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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313화 (31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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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소리를 잃고, 나는 괴수가 움직이는 걸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기 위해서 훈련을 했어. 그리고 훈련의 성과로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아.”

정원이 말했다. 시현은 이미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정원의 말을 막지 않았다.

“나는 땅의 진동을 느낄 수 있어. 그걸 시현씨한테 가르쳐 주고 싶었어.”

“가르쳐준다면 정말 고맙지. 그런데 그걸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시현은 그게 차크라를 이용한 방법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정원은 시현을 흙바닥에 앉게 하고 자기도 똑같이 그의 앞에 앉았다.

정원이 시현의 손을 잡았다.

“눈을 감아. 그리고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 느낄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해. 지금부터는 감각을 모두 열어. 한계를 부정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려줘야지.”

시현이 어색해하며 말했다.

“할 수 있을 거야. 저절로. 시현씨가 해야 되는 건 눈을 감고 깨닫는 것 뿐이야.”

“뭘?”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내가 누군데?”

시현이 물었다.

정원은 시현에게 말을 하는 대신에 손으로 시현의 눈을 감겨주었다.

시현은 눈을 감고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원이 시현의 두 손을 잡고 있었다.

바로 자기 앞에서 자기가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정원이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시현은 눈을 뜨지 못했다.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정원이 고집을 부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좁은 곳에 들어가 속박당하고 있는 것 같은 불쾌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끈적한 땀이 몸을 타고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현의 눈 앞에 낯선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는 시현을 돌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머리에 적포도주를 뿌린 것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하고 시현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호의가 담긴 웃음은 아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남의 운명을 혼자 알고 있는 사람이 지을 법한 웃음을 지으면서 여자가 시현을 돌아보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시현이 눈을 뜨려고 하자 정원이 시현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 아니야.”

시현은 이게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눈을 뜨려고 했다.

하지만 정원은 아예 자신의 손으로 시현의 눈을 가렸다.

세게 누른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를 믿고 제발 조금만 더 시도해봐 주면 좋겠다는 말이 이어졌다.

시현은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정원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다.

시현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갑자기 볼륨을 엄청나게 키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리를 내는 것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땅 위를 기는 것들, 그 위를 네 발이나 두 발로 밟고 지나가는 것들, 통통 거리면서 뛰는 개구리와 곤충 소리까지 들렸다.

시현은 눈을 떴다.

정원의 얼굴이 눈 앞에 보였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다.

정원은 시현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여자는 누구야?”

시현이 물었다.

시현은 자기한테 보였던 것들이 뭐냐고 소리를 높여서 물었다.

“나한테 지금 뭘 한 거야?”

시현이 물었다.

“그냥. 시현씨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게 도운 것 뿐이야.”

정원이 말했다.

“다른 애들도. 무영이나 효재도 이렇게 될 수 있어? 클랜원들도?”

정원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나만 된다고?”

정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빠나 엄마도 안 된다고? 익헌 삼촌이나 아키라 아저씨도?”

정원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은 왜 이런 것들이 저에게만 나타나는 건지, 저만 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쭐하는 기분보다는 점점 더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풀잎이 스치는 소리, 바람이 흙먼지를 끌어올렸다가 떨어뜨리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려서 시현은 점점 그것을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 소리들을 듣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되지?”

“그때는 다시 시현씨의 귀로 들어야지.”

“내 귀로 들으라고요? 그럼 지금 나는 뭘로 듣고 있는 건데?”

“뱀의 내이.”

“뭐라고?”

“뱀의 내이로 지금 시현씨는 땅을 통해 진동을 느끼는 거야. 정지 상태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고.”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시현은 정원에게서 그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차크라의 숙련도를 높여서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수준에서 멈추게 될 줄 알았지 다른 동물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듣는다니. 시현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그걸……. 잠깐만. 지금 하는 얘기를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정원이 시현의 얼굴을 감쌌다.

정원이 시현의 눈을 다시 감기고 시현의 귀로 들으라고 말했지만 시현은 정원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뱀의 내이를 통해서 들은 거라니.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자기 귀로 들을 수 없던 소리를 들은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잠시 후에 시현은 자신의 세계가 다시 잠잠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너무 크게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시현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이 소리를 듣는 거야? 평상시에?”

시현이 묻자 정원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시현씨가 들을 수 있는 소리에 비할 수가 없어.”

“왜 안 되는데?”

“시현씨는 다른 사람이니까.”

“무슨 얘기야?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정원은 고개를 저었다.

