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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콜로니
“앞으로는 아주 급박한 상황이 아니면 시현이한테 콜로니 공략 같은 걸 맡기면 안 된다는 거네요. 그렇죠?”
임정이 말하자 모두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안 되는 거죠. 절대로.”
세진이 말했다. 짧은 시간동안이기는 하지만 자기 제자였다고 애정이 각별했다.
“자. 그러면 다시 또 우리가 유용해 지는 건가?”
태인이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고 머리 뒤에 대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태인의 말에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웃었다.
“저희도 마찬가지네요. 저희는 꽃도 못 피워보고 그냥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건 줄 알았어요.”
무영이 말하자 사람들이 모두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현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임정이 시현을 다독거려 주었다.
“그래도 지금 알아서 얼마나 다행이니? 지연 이모 없었으면 큰일날 뻔 한 거야. 너한테 이전만큼 차크라가 없다는 걸 모르는 채로 위험한 레이드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해 봐.”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아찔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냥 부차적인 설명인데, 직접 괴수를 죽이는데 사용되지 않은 차크라는 대부분 다시 회복이 됐어요. 콜로니 입구에서 백 여 마리를 죽이는데 사용한 차크라만 소실된 것 같고 그 이후에 연못으로 가면서 각성시켜 두었던 차크라는 거의 다시 회복됐어요. 양으로 계산을 했을 때 그런 것 같다는 추측인 거긴 하지만.”
지연이 말했다.
“아. 그거. 레이카랑 아키라한테도 알려줘야 되겠는데? 중요한 정보잖아. 그런데 그 바보들은 아마 모르고 있을 걸?”
이익헌이 말했다.
“레이카랑 아키라가 누구예요?”
무영이 물었다. 호기심 순으로 하면 그들 중에 단연 1위를 달릴 사람이었다. 지우가 웃으면서 설명을 해 주었다.
“익스트림 헌터 길드 소속의 카르마 클랜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클랜의 클랜 마스터였던 사람이야. 일본 사람들이고 지금은 클랜을 떠나서 둘이서 레이드를 하면서 방랑 생활을 하고 있지.”
“그 사람들도 괴수 차크라, 아, 특별한 차크라를 가진 사람들이예요?”
제이가 물었다.
“응. 괴수 차크라라고 말해도 돼. 특별한 차크라라고 말한다고 해서 괴수 차크라가 아닌 것도 아니니까.”
지우가 말하자 제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기가 클랜 A의 클랜 마스터랑 얘기를 했다고 하면 몇 명이나 믿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아무렇지 않게 지우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문득문득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지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카르마 클랜은 괴수 차크라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세력을 키워온 곳이었어. 괴수를 죽이지 않고 늪 아래에게 속박해 둔 채로 계속해서 괴수의 차크라를 조금씩 빼낸 거지. 그 차크라를 헌터들한테 주입시켰고.”
이익헌이 설명을 보탰다.
“아키라랑 레이카도 그렇게 차크라를 주입한 거예요?”
무영이 물었다.
“응. 강해지고 싶은 열망은 사람들에게 금기를 넘어서게 만들기도 하지.”
“그 사람들은 강했어요?”
“강했지.”
“클랜 A보다 더요?”
무영이 진지하게 묻자 이익헌이 답을 생각해보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대일로 붙는다면. 장담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그렇지? 아마 그럴 거야. 일대일로 붙는 일은 피하는 게 좋지.”
그 말에 무영의 궁금증은 극에 달했다. 클랜 A에게 그런 상대들이 있을 거라고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진짜 대단한 사람들인 거네요. 그 사람들!”
무영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들 웃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만날 수도 있겠지. 가끔 무기나 장비를 교환하러 익스트림 헌터에 오니까.”
임정이 말해주자 무영은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야. 너희들은 안 궁금해? 왜 너희들만 점잖을 빼고 있는 건데? 이러면 나만 애같이 보이잖아.”
무영이 방방 뛰건 말건 다른 녀석들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원래 그게 그 녀석들이 잔뜩 흥분했을 때 짓는 표정인데 뭘 더 바라겠는가. 눈이 조금 더 동그래지고 커지면서 입이 함박 벌어지고 소리없이 하악거리는 걸로 그들은 자신들이 흥분했다는 표현을 마쳤다.
회의의 마지막 부분은 무영 덕에 꽤 시끄러워졌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시현이 괴수 차크라를 폭주시키지 않는 걸로 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해졌고, 콜로니의 공략에 참여를 하더라도 헌터의 힘만 사용하기로 단단히 다짐을 받았다.
신입 헌터 네 사람은 곧 시작될 콜로니 공략을 위해서 자기들 숙소로 걸어갔다. 그러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아키라와 레이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들에 대해서 퍽이나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서규태와 지우가 지연에게 다가갔다.
“이제 콜로니에 생긴 괴수는 몇 마리 정도 됩니까?”
서규태가 지연에게 물었다.
“백 오십 마리가 넘어요. 제가 보기에는 몸을 변화시킨 것 같아요. 탑시스의 번식방법을 선택해서 타일락들이 진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고는 이런 번식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진화라는 게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콜로니 내부의 이상한 시간의 흐름이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죠. 아니면 다른 개체들을 잡아 먹은 게 영향을 줬거나요.”
