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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클랜의 멤버
“제가 레어템을 내놓죠. 레어템은 진짜 그 가치를 활용할 줄 아는 헌터들한테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수억짜리 드레스를 오크한테 팔 수도 있겠지만 그건 누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심지어 드레스조차도 슬플 걸요?”
선아영이 말했다.
“그걸 대여도 아닌…….”
“매도죠. 완전한 소유권 이전. 그리고 무기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 저는 어떤 장인이 어떤 재료로 어떤 것들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요. 사람들은 세상에 없는 걸 꿈꾸지 못하겠지만 저는 그걸 구현해낼 수 있어요. 저를 잡으면 도움이 될 거예요.”
천기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할만한 제의였다. 서규태도 천기정을 바라보았다.
“아, 한 가지 더요. 러프 스톤과 괴수 사체에 대한 우선매수권도 저희한테 주세요. 높은 급의 괴수에 대한 수요는 언제나 있거든요.”
선아영이 말했다.
“우선매수권을 주는 대신 8프로로 하죠. 러프 스톤과 괴수사체 매각대금의 8프로.”
천기정이 말했다.
어차피 임정이 협회장과 세금 문제를 결판지어 놨기 때문에 그 정도는 충분히 양보할 수 있는 문제였다.
“좋아요. 마음에 드네요. 언제 한 번 모두들 매장에 찾아오라고 전해주세요. 피팅을 해야 몸에 맞는 갑옷을 만들죠.”
선아영이 말했다.
“그건 제가 서비스로 해 드릴게요. 클랜 A의 창설 기념으로. 거기에 ‘익스트림 헌터’의 로고를 넣는 건 상관없죠?”
그런 선아영을 보면서 천기정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업가는 그런 세밀한 부분 하나에서도 홍보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죠. 옵션에 안지우씨는 안 들어가는 겁니다.”
천기정이 말했다.
“그건 안지우씨가 선택할 문제 아닌가요?”
선아영이 당돌하게 말했다.
“네. 아닙니다. 클랜 A의 평화와 안정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라서요. 우리는 이 관계가 좋게 지속되길 바랍니다. 선 대표님. 우리 같은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우리가 아직 웃고 있을 때 얘기를 끝내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슬슬 웃음이 사라질 때까지 얘기를 길게 잇는 건 굉장히 멍청한 짓이죠.”
서규태가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선아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메시지는 확실했다.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 알아듣지 못한 척을 할 수도 없었다. 층층시하도 이런 층층시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굴욕의 대가로 괜찮은 거래 하나를 텄으니 꼭 손해이기만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선아영은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아, 그리고 대표님 집 근처에 오픈일이 다가오는 늪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안전하게 공략해 주는 대신 비율을 좀 더 조정해 보는 건 어떨까요?”
천기정이 말하자 서규태가 그건 너무 심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천기정을 바라보았다. 천기정도, 이건 너무 심했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선아영은 말이 나온 김에 곧바로 처리해 줄 수 있냐고 덥석 미끼를 물었다. 공략되지 않은 늪 옆을 지나다니는 두려움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논할 수가 없었다.
***
일은 착착 진행이 되었다.
클랜을 창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충 만들어서 유지만 할 생각이었다면 어려울 것도 없었겠지만 임정은 클랜 A가 만들어진 그 역사적인 순간을 사람들이 다 같이 기억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임정은 자산 관리사를 바꿨다. 오랫동안 임정의 일을 봐 주었던 자산 관리사는 임정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자기가 잘못한 게 있거나 서운하게 대한 게 있었느냐고 묻다가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임정은 가까운 지인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런 것 뿐이니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다른 것들을 옮기는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지우가 연구소를 떠나던 날 다른 사람들과 내기를 해서 만들어 둔 돈은 건들기가 애매해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임정의 수중으로 되돌아올 돈이었다.
기존의 자산관리사와 관계를 정리하고 임정은 천기정을 찾아갔다.
임정은 천기정에게 잠깐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할 수 있겠는지 물었다. 천기정이 임정을 따라 나오자 임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천 대리님이 제 자산을 관리해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클랜 A의 재정도 담당해주시면 좋겠고요.”
“…….”
천기정은 임정이 왜 자기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지우를 좋아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그 남자의 형제도 아니고 혈연으로 얽힌 관계도 아닌 자기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이해도 되지 않고 부담스러웠다. 천기정은 괜히 혼자서 그 답을 찾느라고 머리를 싸매는 대신 임정에게 직접 묻기로 했다.
“왜 나한테 이러는지 물어도 됩니까?”
“저도 그동안 궁금한 게 있었는데.”
임정이 천기정을 바라보았다.
“지우씨한테서 천 대리님에 대한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천 대리님은 지우씨의 과거 세계를 구성하는 양대 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다른 사람은 신용하라는 친구고요?”
“네.”
“질문은요?”
“천 대리님을 만나게 된다면, 왜 그때, 아무도 믿지 않는 지우씨한테 기회를 줬는지 여쭤보고 싶었어요.”
“왜요?”
“공대장으로서나, 치안대원으로서 면접을 볼 때 제가 사람들한테 자주 하는 질문이예요. 그 사람들이 내린 특별한 결정이 뭔지,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뭔지.”
임정이 묻자 천기정이 끄응, 소리를 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천기정은 허공을 보면서 이유를 찾았다. 그러나 자기가 왜 그랬을지 생각을 해 보려고 하다가 그냥 조용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요. 그리고 솔직히. 나는 내가 안지우씨한테 기회를 줬다는 생각도 안 하거든요.”
