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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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다] 한.국.인.의 두.통.약 <上>  

    올려다 본 하늘은 먹물을 엎지른 것처럼 무거운 회색빛이다. 

    구름이 잔뜩 뒤덮혀 하늘이 낮게 보인다. 금방이라도 빗줄기를 쏟아 부을 것 같다. 

    오늘 토요일 새벽에 엄마와 누나는 부산스레 대구 큰 이모 칠순잔치에 간다며 

    잠을 이기지 못한 나를 두들겨 깨웠다. 

    엄마 없는 이틀동안에 컴퓨터나 텔레비전 보지말고 공부할 것과 

    밥 꼭 챙겨먹으라며 잔소리에 잔소리를 했다. 

    잔소리 끝에 오늘 비 억수로 온다고 하며, 신발장 위에 우산을 꼭 챙기라고 했는데...... 

    엄마 가신 후 비몽사몽 침대에 엎어져 잠을 깬다는 것이 깜빡 졸아, 

    겨우 고양이 세수만 하곤 부랴부랴 나오느라 우산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오늘따라 마을버스도 오지 않는다. 

    지금 타도 간당간당 지각인데..... 

    굵은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곁에선 사람들이 서둘러 우산을 켠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어떻하지? 

    내가 다니는 서일고등학교는 인근에선 보기 드물게 지각률이 '0'에 가깝다. 

    이는 학생주임 'dog死'가 지각생에게 시키는 초죽음의 정신무장훈련 결과에 따른 것으로 

    오죽하면 지각하느니 결석을 권장한다 할까? 

    dog死는 괴력을 보이기 전 꼭 한마디 던진다. 

    '개새끼야!! 오늘 어디한번 개를 잡고, 개.값.을 물어--?' 

    으윽........그 뒤는 생각하기도 싫다. 

    왜 이놈의 마을버스는 기다리면 오지 않는 거야!!!!! 

    애꿎은 손목시계만 노려보고 발만 동동 구르길 십 여분. 

    그래! 큰길로 걸어나가 시내버스를 타는 것이 낫겠다. 좀 덜 걷고 편하게 가려고 했더니..... 

    마음을 먹었을 때 30미터 앞의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나는 냅다 뛰어 깜박깜빡하며 빨간불로 넘어갈 찰나 헉헉대며 건넜다. 

    나-이스~~~ 

    아침부터 늦잠에, 엄마 잔소리에, 우산에, 마을버스까지 속썩이더니...... 

    훗!! 재수 없는 것만은 아니었지. 

    뿌듯한 만족감을 느끼며 맞은 편 정류장을 보는데...... 

    이런!!!! 저 마을버스 왜 오늘 텅텅 빈 채 오는 거야. 

    함께 기다렸던 동지들이 꿋꿋이 기다린 보람을 느끼며 올라 타 자리에 앉는 것이 보인다. 

    그 뒤에 같은 마을버스 두 대. 

    연달아 3대가 한꺼번에 오다니, 조금만 더 기다릴 걸....... 

    머리를 쥐어뜯고 싶다. 

    그럼 그렇지- 아침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으으으으, 짜증나!! 다시는 내가 저 버스 타나 봐라. 

    아우-씨! 기분 거지같다. 

    한 걸음 옮기는데.......어라, 이번엔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거침없이 땅에 내리 꽂힌다. 

    뭐-야-- 정말!! 다시 건너가 마을버스를 기다리려해도 

    3대가 함께 같으니 그 다음은 기약할 길이 없을텐데...... 흑흑. 

    체념하고 뛰기 시작했다. 

    이젠 비가 완전히 퍼붓듯 내린다. 

    잠깐인데도 퍼붓는 빗줄기에 흠뻑 젖어, 옷이 몸에 감기고 제대로 눈뜨기가 힘들다. 

    이 골목을 질러가면 조금 빠르게 정류장에 갈 수 있다. 

    헉! 헉! 저 건물 모퉁이만 돌아 조금만 더 달리면 버스정류장. 조금만 가면..... 

    모퉁이를 도는 순간, 

    "부앙앙앙앙---------------" 

    "끼------------이-익!!!!!!!!!" 

    "아악!!!!!!......................................." 

    "퍽!!!!!!!!!!!!!" 

    "쿵!!!!!!!!!!!!!!" 

    가슴이 철--렁, 심장이 내려앉고 온 몸에 핏기가 싸-악 가시는 기분....... 

    아이쿠! 엉덩이야. 나 괜찮은 건가? 살아 있지!! 

    휴-우, 꼭 감은 눈을 떠서 보니 넘어졌을 때 오른 쪽 팔을 땅바닥에 스쳤는지 

    조금 피가 흐르고 다리를 살펴보니 무사하다. 

    으---------윽 엉덩이가 너무 축축하다!!!! 

    "야. 괜찮아?" 

