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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카르마 클랜의 헌터들
“응. 몇 번, 같이 레이드를 했던 적이 있어.”
“몇 번 레이드를 같이 했다고 기억할 정도면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나본데요? 몇 급 헌턴데요?”
야로슬라프가 물었다.
“몇급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저 사람. 괴수의 정신계 공격에 면역이 있었거든. 클랜 A 외부적인 문제들이 해결되면 영입을 한 번 추진해보자고 말하려고 했었는데.”
“네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지우도 놀라워하면서 화면을 보았다.
“언제 일어난 일이래요? 내가 병원으로 한 번 가 볼까요?”
임정이 말했다.
“이미 죽었다잖아. 안타깝게 됐네.”
지우가 말했다.
죽지만 않았다면 야나를 타고 가서 임정이 고쳐볼 수도 있었는데 정말 아깝게 됐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한동안 넋을 잃은 듯이 뉴스를 보았다.
아이는 아빠가 무슨 일을 당한지도 모르고 영안실에서 뛰어다니면서 웃고 놀았다.
“우리 시현이만 한 것 같은데. 저 애도 부모없이 크겠지?”
지우가 임정에게 말했다.
“부모가 없이 크지는 않죠. 엄마는 있잖아요.”
임정이 말하자 옆에서 강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집을 나갔대요. 아이 엄마. 그래서 아이는 할머니하고 산대요.”
스마트폰으로 관련 기사를 검색해서 읽던 강현이 말했다.
“어머.”
그런 소리들만 나올 뿐 클랜원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게 왜 남의 일에 나서서. 남아있는 가족들이 그 불행을 고스란히 떠안게 됐잖아.”
이익헌은 속이 상해서 허공에 대고 말했다. 갑자기 부모를 모두 잃게 된 아이를 보면서, 더군다나 그 아이가 시현이와 비슷한 또래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 울적해져서, 임정은 한동안 얼굴을 펴지 못했다.
***
시현의 초등학교 입학식이었다. 시현은 신기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자기 친구들은 계속 그대로 이어지는지 신기했다.
유치원에서도 계속 같은 반이 이어졌고 시현이가 좋아하는 아이들과 헤어지게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시현이가 조금이라도 싫어하는 녀석들이 있으면 그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전학을 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왜 아무 말도 없다가 그렇게 되는 건지 신기했고 초등학교에도 그대로 같은 아이들이 올라가게 되는 게 좋았다.
다른 유치원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다. 시현은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겼다.
용하 삼촌이 학부모들 사이에 서 있다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사장이 인사를 해야 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이사장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인사를 했다.
그때까지 시현은 용하 삼촌이 이사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현신 유치원, 현신 초등학교, 현신 중학교와 고등학교, 현신 헌터 아카데미까지 갖춘 대제국이 용하 삼촌에 의해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다.
시현이 다니는 학교는 다른 세상이었다.
시현은 이제 용하에게 그런 것을 잘 묻지 않았다. 엄마랑 아빠는 왜 시현이를 보러 오지 않냐는 질문.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삼촌이 당황한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른들에게는 아이들에게 쉽게 대답해줄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런 것은 묻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런 얘기보다는, 급식 시간에 뭐가 나왔고, 자기는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싫다는 얘기들을 했다. 그러면 그것 역시 시현이가 싫어하는 친구들처럼 변화를 겪었다.
급식 조차도 시현이가 좋아하는 것으로 바뀌어서 나오곤 한 것이다. 시현은 정말 신기해 하면서 세상이 저를 위해서 돌아가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전화 벨 소리가 들렸지만 지우는 전화를 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임정도 마찬가지였다.
임정은 손으로 전화기를 더듬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그대로 지우의 귀 위에 얹어 주었다.
“제발 자기가 받아. 너무 졸려.”
지우는 그 말이 상대방에게 들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말했다.
“아키랍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키라의 목소리였다.
지우와 임정은 동시에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 한국에 왔습니다. 부탁해야 할 일이 있어요. 안지우씨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만나주실 수 있습니까?”
아키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남자가 그런 목소리로 전화를 하게 될 일이 생길 거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레이카에게 생각이 미쳤다.
'레이카에게 일이 생긴 건가?'
지우는 벌떡 일어나 앉아 전화를 받았다.
“어딥니까? 무슨 일인데 그러는 겁니까?”
지우가 물었다.
“레이카가……. 좋지 않아요. 이상해요. 레이카의 안에 있던 괴수 차크라가 엉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에는 레이카가 그걸 완전히 통제했는데 그게 안 되고 있어요.”
“레이카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지우는 임정에게 옷을 가져다 달라고 말하면서 아키라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뭐가 잘못된 건지.”
아키라는 불안해 하면서 말했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그리로 가겠습니다.”
아키라는 자기와 레이카가 머물고 있는 호텔을 알려주었다.
“함정 같은 건 아니겠죠?”
임정이 물었다.
“함정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전부 다 같이 갈 거니까.”
