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2단계 수련 장소에 머문 지 2150시간이 지났습니다.]
쉽게 생각했는데, 튜토리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러다가 평생 갇혀 살겠는데.’
1단계 수련을 통해 상당히 준수한 스탯과 초감각을 터득했다.
실제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건우는 나름 좋은 성과를 얻었다.
완전 기억능력을 통해 니제르의 검술을 기억하고, 초감각 스킬로 세밀하게 움직임을 컨트롤하여 검술을 완벽하게 구사했다.
때문에 2단계는 무난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건우가 니제르의 역량을 따라잡기에는, 니제르의 검술은 레벨이 너무 높았다.
지금 그 현실이 눈앞에 확연히 드러났다.
카앙! 카앙! 카앙!
숲 한가운데서 쉼 없이 격철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우는 검을 손에 쥔 채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그런 건우에게 달빛 같은 검의 궤적이 쉼 없이 몰아쳤다.
검을 휘두르는 니제르의 움직임은 너무 빨라 눈으로 쫓기도 힘들었다.
‘완전 괴물이네.’
기진맥진했지만 건우는 조금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니제르는 가르침에 엄격했고, 그의 검은 모든 걸 자비 없이 베어버렸다.
단지 버티는 것만으로도 스탯과 스킬의 숙련도가 증진할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대체 이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비긴 거야?’
쇄액!
“아직도 잡념이 많아.”
건우의 빈틈을 타 모습을 드러낸 니제르의 검이 달빛이 반사되며 건우의 어깨를 관통했다.
콰지지지지직!
“크아아아악!”
그는 검을 놓치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십분 내로 회복해. 그다음에 다시 훈련을 재개한다.”
“시간이 너무 빡센데요.”
건우는 복원을 전개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원하던 일이잖아.”
“이제 웬만한 건 다 익혔으니 합격시켜줘도 되는 거 아닙니까?”
“아직 내 기준에는 한참 미흡하단 말이지.”
울컥!
건우는 반박을 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니제르는 과묵한 성격이지만 선을 넘었다 싶으면 용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이센스 시험까지 얼마 안 남았어. 어떻게든 끝내야 돼.’
건우는 궁리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내기를 하는 게 어떨까요? 스승님.”
니제르가 건우의 말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스승님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말했을 텐데.”
“뭐 어떻습니까?”
“좋아. 무엇에 관한 내기지?”
“제가 스승님 몸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내면 나갈 수 있게 해주세요.”
“만약 네가 진다면?”
“스승님이 흡족할 때까지 여기 있을 게요.”
“지금이랑 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만.”
니제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건우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가끔 제자의 의욕도 살려주는 게 스승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늘 엘프들이 스승님 검술을 물려받지 못 하는 거잖아요.”
“…….”
조용히 날아온 건우의 팩폭에 니제르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의 종족인 엘프를 사랑했다. 때문에 그들을 위해 자신의 비급을 남겨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너무나 가혹한 수련법에 후손들은 저주받은 비급이라고 하며 불태우거나 책을 찢어 버리는 만행을 벌였다.
니제르에게 있어서는 당연 마음의 상처가 됐으리라.
“그래서 의욕을 주면, 이번에는 진지하게 해볼 생각이냐?”
“그럼요.”
“좋다. 그럼 그렇게 하지.”
때마침 상처를 모두 회복한 건우가 몸을 풀었다.
“시작은 제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마음대로.”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니제르의 허가가 떨어지자, 건우는 즉각 스킬을 시전했다.
[헤이스트를 발동했습니다.]
[스트렝스를 발동했습니다.]
[초감각을 발동했습니다.]
민첩과 근력을 대폭 향상시킨 건우는 양제철검을 손에 쥐었다.
동시에 주변의 시간들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양제철검은 점차 검은 오러로 뒤덮였다.
니제르 일식, 암섬(Dark slash)
건우는 있는 힘껏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카앙!
니제르 역시 암섬으로 받아쳤다.
채앵! 채앵! 채앵! 채앵!
그 기점으로 둘 사이에서 화려한 불꽃이 튀기기 시작했다.
격전 속에서 니제르는 건우를 보며 생각했다.