“시현씨는 완전히 다른 존재야.”

시현은 정원이 하는 얘기를 자기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현씨가 원하면 자기들의 기관을 빌려줄 거야.”

“누가?”

정원은 시현을 보고 웃을 뿐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누가 기관을 빌려준다는 거야? 무슨 기관을? 나한테 무슨 기관을 빌려준다는 거냐고.”

“나는 시현씨가 제대로 판단하게 해야 하는 사람이야. 그러려고 여기에 온 거고. 시현씨를 위해서. 시현씨는 나한테 뭐든지 요구할 수 있어.”

그렇게 말을 할수록 시현은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뭘 판단해야 한다는 거지?”

“선택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누군지 알아야 하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내가 어떤 존잰데?”

“모든 것을 다스릴 지상 유일의 최상위 포식자.”

정원이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정원의 눈이 푸르게 빛났다.

그 순간 시현은 깨달았다. 정원은 시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시현의 말을 듣기 위해서 시현의 입술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귀로 시현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뱀의 내이를 통해서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먼저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시현이나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을 때는 입술을 봐야했던 정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정원…아.”

시현이 정원을 바라보았다.

“넌……. 누구야!”

시현이 정원을 보며 물었다.

정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불안한 감정 때문에 잠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변화 따위가 아니었다.

시현이 정원에게서 달아나려고 했을 때 정원이 시현을 안았다.

“나는 시현씨 편이야. 시현씨가 먼저 나를 선택했잖아.”

시현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원이라고 계속해서 믿고 싶었다.

***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시현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현실 세계에서 동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없었을 뿐이었다.

무영이 방에 돌아왔을 때 시현은 몸에서 열이 펄펄 끓는 채로 끙끙거리면서 누워있었다.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냐고 무영이 물었을 때 시현은 그냥 잘 거라고 말했다.

시현의 몸이 상당히 뜨겁기는 했지만 그런 일은 무영 자신에게도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무영은 시현의 말대로 해 주기로 했다.

“그래.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너무 무리했나보다. 나는 나갈 테니까 푹 쉬어.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해. 먹고 싶은 게 생각나거나 그러면.”

시현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 올렸다.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소리와 광경.

어떤 것에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시현은 정원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푸르게 빛나던 정원의 눈은 시현이 어렸을 때 받았던 칼 손잡이에 박힌 러프 스톤 같았다.

정원이 시현에게 한 말을 시현은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정원은 곧 진실이 시현을 찾아갈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자기가 알지 못한 곳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온통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으려고 귀를 기울여도 알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자기가 축축한 지하동굴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뜨면 기숙사 방 안인데 그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처음에는 자기가 환청에 시달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짐승의 소리였다.

괴수의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오소소소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고 그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한 개체가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실루엣으로만 보이더니 나중에는 점점 분명해졌다.

여자였다.

짙은 붉은 색의 긴 머리가 찰랑거렸다. 시현은 그 여자를 전에도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원이 숲 속에서 눈을 감으라고 했을 때 그의 눈이 보였던 여자였다.

보고 싶지 않았다.

거기는 자기가 속한 세계가 아니라는 생각에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곳을 들여다보았다가는 영원히 넘어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시현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눈을 감거나 뜨거나 상관이 없었다.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보였다.

소리는 점점 선명해지고 더욱 분명해졌다. 이제 그게 무슨 소리인지, 한 음절 한 음절을 정확하게 옮기고 자기가 똑같은 소리를 따라서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라이어 버드.

시현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때였다.

라이어 버드라고 떠올린 것이 마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한 개체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름끼칠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 시현을 꿰뚫을 듯이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는 어떤 거리끼는 것도 없었다.

시현은 그 개체가 바라보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의 형상을 한 그것이 괴수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함부로 다른 것들을 두고 아름답다느니 절세의 미(美)라느니 하는 말들을 지껄여댔던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여자는 미의 신과도 같았다.

상상할 수도 없었던 수준, 눈을 감은 채 어두운 곳에서 그릴 수밖에 없었던 실체가 시현의 눈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어떤 욕망도 생겨나지 않았다. 소름끼치도록, 입에서 나오는 호흡마저도 얼려버릴 것 같은 두려움. 그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실체가 바로 그 여자였다.

시현의 눈 앞에서 그 여자가 자신의 모습을 바꾸었다. 여자는 어느새 정원이 되어 있었다. 피같은 붉은 머리카락도 정원의 것처럼 부드러운 검은 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놀란 시현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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