잠시 후에 클랜 A의 모든 클랜원들이 야나를 타고 아키라를 만나러 갔다. 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나온 거긴 했지만 아키라와 레이카에 대한 호기심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정도의 불편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호텔 로비로 갔을 때 아키라가 레이카를 데리고 내려왔다. 레이카를 본 적이 있었던 지우와 이익헌은 그야말로 충격을 받았다. 외모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레이카를 봤을 때 레이카는 성숙한 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이 차크라의 속임수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 차크라가 혼돈된 상태에서 레이카가 더 이상 그 차크라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차크라를 돌리지 못하는 레이카의 모습이 역겨울 정도거나 나이 많은 여자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20대 후반 정도의 모습으로, 오히려 적당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문제는 그런 쪽의 외모가 아니었다. 얼굴이 꿈틀거렸다. 벌레가 그 아래에서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몸을 전부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가끔 배가 툭 불러왔다가 꺼지기도 했다.
끊임없이 꿈틀대는 얼굴을 보면서 클랜원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지르면서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키라는 지우가 클랜원들을 전부 다 데리고 온 사실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도움이 절실했고, 기왕 도움을 받을 거면 믿을 수 있는 많은 사람에게 보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일단은 같이 가죠. 우리 숙소로요.”
임정이 레이카의 옆에서 레이카를 부축하려고 했지만 레이카는 사납게 고개를 젓고 아키라에게 안겨들었다. 정신이 완전히 잠식당한 것은 아니고 아키라와 같이 있는 동안은 안전하다는 믿음을 계속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야나가 그들을 거절한다면 난감해지겠다고 생각했지만 야나는 두 사람을 받아들여 주었다. 레이카는 아키라에게 얼굴을 거의 묻다시피 한 채로 사람들에게서 숨으려고 했다. 레이카도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차에 탄 후로 레이카의 배가 갑자기 불룩해지다가 푹 꺼지는 일이 잦아졌다. 야로슬라프와 레오니드, 미하일은 특히나 더 그 장면을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지우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괴수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에게는 언제든지 자신들의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레이카도 처음에는 임정의 손길이나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면서 내치기에 바빴지만 나중에는 차츰차츰 그 손길들을 받아들였다.
레이카의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임정이었다. 임정은 레이카의 안에서 차크라가 완전히 섞여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괴수가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 공존을 해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동안은 서로 길을 나누어서 다녔다면 지금은 서로가 한 곳에서 마주치고 거기에서 서로 양보를 하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차크라의 힘겨루기는 고스란히 레이카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방으로 안내되었을 때 아키라는 고뇌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레이카를 안고 들어갔다.
클랜원들은 밖으로 나와서 얘기를 시작했다. 임정은 자기가 느낀 바를 얘기했다.
“엑소시즘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불러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귀신 들린 사람 같았어요.”
“괴수 차크라를 받은 헌터한테서 다시 괴수 차크라를 빼낼 방법을 알아야 된다는 건데.”
서규태도 난감해 하며 말했다. 이익헌은 말이 없었다. 그에게는 정말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강하기만 했던 한 남자가 철저하게 무너진 모습이었다.
이익헌은 자기가 아키라를 안다고 생각했다. 아키라와 헤어진 후에 아키라와 레이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간 동안 아키라가 그렇게 변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키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 레이카라는 여자가 아키라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였던 건가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이익헌의 머릿속에 들었다.
서규태가 임정에게 다가왔다.
“할 수 있겠습니까?”
임정은 자신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정도 자신의 치유 능력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은 약해지는 차크라에 기운을 넣어주는 거였고 그때의 차크라는 어디까지나 헌터의 차크라였다. 임정이 이해하기로는 그랬던 것 같았고, 그게 맞다면 자신의 치유법이 레이카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정은 지우를 바라보았다. 지우에게는 특별한 차크라가 있었다. 지우에게 특별한 차크라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지우에게는 임정에게만 통하는 특별한 차크라가 있었다.
지우를 만나고 사랑했을 때, 지우가 임정에게 차크라를 흘려주었던 것을 임정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기억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진정 효과를 내 주었었다. 진정제를 투여받고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이제 다 된 거다, 라고 손을 내려놓고 쉴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일 것 같아요.”
임정이 지우에게 말했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그러고 싶어. 아키라와 레이카가 무슨 짓을 했는지와 상관 없이.”
지우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이익헌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키라와 레이카가 사실은 클랜 A에게 아주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말을 해 줘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야로슬라프가 이익헌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익헌과 눈이 마주쳤다.
‘뭐!’
이익헌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챌까봐 차마 소리를 내서 말하지는 못하고 입 모양으로만 야로슬라프에게 야단을 쳤다.
다른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클랜 A에 캐츠 아이 스톤이 필요해지는 시기만 되면 이익헌이 캐츠 아이 스톤을 찾았다고 하면서 가져오는데, 행운의 여신이 이익헌에게 작업을 거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믿기가 힘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