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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천기정이 물었다.
이 사람의 말은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도덕적인 우월감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요. 뭐. 마음대로 즐기세요. 천기정씨가 그걸 즐기도록, 손에 피묻히는 일은 내가 할 테니까.”
“꼭 손에 피를 묻혀야 됩니까?”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자리를 내 놓고 싶어하지 않은 채로 개소리를 계속 해대면 어쩔 수 없잖아요. 천기정씨는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싶은데요?”
“시간을 갖고 설득할 수도 있겠죠.”
“시간을 갖고? 그러다가 오늘 배가 가라앉으면? 시간을 갖고, 라는 말처럼 교만한 말도 없다는 거 압니까? 시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쩌다가 하게 된 건데요?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 누가 압니까? 내일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일 분 후에 이 세상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천기정씨. 천기정씨는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글쎄요. 내 눈에는 그저 겁쟁이로밖에 안 보입니다."
공격의 화살이 이제는 나한테로 돌려졌나보다고 생각하면서 천기정은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어차피 이 방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까 내가 당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제법 한가로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제는 내성이 생겼는지, 아니면 이익헌의 화법을 이해하게 된 것인지 이익헌이 그렇게 자극을 한다고 해도 전처럼 바로바로 발끈하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천기정씨한테도 나만큼이나 나쁜 욕망이 있지만 무서워서 그걸 실행하지 못하는 거예요. 천기정씨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 중에 죽이고 싶었던 사람을 죽이지 않은 건 천기정씨가 착하거나 준법 정신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그런 겁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맹하게 굴지 말고 앞으로는 확실히 밥그릇을 챙겨요. 이제 최전방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울 사람은 천기정씨니까. 천기정씨가 바디 펌에서 재료를 확보해서 익스트림 헌터로 보내지 못하면 익스트림 헌터는 거지같은 증폭률이나 내는 무기만 만들 거고 우리는 괴수랑 싸우다가 뿔에 받쳐서 죽거나 하겠죠. 그때도 천기정씨는 시간을 갖고 설득하려고 했었다고 자위나 하십시오.”
이익헌의 말은, 언제나 그렇지만, 계속 듣다보면 정나미가 떨어졌다.
“천기정씨가 나쁜 역할을 피하다 보면 그게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주면 좋겠군요. 그래도 이제는 이미 엎지러진 물이니까 천기정씨가 어떤 결정을 내리건 나는 천기정씨를 믿을 겁니다. 천기정씨를 선택한 건 내 결정이니까 책임도 내가 질 겁니다. 이제부터는 천기정씨가 내 대리인입니다.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요. 형식적으로는 바디 펌의 전무지만 실질적으로는 바디 펌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사람들한테는 이미 말을 해 놨어요. 그 사람들이 앞으로 천기정씨를 도와줄 겁니다. 천 전무님을요.”
천기정은 놀라서 커피를 뿜을 뻔 했다. 그것만큼은 면하자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삼켰더니 입안이 얼얼하고 기침이 쉬지 않고 나왔다.
이익헌은 딱 그것을 노렸다는 듯이 기분 좋게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매일 볼 사이니까 모르는 건 그때 그때 나한테 물어가면서 하면 됩니다.”
왠지 이익헌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보였다. 이익헌은 속으로 임정을 생각하고 있었다. 서규태를 치안 1부장으로 만들어놓고 임정도 딱 이런 기분이었겠다고. 천기정을 전무로 앉히기로 한 것은 순전히 임정을 보고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임정은 치안부장보다 더 높은 자리로 치안 1부장 자리를 만들어버리더니 거기에 서규태를 꽂아 넣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 자기는 클랜 A와 안지우와 태아의 문제에 완전히 집중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 방법이 신의 한 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둘러보다가 천기정만큼 적합한 사람이 없어 보여서 자기도 천기정을 꽂아 넣은 건데 그 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별로 걱정이 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이익헌의 앞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도 차고 넘쳤던 것이다.
***
일주일 후가 지우의 생일이라는 것은, 천기정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아무도 모르고 넘어갈 뻔 했다. 그러나 다행히 천기정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안 좋았던 것은, 지우의 생일을 위해서 임정이 좋지 않은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는 점이었다. 임정은 지우의 생일상을 자기가 직접 차려줘야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클랜 A의 모든 클랜원들과 강지연, 천기정은 필히 생일 파티에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왜 하필 자기가 음식을 준비하겠다고 나서는 건지. 아니, 그것까지는 이해도 할 수 있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건지. 그 일 때문에 클랜원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우는 클랜원들이 어떤 고민으로 고생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지우는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팀을 이뤄서 레이드를 하거나 혼자서 레이드를 하거나,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레이드에 쏟는 것 같았다.
강현과 태인도 마찬가지였고 서규태도 마찬가지였다. 이익헌은 바디 펌과 익스트림 헌터 사이를 오가면서 관계를 조율하느라 레이드에 소홀해진 면이 있었지만 그게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에는 자기도 거의 언제나 지우와 함께 다니면서 괴수를 사냥하고 러프 스톤을 수거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들 모두는 지우의 마음이 급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제 지우에게 경험치를 몰아주었다. 그래봤자 시스템은 지우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처럼 지우가 D급으로 올랐을 때도 공격력과 방어력을 모두 10씩 올려주었을 뿐이었다.