“그런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은 아주 작은 압박으로도 모든 걸 잃게 되잖아요. 사회적인 내구성이 없는 거죠. 단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기회를 잃어버려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랑은 얘기가 다르죠. 순식간에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는 거였고, 사회는 계속 그런 말들로 지우씨를 위협하고 있었고요.”
“모르겠어요. 이성적으로 생각한 것 같지는 않네요. 그냥 그때는 당연히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요. 나는 이타적인 사람도 아니고 배려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인데. 남의 일에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안지우씨를 보면 저절로 돕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노력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요?”
“그건 모르겠네요. 안지우씨가 노력하는 사람인가요?”
그 말에 두 사람은 같이 웃었다.
결국 천기정은 임정에게서 답을 듣지 못했다. 자기가 했던 질문을 피하려고 일부러 이상한 질문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 날, 그 일이 결정되었다. 천기정이 임정과 클랜 A의 자산 관리를 맡게 된 것이다.
***
연일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지는 와중에 드디어 나이 제한에 대한 특례가 제정되었다. 이제 강현이 레이드를 하다가 걸려서 불이익을 받게 될 일은 없게 된 것이다. 하나하나가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선아영의 집 근처에 있는 늪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과 지우의 늪에 가 봐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운 좋게도 다른 공대가 먼저 선아영의 집 근처 늪을 공략하겠다고 나섰다.
“내일은 사체 운반을 해야 돼요. 바디 펌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가 빠지고 나서 운반량이 확 줄었대요.”
서규태가 말했다.
“뻥이겠죠. 겨우 팀 하나가 빠졌다고 무슨 운반량이 빡 줄어요?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바디 펌 사정이지 우리 사정은 아니잖아요.”
태인이 말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한데. 내일 늪에 가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내가 미리 신청을 해 놨습니다.”
서규태가 말했다.
써전이 그렇게 말하는데 더 이상 토를 달 이유는 없었다.
***
강현은 임정에게서 검술 훈련을 받고 있었다. 태인과 지우도 집중해서 두 사람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혀 막아내지 못하던 강현도 이제는 제법 실력이 늘어서 임정의 공격을 상당히 막아내고 있었다. 대련 실력은 하루 이틀만에 느는 것이 아니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하는 사람의 성장을 막을 방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도 찔리다보니 이제는 몸이 먼저 반응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금은 어떻게 한 거냐고 임정이 물으면, 막고 나서야 자기가 막은 걸 알았다고 말했다.
강현은 임정이 공대장의 팔을 날려버렸던 것을 잊지 못했다. 검에 차크라를 실어 차크라를 날려서 그것으로 공대장의 팔을 베어버린 것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현은 꼭 그것을 배우고 싶어했다. 임정은 귀찮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강현이 부탁을 할 때는 꼭 강현의 상대가 되어 주었다. 강현을 가르치면 강현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도강을 하면서 습득을 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때부턴가는 천기정도 그 자리에 합류했다.
천기정은 나이로 치자면 태인과 비슷했지만 자기가 편하게 느끼는 사람 옆으로 찾아갈 때는 항상 자연스럽게 서규태의 곁으로 갔다. 서규태도 천기정을 편하게 여겼고 태인은 천기정을 서규태 급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언젠가 태인이 천기정에게 나이를 물어보고 일동이 경악을 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 먹은 나이와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라서 강현은 자기가 잘못 들은 거라고 믿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신체 나이는 젊었다. 서규태는 천기정에게 헌터로서의 소질이 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헌터 테스트에서 타투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뭘 어쩌겠냐고 천기정이 실망한 목소리로 말하자 일제히 지우를 가리켰다.
“방법을 전수해 달라고 해 봐요.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지우씨는 뒤늦게 헌터가 됐잖아요.”
서규태가 말하자 천기정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안 알려주더라고요. 저도 물어봤거든요. 그냥 혼자만 알고 있을 건가봐요.”
지우는 아무 짓도 안 하고서 치사한 놈으로 몰렸다. 천기정이 합류하고나서 사람들은 지우를 놀려먹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천기정이 헌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천기정에게 간단한 동작과 기술들은 가르쳐 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헌터들은 틈틈이 개인교습을 진행했다.
서규태와 임정은 가르쳐주는 쪽이었지만 태인과 강현은 천기정이 두 사람에게서 전수받은 것을 졸졸 따라 받아먹는 형식이었다. 서규태와 임정이 천기정을 가르칠 때는 친절하다는 것을 노리고, 자기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천기정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배워오게 하기도 했다.
이제 다 같이 모여서 훈련을 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강도가 높은 훈련이 연일 이어지고 연일 그 강도가 계속 더 높아지는데도 이제는 그것을 힘들게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제는 훈련이 신체 강화와 체력 증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익숙해진 습관이라서 자연스럽게 해 나가는 지경이 되었다.
쉬면서 얘기를 할 때도 몸을 놔두고 있으면 이상하고 심심했다.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면서 서로 공 같은 것을 던지는 것처럼 그들은 검으로 겨루었다. 거의 매번, 강현이 임정에게 검을 가져다 주고 임정의 건너편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저에게 공격을 해 보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정해진 동작대로 공격과 방어를 하는 것을 반복했지만 그러는 와중에 강현이 임정의 리듬을 읽어내면서 가끔 엇박자로 치고 들어와서 임정을 공격하기도 했다. 임정은 재빠르게 몸을 피하면서 검으로 막아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흐뭇한 표정까지 감추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