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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급 괴수
임정은 의심스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기가 지금 아군과 같이 있는 건지 적군과 같이 있는 건지 알 필요가 있었다.
정재군은 임재욱의 방문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임재욱의 요구를 처음부터 들어주었던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 말이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그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유지나 치안부장과 통화를 했습니다. 유지나 치안부장은 자기가 임재욱 헌터의 신원을 보증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임재욱 헌터는 자기가 치안대에서 퇴출당한 신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지난 시간을 추억하고 싶다면서 저한테 부탁을 했습니다.”
“부탁이라뇨?”
“그곳에 혼자 있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임정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순식간에 표정이 사나워졌다.
“그 요구를 받아준 건 아니겠죠?”
이미 어떤 대답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한 채로 임정이 물었다. 정재군은 고개를 떨구었다.
“죄송합니다. 명백히 제 실숩니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치안대와 사이가 틀어지면 헌터 협회 직원으로서 일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일단 말해보세요. 그래서 임재욱 헌터가 무슨 짓을 한 거죠? 그곳에서 없어진 물건이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사라진 건 그 자신입니다. 임재욱 헌터는 그 날 이후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그런 사실은 보고된 적이 없는데요. 실종신고가 들어온 것도 없고요.”
“아마 그럴 겁니다. 임재욱 헌터는 이혼을 준비하면서 혼자 살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최근에 치안대에서 잘린 신분이라 임재욱 헌터의 모든 기반이 사라진 거죠. 누구도 임재욱 헌터가 사라졌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었을 겁니다. 치안대로 출근을 하지도 않고 가족이랑 같이 살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시게 된 거죠?”
정재군은 주저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알아낸 사실들을 숨김없이 임정에게 말했다. 네이팜탄과 거기에서 발견된 강지연의 지문에 대해서도 말을 해 주었다. 네이팜탄이라는 말을 듣고도 임정이 아무 것도 연상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정재군은 네이팜탄이 늪과 괴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도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듣는 동안 임정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다른 치안부장들은 임재욱 헌터에 대해서 우호적이라 이 일이 제 경력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지금까지 지켜봐 온 바로는 치안대의 실세는 임정 탱커님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저는 우리 사이에 사사로운 벽이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아서요.”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해 주러 왔다는 거군요.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요.”
“예, 확실히 그건 제 치부죠. 부끄럽고 후회됩니다. 모든 녹화장치를 꺼달라는 말에 그대로 했던 것도 후회가 됩니다. 임재욱 헌터가 혼자서 돌아다니는 장면이 찍히면 그게 저한테 불리할 거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제가 쥘 수 있던 모든 단서와 증거도 다 날려버리게 된 거죠.”
"저한테 그 얘기를 하지 않았으면 저는 끝까지 그 사실을 몰랐을 텐데요."
"그래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어가게 하는 것보다는 제 입으로 설명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임정 탱커님이라면 나중에라도 그 사실을 알아내실 것 같았고요."
“임재욱 헌터가 어떻게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모릅니다. 솔직히 관심도 없고요. 저는 자기 인생을 위험으로 몰아 넣는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습니다. 위험을 즐기는 부류는 어디든 있으니까요. 내가 그 사람들한테 원하는 건,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는 거죠. 처음부터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단 호의를 한 번 베풀고 나니까 중간에 빠져나오는 게 애매해지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계속 임재욱 헌터의 요구를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작은 실수를 했고 그게 꼬투리로 잡힐 거라고 생각해서 겁이 나서 그랬겠죠. 일단은 알았습니다. 유지나 헌터가 신원을 보증하기로 했다는 말은 믿을 수 있는 거죠?”
“녹음 파일을 가져왔습니다. 길지 않으니까 직접 들어보시죠. 파일은 따로 탱커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래놓고 그는 유지나의 목소리가 담긴 파일을 재생시켰다. 그날 임재욱이 지우의 아파트에 나타났던 것은 사실인 듯했다. 임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재군을 내보냈다.
“그 일로 인해서 책임질 일이 생기면 책임을 지긴 하셔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정상 참작이 될 것 같군요. 얘기해 줘서 고맙습니다.”
임정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정재군이 돌아간 후부터 임정의 발걸음은 급해졌다. 임정은 서규태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치안대로 와 줄 수 있겠는지 물었다. 서규태는 레이드를 하려는 중이었다면서 급한 일인지 물었고 임정은 급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서규태는 두 말도 하지 않고 임정에게 와 주었다. 임정이 지우대신 자신을 불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서규태는 임정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도 임정을 재촉하지 않고 임정이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
“임재욱 헌터가 지우씨가 살던 아파트에 나타났다고 해요. 현장을 지켜야 했던 협회 직원을 회유해서 혼자 있을 시간을 갖게 해 달라고 했다가 사라졌다는데 협회 직원이 돌아왔을 때 그 사람은 사라진 후였고 현장에서는 소형 네이팜탄 여러 개가 발견됐다고 해요.”
“네이팜탄요?”
서규태는 즉각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임재욱 헌터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라졌대요. 협회 직원이 개인적으로 찾아봤던 모양이예요. 그 사람은 임재욱 헌터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어요. 그러면 수사 과정에서 자기가 현장을 이탈하고 직무 유기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날 거고. 그 사람은 일이 복잡해지는 게 귀찮은 거고요.”
