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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부. 괴수의 왕
그렇게 무영이 툭툭 던져놓는 질문들이 그대로 다른 클랜원들에게 숙제처럼 남겨졌다.
아키라는 시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시현은 정원의 곁에 서서 정원이 놓치고 다시 묻는 말들을 일일이 다시 말해주고 있었다. 정원은 특히 지연이 하는 말들을 자주 놓쳤다.
시현이 지연이 한 말을 몇 번이나 다시 알려주는 것을 보고 태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지연이가 좀 그래. 발음을 정확하게 안 하거든. 발음을 정확하게 안 한다기보다 성의있게 안 하지. 입을 제대로 안 벌려. 그래서 정원씨가 입술을 읽는 게 어려울 수도 있어.”
“어머. 내가 그래요?”
지연이 처음 알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동안 그 사람들의 입술을 보더니 자기가 정말로 입을 대충만 벌리고 말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게 크게 벌리고 말을 해 봐. 배에 힘을 주고. 그래야 정원씨가 잘 알아듣지.”
태인이 말하자 정원이 그 말을 보고 뜨끔해 했다. 자기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는 표정이었다.
“정말 그래야되겠네.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렇게 말한다는 걸 몰랐어요. 알게 해 줘서 고마워요. 정원씨. 이제 말 잘 할게요.”
지연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이가 몇인데 이제 와서야 발음을 교정하고 있는 거야?”
태인이 계속해서 깐족거리자 지연이 태인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버렸다.
“딱 거기까지만 해요. 거기까지만. 에?”
태인이 실실거리면서 도망치는 것을 보고 정원이 웃었다.
“두 분 친한 것 맞죠?”
“친하지 않더라도 결혼까지 했는데 이제와서 헤어지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까 아마 계속 저대로 같이 쭉 살 걸요?”
강현이 말하자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던 정원이 화들짝 놀라면서 정말 신기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 클랜원들은 거의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정원씨가 몰랐구나? 지우 형이랑 정이 누나도 그렇고. 이익헌 사장님은 익스트림 헌터 선아영 대표님이랑 부부고. 나는 우리 세진이랑. 태인이 형은 지연이 누나랑. 여기 키라 형은 이카 누나랑.”
“키라 형요?”
무영이 물었다.
“아키라 형. 레이카 누나. 잘 모르나? 아직 인사들 안 했어요?”
인사를 했다고 하기도 그렇고 안 했다고 하기도 그렇고 애매한 상황이기는 했다. 어른들이니까 보고 인사를 해 오기는 했지만 서로 자기 소개를 하거나 할 겨를은 없었다. 사교성 하나는 끝내주는 무영조차도 아키라의 대단한 기운에 눌려서 감히 제 소개를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다른 녀석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키라나 레이카 쪽에서 별로 소개받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해서 누가 딱히 나서서 얘들은 누굽니다 라고 소개를 할 기회가 없었다.
아키라와 레이카는 그동안 봐왔던 어떤 폐쇄적인 커플보다도 더 폐쇄적이었다.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명체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건 겉으로 보이는 인상 때문만은 아니었고 지우와 이익헌은 이미 그들의 그런 성향이 레이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봐서 잘 알고 있었다.
같이 레이드를 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괴수로부터 공격을 당해도 두 사람은 나서지 않았다. 괴수에게 먹히고 몸이 부러지고 뼈가 씹혀도 상관하지 않았다.
지우와 이익헌이 가장 걱정하는 것도 그 점이었다. 두 사람은 클랜 A의 누구 못지않게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과연 클랜 A나 신입 헌터들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줄지 그건 아직도 의문이었다.
이익헌은 속으로 미리 포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그냥 두 사람의 레이드를 하도록 하고 다른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속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키라는 신입 헌터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더니 어느덧 자기 등에서 날개를 폈다. 그것은 클랜 A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레이카조차 아키라가 왜 주책맞게 그런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키라에게는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정원이 어디까지 들을 수 있는지 그게 궁금했던 것이다.
아키라가 예의 그 박쥐같은 날개를 펴서 몇 십 미터를 날아갔을 때 클랜원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몰라서 난감해 했다. 박수를 쳐 줘야 하는 건가보다 하고 무영이 혼자서 박수를 쳤다. 정말 그래야 하는 건가? 하면서 가만히 서 있는 제이와 효재의 팔을 툭 쳐서 같이 가담하게 만들어서 세 사람이 나란히 박수를 쳤다.
아키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에서 튀어나왔다. 레이카는 다른 사람들이 아키라의 위치를 예상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 정원의 시선이 이미 아키라의 위치를 포착하고 그리로 돌아간 것을 알았다. 아키라는 몇 번 더 그런 식으로 시험을 해 보더니 이내 자리로 돌아왔다.
하늘에서부터 유유히 날개를 접으면서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오는 아키라는 정원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레이카와 시선을 맞추면서 의미있는 시선을 주고받았다.
“날게 된 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땅에 잘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 조류 괴수들을 상대할 때는 유익하겠네요.”
이익헌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마구 찬양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대뜸 평가 절하를 해 버린 것이다.
“날개가 있어도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무영이 물었다.
“차크라를 사용하면 20층짜리 건물 높이 정도는 그냥 올라갈 수 있는데 날개가 필요해? 길무영. 아직 그걸 못 하는 거야?”
이익헌이 진지한 얼굴로 묻자 무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른 클랜원들은 이익헌이 장난을 치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무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익헌이 하는 말에 약간의 과장이 들어가기는 했지만 허무맹랑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새싹같은 헌터를 밟아 으깨기에는 충분했다.
