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세이비어 이그너스.
이그너스 가문의 시조.
건우는 그가 살아생전 이루어낸 업적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존경했고, 언젠가는 저만큼 명성을 떨치길 고대했다.
하지만 그의 바로 곁에 있다 보니 그 경의는 무뎌지게 되었다.
솔직히 레이드를 할 때가 아닌 그는 드라마 좋아하는 동네 할아버지였다.
우우웅.
하지만 그의 비전을 이렇게 직접 전수받으니, 다시금 소름이 끼쳤다.
체내를 감돌고 있던 영약의 기운은 완전히 건우의 것으로 탈바꿈됐다.
그와 동시에 건우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다.
[이그너스의 마나 연공식이 5성에 도달했습니다.]
원활한 마력공급.
마력의 낭비를 덜어 주는 효율적인 방식.
전생에서는 4성에 그쳐 겪어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경지가 높아진 만큼 이번에도 잇달아 부가적으로 능력이 상승했다.
[스킬에 부여된 마력 소모치가 대폭 하향 조정됩니다.]
[근력이 5 상승합니다.]
[민첩이 7 상승합니다.]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마력이 70 상승합니다.]
건우는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는 세이비어가 잇몸을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는 건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어떠냐? 과거에 나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했느냐?”
“…….”
“표정이 왜 그러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련을 하는 내내 일부러 고통스럽게 한 걸 떠올리니 몹시 약이 오른 터였다.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건우는 솔직하게 속내를 토로했다.
“과거에 왜 가문에서 아무도 할아버지를 뛰어넘지 못했는지 이제야 실감이 되네요.”
“하긴 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그릇은 너밖에 없었지.”
“제가요?”
“나 이후에는 차이트의 권능을 쓸 줄 아는 건, 너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가주로 선택된 거고.”
건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들은 이그너스의 시작이면서도 끝의 위치에 있는 자였다.
세이비어는 감회가 새로웠다.
“다만, 지능이 딸려서 아쉬웠지.”
울컥!
건우는 문득 전생 때 겪은 서러움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그너스의 마법 교육은 너무 가혹했다.
7살 아이에게 마법서 교본을 하나 던져 주며 암기하라고 강요하질 않나.
8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기초전투 마법을 20가지 이상을 터득해야 했다.
10살쯤 됐을 때는 고블린이 머무는 숲에 버려졌다.
여기서 좀만 못하면 덜떨어진 놈 취급을 받았다.
오죽하면, 이그너스 가문에서 은연중 떠도는 가훈이 ‘100-1=0’이라는 수식이었다.
100번 잘해도 1번 못하면 그냥 못하는 거다.
‘물론 내가 그걸 감안해도 반푼이는 맞지만.’
건우는 세이비어를 찌릿 노려보았다.
경외가 담겼던 시선이 원망으로 변질됐다.
이 말도 안 되는 교육법을 고안한 게 바로 세이비어였기 때문이다.
“……왜 그러냐?”
“아니에요. 아무것도 갑자기 니제르가 보고 싶어져서.”
차갑고 무뚝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는 정은 많았다.
무엇보다 잘하면, 그때마다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그놈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고 그래?”
세이비어는 단단히 심통이 난 듯했다.
“제 검술 스승님이잖아요. 할아버지도 저번에 제 검술 인정해 주셨잖아요.”
“으으.”
세이비어는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그때 그가 건우의 경지에 심취해 앞으로 더 정진하라고 부추기긴 했다.
세이비어의 반응에 건우는 순수하게 호기심이 발동했다.
“할아버지 혹시 니제르한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는 건가요?”
“가가가, 갑자기 무슨 소리냐!”
말을 더듬는 게 심상치 않았다.
잘 모르지만 니제르를 신경 쓰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니제르 그 자식. 손가락 하나로도 짓누를 수 있지. 하하하.”
“…….”
점잖은 니제르와 달리 세이비어의 모습은 경박해 보이기도 했다.
피식.
이내 건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할아버지 덕분에 검술도 한 단계 도약했어요.”
“무슨 소리냐?”
건우는 말 대신 크루엘의 마검을 뽑아들고서 오러를 주입했다.
