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각성자 체육관.
그곳은 각성자들이 단련을 할 수 있는 훈련시설이다.
보통은 은퇴한 헌터들이 트레이너를 맡고 있으며 구비된 시설은 모두 각성자에게 맞춰져 있다.
건우는 그중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체육관에 들어와 있었다.
물론 이곳에 온 목적은 단련이 아니었다.
현재 건우는 링 위에 올라와 글러브를 착용한 상태였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맞은편에서는 권정아가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복장은 스포츠 탱크탑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건우를 힐끔 보며 물었다.
“저기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그러세요.”
“나이가 어떻게 돼요?”
“24살입니다만.”
씨익.
권정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내가 4살 많으니까 말 놔도 되지?”
‘이미 놓은 거 아닌가?’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웅성웅성.
수련장에서는 이 둘을 두고 사람들이 한창 들썩이고 있었다.
“저 왈가닥 기어코 저질렀네.”
“S급 헌터끼리 스파링하면 막 부서지고 이러는 거 아니야.”
“여기 시설 전부 저 왈가닥한테 맞춰진 거잖아. 절대 안 부서져.”
“완전 흥분한 것 같은데.”
“그동안 저 왈가닥 스파링 한 번 제대로 못했잖아. 주체 못할 만하지.”
‘왈가닥, 잘 어울리네.’
건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반면, 권정아는 음산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물었다.
“왈가닥한테 맞고 싶으신 분?!”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양손의 글러브를 세차게 부딪쳤다.
콰앙!
체육관 내에서는 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들은 대답 없이 관전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와중에 박춘삼은 링 위에 팔을 올리며 건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형님 제 판돈을 모두 형님에게 걸었습니다. 꼭 이겨 주십시오.”
빠직!
건우의 이마에 핏대가 세워졌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자식이! 정신을 못 차리고!”
건우는 양 주먹으로 춘삼의 머리를 가볍게 지압해 주었다.
“으아아아아악!”
춘삼은 훌쩍이며 구석으로 얌전히 물러났다.
준비를 끝마친 둘은 곧 링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규칙은 간단해. 나하고 쉬지 않고 5분 동안 스파링해서 버티면 돼. 신참이니까 최대한 봐주면서 할게.”
그녀는 도발 섞인 미소로 건우를 쳐다봤다.
그 도발에 건우는 웃음으로 맞받아쳤다.
“저 질문이 있는데요?”
“뭔데?”
“제가 이기면 어떻게 되는 가요?”
그녀는 얄궂게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일 없을 텐데. 넌 샌드백 대용이야.”
“혹시나 해서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니가 시키는 대로 다 한다.”
“약속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자세를 잡았다.
땡!
그리고 공이 올렸다.
쇄액!
먼저 치고 들어오는 것은 권정아였다.
기세가 무섭게 돌변한 그녀가 지그재그 스텝을 밟으며 돌격해 왔다.
“……?!”
그 속도가 예상을 훨씬 웃돌아 건우는 당황해하며 급히 가드를 올렸다.
권정아는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음이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권압이 어찌나 거세던지 건우는 로프까지 밀려났다.
지릿지릿!
충격을 받은 팔에 뼈가 시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콰앙! 콰앙!
권정아는 폭풍처럼 건우를 몰아붙였다.
그녀의 일격을 맞받아치거나 회피하던 건우는 이마를 좁혔다.
‘왜 그동안 스파링 상대가 없는지 알겠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 누구도 이 펀치를 감당할 수 없다.
아마 맞는 사람 족족 기절해 의식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심지어 이건 혼신의 힘으로 후려친 게 아니다.
‘흠 근력만 따지고 보면, 마동혁 대표보다 더 위네. 9위로 상정된 건 이 부분 때문이겠네.’
권정아.
그녀는 괴력난신의 화신이다.
과장을 붙여 표현하자면, 지금 건우의 눈에 그녀는 10미터도 넘는 거대한 코뿔소를 보는 것 같았다.
후웅!
건우는 종이 한 끗 차이로 그녀의 일격들을 피해 나갔다.
“……?!”
권정아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다 곧 익살맞게 웃어 보였다.
‘제법인데, 좀 더 속도를 올려 볼까?’
파앙! 파앙!
허공에는 그녀의 권압이 공기와 마찰을 일으키며 파공성을 일으켰다.
