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리고, 오랫동안.
시간은 물처럼 흘렀다.
차가운 계절이 지나고, 햇살이 점차 따뜻해졌다. 거칠고 냉랭한 공기에 점점 훈기가 감돌고, 색이 없던 풍경에 화려한 색이 수놓였다. 자연의 일들이 슬슬 시작을 알리자 사람들은 바빠졌다. 일 년의 성패란 자고로 봄에 결정되는 법. 슬슬 춘경기가 오는 것이다.
겨우내 스캔들로 들끓었던 공작령 역시 이에 따라 점점 조용해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여기저기서 말들이 나오긴 했다. 허나 그것도 곧 있으면 사그라들 것이다. 아무리 스캔들이 좋더라도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못한 법.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곧 자기 일들로 분주해졌고, 공작성 역시 겨우 긴 한숨을 돌렸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허나 경우에 따라선 그것만 한 해법도 없다는 말이 맞긴 맞았다.
어쨌거나, 겨울이 지나 봄이 될 동안 프로하우스 성은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일단 가장 큰 건은 공작의 이혼이었다.
“모두 들었어? 프로하우스 공작이 이혼을 신청한다는군!”
“저도 들었답니다. 공비가 참 성급한 선택을 했더군요.”
“참 별일도 다 있단 말이지?”
공작의 이혼은 황도에서도 소소한 화젯거리였다. 고위 귀족들의 이혼은 어지간하면 벌어지지 않는 일이다. 서로 엮인 재산들과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둘은 혼인한 지 서른 해에 가까운 사이였다. 그만큼 오래된 계약은 벗어나기 퍽 어려운 법. 사람들은 흥미진진해하며 이 이혼 신청을 지켜보았다.
“과연 될까?”
“공비의 친정에선 절대 안 된다고 악을 쓰고 난리라던데요.”
“잘못을 하긴 했지만 힘들지 않겠소?”
사실 원래대로 한다면 둘의 이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버나드가 있으면 또 모르겠다. 허나 아직 그가 잡히지 않았으므로 사생아란 주장을 할 수는 없었다. 자고로 주장은 증명할 증거물이 있어야 하지 않던가.
특히나 공작 같은 경우는 그 주선을 황가에서 했다. 그냥 황가도 아니고 전 황제가 주선한 결혼, 거기다 공비는 현 황제와 친척이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결국은 황제가 이혼 대신 별거를 하라는 판결을 내릴 줄 알았다. 공비의 친정도 이를 들어 이혼 불가론을 펼쳤고, 온갖 데에 선을 대 둘 사이의 이혼을 막고자 노력했다. 설상가상 해당 신청 건이 계류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자 소문은 더더욱 그렇게 퍼졌다.
가재는 게 편, 초록은 동색,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결국 황제가 거절하겠지.
그러나.
놀랍게도, 황제가 이 이혼을 허가했다.
사유는 이러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부부로서 함께 살았다. 허나 현재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파탄 나 서로 간의 신뢰가 사라진 상태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짐은 공작의 신청 서류를 받고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이 혼인의 파탄 책임이 공작에게 있었다면 짐은 이 이혼 신청을 기각하였을 것이다. 또한 둘 사이가 어떻게든 봉합될 여지가 보인다면 공작을 불러 타일렀을 것이다. 결혼은 신성하고, 그에 따른 계약 역시 신성한 것. 갈라서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듯 짐은 여러모로 두 사람의 사이를 숙고하였다.
허나 짐이 판단하건대, 두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더 이상 부부로서 함께하기 힘들다 보여진다. 두 사람이 헤어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둘 사이가 나아질 상황이 전연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비는 공작의 작위를 탐하였다. 이는 이 제국에서 어떤 경우에도 용서할 수 없는 금기 중 하나이다.
부부란 사랑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신뢰는 필요하다. 허나 공비는 금기를 범하여 신뢰를 잃었고, 금기를 범한 공비를 공작은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신뢰는 쌓기 어려우나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며, 한번 잃은 신뢰란 다시 쌓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지나온 날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두 사람의 결혼은 더 이상 이어지기 힘들다는 점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혼인이 파탄이 공비에게 있는 점, 두 사람의 사이가 이미 파탄 나 봉합이 어려워 보이는 점, 이 혼인을 유지할 경우 한쪽에게 현저할 정도의 고통을 줄 것이 확실한 점, 이 모든 것을 감안하여 짐은 이와 같이 결정한다.
기즈 드 프로하우스, 메르디스 드 프로하우스. 두 사람의 이혼을 허가한다.”
황제의 말은 곧 제국의 법. 아무리 공비의 친정이 날고 긴다 해도 황제의 명은 모든 것에 우선했다. 그리하여 공작은 공비와 무사 이혼했고, 공비는 곧바로 친정으로 돌아가게 됐다. 물론 그냥 가진 않았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럴 수는!”
사실 그녀는 일을 치고 난 이후 조용히 있었다. 이혼 신청이 기각 내지 반려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일이 생각과 달리 되어 가자 더 이상은 얌전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날뛰며 사람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마치 미친 것 같았다.
“나만 잘못하였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저이도 나를 내버려 두었다. 그것도 수십 년이나! 내가 엇나간 건 다 공작 탓이야. 부부 사이에 한쪽만 잘못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찌 나만 이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어째서!
그녀는 발악하며 사방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입지만 더 줄어들 뿐이었다. 이제 그녀를 보기 위해 오는 귀족들도 별로 없었다. 삼십 년간 쌓아 올린 명예와 입지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오열하며 어린아이처럼 울었으나, 그런 그녀를 위로하는 이는 없었다.
“…가느냐?”
“네, 가네요.”