지연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익헌과 임정이 뒤늦게 그 자리에 동참했다.
“탑시스의 번식력을 가진 타일락으로 콜로니가 채워졌다는 건.”
지우가 말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자 임정이 대신 해 주었다.
“이번에 이 콜로니를 공략하지 못한다면 아메리카 대륙이 멸망을 맞을 수도 있다는 거죠.”
***
전멸시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클랜 A가 잔뜩 긴장한 것과 달리 베로니카 공격대원들과 다른 헌터들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콜로니의 공략은 30분 후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봐야 이백도 되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줄곧 그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자기들끼리만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은 클랜 A가 앞장서 주고 있으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라는 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베로니카 공격대와 그들에게 합류한 다른 헌터들도 알고 있었다.
'반드시 이번에 끝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그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임정은 지우의 표정이 다른 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번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임정에게는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콜로니에 들어가면 레이드에는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하고 지우의 표정에 자꾸 신경을 쓰다가 실수를 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한 임정이 지우를 불러냈다. 지우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는 듯이 순순히 따라왔다.
“무슨 일이예요?”
임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우는 한숨을 쉬었다.
“연못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다쳤어요? 아프거나 몸이 이상해요? 그럼 숨기지 말고 나한테 말해야 돼요. 내 차크라는 다 회복됐어요. 어디 봐요.”
임정은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아예 지우의 몸을 벗겨보려고 들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시현이 문젠데. 지금 말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어.”
“그래도 말해봐요. 짧게라도요. 이 상태로는 제대로 레이드를 할 수도 없어요. 당신한테 신경이 쓰여서.”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어.”
지우가 말했다.
“그럼 밖에서 잠깐 걸을까?”
지우가 말하자 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오다가다 다른 사람이 들을 것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지우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시현이 듣게 되는 걸 거라고 생각하면서 임정의 걱정은 더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조심을 하는 건가 해서였다.
얘기가 길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지우는 강현에게 자기들이 잠깐 산책을 갈 거라고 얘기를 해 두었다.
"기다릴게요. 형 없이 우리가 먼저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거든요."
강현이 그런 염려는 붙들어 매라는 듯이 자신있게 말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멀리, 그림처럼 펼쳐진 산이 눈에 들어왔다. 산에 걸린 구름은 붓으로 그린 그림 같았다. 그 정경이 주는 평화로운 느낌이 지우가 하는 말에 의해서 이제 곧 깨지겠지만 두 사람은 잠시나마 그 기분을 즐겼다. 피가 고이고 코를 찌르는 괴수의 악취가 가득한 콜로니를 떠나, 우호적인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평화로운 초목의 냄새를 맡으며 서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그 시간의 여유를 즐겼다.
임정이 지우의 손을 잡자 지우가 팔을 들어 임정의 어깨를 감쌌다. 지우의 입에서 지금부터 나올 말이 뭐든지간에 그와 함께 견뎌가면 되는 걸 테니 그럭저럭 참을만 할 거라고 임정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연못으로 떨어졌을 때 그 안에서 소리가 들렸어.”
지우가 말했다.
“당신이 들은 소리는 라이어 버드가 낸 소리일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라이어 버드가 낸 소리라고 믿게 하려는 다른 누가 있는 건지도 모르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임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냥. 조금 전에 든 생각이야. 라이어 버드의 뒤에 다른 실체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
“새에 대한 편견 때문일까? 새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믿기질 않아서. 아니야. 신경쓰지마. 어차피 괴순데. 괴수의 외형을 보고 자꾸 자연계에 존재하는 비슷한 생명체에 대입을 하려는 습관은 웬만해서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아.”
임정은 지우가 제대로 말을 해 줄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렸다.
“그 목소리가 말을 했어. 시현이에 대해서. 시현이는 언젠가 선택을 해야 할 거라고. 시현이는…….”
“……?”
“시현이가. 괴수의 왕이 될 거래. 돼야 할 거래.”
“돼야 한다고요? 괴수의 왕이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임정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시현이는 괴수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임정도 그게 지우가 한 말이 아니라는 것과, 지우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임정을 보면서 지우는 대단한 절제력이라고 생각했다.
“시현이는 괴수의 차크라와 헌터의 차크라를 모두 받아서 괴수의 왕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래. 내가 가진 괴수의 차크라로 살육의 위업을 달성했고 당신이 가진 헌터의 차크라로 희생의 위업을 달성했대. 내가 죽인 사람들의 수와 당신이 살린 헌터들의 수에 대해서 말한 것 같았어. 그런 우리의 아들인 시현이야말로. 괴수의 왕의 돼야 한대. 인간의 삶과 죽음을 모두 우리가 주관했기 때문이래. 피를 흘리기도 했고 막기도 했고.”
“지금은요? 지금은 괴수의 왕이 없는 거래요?”
“아니.”
“그런데 왜 시현이를 찾는 거예요? 쿠데타를 일으킬 거래요?”
말을 해 놓고 임정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지우가 말했다.
임정이 지우를 바라보았다.
“괴수의 왕은 지금까지 시현이가 나타날 걸 알고 있었대. 지금까지는 괴수들도 같이 기다려온 것 같아. 숨을 죽이면서.”
“지금까지라는 게. 혹시 시현이가 헌터로 각성한 때를 말하는 거예요?”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