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한 집안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침묵이 실내를 맴돌았다.
‘숨 막혀.’
선우진은 숨쉬기가 텁텁했다.
현재 그는 집안의 서재에 있었다.
서재의 주인은 책상에 앉은 채로 선우진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강건한 체격과 심계 깊은 눈빛.
그와 마주한 자라면 누구든 가슴에 오한이 들 것이다.
이름은 선우혁.
선우유정과 선우진의 아버지이자, 아크 길드를 책임지고 있는 수장이었다.
“……못난 놈.”
그가 말문을 열자, 선우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대체 네놈이 형보다 잘난 게 뭐가 있다는 거냐?”
“…….”
선우진은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이 두려웠고, 그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선우혁이 지그시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봉황 길드와 혼담이 취소됐다. 거의 다 넘어왔는데. 이게 누구 때문인지 아느냐?”
“저, 저 때문입니다. 면목 없습니다!”
선우혁의 관점에서 혼인은 당사자들끼리 정해야 될 문제가 아니었다.
옛적부터 집단이 서로 혈연을 맺는 건 그만큼의 이익이 오고 가는 중요한 거사였다.
그 때문에 선우혁은 심기가 매우 언짢았다.
최근, 선우진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기 때문이다.
S급 헌터, 최건우 앞에서 엉덩방아를 찍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말이다.
기사는 전부 내렸지만 간간이 인터넷에서 짤방으로 돌아다녔다.
봉황 길드 대표, 서일도는 선우진의 그런 점을 굉장히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그래도 거의 다 넘어온 참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손에 깍지를 꼈다.
“언제까지 네놈의 방만한 태도를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선우진이 반성 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기, 기회를 주시면 어떻게든 만회해 보겠습니다.”
“만회한다고?”
선우혁은 깍지를 턱에 괴며 고심했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선우진을 봤을 때, 그는 아직까지 길드에서 쓸 만한 자원이기는 했다.
B급의 준수한 실력, 본성을 숨길 줄 아는 처세술.
무엇보다 음모술수에도 능했다.
선우혁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순무식하고 이미지 관리를 안 하는 선우유정보다 후하게 보고 있기도 했다.
‘형만큼만 실력이 됐어도 충분히 내 자리에 올랐을 놈이기는 하지.’
선우혁이 비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떤 식으로 만회하겠다는 거냐?”
“절 거부한 봉황 길드를…….”
말을 하면서 선우진은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아까와 달리 그 얼굴에서는 공포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 눈빛은 표독스러워졌다.
“아버지께 바치겠습니다.”
씨익.
그 얼굴을 본 선우혁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미 어떤 꿍꿍이를 준비했나 보군.’
그는 개인적으로 선우진의 이런 주도면밀한 점을 좋아했다.
“어떻게 할지 지켜보마.”
두 부자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끼익!
서재의 문이 닫히고 바깥으로 나온 선우진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새끼들이 날 병신으로 봐.”
요 며칠 사이 굴욕을 맛본 선우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대로 부숴주지.”
그는 스마트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저예요. 계획을 제 2안으로 변경해야 되겠어요.”
제 1안인 서유라와의 약혼.
그게 보기 좋게 빗나갔으니 제 2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 2안.
그것은 봉황 길드를 뒤집어엎는 계획이었다.
***
건우가 봉황 길드에 온지 어언 닷새가 흘렀다.
딱히 계획하고 온 여행은 아니었지만 건우는 나름 즐거웠다.
휴양을 즐기면서 수련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우는 지난번, 서일도와 대련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강해지는 데는 무작정 레이드를 치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검술의 기초를 갈고닦으니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다.
봉황 길드의 무도장.
타앙! 타앙!
현재, 건우는 무복을 갖춰 입고 목검으로 타격대를 강타하고 있었다.
타격을 가할 때마다 목검의 궤적이 굽이굽이 휘는 게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으아악!”