    그 때서야 나를 이렇게 만든 놈을 쏘아보고 한 소리하려 고개를 드는데, 

    "어!!!" 

    할 말도 못하겠다.................나는 목숨이 하나일 뿐이다. 

    권. 승. 주....... 그가 누구던가!! 

    올 초에 서울에서 전학 와 단기간에 유명인사가 된 우리 반 놈이다. 

    묘하게 시선을 끄는 차갑고 어른스러운 분위기에, 

    가만히 있어도 존재감이 느껴져 주위를 주눅들게 만드는 위압감. 

    이 놈에게 눈독들인 일진이 영입권유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덤볐다가 피곤죽이 되었다 했다. 

    귀신처럼 싸움을 잘해 작년 졸업과 동시에 서울 어느 조직에 스카웃 됐다던 

    그 전설의 전갈이 일부로 현재 짱에게 전화를 넣어 이 놈 이름을 대며 

    아. 끼. 는 후. 배. 임을 강조했다고 한다. 

    얼마나 대단한 놈이길래, 서울 조직에 있다는 선배까지....... 

    그 후로 이 놈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지만 모두에게 경외시 되었다. 

    나는 바보처럼 잔뜩 굳어서 그저 

    ".......어, 어....." 

    이 놈은 그런 나를 몸을 구부려서 노려본다. 이 놈이 사람을 치여놓고 노려보기는! 

    헉!! 혹시........ 오토바이에 상처라도 생긴 건가? 

    쏴----악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조금 전 분명히...... 둔. 탁. 하. 게...... 깨....지....는.... 소......리.....가...... 

    학교안테나 성재놈 말로는 이 놈에게 당하고 앙심을 품은 겁 상실한 일진놈이 

    녀석의 애마를 해하려다 그 자리에서 걸려, 죽지 않을 만큼 모질게 맞고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나...........사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그 소문 뒤부터는 

    더더욱 이 놈 앞에서 아이들은 몸을 사렸고 눈조차 맞추질 못했다. 

    나 혹시 오늘 비 오는 날 먼지나게 두들겨 맞고, 생애 최초로 병원밥 먹게 생겼다. 

    야! 임마!! 머리 좀 치워봐. 니 잘난 오토바이 좀 보게!!!! 

    "김. 민. 하" 

    헉!!! 내 이름을 알고 있다......... 2학년 5반. 같은 반이라지만 한번도 말을 터 본적이 

    없을 뿐 아니라 이 놈이 다른 놈의 이름을 부르거나, 말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우습게도 이 와중에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이 기쁘면서 당하게 될 일이 두려웠다. 

    우리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칠순잔치에 가서 가무를 즐기실텐데...... 

    이 빗속에서 나는 하얗게 질려 퍼질러 앉은 채로 그저 입만 벙긋벙긋 벌리고 있다. 

    "일어나." 

    이 놈이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 나를 일으켜 준다. 다리가 후들후들. 

    아- 어쩌란 말이냐. 이 빗속에 개미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고 도움을 구할 곳이 없네. 

    우선 일으켜 세우고 때리려 하나? 

    자,잠깐!!!! 우리 대화로 풀어보자고!!!!! 

    "저- 있잖아.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뭐?" 

    아. 잘못 말했나? 나도 조금이지만 피 봤쟎아!! 그래도 사과 먼저 해야했나? 

    이 놈 노려보며 한 쪽 눈썹을 신경질적으로 올린다. 

    "아....저...저... 그게 오토바이 수리비는 어떻게든 할테니, 제발........" 

    약간 울먹이며 애처롭게 선처를 부탁하는 눈빛을 보냈다. 

    "오토바이 무사해." 

    "에?" 

    그럼 조금 전 '퍽' 소리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그 놈 뒤의 오토바이를 살펴보니 오토바이는 건재하고 

    건물 입구에 세워놓은 주차금지라 표기되어진 주황색의 플라스틱 표시판이 넘어져 있다. 

    "휴-우" 

    천만 다행이다. 정말 큰-------일 치를 뻔했네. 

    "학교 가는 길이였냐?" 

    아! 맞다. 나는 그제서야 방금 전 열나게 뛰었던 노력을 상기하며 경악했다. 

    "헉!! 지각이다!!!!" 

    "지금 가봐야 독사에게 물릴테니 치료하고 가." 

    엉? 무슨?? 어디서??? 

    그러고 보니 나는 교복차림인데 이 놈은 사복이네. 밤새 놀다 지금 들어오는 길인가? 

    여기 이 건물에서 사나? 여기는 얼마 전 오픈한 오피스텔 같은데...... 

    그 사이 반 지하주차장 입구 한 구석에 오토바이를 끌어다 묶어놓곤, 

    "올라와" 

    하며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그냥 가려니 옷은 흠뻑 젖어 군데군데 얼룩지고, 팔은 아스팔트에 쓸려서 쓰리다. 

