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2. 염병천병 (13/20)

12. 염병천병

이시미어 2세 17년, 신년에 벌어진 일이다.

프로하우스 공작령에 지진이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피해는 매우 컸다. 이 지진으로 인해 공작의 성이 무너지고, 성의 주변에 위치한 귀족들의 저택들이 상당수 큰 피해를 입었다.

지진의 원인은 지반 침하 때문이었다.

프로하우스 공작의 성 아래 생긴 거대 공동 때문에, 성을 떠받치고 있던 지반이 무게를 못 이기고 꺼지면서 유사 지진을 발생시켰던 것이다. 어째서 성 아래 저런 거대한 공동이 생겨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으며, 그저 이 성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이후 파견된 지질학자들에 의해 이 추측은 사실로 밝혀진다. 침하된 지반이 스스로 메워지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이는 결국 예정된 사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진이 벌어진 이날 성에선 때마침 공작의 조카가 약혼식을 치르고 있었다. 유수의 귀족들이 이 약혼식에 참석했기에, 이날 하마터면 제국의 중남부를 담당하는 푸른 피들이 집단으로 떼죽음을 당할 뻔했다.

만일 당시 와병 중이던 공작이 귀족들을 모두 대피시키는 데 성공하지 않았다면, 이후 제국 중남부 지역의 정세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당시 프로하우스 공작은 제 9대 공작 기즈 드 프로하우스로, 향후 후세인들에게 행정공이란 이명으로 불리는 행정 정치의 귀재다. 급작스러운 재난 앞에서도 그는 자신의 실력을 여과 없이 발휘했다. 무척이나 명민한 정신으로, 매우 발 빠르게 움직여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일단 사람들을 구한 그는 오랫동안 닫은 공작성의 비밀 창고를 열어 피해를 복구했다. 여기엔 그가 오랫동안 모으고 있었던 마도구의 힘이 컸다. 이재민들의 집을 복구, 거의 반파된 성을 재축하였으며, 무너진 구덩이를 메워 지반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일설엔 또 다른 오래된 왕국의 후손이 그 일을 도왔다고 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이 사건 이후 프로하우스령과 그 본성 부근에 지어지는 건물들은 모두 내진 설계를 거치게 되었고, 고층 건물은 반드시 지반 조사를 마친 뒤 짓게끔 법령이 새로 제정되었다. 다닥다닥 붙여 짓던 건물들 사이는 이런 대형 악재시에 큰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다 하여 건축물간 이격 거리 기준이 강화된다. 또한 내부 구조와, 내장재, 장식물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무겁지만 묵직하고 화려한 석조 대신 간편하고 실용적인 양식이 대유행하였으며, 이는 대륙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프로하우스는 황도를 제외한다면 대륙에서 제일 부유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행이 더 빠르게 퍼져 나갔다는 시각도 있다.

또한….

(중략)

…이처럼 당시 지진은 향후 프로하우스령과 대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허나 재미있게도 이 일들은 당시 큰 주목을 받진 못했다.

이것은 아마 지진을 수습한 뒤, 프로하우스 공작이 터트린 후계자 문제 때문일 것이다.

당시 프로하우스 공작은 후계자가 없었다.

그때만 해도 공작은 퍽 강건하고 젊은 편에 속했다. 때문에 그의 행위는 권력을 양분하는 것을 경계한 행동이라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는 곧 후계자를 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나이가 들면서 슬슬 병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 후계자가 누가 될지 골몰했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다음 후계자가 될 것이라 생각한 후보자는 총 둘이었다. 하나는 공작의 아들 버나드 드 프로하우스였고, 다른 하나는 조카인 로메인 드 데퓨탄이었다.

후손이 귀해진 공작가에선 그 둘 말곤 다른 마땅한 자가 없었던 탓에 다들 이 둘 중 하나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작의 와병은 길었고,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이 후계자를 정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은 곧 들어맞았다.

공작가를 뒤흔든 지진 수습 뒤, 공작은 곧바로 자신의 후계자를 정했던 것이다.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로.

이게 바로, 대륙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 공작의 첫 등장 순간이다.

******

공작의 외침으로 용은 사라졌다.

정확히는 도로 잠들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들은 뒤, 마치 거짓말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땅 밑 공동으로 몸을 눕혔다.

그리고, 놀랍게도 모든 것이 뒤로 ‘감겼다’.

산산이 조각난 것 같았던 성, 유리창, 바닥까지 맨 처음 그대로 복구되었다. 용이 누운 땅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용의 얼굴이 존재했는데 그 위로 흙과 돌이 덮이더니 사라졌다. 마치 시간이 뒤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맙소사….”

무너진 석재, 깨어진 창문, 조각나 부서진 대리석 바닥, 용이 뛰쳐나오려고 했던 대지의 울음이 뒤로 감기면서 처음처럼 되돌아가는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고 벌어지는 일들을 응시했다. 본 사람이 없다면 믿지 않을 정도로 신비로운 광경이다. 방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이 마치 꿈처럼 아뜩했다.

“세상에….”

렉시는 로메인의 품에 안긴 채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라도 이 정도의 대규모 마법은 처음 보는 것이다. 이것은 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거, 거짓말…!”

귀족들은 다들 얼떨떨해하다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건물은 복구되었지만 먼지들은 그대로인지 앉은 자리에서 먼지가 풀썩인다. 그들은 허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갖은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한 귀족들의 몰골은 대단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게 딱 거지꼴이다. 커다란 한숨이 터짐과 동시에, 모두 저마다 이말 저말을 쏟아 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가…!”

“꿈이야… 이건 꿈이야…!”

“아이고 어머니…!”

그들은 의미 모를 말을 내뱉으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혹자는 훌쩍거리며 울기도 했다. 렉시는 왠지 모르게 그들과 진한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다. 그도 왠지 모르게 조금 울고 싶었던 것이다.

“잘… 된 거죠?”

얼떨떨한 물음에 로메인이 잠시 침묵했다. 잘된 건가?

“네. 일단 그런 것 같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가네요. ―이 모든 것이.”

렉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한꺼번에 많은 일이 몰아쳤다. 약혼식, 반역, 용, 그리고 공작…. 로메인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렉시는 그런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다 품에 폭 안겼다. 모든 것이 어지럽고 몸은 너무 피곤하다. 그러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이 상황 속에서도 그가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건 옆에 이 사람이 있어서였다. 렉시는 작게 웃으며 로메인에게 수줍게 웃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예뻤다.

“그래도… 경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저도.”

로메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작게 속삭였다. 렉시를 보는 푸른 눈이 곱게 휘고 있었다.

“…당신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상황은 어쨌거나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일의 시작이고 자시고 사람들은 지금 몹시 쉬고 싶었다. 너도나도 휴식이 절실했던 것이다. 다들 몸은 여기에 있었지만 마음은 다들 집에 가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짐 싸 들고 집 가서 잠이라도 잤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이 그런 그들을 잡아 세웠다.

“조금 힘들겠지만 다들 조금 기다려 주게.”

“전하…?”

왜요?

아마 거의 동시에 사람들이 떠올린 질문이었을 것이다.

왜요? 어째서요? 왜 가는 걸 막아요?

하지만 누구도 싫다고 말은 못하는 것은 다들 눈치라는 것은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정신이 없어도 방금 나타났던 용은 다들 봤다. 그 용이 당장 누구 덕분에 사라진 것인지도 다 목격했고….

즉, 이 상황에선 설령 황제라도 싫다고 말을 못할 거란 이야기다.

공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가겠다면 막진 않겠네. 모두 혼란스럽겠지. 몸이 아프고 마음이 어지럽기도 할 거고. 내가 그걸 모르겠는가? 하지만 지금 말해 두겠네. 나는 이 자리 외에 다시는 이 일의 전말을 밝히지 않을 셈이야.”

“옛?!”

“정확히는 여기 이 자리에서만 알려 줄 거네. 그리고 이후론 함구령을 내릴 것이야. 즉, 가도 상관은 없으나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일의 이면을 알게 된다는 말이 되겠군. 그래도 좋다면 가게. 내 막지는 않겠어.”

공작의 으름장은 무척이나 불합리했다. 이것은 사람들의 발도 막았지만, 달리 말하자면 알려지면 다 니들 탓이란 이중 굴레였다.

‘이런 사기꾼 같은!’

사람들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공작 본인이 그런다는데….

게다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자리에선 황제조차 아무 말 못 한다. 자칫하다 공작이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그 뒷일은 그야말로 신만이 아실 일 아닌가?

결국 다들 침묵하며 침을 꼴딱꼴딱 삼켰다. 누구도 일어나서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슬슬 눈치를 보다가 입술을 옴짝거렸다. 이왕 일이 이리된 것, 잔뜩 쌓인 궁금증이라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이 모든 일의 전말, 공작의 부재, 공비의 행동, 그리고 플로랑 후작의…!

“앗! 그, 그러고 보니 플로랑 후작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전하가 없는 틈을 타 전하의 모습을 훔쳤습니다. 실로 감쪽같아 누구도 몰랐지요. 전하. 그녀의 반역 행위는 어찌하실 겁니까?”

“정말로 전하께서 명령하신 일입니까?”

공작은 질문을 들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랑 후작 말인가. 그래, 내가 그녀에게 내 대리를 부탁했다네. 그에겐 미안한 마음뿐이야. 생각보다 외유가 길어져서 퍽 고생했을 테니까. 플로랑 후작은 지금 어디 있나?”

공작의 물음에 누군가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전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타난 누군가는 큰 검을 뒤로 찬 기사였다. 공작과 달리 아직 로브를 벗지 않았지만 공작은 그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얼굴로 상대를 불렀다.

“―시라노 경.”

“시종장이 그녀를 데리고 있더군요. 건네주려 하지 않기에 함께 끌고 왔습니다.”

그는 한 손으론 후작을 안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쇠사슬을 든 채 공작에게 다가왔다. 쇠사슬 끝엔 사람 둘이 칡처럼 칭칭 얽어져 있었다. 하나는 시종장, 다른 하나는 공비였다. 둘은 끌려오는 내내 시라노 경을 향해 욕설을 했다.

“놔, 놔라! 이 무엄한 놈!”

“놓으시오 시라노 경! 아무리 당신이라도 날 이렇게 할 권리는 없소!”

그 마당에 용케 기절을 안 했는지 둘 다 쌩쌩했다. 시종장과 공비가 데려온 기사단들은 그런 그들을 보면서도 아무 손을 대지 못했다. 이건 푸르르거리며 그들을 위협하는 유니콘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지만, 기실 공작이 돌아왔기에 움직일 근거를 잃었던 탓이 컸다.

공작은 질질 끌려오는 두 사람을 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복잡한 그의 얼굴은 가까이 온 후작의 모습을 보자마자 달라졌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그 사람 손가락이 왜 저러나…?!”

“후작이 반역을 한 것이라 생각한 시종장이 잘랐다고 합니다.”

그 짧은 사이 놀라운 속도로 정보를 취합한 시라노가 공작에게 보고했다. 공작은 경악을 금치 못한 채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 하고 이내 한숨을 토해 냈다.

“…또, 그가?”

시라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복잡한 얼굴로 시종장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일단 그녀는… 그래, 렉시. 네가 맡아 다오.”

“…? 알겠…습니다?”

렉시는 얼떨결에 다가가 후작을 인계받았다. 공작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하는 의문이 스쳤지만 일단 그녀를 받는 게 급했다. 그는 얼른 그녀를 자리에 눕히고 상처를 감싸 맸다. 후작이 안전히 눕는 걸 보던 공작은 한숨을 푹 쉰 뒤, 곧 시종장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차가운 힐난이 터져 나왔다.

“시종장. 이것이 무슨 짓인가?”

“무얼 말입니까.”

“몰라서 묻는가? 일단 저 손가락부터! 자네 어떻게 후작의 손가락을 자를 수가 있나!? 플로랑 후작가가 무섭지도 않았나?”

“―저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전하, 저는 억울합니다!”

시종장은 두 눈을 파르라니 뜨며 공작을 향해 읍소했다. 공작은 그저 기가 막혔다.

“전 그녀가 전하를 시해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공비 전하와 함께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감히 반역을 기도한 자를 어찌 그냥 둔단 말입니까?”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나. 그리고 공비, 공비라고?!”

공작은 헛숨을 들이켰다. 시퍼렇게 이글대는 시종장과 눈을 마주하니 오래된 상처가 다시 도지는 것 같았다. 공작의 우미한 얼굴 위로 짙은 우울이 스쳐 지나갔다. 시종장은 그런 공작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재차 외쳤다.

“저 또한 피해자입니다 전하. 전하야말로 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 어떻게 후작에게 대리를 맡기시고 공작령을 비우실 수가 있습니까! 제게는 왜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오선 이 공작령을 다스리셔야 하는 분입니다. 전하께서 사라지시면 공작령은 어떻게 된단 말입니까? 전하의 어깨에 공작령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걸 모르시지 않잖습니까. 헌데 어떻게 이렇게 몰래…!!”

“자네는!!”

공작이 버럭 소리쳤다. 버럭 소리치는 공작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자네는, 지금 그게 중요한 건가. 내가 왜 그랬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전하, 저는 전하를 걱정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왜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전하는 지금 공작으로서 하셔서는 아니 되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 무엇도 전하의 안위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제가 늘 전하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하께오서 공작령입니다. 그 자체입니다! 어째서 이 노구의 말씀은 늘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래. 자네는 늘 그랬지. 내가 괜한 말을 했어….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이래서 그랬네, 이래서! 내가 그래서 자네에게 아무 말 하지 않은 거야.”

공작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용과 맞닥뜨리고도 생생하던 그 얼굴 위로 이상하게 짙은 피로감이 엿보인다. 그는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이마를 짚은 채 하늘을 보다 고개를 바로 했다. 그의 다음 시선은 시종장이 아닌 공비에게로 향했다.

“공비. 나는 선황과 한 약조를 잊지 않고 계속하여 지켰다. 그대도 그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헌데 어째서 시종장과 손을 잡고 반역을 꾀했나?”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허나 전하, 저는 진실로 억울합니다. 저는 단지 저 시종장의 혓바닥에 놀아났을 뿐이니까요.”

옷이 먼지로 뒤덮이고 새빨간 머리 또한 빛을 잃었지만 공비는 당당했다.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공작을 응시했다. 실로 떳떳한 자태였지만, 그 속내를 아는 사람으로선 가증스러울 뿐이다. 공작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 다시 물었다.

“그런가? 허면 다른 걸 묻지. 이 인장은 어찌 된 건가.”

“…무슨 말입니까?”

“내가 자리를 비우고 늦게 왔다고 모른다 생각지 말라. 공비, 나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 분명 자네 손 위에서 빛나는 이 인장을 보았어. 이건 어떻게 손에 넣었나?”

“그야 물론 전하께오서 주신 것 아닙니까?”

공비는 시치미를 뗐다.

“내가?”

“허면 설마 제가 이걸 훔쳤기라도 했겠습니까? 제가?”

공비는 두 눈을 똑바로 뜨며 공작과 시선을 마주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공작은 기가 질렸다.

“제 처소에 이것이 있었답니다. 저야 당연히 전하께오서 제게 이걸 주신 것으로 알았지요.”

“내가 자네의 처소에 인장을 가져다 놓았다? 내가 왜?”

“제가 전하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허나 만일 이것이 장물이라면 제가 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 인장을 내보였겠습니까? 부디 살펴 생각해 주시지요 전하.”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다. 어찌 저리 철면피란 말인가? 하고픈 말이 너무 많다 보니 말이 안 나온다는 게 딱 이 짝 아닌가.

“공비. 우리는 다정한 부부는 아니었다. 허나 나는 이제껏 그대를 대함에 있어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 대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 자리에서 죄를 인정하고 물러선다면 이후 일어날 일들은 불문에 부치겠다. 어떤가?”

“죄라니요. 제게 무슨 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단지 저 시종장의 혓바닥에 놀아났을 뿐이고, 인장은 제 처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이런 제게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끝까지 이렇게 나오겠다는 것인가?!”

공작의 얼굴에 결국 붉은 기운이 서렸다.

“자네는 그렇다 치지. 그 고집을 내 모르는 바도 아니니. 허나 자식은 생각해야지 않나. 자네는 버나드의 미래가 걱정되지도 않는단 말인가?”

“하! 버나드의 미래가 어두운 건 제가 아니라 전하 때문입니다! 전하께오서 버나드를 후계자로 만들지 않은 것이 모든 일의 시발점 아닙니까?!”

공비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공작을 노려봤다. 설마하니 공작이 버나드를 건드릴 줄은 몰랐다는 투였다.

“어디서 자식을 운운하십니까. 단 한 번도 그 애에게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된 적도 없으시면서!”

“…….”

공작은 결국 단념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더 이상은 그에게도 무리였다.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상대가 받아 주지 않는대서야 무슨 소용인가? 그는 멀찍이 서 있던 시라노 경을 향해 손짓하며 공비에게 고했다.

“…좋아. 정녕 그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알겠네. 향후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제 다 자네 탓이네.”

“제 탓이요? 또 무슨 소리를 하시려고…!”

공비가 발칵 일어서려 하자 시라노 경이 그런 공비를 다시 앉혔다. 그는 공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아까 분명 이곳에 있던 버나드를 보았다. 지금 버나드는 어디 있는가.”

“그게, 도망쳤습니다.”

“? 도망쳤다고?!”

공작이 눈썹을 찌푸리며 되묻자 시라노 경이 고개를 저었다.

“…네, 정말입니다. 모두 복구가 되자 제일 먼저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더군요. 그 애송이 백작과 함께요.”

아마 용이 무서웠나 봅니다. 시라노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공작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가 그걸 그냥 두었다 이 말인가?”

“보시다시피, 이 둘을 잡으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저라도 몸이 두 개는 아니어서요. 노는 손이 없었지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쇠사슬을 짤랑짤랑 흔들었다. 공작은 그런 시라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한숨을 팍 쉬었다.

“―좋아. 자네가 그렇다면…. 허면 이 일은 일단 기사단에게 넘기지. 내 그들에게 추포령을 내리겠다.”

추포령? 가만히 듣고 있던 공비가 펄쩍 뛰었다.

“잠깐요 전하. 추포라니요?! 그 애는 단지 용이 무서워 도망친 것뿐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공비는 조용히 하라! 시라노. 내가 여기서 공비의 말을 더 들어야 하나?”

턱!

남자는 재빨리 공비의 뒷머리를 손날로 쳤다. 기사의 기술이 섞인 손날치기에 공비는 악 소리도 못 하고 기절했다. 허, 허헉!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이 커다래졌다.

“저, 전하!”

“어떻게 공비 전하를…? 이번 일은 황가에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황가가 무섭지 않은가? 아무리 현 황제와 공비 사이가 데면데면하더라도 일단은 피를 나눈 친척. 이 일이 알려지면 공작 역시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작은 태연했다.

“그녀의 죄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 건은 이후로 미루지. 급한 건 다른 것이니.”

슬슬 이제 본론으로 넘어갈 때였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몇 달 전 나는 후작에게 내 대리를 맡기고 영지를 떠나 있었다. 아주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지. 본래는 길어 봐야 두서너 달 정도 걸릴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외유를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간에 일이 꼬이는 바람에 생각보다 외유가 길어졌지…. 후작에겐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퍽 고생했을 거야.”

