취 및 FBI의 공무집행 방해밖에 없다. 그 정도로는 차은성을 잡을 수 없다.
차은성은 닳고 닳은 정보 요원이다. 그리고 사전에 계획을 세워 두었다면 당하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
하비에가 생각하는 사이.
차은성이 시선을 바로 하며 걸음을 떼려 했다.
그러자 하비에가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다 계획되어 있었다?”
“…….”
“차 팀장.”
하비에가 불렀지만 차은성은 대답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말없이 걸음을 떼며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그러곤 가볍게 좌우로 흔들었다.
“See you again. 미스터 하비에.”
말하며 차은성이 손을 내리고 천천히 걸어갔다.
하비에가 성난 눈으로 그런 차은성을 바라보았다.
으득.
이를 갈았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서 오만 생각이 다 드는 하비에다.
여기서 차은성을 체포하는 무리수를 둘까?
아님.
사살해 버릴까?
까짓, 차은성이 체포 과정에서 저항하여 부득이 사살할 수밖에 없었노라. 상부에 그리 보고하면 되지 않을까?
하비에는 마음속으로 뿌리칠 수 없는 유혹과 같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전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차은성을 체포한다고 해서 세바스찬 박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실익이 없어. 골치 아픈 문제만 야기할 뿐.’
하비에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중요한 것은 세바스찬 박의 신병 확보다. 그런데 실패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은성이 세바스찬 박과 접선. 그의 신병을 이미 확보하여 국외로 빼돌렸다.
‘접선한 그 시점에서! 진 게임이야.’
하비에는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과 FBI가 차은성의 손바닥에서 놀아났음을.
“으음…….”
하비에의 다문 입술 사이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사이.
차은성은 꽤 거리를 벌려 곧장 카지노 입구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편.
주위에 있는 FBI 요원들이 매우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은 곧장 카지노 입구로 걸어가는 차은성과 하비에를 급히 번갈아 보았다.
―지시를?
FBI 요원들은 어떻게 할지, 하비에의 지시를 무언으로 요청했다.
그러자 알아챈 하비에가 천천히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내렸다.
―가게 놔둬!
하비에의 손짓에 주위에 있는 FBI 요원들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모두 보란 듯이 불만의 눈빛을 띠었다. 다들 어이없어하며 다시 차은성과 하비에를 번갈아 보았다.
―재고를?
하비에는 손을 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정예 요원들답게, 주위에 있는 FBI 요원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누르며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어쩔 수 없다!
지부장 하비에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하비에는 차은성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음에는…….”
기회는 있을 것이다. 언제고 한 번쯤은 차은성과 승부를 겨루게 될 것이다.
‘그때! 다시 보지, 차 팀장.’
하비에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훗날을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