‘이 녀석, 정확히 나를 따라하고 있어.’
건우의 동작에는 한 점의 군더더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니제르는 마치 자신의 그림자와 검합을 나누고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호흡부터 시작해 검을 휘두르는 자세까지, 완벽한 모방이었다.
‘하지만 어림없지.’
니제르는 검격 사이에 미끼를 섞었다.
휘익!
“?!”
그의 타이밍이 절묘한지라 건우는 그대로 균형이 무너졌다.
니제르는 곧장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카카카캉!
건우는 검을 역수로 쥐어 가까스로 니제르의 검초를 흘려 넘겼다.
검에서는 심한 마찰로 인해 불똥이 요란하게 튀었다.
스팟!
건우는 그대로 몸을 연달아 선회시키며 니제르의 관자놀이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니제르 삼식. 월광(Moon light)
하나의 빛줄기가 곧장 니제르의 이마를 관통하려고 했다.
카아앙!
그러나 니제르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공격을 쳐냈다.
촤르르르륵!
검에 실린 힘이 어찌나 세던지 건우는 한참 뒤로 밀려나간 뒤에야 몸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후우.”
건우는 호흡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까지 호흡 하나 없이 세찬 검투를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1초.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니제르의 검이 그의 숨통을 옥죌 것이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니제르가 힘을 아끼며 건우를 봐주고 있다는 것이다.
타앗!
어느 정도 호흡의 안정을 되찾은 건우는 곧바로 발을 박찼다.
검신에는 다시 검은 오러가 뒤덮었다.
카앙!
두 남자가 다시 격돌을 펼쳤다.
니제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건우의 검격을 일일이 맞받아쳤다.
“으아아아아아!”
카앙! 후우우웅!
맞닥뜨린 두 검에서 오러가 뱀처럼 얽히고설키며 후폭풍을 일으켰다.
건우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발돋움을 했다.
니제르 이식, 사편(Snake whip)
양제철검이 굽이굽이 흔들거리며 사각에서 덮쳐왔다.
니제르의 검을 스산하게 감싼 건우의 검이 단숨에 니제르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목이 꿰뚫릴 위기.
니제르는 피하는 대신 건우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카앙!
쾌속의 찌르기, 월광이 순식간에 건우의 목을 향해 쇄도해왔다.
“?!”
당황한 건우는 즉시 검을 거두며 니제르의 검을 튕겨냈다.
빠직! 카카캉!
니제르의 월광에 건우의 양제철검이 단숨에 박살이 났다.
‘뭐 이 정도까지인가?’
니제르가 코웃음 치며 검을 거둬들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복원을 발동했습니다.]
쇄액!
건우의 철검이 니제르의 목덜미에 아주 살짝 닿았다.
“?!”
깜짝 놀란 니제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간으로 치면 약 3초.
건우는 부서진 철검을 순식간에 복원시켰다.
“제가 이겼습니다.”
건우가 씨익 웃으며 검을 거둬들였다.
니제르는 어이가 없었는지 눈매를 좁혔다.
“회복능력이 아니었군.”
니제르는 건우가 단순한 회복능력만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여태껏 건우가 상처 회복에만 그 능력을 썼기 때문이다.
니제르는 싱긋 웃고 있는 건우에게 한마디를 쏘아냈다.
“비겁한 놈.”
건우는 뻔뻔한 미소로 답했다.
“후후후, 저한텐 마지막 남은 비장의 카드인데 스승님한테 들키면 어떻게 합니까?”
“후우.”
니제르는 건우의 대답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생사를 다투는 싸움에서 패배에 변명을 붙이는 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단지 심기가 비틀리니 이 말만큼은 꼭 남겨야 했다.
“……치사하고 더러운 수단으로 이긴 걸 보면, 넌 세이비어의 후손이 확실하구나.”
건우는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할아버지와는 무승부 아니었나요?”
“아니, 나의 패배였다. 참 낯짝 뻔뻔한 일족이야. 너희는”
투덜거리는 것과 달리 니제르는 속이 후련하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합격이다.”
[니제르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튜토리얼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스킬 니제르의 검식을 터득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스킬 마나스킨을 획득하였습니다.]