렉시는 공작과 함께 테라스에 나와 길게 꼬리를 물고 사라지는 마차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공비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마차였다. 가지고 온 세간이 많았으므로 가져가는 것도 많다. 렉시는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행렬과 짐을 보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째, 이혼당하는 마당인데도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짐이 어마어마하군요.”
“올 때도 저만은 했지. 아무래도 황가와의 혼사였으니까.”
공작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옛날 혼수치곤 다들 반짝거리는 거 같은데요.”
렉시가 툭 내뱉자 공작이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아깝니?”
“아깝다기보단…. 어째 의기양양한 꼴을 보니 배알이 꼴려서요.”
공작은 잠시 렉시를 보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우아한 눈썹을 살짝 찌푸린 얼굴이 햇빛 아래서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렉시의 미모는 가끔 그를 낳은 부모조차 말을 잊게 할 때가 있었다. 부친이야 자주 봐서 면역이 된 모양이지만…. 그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픽 웃었다.
“어쨌거나 이혼당하고 가는 거니까 너무 탓하지는 말거라.”
“저 다 싸 들고 가는 것도 맘에 안 들어서 그렇지요.”
“저렇게 간다고 어디 마음이 편하겠느냐? 가는 것도 억울할 텐데 세간살이와 패물 좀 가져간다고 뭐라고 하면 편협하다는 말을 들을 거다.”
“흥, 자기가 잘못한 것인데도 말이지요?”
공작은 흐릿한 얼굴로 아들을 향해 웃었다. 잘 컸다 싶으면서도, 아직 이렇게 서투른 면이 남아 있는 것이 퍽 흐뭇하다. 물론 부모란 자식이 제대로 큰 모습을 보고 싶은 법이다. 허나 그는 어린 시절 억지로 렉시와 떨어져 살아왔다. 이런 그의 안에서 아직 렉시는 성인보단 어린아이 그대로였다. 완전한 성인다운 면모보다, 이렇게 조금씩 남아 있는 미숙함을 볼 때마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건 아직 그가 부모로서 가르칠 것이 있다는 말이니까.
“무릇 모든 일에 있어 인정은 있어야 하는 법이지. 아들아, 그래도 생각보다 여자가 빨리 갔다고 생각하지 않니?”
“황제께서 친히 마차까지 보내 주셨으니 그랬겠지요.”
“그래. 헌데 그건 알고 있느냐? 폐하께서는 마차를 보내 주셨지만 기한은 정해 주지 않았단 걸.”
렉시는 당황한 얼굴로 공작을 보았다.
“그 말은….”
“떠올려 보렴. 휘청거리던 저 여자가 어째 짐을 보고 좀 몸을 세우는 것 같지는 않더냐?”
“…그랬던가요?”
렉시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려고 했지만 곧 실패했다. 조금 허물어진 렉시의 얼굴을 보며 공작은 살짝 손가락을 까닥였다.
“저 재물이라도 쥐여 주지 않았다면 저 여자는 열흘이고 한 달이고 안 가고 버텼을 거다.”
“…….”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전적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그 며칠간 여자 때문에 고생을 단단히 한 렉시는 저 말이 거짓이란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렉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액땜이라고 생각하면 못 줄 것도 없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도 있으니… 먹고 떨어지라고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요.”
“쿨럭!”
공작은 풋 하고 웃음을 흘렸다. 어째 틀렸는데 묘하게 맞는 말 같기도 했으니까.
“저 여자는 저렇게 보냈는데, 백작과 버나드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사단은 아직 아버지의 영역이지 않습니까. 흔적은 잡히고 있나요?”
“아직 잡히지 않았다. 생각보다 잘 도망 다니더구나.”
“…뭐 의외롭진 않습니다. 둘 다 기사 수업도 받은 놈들이니 그렇게 잡히면 말이 안 되긴 하죠.”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이혼이 된 이상 둘 다 빨리 잡을 필요는 없기도 했다.
“일단 다른 영지에도 계속 수배 전단은 뿌리겠습니다. 이 정도로 안 잡힌다는 건 공작령은 벗어났다는 의미 같으니까요. 언젠가는 잡히겠지요.”
“…그래. 그리고… 너무 심하게 몰지는 말거라.”
공작은 씁쓸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전날, 아들의 실수를 안 전 기레스 백작이 아픈 몸을 이끌고 공작을 찾아왔다. 하나뿐인 아들이 잘못을 했으나 부디 자신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 달라. 무엇이건 하겠다. 제발 살려만 달라….
이렇게 통사정하는 전 백작을 상대한 터라 그는 몹시 심력을 소모한 터였다. 그도 부모라 애끓는 부정을 모르는 바도 아니어서 마음이 흔들렸다. 렉시도 어제 아버지가 누굴 만났는가 보고 받은 바였다. 렉시는 공작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결정하셨습니까?”
“…패트릭의 작위는 사촌에게 넘어갈 거다. 백작이 그렇게 하겠노라 맹세했지. 실제로 사촌을 양아들 삼았다는 문서를 가지고 왔어. 그리고 버나드는… 어차피 와 보았자 이제 자리가 없지 않겠느냐.”
이래저래 위협이 안 된다는 의미이니 아량을 베풀겠단 의미였다. 렉시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그렇게 정했다면 그로서도 할 말은 없었다. 렉시는 잠시 멀어지는 마차 꼬리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쨌거나 방금 전 부탁한다는 말로 기사단의 행동권까지 이양받았다. 그렇다면 가서 일을 수행해야지.
“알겠습니다. 최대한 다친 곳 없이 생포하라 이르겠습니다.”
“부탁한다.”
렉시는 씩 웃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바로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자신만만하게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생각보다 애를 잘 키웠단 말이야.”
