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의 천재 스파이 (67)
앨리게이터 펀드
큼직한 창문을 배경으로 책상에 앉아 통화 중인 하비에.
“네. 일단은 말씀하신 대로 하긴 했습니다만.”
“…….”
“결국 마담 화이트를 찾아 제거했습니다.”
“…….”
“부국장님. 하지만…… 알겠습니다. 그럼.”
하비에는 수화기를 내려놨다.
FBI 부국장 제프 엡스타인의 지시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제기랄!”
하비에가 중얼거리며 의자에 앉은 채 빙글 뒤돌았다. 그러자 창밖의 샌프란시스코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차은성…….”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프 부국장의 뜻에 따라 놔줄 수밖에 없었다.
송환시키고자 했다면 까짓, 못 할 것도 없다.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타국 정보 요원이다.
게다가 마담 화이트를 잡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며 미합중국의 법질서를 어지럽혔다.
판사라고 해도, 법에 어긋난다고 송환 보류 판결을 내리기 힘들다.
까짓 판사가 아니더라도 국가 안보를 들먹이며 밀어붙이면 그깟 송환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다른 곳도 아니고 FBI가 아닌가?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제프 부국장이 불허했다.
“으음.”
하비에는 신음성을 흘리며 상의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이어 깊이 빨며 생각했다.
‘To The End Of Hell이라는 건가?’
하비에가 심중 중얼거렸다.
후우우우.
하얀 연기를 뿜으며 하비에가 슬쩍 미소 지었다.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한 차은성.
다른 것은 몰라도 집요한 것 하나는 알아줄 만하다.
하비에는 창밖을 바라보며 감회 어린 눈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 역시 동료를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낀다. 하지만 차은성을 두둔할 수는 없다.
한국 NIS 요원인 차은성이 다른 곳도 아니고 미합중국 내에서 복수를 한답시고 날뛰는 것을 허용할 수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국가의 자존심상.
타국 정보기관의 요원이 자국 내에서 마음대로 마구 날뛰는 것을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 * *
보름 후. 서울 모처 순대볶음집.
박영광과 차은성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쭈욱.
박영광이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이어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탁.
연후.
젓가락을 들어 순대 하나를 입에 쏙 넣었다.
“맡아.”
박영광이 씹으며 말했다.
“싫습니다.”
차은성이 소주가 반쯤 남은 잔을 내려놓더니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박영광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쪼르르.
박영광이 씹던 순대를 삼켰다.
“사람이 없어.”
차은성이 소주병을 내려놓으며 박영광을 보았다.
“회사에 차고 넘치는 것이 전문가들인데.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기존 관련 업무를 하던 놈들 중에서 차출할 수 있는 애들이 극히 제한적이야.”
“…….”
“기존 업무에 지장을 주면 곤란해.”
“…….”
“게다가 경제 쪽으로 빠삭한 녀석이 너무 없어.”
“…….”
“금융, 주식, 파생 상품 등…… 어디 가서도 관련 전문가 흉내 정도는 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애들이 너무 없단 말이지. 쯧.”
박영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을 지으며 잔을 들었다. 그러곤 거침없이 한입에 소주를 털고는 빈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놨다.
탁.
그러곤 젓가락으로 순대볶음 하나를 집어 입에 넣으며 차은성을 보았다.
그사이.
차은성이 다시 소주병을 들고 박영광의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저는 그쪽으론 문외한입니다.”
차은성이 말하며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박영광이 순대를 씹으며 툭 던지듯 차은성에게 말했다.
“너, 저번 이탈리아에서 북한 애들 자금 삥땅 쳤지?”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허억!’
심중 놀랐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했는데, 박영광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차은성은 심중 당황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지?”
박영광이 씹던 순대를 삼키며 말하자.
“끄응.”
차은성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박영광이 잔을 들며 차은성을 보았다.
“너, 돈 많더라. 무슨 현상금을 5백만 불이나 걸어.”
“…….”
차은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체 정보 소스가 어디야?’
궁금했다. 자신을 포함, 팀원들만이 아는 일인데, 박영광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박영광이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법 많은 돈을 굴리던데…….”