퍽 고생이 아니라 아주 개고생을 했다. 후작이 지금 정신이 있다면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할 정도였을 것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지금 기절 중이다. 공작은 플로랑 후작,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내가 이곳을 떠났던 이유는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송구한 말씀이나 전하. 이미 전하께는 두 명의 후보가 있지 않았습니까?”

누군가가 질문했다. 공작이 픽 웃었다.

“버나드와 로메인 말인가? 그래, 분명 자네들은 그 둘을 밀었지. 버나드는 그렇다 치더라도 로메인은… 그래, 본인이 하겠다고 한다면 내 분명 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로메인은 내 권유를 거절했지. 자네들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 친애하는 조카는 제가 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성격이야. 하늘이 무너져도 뒤도 안 돌아보는 고집불통이지. 어때, 내 말이 맞나 데퓨탄 후작?”

갑자기 이름을 불린 데퓨탄 후작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저 녀석은 자기가 정한 일은 끝까지 하지만, 문제는 반대도 똑같다는 겁니다. 약간 외골수적인 기질이 있지요…. 제 자식이지만, 그렇습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한들 자식은 자식이다. 부모가 제 자식 성향을 모를 리 없었다. 공작은 후작의 대답에 만족한 듯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로메인을 포기했으니 그럼 응당 버나드를 후계자로 밀어야 할 상황이겠지. 허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네. 왜냐하면 버나드는… 내 아들이 아니었으니까.”

뭐라고?!

사람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부는 귀조차 의심했다. 지금 공작이 뭐라고 하는 것인가? ―버나드 공자가, 공작의 자식이 아니라고?!

“전하! 그게 대체 무슨 망극한 말씀입니까?”

“어떻게 버나드 공자가 전하의 친자가 아닐 수가 있습니까. 공비 전하는 전하와 동침 후 수태하여 버나드 공자를 낳지 않았습니까?”

터져 나오는 말들이 숫제 절규 같다.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침중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내가 공비와 혼인한 건 전 황제 폐하의 뜻이었네. 허나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황가가 얼마나 이 공작령을 탐내는지 말이야. 혼인하러 온 공비는 자네들도 알다시피 야망이 강했고, 황제는 야욕을 숨길 생각을 하질 않았네. 허나 이 혼인을 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지. ―나는 공비와 동침하지 않았네.”

“?!”

동침을 하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깜찍하게도 공비는 아예 임신을 한 채 시집을 왔더군. 선황제의 생각인지 그녀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퍽 용의주도한 행동이지. 참고로 공비도 이 사실을 모른다네. 내가 속였으니까. 아마 그녀도 내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예상치 못했을 거네. 몇 달 뒤, 그녀는 내게 수태했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어.”

“어… 어째서입니까. 그때라도 말씀을 하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 물었다. 공작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땐 선황제께서 살아 계셨지 않은가? 선황제 폐하는 굉장히 용의주도하고 무서운 사람이야. 당시 나는 젊었고, 그런 폐하를 상대할 방도가 없었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시일을 두고 볼 셈이었지.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그때 그녀를 내보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던 거야. 그런데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서야, 나는 이 내 생각이 무척 얕았다는 걸 깨달아야 했지. 폐하가 내게 무얼 내린 줄 아나?”

공작은 쓴 약을 잔뜩 먹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폐하께서, 내게 몰래 약을 먹였다. 남자의 씨가 마르는 약을….”

“!!!!”

사람들은 경악했다.

“효능 자체는 그냥 원기를 충전하는 약이 맞았네. 심지어 먹으면 무척 달았지. 허나, 그것을 장복하자 나는 내 남성적인 기능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말았어. 이 얼마나 간악한 뱀의 지혜란 말인가? 그는 그렇게 내 가문을 삼킬 생각을 했던 것이야. 나는 그때 깨달았네. 공비의 아이가 내 자식이 아니란 걸 아는 척하면… 어쩌면, 나는 암살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말이야.”

사람들은 전 황제의 끔찍한 행각에 치를 떨었다. 남자의 씨를 말리는 약이라니…! 악마도 그것보다는 자비로울 것이다. 듣다 못한 로메인이 가슴을 치며 공작에게 고했다.

“그 약을 아니 드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그걸 계속 드신 겁니까?”

“로메인. 어쨌거나 나는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바 있다. 폐하께오서 황명으로 내리는 것을 신하인 내가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느냐?”

로메인이 조용해졌다. 공작은 하, 숨을 내쉬었다. 사실 염병천병할 일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으니까.

“결국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버나드의 일은 일단 먼 훗날로 미루기로 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선황제의 악행을 계속해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 지금이야 그저 씨가 마르는 거지만, 뒤는 내 생명일 줄 누가 아는가. 그래서 내가 전쟁터로 나간 거네. 그건 이 땅을 잠시 떠나 있기 아주 좋은 구실이었으니까.”

“…그건, 혹시 오래전 전하께서 친정하셨던 북방 정벌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작이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방 정벌에 나선 것은 제법 오래전의 일. 그는 그곳에서 삼사 년 정도 있다 돌아왔다.

“그래. 다들 위험하다고 반대했지만 적어도 공작령보단 거기가 나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곳을 간 건 아주 옳은 판단이었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탈을 꾀한 것도, 그리고 평생 갈 보물을 얻은 것도 바로 그 정벌 전쟁을 통해서였으니까.”

묘한 뉘앙스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 운운에 보물이라니?

곰곰이 생각하던 사람들은 공작이 아까 이 영지를 떠난 이유가 후계자를 찾기 위함이었노라 말했던 걸 떠올렸다. 눈앞이 환해졌다. 설마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은…!

공작이 씩 웃었다.

“맞네. 나는 거기서,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얻었어.”

“허억!!!!”

아이라니!

사람들은 공작의 말에 혼이 나갔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과거사란 말인가?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아간 전쟁터에서 아이까지 얻다니!

“시, 실로 기적이로군요!”

누군가 외쳤다. 그 말에 공작의 눈이 둥글게 호선을 그렸다.

“그런가?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새로운 생명을 얻는 일은 기적과 퍽 닮아 있었지.”

“혹시 그 일을 지켜본 증인도 있습니까?”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네. 아이의 탄생을 도와준 게 바로 로메인의 백부야.”

“아아… 바로 그! 그라면 가능하지요.”

로메인의 백부는 일각에선 상당히 유명했기에 사람들은 납득했다. 물론 데퓨탄 후작이나 로메인은 펄쩍 뛰었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였던 것이다.

“출산을 도운 그에게 맹세를 시켰어. 출산과 관련해선 어떤 말도 하지 말라고 말이야. 알다시피 이 일이 알려지면 아이가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분 의외로 입이 무거운 분이었구나…. 렉시는 전번에 봤던 로메인의 백부를 떠올리고 감탄했다. 스무 해를 넘는 기간 동안 입을 다물 수 있다니 실로 대단한 사람이 아닌가.

‘흠. 혹시 그때 들었던 일이 혹시 이 일이었나?’

분명 전쟁통에서 죽기 직전 사람을 살리네 마네 했다고 들은 거 같은데 이게 그거였나 보다. 확실히 출산처럼 안 들리긴 했지.

이 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렉시는 조금 느긋하게 상황을 관조했다. 하지만 이건 그나 그렇고 나머지 귀족들은 그야말로 야단이었다. 저게 진짜인가 아닌가, 말이 되나 안 되나.

“전하께오선 버나드 공자가 아드님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그 증거는 어디 있습니까? 직접적인 증거를 보이지 않고선 사람들이 믿지 않을 텐데요.”

“그래서 바로 인장이 필요했던 거네. 공비가 왜 내 인장을 빼돌렸겠나?”

“…아!!”

그렇구나! 비로소 이해한 귀족들은 슬슬 흥분했다. 어쨌거나 극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공작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매우 홀렸던 것이다.

“전하께오서 돌아오실 때는 아기씨가 없었는데, 허면 아기씨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이는 남아입니까 여아입니까?”

“모친은 귀족입니까? 아니면 평민입니까?”

“그렇다면 현재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 이미 성인일 텐데!”

“제대로 된 교육은 받았습니까?”

“아, 아기씨―아니 후계자께선 그럼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찾으러 가셨다면서요?”

결국 공작은 살짝 손을 들어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질문이 많긴 하겠지만 이래서야 하루 종일이 지나도 대답만 하게 생겼다.

“그만. 그만! 정신이 하나도 없군!”

공작은 슬쩍 툴툴대며 가신들을 바라봤다.

“아이는 남아고, 안전한 곳에서 잘 컸네. 성인이고, 교육도 제법 잘 받았어. 별일 없었다면 그대로 계속 놔뒀겠지만, 상황은 변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여하간 저런 이유로 나는 아이를 데리러 갔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네. 아들이 있어야 할 영지에 아들이 없었어. 그래서 아들을 계속 찾다 보니 늦어진 거고, 도중에 소식을 듣고 공작령으로 왔다가 작금의 개판을 목도하게 된 것이지.”

“…….”

가만히 듣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공작의 여정은 이제 대충 알 것 같다. 숨겨진 아들을 몰래 찾으러 갔으니 그렇게 소리 없이 다녀왔구나. 모두 다 이해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목적물은 어디에 있는데?

“저, 허면 아드님은 어디 계십니까?”

“내 아들 말인가?”

그는 대답 대신 한 손을 들어 뒤를 가리켰다. 거기엔 로메인과 렉시, 쓰러진 후작, 그리고 쇠사슬을 든 기사 시라노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상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 도로 공작을 응시했다. 아들이라니, 어디에?

“저기 전하. 아드님이 안 보입니다.”

“…정말 모르겠나?”

뭐 이런 아둔한 것들이 있나 하는 얼굴로 공작이 사람들을 훑어봤다. 귀족들은 그저 억울했다. 아니 저기 어디에 니 아들이 있단 말이냐?

결국 공작이 쯔쯔 혀를 찼다.

“자네들은 눈 뜬 장님들인가?!”

“…송구하오나 전하. 아드님이 그, 마도구를 써서 몸을 감추셨습니까?”

“답답한 사람들 같으니! 이 성에서 피를 흘려 공작성 아래 있던 용을 잠에 깨우고, 잠에서 깬 용과 이야기를 나눈 자. 비록 답을 몰라 실패하긴 했지만, 용과 담판을 지어 잠들게끔 마지막까지 설득한 자. 자네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가,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곰곰이 생각하던 귀족들이 깜짝 놀라는 건 순간이었다. 그들은 황급히 공작이 가리키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쿨럭, 쿨럭!”

거기엔 공작의 말에 놀라 기침을 하는 렉시가 있었다. 피와 먼지로 얼룩져 꾀죄죄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뻐서 눈이 부신 그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렉시는 벼락 맞은 얼굴로 공작을 바라봤다. 참으로 기가 막히다 못해 코가 막힌 심정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아니 잘 나가다가 왜 갑자기 나더러 자기 아들이래? 그는 흔들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바짝 정신을 차렸다.

“…전하. 정말, 진짜, 매우 송구하오나… 제 부친은 전하가 아니십니다.”

“응?”

공작의 눈썹이 살짝 위로 솟아올랐다. 렉시는 억지로 웃는 얼굴을 했다.

“전하께오서 …무언가 잘못 아신 게 아닐까 합니다. 일단 저는 제 아버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뭐라?”

공작이 정색했다. 하지만 렉시는 매우 떳떳했다. 일단 비례(非禮)를 행한 건 공작이지 그는 아니잖은가. 공작의 말 때문에 지금 렉시의 아버진 난데없이 오쟁이 진 남자가 되었지 않나. 죽은 베르크 남작이 살아 돌아오면 이 자리에서 너 죽고 나 죽자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렉시는 진지하게 공작을 바라보았다.

“전하, 저는 전하의 아드님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 전하께선 나중에 오셔서 상황을 자세히 못 보신 듯합니다. 예의 용이 깨어난 것은 로메인 경이 위기에 빠진 뒤였습니다. 나타난 용과 먼저 대화한 건 제가 아니라 로메인 경이었고요. 저는 단지 나중에 그 둘 사이에 끼어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전하의 말대로라면 그럼 로메인 경도 전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메인 경의 부모는 저기 저 데퓨탄 후작이시지 않습니까…? 전하께오서 아드님을 찾지 못한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나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절 아들이라고 주장하시는 건 옳지 못한 일입니다.”

“……!”

짧지만 긴 침묵이 이어졌다. 렉시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공작의 얼굴은 차츰 험악해졌다. 그의 얼굴 위로 차례차례 긴 감정의 격랑이 스쳐 지나갔다. 당황, 어이없음, 몰이해, 의구심, 노여움.

그리고―.

“…아가. 설마, 너 아무것도 모르는 거냐. 네 아비가 네게 아무 말도 안 했어?”

라고, 공작이 버럭 소리를 쳤다. 렉시는 갑자기 훅 변한 공작의 기세에 깜짝 놀랐다.

“예?”

“네 아버지가 아무 말도 안 했느냐 이 말이다. 베르크 드 페르귄에게! 너 정말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느냐? 응?”

렉시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저분이 우리 아버지 이름은 어떻게 알지?

“송구하오나 전하. 전하께선 제 부친을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아느냐니…! 허면 너 대체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 알고 온 게 아니었느냐?”

어떻게 왔냐니? 그야―.

“도, 돈이 많다고 들어서…?”

당황한 나머지 본심이 흘러나왔다.

“…돈?”

“제, 제가 공작령에 온 이유는 마도구를 팔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것입니다만….”

“허…!!”

공작은 입을 떡 벌린 채 헛숨만 들이켰다. 입을 뻐끔대는 것이 마치 꼭 금붕어 같다. 잘생긴 금붕어…. 금붕어의 얼굴 위로 차가운 노여움이 내려앉았다. 주변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공작의 눈에 불똥이 팍 하고 튀었다.

“…뭐 이런 어이가 없는 일이…!”

그는 부들부들 떨며 이를 악물고 웃었다. 물론 말이 웃다 뿐이지 저게 웃는 게 아니란 건 모두가 다 알았다. 야수처럼 흉험한 기색이 녹색 눈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어쩐지!”

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렉시에게 다가갔다. 허허 웃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진심으로 화를 내니 위압감이 엄청났다. 그가 말했다.

“아가. 네게 아무 말 안 한 네 아비는 내가 나중에 반드시 혼을 내 주마.”

“네?”

“다 큰 애를 농락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이런…!”

말하는 게 꼭 사고 친 아버지의 뒷수습을 하는 어머니 같다. 그는 말문이 막힌 렉시의 손을 꽉 잡고 이를 갈았다. 렉시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잡힌 손을 바라보았다. 맞잡은 손이 이상하게 따뜻한 느낌이 든다. 뭐야 이거? 이거 뭔가 기분이….

그때, 공작이 애를 끓는 듯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알렉시아노, 내 아들아! …내가 …내가 바로 네 어미다!”

렉시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회장 내에 정적이 휘몰아쳤다. 다들 상상하지도 못한 공작의 고백에 선 채 소금기둥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모두 렉시처럼 제 귀를 의심했다. 실로 그럴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이쯤 되면 도무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렉시가 떠듬떠듬 질문했다.

“…전하. 전하께옵서는 혹시 여…여성이셨습니까?”

공작이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남자다.”

“아니 남자가 애를 낳습니까? 혹여 미치셨습니까 전하?”

평소 같으면 하지도 못할 말이 죽죽 나오는 건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해서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엄마라고? 누가???

공작은 그런 렉시를 보며 노화를 눌러 참는 얼굴을 했다. 그래 애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애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딱 이런 얼굴이었다.

“―그래. 네 아버지가 말을 전혀 안 해서 네가 어지럽겠지. 이해한다.”

그는 닥닥 이를 갈다가 후 하고 숨을 들이켰다. 사람들은 숨을 딱 멈추고 공작만 바라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이쯤 되면 무섭기까지 한 그들이었다.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찬찬히 설명해 주마. 일단, 우리 프로하우스 공작가에 용의 피가 흐른다는 것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후손들에겐 때때로 용의 피를 이었다는 표식이 나타나지. 몸에 비늘이 있거나, 눈동자가 파충류의 것처럼 보인다거나. 나 같은 경우는 보시다시피 뿔이다.”

공작은 자신의 뿔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다들 반사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공작이 말을 이었다.

“보통 표식은 이렇게 신체 외적인 특징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공작가엔 그거 말고 다른 비밀이 한 가지 더 있다. 아주 비밀스러운 일이기에 해당되는 자들에게만 대대로 알려지게 했다.”

“대대로 물려 내려온…비밀이라고요?”

“그래.”

그는 따뜻한 눈으로 렉시를 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렉시의 착각일까? 공작은 그런 렉시를 보다가, 자신의 배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용의 표식을 타고난 자는 설령 남성이라도 임신이 가능하다. 그게… 바로 마지막 비밀이지.”

뭐, 뭐라고??!!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이 커졌다. 나, 남자가 뭘 할 수 있다고?

“너는 내가 낳았다, 알렉시아노. 내가 네 엄마다!”

…이런 미친! 렉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어떻게 애를…! 말도 안 됩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 생각해 보렴, 아가. 사람이 뿔이 돋았는데 남자가 아이를 낳는 게 무슨 대수겠느냐?”

“그, 그건!”

렉시는 입이 딱 막혔다. 그건 그렇지. 확실히 사람이 뿔이 나는데 남자가 애를 낳는다는 게 대수롭지 않…기는 개뿔!

“용의 피란 게 그렇단다. 세상에 없을 기적을 선사하는 게 바로 용의 피지. 아가, 너 또한 용의 피를 타고난 걸 매일 느끼지 않느냐?”

과연 이 말엔 렉시도 뒤집어졌다. 렉시는 자리에서 펄쩍 뛰며 공작을 향해 대거리를 했다.

“용의 피라뇨?! 이보세요 전하. 전 뿔도 비늘도 없습니다. 눈동자도 발톱도 다 사람이에요! 제 어디에 용의 기질이 있단 말입니까?”

“용이 분한 사람은 실로 사람 같지 않게 아름답다고 한단다. 아가, 너는 진정 네 용모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

연이은 경악이었다. 사람들은 이어지는 대 고백에 입만 벌리고 있었다. 아니 사람 같지 않은 외모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정말로 사람의 외모가 아니었다고?

“고작 용모 따위로 그런 말을…! 아니요,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제 어머니는 영지에서 저를 키운 적도 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기억해요! 어머니는 금발이셨어요. 그리고 초상화! 초상화에 그려진 어머니는 분명 여성이었다고요!”

하도 오래전에 초상화를 봐서 얼굴은 기억 안 나도 성별은 기억한다. 거기엔 분명 여자가 자길 안고 있었다. 허나 그런 렉시의 반발은 공작에겐 전혀 들어 먹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사실에 입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려 렉시의 말에 반가운 듯 추임새를 넣었다.

“세상에. 그땐 네가 아직 어릴 때였는데 그게 기억나느냐?”

“아니 왜 반가운 얼굴을 하시는 겁니까? 그거 전하 아니라니까요?”

“아니, 그건 내가 맞다. 어린 널 데리고 내가 영지에 가서 잠시 널 키웠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머리를 염색했고…! 저 반지로 뿔도 가렸지!”

내 아들이 천재인가? 공작이 두 눈을 반짝거리자 렉시는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전하, 상식적으로 정말로 말이 안 됩니다. 정말 전하가 애를 낳았다 칩시다. 허면 사람들이 그걸 왜 몰랐단 말인가요?”