우웅.
그의 황금빛의 마나가 검은 오러로 변질됐다.
우웅!
“호오.”
검신을 두른 오러를 살핀 세이비어는 감탄을 자아냈다.
이전에는 희미한 흑색이었지만 지금은 그 색이 짙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흐물흐물했던 오러가 불안하긴 하지만 검신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러.
그것은 마나의 또 다른 형체였다.
그리고 검을 다루는데 있어 필수불가결의 재능이었다.
이번에는 세이비어의 호기심이 발동됐다.
“어떻게 한 거냐?”
마법은 고도의 연산과 논리로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다.
그러나 검은 그 개념이 약간 달랐다.
제일 중요한 건 깨달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이비어가 이해할 수 없는 분야였다.
건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5성에 도달하니까 자연스럽게 됐어요. 봉황검술을 터득한 것도 많이 도움이 됐고요.”
건우는 서일도가 검을 휘두를 때 모습을 떠올렸다.
검신을 두른 불꽃은 미미하게 검신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는 그의 오러와 불꽃이 혼합된 다소 특이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운이 좋았지.’
건우는 머릿속에 그의 검을 똑똑히 각인해놓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5성에 도달하자, 완전 기억을 바탕으로 오러를 검신의 형태로 맺는데 성공했다.
세이비어는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크흠 내가 만든 마나연공식에 그런 비결이 있을 줄이야. 고마우면 내가 좋아하는 오현숙 여배우 드라마, 일출의 아침을 전편 구매해 놓거라.”
“과외비 치고는 싸네요.”
건우는 피식 웃으며 크루엘의 마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근데, 너 검 외에도 병장기 많이 다루지 않냐?”
세이비어의 질문에 건우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다 한 마디를 남겼다.
“이기기만 하면 장땡이죠.”
세이비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조 없는 놈.”
***
수련을 마친 건우는 곧장 이그너스의 제단으로 이동했다.
거대한 석상 주변으로 마정석이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도 모두 A급 이상의 마정석으로 숫자가 약 14000개 달했다.
“후우, 완전 노가다네.”
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간 열심히 사냥해서 마정석을 아무리 많이 모았으나, 순도가 낮은 마정석은 등급 상향 의식에 쓰일 수가 없었다.
바포메트의 등급 상향을 위해서는 앞으로 순도 A급의 마정석이 3000개가 필요했다.
귀찮아서 시중에서 구매할까 했지만 포기했다.
그 정도 단위의 마정석은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괜스레 얽혀봤자 좋을 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건우가 세이비어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근데 이 제단이 왜 제 영지에 있을까요? 전생에는 없었는데.”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격이 떨어진 보스가 마련해 둔 거지.”
건우는 거미와 여인의 몸이 섞인 몬스터를 떠올렸다.
“……아라크네.”
“그래. 아라크네는 분명 이 제단을 완성시키기는 했지만, 상처로 인해 마정석을 모으지 못했던 게야.”
건우는 싱긋 웃어 버렸다.
“그 녀석한테 고마워하게 될 날도 오네요.”
전생에서 자신을 죽인 원흉이 이렇게 도움이 될 날이 올 줄이야.
건우는 제단 주변을 한창 조사하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AM 07: 00]
슬슬 지혜가 일어나 깨울 시간이 됐다.
“이제 돌아갈까요?”
세이비어의 몸은 연기로 변모하더니 건우의 반지로 들어갔다.
-오늘 새로 나올 아침 드라마가 궁금하구나.
“하여간.”
건우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게이트를 열어 통과했다.
***
짜악!
드라마 속 여배우가 남배우의 따귀를 때렸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남자는 바람피우다 걸린 것도 모자라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까지 몰래 숨겨 키우고 있는 걸 들킨 참이었다.
-…….
묘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는 점차 고조됐다.
여배우가 어떤 짓을 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삐빅!
그 중요한 타이밍에 TV가 꺼졌다.
-으아아아악!
세이비어는 절규했다.
빵을 우물우물 씹고 있던 건우는 자연스럽게 반지를 꼭 눌러 음성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았다.