공작은 지금쯤 잔뜩 토라져 쭈글대고 있을 베르크 남작을 떠올렸다. 공비가 마지막으로 가는 모습을 본다고 하자 입을 삐죽대며 사라진 남자는 객관적으론 참 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철없는 남자가 어찌저찌 애는 제대로 키운 건 참 가상한 면이 있었다.
“흠, 둘째도 잘 키워 줄까?”
그는 이제 조금씩 올라오는 배를 만지작거리며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슬슬 아들에게 전권을 넘겨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문이 닫히기 직전 본 장면을 되새기며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렉시를 낚아채 간 조카의 모습은 그에게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슬슬 어른으로서 교통정리를 좀 해 줘야 할 때였다.
“이젠 슬슬 결론을 내야겠어.”
나오자마자 자신을 낚아챈 남자는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속절없이 열린 입안으로 달아오른 혀가 얽혔다. 렉시는 깜짝 놀랐지만 그냥 순순히 로메인에게 몸을 맡겼다. 동시에 주변이 수선스러워지더니 인기척이 사라진다. 수행원들이 알아서 주변을 정리한 것이다.
내 수행원들이 참 일들은 잘해.
렉시는 속으로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뒤이어 뜨거운 혀가 내부를 샅샅이 훑으며 안으로 밀려온다. 살짝 살짝 건드리던 혀는 곧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숨이 가쁘게 헐떡였다. 입안을 가르고 들어온 것이 내부를 진탕하듯 휘젓고 있었다. 벌어진 입술에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몸이 밀려 등 뒤에 딱딱한 벽이 닿았다. 동시에 단단한 손아귀가 둔부를 잡고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시야가 같아지며 키스가 더욱 깊어졌다. 렉시는 몸이 반쯤 들린 채 로메인에게 입술을 빨렸다. 젖은 소리가 계속해서 귓전을 울리고, 세우기 힘들 정도로 허리가 흐물흐물해진다. 마지막엔 입술이고 혀고 다 남김없이 상대의 손안에 있었다. 키스가 멈춘 것은 그가 숨이 모자라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 되어서였다.
렉시는 몽롱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마주한 눈동자가 델 것처럼 뜨거웠다. 실로 열정적인 입맞춤이었지만, 남자의 열기는 여전해 보였다. 렉시는 얼굴을 붉히며 상대를 불렀다.
“로메인.”
탁해진 음성이 묘하게 관능적이다. 나른한 부름에 로메인의 파란 눈동자가 살짝 호선을 그리며 곱게 접혔다. 여운 때문에 붉어진 눈꼬리가 매혹적이었다. 왠지 모르게 배 속이 꽉 조이는 느낌에 렉시는 목이 말라 입술을 핥았다.
“이렇게…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렉시는 눈을 곱게 흘겼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보는 순간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은 미안하다면서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다못해 입꼬리까지 위로 살짝 올라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표리부동이 싫지는 않다는 게 참 문제였다.
“…이젠 진정이 좀 되구요?”
“―진정은… 조금 더 한다면 진정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더해도 됩니까?”
“아니요, 안 돼요.”
여기서 더하면 일도 치르게 생겼다. 딱 잘라 말하자 눈꼬리가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아쉬운 듯 부풀어 오른 입술을 애타게 바라보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대신 풀이 죽은 로메인의 눈에 살짝 키스하자 눈이 다시 반짝 사는 게 귀엽고 웃겼다. 렉시는 푸슬푸슬 올라오는 웃음기를 감추고 심각하게 물었다.
“헌데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연인 사이라고 아무거나 다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공작과 만나는 공적인 자리 아닌가. 비록 끝난 뒤이긴 하나, 공적인 자리에 갑자기 난입한 것이 그답지 않은 일이다. 무슨 급한 일이 있나? 헌데 대답은 의외로웠다.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저를요?”
렉시는 놀라 눈을 깜박였다. 나를? 우리 오늘 면담 예정이 있었나?
“공무는 아닙니다.”
“…그럼 왜?”
“이제 곧 점심시간 아닙니까.”
그리고 촉, 재빠르게 눈가에 키스하고 떨어진다. 그제서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은 렉시의 얼굴이 홍옥처럼 새빨개졌다. 이, 이것! 데이트 신청이구나!
“같이 밥을 먹자는 거죠?”
“안 됩니까?”
렉시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봤다. 이성과 감성이 치열하게 고뇌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요즘 그는 무척 바빴다. 얼마나 바쁘냐면 점심시간에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을 정도였다. 공작이 점점 몸이 무거워지자 그에게 할당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작위가 언제 넘어올지 모르는 지금,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고생을 덜 하지. 결국 이성이 감성을 억눌렀다. 렉시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로메인. 하지만 오늘 점심은….”
“압니다. 바쁘시지요. 허나 점심 한 끼 정도는 밖에서 먹어도 되지 않습니까.”
로메인은 시무룩한 얼굴로 렉시에게 거듭 청했다.
“제가 좋은 식당을 알아 놨습니다. 아마 당신 마음에도 들 겁니다.”
“으음….”
“어쨌거나 식사는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오고 가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을 겁니다.”
렉시의 망설임을 알았는지 애정 공세가 짙어졌다. 촉, 촉…. 얼굴 위로 거듭 내려오는 입맞춤은 어째 집요하기까지 했다.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계속될 것 같은 키스 세례에 렉시는 결국 와락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반칙이다. 이래서야 정말이지 이길 방도가 없지 않은가.
“알았어요. 알았어. 뭐 한 끼 정도는 밖에서 먹어도 되겠죠.”
“!”
로메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수행원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예정된 시간을 비우면서 가중되는 업무 부담은 수행인들의 몫. 허나 그들의 괴로움이야말로 그가 알 바는 아니다.