    뭐 오토바이가 무사하니 괜찮겠지. 

    어차피 지금 가봐야 기다리는 것은 '독사의 매' 밖에는 없으니 1교시 끝날 쯤 

    아파서 늦었다고 핑계대면 넘어가겠지. 

    나는 매는 죽어도 싫다. 

    어릴 때부터 매 한 대 맞느니, 차라리 무릎 꿇고 두 손들어 한시간 벌 서는 쪽을 택한다. 

    주춤거리다 건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는 그 놈이 보인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는지 내 쪽을 돌아본다. 나는 쪼르르 그 뒤를 따랐다. 

    올라타고 7층을 누른다. 나는 어색해서 엘리베이터 안쪽에 몸을 기대는데, 

    이 엘리베이터 5월 끝이라해도 여름이 아닌데 벌써 에어컨이 나온다. 

    비 맞은 머리와 몸에 닫는 에어컨 바람으로 소름이 돋고 머리가 아파온다. 

    인상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누르는데, 다 도착했나보다.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계속 누르며 그 놈을 따라 갔다. 

    현관을 들어서니 아담하고 깔끔하다. 다 젖어버린 옷차림으로 들어가기가 왠지 망설여진다. 

    주인도 그냥 들어가는데 뭐 어떠냐 싶었지만 친한 놈의 집도 아니고 처음인지라 

    젖어있는 양말로 들어가긴 그렇고해서 양말을 벗어 운동화에 두곤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침대와 사이드테이블, 책상, 옷장 그리고 가전제품은 냉장고와 커피메이커 뿐.......... 

    이 놈 성격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삭막 할 정도로 꼭 필요한 것 외엔 꾸미질 않아 잠만 자는 방 같다. 

    그 놈은 욕실에서 달랑 수건 하나만 꺼내 자기 머리를 턴다. 

    왜 나는 수건 안주고 너만 물을 닦는데, 치사한 놈!! 물기를 털다 고개를 든다. 

    이크!! 설마 내가 욕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겠지? 

    "샤워하고 와서 치료하자" 

    "아니 그냥, 연고만 바르면....." 

    수건을 어깨에 걸치곤 나를 뚫어지게 보며 한 쪽 눈썹을 올린다. 

    이 놈은 눈썹 하나만 움직여도 위압감이 든다. 

    주변학교 여자애들은 이 놈을 어떻게 알았는지 '서일의 쿨가이'라고 부르며 

    이 놈 얼굴 한 번 보려고 일부러 삼삼오오 짝지어 우리 학교 주변을 알짱거린다. 

    그래. 하긴 잘나긴 잘났지. 180 넘는 키에, 적당히 붙은 근육으로 보기 좋은 늘씬한 몸매. 

    조금 긴 듯하면서 세련되게 다듬어진 머리와 여드름 없는 깨끗한 피부. 

    숱 많은 짙은 눈썹아래 꿰뚫어 보는 듯한 냉소적인 검은 눈동자, 길고 날렵한 콧날, 

    고집스러워 보이면서 섹시함을 느끼게 하는 도톰한 입매와 깎은 듯한 턱선을 가진 

    사내답게 생긴 얼굴....... 같은 사내로서도 충분히 매력이 인정된다. 

    거기다 같은 또래로는 생각되지 않는 어른스러운 분위기로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든다. 

    교실에서 이 놈은 우리를 두렵게 만들었던 화려한 소문은 거짓인양 

    없는 존재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킬 뿐이지만, 우리에겐 또 다른 무게감으로 느껴질 뿐이다. 

    이상하게 처음부터 이 놈이 신경 쓰였다. 내 뒤에 앉은 성재놈과 싱거운 농담 끝에 

    눈꼬리에 웃음을 달고 고개를 들면 이 놈이 나를 보고 있다. 

    그런데 왜 항상 나를 불만인 듯 뚫어지게 보냔 말이다!!!!!! 

    머리가 아파와 다시 관자놀이를 누르며 용기내어 말한다. 

    "저 물 좀 ....." 

    그제서야 쏘는듯한 눈빛을 거두고 옆의 냉장고를 연다. 

    나는 속으로 한 숨을 삼키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가끔 두통 때문에 한.국.인.의 두.통.약을 한국인답게 지니고 다닌다. 

    사실 이 약은 보통 여자들이 한 달에 한번씩 걸린다는 '마술'의 후유증으로 누나가 사온다. 

    누나의 생리통은 심각한데 꼭 한.국.인.의 두.통.약만 찾는다. 약발이 좋단다. 

    나는 누나가 쓰고 남은 캅셀을 두통으로 인한 비상약으로 한 두 개 들고 다닌다. 

    바지주머니에서 약을 찾아 깠다. 분홍색의 알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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