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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성
“림스에서 그렇게 당했으면 뭔가 배우는 게 있어야지. 사람이 뭐가 그렇게 발전이 없어요? 수술비가 얼마나 나올지 알고 홀랑 보증을 섭니까? 함부로 보증 서면 안 된다고 집에서 안 배웠어요?”
천기정은 그동안 벼르고 별러왔던 것처럼 잔소리를 해댔다.
지우는 그런 천기정을 신기한듯이 바라보았다. 솔직히 천기정이 이렇게까지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를 하지 못했다. 묻지마 폭행을 당한 사람들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에 모두 죽었다. 정체불명의 가해자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천기정이 유일한 상황이었다.
“보증을 함부로 선 건 아닌데요.”
지우가 말하자 천기정은 아직 한참 멀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우는 냉장고를 열고 자기가 사 온 음료수를 일렬로 편의점 냉장고에 진열하듯 넣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리고 이제 저도 돈 잘 버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헌터잖아요.”
지우가 우쭐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 유명한 텐텐.”
천기정이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천기정이 그 별명을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했다. 그놈의 쓰레기같은 스텟 때문에 지우는 연구소에서 중국 여자애 이름같은 텐텐이라고 불렸다.
"그 얘기는 누구한테서 들으셨어요?"
"뉴스에 나오던데요? 안지우씨도 유명인사예요."
"거기에 제 기본수치까지 나왔다고요?"
"뭐, 신체 사이즈도 아니고."
"차라리 신체 사이즈를 공개하는 게 낫죠. 신체 사이즈라면 꿀릴 게 없는데. 왜 하필. 아놔. 진짜. 웃기는 인간들이네. 왜 남의 스텟을 공개하고 난리래? 허락도 안 받고!"
"신기하니까 그랬겠죠. 전 세계적으로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제 얼굴도 나왔어요?"
"아뇨. 그 사람이 안지우씨일 거라는 건 내가 때려맞춰서 안 거고. 아마 이런 정보도 곧 통제가 되겠죠. 처음에는 정부랑 헌터 협회에서 경황이 없어서 정보를 공개한 것 같고."
"통제요?"
"이런 일을 알려서 뭘 하겠습니까? 헌터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세계 강국이 되는 시댄데 뒤늦게 헌터로 각성한 사람에 대해서 널리 알려서 뭘 하겠어요?"
"그렇게 되나요?"
"아마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통제가 되겠죠."
"집에서 아직 못 가져 온 게 많은데. 저도 집에 못 가게 할까요?"
"내 생각에는 그럴 것 같은데요?"
그게 천기정의 잘못도 아닌데 천기정한테 따질 일은 아니어서 지우는 냉장고 정리에 집중을 했다.
“아. 림스 쓰레기는 처리했어요. 헌터 협회에서 늪을 연구한다면서 늪 생성에 관여했을 만한 걸 전부 다 샀거든요.”
지우는 중요한 걸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이 천기정을 보며 말했다.
“잘 된 건 잘 된 건데 그게 늪을 만든 것 같대요?”
천기정은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구. 아파라.”
“범인은 아직이래요?”
“그런가봐요.”
“인사팀에다 말해서 저한테 자리 만들어주신다고 하시더니. 티오가 안 나서 대리님 자리를 내 주시려고 그런 거였어요? 저는 정말 이번에 대리님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요.”
지우가 말했다.
“아, 그랬지.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네.”
“이제는 완전히 잊으셔도 돼요. 이제 헌터잖아요. 그러니까 괜히 저 때문에 티오 만드실 생각하지 마시고 빨리 건강 회복해서 회사로 돌아가세요.”
“여기 있는 게 편해서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은데.”
천기정이 농담조로 말했다.
살아서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기적처럼 느껴져서 지우는 천기정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뚫어지게 보지는 말고요. 얼굴이 단단해보여도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뼈가 부서져서 그걸 일일이 맞추느라고 자기들이 고생이 많았다고 그러던데.”
"누가요? 의사들이요?"
"네."
“얼굴뼈도 부숴졌었대요?”
지우가 놀라서 물었다.
“퍼즐 맞추기 하는 것 같았대요. 뼈를 모아서 맞추는 일이. 얼굴만 그런 것도 아니고 쇄골이랑 어깨뼈도 그렇고.”
천기정은 장난스럽게 얘기를 했지만 지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큰일이 날 뻔했다는 것은 천기정도 알고 있었다.
“안 죽었으니까 됐죠, 뭐. 이런 재미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재미있는 얘기 해 봐요. 헌터가 되니까 어때요?”
지우는 천기정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천기정이 그 얘기를 더 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자기 얘기를 시작했다.
“그거야말로 재미없는 얘기예요. 어떤 느낌이냐면요. 왕자와 거지에 나오는 왕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예요. 제가 왕잔데 그동안 거지가 됐었던 거죠. 근데 다시 왕자가 된 날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가 들어선 것 같은 느낌?”
“그게 뭐예요?”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쩌리라는 걸 깨달았다는 거죠. 그동안 헌터의 계급 사회가 사체 운반을 하는 헌터랑 레이드를 하는 헌터로 이분이 돼 있었다면 이제는 삼분이 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레이드하는 헌터, 하급 헌터, 그리고 안지우.”
“아이쿠. 거기서도 바닥이예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바닥이예요.”
지우가 시무룩하게 말을 하자 천기정은 웃어도 되는지 슬슬 눈치를 보다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그래도 사체 운반을 할 수는 있는 거죠?”
“네. 아마. 그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됐네. 부지런히 사체 운반해서 돈 벌어서 사업해요. 그럼 되겠네. 헌터라고 꼭 헌터로만 성공해야 한다는 법도 없잖아요.”