차은성이 재빨리 말했다.
“그거야 매 작전 때마다 회사가 쥐꼬리만큼…….”
“회사가 무슨 돈이 넘쳐 나는 재벌 그룹인 줄 알아!”
박영광이 언성을 높였다.
“아, 예에에.”
차은성이 은근 화제를 돌리려 했다. 돈에 관해 길게 얘기해 봐야 자신만 손해다.
“그리고 네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언론 입 막느라 내가 아주 개고생을 했어.”
박영광이 소주병을 들어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이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젓가락으로 당면과 순대를 말아 입에 쏘옥 넣었다.
“네 신분이…….”
박영광은 차은성의 신분이 노출되었음을 돌려 말했다.
NIS는 타 팀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상호 간에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마담 화이트가 국외로 탈출할 때, 차은성은 한우종 회장의 차를 훔쳐 타고 폭주했었다. 자연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차은성이 동료 직원임을 알게 된 직원도 몇 있다.
차은성은 맡은 임무 때문에 신원의 노출을 피해야 한다. 결코 외부에 드러나면 안 된다.
박영광이 순대와 당면을 씹으며 차은성을 보았다.
“당분간이야. 새로 팀을 이루고 정상적으로 활동하기 전까지…… 시키는 대로…… 한성 그룹 쪽으로 출근해.”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은 술맛이 확 달아나 버렸다.
“재계 쪽과 연관되고 싶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말했다.
“왜?”
박영광이 말하며 눈짓으로 빈 잔을 가리켰다. 그러자 차은성이 소주병을 들어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순간.
“네 어머니 때문에.”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멈칫거리더니 소주병을 내려놨다.
“삼촌!”
큰 목소리로 박영광을 불렀다.
저, 화났어요.
차은성이 그렇게 무언으로 말했다.
박영광이 씹던 당면과 순대를 삼키며 말했다.
“알아, 인마. 네 아킬레스건이 네 어머니라는 거.”
“아시면서!”
“상황이 안 좋아.”
박영광이 잔을 들었다.
쭈욱.
잔을 비우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작년 한성 전자의 매출이 17조 원이야.”
“…….”
“한국 경제에서 한성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이 30% 가까이 돼. 특히 폰과 반도체에 있어서의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야.”
“…….”
“그런 한성 전자가 흔들리면 국가 경제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어.”
박영광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누군 하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하겠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박영광이 순대와 대파를 입에 넣고는 젓가락을 내려놨다.
“……겉으로는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운용하는 펀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국제 투기 자금 중 하나야. 현재 예상 최저 자금은 최소 한화 30조이야. 어쩌면 100조까지 투입할지도 몰라.”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100조.
국가 예산의 1/4에 육박하는 엄청난 자금이다. 그 자금으로 한성 전자를 공격하려 한다.
박영광이 순대와 대파를 씹으며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쪼르르.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대체…….”
차은성이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물었다.
“상황이 심각해.”
박영광이 소주병을 내려놓았다.
“어마어마한 국제 투기 자금이 지금 한성 전자를 노리고 있어……. 만에 하나라도 한성 전자가 어떻게 되었다간, 관련 업계의 이들, 최대 수백만 명이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 우리 한국 경제에도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고.”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은 생각 외로 상황이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군요.”
박영광이 씹던 순대와 대파를 삼키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사장님이 VIP께 보고하고 재가를 받은 작전이야……. 한우종 회장과도 몇 차례 회동하며…… 어지간하면 은성이 네가 당분간 쉴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고 싶지만, 힘들어.”
박영광이 젓가락으로 순대와 당면을 다시 말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그러곤 천천히 씹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성 전자가 잘못되면 그 영향은 해상 테크에도 미쳐.”
박영광의 말에 차은성이 흠칫했다.
그사이.
박영광이 씹던 것을 삼키며 소주병을 집으려 했다. 그런데 소주병에 소주가 없다. 어느새 다 마셔 버렸다.
박영광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소리쳤다.
“이모. 여기 소주 하나 더요.”
“네에.”
아주머니의 대답을 들으며 박영광이 차은성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