그는 얼른 렉시를 이끌고 밖으로 걸어갔다. 성큼성큼 걷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경쾌했다.
“그런데 식당은 언제 알아 놨어요? 당신도 바쁘잖아요.”
“저야 바쁠 게 뭐 있겠습니까?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닌걸요.”
“응? 정말요?”
“물론이지요. 당신에 비한다면 저는 정말이지 한가로운 축입니다.”
참으로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었다. 렉시는 듣다 말고 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가 알기로 로메인은 그보다 덜 바쁘긴 해도 아예 안 바쁘진 않은 상태다. 현재 조용한 플로랑 후작 때문이었다. 그녀가 요양을 하는 탓에 데퓨탄 후작의 일이 늘어났으니, 응당 그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게 당연하지 않은가.
아마 이건 자기 듣기 좋으라고 괜히 하는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렉시는 모른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차피 데이트란 게 다 그렇고 그렇다. 곧이곧대로 말하면 연애는 곧 끝나는 법. 자고로 적당한 호감과 안정적인 사랑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은 연애의 필수 양념인 것이다.
렉시는 로메인의 옆에 찰싹 붙었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더니 실로 놀라운 변모에 렉시조차 놀랄 지경이다. 연애를 위해 농땡이도 서슴지 않게 된 로메인이라니 남들이 들었으면 당신 꿈꾸냐 했을 것이다. 고지식한 남자가 한번 변하니 상전벽해는 아주 저리 가라다. 하지만 렉시는 그 변화가 싫지 않았다. 외려 그 변모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기쁜 렉시였다.
“오늘 메뉴가 궁금하네요. 힌트 줄 수 있어요?”
“그건 도착한 뒤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하지만 맛은 보증합니다. 공작령 내에서 가장 이름이 높은 곳이니까요.”
“오, 정말요?”
기대되네요! 렉시는 아하하 웃으며 로메인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가슴이 따스해진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볼이 발그레해졌다. 모든 것이 연애 박사 요수아의 말대로였다. 연애란 박력! 밀어서 안 되면 당기면 된다! 연애란 물꼬 트면 저 알아서 물길 잡고 흐르는 법이란 그의 코치는 진정이었던 것이다.
연애의 참맛을 맛보는 두 사람의 주변에서 꽃바람이 날린다. 렉시는 화사하게 웃으며 그와 함께 총총히 떠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둘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렉시와, 로메인을 뒤따라온 수행원들뿐….
그리하여 남은 그들은 서로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다들 얼굴이 말도 아니었다. 몇몇은 입술을 꼭 깨물고 손수건을 비틀었다.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욕설이 터져 나온 건 금방이었다.
“빌어먹을…!”
“사악한…!”
“요망한…!”
당연하겠지만, 이 모든 단어의 주체는 로메인이다. 이 자리엔 로메인의 수행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뭐라 하는 대신 자기들도 이 욕지거리에 끼어들었다. 빈 시간을 찾아내면 일이나 할 것이지 연애나 하는 요망한 상사 같으니. 늘어나는 야근에 일조하는 상사를 그들이 좋아할 리는 없었다.
“오늘도 또 야근이냐. 오늘도 또 야근이야…!”
“빌어먹을 데이트. 빌어먹을 연애!”
“누군 저들 때문에 집도 못 들어가는데…!”
동서고금 윗사람의 농땡이로 괴로운 것은 아래의 신하들인 법.
그들은 오늘도 이렇게 갖가지 술수로 연애하러 떠난 커플에게 참패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몸과 마음이 다 통한 뒤 한 쌍의 잉꼬로 거듭난 두 사람은 남들의 눈치 따윈 개나 주고 있었다. 어차피 연애하면 다들 싸우고 붙고를 반복한다. 초반에 두 사람이 만나지 않던 시간은 자연스레 사랑싸움의 일환으로 치환됐다. 두 사람이 헤어졌다 수군대던 사람들은 입을 닥친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투덜거리며 두 사람의 연애를 지켜보았다. 어찌나 별났는지 볼 맛은 있었다.
“참 별일 났네요 별일 났어. 자기들만 연애하나…?”
“사랑싸움 두 번 했다간 성이 아작 나겠어요.”
“좋을 때네요. 좋을 때야….”
때는 춘삼월, 싱숭생숭한 마음들이 터져 나올 계절.
기실 공작성은 공비와 공작이 사이가 좋지 않아 연애의 연 자도 발을 못 붙이는 분위기였다. 헌데 렉시와 로메인이 연애를 시작하고, 덕분에 공작성의 분위기가 춘풍에 봄눈 녹듯 사르륵 바뀌었다. 원래 옆에서 거창하게 연애하고 있으면 생각 없는 사람도 옆구리가 시리기 마련이다. 공작성도 딱 그 수순을 따라 분위기가 변했다.
기혼자는 샘이 나서 사이가 좋아졌고, 미혼자는 썰렁한 옆구리를 한탄하며 애인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이 봄이 지나고 나면 제법 많은 커플들이 성내에 생길 것이다. 어쩌면 새 생명 탄생도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고.
정말 본의 아니게 성내 결혼과 출산율에 일조하는 로메인과 렉시 되시겠다.
어쨌거나 이런 들뜬 분위기를 공작이 모를 리는 물론 없었다. 때문에 그는 매일 밤잠을 설치며 렉시의 미래를 고뇌했다. 부모로서의 걱정이었다.
저 둘을 어떻게 해야 할까.
‘로메인은 외골수 기질이 있어서 렉시와 결혼까지 하려 하겠지.’
아들은 렉시라도 같이 지낸 시간은 로메인이 월등하다. 때문에 그는 로메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 물어봐도 훤히 알았다.