그 모습을 보고 자극받은 문하생들은 더욱 세차게 수련에 임했다.
그러나 여기서 딱 한 명.
분위기를 흘리는 글러먹은 외국인 한 명이 있었다.
“혀어어엉님. 휴가 와서 왜 이런 생고생을 한단 말입니까?”
박춘삼이 숨을 헐떡이며 목검을 붙들고 있었다.
타앙! 타앙!
건우는 들리지 않는지 연신 타격대를 강타했다.
“혀어어어님!”
“어허, 시끄럽다. 이놈.”
그 간절한 애원을 들어 주는 이는 그를 혹독하게 대하는 검술사범뿐이었다.
“꾀부리면 안 되지. 손 쉬면 100회 더 추가한다.”
“으아아아악!”
탕! 탕! 탕!
춘삼은 열정을 바쳐 목검을 휘둘렀다.
드륵.
그때 무도장이 열리며 식사 당번이 들어왔다.
바로 최지혜와 서유라였다.
그녀들은 광주리를 안고 있었다.
“다들 하던 거 멈추고 식사하세요.”
“지혜 씨 많이 무거우시죠? 제가 들겠습니다.”
휘익!
춘삼이 목검을 버리고 지혜에게 후다닥 달려갔다.
검술사범은 어이가 없어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요령 좋게 도망치는 데, 도가 튼 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게…….
우르르르.
“아닙니다. 제가 들겠습니다.”
“아니, 내가 먼저!”
도장에 있던 문하생들이 한꺼번에 움직였기 때문이다.
“으이구, 한심한 것들.”
기가 찬 검술사범은 혀를 차면서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자고로 벼랑 위에 핀 꽃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법이다.
한데, 그 벼랑 근처에 만렙 드래곤이 진을 치고 있다면?
당연 접근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 경우가 바로 지금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건우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남자 문하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싸아.
그 눈빛이 지독하게 차가웠다.
“…….”
두 여인에게 말 한 번이라도 붙여볼까 했던 문하생들은 주먹밥만 야금야금 먹어야 했다.
서유라는 건우가 먹고 있는 주먹밥을 보며 물었다.
“오, 오빠 그거 제가 만든 건데, 어때요?”
“으, 응. 아주 맛있어.”
건우가 떨떠름하게 웃었다.
지난번에 맛본 서유라의 요리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지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유라가 나한테 요리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라고. 굉장히 서툰데, 누구 때문에 노력하는 것 같아.”
서유라가 얼굴을 화끈 붉혔다.
“지, 지혜야!”
요 며칠 동안 이야기를 나눈 것뿐인데, 그녀들은 굉장히 친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동갑이다 보니 서로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건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 그래? 누군지는 몰라도 그 녀석 참 부럽네.”
“…….”
어째서일까?
단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인데, 분위기는 차갑게 내려앉았다.
두 여인이 보기 드물게 싸늘한 표정으로 건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그래?”
“후우.”
두 여인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지혜가 서유라에게 사과를 건넸다.
“이런 오빠라서 정말 미안해.”
“아니야.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지. 뭐.”
긁적긁적.
괜스레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건우는 관자놀이를 긁으며 창밖을 살폈다.
“날씨가 참 좋…….”
두근.
말에 매듭을 짓기 전, 건우의 심장이 묘하게 박동했다.
‘뭐지. 이 감각은?’
건우는 다시금 산 곳곳을 살펴봤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
“우연인가?”
홀로 중얼거릴 때, 세이비어가 답을 내주었다.
-글쎄 우연은 아닐걸. 한순간이지만 나도 엄청난 파장을 느꼈거든.
“……그럼.”
건우가 슬그머니 등을 돌리니, 서유라가 이마를 짚고 있었다.
“유라야. 너 왜 그래? 괜찮아?”
“아, 아니. 그냥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
건우처럼 민감하지는 않지만, 서유라 역시 무의식중으로 무언가를 감지한 건 틀림없는 듯 보였다.