“네. 막 의욕이 솟구치네요.”
영혼없이 대꾸를 하면서 지우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천기정이 회복되는 걸 보고 돌아갈 수 있어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헌터가 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줄 알았는데 헌터의 밑바닥에서부터 다지면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버거웠다.
‘그래도. 이것도 다 배부른 소리지. 언젠가 오늘을 떠올리면서 혀를 찰 날이 오겠지.’
지우는 조용히 저를 격려했다.
성과를 내지 못하고 죽을 쑤는 것은 지우의 거실에 있는 늪도 마찬가지였다.
헌터 협회에서 파견을 나간 전문 인력들은 지우의 집에 틀어박혀 연구를 하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이어나갔다. 헌터 테스트에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을 데려다가 지우의 거실에 나타난 늪에 손을 담가 보도록 한 것이다.
가능하면 지우에게서 들었던대로 상황을 비슷하게 재연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지우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기종의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가 빠뜨리고 그것을 꺼내게 했지만 누구에게도 타투가 생겨나지 않았다.
슬슬 늪을 소멸시키고 철수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래도 늪의 테두리 색깔이 전례없는 특이한 색이었기에 늪 안에 살고 있는 괴수가 어떤 종류일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지우의 집에서는 은밀하게 괴수의 공략이 준비되었다.
그리고.
지우의 집에서 발견된 늪은 헌터들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어놓았다.
***
일반적으로는 늪의 테두리 색깔로 늪 안에 어떤 괴수가 살고 있는지 예측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우의 집에서 발견된 늪은 헌터들에게 어떤 힌트도 주지 않았다.
결국 헌터 치안대의 B급과 C급 헌터들이 차출되었다. 그렇게 꾸려진 파티는 가히 역대급이라고 할 만했다.
전 세계적으로 A급 헌터가 세 명이 존재하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A급 헌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B급 헌터가 한국에서 최상위급 헌터였다. 최고의 방어 증폭률과 공격 증폭률을 갖춘 장비와 무기로 무장을 하고 한 명의 탱커와 아홉 명의 딜러가 늪 앞에 도열했다.
불꽃이 일렁이는 것처럼 두 개의 색깔이 교차하며 출렁이는 테두리는 헌터들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탱커인 강동호는 딜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브리핑을 할 내용이 마땅치 않았다. 그 자신도 이 늪에 대해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 탓이었다.
“이 안에 어떤 괴수가 있는지는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1급 괴수보다도 더 강력한 괴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1급 괴수의 공략 시도 경험이 있었던 딜러들은 얼굴을 구겼다. 자신들이 치른 전투가 생각난 까닭이었다. 그런 패배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두려움은 뇌와 뼈에 새겨진다.
“상황에 따라서 늪에 입장을 했다가 정보창만 보고 바로 빠져나와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모두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작전을 수행해 주기 바랍니다.”
"예!"
강동호가 말하자 나머지 딜러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답했다.
늪에 입장을 하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정보창이었다. 정보창에는 괴수의 체력과 늪의 타이머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탱커가 전략을 짜고 대형을 갖추어 공격을 한다.
등급이 같은 늪이라면 괴수의 체력은 거의 비슷하다. 정보창만 보고 그대로 돌아나온다는 것은 적진에 들어갔다 빈 손으로 나온다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강동호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감이 고조된 탓이었다.
강동호가 늪 위에 두 발을 디뎠다. 드디어 늪이 개방되었고 그의 몸이 안으로 유연히 사라졌다. 강동호를 시작으로 다른 아홉 명의 헌터들도 모두 늪으로 입장했다. 헌터들의 입장이 끝나자 늪의 수면은 원래의 평온을 되찾았다. 파동이 없는 고요한 수면만 바라보자면 그 안에서 일어날 일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늪 안의 환경은, 일단 들어가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예상할 수가 없었다. 각 사람들의 레이드 경험이 수 천 번은 되었던 터라 헌터들은 순식간에 포지션을 잡으면서 정보창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입장을 함과 동시에 괴수에 대한 정보창이 뜨는 여느 늪들과 달리 이곳에는 정보창이 뜨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늪 속의 세상에서는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열 명의 헌터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정보창을 찾았다.
이상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정보창이 없었다. 정보창은 늪에 입장을 하면 당연하게 보이는 거였지 이렇게 두리번거리면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니었다.
“정보창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동호와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현동기가 말했다.
“괴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백전노장인 임재욱이었다. 그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어디에서도 괴수가 보이지 않았다.
늪의 등급에 따라 맵의 크기도 변한다. 5급 괴수의 경우 맵의 반경이 대략 1킬로미터라면 4급 괴수의 경우 두 배로 늘어나고 3급 괴수의 경우 세 배로 늘어나는 식이다. 맵의 크기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괴수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괴수를 공략하지 못하고 후퇴를 할 때는 하더라도 일단은 최대한의 정보를 모아서 가야 한다. 그런데 이 늪에서는 정보창도, 괴수도 보이지 않았다.
“셋씩 조를 이뤄서 수색을 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고 여기까지 내려온 이상 뭔가를 하기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임재욱이 말하자 유지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어요. 이 늪은 너무나 변칙적이잖아요. 정보창도 없고 괴수도 없다면. 늪의 유지 시간이 12시간이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유지나의 말에 의견이 반으로 갈렸다. 몇 사람은 임재욱을 지지했고 몇 사람은 유지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갔고 유지나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이 늪에는 괴수가 없는 겁니다.”
유지나는 강동호가 어서 결단을 내려주기를 촉구하는 눈빛으로 강동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