‘빨리빨리 결혼하려고 몸이 벌겋게 달았을 거야.’
차라리 둘 다 연애만 한다고 하면 앞장서서 꽃은 뿌려 줄 수 있다. 허나 로메인의 기질을 알기에 그는 꽃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했다. 연애 허락이 나오기가 무섭게 약혼에서 혼인까지 고속으로 진행시킬 조카를 아는데 어찌 허락을 하겠는가.
어쨌거나 그도 부모였다. 간신히 함께하게 된 아들의 인륜지대사를 아무렇게나 결정하고 싶진 않았다.
그간 돌보지 못한 아들이다. 최대한 좋은 것만 주고 싶었다.
“그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나?”
베르크 남작은 열심히 배를 문지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렉시의 중재로 용서를 받은 그는 틈만 나면 이렇게 공작의 시중을 들었다. 지금도 태교 겸 뭉친 배를 마사지하는 중이었다가 갑자기 부른 말에 눈을 껌벅대고 있었다.
“저 말입니까?”
“그래, 어쨌거나 그대도 부친이잖나. 나만 고민해서 될 일도 아니고…. 그대의 생각도 들어 봐야지.”
공작은 그렇게 남작의 입술에 집중했다. 남작은 잠시 고민하다 조금 기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사실 저도 아비다운 일을 해 보고 싶다고 최근 계속해서 생각했었습니다. 조금 성급하단 말을 들을까 봐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만….”
“그랬나?”
무려 매일 생각했다는 소리에 공작은 감격했다. 대체 어떤 의견을 낼까? 부부로서 아이 미래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을 나누는 것 같아 왠지 가슴이 설렜다. 공작이 눈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남작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었다.
“여자애면 알렉산드라, 남자애면 레오날드.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까?”
“…뭐?”
공작의 얼굴이 서서히 썩어 갔다. 아 이게 아닌가? 베르크 남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맘에 안 듭니까? 너무 고전적이면 다른 이름도 좋지요 뭐.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 그러니까 뭐든 골라 보십시오.”
“…….”
그렇게 오랜 시간 같이 있었어도 공작은 아직 남작을 모른다. 태교와 배 마사지 하나에 꽂혀 있는 한, 그가 제대로 된 대화 상대가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아이고 이 화상.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욕을 한다. 베르크 남작은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둘째 말고, 렉시. 우리 첫째!”
결국 으르렁대는 소리로 공작이 말했다. 공작의 지칭에 남작이 눈을 끔벅거렸다.
“렉시는… 렉시요? 렉시는… 딱히 남이 손댈 데가 없을걸요. 워낙 똑똑해서 제 일은 잘 알아서 하던 애라.”
“누가 렉시가 문제가 있다던가. 하지만 로메인이 있다는 걸 그대도 알잖아!?”
“…아, 그거.”
난 또 뭐라고. 베르크 남작의 태도가 확연히 다르게 심드렁해졌다. 이미 렉시가 결혼을 하네 마네 하고 한번 속을 뒤집고 포기해서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멋모르는 공작은 순간 발끈했다. 아무리 다 큰 자식이라도 조금 너무하지 않나?
“그대, 조금 태도가 심드렁하지 않아?”
“음… 그렇게 보입니까?”
남작은 얼굴을 긁적였다.
“하지만 다 큰 자식 연애 가지고 이래저래 하는 건 좀 모양 빠지는 일 아닙니까.”
“자식의 미래를 고민하는 일에 모양이 빠지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공작이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남작의 태도는 여전히 그만저만했다.
“렉시 녀석은 걱정할 거 없습니다. 고작 연애 좀 한다고 어떻게 될 녀석은 아니고.”
“…그대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건가?”
노기등등한 공작을 바라보며 남작은 말을 줄였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뭐 더하고 덜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체 뭐가 문제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답을 찾았다.
아, 혹시 헤어질 거 같아서 그러나?
“마음의 상처가 걱정이라는 건가…. 뭐 연애라는 게 원래 좀 그렇죠. 하다가 트릿하면 헤어지기도 하는 게 연애니…. 물론 마음의 상처야 받을 겁니다. 하지만 부모가 세상 모든 풍파를 다 막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 정도는 겪어도 됩니다.”
“…그쪽이 아니야. 사귀는 게 겁나는 거지! 그리고 헤어지다니? 감히 어떻게 내 아들과 헤어질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야!?”
“…헤어지는 게 문젭니까? 아니면 사귀는 게 문제라는 겁니까?”
“…!”
생각지도 못하게 말이 말렸다. 공작은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생각해도 자기가 참 이율배반적인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남작은 끙 하고 머리를 긁적이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배우자의 안 좋은 습관이 또 나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가 늘 말하지만 당신은 생각이 많습니다.”
“…내가 우둔하다고?”
“설마요? 제 말은, 당신은 때론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한다는 거죠.”
그의 배우자는 완벽하고자 하는 의지가 타인보다 월등했다. 태어나자마자 타고난 용의 표식은 공작에게서 범인의 삶을 빼앗아 갔다. 공작가의 장자이자 유일무이한 후계자로 지목된 그는 끊임없이 주변의 시험을 받았다. 완벽한 공작이 되어라. 이건 그의 일생 내내 따라다닌 천형과도 같았다.
차라리 성격이라도 나빴으면 모른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성실하고 엄격했다. 그는 그 모든 요구를 어떻게든 해냈다. 때론 그를 위해 자신의 욕망마저 죽였다. 불행한 일이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통제하며 완벽을 추구해 왔지요. 기즈, 저는 당신의 삶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무얼 하건 그에 따랐고.”