“임신은 전쟁 도중이어서 숨기기 쉬웠다. 해산은 사고로 본대와 떨어졌을 때 했었고. 널 낳고 난 뒤엔 본대로 갔지만, 네 아비의 설득으로 남작령에 가서 살았지. 도중에 …어쩔 수 없이 공작령에 돌아갔다 그만 발목이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난 거기서 계속 널 키웠을 거다…. 정말이다.”

그의 눈이 흐려지면서 과거로 향했다가 앞에 있는 렉시를 보고 이내 맑아졌다. 렉시는 공작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순간 흠칫하고 놀랐다. 공작의 눈동자가 자신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린 봄을 담고 있는 봄의 녹색 눈동자.

거기엔 자식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과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널 그렇게 홀로 두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 없었기에 결국 널 떼 놓고 공작령에서 공작으로 살아야 했단다. 사람들에겐 내가 죽었다고 말하라곤 했다. 하지만 설마 너한테까지 그렇게 말할 줄은…미처 몰랐구나. 정말로 미안하다. 그리고 초상화가 나와 조금 다른 건….”

공작은 여기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만… 내가 여장을 좀 했다.”

…뭘 해?

렉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공작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때뿐이었다. 초,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데 그럼 어쩌겠니? 그리고 그건 네 아빠가 원해서 그런 거야. 나는 그런 취미 없다!”

“…….”

아니 전 일단 님 취미는 상관이 없고요. 그저 당신이 제 엄마인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만…. 렉시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게, 진짜 정말이라고?

“이게… 모두 정말이라고요? 진짜?”

“믿기 힘들겠지. 하지만 얘야, 생각해 보렴. 내가 이 건으로 거짓말을 해 봐야 좋을 게 무엇이 있겠느냐?”

“그건…!”

렉시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공작이 뭐 좋을 게 있다고 그 같은 변방 남작을 데려다가 억지를 부리겠는가. 차라리 다른 놈을 밀면 밀었지….

“널 찾아 영지에 갔으나 너는 영지에 없었지. 열심히 수소문을 했지만 솔직히 말해 역부족이었다.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도중에 추적용 마도구까지 찾지 않았겠니? 헌데 도중에 네가 이곳에 있단 이야기를 들었다. 해서 난 네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네요. 진짜라고요?”

“증거가 필요하니?”

렉시가 아무 말 하지 않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거두절미, 아까 품 안에 집어넣었던 인장을 꺼내 렉시에게 넘겼다.

“잡아 보렴.”

“…….”

렉시는 잠시 고민하다 인장을 받았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요란한 반응은 렉시가 아닌 다른 쪽에서 나왔다.

“인장의 색이…!!”

“오오…! 저, 정말이다!”

“색이 붉어!”

사람들은 공비가 저것을 잡자 희게 빛나고 있던 것을 이미 보았다. 그리고 공작이 인장을 잡자 붉게 변한 것도 아까 보았고. 렉시가 잡고 있는 인장 끝의 보석은 여전히 붉었다. 렉시가, 정말로 공작의 자식이라는 증거였다.

“…맙소사.”

렉시는 도무지 이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알 수가 없어졌다. 렉시는 죽은 아버지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 아버지, 이 썩을 놈의 아버지. 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죽은 사람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당장에 멱살을 짤짤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러던 렉시는 순간 공작이 제 아버지를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혼내 준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설마….

“자, 잠깐. 그런데 전하.”

“어머니라고 부르렴. 아니면 아버지도 괜찮고.”

“아버지는 됐습니다. 그보다… 어…머니.(말하는 렉시의 얼굴이 여기서 살짝 썩었다.) 당신께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 혹시 모르고 계셨던 건가요?”

공작이 렉시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죽다니? 누가?”

“…….”

렉시의 전두엽으로 기이한 가설이 순식간에 성립됐다.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을 연이어 겪은 그에게 이미 불가능한 가정이란 없다. 이건 공작에게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렉시에게 물었다.

“얘야. 혹시 해서 물어보는데 네 아버지가 네게 연락 한번 안 한 거냐?”

“…정말 아버지가 살아 계신 건가요? 안 죽고?”

공작은 결국 입에서 불을 뿜었다.

“…그치가 너에게 말한 게 있기는 하느냐? 맙소사, 죽기는 누가 죽어! 네 아버지 안 죽었어! 네 아버지 아직도 저기 있다! 네 아비가 어디 죽을 위인이냐!?”

공작의 바들거리는 손가락이 렉시의 뒤로 향했다. 렉시는 천천히 뒤를 돌아 공작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공작이 가리키는 곳에 있던 사람은―.

“…시라노 경?”

아직까지 로브를 입은 채인, 시라노 경이었다. 왜 저 로브를 꿋꿋하게 뒤집어쓰고 있나 했더니…. 렉시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뒤로 물러나다 딱 멈춘 것 같은 움찔거림이 어깨너머로 보인다. 렉시는 조용하게 있는 남자를 불렀다.

“아버지.”

조용했다.

“아버지?”

또 조용하다.

“…아빠?”

―움찔!

남자의 어깨가 살풋 흔들리자 렉시는 확신했다. 시발 맞구나…!

사고치고 모른 척할 때 아버지라 부르면 대답 안 하다, 아빠라고 부를 때만 움찔하던 저…… 가증스러운 행동!

죽었다는 자가 어째서 살아 있는가. 대체 여기서 뭣 한 건가. 온갖 감정들이 가슴 안에서 휘몰아쳤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니. 그것도 어머니 곁에서…!

결국 렉시는 남자를 향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아빠!! 이 …이 빌어먹을 난봉꾼아!!! 이게 대체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

“그러니까, 결국 둘만 있고 싶어서 꼼수 피다 그리된 거죠.”

렉시는 시니컬하게 말했다.

“…꼼수 말입니까?”

“좀 천박한 말인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지금은 이 단어밖에 생각이 안 나니까요.”

렉시는 그렇게 말한 뒤 과자를 씹었다. 오독오독, 아까부터 오도독거리는 소리가 경쾌하다 못해 전투적이다. 마치 쿠키가 아버지라도 되는 것인 양 열심히 씹는 렉시의 모습은 예뻤지만, 동시에 은근히 흉흉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메인은 조용히 렉시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과자만 먹지 말고 차도 좀 마시라는 친절이었다.

“차도 좀 드십시오. 목이 막힙니다.”

“…고마워요.”

렉시는 앞에 있는 차를 말끄러미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그래도 애인이 좋긴 좋다. 이렇게 목 막힌다고 차도 타 주고….

하지만 그렇다고 터지는 속이 안 터지는 건 아니다. 그는 차를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기사는 차도 잘 타야 하는 건가, 적당히 식혀진 차가 목구멍으로 술술술 넘어간다. 꼴깍꼴깍, 우적우적. 한참을 그렇게 쿠키와 차를 비우던 렉시는 하, 하고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댔다. 거위털 솜털인지 오리 깃털인지가 들어간 쿠션이 기댄 몸을 푹신하게 감싸 안는다. 과연 비싼 물건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인지…. 렉시는 그냥 이대로 푹 자고 싶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폭 나왔다.

로메인이 그런 렉시를 보며 우려스러운 듯 한마디 했다.

“많이 피곤해 보입니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솔직히 그러면 거짓말이겠지요?”

렉시는 어설프게 웃으며 눈 밑을 문질렀다. 요 며칠간 한 격무 때문인지 눈이 조금 아렸다. 어쩌면 눈 밑이 까말지도 모르겠다.

“일이 정말 너무너무 많더군요. 전 지금 어머니가 제일 괴물 같다니까요…. 전엔 어떻게 이 일을 다 처리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혼자 다 하신 건가요?”

“전하의 행정 관리는 본래부터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뭐든 익숙해지기까진 뭐든 시간이 걸리는 법이고요. 그러니 그보단 당신을 먼저 돌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어머니랑 날 비교하지 말란 말이죠?”

“당신의 몸을 걱정하는 겁니다. 정말로 피곤해 보이니까요.”

“하아….”

렉시는 한숨을 삼켰다. 정론은 정론인데 이상하게 맘이 무겁다. 해야 할 일은 산처럼 쌓여 있건만 어째 앞일이 이토록 오리무중에 구만리인지.

렉시의 출생이 밝혀진, 그날의 일 뒤 공작령 일대엔 대형 폭풍이 휘몰아쳤다.

난데없이 나타난 렉시란 존재도 문제긴 하다. 허나 사실 가장 난리였던 건 공비를 둘러싼 일이었다. 그녀가 행한 일은 반역이었다. 아무리 황가의 일원이라도 무마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있는 법 아닌가. 한 가문의 근본을 손대는 일은 황제라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법. 헌데 이렇게 대놓고 일을 저질렀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공작은 황실로 공비와 이혼하겠노란 공식 문서를 보내고, 사라진 버나드와 기레스 백작의 행방을 뒤쫓게 했다. 뒤이어 시종장의 꼬임에 넘어간 자들의 신병 처리를 하고 그에 따른 뒷수습도 힘겹게 해냈다. 그리고,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일도 처리했다. 실질적인 가장 큰 피해자인 후작의 손가락을 예쁘게 붙여 놓고 금일봉과 함께 휴가를 준 것이다. 여기엔 그간 까닥까닥 모아 놓은 마도구가 실로 큰 역할을 했는데, 참 뭐든 있으면 어딘간 쓸 데 있다는 옛말이 맞긴 맞다.

하여간 이것 외에도 공작이 해야 할 일은 한도 끝도 없었다. 그저 용이 겸사겸사 귀족들의 저택들도 도로 고쳐 놓은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일 이마저도 없었다면 공작은 일에 파묻혀 도로 과로사했을 것이다. 그저 본인이 부숴 놓은 집들은 알아서 처리했단 점에서 힐라그라스는 그럭저럭 양심은 있는 용이었다.

지금 렉시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도 다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떨어진 일 폭탄 때문에 공작이 사적으로 렉시의 손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일각에선 아무런 직책 없는 자가 그래도 되냔 말이 있긴 했지만…. 솔직히 직책이 없지 명분이 없을까. 그 난장을 코앞에서 시청한 인간들이 그렇게 많은데 사정 모를 리도 없고.

어쨌거나, 그래서 지금 렉시가 있는 곳은 후계자의 방이었다. 물론 아직 정식으로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시간문제였다. 그걸 위해 공작이 자신을 찾아다닌 것이니까.

‘후계자라.’

렉시는 아뜩한 얼굴로 천장을 보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쉬는 건 다 좋은데 이게 문제다. 한가로운 시간이 생기니 생각이 많아지잖은가? 복잡한 일은 지금 일단 뒤로 미뤄 둬야 할 때였다. 이렇게 얼렁뚱땅 보내기엔, 오랜만에 맞이한 이 시간이 참으로 아깝다. 렉시는 아까부터 조용하게 앉아 있는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후작 부처께선 어떠신가요? 제가 바빠서 통 찾아뵙질 못했네요.”

“두 분은 걱정 마십시오. 다 이해하고 계실 겁니다.”

그게 과연 정말일까. 듣자 하니 후작은 몰라도 후작 부인은 전말을 듣고 기절했다고 하던데. 하지만 로메인이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렉시로선 믿어 줄 수밖에 없었다. 렉시는 며칠 사이 조금 마른 듯한 로메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자기지만 로메인도 퍽 바빴던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열흘 동안 얼굴 한 번 못 봤지.

“후작께서도 바쁘시죠?”

“네, 그렇습니다. 본인의 일뿐만이 아니라 플로랑 후작의 일까지 대신하고 계시니까요.”

“경도 그런 후작님을 돕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저는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의 일을 돕고는 있지만 격무는 아니니까요. 저보다는 당신이 더 힘들겠지요.”

로메인의 손가락이 렉시의 눈 밑을 살짝 스쳤다가 돌아간다. 다정한 기색에 순간 마음이 풀렸다. 그 사소한 스침 하나에 잔뜩 굳은 몸이 풀리는 게 왜 이렇게 신기한지 모르겠다. 사귀기 시작하면 다 이런가? 내 마음이 내 것이 아닌 느낌은 생경하지만 왠지 모르게 달았다. 돌아간 손끝이 부드럽게 움직이다 렉시의 손등 위에 안착했다.

까슬한 손바닥이 렉시의 손등을 달래듯 톡톡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편 손 안쪽으로 들어간 남자의 손가락이 손바닥 쪽을 살살 긁었다. 왠지 모르게 관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손가락이 움찔대자, 마주친 눈동자가 살짝 웃는다. 시원하게 뻗은 눈꼬리가 슬쩍 호선을 그리자, 이상할 정도로 느낌이 야하다. 렉시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흠!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자 로메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갑자기 더워진 공기에 렉시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로메인은 그런 렉시를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아 이건 혹시… 렉시가 속으로 숨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로메인이 손을 살짝 놓았다. 렉시는 당황했다.

‘방금 약간 그런 분위기 아니었나?’

렉시는 당혹한 얼굴로 로메인을 살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다정했지만 다시 보니 묘하게 태도가 담백한 것 같았다.

내가 …뭔가 착각한 건가?

연애는 해도 해도 어려웠다. 대관절 이게 그런 분위기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렉시가 속으로 투덜대는데, 로메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 방금 전 묘했던 기류는 어느 순간 사라져 온데간데없었다.

“허면, 일은 오래 걸릴 것 같습니까?”

“예? 아. 그렇죠. 권력 구조 재편이 어디 하루 이틀로 끝나겠어요. 한동안은 계속 이렇게 바쁠 테죠.”

“계속이라…. 힘드시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데 말이에요. 그래도 맘대로 쉬게는 해 주는 게 다행인 듯싶지만요. 이건 역시 후계자라 그런 거겠죠?”

“…글쎄요.”

로메인은 렉시의 말에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렉시는 몰랐지만, 그는 사용인들이 렉시를 찾으러 오지 않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계자보다, 그날 보여 준 렉시의 위엄에 다들 감복해 오지 않는 것이다.

로메인은 그날 렉시가 보여 준 미친 주먹의 위엄을 생각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남작을 쏘던 렉시의 발차기도. 그날 그가 본, 렉시의 위업은 상급 기사인 그조차도 좀 놀랄 정도로… 음, 훌륭했다.

죽었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날, 귀족들은 세상 다시 보기 힘들 부자 구타 사건을 목격했다. 그건 아마 퍽 오래 귀족들의 입을 오르내리게 될 것이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아들이 나비처럼 날아서 제 아비 중심을 발로 까는 건 두 번 보기 힘들 테니까. 열이 받아 얼굴이 시뻘게진 렉시가, 회장을 도망다니다 결국 잡힌 제 아비를 패는 모습은 실로 공포 그 자체. 어찌나 살벌한지 말릴 수도 없었다. 그저 다들 오들오들 떨며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죽어! 죽어 버려!”

“아, 아들아! 그만, 그만해라!”

아무리 무력이 뛰어나도 죄 지은 자는 처벌을 피할 수 없는 법이라.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에 수차례 얻어맞은 남자는 아들에게 사정하며 선처를 구했다.

“렉시! 아들아! 너는 내가 반갑지도 않니?”

“지금 반갑냐고 했어요? 염치도 없지. 양심도 없지! 지금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요? 어?!”

입으로 매를 번다는 말이 바로 저런 것일까. 기가 막힌 렉시의 눈에 광기가 돈다. 아무리 무력이 뛰어나다 한들 눈이 뒤집힌 자를 이기기란 힘든 법이다. 더해서 상대가 자기 때문에 눈 돌아간 아들이기까지 하면 아무리 그라도 반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여 공작을 호위할 정도로 무력이 뛰어났던 베르크 전 남작은 아들의 손에 자근자근 밟혀야 했다.

그리고 급기야―.

“아, 아악!”

“죽어라 아버지!”

비호같은 발놀림이 결국 부친의 알을 발로 까고 말았으니…. 제 아들 속인 남작의 죗값이 회장을 뒤흔드는 걸 보는 귀족들의 얼굴도 동시에 시퍼레졌다. 특히 남자 귀족들이.

“아, 아들아…. 그만하면 되지 않았을까?”

이쯤 되니 공작도 슬슬 아들을 만류했다. 하지만 렉시는 단호했다. 그가 보기에 제 아비는 아직 반도 안 맞은 거였다. 그는 공작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정도 가지곤 어림도 없어요. 적어도 두 시간은 더 맞아야죠!”

“두, 두 시간?”

“전하는 모르세요. 이 인간은 그 정도는 해야 정신 차려요!”

귀족들과 공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심부를 쥔 채 쓰러진 남작을 보았다. 입에 뿜긴 게거품이 이상하게 서러워 보였다. 렉시냐 공작 부군이냐. 아들이냐 남편이냐. 심각한 침묵이 주변을 맴돌았다. 꿀꺽, 결심한 공작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 알겠다. 그럼 난 저들과 좀 자리를 비키겠다.”

“저, 전하! 아니 여보!”

살려 줘! 기절한 척하던 남작이 벌떡 일어나 우짖었다. 렉시는 씩 웃으며 거보란 듯 공작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거봐요. 역시 덜 맞았죠?”

그리고, 다시 퍽!

“으아아아악!”

“…….”

그리고 뒤이어지는 퍽퍽 울리는 심각한 구타 소리. 귀족들은 칼 같은 공작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부군의 하반신의 위기에도 저토록 침착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냉철함이란 말인가.

“…자기 아버지인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공작은 애써 말했지만 글쎄, 과연 그럴까.

아마 그때 모든 귀족들 이하 사용인들이 두 손 모아 다짐하게 되었을 것이다. 공작과, 그리고 소공작을 적으로 돌리지는 말자고. 살아 돌아온 부친에게도 가차 없는 사람인데 타인은 오죽하겠는가라는 공감대가 모든 이에게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잠시 생각하던 로메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나저러나 덕분에 귀족과 시종들을 휘어잡았으니 뭐 결과적으론 좋은 일. 자고로 모로 가도 수도로 가면 다인 법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그런데, 하고 운을 뗐다. 생각해 보니 남작이 맞는 거만 보느라 전말을 하나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헌데 정말 아버님은 왜 그러신 겁니까. 정말 두 분만 함께 있으려고 그리 가신 겁니까?”

“―그러니까….”

하아, 렉시는 한숨을 내뱉었다. 진짜 내가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건지 이상하게 회의감이 드는 그였다.

렉시의 어머니, 그러니까 현 공작이 공작령으로 돌아간 이후 렉시의 아버지는 홀로 렉시를 키웠다. 무척 상심했지만 렉시가 있으니 생활은 그럭저럭 한 모양이다. 그러나 자기 마누라를 지극히 사랑하고 애모하던 남작은 그의 빈자리를 결국 이기지 못했다. 사랑도 병이라고 매일같이 전전반측했으니 눈이 돌아가는 것은 순식간. 결국 남작은 사람들 몰래 영지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몰래 공작을 만나 염원하던 마누라와의 해후에 성공했던 것이다.

―평민, 시라노의 탈을 쓰고.

물론 처음에야 공작도 매우 반겼다. 솔직히 감동도 했다. 자길 보기 위해 먼 거리를 불원천리 달려온 배우자가 싫을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있지 그 먼 거리를 달에 한 번씩 오는 걸 보니 그도 슬슬 걱정이 안 될 리가 없었다.

