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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부터 레벨업-126화 (126/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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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A급 헌터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겨나는 겁니까? 괴수의 차크라를 가진 헌터요. 그 사람들한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야로슬라프는 혹시 그 일을 기억합니까? 어떻게 괴수 차크라가 자신의 몸에 들어오게 됐는지 말입니다.”

서규태가 물었다.

“아뇨. 저는 기억이 안 나요. 다만 세멘노프 교수한테서 들은 얘기가 있긴 해요. 세멘노프 교수는 지금까지 발견된 늪과 다른 특별한 늪이 있다고 했어요. 둘레의 색깔이나 출현의 양상이 전부 다 특별하다고 했고, 그 늪에 사는 괴수가 늪을 떠나서 숙주를 찾는다고 했어요.”

“그럼……. 안지우씨는 괴수가 아닌 거군요. 그건 그냥 차크라일 뿐인 거군요. 그렇죠?”

“차크라를 가진 괴수가 숙주를 찾아 들어가는 거죠.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몸에 들어간 게 괴수가 아니라 괴수의 차크라 뿐이라고 하면 받아들이는 게 편해지나보죠?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안에 나와 다른 존재가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알 뿐이고 그게 차크라인지 괴수인지, 그건 따져보지 않았어요. 세멘노프 교수도 그걸 정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내가 괴수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언젠가 내가 다음 급으로 올라가지 못하면 내 안의 차크라가 나를 지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그때는 더 이상 내가 아닌 존재가 되겠죠.”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더 이상 내가 아닌 존재가 되겠죠.'라고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동안은 그런 말이나 생각을 할 때 아마도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을 거라고 지우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상황에 과도하게 몰입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면……. 그럼, 내일 이걸 가지고 레이드를 하기만 하면. 그렇게 해서 A급으로 등급을 올리기만 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거군요. 처음부터 캐츠 아이 스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치안대에 들어갔다는 것도 거짓말이었고. 그런데 왜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던 겁니까? 왜 아직까지도 A급 헌터로 올라가지 않은 거예요? 지금이라도 캐츠 아이 스톤을 가지고 레이드를 하면 등급을 올리고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거죠? 맞는 거죠?”

지우가 말하자 야로슬라프가 고개를 저었다.

“더는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야로슬라프가 말했다. 이제는 완전히 지쳤다는 표정이었다.

“뭐라고요? 그러면 죽는 거잖아요!”

지우가 정신차리라는 듯이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야로슬라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레이드, 경험치, 살겠다는 고집. 세멘노프 교수는 헌터에게 사냥당한 게 아닙니다. A등급, S등급으로 계속 올라가려면 캐츠 아이 스톤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세멘노프 교수는 우리 동료들을 죽였고 우리 동료들한테서 캐츠 아이 스톤을 얻어냈어요. 그리고 나는."

야로슬라프는 그 다음의 공백을 한동안 채우지 못했다.

세 사람은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이미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야로슬라프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야로슬라프가 스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세멘노프 교수를 죽였습니다. 세멘노프 교수를 죽였을 때 나는 내가 내 동료들을 위해서 복수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었어요. 그건, 캐츠 아이 스톤을 위해서였어요. 좀전에 나한테 그걸 물었죠. F등급인 녀석, 그 녀석을 죽이면 캐츠 아이 스톤이 나오냐고. 네. 맞아요.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 녀석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변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서 죽이고 1년의 생명을 연장받는 것. 그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면. 나는 이제 그걸 끝내고 싶습니다."

야로슬라프의 말에 아무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온 참회의 고백에 지우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내가 죽으면 또 하나의 캐츠 아이 스톤이 나올 겁니다.”

그가 말했다.

“괴수의 차크라를 가진 헌터들이 폭주했을 때 다른 헌터들이 사냥을 한 건 캐츠 아이 스톤 때문이었던 겁니까?”

서규태가 묻자 야로슬라프는 고개를 저었다.

“헌터들은 캐츠 아이 스톤을 보지도 못했을 거예요. 언제나 세멘노프 교수가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세멘노프 교수가 모든 캐츠 아이 스톤을 수거했으니까요. 이 보라 색.”

야로슬라프가 보라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캐츠 아이 스톤을 집어들었다.

“이게 유리 세멘노프 교수의 캐츠 아이 스톤입니다. 이건 보리스, 드미트리, 예고르, 안톤……. 이건…. 미하일의 거고…….”

하나 하나의 캐츠 아이 스톤을 가리키면서 그는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은 특별히 친한 친구였는지, 미하일의 캐츠 아이 스톤을 만질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신과 당신의 아이에게는 이게 필요할 겁니다. 나한테는 이것들이 내가 만든 지옥을 이어나갈 도구가 되겠지만 당신이라면 행복해질 수 있잖아요. 내가 거기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면. 내 삶도 조금은 의미가 있었다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요?”

지우의 눈에서, 고일 틈도 없이 눈물이 툼벙툼벙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그걸 왜 이제야 말을 하는 겁니까? 내일 죽는다는 사람이. 걸음이 엇갈리거나 우리가 오늘 찾아오지 않았으면 이걸 받을 수도 없었을 거고 그런 얘기를 들을 수도 없는 거였잖아요.”

이익헌이 말했다.