사실 그런 그가 남작과 만난 것이 더 놀라운 일이다. 베르크 남작과 기즈 공작의 만남은 공작에게 있어 사고 같은 것이었다. 그는 설마 자신이 남자와 사랑에 빠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사생아란 건 그의 인생에 있어서도 안 되는 일. 허나, 놀랍게도 공작은 이 사랑에 휘말려 사생아를 낳았다.
도중에 돌아가긴 했으나, 하물며 키우기까지 했고.
“하지만 아무리 통제해도 인생이란 녀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입니다. 당신 뜻대로 인생이 흘러갈 거였으면 나 같은 인간을 만나지도 않았을 거고.”
“……그대.”
베르크 남작은 씩 웃으면서 공작의 발에 입 맞췄다. 최근 들어 나아진 입덧 때문에 뽀얗게 살이 올라온 발끝이 복숭아처럼 분홍색이다.
“나 때문에 당신은 완벽한 공작에서 좀 글러먹은 공작이 됐죠. 이 나이에 이혼하고, 사생아에… 임신에. 뭐 그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즈. 당신 혹시 지금 불행합니까?”
공작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 오만불손한 남자에게 당장이라도 그렇다, 네 이놈!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니.”
공작의 얼굴 끝에 걸린 붉은 기를 보며 남작은 눈을 접었다. 그리고 다시금 물었다.
“물론 생각만큼 완벽하지는 않지만…. 행복하지요?”
“…….”
공작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얼굴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베르크 남작은 조용히 일어나 공작의 이마에 키스했다.
“단순하게 생각하십쇼. 단순하게…. 둘이 연애 끝에 결혼하건, 연애 끝에 헤어지건, 결혼한 뒤 이혼하건…. 중요한 건 렉시가 로메인을 퍽 좋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쌍방이고요.”
“…하지만 걔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어.”
한참 뒤 공작이 꿍얼댔다. 그러나 남작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네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둘이 인연이라면 끝까지 가겠고, 아니라면 헤어지겠지요.”
“…하지만!”
“네, 네. 완벽한 일생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행복할 수는 있을 겁니다.”
“…….”
공작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공처럼 튀었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많고 많은 언어들이 가슴에서 소용돌이쳤다가 와해되길 반복했다.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행복할 수는 있다….
그는 오랫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얼마 뒤.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가신들과 혈맹들에게 잇따라 결혼 초대장이 발송됐다.
그들이 수령한 발신인 자리에 찍혀 있는 문양은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독수리와 장미.
프로하우스 공작가의 상징이었다.
******
결혼식이 열린 것은 그해 늦봄.
날씨가 무척 좋은 어느 날이었다.
사흘 전까지 내린 비로 깨끗해진 공기는 무척이나 청명했다. 이슬을 잔뜩 머금은 잔디와 풀들은 생생하게 빛이 나고, 살살 부는 바람결에 느껴지는 꽃내음은 화사하다. 전체적으로 들뜬 분위기는 투명하게 일렁거리며 주변을 물들인다. 어쩜 먼 미래에 다시 이날을 회고해 보라면 사람들은 무조건 날씨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로 날이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날, 화사하게 꾸며진 성은 마치 동화처럼 아름다웠다.
안 그래도 아름답고 화려한 프로하우스 성의 외관이다. 몰려든 인파들의 눈들이 다들 반짝반짝 빛을 내며 주변을 훑었다.
“굉장하네요.”
“마치 보석 같아요…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요!”
결혼식을 앞둔 성은 마치 커다란 선물 상자 같았다. 반짝이는 레이스와 비단으로 마무리된 거대한 화환들이 성곽과 성의 전면을 장식하고 화려한 색의 천들이 공중을 가른다. 흰 석영만 골라 깔아 놓은 돌길은 마치 진주알처럼 반짝거렸다. 맛 좋은 음식들이 성 밖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 끝도 없이 쌓였다. 공작성의 창고를 모두 털어 온 듯 음식들의 행렬은 한도 끝도 없었다.
“맙소사,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겠군!”
누군가 중얼거렸다. 실제로 공작은 그럴 작정으로 이 모든 것을 마련한 것임을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 외성 한쪽 편엔 평민들을 위한 공간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 결혼식이 끝나면 이쪽으로도 음식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돼지 구이, 새 구이, 각종 과일로 만든 파이, 맥주와 포도주, 여러 가지 물고기 찜, 구이, 흰 밀 빵들이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확실했다. 갖가지 설탕으로 만든 사탕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밖에선 이 대대적인 잔치를 만끽하기 위해 길게 인파가 늘어져 있었다.
“좋은 날이야. 멋진 날이야!”
“공작님 만세! 프로하우스 공작 전하 만수무강하소서!”
실로 어지간한 가을 축제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규모였다. 사람들은 잔뜩 들떠 이리저리 떠들어 댔다. 경사를 앞둔 성에서 내려 줄 선물들을 생각하는 이들의 얼굴에선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결혼 연회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이어진다. 일주일 동안 배불리 먹고 마시며 놀 걸 생각하니 절로 기쁜 그들이었다. 아직 식은 시작도 안 했건만 사람들은 미리부터 신부와 신랑을 축복하고 있었다.
모두가 행복해했다. 다들 얼굴에서 행복과 기쁨이 줄줄 흘러넘쳤다.
…여기 있는, 이 딱 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얼굴이 왜 그래요?”
렉시는 당혹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봤다. 시간 맞춰 그를 찾아온 로메인의 얼굴이 무척 참담한 터라 물음이 절로 나온다. 경사스러운 날이라 잔뜩 빼입은 옷은 번쩍이건만 얼굴은 왜 이리 칙칙한가? 무뚝뚝한 얼굴, 잔뜩 찌푸린 눈썹, 못마땅한 걸 감추지 않는 딱딱한 입매.