너 영지 경영 안 하냐? 너 애 안 키워?

영지엔 주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렉시에겐 보호자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공작은 눈물을 머금고 렉시의 아버지에게 단단히 말했던 것이다.

앞으로 렉시가 다 크기 전까진, 절대 공작령에 오지 말라고.

“어쩐지 언젠가부터 좀 조용해졌다 싶었죠. 그게 다 어머니 덕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전 솔직히 울 아버지가 드디어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사정이 있더라구요. 저 인간이 철들길 바란 내가 미쳤지….”

렉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제국 법으론 17세면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지요.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그때만 오매불망 기다리신 거였어요. 그리고 제 17세 생일이 지나자마자―일을 친 거죠.”

“…어떻게 말입니까?”

“뭐겠어요. 죽은 척하고 가출한 거죠!”

내가 증말 미쳐! 렉시는 악 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저히 그러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살다 살다 내 그런 인간은 처음 봐요.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죠?”

어린 자식에게 영지 맡겨 놓은 게 무섭지도 않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렉시였다. 로메인이 그런 렉시를 차분히 달랬다.

“아무래도 렉시 당신을 믿은 것이겠지요. 실제로 잘 해냈지 않습니까.”

“…물론 제가 무척 똑똑하고 요령이 좋아서 잘 해내긴 했죠.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란 거예요. 당최 열일곱 살짜리한테 영질 맡길 생각을 하는 그 정신머리 자체가 이해 불가라고요. 아니 만의 하나라는 게 있지 않나요?”

“…그렇기야 합니다만.”

로메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렇기는 했으니까. 쓴웃음을 짓는 로메인을 보며 렉시는 타는 속을 차로 식혔다.

“차 좀 더 주세요. 그리고 로메인도 좀 드시고요. 아까부터 저만 먹고 있네요.”

“알겠습니다.”

얼결에 로메인도 렉시를 따라 차를 비우자, 렉시는 흥 하고 몸을 뒤로 기댔다. 짧은 휴식이었다. 말할 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있네. 빚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제가 말하지 않았죠?”

“…사실, 그 일이 제일 궁금했습니다.”

로메인은 진지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그 빚 때문 아닌가. 빚만 아니었으면 렉시가 이렇게 나올 일도, 어쩌면 공작령이 이렇게 개판 오 분 전이 될 일도 없었을 터다. 안 그래도 속 시끄러울 사람이라 묻지 못한 거였지 사실 그게 제일 궁금했었다.

“아버님은 그 돈을 왜 빌리신 겁니까. 그리고 어디에 쓰셨다고 합니까?”

“…듣고 나면 기가 막힐걸요.”

“아직 더 기가 막힐 일이 남았습니까?”

이미 놀랄 일투성인데 여기서 더? 그런 로메인을 향해 렉시는 삐딱하게 웃었다.

“제가 말했던가요? 제 아버지는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을 보여 준다고.”

한번 말한 바 있긴 하지만 워낙 오래전 일이니 여기 다시 한번 말한다. 남작령은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또한 렉시의 아버지 자체도 돈 쓰는 법은 몰랐다. 본래 돈도 쓸 줄 아는 놈이 쓰는 법이지 쓸 줄 모르는 놈은 돈을 쓸 데도 없다.

그런 렉시의 아버지가 천만 크레아란 빚을 진 이유는 간단했다.

“공작령과 저희 영지는 생각보다 거리가 멀어요. 아버진 어쨌거나 영주라서 오랜 시간 영질 비우면 누군가 이상한 걸 눈치채겠죠. 어머니는 보고 싶고, 영지를 오래 비우면 안 되고. 그래서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 그거였다더군요.”

“그것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요약하자면, 제가 빚 갚기 위해 한 짓을 딱 반대로 했어요.”

로메인은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그가 알기로 렉시가 한 일은 마도구 판매.

잠깐, 그렇다는 건…?

“…마법 도구… 구매 말입니까?!”

렉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흐흐 웃었다. 사람이 빡이 치다 보면 웃음밖에 안 나올 때가 있다. 그의 지금 웃음이 딱 그랬다. 얼굴은 마치 김이 나올 것 같이 빨간데 입술만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삐죽거렸다.

“중장거리 이동 마도구란 거 들어는 보셨나 모르겠네요.”

이름 한번 직관적이다. 딱 들어도 이동 마법 같은 게 내장된 마법 도구인 걸 알 것 같으니.

“처음 들었습니다. 이동용 마법 도구인가요?”

“네. 세상 참 넓더라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고 사는 등신들이 있다니!”

원래 등신이 등신짓 하는 건 별일 아니다. 그걸 뒷수습하는 정상인만 고통받을 뿐…. 렉시의 허허로운 웃음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듣고 있던 로메인의 입이 헐 하고 벌어졌다. 잠깐, 그럼 설마 …마도구 사려고 빚을 졌다고?

“정말 고작 마도구를 사기 위해 작위를 저당잡혔단 말입니까?”

“설마가 원래 사람을 잘 잡아요, 로메인.”

“맙소사!”

로메인은 기함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천만 크레아입니다. 고작 마도구 때문에 천만 크레아를 빚지다니요!? 게다가 가격도 너무 이상합니다. 어떻게 그것 하나가 그런 가격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혹시 그것이 당신의 것보다 더 귀한 것입니까?”

굳이 비교를 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은 해야겠다. 물론 장거리 이동 물건도 퍽 귀한 물건이 맞다. 하지만 렉시가 가진 유니콘을 부르는 피리, 마부 없이 말을 다룰 수 있는 마차, 혈육을 판단할 수 있는 반지 등등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보단 더 비쌀 물건이다.

물론 로메인의 의문은 맞았다. 렉시는 단호히 대답했다.

“아뇨, 객관적으로 봐도 제 게 더 좋죠. 당연하잖아요?”

“헌데 어째서 가격이 그렇습니까?”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멋모르는 사람은 혼란스럽겠지.

“이상할 거 없어요. 그냥 아버지가 바가지 옴창 쓰고 사 버린 거니까.”

렉시는 혀를 찼다. 알다시피 마도구는 가격이 정량화가 된 물건이 아니다. 즉 산 사람이 다급하다면 얼마든 가격대를 올릴 수 있는 물품이라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애모하시는 베르크 남작의 사랑은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천만 크레아란 가격을 대고 그걸 팔아먹었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가히 상인의 표본이 될 만한 놈이 분명했다.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로메인이 말했다.

“바가지인 걸 알면 안 사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보통은 안 삽니다. 헌데 어째서?”

“네, 보통은 그렇겠죠. 살펴보면 더 싼 게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목마른 사람 앞에 물이 있으면 일단 마시고 보는 법이잖아요. 하물며 우리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충동 조절도 아주 약한 사람이고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얼른 돈이라도 빌리셔야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되고 안 되고 간에 이미 그러고 산 사람이 있다. 뭐… 그래. 좋게 생각하면 부부끼리 사이가 좋다 못해 벌어진 일이니 자식 된 입장에서 뭐라 말은 못하겠다. 부부가 사이좋은 게 나쁜 일은 아니기도 하고.

허나 영주된 입장에선 참으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을 뿐이었다. 고작 그런 것에 작위를 걸었다니…. 남작 맞아? 무슨 영주가 저래?

“그럼 그 돈은 나중에 어떻게 갚을 계획이셨답니까? 설령 팔아도 그 돈은 다시 못 받는 거 아닙니까.”

“오, 로메인. 그런 계획이 있었으면 제가 욕을 했을까요?”

“……예?”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라고.”

보통 사람은 빚질 때 갚을 일을 생각하고 빚을 진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아마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로 그러고도 남았다.

렉시의 이 말에 로메인이 드디어 침묵했다. 그는 왜 전 남작 이야기만 하면 렉시가 진저리치는지 완벽히 이해했다.

무계획과 무논리와 무대책.

3무의 남작, 그는 실로 대책 없는 남자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하긴요? 그냥 그 인간 없는 셈치고 돈 갚는 수밖에요.”

“하지만 돈이… 없지 않습니까? 시간도 얼마 없을 텐데요.”

“뭐 언젠 돈이 있었나요? 어차피 이 빚 건에 있어서 아버지는 상정 외였는걸요. 그렇게 심각하게 보지 마세요. 전하께서 해결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아마 이미 해결을 위해 사람을 보내셨을걸요.”

천만다행이었다. 로메인은 노골적으로 안심했다.

“아…! 전하께서도 이 사실을 아십니까?”

“대체 영지를 나선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셔서요…. 돈 때문이라고 하니 영 이해를 못 하시길래. 뭐, 말씀드렸죠.”

당시 공작이 보인 반응을 떠올리며 렉시는 쓰게 웃었다. 저간을 들은 그가 얼마나 펄펄 뛰었는지는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이후 공작의 화는 이내 급속도로 수그러들었다. 원래 세상일 다 그렇다. 그럴 만한 놈이 말짓 하면 다들 그러려니 하는 법.

이 작자가 또…!

탄식하는 공작의 뒤로 설핏 보이는 아버지는 잔뜩 혼난 개처럼 처량맞았지만…. 그 말썽쟁이 개를 보는 공작의 눈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가득했다. 세상에.

렉시는 버릇처럼 혀를 차며 한숨을 삼켰다.

“어머니도 참 팔자가 사나워요. 그런 걸 남편이라고 데리고 살고 말이죠….”

“…그렇군요.”

실로 가차 없는 평가였으나 패륜이라 하기엔 상황이 너무 개 같다. 솔직히 여기서 죽일 놈 살릴 놈 안 하는 거만 해도 렉시는 충분히 효자였다.

“어쨌거나 대신 갚아 주신다고 하셨으니 그 건은 괜찮을 거예요. 곧 좋은 소식이 오겠죠.”

“―정말로 다행입니다.”

그래, 다행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렉시는 생각할수록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돈을 갚아 준다 한들 그건 그거고 고생은 남는다. 그간 아버지가 싸질러 놓은 똥 때문에 고생한 것이 물경 삼 년.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이런 고생은 쓸데도 없다.

“네, 다행이죠. 하지만 정말 짜증 나는 인간이에요. 늘 저랬다니까요 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쇠, 일은 일단 저질러 놓고 다른 사람이 뒤처리하게 만들고. 아버지의 인생의 팔 할은 그저 충동과 우연으로 만들어졌어요. 대체 왜 살까요? 머리는 왜 달고 다닐까요? 그냥 태어난 김에 사나? 아니 그렇게 살 거면 피해나 주지 말지!”

한참 열불 내는 렉시였다. 로메인은 그런 렉시를 위로할 말이 참으로 없었다. 그도 살다 살다 저렇게 무책임한 양반은 처음 봤던 것이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 당신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급한 일도 해결되었고, 잃었던 모친을 찾으셨으니… 그걸로라도 위안 삼으시면 어떻습니까?”

덕분에 터진 일복이 문제긴 하지만 어쨌거나 시간은 가기 마련. 물론 공작령의 후계자 건과 남작령은 어찌 되는가가 남긴 했다. 하지만 일단 전 남작이 살아 있으니 어찌 되긴 할 거다. 하지만 렉시의 그늘진 얼굴은 여전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 때가 있었지요….”

“아버님에 대한 원망이 크시겠지요. 이해합니다.”

”그게 아니에요. 이제 와서 원망해 봤자 과거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전 그냥 화가 날 뿐이에요. 아버지 때문에 고생할 게 아직 남았으니까요.”

“…예?!”

실로 엽기적인 말이었다. 듣자마자 안색이 확 변했다. 설마?!

“혹시 빚이 또 있습니까?!”

로메인이 버럭 소리쳤다. 퍽 놀랐는지 주먹도 쥐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빚은 아니다. 단지 다른 면으로 심각해서 문제지.

“그랬다면 양심도 없는 거고요. 그런 일은 아니에요.”

“그럼 무엇입니까? 무엇이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글쎄요. 과연 당신이 절 도와줄 수 있을까요?”

렉시는 로메인을 지긋이 바라봤다. 물론 로메인이 무능하단 소린 아니다. 렉시는 그가 생각보다 더 유능하다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얼마 전 받은 보고만 해도 그의 유능함은 이래저래 차고 넘쳤으니까. 다만 그가 그렇게 나온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건 로메인의 무능이 아니라, 그가 정말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곧 동생 생겨요.”

“……네?”

당연하지만 로메인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처음엔 알아먹지 못했다. 뭐 당연 그럴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그러니까 전하요. 임신하셨어요.”

“?!!!”

놀란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요동쳤다.

“이, 이, 이, 임신?”

“놀랍죠? 예, 저도 놀랐어요.”

렉시는 혀를 쯧쯧 찼다.

“전하의 모습을 분한 후작이 바짝 말랐던 거 기억하세요?”

“분명 그랬지요. 하지만 그것이 왜…?”

“―입덧해서 그랬대요. 저 임신했을 때도 그렇게 바짝 말랐었다고 하더라고요.”

바짝 마른 공작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어쩐지 아무리 여행이라도 너무 말랐다 했다. 그게 입덧 때문이었다니….

정말로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공작의 사생활이다. 로메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마치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정말… 진짜 임신입니까?”

“경의 백부가 보증했답니다. 태맥이 잡힌다더군요.”

“맙소사!”

로메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그 나이에? 이제 와서?!

“…축하드려야 하는 겁니까?”

“모르겠어요. 솔직히 기분이 묘해요. 이제 와서 동생이라니….”

이것이 자신에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렉시도 몰랐다. 아무리 그라도 임신 출산 관련해선 아는 게 없었던 것이다.

단지, 하나는 무척 분명했다.

“여하간 어머니는 곧 일선에서 물러나실 거예요. 요즘 열심히 일하시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어쨌거나 노산이니 최대한 안정을 취해야 하지 않겠어요.”

“!”

공작령의 권력 구조는 정말로 대대적으로 개편될 거다. 어쩌면 이양 작업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물론 그거까진 렉시가 열심히 거부할 거지만 어쨌거나 앞으로 놀 일은 텄다. 로메인의 푸른 눈동자가 물먹은 듯 확 커졌다.

“허면 렉시 당신은―.”

“네, 그래요. 아마도, 당분간은 여기 묶인다는 거죠….”

임신한 어머니를 건사하는 건 부친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다 큰 아들인 그가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일.

귀향은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목이 타는지 차를 벌컥 마시는 로메인을 보며 렉시는 생각에 잠겼다. 한 잔, 두 잔, 세 잔…. 잠시 수를 세던 렉시는 여상하게 말했다.

“여하간 저는 적어도 열 달, 길면 일 년 반 정도는 이곳에 머물러야 해요.”

어머니, 그러니까 공작의 말대로라면 자긴 조금 일찍 나왔다고 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의 임신 기간으로 따져서 일찍이다. 정상적인 용들의 임신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는 현재로선 아무도 몰랐다. 기록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구전으로만 전해 오는 일을 누가 알겠는가. 어쨌거나 사람이 낳는 것이니만큼 열 달은 넘지 않으리란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요수아와 필립은 영지로 보낼 거예요. 아쉽긴 한데 둘은 너무 고생했으니까. 집사에겐 이미 고생 좀 더 해 달라 서신을 보냈지요.”

“그가 영지를 대신 운영 중입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아버지는 못 믿어도 그는 믿죠. 그렇게 말하며 렉시는 갈색 액체가 찰랑대는 찻잔에 입을 댔다. 와삭, 그리고 의무적으로 과자를 먹었다. 쓴 액체와 단 과자가 입안에서 어우러져 황홀한 향을 뿜었다. 약간 망그러진 과자를 목 뒤로 넘긴다.

인생이 마치 이 차와 과자 같은 것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쓴 것 뒤에, 반드시 단것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기꺼이 쓴 차를 감내할 텐데.

하지만 세상은 그처럼 좋게 흘러가진 않는다는 것을 렉시는 이미 알고 있다. 쓴 차 뒤에 반드시 오는 과자란 건 없다. 만일 단것을 원한다면 먹는 사람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

“여하간 전 당분간 이래서 여길 벗어나지 못해요. 로메인,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 일이 끝나면 당신은 저와 함께 남작령으로 가기로 했었지요. 아직도 그 마음이 그대로인가요?”

“그게 무슨….”

로메인의 눈동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지러졌다.

“전 당연히 당신과 있을 겁니다. 당신 옆에요.”

렉시는 한숨을 삼켰다.

“…어머니는, 그러니까 전하는 저희 약혼이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을 불러오기 위한 위장이라 생각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런가 당신과 제 사이를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 눈치였죠.”

렉시는 씁쓸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추호의 의심도 없다는 건 다른 말로 말하면 생각지도 않고 있다는 말이다. 로메인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시작은 그랬으니까요. 플로랑 후작에게 우리 일을 말하지도 않았으니… 감안하고 있습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리 약혼은 제대로 끝나지 못했고, 공작 전하는 당신을 제 짝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제국은 넓고 사람은 많다. 고로 사촌 간의 혼인이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처럼 잦은 일도 아니므로 렉시의 고민은 깊었다.

갑작스레 새로 생긴 외사촌이 애인일 줄이야….

렉시는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로메인은 그런 렉시를 바라보았다. 말끄러미 보는 푸른빛 눈동자가 유달리 선명했다.

“저와의 일을 후회하십니까?”

렉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예?”

“저와, 이어진 것을 성급하게 여기고 계시는 겁니까. 만일 그렇다면….”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후회할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진심이다. 설령 그가 사촌이 아니라 잃어버린 형제라도 매한가지였다. 그는 단지 그일 뿐이지 다른 무엇도 아니다. 딱딱하게 굳었던 로메인의 입가가 그제서야 조금 풀렸다.

“전 오히려 당신이 걱정이었어요. 며칠간 절 찾아오지 않아서…. 그래서.”

사실, 렉시의 안색이 나빴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거다. 그 난리통에 헤어진 뒤, 두 사람은 열흘간 아무 소식 없이 서로 떨어져 있었다. 렉시로선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바빠서 그랬겠지, 형편 좋게 생각은 했다. 실제로 렉시 자신도 아예 발이 묶여 움직이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혼자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게다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로메인이 렉시만큼 바빴을 리는 없지 않은가. 즉 시간이 나면 찾으러 왔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후작가의 별저는 성과 지척, 누가 자신을 만난다고 해도 막지도 않았을 거다.

‘어째서 오지 않을까?’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렉시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실체 없던 불안이 형태를 가지고 일어나 자꾸 그를 잠식했다.

왜 연락이 없을까.

많이 바쁜가?

그래도 가까우니 인사 정돈 해도 괜찮을 텐데.

오늘은, 내일은.

그러다 결국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혹시… 외사촌이라고 밝혀져서…. 내가 싫어진 걸까?

말이 이어질수록 로메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 마지막 말을 들은 뒤 그의 얼굴은 겨울이 온 것처럼 외롭고 서글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당신은 늘 바르게 살아왔던 사람이죠. 사촌이 터부시된다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혹시 내가 싫어진 걸까. 그래서 연락이…!”

그때였다. 갑자기 큰 손이 렉시의 얼굴을 잡아 왔다. 렉시는 눈을 크게 떴다.

키스는 갑작스러웠다.

예고 없이 시작된 키스는 단박에 호흡을 앗아 갔다. 헐떡대는 숨이 가빴다. 놀라 벌어진 입술을 헤집고 뜨거운 혀가 렉시를 침탈했다. 앗 하는 순간 혀가 빨려 거세게 얽혔다. 질척한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흐, 읍!”