“당신들이 캐츠 아이 스톤을 구해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이걸 당신들한테 줄 생각을 안 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애 써 주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이예요.”

야로슬라프는 이익헌이 펄쩍 뛰는 게 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이 어마어마한 캐츠 아이 스톤들을 침실에 놔둔 채로 죽어버릴 생각이었다고요? 누가 갖든지 아무 상관도 없다고요?”

이익헌이 소리를 지르자 야로슬라프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이 이익헌을 바라보았다.

“죽기 전에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서 한 번은 웃게 되네요.”

이익헌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듯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것은 깊은 생각에 잠길 때의 그의 습관이었다. 이익헌이 갑자기 일어섰을 때 그의 행동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러시아 대통령은 한밤중에 전화를 받았다.

클랜 A의 이익헌이라는 말을 듣고, 다음에 연결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클랜 A를 잘못 대우했다가 지금 미국 대통령이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알고 있었다. 클랜 A가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미국의 상황은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두 개의 1급 늪이 오픈되었고 해리와 라미실을 포함한 베테랑 상급 헌터들이 투입되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브뤼는 이번에도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브뤼도 협조를 할 거라고 생각했던 해리와 라미실의 기대는 보기좋게 배신을 당했다. 브뤼는 프랑스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 클랜 A가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확실히 믿었고, 그래서 해리와 라미실과는 적당히 관계를 정리하려는 중이었다.

해리와 라미실은 1급 늪이 오픈되기 전부터 거의 매일 공략을 시도했다. 하지만 괴수의 체력을 거의 다 바닥내고도 시간이 부족해서 괴수의 체력이 리셋되는 것을 보며 번번이 돌아나와야 했다. 그 사이에 부상을 당한 헌터들의 수도 점점 더 늘어났다. 다행히 사망에 이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쯤되자 일을 그 지경에 이르게 한 사람들에 대한 거센 책임론이 불거졌다. 책임론을 제기한 사람들도 그 일에서 완전히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자기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먼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A급 헌터인 해리와 라미실의 무능력을 비난했고 당장 클랜 A를 데리고 오라고 연일 시위를 벌였다.

클랜 A의 인간성에 호소를 하는 언론도 생겨났다. 러시아의 1급 늪들도 반경이 커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촌각을 다툴 정도는 아니니 미국에 와서 1급 괴수를 처리해주고 다시 돌아가서 러시아의 1급 괴수들을 공략해주면 안 되겠냐는 지극히 타당한 요청이었다. 그러나 한 번 돌아선 클랜원들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클랜 A의 클랜원들은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을 거라고 느슨하게 마음을 먹었다. 정말로 늪이 오픈될 때까지 헌터들이 공략을 못하더라도 앞선 경험에 미루어 군을 동원해서 해결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국민들과 정부, 언론들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고 마음이 조급하지도 않았다. 클랜 A가 지금은 화가 난 척 하고 있지만 막상 늪이 오픈되는 날이 다가오면 클랜 A도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라도 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그들은, 뒤에 앉아서 잘난 소리만 떠들어댄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게 되었다. 두 개의 1급 늪이 오픈일까지 공략되지 않았고 괴수가 튀어나왔다. 뒤늦게 군이 동원되었고, 늪의 오픈일 직전에 대피령이 내려졌다. 삶의 터전을 강제로 떠나게 된 사람들은 정부와 언론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오픈이 다가오는 늪 때문에 피난길에 오르면서 사람들은 제발, 공략이 어려운 1급 늪, 그것도 빠른 속도로 반경이 커지는 1급 늪이 백악관 앞마당과 언론사 사주들의 마당에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론이 계속해서 악화되자 클랜 A에게 요청을 하던 사람들의 자세가 점점 달라졌다. 처음에는 거의 드러누운 자세로 턱을 거만하게 움직이면서,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우리 대신 일을 처리해 달라는 태도였다면 이제는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부딪칠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았다. 요구만 한다면 이마에서 피가 나도록 이마를 땅에 찧으려고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군의 투입으로 두 마리의 괴수를 처리하기는 했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쑥대밭이 된 것을 본 주민들은 연일 시위를 했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도록 지역 정치인들을 압박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당장 클랜 A를 데려오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압박이 점점 거세지자 대통령이 전용기를 타고 러시아에 클랜 A를 설득하러 왔지만 미국 대통령은 클랜 A를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미국은 군을 동원해서라도 1급 괴수를 처리할 수 있고 A급 헌터를 둘이나 보유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전혀 그런 사정이 안 되기 때문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클랜 A가 러시아의 문제를 도와주기로 했다는 러시아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러시아의 사정이 급하지 않은데 감정상 버티는 거라면 클랜 A의 마음도 불편했겠지만 러시아의 사정 역시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미국은 뼈를 깎는 아픔을 느끼면서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지만 결국 일을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잠을 자다가 이익헌의 연락을 받은 거였음에도 러시아 대통령의 반응이 그렇게 즉각적으로 나왔던 것이다. 이익헌과 서규태는 한밤중에 러시아 대통령과의 화상 회의를 요청했다. 대통령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면서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서규태였다.

“클랜 A가 러시아 정부로부터 빌린 캐츠 아이 스톤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왜요? 그걸 잊어버리기라도 하신 건가요?”

대통령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측을 못한 채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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