“임재욱 헌터가 네이팜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것 때문에 써전님을 부른 거예요. 오시기 전에 저도 그 사건에 대해서 찾아봤고요. 늪을 떠난 괴수를, 늪을 태우는 방법으로 죽였다는 자료를 저도 보기는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모르겠어요. 지우씨 아파트에 있는 늪에 괴수가 없다는 건 알지만. 임재욱 헌터가 왜 그런 정성까지 들인 건지 그걸 모르겠어요. 공적을 세우면 치안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그리고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까? 그 협회 직원이 한 말 중에요.”
임정은 강지연이라는 연구원에 대해서 말을 해 주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시간 낭비하고 있으면 안 되겠군요.”
서규태는 임정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가려다가 임정이 임신한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춤했다.
“써전님도 적응이 안 되시는 거죠? 제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자가 됐다는 게요.”
임정이 웃으면서 말했다.
“네, 확실히 그러네요. 임재욱 헌터한테 네이팜탄을 구해준 연구관을 취조하는 게 꺼려지면 그건 내가 맡아서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만. 그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그렇게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고 강지연의 집과 연구실을 모두 찾아갔지만 강지연은 자리에 없었다. 간발의 차이로 자꾸만 어긋났던 것이다. 임정은 치안대를 동원해서 강지연을 잡겠다고 했지만 서규태는 그 일을 클랜 A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임정은 서규태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규태가 강지연의 집 앞에서 잠복을 하고 있다가 강지연이 들어오는대로 연락을 해 주기로 했던 것이다.
지우는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말해줘요.'
면도를 해서 새파랗게 드러난 지우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임정은 속으로 지우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마침내, 잠들어있는 지우의 곁에 누워있던 그 시간에 서규태로부터 연락이 왔다.
임정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지우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심해서 바람 쐬러 나가요. 써전님이랑 같이 나가니까 걱정은 안해도 돼요. 일어나면 전화해요. 바로 들어올게요.]
미음과 이응이 자유분방하게 흩어지는 악필이었지만 지우가 좋아하는 글씨체였다. 임정은 메모를 지우의 스마트폰으로 깔아놓고 집을 나섰다.
***
강지연은 몸에 흐르는 물을 닦으려 하지도 않은 채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밖으로 나왔다. 혼자 사는 집이라 빨리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강지연은 그대로 소파로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미국에서 출몰한 1급 괴수는 강지연에게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A급 헌터를 두 명이나 보유한 미국이라서 공략 가능성이 클 거라고 봤던 것이다. 1급 늪이 다른 나라보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성장하기 시작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소식으로 전해진 참상은 끔찍했다. 그러면서도 강지연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1급 괴수라고 해도 늪에 네이팜탄을 투하해 버리면 끝날 텐데 사람들이 왜 그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지연은 1급 늪이 밀폐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누구도 그 사실을 일반에 공표하지 않았다. 늪에 네이팜탄을 터뜨려서 괴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늪이 밀폐공간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1급 늪은 다른 늪들과 여러 가지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에 나타난 1급 괴수의 경우에는 늪 아래에 있는 하나의 맵에 괴수 둘이 살고 있었다.
앞으로는 어떤 일들이 더 일어날지, 1급 늪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개방된다면 그때는 누가 거기에 대응해서 싸울 수 있을지 강지연의 시름이 깊어갔다.
늪이 생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헌터의 수는 역부족이었다. 상급 늪의 괴수를 공략하다가 부상당하는 헌터들의 수도 점점 늘었다.
세상은 급변하는 것 같았다. A급 헌터도 없는 한국에서 1급 늪들이 성장을 하기 시작한다면 큰 일이라는 생각에 강지연은 괜히 한숨을 쉬었다. 뭔가를 해 보고 싶었지만 너무 무력했다.
'도대체 어떤 세상이 되려고.'
커다란 타올로 머리를 감싼 채 얼굴의 물기를 천천히 닦으면서 생각에 잠겨있던 강지연은 제 집 안에 외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규태는 강지연이 스스로 자기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를 기다리려고 했지만 이 여자의 상념은 끝이 없을 듯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벌거벗은 여자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조금이라도 제 스타일이었다면 모를까, 원치 않는 음식을 자꾸 권유받는 것 같아서 서규태는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사태를 수습한 것은 임정이었다. 임정은 테이블에 대충 던져져있던 강지연의 옷들을 강지연의 다리 위로 던졌다. 강지연은 그제야 타올을 내리고 그들을 발견했고 고함을 질러댔다.
“치안대다. 닥쳐. 스스로 안 닥치면 내가 닥치게 해 준다.”
임정이 말하자 강지연은 한 번에 말을 알아들었다.
“내 시간을 꽤 낭비하게 했어.”
임정이 강지연을 노려본 채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강지연은 옷을 급하게 꿰 입으면서 임정이 하는 말에 집중했다. 서규태는 불쾌한 듯이 고개를 돌렸다. 저런 몸을 보자고 지금까지 눈을 아껴온 게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혐짤을 본 것 같아 굉장히 불쾌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