“로메인?”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챙길 건 챙기는 연인의 태도는 여전히 다정했다. 허나 반대로 렉시의 근심은 점점 깊어졌다.
자길 보고도 저렇게 심각한 얼굴이라니…!
렉시는 심각하게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아리땁다 칭송되는 미모가 가림막 하나 없이 햇빛 아래 영롱하게 반짝이는데 놀라지도 않다니!
렉시가 대중들 앞에서 외모를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확히는 스스로 결정한 게 이번이 처음이다. 힘없는 미인은 약탈의 대상이나, 그 반대는 칭송의 대상이 된다. 이제 바야흐로 권력자가 된 렉시는 이번을 통해 그걸 여과 없이 드러낼 작정이었다. 사전에 말을 하지 않았기에, 렉시는 로메인이 이걸 보고 무척이나 놀랄 줄 알았다.
이거 문제가 있어. 아주 큰 문제가.
“로메인, 대체 왜 그런 얼굴인가요? 설마 무슨 일 있어요?”
“…죄송합니다. 저도 이런 얼굴을 보이고 싶진 않았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저런단 말인가.
렉시는 눈을 깜박거리며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간신히 제 색을 찾았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서. 하지만….”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몇 번이고 노력해 보았다. 오늘 같은 날은 어떻게든 기쁜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맞으니까. 허나 아무리 해도 기분이 나쁜 게 수습이 되지 않는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묵직한 한탄이 새어 나왔다.
“어째서….”
울분이 솟구친 남자의 목소리가 거세게 솟았다. 음울하게 가라앉은 푸른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인다. 기사답게 두툼한 가슴이 위협적으로 부풀었다. 어깨에 매단 견장 아래 이어진 에샤르프가 그 통에 파르르 떨렸다.
로메인, 그는 결국 이를 갈면서 속상함을 외치고 말았다.
“어째서… 우리 둘이 아니라 저 두 분이 먼저 혼인하는 겁니까?!”
“…….”
렉시는 침묵했다.
아 그거….
사실, 오늘 공작의 혼인은 의도된 일은 아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 그는 이혼까지 한 마당에 이렇게 거창하게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볼 장 다 본 거, 굳이 결혼까지 해야 할까.”
이미 한 번의 결혼과 이혼을 끝마친 남자다. 그런 남자가 무슨 호강을 하자고 결혼식을 또 하고 싶었겠는가?
원래 결혼이란 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사람 부르고, 손님 치르고, 돈도 또 엄청나게 나간다. 이 시절의 결혼은 날 잡고 며칠간 연회까지 베풀기에 더 그랬다. 하물며 그는 지금 배까지 부른 상태 아닌가. 그런 남자에게 또 한 번의 결혼이란 귀찮기만 한 일일 뿐.
그래, 이대로 사는 거야.
어차피 배우자가 베르크 남작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같이 사는데 형식이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그는 그냥 이대로 가기로 결심했다. 남작이 무심코 한 말에, 그의 귀가 휙 돌아가기 전까지는.
“흠, 그럼 공작령은 사생아가 후계자가 되는 거군요.”
사생아? 공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 애가 왜 사생아인가? 공비도 없고, 이제 그댄 내 유일한 배우자야. 허면 응당 적자여야 맞지 않나?”
“당신과 제가 배우자가 아니란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서류상 혼인을 안 했는데 렉시가 어떻게 적자가 됩니까? 제가 아무리 행정을 몰라도 그 정도는 압니다.”
“……!”
명쾌한 논리였다. 혼인하지 않은 사이의 자식은 적자가 아니다. 그리고 공작은 그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맙소사. 그는 기분이 단박에 나빠졌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내 자식이 …사생아라고?’
공작가의 후계자가 사생아가 되는 것은 사실 그리 큰 문젠 아니다. 어쨌거나 피가 통하는 자라면 상관없는 것이 이 자리니까.
하지만 자신의 자식들이 여전히 사생아란 오명을 뒤집어쓰는 건 아주 큰 문제였다. 이혼도 한 마당에 사생아라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들이 왜 그런 욕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남작은 몰랐으나 그는 이 말로 공작의 역린을 건드렸다. 공작은 두 눈을 번뜩이며 이를 드러냈다.
“혼인하겠다.”
“예?”
“그대, 그대와 혼인하겠다. 사생아? 아니, 그 누구도 내 자식을 사생아라고 불러선 안 돼! 그 누구도! 그대조차!”
“아니 갑자기 무슨…?”
“그대도 당장 혼인을 준비해. 황성에 파발을 보내! 허가장을 받아야지. 그리고 도착하는 즉시 제일 빠른 날을 잡아 해치우겠다. 알겠어?”
“아니, 아니 잠깐만…! 그럼 저야 좋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대가 내 어리석음을 이렇게 일깨워 주었어. 고맙다. 그래, 이대로는 후계자 작업도 하면 안 되겠지. 차라리 잘되었어. 모두 대신 결혼식 준비를 먼저 하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결정이었지만 어쨌거나 공작의 명.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판단할 새도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공작이 엄청나게 채근을 했기에 일은 순풍에 돛 단 듯 쑥쑥 나갔다. 심지어 나오기 오래 걸린다는 황도의 결혼 허가장도 미친 듯이 빨리 나왔다. 생전 처음으로 공작이 뇌물을 가져다 바치자 놀란 황제가 보자마자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허가장이 나오자 남은 것은 그야말로 식뿐.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게 제일 오래 걸리는 것이었지만….
모두 알다시피 시간과 인력은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법이다. 제국에서 제일 재력 넘치는 공작께서 이걸 모를 리 없었고, 그는 아낌없이 돈을 풀어 시간과 인력을 샀다.