숨이 막힐 것 같아 간신히 입을 뗐다. 하지만 단박에 다시 입술을 빼앗겼다. 거부하는 것이 아니건만 마치 거부하는 것처럼 느낀 모양이다. 견딜 수 없다는 듯 로메인이 강하게 렉시를 끌어안았다. 흘러넘치는 타액마저 집요하게 달라붙어 핥아 삼켰다.

렉시는 반사적으로 로메인의 가슴팍에 손을 댔다. 딱딱한 가슴 안쪽으로 심장이 한껏 달린 말처럼 거세게 뛰고 있었다. 싸늘했던 얼굴이 언제였냐는 듯 내려다본 남자의 관자놀이가 붉었다. 흥분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짜릿하게 머리를 울렸다. 입술이 이어진 그대로 렉시가 로메인의 다리 위에 들어 앉혀졌다. 순식간에 몸의 자유가 로메인에게 넘어갔다. 먹이를 사냥하는 사냥꾼처럼 그는 렉시의 자유를 앗아 갔다. 상대의 몸이 단단하게 잡힌 것을 안 그는 곧 다시 열정적으로 렉시의 입안을 탐했다.

여린 안쪽이 상대의 침입에 서슴없이 속살을 드러냈다. 혀가 얽히고, 입안이 샅샅이 헤집혔다. 로메인의 혀가 입 안쪽을 문지를 때마다 몸 한쪽이 움찔거렸다. 렉시는 잔뜩 긴장했던 몸이 열기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가 마치 뜨거운 여름 해 아래 놓인 얼음 같았다. 로메인의 질주는 바람처럼 거침없었다.

“으응….”

츄읍…. 질척대는 소리만이 방안에 가득했다. 수차례 겹쳐진 입술만으론 견딜 수 없다는 듯 급기야 남자의 손이 몸을 훑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방안은 불을 피워 따스했다. 접촉을 무시하기엔 옷이 너무 얇았다. 눈앞이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해졌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확 떴다. 선뜩한 바람이 몸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앗!”

순식간에 가슴 언저리가 헤쳐졌다. 단추가 언제부터 풀렸는지 알지도 못했다. 찬 공기를 맞은 유두가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로메인의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입에서 단숨이 새어 나왔다. 입안을 충분히 맛본 짐승이 목을 타고 쇄골 아래로 내려왔다. 새처럼 가슴이 파다닥 뛰었다. 뜨거운 입술이 몸에 닿을 때마다 숨이 턱턱 공처럼 튀어 올라 가빠졌다. 천천히 내려오던 로메인의 혀가 급기야 렉시의 유두를 삼켰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긴 신음을 내뱉었다.

“하으읏…!”

엉겁결에 남자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쭉 하고 빨아올릴 때마다 무언가 가슴에서 톡 하고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살을 삼킨 입안에서 유두가 혀로 희롱당하다 이로 잘근잘근 깨물리자, 저절로 허리가 흔들리고 다리가 오므려진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 로메인!”

“―내가, 당신을.”

로메인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안쪽은 밤처럼 깊었다. 불똥이 일며 괄게 타오르는 불이 그 안에 있었다.

“싫다고…?”

동시에, 그는 렉시의 허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후욱, 렉시의 흉곽이 위로 솟자 가슴살이 도톰하게 솟아올랐다. 마치 아양 떨며 빨아 달라는 듯한 모양새에 로메인의 표정이 번뜩였다. 직전까지 잔뜩 빨린 유두가 마치 꽃처럼 붉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렉시의 가슴을 삼키고 깨물었다. 렉시의 몸이 충격으로 격렬하게 튀었다.

“아…!”

“―흐으.”

눈처럼 흰 가슴 위에 그의 흔적이 새겨질 때마다 남자의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덜덜 떨리는 몸을 묵직하게 누르며 새빨개진 가슴을 빨았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울리면서 가슴이 축축하게 젖었다. 렉시는 눈을 꼭 감았다.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가 가슴을 빨아 올릴 때마다 허리가 벌벌 떨리면서 아래가 묵직해졌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드디어 허리띠를 잡아챘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렉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로메인. 잠깐요. 여, 여기선…!”

“이래도.”

잔뜩 쉰 목소리였다. 로메인은 열기 어린 눈으로 렉시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핥았다. 냉철하던 표정이 흐트러진 모습이 무척이나 음란했다. 지금이라도 잔뜩 자신을 삼키고 싶어 하는 남자의 눈동자에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래도… 제가 당신을 싫어하는 거 같습니까?”

렉시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마 가슴 언저리도 새빨갛게 변했을 것 같았다. 로메인은 그런 렉시를 보며 피식 웃었다. 렉시가 말렸기에 허리띠는 풀지 않았지만, 방향을 바꾼 손은 은근한 손짓으로 렉시의 둔부를 주무르고 있었다.

“말해 보십시오. 제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까?”

주무르는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와 렉시의 성기 부근에 머물렀다. 안 그래도 빨갰던 얼굴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개졌다. 아앗! 렉시는 새된 목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의 성기를 주무르는 남자의 손목을 세게 밀었다.

“아뇨. 아니요!”

“무엇이 아닙니까?”

이래서야 말하지 않으면 손을 떼지 않을 기세다. 제정신이라면 부끄러워 말하기 어려울 것이 정신없이 새 나왔다.

“싫어하지… 않! 아앗!”

맘에 드는 말이 아닌지 남자가 두툼한 부분을 중심으로 강하게 압박했다. 렉시는 벌벌 떨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좋아해요. 좋아한다고!”

“누가, 누구를?”

“당신이, 흡, 저를…!”

강하게 압박하다 다시 부드럽게 만지는 손 때문에 목소리가 여기저기 튀었다. 부드럽게 자극하는 압력 때문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옷을 입고 볼썽사나운 꼴을 보일 것이다. 렉시의 울음 섞인 얼굴에 로메인이 한숨을 쉬며 손에 힘을 뺐다.

“…저를 너무 자극하지 마십시오.”

로메인은 그렇게 말하며 눕힌 렉시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힘이 빠진 렉시가 제대로 허리를 세우지 못하자, 그는 직접 렉시를 소파에 앉혀 세웠다. 단숨이 학학대며 새어 나오는 사이, 그는 재빨리 렉시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유두에 시선을 준 뒤, 다정하게 그 위에 입을 맞추면서 옷을 추슬렀다. 보석 달린 스트링까지 확실하게 맨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렉시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다시금 뜨거운 것이 렉시의 입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러운 입맞춤은 마치 애태우는 것처럼 길고 달달했다.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다가, 입술을 빨고,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어 천천히 느긋하게 안을 맛본다. 격정적이었던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숨이 가빠졌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로메인이 입을 떼자, 렉시가 헉헉대며 숨을 삼켰다. 로메인의 까슬한 손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당신이 제 마음을 의심할 때마다, 제 안의 다른 내가 날뛰고 맙니다.”

그는 짧게 한숨 쉬었다.

“열흘간…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라도 올걸 그랬군요. 저 또한 당신이 무척 보고 싶었으니까요.”

“…정말이요?”

“렉시. 당신에게 거짓을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로메인은 물기 어린 렉시의 눈동자에 살며시 키스했다.

“저는 기사고, 기사는 하나를 택하면 변치 않습니다. 제 마음은 영원히 변할 일이 없을 겁니다. …설령, 당신이 변심하더라도.”

“어, 네?”

뜻밖의 말에 렉시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무슨 헛소린가 했으나 얼굴이 진지하다. 그는 당황한 렉시를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대체…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변심이라니요!?”

가능성이라니. 이해 가지 않는 말이었다. 내가 왜 그를 두고 변심한단 말인가? 그는 렉시의 눈동자에 떠오른 의문에 천천히 답을 했다.

“당신은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엉뚱한 질문이었다. 렉시가 답을 하지 못하고 멍해 있자, 로메인은 스스로 그 물음에 답하며 렉시를 이끌었다.

“며칠 전까지 당신은 작은 지역의 영주였지요. 아주 작지만, 그래서 평화로운…. 그래서 지금 상황이 잘 인지되지 않을 겁니다. 렉시, 현재 당신은 이 거대한 공작령의 하나뿐인 후계자입니다.”

광대한 제국에서도 프로하우스 공작령의 부유함은 손에 꼽는다. 공작령에 사는 인구만 해도 삼천만, 그 광대한 대지는 수천 헥타르에 이른다. 평야는 씨알만 뿌려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힌다는 기름진 지역이 대부분. 그 대지에 밀접한 임야엔 철과 보석, 암염의 산이 있었으며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항구 도시 역시 프로하우스의 영내에 있다.

황가를 제외한다면, 그보다 부유할 가문이 없다는 것이 그냥 말이 아닌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당신의 부친의 집안은 대륙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오래되었고, 모친의 지위 역시 황가를 제외한다면 따를 자가 없습니다.”

렉시는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요?”

“황가가 탐낼 정도의 부, 오래된 가문의 정통한 핏줄. 그리고…. 누가 보아도 홀릴 것 같은 외모. 이 모든 것이 한 몸에 있는 자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원한다면 타 대륙의 황가와도 혼인할 수 있습니다. 귀천상혼하지 않는 타 왕실의 핏줄과도 혼인이 가능할 테지요.”

“뭐라고요?”

렉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왕가에 황가는 무슨 소리인가요. 제 연인은 당신이에요!”

달콤한 순간에서 갑자기 현실로 끌려 내려왔다. 당연하겠지만 그의 기분은 무척이나 더러웠다. 찬물을 면전에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창 열정을 불태우던 것이 거짓말 같게 남자는 너무나 냉정한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이 정말 내 연인이 맞는가? 실로 의아할 정도였지만 안타깝게도 눈앞의 로메인은 누가 뭐래도 진짜였다.

“전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실제로…그러니까요.”

그는 약간 어두워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남작일 땐 저란 존재가 이득이 되었을 테지요. 작위는 하잘것없으나, 지닌 재산이나 무력은 당신께 충분히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저는 당신에 비한다면 보름달의 반딧불 같은 존재입니다. 저 같은 자가 열이 모인들, 당신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할 겁니다.”

렉시가 남작일 땐 로메인의 존재가 보다 컸다. 작은 영지의 영주에게 무력이 강한 기사란 매우 매혹적인 배우자였으니까. 혈통 좋고, 재산 또한 상당한 배우자는 누구라도 반길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그 모든 장점은 렉시의 지위가 변하면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무력? 로메인이 상급 기사이나, 공작가의 기사단은 그 수가 무려 천에 이른다.

혈통? 애초 렉시의 혈통을 따라갈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재산? 로메인의 재산은 렉시의 것에 비한다면 모래사장 위의 모래알 같은 것이다. 그의 것이 더해진들 티 하나 나지 않을 것이었다.

사람의 관계란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 남작인 렉시에게 로메인은 좋은 배우자였지만, 공작인 렉시에게 로메인은 좋은 연인이 될 수 없었다. 그곳에 남아 있는 건 이제 렉시에게 한없이 부족해진 남자뿐이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진다. 공작이라면 특히 더.

로메인은 한때 그 자리에 가까이 있어 봐서 잘 안다. 애초 그래서 그 자리를 포기했었다. 허나 렉시는 부유하고 드높았던 적이 아직 없어 그 자리의 숙명을 아직 잘 모르는 상태였다. 로메인에게는 그것이 불 보듯 뻔히 보였다.

내가 좋다고, 상대의 가치를 속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이것은 일종의 양심과 선택의 문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렉시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를 품에 안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는 순수했고, 또 결벽했으므로. 어쩌면, 그가 렉시를 조금이라도 덜 사랑했다면 필시 그랬으리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메인은 렉시를 그보다 더 사랑했다. 렉시가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가능성을 없애는 짓을 그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을 속이는 짓 아닌가.

“저는 지금의 당신에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땅히 저보다, 더 나은 배우자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도움이요? 더 나은 배우자?!”

렉시는 숨을 헐떡였다.

“맙소사! 전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제가 그런 이득을 생각하며 당신을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이득을 원해 사람을 만났다면 그는 로메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택했을 것이다. 렉시가 원하는 건 이득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끌리는 자였다. 이 사실을 로메인이 모를까? 당혹스러운 말들의 연속이었다. 로메인이 당황하는 렉시를 가만히 바라보다 설핏 웃었다.

“압니다. 당신은 그런 세속적인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란 걸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빠져들었는데, 모를 리 없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렉시에게 반한 것은 외모 때문도 있지만, 기실 그가 사랑에 빠진 순간은 외모 안쪽에 숨겨진 내면을 눈치챘을 때였다. 그저 외모로만 사람을 사랑했다면 그는 이미 황녀에게 반하여 목을 맸을 것이다. 그는 얼굴보다, 내면에서 풍기는 기품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었다. 마치 새벽에 맺힌 이슬과도 같은 깨끗한 순수함. 어떨 때 그를 보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뿐인가? 어려움을 앞에 두고도 굴하지 않는 정신은 실로 고결할 정도다. 로메인은 담담한 얼굴로 입매를 굳혔다. 반듯한 턱, 이를 악물자 숨겨졌던 핏줄이 선명히 드러났다.

“알면서 왜 이래요, 로메인. 제 지위가 변했지 마음이 변했나요?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 오직 당신만 좋아한다고요!”

“저와의 일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하셨지요.”

“그건…!”

렉시는 이를 악물었다. 고민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설득시키기 위한 고민이지, 헤어지기 위한 고민은 아니었다.

“그건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 저희 관계를 알릴까. 어떻게 설득시킬까, 그런 이야기였어요. 이런 게 아니라!”

“…적어도 당신의 부친께서는 저희 관계를 알고 계실 겁니다.”

“그게…무슨 소리죠?”

렉시는 이마를 찌푸렸다. 갑자기 여기서 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우리 일을 알아요?”

“부친이신 공작 부군께선… 생각보다 기민하신 분이더군요.”

렉시는 모를 것이다. 제 아버지의 바보 천치 같은 면 뒤엔 생각보다 더 교활한 면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하긴 그런 작자이니 무려 공작을 손에 쥔 것일 것이다. 자식이나 부인에게나 쉬운 남자지, 남들에겐 순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당하고 나서야 알게 된다. 로메인 역시 그랬다.

그가 렉시를 열흘간 보지 못한 이유 또한 그 부친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그는 여기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상대의 부모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길 하는 건 바람직한 연인의 자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제 말이 잘 와닿지 않으시겠지요. 제가 원망스럽기도 하실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렸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마치 어디론가 떠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렉시는 다급히 그의 옷깃을 잡았다.

“로메인!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건가요?”

“가지 않습니다. 당신을 두고 제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그럼 지금 말은 뭔가요. 이상하잖아요?”

그가 원한다면 그는 언제나 렉시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연인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가 원한다면 언제나 옆에 있으리라.

“이대로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저 또한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자신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당신을 탐하기엔, 제 안의 당신에 대한 사랑이 그걸 막는군요.”

한숨을 내쉬는 로메인에게 거짓의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모순적인 말이었다. 렉시는 아득함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사랑한다면서 헤어짐을 말하다니….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요?”

“…모를 리가요.”

창을 통해 내리쬐는 햇살이 이상하게 하얗다. 그 빛을 받은 로메인의 얼굴 역시 희게 빛났지만, 왠지 모르게 우는 것처럼 보였다면 너무 나간 생각일까.

렉시는 한동안 말없이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로메인의 마지막 말이 이상하게도 귀에 박혀서―.

“그저,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잊지 말아 주십시오.”

******

그날 이후, 마치 거짓말처럼 로메인이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 아버지 일로 공작성을 제집 드나들듯 하고 있다는 걸 아는데, 렉시가 그를 찾을 때마다 로메인이 자리에 없었다.

“이게 뭐야?”

헤어지는 거 아니라며! 근데 왜 이래?

렉시는 억울하다 못해 분통이 터졌다. 아무래도 혼자서 나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그러는 거 같은데 정말 불필요한 친절이다. 무엇보다 렉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로메인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렉시는 바짝 약이 올라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성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일하는 데는 한정되어 있으니, 그곳만 덮치면 로메인 검거는 성공이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겨우 몇 달 산 렉시가 로메인보다 이곳 지리에 익숙할 리는 없었다. 결국 추적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렉시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다.

어떻게 된 게 이렇게 되는 일이 없단 말인가?

허나 설상가상 그런 렉시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게… 대체 무언가?”

“이것 말이옵니까?”

렉시는 기함한 얼굴로 관리가 세워 두는 액자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일단의 무리들과 낑낑대며 가져온 것은 액자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딸려 있는 책자와 양피지, 상자들도 액자 앞에 줄지어 놓여 있다. 줄잡아 열이 넘는 모르는 여자들이 렉시의 집무실 벽을 채웠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의 초상화들이 한꺼번에 집무실에 세워지자 어쩐지 모르게 으스스했다. 초상화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렉시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렉시 앞에 시립한 관리가 말했다.

“이것은 소공 앞으로 온 물건들이옵니다.”

“무슨… 누가 선물을 보낸 것인가?”

제대로 된 예식을 거치진 않았지만 렉시는 일단 미래의 소공작. 그런 그에게 선을 대기 위해 노력하는 귀족들은 많을 것이다. 렉시도 남작일 땐 그런 적이 종종 있었으니 이해한다. 허나 보통은 …좀 온건한 선물을 보내지 않을까?

어떻게든 튀어 보겠다는 의지인지 액자들의 꼴은 가관이었다. 액자에만 장식을 하는 건 그나마 양반이다. 심지어 어떤 그림은 그림 속 여인의 눈에 진짜 보석 같은 걸 박아 놔서 보내 왔다. 저건 대체 뭘까. 요즘 뇌물은 저런 식인가?

영 감을 잡지 못하는 렉시를 향해 관리가 후후 웃으며 손을 비볐다.

“저것들은 프로하우스 소공 전하의 앞으로 온 연애편지 같은 것이지요.”

“…뭐?”

렉시의 기막힌 얼굴에 관리가 살짝 머쓱한 얼굴을 했다.

“연애편지라니?”

“그러니까, 말하자면 구혼장 같은 거 말입니다.”

뭐시라?

“나는 이제야 겨우 소공작의 자리에 올랐다. 아직 제대로 된 순서도 거치지 못했건만 무슨 구혼장이란 말이야?”

“아이고, 소공 전하. 뭘 모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원래 이런 건 먼저 찜하는 게 임자인 법이지요.”

평민 출신으로 관리가 된 남자는 말이 좀 경박한 편이었다. 그는 엣헴, 하고 헛기침을 하며 젊은 소공작의 오해를 정정했다.

“별처럼 많은 남성들 중 쓸 만한 남자란 매우 드물지요. 제국엔 많은 귀족들이 있습니다만 어떤 자는 돈이 없고, 어떤 자는 혈통이 모자라고, 또 어떤 자는 외모가 기대 이하이거나 아주 늙었답니다. 소공 전하처럼 이 모든 걸 한 몸에 지닌 사람이 드물다 이 말입지요. 모든 사람들이 안달 낼 만하지요.”

“대체 나를 언제 봤다고?”

“보지는 않았어도 소문은 발보다 빠른 법이랍니다. 전하를 뵙지는 않았지만 다들 알기는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거르고 거른 제국 유력가의 영양들입니다. 다들 한결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지요.”