피핏!
그녀의 무서운 공격이 건우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건우는 눈매를 좁혔다.
‘여자를 때리는 거라서 기분이 그렇지만.’
쇄액!
건우는 니제르에게 배운 보법을 응용해 그녀의 일격을 피한 뒤, 단숨에 사각에 진입했다.
‘뭐, 뭐야?!’
건우는 글러브가 그녀의 턱을 그대로 올려쳤다.
콰아아앙!
극강의 카운터였다.
정통으로 일격을 허용한 권정아의 동공이 일순간 희미해졌다.
그녀는 희미하게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아, 안 돼.”
스스스스스.
그녀가 의식을 잃기가 무섭게 동공이 붉게 물들며 심상치 않은 사기가 피어올랐다.
‘빙의?!’
그 현상이 무엇임을 눈치챈 건우는,
퍼억!
악마가 눈을 뜨기 전에 그녀의 복부를 강하게 쳤다.
“쿨럭!”
그 충격에 권정아를 점령하려고 했던 악령도 기척을 감췄다.
“뭐가 고민인지는 알겠네.”
글러브를 벗어던진 건우는 권정아를 품에 안으며 관중들에게 물었다.
“여기 의무실은 어디 있죠?”
“바, 바로 아래층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우는 그대로 링 밖으로 빠져나와 의무실로 향했다.
그런 건우를 보며 사람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우와 저 권정아가 가녀린 여자로 보이는 건 처음이다.”
“그나저나 저 사람 마법 계열 헌터 아니었어. 왜 저렇게 빨라.”
“난 어떻게 기절시켰는지 보지도 못했어.”
그런 그들의 뒤에서 춘삼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
“에이씨.”
“다 처먹어라.”
“아, 저놈 말빨에 속아 넘어갔어.”
뻘쭘하게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야유를 퍼부으며 돈을 꺼냈다.
***
의식을 잃은 권정아는 무의식적으로 스파링 장면을 떠올렸다.
이지적인 눈동자는 그녀의 움직임을 정확히 포착했다.
단련된 근육은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의 일격을 튕겨 냈다.
특히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는 그 기술은 절로 예찬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이 일순간 혼란으로 뒤덮였다.
말도 안 돼.
그 녀석 마법사라며?
나이도 나보다 어리고 레이드 경력도 나보다 적은데?
아무리 S급의 육체가 강해도 이럴 리가 없을 텐데.
번뜩!
순간 의식을 되찾은 권정아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긴.”
주변을 둘러보니 낯익은 광경이 펼쳐졌다.
이곳은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체육관의 의무실이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여기 실려 올 때도 다 있네.”
“기절한지 30분 만에 일어나셨네요. 너무 튼튼한 거 아니십니까?”
“너.”
그녀는 쌍심지를 키며 구석을 바라보았다.
간호석에는 건우가 책을 읽고 있었다.
“야, 다시…….”
“다시는 없습니다. 졌으면 깔끔하게 인정하세요.”
“…….”
정 없이 확 잘라 말하는 말투에 권정아는 쳇 혀를 찼다.
“그래. 졌다. 졌어. 그래서 내가 뭐해 주면 되겠냐?”
“적어도 제 앞에서는 얌전히 있어 주세요.”
“……그게 다야?”
어이없는 요구에 그녀는 버럭 했다.
“나 장난으로 말한 거 아냐!”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달라고요. 누님.”
“누, 누님?”
어색한 호칭에 그녀는 얼굴을 화끈 붉혔다.
건우는 책장을 덮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꽤 귀찮은 악마가 달라붙어 있네요.”
권정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어떻게 안 거야?”
“마법을 연구하다 보면, 악마는 자연히 접하는 소재니까요.”
“……아까 스트레이트 날린 거 도와준 거지. 고맙다.”
그녀는 악마가 각성하기 전에 건우가 잠재운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건우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S급 정신을 위협하는 정도면 꽤 위험한 놈이에요. 외국 길드의 하이 프리스트에게 도움을 받아야 될 거예요.”
그녀는 이불자락을 꽉 붙들었다.
“이미 다 해 봤어. 대기자 수가 천 명이 넘는데 어떻게 만나?”
“그럼 차선책을 써야겠네요.”
“차선책?!”
권정아는 눈을 부릅떴다.