그리하여 이 봄이 다 가기 전, 이렇게 위엄과 화려함이 넘치는 결혼식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이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렉시는 그래서 별 화가 안 났다. 자기 앞에 매달린 글자 떼 주기 위해 결혼한다는데 싫다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로메인도 이걸 알아서 기분이 안 나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기분이 나쁜 건 참으로 별개인 모양이다. 설마 그걸 아직까지 한탄스러워하고 있었다니….
렉시는 살살 로메인의 기분을 달래 주었다.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빴어요? 하지만 모든 게 절 위한 일이라니 로메인이 조금 이해해 줘요.”
“…예. 압니다. 이해합니다. 허나 속이 상하는 건 사람의 인력으로 어찌 되지 않더군요…. 게다가 이렇게 되면 우리 결혼은 아무리 빨라도 내년입니다.”
그렇다. 사실 그가 제일 환장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었다.
아무리 공작가라도 한 해 혼인을 두 번이나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이건 오는 사람들 문제였다. 아무리 하객들이 돈 많은 귀족들이라도 한해 혼사를 두 번이나 치르는 걸 좋아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두 분은 절 말려 죽이려고 하나 봅니다….”
초대장을 받기 전만 해도 그는 자신과 렉시가 곧 결혼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기대가 과하면 실망도 큰 법. 잔뜩 김칫국 마시고 있었던 자의 절망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렉시는 피식 웃었다.
“로메인, 좋게 생각하세요. 저도 사실 올해 결혼하긴 조금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걸요.”
“?!”
뭐? 놀라 고개를 번쩍 드는 로메인의 시선이 렉시와 마주쳤다. 렉시는 눈을 곱게 접으며 로메인의 어깨에 안기듯 손을 걸쳤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이르다니요?”
“안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어차피 시작한 연애, 해 볼 건 다 해 보자는 거죠.”
“무얼 …말입니까?”
“연애, 약혼, 혼인. 보통은 다들 이러잖아요?”
“하지만 저희 약혼식은 이미 하지 않았습니까?”
“에이, 도중에 제대로 마무리 안 됐잖아요. 그건 무효죠.”
게다가 그건 가짜 약혼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급하게 하느라 엉망이었고, 중간에 생긴 사고로 존재감마저 희미하다. 렉시는 그딴 걸 약혼식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생에 한 번뿐인 약혼식을 그따위로 끝내다니…?
“그런 엉망진창 약혼식은 없는 셈으로 칠 거예요. 그냥 이렇게 된 거, 둘 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이거저거 해 봐요.”
렉시는 잔잔하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오랫동안 맘속에 담아 왔던 리스트를 드디어 실행해 볼 때가 왔다.
“저는 당신이랑 같이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어요, 로메인.”
렉시는 환하게 웃었다.
모든 것을 그와 다 할 것이다. 여행도, 연애도, 살아가면서 있을 모든 이벤트도 다 빼먹지 않고 다 하고 살 거다. 약혼 전 기념일 챙기는 연애도 해 볼 거고, 그 끝에 약혼하고, 으리뻑적지근한 청혼도 해 볼 것이다.
“전 당신과 살아가면서 해 보고 싶은 게 참 많아요.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빼먹고 싶지 않구요. 제 생각하는 모든 건 오로지 당신하고만 할 수 있는 건데… 그중 하날 이렇게 넘기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요?”
“…….”
로메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음울했던 눈동자가 짙푸른 빛을 안고 제 색으로 밝게 빛난다. 조가비처럼 다물렸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것입니까?”
“천천히, 다 해 보는 거예요. 모두 다.”
“……저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로메인은 잠시 홀린 것처럼 렉시의 뒷말을 중얼거렸다. 먹구름이 낀 것 같은 얼굴이 점차 개어 간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귀 끝이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싫어요?”
“…아니요. 좋습니다.”
로메인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렉시의 손에 깍지를 꼈다. 맞닿은 손가락이 이상하게 휑한 것 같아 생각해 보니, 이런. 아직 이 손에 반지조차 끼워 주지 않았구나.
깨달은 사실에 조금 부끄러워진 그는 얼굴을 붉혔다. 렉시의 말을 듣기 전까진 조급해 죽을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그가 너무 성급했다.
천천히, 조금씩, 모두 다.
렉시가 살짝 윙크했다. 슬슬 움직일 시간이었다.
“자, 그럼 멋지고 훌륭하신 로메인 경. 제가 곧 있을 공작 전하의 결혼식에 가야 하는데… 혹시 시간이 된다면 절 에스코트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건 데이트 신청입니까?”
“뭐 겸사겸사? 식이 끝나면 둘이 어디 놀러라도 가요. 그럼 그게 데이트죠 뭐.”
그는 느슨하게 풀린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 끝내는 작게 미소했다. 장난스레 웃고 있는 눈앞의 사람이 정말이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는 마주 잡은 손끝에 살며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맞닿은 부분에서 시작된 짜릿한 감각이 가슴을 지나, 끝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암울했던 마음이 언제냐는 듯 세상 모든 것이 연하고 여린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예. 당신과 함께하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열린 문 밖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는 그 화려한 빛의 커튼을 바라보며 렉시와 마주했다. 후욱,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그럼…. 자, 이제 가 볼까요?”
댕댕, 식이 시작되기 직전임을 알려 주는 종이 울린다. 타종이 가리키는 시간은 하늘에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을 정오 십 분 전. 멀리서 환호 소리가 들린다. 속삭이듯 들려오는 소음이 음악처럼 아름답다.
두 사람의 마주 잡은 손이 꾹, 굳게 잡힌다.
그리고 천천히.
둘은 빛 아래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