렉시는 기가 막혔다. 그들의 안중엔 자신이 얼마 전 약혼을 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이 들어 있지도 않은 것인가?

“그렇게 내가 유명하다면 내 약혼 사실도 퍼졌을 텐데?”

“에이, 그건 전하께서 남작이셨을 때 했던 것 아닙니까.”

렉시의 눈초리가 스산해졌다.

“…아. 남작일 때 한 약혼은 무효라는 소리인가?”

“예? 아, 아니. 무효라는 것이 아니오라….”

관리는 그제서야 얼굴에서 미소를 잃었다. 렉시의 얼굴에 냉담한 기색이 점점 퍼지자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일단, 약혼이 제대로 마무리된 것도 아니옵고…. 아무래도 사람들 생각이 다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남작이실 때는 로메인 경이 차고 넘쳤지만, 현재로선 그분을 배우자로 들이기엔 소공께서 아깝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들 내가 새로 약혼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말인가?”

렉시가 기가 막혀 따지자, 관리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것들이 잔뜩 온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 보낸 이들도 소공 전하께서 당장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미리 선을 보인다 이런 것이겠지요.”

“…….”

렉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전담 관리마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거의 모든 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일 터. 로메인이 말하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렉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로메인 경은… 지금 어디 있나? 찾아오라고 했을 텐데.”

“그, 그것이… 분명 성에 오시긴 하셨습니다만 말을 들어 보니 또 돌아가셨다고 하여…!”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전언은 남겼나?”

“남겼습니다. 분명 남겼지요.”

렉시는 끙 하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전언을 남겨도 답이 없는 걸 보면 아주 작정하고 피해 다니는 것이 분명한데….

“―일단, 자네 내일부턴 로메인 경이 자주 들르는 장소에 출근하도록 해. 가서 로메인 경을 만나거든 어떻게든 내게 데려와.”

“제, 제가 말입니까?”

말이 거듭될수록 관리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일단 가도록 하겠습니다만…. 오지 않겠다고 하시면 어찌합니까?”

“―그걸 해결하는 게 자네 일 아닌가?”

내가 그런 것까지 해결을 해 주어야 할까? 렉시가 짜증스레 내뱉자 남자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아, 알겠습니다요.”

“―그럼 나가 봐.”

쩔쩔매는 관리를 손을 휘휘 저어 내보낸 렉시는 의자에 앉아 풀리지 않는 난제에 머리를 싸맸다. 온 성안에 저런 말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는 건, 로메인이나 후작 측이 이 말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 않다는 말일 터.

“이런 게 온 걸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정말 내가 다른 사람과 혼약해도 괜찮다는 것일까? 후작은 그렇다 쳐도 로메인은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렉시는 도무지 짐작 가지 않는 상대의 속내에 속이 탔다.

“설마 혼인해도 내 옆에서 정부처럼 있겠다는 뭐 그런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어째 로메인이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가능성이 있어 보여 문제다. 렉시는 왠지 모를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멋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네. 뭐가 이렇게 어려워?”

로메인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멀리하는지는 그래, 대충 알겠다. 렉시도 점점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닌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저 웃기지도 않은 물건들이나 사람들의 태도가 싫어도 렉시의 위치를 되새기게 했다. 관리의 말대로, 저들이 들이미는 여성들은 훌륭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로메인은 그것을 직접 느껴 보라며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겠지.

하지만 단언하는데 그건 참으로 쓸데없는 배려였다.

“연애 한번 엄청 어렵다 진짜….”

사람이 착하고 배려심이 많아도 참으로 문제로구나. 이대로 어영부영 보내다간 진짜 다른 사람이랑 혼인하게 생겼다. 렉시는 빨리 로메인을 만나 그의 그 어처구니없는 배려를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 일단 좀 만나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만나지?

“뭐가 그렇게 어려우신데요?”

“?!”

그때였다. 갑자기 상념 속으로 끼어든 목소리에 렉시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누구인지 상대를 확인한 렉시의 얼굴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요수아!”

렉시는 오랜만에 만난 그의 가신을 반가운 목소리로 맞이했다. 요수아가 생긋 웃으면서 렉시를 향해 달려왔다.

“영주님! 보고 싶었어요!”

팔짝 뛰며 팔에 매달린 요수아 덕분에 렉시는 간만에 웃음을 지었다. 늘 소공작님 어쩌고저쩌고만 듣다 익숙한 영주님 소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숨이 트인다. 방금 전까지 지끈대며 아팠던 머리가 일순 나아졌다.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단다. 별일 없었지?”

“헤헤, 물론이죠!”

렉시는 헤헤 웃는 요수아의 머리를 쓰다듬다 눈가를 좁혔다. 이마 쪽에 아직 희미하게 남은 생채기가 눈에 밟혔다.

“이마에 상처가 남았구나.”

렉시는 혀를 쯔쯔 찼다.

요수아의 상처는 예의 지진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귀족이 아니기에 식에 참여할 수 없었던 요수아와 필립은, 땅이 흔들리자마자 식장으로 달려와 자신을 구하려고 용을 썼다. 하지만 거대한 낙석 때문에 문이 막히고, 설상가상 떨어진 파편 때문에 요수아의 이마가 깨지자 필립이 기함하며 그를 데리고 밖으로 튀어 나갔던 것이다. 덕분에 며칠 요양을 하네 마네 하는 터라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되었다.

요수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 정도 가지고요.”

“이 정도라니? 그 돌이 조금만 더 컸으면 너 지금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어. 다음부터 그런 일 생기면 그냥 도망부터 쳐. 알았어? 대체… 죽으면 어쩔 뻔했니?”

섬기는 주인을 내버려 두고 도망치라는 소리를 자연스레 하는 건 상대가 아직 어리기 때문일 것이다. 렉시는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쾌활한 소년이 벌써부터 어른 흉내 내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렉시의 타박에 요수아가 콧잔등을 씰룩댔다.

“하지만 영주님이 안에 있었잖아요! 제가 어떻게 그래요?”

“날 생각했다면 그냥 도망치는 편이 나았을걸. 네가 죽었으면 필립이 날 살려 둘 것 같아?”

반은 진담, 반은 농담을 담은 말에 요수아가 입술을 삐죽댔다.

“농담 아니다. 나 요즘 필립 피해 다니는 거 알아 몰라?”

물론 때릴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필립이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질 않아서 피해 다니는 거지만… 그게 그거지.

“…뭐 생각은 해 볼게요.”

“생각이 아니지! 그냥 무조건 내 말대로 해!”

요수아의 코를 툭 친 렉시는 그를 데리고 의자에 앉았다. 렉시를 따라 앉은 요수아는 으리으리한 내부 장식을 보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오, 우와. 근데 영주님 여기 진짜 비싸 보이네요. 이게 다 진짜 영주님 거예요 인제?”

“이건 그냥 집무실 같은 거야. 굳이 따지자면 공작님 소유겠지.”

“그게 그거죠. 공작님 게 영주님 거, 영주님 게 공작님 거!”

요수아는 씩 웃으면서 손바닥을 쳤다. 요수아의 넉살에 렉시는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요수아, 다른 데서 그런 말 하면 혼나는 건 알지?”

“뭐 어때요? 내가 빈말 한 것도 아닌걸요.”

이미 다른 사람들을 통해 렉시의 모친에 관련된 이야기도 다 들은 마당이다. 그리고 그 망할 전대 남작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도 다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렉시 이하 가신 셋은 그에게 유감이 매우 많다. 요수아는 불퉁대는 얼굴로 전 영주를 씹어 댔다.

“전 전대 영주님이 언젠가 그런 사고 칠 줄 알고 있었어요.”

“너 우리 아버지 본 적 별로 없지 않니?”

“사람 됨됨이 정도야 한 번만 보면 끝이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전대 영주님한텐 무책임의 기색이 가득했다 이거예요.”

“뭐라고?”

어린것이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무책임의 기색을 운운하는 걸까. 하지만 딱히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니 뭐라 할 말도 없다.

“분명 빚도 갚을 방도도 없이 빌렸을걸요. 안 봐도 뻔하지. 돈도 엉뚱한데 썼을 거고요. 그쵸? 그나저나 우리 영지 빚은 어떻게 됐어요? 역시 공작님이 갚아 주시는 건가요?”

“…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남우세스러워 그 이야긴 어디 밖에서 한 적 없는데…. 설마 말이 어디로 새 나갔나? 렉시가 놀라 묻자 요수아가 가슴을 탕탕 쳤다.

“에이, 뭐 이 정도 가지고 놀라세요. 척! 하면 착이죠 뭐. 제가 이래 보여도 모르는 게 없다구요, 영주님.”

자리에 누워 있으면서도 뭔 이야길 그렇게 듣고 다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혹시 필립 몰래 놀러라도 다녔나?

“그나저나 그건 그렇고요. 아까 그 말은 뭔가요?”

“응? 무슨 말?”

“뭐가 어려우시다면서요. 자세히 보니깐 얼굴도 많이 상하셨네. 우리 영주님 속을 누가 박박 긁고 있나요?”

툭툭 뱉는 말이었지만 은근히 핵심을 꿰뚫는다. 생각해 보면 요수아가 공부는 안 해도 이런 소문 쪽으론 정통한 편이었다. 페르귄 영지에서도 그랬지. 어린 것이 빨빨대며 온갖 데를 설치고 다니는데 세상 별별 이야기는 다 듣고 다니고.

“이 정도면 뭐 어찌저찌 일이 잘 풀린 거잖아요. 싱글싱글 웃어야 하는 분이 왜 그리 얼굴이 칙칙하세요. 말해 보세요, 대체 뭐가 문제예요?”

“…음.”

렉시는 순간 고민했다. 사실 요수아나 필립 둘 다 렉시와 로메인의 사이를 몰랐기 때문이다. 숨기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과연 쟤에게 이걸 말하는 게 맞을까?’

이런저런 고민이 된 렉시였지만 생각해 보면 어차피 시일 지나면 알려질 일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보다 자신에게 듣는 것이 백배는 나을 것이다. 렉시는 멋쩍은 얼굴로 얼굴을 긁었다.

“…누가, 누구랑 뭘 해요?”

“그게, 뭐 그렇게 됐단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요수아는 렉시의 말을 듣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생긋거리며 웃는 얼굴이던 요수아의 얼굴은 렉시의 말이 끝난 뒤엔 귀신같이 변해 있었다. 렉시의 고백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제자리서 개구리처럼 펄쩍 뛰었다. 당치도 않은 말을 들은 사람의 난장은 렉시의 예상보다 격렬했다.

“이럴 수가! 로메인 경 사람 좋게 봤더니!”

분에 못 이긴 요수아가 발을 쿵쿵 굴렀다.

“말도 안 돼. 믿었는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건가요! 내가, 내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어!”

“…음. 그 생선이 혹시 나니?”

“그럼 고양이겠어요?!”

요수아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렉시를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실로 청천벽력이었다. 고이고이 감추어 둔 우리 영주님을 요망하고 못된 고양이가 홀라당 물어 가 버렸어! 이런 나쁜 고양이 같으니! 더더욱 화가 나는 건 그 고양이를 방금 전까지 자기가 아주 믿고 있었다는 것일 것이다. 이럴 수가….

아우아우거리던 요수아가 급기야는 렉시를 물고 늘어졌다.

“영주님 왜 이렇게 눈이 낮은 건데요. 그런 건 전 남작님을 좀 닮아야죠!”

당치도 않은 상대를 박력으로 얻은 것이 분명한 전 남작을 두둔하며 요수아는 괴로워했다. 아니 좋은 걸 좀 닮아야지 왜 그런 걸 공작을 닮았단 말인가.

하지만 듣는 렉시로선 좀 억울한 평가였다. 아니…로메인이 뭐가 어때서?

“로메인 경이 뭐가 어때서 그래? 그만하면 잘생겼고, 돈도 제법 있고, 성격도 좋잖아.”

덧붙여서 칼도 잘 쓰고 체력도 좋다. 그만하면 배우자감으로 나쁘지 않지 않나?

“작위가 낮잖아요. 남자잖아요! 영주님에 비하면 뭐든 모자라요. 뭐든 모자란다구요!”

생각해 보면 요수아는 렉시가 남작일 때도 로메인이 맘에 안 들어서 데굴데굴 구른 몸이다. 그런 요수아 눈에 공작이 될 렉시의 배우자감으로 로메인이 눈에 찰 리가 없었다. 아아 이럴 수가. 우리 공작님 배우자로 황제나, 황녀라거나, 왕이나, 왕녀라거나, 여하간 대충 그런 사람들을 꿈꾼 것이 고작 며칠 전이었건만!

꽃길만 걸어도 모자랄 내 우상이 어째서 고작 돌바닥을 선택해?!!

“남자인 것도 맘에 안 드는데 외사촌이기까지 하다니!”

크헝헝헝….

캥캥대는 요수아의 발광은 짧지만 격렬했다. 현실을 부정하고자 허우적대는 요수아의 꼴을 보다 못한 렉시가 그를 끌어다 다시 앉혔다. 요수아는 입술을 삐쭉대며 렉시를 바라보았다.

“…헤어지면 안 돼요?”

렉시는 콧방귀를 뀌었다.

“안 돼.”

너라면 필립이랑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질래? 렉시가 날카롭게 되묻자 요수아가 힝… 하고 우는 척을 했다.

“그런 남자 뭐가 좋다고… 쓸모도 없는 배려로 벌써부터 속을 썩이는 남자라구요. 지금도 보세요. 지가 뭐라고 우리 영주님을 피해 다녀요?”

“그건 나도 비슷한 생각이지만…. 그래도 날 위한 거였어.”

“어디가 어떻게 영주님을 위한 건데요!”

“나도 그가 날 이렇게 내버려 두는 건 맘에 들지 않아. 하지만 그는 내게 선택권을 주었단다. 내 가치를 알면서도, 스스로를 뒤로 물린 거야. 요수아, 생각해 봐. 너라면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겠니?”

손안의 돌이 갑자기 값진 보석으로 변하는 경험은 아무나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보통 사람이라면 필시 탐욕을 먼저 부릴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실로 그렇다. 인간의 마음속엔 선도 의도 있지만, 동시에 탐욕과 이기심 역시 내재되어 있으니…. 사실을 말하자면 렉시도 그런 상황에선 갈팡질팡할 것이 뻔했다.

“그가 날 덜 사랑했다면 약속을 앞세워 나와의 혼인을 주장했겠지. 하지만 그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걸 알고 뒤로 물러났단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물론 그 행동으로 속이 현재진행형으로 썩고는 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 아닌가.

“…흥! 자신이 없어서 뒤로 물러난 게 아니고요?”

“그랬다면 내가 잡았을 때 못 이긴 척 내 뜻을 따라 줬겠지. 그는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날…무척 좋아하고.”

렉시가 얼굴을 붉히며 말한 마지막 말에, 요수아는 결국 설득을 단념했다. 그의 영주가 저렇게 뭐 하나를 좋다고 하는 것도 처음 본 데다… 결국 이런 건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 아닌가.

“…칫.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그래, 알아 주어서 고맙다. 우리 요수아… 이제 다 컸네?”

“전 원래 컸어요! 그리고 필립 님은… 제가 말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분은 저만큼 영주님 배우자감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요.”

물론 가신 된 입장으로 가벼운 칼싸움 정도는 할지도 모르겠지만, 거기까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영주님을 데려가는데 그 정도 고난은 겪어 봐야 하는 거 아냐?

요수아는 꿍얼대며 콧방귀를 흥흥 뀌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로메인 경 봤을 때 몇 대 치기라도 할걸…. 어쩐지 쌩하니 지나가기에 이상하다 했더니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이미 지난 일 되돌리기도 어렵고, 영주님이 저렇게 좋다는데 뭐 어쩔 것인가. 요수아는 큰맘 먹고 렉시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좋아요. 도와드릴게요.”

“…? 뭘?”

“이렇게 된 이상 영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가신의 도리겠지요. 못된 고양이… 아니 로메인 경이 자꾸 도망 다니는 게 싫으시다면서요. 잡게 해 드릴게요.”

렉시는 눈을 깜박거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가 이 말을 한 건 가신에게 상황을 알리기 위한 것. 도움을 받기 위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인지가 순간 느려졌다.

“…네가?”

“다른 건 몰라도 연애 쪽으론 제가 전문가예요. 요는 도망치는 남자를 잡기 위한 방도가 궁금하신 거잖아요?”

“…그, 렇긴 한데.”

요수아는 씩 웃으며 렉시를 바라봤다.

“영주님은, 제가 필립 님을 어떻게 잡았는지 모르시죠?”

“…필립을?”

“사실 필립 님도 그랬거든요. 얼마나 저한테서 도망다녔는지 이루 말로 다 못 한다니까요.”

너는 아직 어리다느니, 자기는 이래 봬도 준법정신이 아주 투철하다느니…. 개도 웃고 갈 소리를 하면서 절 거부하더라니까요?

“…필립이?”

널 거부했다고?

“영주님이야 원래 이런 거 신경 잘 안 쓰시겠지만…. 사실 필립 님이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데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 영지에서 제일 칼 잘 쓰고, 성격은 더럽지만 얼굴은 잘빠졌고, 키도 크고, 힘도 세고. 성안에서 일하는 누나들이 필립 경만 나타나면 분칠하느라 얼마나 바빴다고요.”

“그…그랬어?”

렉시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이야기를 들었다. 실로 황당무계한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게 여태까지 다들 못된 필립이 어린 요수아를 한입에 삼킨 걸로 알고 있었다. 헌데 그 반대였다니…? 이 얼마나 놀랄 노 자란 말인가.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애가 달았겠어요. 물론 누나들보단 제가 조금 더 승률이 높긴 했어요. 그때 즈음 필립 님이 저한테 퍽 수상하게 굴었으니까요. 저도 솔직히 필립 님이 좋아서 은근슬쩍 다가갔죠. 헌데 사람 환장하게 다가서면 대놓고 빼는 걸 얼마나 해 대던지. 분명 품새를 보면 나한테 맘이 있는데, 입은 꼭 싫다고 하니까 제가 결국 딱 빡이 쳐 버린 거죠.”

하아, 멋들어지게 한숨을 내쉬는 요수아를 보며 렉시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그래서?”

“그래서 뭐 별거 있나요. 원래 저런 남자들이 한번 딱 길이 잡히면 상대에게 죽고 못 살거든요. 그래서 아예 날을 잡고, 몰래 덮쳤죠 뭐.”

“???”

내가 지금 뭘 들은 것인가? 렉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누가… 뭘 어떻게 했다고?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이게 제일 빨라요. 로메인 경 성격이면 항복 안 하곤 못 배길걸요.”

요수아는 훗 하고 웃으면서 머리를 뒤로 팔랑 넘겼다. 렉시는 황망하다 못해 등에서 땀이 났다.

“요수아… 하지만 그건…좀…!”

“로메인 경 같은 고지식한 사람은 약간 똥고집적인 면모가 있어요. 말로 해서는 끝이 안 날 거예요. 행동으로 보여야지…. 그러니까, 덮치고 선언하세요. 넌 내 거라고요.”

실로 악마의 유혹이란 저런 것일까. 듣고 있던 렉시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 내가 로메인 경을 덮치라고?

“맘 없는 사람이 그러면 물론 범죄죠! 하지만 로메인 경은 영주님이 좋다 못해 등신 같을 정도로 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미지근한 남자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는 거예요. 앗 뜨거! 할 정도로.”