“나 잠깐 밖에 좀 나갔다 올게.”
그는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
봉황 길드 뒤에 위치한 용문산.
그곳에는 봉황 길드의 대표, 서일도는 수련 겸 가볍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등산을 하듯 오르는 건 아니다.
휘익, 휘익.
신출귀몰.
그는 고속으로 발을 튕기며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움찔.
그러다 서일도는 중간에 한 번 발을 멈추었다.
“방금 무슨 감각이었지?”
기이하게도 갑작스레 오한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 봤지만, 방금 전의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착각인가 보군.”
그는 다시 발을 박찼다.
잠시 후.
그가 도착한 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주변에는 첩첩이 쌓인 암괴들이 드러났고, 깊은 계곡과 폭포가 자리 잡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보군.”
그는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곳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그의 전용수련장이었다.
“하하하, 대표님은 여전하십니다. 그렇게 강하면서 왜 더 힘을 추구하시는 겁니까?”
그때 숲 속에서 봉황 길드의 부대표, 김광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멈춘 서일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유는 알지 않는가?”
“홍련초래를 말하는 겁니까?”
서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련초래(紅蓮招來)
그것은 한 끗의 깨달음이 모자라서 완성시키지 못한 초식이었다.
김광식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
“새삼스럽게. 말 편히 해도 되네.”
김광식이 급히 호칭을 고쳤다.
“형님은 봉황 길드를 더 크게 확장시킬 생각은 없으십니까?”
“내가 지켜야 될 땅은 이곳이야.”
“그렇군요. 형님은 지니고 있는 힘의 크기에 비해 참 야망이 없으십니다.”
서일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정에 신경 쓰기도 급급한 마당에 쓸데없는 욕심은 부릴 수 없지. 그래도 이제는 유라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는 한없이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김광식은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형님. 제가 그 일 때문에 참 곤혹스럽습니다.”
“미안스럽게 생각하네.”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덕분에 저도 결심했으니 말입니다.”
김광식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무슨 말이지?”
목소리에 담긴 살기를 감지한 서일도가 눈빛을 좁혔다.
피식.
김광식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형님 사실 두 달 전부터 이곳에 게이트 하나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아크 길드를 통해 조사해 본 결과, 그 게이트가 레드 게이트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그 말이 떨어지자, 서일도의 전신에서 험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게이트는 공략된 건가?”
김광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달 동안 방치했으니 이제 곧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자네는 뭘 했지?”
“게이트의 마력을 눈치채지 못하게 감추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강해서 그런지 봉인도 점차 풀리려고 하더군요.”
콰아아앙!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문산 전체로 흉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긴가?”
게이트의 마력을 감지한 서일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그곳은 시선이 닿는 위치였다.
서일도는 인상을 굳혔다.
“사, 살려 주세요.”
왜냐하면 그곳에는 김광식의 부하들이 어린 문하생 두 명을 게이트 쪽으로 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광식이 콧잔등을 매만지며 구슬픈 어조로 말했다.
“불쌍하지 않습니까? 저 아이들이 레드 게이트에서 죽을 생각을 하니.”
“네놈!!”
서일도는 일갈을 내지르며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바로 그때,
스스스스.
어린 문하생들이 그대로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다.
타앗!
그걸 본 서일도는 단숨에 발을 박차 게이트로 진입했다.
스스스스.
이윽고 게이트가 닫히며 흉흉한 적색으로 변색됐다.
김광식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크크크. 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형님은 그런 사람이니까요.”
삐리리
그때, 그의 스마트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김광식이 씨익 웃으며 통화에 응했다.
“아, 선우진 헌터. 일은 잘 처리됐습니다.”
그는 그대로 발길을 옮겨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안가,
저벅.
레드 게이트 부근으로 건우가 발을 내디뎠다.
44.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