효재와 시현과 제이는 그 질문의 대상이 다음번에 자기들이 될까봐 겁이 나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레오니드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아짐이 하는 말은 70퍼센트가 구라라고 보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편안한 가운데서 브리핑이 이루어졌고, 자세한 것들은 콜로니에 들어가서 몸으로 부딪쳐서 알아오라는 지연의 특명을 받고 모두들 콜로니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시현이는 혼자 다니지 말아라. 효재가 항상 시현이 곁을 지켜줘. 부탁한다. 정원씨도요. 부탁합니다.”
이익헌이 말했다.
지난 번에는 괴수들이 지우를 연못으로 끌어들여서 지우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당사자인 시현이 콜로니에 직접 들어가니 시현을 직접 타겟으로 삼으려고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효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단히 의지를 다졌다. 그렇지 않아도 시현은 자기가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익헌이 한 번 더 그 말을 하는 것에는 분명히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영과 제이는 직접 부탁을 받지는 않았지만 자기들도 시현을 지켜줄 거라고 다짐했다.
지연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콜로니의 상황을 한 번 더 보고받고 클랜 A와 신입 헌터들은 마침내 콜로니의 안으로 향했다.
콜로니의 내부로 들어가서 묵묵히 레이드를 하던 사람들이 느낀 것이 있었다. 이게 이렇게 쉬울 일인가? 하는 것이었다. 임정이 지우를 바라보았고 지우도 임정을 바라보았다. 지우의 시선은 그 후에 이익헌과 서규태를 향했다. 그들의 눈빛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쉬운 거냐고.
일격에 괴수의 체력들이 바닥이 났다. 서른 개의 개체를 해치우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콜로니 하나를 두어 시간 안에 공략을 마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더 강한 놈들이 나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틀리지 않고 제대로 된 해법으로 풀어가고 있기는 했지만 이곳의 난이도가 이렇게 낮을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만 자기들이 잘못된 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지우가 멈춰섰다. 익헌과 서규태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지우가 물었다.
“일단은 더 들어가보죠. 시현이한테 계속 신경을 쓰고요. 콜로니 안의 지형에도 계속 집중을 해야 할 거고 말입니다.”
서규태가 말했다.
라이어 버드의 공격과 같은 것도 없었다. 피바람이 불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건 유치원 어린이날 운동회 수준이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점에서 그거야말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신입 헌터들은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클랜의 고수들은 한 두 방으로 탁탁 때려서 괴수들을 해치울 수 있었지만 신입 헌터들에게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공격 기회를 노리고 있는 힘껏 기합을 넣고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면서 쥐어 패 봐야 괴수의 체력이 3분의 1정도 동이 나는 수준이었으니 그들은 이게 너무 쉽다는 생각 같은 것은 애초에 들 틈이 없었다.
베로니카 공격대와 함께 공략했던 콜로니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사사롭게 그런 생각을 오래 할 틈이 없었다.
콜로니의 어두운 환경에서 눈이 퇴화되었는지 콜로니 안의 개체들은 효재의 환상 공격에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일단 뭐가 보여야 환상이든 뭐든 그런 것도 보일 텐데 보이질 않으니 자기 몸에 레드 바이올린이 있건 다른 맹독 괴수가 붙어있건 공포를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콜로니에는 유난히 어두운 곳들이 있었고 그런 곳들에 괴수가 집중돼서 모여 있었다.
얼추 자기들이 맡았던 괴수들도 끝이 나가자 신입 헌터들도 전진하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고 그들을 끈질기게 기다려 주었던 클랜원들도 그제야 서서히 움직였다. 콜로니의 공략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시현을 보호하는 거였으니 그들이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콜로니의 안은 점점 어두워졌다.
시현이 정원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둠은 정원에게 완전한 침묵을 의미했다. 이제 시현의 입술을 볼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면서 자기들의 위치를 알려주었지만 꼭 필요한 얘기가 아니면 하지 않았다. 이미 라이어 버드에게 한 번 크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상대방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들려오는 말은 전적으로 믿지 말고 일단 한 번 걸러내라는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정원의 손에 시현의 너클이 만져졌다.
고요한 어둠.
그것이 한없이 깊어졌다.
시현이 잠시 정원의 손을 놓은 것은 벽에서 갑자기 체력 3600만의 괴수가 튀어나왔을 때였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칠흑같은 어둠인 것은 아니었다. 앞 뒤쪽에서 각각 불이 비춰지고 있었고 그 불빛에 의지해서 사물의 형상을 가늠할 정도는 되었다. 체력이 3600만이라고 해 봤자 클랜원들이 다 같이 덤비자 몇 분 안에 끝나버렸다. 까다로운 놈도 아니었다. 시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효재와 레오니드가 보였다. 정원이 보이지 않았지만 무영과 제이도 보이지 않았기에 셋이서 같이 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서두를까?”
효재가 물었다.
시현이 불안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길무영. 정원이 누나랑 같이 있냐? 이제이. 앞에 가고 있어?”
효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어. 셋이 같이 가고 있어.”
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있나봐. 빨리 가자.”
세 사람은 곧 일행을 따라잡았다.
시현은 정원에게 달려갔고 정원의 손을 잡았다. 정원이 시현을 바라보고 웃었다.
"안 보여서 걱정했어."
시현이 정원을 보고 말하며 정원의 손을 꼭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