“뭐, 뭔데? 방법이 있는 거야?”
건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문분야는 아니지만 어차피 약속이기도 하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뭐? 어떻게? 탑에서 온 교류자도 해결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자, 건우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딴사람 알아 봐요.”
“잠깐!”
그녀는 몸을 벌떡 일으켜 건우의 손목을 붙들었다.
“도와준다면, 뭐든 할게.”
건우는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어쩐지 춘삼에게 속은 이유를 알겠네요.”
“춘삼? 그게 누군데?”
“자기가 로베르토라고 떠드는 놈이에요.”
“……?”
한 번에 이해가 안 됐는지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건우는 설명을 덧붙였다.
“미국계 한국인이고 전직 사기꾼이에요. 어설프게 한국어 하면서 남 뒤통수 후려치는 게 전문인데, 저도 한 번 속았어요.”
“그 자식!”
권정아가 다시 발끈하려는 찰나. 건우가 주의를 주었다.
“제 앞에서는 얌전히 있기로 했죠.”
“…….”
그녀는 간신히 화를 누그러뜨렸고 건우는 설명을 이어 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 저녁에 멸마의식을 치르죠.”
그녀는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필요한 게 뭐야?”
“우선 이 체육관 통째로 빌려주세요. 의식에 쓰이는 아티팩트 비용이랑 제 인건비를 합치면 17억 원 정도 되겠네요.”
권정아는 인상을 홱 찌푸렸다.
“좀 깎아주면 안 돼? 이번 달 보상금 때문에 빡빡한데.”
“전액 제가 부담합니다.”
“그래주면 고맙…… 뭐?!”
권정아는 깜짝 놀라 휘둥그레 눈을 떴다.
“문제 있습니까?”
“왜,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권정아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건우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얄밉기는 하지만 그래도 거둬들인 놈 뒷수습은 책임지고 해야죠. 이걸로 속상한 부분은 퉁 친 겁니다.”
“……응.”
권정아는 드물게 고분고분 답했다.
***
심야 12시.
각성자 체육관에는 마법진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성역(Holy ground).
이 마법진 안의 부정한 악마는 정화될 수밖에 없었다.
단 발동하기 위해서는 헬파이어에 버금가는 마력을 사용해야 했다.
그 때문에 중앙에는 얼마 남지 않은 마나스톤이 놓여 있었다.
“어렵다. 아직 공부가 부족하네.”
건우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검토에 들어간 참이었다.
그런 건우에게 세이비어가 말을 걸어왔다.
-너가 이렇게 순수하게만 도와줄 놈으로는 안 보이는데.
“순수하게 도와주는 거 맞아요. 단지 도와주는 김에 저도 얻어 가는 게 있을 뿐이죠.”
세이비어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그럼 그렇지. 그래서 목적은 뭐냐?
“악마는 등급이 낮더라도 지능은 높은 편이잖아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악마 녀석들은 절대 이득을 갖다 주지 않아.
건우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갖다주는 게 아니고 갖다 바치게 할 겁니다.”
-호오?
세이비어가 기대가 된다는 어조로 감탄하자, 권정아가 말을 걸어왔다.
“혼자서 쫑알쫑알 뭐라고 떠드는 거야?”
뒤를 돌아보니, 권정아의 얼굴과 몸 곳곳에 푸른색 염료로 룬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멸마의식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건우가 미리 새겨 둔 타투였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건우를 쏘아봤다.
“날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못 고치기만 해 봐.”
“저희 형님이 다재다능하십니다. 믿어 주시죠.”
곁에 있던 춘삼의 말에 권정아가 찌릿 춘삼을 노려봤다.
“당연 너보다는 건우가 훨씬 믿음직하지. 춘.삼.아.”
“추, 춘삼이라니요? 저, 저에게는 로베르토라는 이름이…….”
우드득.
권정아는 말 대신 주먹 관절을 풀었다.
“박춘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누님.”
과연 상황 파악이 빠른 그는 허리를 굽실 숙였다.
“흥!”
그녀는 고개를 젖히며 마법진 중앙에 섰다.
그리고 멸마의식이 시작됐다.
“누누이 말하지만 의식 중에 절대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끄덕.
긴장이 됐는지 권정아는 대답 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럼.”
건우는 곧장 마법진을 발동했다.
58.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