“!”

원색적인 말에 렉시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이것이 바로 기혼자(?)의 박력?

“자, 어때요 영주님? 제 복안이 맘에 드세요?”

입술이 마른다. 등에서 땀이 난다. 시선이 흔들리고 초점 없는 눈동자가 정처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꼴깍.

“요수아. 그게…음, 아니 그게… 아주 급진적인 생각이긴 한데…”

“아 참, 듣자 하니 로메인 경한테도 구혼 편지가 쇄도하고 있다던데. 아세요?”

요수아의 말에 렉시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

“엊그제 정신을 차린 후작 부인이 온갖 데다 선을 대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시녀 누나가 슬쩍 하는 말을 엿들었으니 확실해요. 그러니까 하시려면, 빨리 찜하세요. 잘못하다간 이도저도 안 되는 수가 있어요.”

“……!”

파도처럼 흔들리던 렉시의 눈동자가 태풍의 눈을 만난 듯 잠잠해졌다. 흐릿하던 녹색 눈동자에 빛이 들어오는 것은 한순간. 연초록색 눈동자 위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렉시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요수아를 향해 침착하게 되물었다.

“…그러니까…뭘 어떻게 했다고?”

베르크 전 남작이 요즘 있는 곳은 성의 서편에 마련된 공간이었다.

본래라면 공비의 영역이었을 이곳은 그녀의 갑작스런 실각으로 텅 비었고, 그래서 자연스레 그가 거할 거처가 됐다. 공비가 실각한 뒤 시녀들 역시 황실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기에 성의 서편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인적이 드물어진 성의 서편은 그래서 남작이 거하기 퍽 좋았다.

정확히는, 숨어 다니기에 퍽 좋았다.

새로이 나타난 공작의 후계자는 성을 발칵 뒤집어엎었다. 자연스레 그 부친인 베르크 전 남작 역시 보는 눈이 많아졌다.

소공작에게도 물론 붙은 눈은 많았다. 허나 다들 감히 소공작에게 말 한마디 걸질 못했다. 소공작이 제 아버지를 개 패듯 팬 일은 이미 온 성안에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패는데 우리라고 안 팰까?

―아버지도 개 패듯 때렸는데 우리는 죽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섭다 한들 궁금증이란 요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닌 법. 그런 그들에게 베르크 남작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작위가 낮고, 아들에게 개 패듯 맞은 일로 은근히 만만한 이미지가 쌓인 베르크 남작. 거기다 그는 평소 입방정 잘 떠는 사람으로 이래저래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매일 눈을 까뒤집고 남작을 찾아다녔다. 이러하니 아무리 담대한 남작이라도 맘대로 나다니기는 참으로 힘들 밖에.

하여 이렇게 은인자중하는 그의 요즘 심내는 대충 이런 것이 다였다.

―조금 시끄러운 것이 멈추면 나가야지. 아들이 화 좀 덜 내 줬으면 좋겠다. 마누라가 주는 일거리도 짬짬이 처리하고, 소소하게 취미 생활도 좀 하고, 임신해서 퉁퉁 부은 마누라 발도 잘 때 몰래 좀 주물러 주고.

임신하면 원래 그랬나 싶게 요즘 그의 아내는 신경질이 퍽 늘었다. 가끔은 성을 내며 자기 머리칼을 몇 가닥 쥐어뜯기도 했다. 그래도 그의 예상보다 손속이 덜한 건 그의 아들내미가 야물딱지게 쥐어팬 상처가 퍽 커 보이기 때문일 거다. 그가 슬쩍 아픈 척할 때마다 쥐어뜯는 손아귀 힘이 조금 약해진 거 뻔히 봤다. 그러니 확실하다.

그래서 그는 그 상처를 일부러 좀 내버려 두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손을 쓰면 멍 자국 정도는 지울 수 있지만, 아내의 노여움에서 좀 벗어나려면 이 정도쯤은 감내할 수 있다.

그는 속으로 툴툴댔다.

―자식, 그래도 지 애비를 그렇게 패냐.

아들의 손속은 생각보다 조금 더 아팠다. 물론 자기가 잘못한 게 많긴 해서 얌전히 있었다. 만일 자기가 진심이었으면 아들은 자신을 한 대도 때리지 못했을 거다. 얌전히 맞은 건 그가 나름 반성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의 거시기(?)를 그렇게 팬 건 쪼오끔 너무하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마지막에 남기고 간 위협도 조금 그랬고….

“당분간 내 눈앞에 보이면 다리 사이 그걸 확 잘라 버릴 줄 알아요!”

한참 패고 난 뒤 이렇게 썽을 내며 사라지는 아들의 모습이 어찌나 무섭던지…!

허나 아들이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을 수밖에 없는 슬픈 짐승, 그대의 이름은 죄 지은 아버지라.

그리하여 그는 그래서 밖을 나가도 일부러 아들이 나올 만한 곳은 피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설마 정말 자를까? 싶긴 하지만…. 가끔은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 혹시라도 진짜 봤다고 내 다리 사이 그걸 자른다고 나서면 어떻게 해?

그래서, 그는 갑자기 찾아온 아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 아들?”

“…안녕, 바보 아버지.”

“어…어, 으음?”

베르크 남작은 어설프게 인사하며 슬쩍 가랑이를 옷으로 가렸다. 저고리가 긴 게 다행인 건지 어쩐 건지…. 물론, 슬쩍 한다고 하는 그 행동이 안 보일 리는 없었다. 렉시는 기도 안 차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시푸르딩딩한 멍을 달고 가랑이를 옷으로 가리는 모습이란 솔직히 웃기지도 않는다.

뭐 하는 거야 진짜? 하여간 저 진상!

렉시는 흥하고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 앉았다. 멀리 있던 남작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물론 엉덩이는 조금 뒤로 뺀 채였다.

“여, 여긴 어쩐 일이냐?”

“왜요. 내가 못 올 데 온 건가?”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는 렉시의 눈초리가 북풍한설보다 더 매섭다. 찔끔한 베르크 전 남작이 고개를 재빨리 저었다.

“으응? 아니, 아니지…. 올 데 왔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흥. 살 만하신가 보네. 생각보다 방도 제법 좋은데요?”

자리 아깝게. 렉시가 싸늘하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남작이 싸바싸바 손 비비다 말고 펄쩍 뛰었다.

“조, 좋긴! 이거 그냥 손님방이야! 여기가 어, 워낙 좀 부유하잖냐. 그래서 그래 보이는 거야. 아무렴 내가 젤 좋은 방을 가져다 썼겠어?”

“…뭐, 그건 그렇겠지만.”

솔직히 좋은 방을 가져다 쓴 건 중요한 일은 아니다. 사실 렉시는 지금 일부러 꼬투릴 잡고 있다. 일종의 기선 제압용이었다. 엉거주춤 서 있는 제 아버지를 보아하니 기선 제압은 대충 잘된 것 같고…. 좋아. 렉시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앉아요.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기이이이익.

기이한 신음 소리를 내며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베르크 전 남작은 렉시의 도끼눈을 모른 체하며 렉시와의 사이에 안전거리를 만들고 의자에 앉았다.

안전거리, 대략 삼 미터.

멀리 떨어진 제 아버질 보며 렉시가 허, 하고 기찬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누가 잡아먹는대?”

“…그렇진 않은데, 왜 만일이란 것이 있잖냐 아들.”

“―지은 죄가 큰 줄은 아나 보죠?”

저렇게 무서워할 거면서 죄는 왜 짓고 다녔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죄 지을 땐 정신머리를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가? 걸고 넘어가고픈 것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렉시는 참았다. 그는 각설하고 온 목적부터 꺼내 들었다.

“뭐 됐고, 바보 아버지. 요즘 몸은 어때?”

“으, 어엉?”

베르크 남작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갑자기 몸?

“그건…왜?”

얘가 왜 갑자기 와서 내 몸 상태를 물어보지. 혹시 쫓아다니는 놈 좀 방해한 거 걸렸나? 아닌데, 안 걸리게 했는데??

혹시나 또 때릴까 봐 새파랗게 질린 남작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그걸 정면으로 본 렉시가 얼굴을 우거지상으로 구기며 타박했다.

“대답이나 해요. 머리 굴리지 말고! 좋아요, 나빠요?”

“조, 좋다!”

그는 얼떨결에 진실을 이야기하고 혀를 깨물었다. 아뿔싸, 좋다고 하면 안 되는데! 그런 그를 보고 있던 렉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흥, 역시 엄살이었어.

“―좋네. 요즘 바쁜 일도 없을 거고요. 그렇지?”

“…그, 그런지?”

“좋아요. 아주 좋아.”

사실 바쁘려면 바쁠 수 있지만 그도 눈치는 있다. 아들의 만족스러운 얼굴에 베르크 남작은 조금 안심했다. 그래, 역시 안 들켰어. 어쨌거나 그를 다시 때리려는 것은 아닌 것 같고. 노골적으로 가슴 쓸어내리는 아버지를 보며 렉시는 다리를 슬쩍 위로 꼬았다.

“―몸도 멀쩡하고 일도 없고 남는 건 시간뿐인 바보 아버지. 내 부탁 좀 하나 들어줘야겠는데요.”

“…부탁?”

말이 부탁이지 하는 행동은 꼭 명령이다. 실제로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렉시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란 자신이 있었다. 떨떠름한 얼굴을 한 아버지를 향해, 렉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내밀었다.

“이 부탁 들어주면 그간 한 일 다 용서해 줄게요.”

베르크 남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날 속인 거. 그래서 개고생 시킨 거. 몰래 몸 숨겨서 연락도 안 한 거. 다 없던 일로 쳐 주겠다고요.”

“지, 진짜? 진짜로?”

“아버진 몰라도 난 이런 거론 거짓말 안 해. 내 명예와 이름을 걸죠.”

아들의 진지한 얼굴을 본 남작의 얼굴에 희열이 스쳤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럼 혹시… 네 엄마한테도 잘 말해 줄 수 있어?”

“…혹시 내가 용서해 줬다고 말해 달라는 거?”

“응! 바로 그거 말이다!”

“―두 분 요즘 안 좋아요?”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닌데…!”

안달하는 아버지를 보며 렉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만 준다면야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좋아. 해 줄게요. 대신 일을 잘 처리하는 조건이에요.”

“한다!”

뭐든 한다!

베르크 남작은 넙죽 미끼를 물었다. 아들을 홀대한 벌로 각방 쓰고 있는 남자에게 서광이 비치는 순간이었다. 그는 멀리 떨어졌던 몸을 냉큼 앞으로 들이밀었다. 죽는 거 빼놓곤 뭐라도 들어줄 수 있다. 열망이 드글드글 떨어지는 남자의 두 눈동자가 렉시에게 집중됐다.

“그래.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되는 거냐?”

렉시는 몸을 앞으로 내밀며 은밀하게 말했다.

“―사람 한 명을 제게 데리고 와요.”

“사람?”

잠시 생각하던 베르크 남작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혹시 그 씹어 먹을 백작 놈?”

기레스 백작을 말하는 줄로 안 남작의 얼굴 위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래. 다른 사람 몰래 죽여 버리게? 난 찬성이다!”

렉시가 버럭 소리쳤다.

“미쳤어요? 그건 국법이 해결해 줄 거니까 생각도 하지 마요. 그 건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으니 아버지는 손댈 것도 없고. 내가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고…. 아마 좀 힘들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기사라서.”

“기사라고?”

“응. 실력도 상당하니까요.”

렉시의 말에 남작이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그는 얼굴을 톡톡 두드리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라…. 뭐, 좀 까다롭긴 하지만 어려울 건 없지. 원래 그런 놈들이 방심을 더 잘하거든. 그런데 살려서 데려와?”

“물론이죠! 절대 다쳐선 안 돼. 살려서, 몸 안전히 데려와야지. 할 수 있겠어요?”

베르크 남작은 씩 웃었다. 얼핏 들으면 어려운 일 같지만 상대가 기사라면 꽤 쉽다. 정면 승부라면 어려울지 모르지만 기사들은 보통 이런 일에 취약했다. 본인들의 무력을 믿는 자들은 자존심이 높기에 타인을 의심할 줄 모른다. 자랑은 아니지만, 베르크 남작은 이런 시야의 사각지대를 누구보다도 잘 활용할 줄 알았다.

“그거야 내 전공이지. 문제없다. 언제까지 하면 되냐?”

“빠르면 빠를수록!”

당장 오늘이라도 데려올 수 있다면 좋겠단 소리다. 남작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이런 일은 맘먹었을 때 처리해야지. 대체 우리 아들 눈에 밉보인 그 불행한 기사 놈이 누군지 좀 들어 볼까?”

“로메인 경이요.”

“응, 그래 로메인 경? 나도 사실 그 벌레 놈이 좋진 않…. 잠깐.”

줄줄 말하던 남작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누구?”

“로메인 경. 데퓨탄 후작의 둘째 아들이요. 아버지도 알잖아?”

“어… 알지. 알긴 하는데…!”

남작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아들을 바라봤다. 대관절 저 예쁜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걔는 …왜?”

“나, 결혼하려고.”

“?????”

베르크 남작의 얼굴이 희한하게 변했다.

“겨… 결혼? 누구랑?”

“말이 이 정도 진행됐음 대충 알 만하잖아요 아버지. 거기다 아버지, 나랑 로메인 경 연애하는 거 대충 안다며? 그런데 내가 굳이 따로 말을 해야 하나?”

“…너, 너!”

아들이 뭔 말 하나 드디어 깨달은 부친은 입을 쩍 벌렸다. 푸르딩딩한 멍 자국만큼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세상에!

“너, 설마 지금 나한테 보쌈을 시키는 거냐?”

“내 주위에 무력이 센 사람은 필립과 아버지가 다야. 하지만 필립은 이런 일을 시키기엔 조금 그렇잖아. 그러니까 아버지가 해야죠.”

자식이 해 달라는 걸 해 주는 건 부친의 의무! 렉시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남작은 기겁하며 뒤로 몸을 뺐다.

“안 돼…! 절대 안 돼! 결혼이라니. 결혼이라니!”

아우성치는 아버지를 향해 렉시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왜 안 되는데? 로메인 경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얌마! 그거 너 사촌이야. 외사촌! 외사촌이랑 연애한 것도 복장 터지는 마당에 결혼? 이놈아 꿈도 꾸지 마! 남들이 흉본다!”

“사촌이 뭐 어때서? 사랑에 그런 게 어딨어? 좋아하면 다 된 거지!”

“야!”

“아버지는 엄마가 남잔데도 결혼했으면서 고작 외사촌인 게 뭐가 어때서 그래?”

따지고 보면 남자나 외사촌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남작은 렉시의 논리에 맞대어 고함쳤다.

“야 이놈아. 나는 사랑이 있었어. 사랑이! 그렇게 댈 게 아니지!”

“아버지만 사랑할 줄 알아? 나도 사랑해! 나도 사랑한다고!”

렉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어머니 때문에 나도 버렸어. 그런 주제에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어?”

“!”

제일 찔리는 부분을 공격당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간신히 떠올린 반론을 입에 담았다.

“그, 그래 좋다. 너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로메인 경은? 로메인 경은 무슨 죄로 너한테 보쌈을 당해야 하냐? 그놈 인생은 생각도 안 해?”

아들이 안 되면 상대를 잡고 늘어진다. 로메인 경을 잡고 늘어지는 베르크 남작의 말에 렉시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렉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날카롭게 대꾸했다.

“로메인 경도 정부보단 나와 부부인 쪽이 나을걸?”

짧지만 많은 것이 담긴 말이었다. 득의양양해하던 남작이 컥 하고 숨을 삼켰다.

“그놈이 너한테 …정부가 된다고 그랬어?”

“내가 다른 사람이랑 혼인한다고 해도 평생 옆에 있어 준다더라. 걱정 말래, 절대 옆에 있을 거래. 그런 사람을 어떻게 정부로 둬? 당연히 내가 거둬야지. 사람이면 그래야지! 아버지라면 그럴래? 어머니가 그렇게 나오면 정부로 둘 거야?”

“그, 그건!”

절대 안 되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가정에 베르크 남작이 몸서리친다. 소금 맞은 달팽이처럼 몸서리치는 베르크 남작을 보며 렉시는 두 주먹을 결연히 맞잡았다. 녹색 눈동자가 태양처럼 밝게 빛나며 상대를 응시했다. 렉시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아버지, 그러니까 응? 나, 로메인 경 정말로 좋아해요. 정말로 사랑해!”

“끄, 끄응….”

“아빠아!”

“으으으윽!”

남작은 괴로워하며 머리를 싸맸다. 보쌈이라니. 결혼이라니. 으으윽! 으으으윽! 끙끙대는 아버지는 간절한 표정의 아들을 보며 가슴을 푹푹 쳤다. 사춘기 한번 겪지 않던 아들이 이렇게 자신의 뒤통수를 칠 줄이야! 곱게 키운(?) 아들자식에게 배신당한 부친의 몸부림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고로 자식 이기는 부모란 없는 법인 것을.

뒤굴, 비틀, 움질, 꿈질.

아아 안 되는데.

정말로… 정말로 안 되는데에에….

흑흑흑, 정말로 이건 안 되는 일인데…!

그렇게, 공작성 한 켠에서 부자지간이 서로 끙끙대고 있을 무렵.

공작성과는 다른 의미로 뒤집어진 한 후작가 저택에선, 두 모자지간이 서로 아르릉대며 대치하고 있었다.

“이제야 돌아오는 거니?”

“…어머니?”

로메인은 방안에 들어오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들어오자마자 환하게 밝아진 방안 한가운데, 어머니 후작 부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누워 있다 일어난 사람답지 않게 그녀는 혈기가 넘쳤다. 정확히는 악이 넘쳤다고 해야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마는.

어쨌거나 며칠 만에 본 아들을 향해 그녀는 눈을 부라렸다. 잔뜩 화가 난 모습에 겁이 나기도 하련만 그렇진 않다. 아들을 보는 어미의 입술에서 날카로운 질타가 튀어나왔다.

“그 비싼 얼굴을 이제야 보는구나. 하도 보이지 않길래 아예 나가 사나 했지! 로메인, 네가 도둑이니? 살금살금 들어왔다 나가게?”

끙, 로메인은 침음성을 냈다. 이럴 줄 알고 잠깐 서류만 가지고 왔다 가려던 거였는데 아뿔싸. 설마 아예 들어와서 기다릴 줄이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이게 딱 그 짝이련가.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 아들 하나가 며칠간 코빼기 하나 비치질 않아서 직접 찾으러 왔지. 너, 나이 먹었다고 이제 네 엄마가 우습게 보이니?”

“어머니…. 침소봉대하지 마십시오. 제가 감히 어떻게 어머니를 그리 보겠습니까?”

“그래? 그럼 말해 보려무나. 너 어째서 계속 날 피하니. 이 어미가 네게 보자고 한 말을 왜 무시하는 거니? 듣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렴. 다 전해 들은 거 알고 있으니까.”

“하아….”

로메인은 한숨을 삼키고 어머니와 마주했다. 어째서 피하냐니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일까.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벌인 일로 그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꼭 말로 해야 아는 것인가.

“어머니.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지 말긴 뭘?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모른 척하시기입니까…? 좋습니다. 직접 말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지요.”