시스템창이 연달아 올라온 것과 동시에 건우의 뒤편으로 게이트가 형성됐다.
꾸벅.
건우는 니제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니제르는 건우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엘프의 모습이 양각으로 박혀있는 팬던트였다.
“……저 주시는 겁니까?”
“그걸 네가 목에 차서 뭐 하게? 딱 봐도 여자 거잖아.”
“스, 스승님 설마 저를…….”
“……?”
니제르가 ‘이놈 미친 거 아니야?’라는 눈빛으로 건우를 쏘아봤다.
“인연이 닿으면 내 딸에게 전달해 주면 된다.”
“아직 살아있어요?”
니제르는 무척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살아있다.”
건우는 공손하게 팬던트를 받으며 물었다.
“이름이 뭔데요?”
“니파, 니파 아즈엘이다.”
“따님분한테 할 말은 없으세요?”
“그냥 미안하다고만 전해주면 된다. 그리고 이것도 받아 가라.”
이번에 그가 건네준 물건은 사파이어가 박힌 귀걸이였다.
“이것도 따님분한테 주면 되는 건가요?”
“나를 계승하는 놈한테 주는 거다. 그게 인간이 될진 몰랐지만.”
니제르와 건우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스승님!”
“허허, 그래 즐거웠다. 그만 가보거라.”
니제르는 진심으로 만족한 얼굴을 하며 천천히 자취를 감췄다.
***
이그너스의 공방.
고대 엘프의 검술 비급이 팔락거리며 게이트가 형성됐다.
우웅!
게이트 너머로 건우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왔군.”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세이비어는 줄곧 이곳에서 건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으으”
건우는 기지개를 힘껏 펴며 세이비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 본 사이에 많이 달라졌구나.”
세이비어는 부쩍 변한 건우의 모습에 은연중 감탄하며 의외의 말을 던졌다.
“니제르는 잘 지내고 있더냐?”
“알고 있었어요?”
“나 정도 되는 대마법사가 그걸 모른다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무엇보다 네 귀에 달린 게 증거 아니더냐?”
그는 건우의 왼쪽 귀에 부착된 귀걸이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다 뚱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배신자 같으니라고.”
건우가 황당무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갑자기 왜 삐지셨어요?”
“이그너스의 가주가 니제르의 후계자를 자청하고 있으니 속이 안 뒤집히겠냐?”
‘그렇게 심오한 뜻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건우는 귀걸이를 슬쩍 만지며 상태창을 확인했다.
<니제르의 귀걸이>
-등급 : 유니크
-설명 : 다크엘프 영웅, 니제르의 상징이라고 일컬어지는 귀걸이, 불온한 조짐이 생기면 정령이 미리 경고를 해준다고 한다.
-내구도 : 70/70
*정령친화도 50상승, 마력 70상승.
건우는 삐져있는 세이비어를 보며 쿨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그너스 가주랑 니제르 후계자, 둘 다 하면 되죠.”
“이게 어디서 양다리를 걸치려고 해!”
“……그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요?”
“수목 아침 드라마, 바람난 연인이란 명작에서……”
“거기까지.”
“크흠, 아무튼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아, 그리고 이것 보세요. 짜잔!”
건우는 손에 끼고 있는 이그너스의 반지를 보여주었다.
균열이 져 곳곳이 갈라질 것만 같던 반지가 완전히 제 모양을 찾았다.
세이비어가 눈을 반짝였다.
“오오! 이 기특한 녀석. 가보를 되살렸구나.”
건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제 대에서 멸망당했으니 제가 책임져야죠.”
“그때 당시라면 나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어. 넌 잘했었다.”
세이비어의 위로에 건우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세이버어는 말을 하면서도 의외로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마음이 얼마나 급했던지 곧장 그 속내를 드러냈다.
“이제 하찮은 감성팔이는 됐으니 빨리 게이트 열거라.”
“예?”
“지금이라면 아직 드라마 <바람난 연인> 볼 수 있단 말이야! 얼른!”
“…….”
재촉하는 그의 눈빛에 건우는 고개를 절래 흔들면서도 기분 좋게 게이트를 열었다.
우웅!
그와 동시에 세이비어는 반지로 스며들었고 두 사람은 집으로 귀환했다.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