TV를 끈 건 건우의 여동생, 최지혜였다.
“오빠 요즘 들어 자극적인 거 너무 많이 본다.”
“응. 잘했어. 나도 보고 싶지 않았거든.”
“……?”
지혜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현관문으로 들어온 춘삼이 건우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형님 이름으로 왔습니다.”
“고맙다.”
“그게 뭡니까? 문 앞에서 엄청 험한 분이 오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춘삼은 현관문 앞에서 마주친 협회 직원을 떠올리며 으스스 몸을 떨었다.
“이건 내가 협회에서 요청한 자료야. 아마 보안이 걸려 있어서 직접 전하러 온 걸 거야.”
협회에서는 각성자를 비롯해 게이트와 관련된 의문의 현상을 정보 수집을 한다.
그리고 수집한 정보에 가격을 매겨 헌터들에게 판다.
정보 가치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
꿀꺽.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춘삼은 목에 고인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보안까지 걸려 있으면 최소 억 단위 정보라는 건데. 어떤 거지?’
“대체 어떤 정보기에 그렇습니까?”
“비밀.”
건우는 슬쩍 지혜를 가리키며 윙크를 했다.
지혜가 없는 데서 말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의미를 간파한 춘삼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밥이나 먹어.”
“넵!”
아침 식사 후.
지혜는 곧장 대학으로 갔고, 건우는 실내에서 서류 봉투를 뜯어보았다.
그리고 한 장씩 문서를 살피다가 건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놔! 어이가 없네.”
“뭡니까?”
“봐봐라.”
춘삼은 건우가 내민 서류를 살폈다.
[아크 길드, 선우진 보석 석방, 보석금 최소 10억.]
[새벽 2:00 아무도 모르게 미국행을 타고 떠남.]
[행선지는 애리조나, 스코필드 가문과 접촉할 가능성이 높음.]
“헐.”
기사를 읽은 춘삼은 기가 막혔다.
“형님 이 새끼가 어떻게 보석 석방돼요?”
선우진.
그의 형량이 처음 7년에서 6개월로 감형됐었다.
그 당시에도 여론은 한창 떠들썩했다.
한데, 갑자기 석방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우진은 상관없지만 스코필드는 신경 쓰여.’
수명을 대가로 힘을 빌려 주는 극약, 레이즈.
건우는 약의 소재지로 스코필드를 의심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지만 일에는 항상 순서가 있는 법이다.
사정이 어쨌건 건우는 우선, 연계 퀘스트부터 수행해야만 했다.
“춘삼아.”
“……네.”
“혹시 모르니까 미국 갈 준비하고 있어라.”
“네?”
“강원도에서 용무 다 본 다음에 미국으로 가봐야겠다.”
춘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 언제 출발할 건데요?”
“왜 가기 싫어?”
“그럴 리가요.”
대답과 달리 춘삼은 전력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반항하면서도 고분고분 일을 잘 해내는 게 그의 스타일인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흔히 말해서 츤데레라고 하는 건가?’
“언제 출발하지는 나도 몰라. 중간중간에 연락 넣을게.”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강원도는 옥수수와 수박, 참외가 명물인 걸 꼭 잊지 말아주십시오.”
“한 트럭으로 보내 줄 테니까 다 못 먹으면 죽는다.”
“아, 아니. 그 정도까지 필요 없는데요.”
현관문은 그대로 닫혔다.
홀로 현관문에 있던 춘삼은 주륵 땀을 흘렸다.
건우가 대답을 하지 않고 간 게 못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서, 설마 진짜 그렇게 사 오는 건 아니겠지.’
***
강원도 춘천에는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거대한 교량이 있다.
소양강 스카이 워크.
총 길이 174m.
교량의 바닥 중 투명 유리 구간이 156m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리 건너편으로 보이는 거친 물살이 묘한 스릴감을 일으켰다.
그곳에는 마침 한 커플이 사진을 찍으려 하고 있었다.
“오, 오빠 무서워!”
“에이, 또 오버한다.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여인이 귀엽게 포즈를 잡고 남자가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휘익!
그 사이로 건우가 스쳐 지나갔다.
67.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