그런 것에도 적응이 되었다. 주위에서 먼저 기대를 접어주자 지우도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당당하게 변한 타투를 보고도, 그러면 그렇지, 라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러프 스톤은 쌓여갔고 클랜원들의 경험치와 등급도 꾸준히 올라가고 있었다.
지우의 생일 새벽에, 임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생일 음식을 준비하러 갔다가 주방 문이 잠긴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것은, 레이드에 지친 불쌍한 헌터들을 임정의 음식으로 고문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태인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하수구가 넘쳐서 오늘은 주방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주방 문에는 태인의 글씨로 쓰여진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황당한 얼굴로 방에 돌아가자 지우가 어느새 잠에서 깨서 임정을 맞아들였다.
“내가 항상 말하잖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자기라고. 내가 좋아하는 걸 주고 아침은 나가서 먹자. 그게 나와 모두를 위하는 길이야.”
지우의 임기응변으로 클랜 A의 클랜원들은 짠내 가득한 미역국 공격을 피할 수가 있었다. 지우의 유혹을 받은 임정은 지우를 천국으로 안내해주고 천국 문을 활찍 열어주기까지 했다.
지우와 함께 나른하게 누워있던 임정은 지우의 헌터 타투를 보고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당신. D급이예요?”
“어? 어. 이제 30이야. 많이 올렸지?”
지우는 괜히 민망해서 장난을 쳤지만 임정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나! 그거. 거기에 돈 걸었잖아요. 앗싸! 그거 이제 내 돈 됐다. 당신이 D급 됐으니까. 우와. 정말로 당신이 D급이 될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당신도 안 믿었다고?”
“아니. 안 믿은 건 아니지만 3년 안에 그렇게까지 될 줄은. 우와. 이거 완전!!”
지우가 연구소를 떠나던 날, 임정이 호기를 부려서 헌터 협회 사람들과 치안대들을 끌어들여 내기를 해서 모은 금액은 78억 5천 4백만원이었다. 거기에 임정도 딱 그만큼의 돈을 넣어서 전부 157억 800만원이 모아져 있었다. 내기를 한 날로부터 3년 후에 지우가 D급 이상의 헌터가 되면 임정이 갖게 되는 돈이었다.
“자기한테는 별로 의미도 없는 돈이잖아.”
지우가 말했다.
“이건. 당신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증거 같은 거죠.”
“그 일은 자기 혼자 저지른 일이잖아. 3년 안에 내가 D급으로 올라가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고. 만약에 그 돈을 잃게 되면 나한테 실망할 거였어?”
지우가 물었다. 역시 엉뚱한 사람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건 아니지만.”
임정은 빙글빙글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저도 잘 알지 못해서였다.
왜 그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지우를 믿고 싶었던 건지, 그리고 지금, 지우에게 왜 이렇게 고마운 건지.
“무턱대고 나를 믿어주는 건 좋은데 제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는 건 그만해. 하긴. 큰 일도 아니었겠네. 자기한테는.”
지우가 하는 말이 임정의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멍청한 선택을 한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해 줘서 고마워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내가 당신 체면을 살려준 건가?”
“아마 그럴 걸요?”
임정은 기분이 좋았다. 지우의 생일에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게 상징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
임정이 갑자기 지우의 손을 잡아다가 제 배 위에 올렸다.
“움직였다!”
지우도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느껴지니, 콩알? 이게 바로 D급 아빠의 손이다.”
임정이 의기양양하게 속삭였다.
***
지우는 자기가 살던 거실을 서성거렸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쩌다 발걸음이 거기로 향하게 됐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잠깐 좀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걷다보니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지우는 자기가 왜 거기에 왔는지 알지 못한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클랜 A에서 접수했다고 해서 갑자기 뭐가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우는 멍하니 거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날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천기정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마음으로 병원에 달려갔던 일 하며, 늪을 발견하고 헌터 타투를 발견하고…….
지우는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그날 지우의 신고를 받고 온 임정이 그곳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임정이 들어오던 모습은 생생하게 떠오르지 않았지만 실컷 집안 구경이며 늪 구경을 다하고 와서 인사를 하던 모습은 생생했다. 지우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이렇게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을 지우는 알지 못했다. 이제 임정은 지우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지우는 늪을 향해 걸어갔다. 리드로 덮여 있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지우는 리드를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늪으로 내려갔다. 지우가 그 늪으로 들어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오랜 시간을 그 주위에서 맴돌았으면서 정작 늪 아래로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지우는 그 맵도 처음 보았다. 강지연이 만든 감응기로 본 적은 있었지만 감응기는 이런 모습을 세세하게 펼쳐보이지는 않았다. 처음에 치안대의 헌터들이 들어왔을 때 거센 폭설로 그들을 사납게 대했던 맵은 말할 수 없이 고요했다.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멀리에서 곤충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우는 바닥에 앉아 흙을 만졌다. 보슬보슬한 흙이 그의 손안에서 머물다가 떨어졌다. 지우는 다시 흙 한 무더기를 손으로 집어 제 코에 가져다 대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살던 집의 앞마당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비가 온 후에, 바닥에 뭉쳐있던 젖은 낙엽이 풍기는 것 같은 냄새였다. 지우는 그 바닥에 드러누웠다.
하나의 공간이 오로지 저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