로메인은 후작 부인을 지나 책상 위에 있는 물건에 손을 댔다. 그가 계속 외부를 돌게 만든 물건을 보는 로메인의 시선이 냉담했다. 아들이 뭘 하나 지켜보던 어머니의 얼굴이 순간 희게 변했다.

“자, 잠깐!”

그러나 말보다 행동이 빨랐다.

빠각!

마치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공처럼 뭉쳤다 부서졌다. 기를 사용하는 기사의 손에서는 무쇠조차 무사하지 못하다. 손에서 무참히 바스러진 물건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벌인 일로 황당해진 얼굴이 무참했다.

“―자꾸 저런 걸 가져다 놓으시니 하는 소리입니다. 여태까진 어머니 얼굴을 보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만 앞으로는 죄다 태울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짓은 이제 그만하십시오.”

“…로메인!”

바들바들 떨던 후작 부인이 결국 참던 노화를 터트렸다.

“너… 정말 이럴 거니?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이런 건 절 위한 게 아닙니다. 절 정말로 위하신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을 겁니다.”

설마 했던 선언이 급기야 떨어졌다. 가슴이 덜컹대는 소식에 후작 부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럼 어쩌려고!”

그녀는 가슴을 턱턱 치며 아들을 향해 소리쳤다.

“뭘 어쩌려고! 후계자 자리는 이미 날아갔고! 약혼은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끝이 났잖아! 그래, 십분 양보해 후계자 자리는 없었던 일로 칠 수도 있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니었으니 없었어도 아쉽진 않아. 하지만 결혼은 해야 할 거 아니니? 혼자 살 거야?!”

“…….”

“너 요즘 하는 걸 보면 내가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아. 실패한 사람들이 다 너처럼 모든 걸 놓지는 않아. 너, 고작 약혼 한번 실패한 걸 가지고 모든 걸 놓아 버릴 거니?”

외면하고 있던 로메인의 시선이 다시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어머니를 닮아 푸른 눈동자가 이 순간 바다처럼 검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질문했다.

“어머니가 보기엔 …제가 모든 걸 놓은 것 같습니까?”

“그럼? 넌 지금 네 모습이 어떻게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아들을 응시했다. 아무리 자리에 누워 있더라도 엄마는 엄마다. 자기 아들이 뭣하고 돌아다니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제 아들은 요즘 정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울고불고 화를 내면 또 모르겠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내가 이렇게 걱정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너 요즘 어떠니? 맥아리없이 그저 돌아만 다니고 있잖니!? 말해 보렴. 너, 요즘 제대로 하는 게 있긴 하니?”

한순간 로메인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요즘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아실 텐데요.”

“그래, 그깟 일 조금 한다고 하루 종일 성에 있다가 오지. 내가 널 몰라? 네가 맘만 먹으면 그깟 거 반나절이면 끝낼 수 있단 거 이 어미도 다 안다. 아버지 일 도와준답시고 뻔질나게 성을 가서, 몰래 약혼자 얼굴이나 보고 돌아오는 게 네 요즘 일과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미묘한 미동이 일었다.

“그건 어떻게….”

“너만 시종들과 선이 있는 게 아니다. 이 어미는 그곳에서 스무 해 가까이를 살았던 사람이야. 내가 후작 부인이 됐어도 공녀였던 사실이 사라지겠니? 다른 건 몰라도 네가 하는 일 정도는 나도 알아낼 수 있어!”

시종들이 이용하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하는 짓이 고작 옛 약혼자 스토킹이라니! 그녀는 아들의 기행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딱히 몰래 본 것은 아닙니다.”

“만나지 않았으면 몰래 보고 온 거다. 그쪽은 네가 그러고 다니는 걸 알고 있어?”

로메인은 침묵했다. 물론, 알 리 없었다.

“그래, 모르지. 알 리가 없지. 볼 리도 없을 거고. 난데없이 공작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옛 정혼자가 눈에는 들어오겠어?”

“어머니. 그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와 엮이는 게 싫으니 안 보는 것 아니겠니?”

“바빠서 그런 겁니다. 그저 바빠서―.”

그녀는 자리에서 펄펄 뛰었다.

“그딴 말 그만하렴! 이젠 약혼자도 아니면서 왜 대신 변명을 해 주는 거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넌 그 애를 아직 잊지 못하지만 그 애는 이미 널 잊었어!”

“그건…!”

로메인은 뭐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이 상황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일부러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딱히 변명은 할 수 없었다. 떨어지길 원한 것이 자신이고, 그 반대라고 해도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또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부모에게 그가 원해서 휴지 기간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어떻게 말을 하겠는가?

로메인이 침묵하자 후작 부인은 속이 상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래, 속상하겠지. 나도 속이 상해. 나도 놀랐고, 속이 터지고, 안타깝고 분하니까. 내가 그런데 너는 어떻겠니?”

“…….”

때론 침묵으로 이성을 찾기도 한다. 씨근덕대던 후작 부인의 과한 흥분 역시 로메인의 침묵으로 조금씩 잦아들었다. 차분히 정신을 차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던 로메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밤이 깊었습니다. 그만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주무셔야지요.”

“네가 그렇게 부모를 생각하는 녀석인 줄 방금 처음 알았구나. 그래, 그렇게 내가 걱정되면 내가 보여 주는 사람들을 좀 봐 다오. 네 전 약혼자만큼은 안 될지라도 어디 빠지는 사람들은 아니다. 제발 부탁이니 그 애는 이제 잊자. 당장은 힘들지만, 세월이 지나면 분명 잊힐 거야. 사람의 감정이 다 그런 법이야.”

“―어머니.”

로메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자신을 절절하게 걱정하는 어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세상엔, 때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그 사람들 만날 생각 없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걸 제게 가져오지 마시고…. 저는 그냥 이대로 둬 주십시오.”

“이대로 두라니…? 그럼 …영영 혼인 안 한다는 말이야?”

로메인은 침묵했다. 허나 그 침묵이 긍정이라는 걸 그 어미가 모를 리 없다. 후작 부인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통곡 섞인 울먹임이 부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너 정말 왜 이러니. 응? 내가 밥통을 낳았어. 내가 멍충이를 낳았어! 이 미련한 것아!”

묵묵히 서 있는 아들을 보며 그녀는 바닥을 탕탕 치고 울부짖었다.

“이게 뭐니. 이게 뭐니! 그렇게 그 사람을 못 놓겠으면 가서 자리에 눕고 읍소라도 해야지! 그렇게 실연이 싫다면 그래야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그렇게 산송장처럼 말라 죽어 갈 거면 그러기라도 해야지!”

“어머니, 고정하십시오.”

“내가 뛰다 죽겠다. 뛰다 죽겠어! 이 밥통아. 이 멍텅구리야! 검만 쓰면 뭐 해! 어떻게 저렇게 아둔한 걸 내 속으로 낳았지?!”

“하아….”

엉엉 우는 어머니를 보며 로메인은 떫은 숨을 내뱉었다. 오늘 아버지가 궁에서 오지 않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이런 모습의 어머니를 보면 아버지도 뒤로 넘어갈 것이 뻔할 뻔 자다. 그는 아까부터 몰래 와서 안을 살피는 하인들을 향해 눈짓했다. 들어와서 어머니를 모셔가라. 하인들이 기다린 듯 후다닥 달려와 후작 부인을 모셔갔다.

“날 놔라. 날 놔!”

“마님, 부디 고정하십시오.”

“모두 마님을 방으로 뫼시어라!”

“이거 놓으라고!”

그녀는 방으로 가지 않기 위해 버텼지만 사람 여럿이 들고 가는 덴 장사 없었다. 그녀는 하인들의 품에 들려 가면서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아이고…!”

멀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드디어 사라졌다. 하인과 하녀들이 고생을 좀 하겠지만 그는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지끈대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잠깐 사이 온 심력을 다 쏟았더니 머리가 다 아팠다.

“피곤하군….”

문이 닫히고, 소리가 차단된 방안에서 그는 한동안 무력하게 서 있었다. 단지 말 몇 마디 나눴을 뿐이건만 온몸에서 힘이 쫙 빠진다.

“렉시….”

자기도 모르게 렉시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시간엔 시종들도 자신을 들여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게 온정적인 시종들이라도 목이 달린 일엔 그를 냉정히 쳐낼 테니.

매일같이 보는 렉시는 날로 아름다워졌다.

새로이 나타난 새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렉시에게 어울릴 만한 걸 잔뜩 선물했다. 덕분에 렉시가 걸치는 것들은 날로 새로웠다. 뭘 입어도 소화시키는 주인의 모습은 시종들의 손도 바빠지게 했음이 틀림없었다. 원래도 아름다웠지만, 매일같이 아름다움을 갈고 닦는 렉시의 모습은 마치 빛의 신이 현신한 것처럼 번쩍거렸다.

“…….”

렉시의 모습을 떠올리던 로메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로메인은 그가 오늘 본 다른 것들을 생각하며 눈가를 날카롭게 좁혔다.

“…초상화라.”

그의 눈에 보물이면 다른 눈에도 보물일 것이라는 건 예상했다. 자신이 뒤로 물러서니 어중이떠중이들이 다들 몰려들 거란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그게 마음에 든다는 말은 아니다. 초상화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걸 박살 내고 싶었으니까. 기사로서 처음 겪는 광폭한 감정에 그는 순간 모든 걸 뿌리칠 뻔했다.

열로 들끓는 가슴이 그에게 명령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앞으로 온 발칙한 물건들을 죄다 부수자.

그리고 렉시를 안아 들고 사랑을 고백하며 당신과 함께하고 싶노라 외치자.

할 수만 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이게 바로 내가 선택한 길이지.”

로메인은 쓰게 웃었다. 이미 그의 선택을 존중하겠노라며 뒤로 물러선 마당이다. 말을 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내뱉은 이상 그는 렉시에게 그 말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렉시가 어떤 길을 택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온전히 그에게 선택권을 주겠노라 맹세하지 않았던가.

설령, 그가 다른 이와 혼인하게 되더라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군….”

하늘에 떠오른 달이 유달리 밝아 더욱 외로운 밤. 로메인은 방의 장식장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던 해의 포도로 만든 와인이었다. 선물 받은 뒤 한 번도 딴 적이 없었던 이 술을 이런 날 따게 될 줄이야.

하지만 오늘은 정말 술이 없인 잠들고 싶지 않았다. 로메인은 주저 없이 코르크 마개를 땄다.

퐁!

“…달군. 달고, 써.”

십여 년간 숙성된 와인은 제법 독했다. 담았던 해의 포도가 유달리 달다더니 그 탓인지도 모르겠다. 한잔, 두잔, 세잔…. 잔이 거듭될수록 로메인의 눈동자가 무거워졌다. 몇 번째 잔이 비워졌는지는 그도 잘 알 수 없었다. 발치 아래 굴러다니는 술병이 세 병이 넘어갔다. 취기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로메인은 천천히 감겨 오는 눈을 깜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고 싶군.”

천천히 차오르는 어둠 속에서 갈색 머리칼을 가진 미인이 그를 보며 웃고 있다. 술이 보여 주는 환상인 걸 알고 있지만 그는 견디지 못하고 손을 내뻗었다. 살며시 안겨 오는 렉시의 향기는 잔뜩 취한 술보다 더 달고 독했다.

“렉시….”

가능하다면, 이 꿈 안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

로메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밝게 웃고 있는 렉시가 점점 그에게 다가왔다.

.

.

.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야음을 틈타 방 안에 몰래 침입한 한 남자는, 술로 떡이 된 로메인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헐…. 아니 이게 웬 떡?”

******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을 저지르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이것을 물어본다면 보통은 이런 것들을 늘어놓는다.

일을 행할 수 있는 실행력, 그 일을 감내할 수 있는 담력, 두 명 이상이 필요한 일이라면 그 일을 도와줄 수 있는 하수인, 금전, 여유 시간, 알리바이 등등등.

필요한 것을 따지라면 사실 한도 끝도 없다.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이거저거 챙기다 보면 끝도 없어지는 것이 사전 준비물 아닌가.

허나 이들 중에서도 가장 선결 조건인 것을 꼽으라 한다면 응당 이것이 꼽힐 것이다.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

그곳은 가급적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으며, 드나듦이 은밀한 데다 혹여 들키더라도 재빨리 몸을 피할 수 있는 그런 비밀 공간이어야 한다.

앞으로 렉시가 행할 일에는 바로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호기롭게 요수아의 권유로 나선 렉시는 이걸 뒤늦게 떠올리고 낭패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공작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렉시에겐 무척 힘든 일. 형편 좋게 자기 방에서 일 처리하면 안 되는 건가 생각했지만, 잘못하면 실행 도중 들킬 위험성이 크다.

헌데 놀랍게도 이 일을 해결해 준 건 미적거리던 렉시의 아버지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그런 장소를 누구보다 많이 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종들보다도 더 잘 안다. 시종장 때문이었다.

“소싯적에 그 인간 때문에 온갖 델 다 뚫어 놨지. 그 인간이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너는 모를걸. 그렇게 숨고 숨어도 쫌만 이상하면 곧바로 쫓아오더라니까.”

“…….”

“여긴 개중에서도 한 번도 안 들킨 데야. 이렇게 알리기 좀 아깝지만, 내 아들을 위한 일이니 내가 공개하지. 어때, 이 아버지의 인심이?”

“……하.”

렉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자식 앞에서 대체 이 인간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걸까? 하지만 어쨌거나 고맙긴 고마운 일이다. 로메인 데려오고 나서 일 치르다 들키면 쪽팔리고 엿 먹는 건 그밖에 없다.

“…고맙습니다.”

“핫핫핫! 그렇지?”

베르크 남작이 코끝을 치켜세웠다. 인간 이하의 아버지에서 그나마 한 단계 위로 올라온 것 같은지 코끝이 아주 하늘을 꿰뚫었다. 그래 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쨌거나 그는 아들을 그렇게 비밀 장소에 데려다 놓고 힁하니 사라졌다. 렉시는 방안에 멍하니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법이네.”

비밀 장소인 주제에 있을 건 다 있었다. 피신처로 쓰기 위한 장소였는지 얼마간 버틸 수 있는 식료품과 약, 옷가지들도 보였다. 아버지가 이런 걸 가져다 놓을 위인은 아니니, 누군가 주기적으로 들러 채워 넣고 있을 것이다. 구조는 페르귄 성에 있는 피신처와 비슷했으므로 파악이 어렵진 않았다. 곧 장소에 익숙해진 렉시는 곧 들려올 로메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요수아가 뭐랬더라….”

홀로 준비하려고 하면 막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한번 길을 밟은 대선배(?)의 조언이 있다. 렉시는 요수아가 말한 대로 방을 꾸미고 테이블을 가까이 끌어왔다. 간단한 요깃거리와 함께 술 한 병을 꺼낸 렉시는 잠시 고민하다 작은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유리병 안에선 그냥 봐도 수상해 보이는 약물이 찰랑거린다. 귓가에서 이걸 넘겨주며 으쓱대는 요수아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자요. 이게 바로 기사한테도 듣는 묘약이에요. 딱 한 방울만 먹이면 만사형통이죠.’

‘…뭐?’

‘몸에 나쁜 거 아니에요! 막 춘약 같은 거도 아니고. 요약하자면 사람의 본심을 내보이는 약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일종의 자백제?’

‘…너, 설마 필립 약 먹이고 덮쳤니?’

‘아뇨, 서로 덮친 거죠! 저도 같이 먹었으니까요! 그리고 끝이 좋음 다 좋은 거라구요. 안 그래요?’

필립….

렉시는 왠지 필립도 이 일을 아는 건가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똑같은 짓을 하려고 약 받는 마당에 뭐라 하기도 참 무엇했다. 렉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요수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가 약을 품 안에 넣는 것까지 확인한 요수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렉시를 응원했다. 내용은 퍽 무안했다.

‘다음으론 제가 알려 준 대로만 하시면 돼요. 아셨죠? 영주님은 할 수 있어요!’

“약이라.”

렉시는 잠시 망설였다. 살다 살다 이런 일까지 해 보다니 인생 참 회의감 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뒤로 뺄 거면 시작도 안 했다. 렉시는 마음을 다잡고 술병 안에 약을 떨어트렸다. 무색, 무미, 무취의 약이 술병 안에 순조로이 섞였다. 긴장된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자리를 정돈하던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아들! 나 왔다!”

“?!”

아버지?

렉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오지? 혹시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났나 싶어 시계를 보니 실제로 너무 빨리 온 게 맞았다. 이 시간이면 거의 그냥 갔다가 돌아온 수준 아닌가. 혹시 데리고 오는 걸 실패했나?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혹시 약이라도 쓴 건가요?”

렉시는 인사불성인 로메인을 보며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으차! 그게 아니고, 가니까 술 먹고 떨어졌더라. 그래서 알아서 업어 왔지. 크, 엇차!”

등에 업힌 로메인을 침대에 내려놓는 태도가 퍽 거칠다. 푹 소리를 내며 로메인이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거칠게 떨어지는 모습에 가슴이 선뜩했지만, 어찌나 고주망태가 되었던지 깨긴커녕 눈도 못 뜬다. 달달한 술 냄새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풀풀 날 정도였다. 렉시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아니 이게 무슨….

“대체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저렇게….”

“낸들 알겠냐, 나중에 네가 물어보든가 해라. 뭐 덕분에 힘은 좀 덜 썼다. 혼자서 대여섯 병 정도 비운 것 같던데 생각보다 술이 약한 모양이야.”

남작은 툴툴거리며 몸을 털었다. 그리고 동시에 작업복을 벗었다. 야음을 틈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입은 검은 옷이 후두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야행복을 벗고 그럭저럭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남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일단 난 약속 지켰다. 이젠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너 알아서 할 일이고….”

그는 삐죽거리며 렉시를 흘낏거리다 조그맣게 속삭였다.

“약속, 지킬 거지?”

“…알았어요. 이 일 끝나면 곧바로 해 드리죠.”

그래 그거 물을 줄 알았다…. 렉시가 떫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이 간절한 얼굴로 재차 매달렸다.

“진짜다? 잊으면 안 된다!?”

아들의 보쌈까지 도와준 마당에 나가리 될까 안절부절못하는 남작이었다. 대답 안 하면 끝까지 매달릴 것 같은 대우주의 기운에 렉시는 신경질을 내며 아버지를 내쫓았다.

“지켜요. 지키니까… 얼른 나가요!”

“좋았어! 아들, 아들만 믿는다? 그럼 걔랑 좋은 시간 보내고…. 으음, 혹시 다른 것도 좀 도와줄까?”

렉시는 기가 찬 얼굴로 아버지를 노려봤다. 이 마당에 도와줄 거라곤 밤일 하나밖에 없는데…. 무얼 염두에 두고 저 말을 한 건지 그가 모를 리 없다. 맙소사 이 망할 인간이! 렉시는 성이 난 얼굴로 와락 외쳤다.

“나가요. 당장 안 나가요?”

“아, 아얏. 때리지 마! 나가면 되잖아?”

“당장 나가욧!”

퍽!

짧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메인은 꿈을 꾸고 있었다.

살랑대는 바람이 먼 데서 불어오고, 푸르디푸른 초원이 끝도 없이 이어진 이상의 공간. 그는 천천히 말을 달리며 말고삐를 만지작댔다. 자신의 앞에 앉힌 렉시의 품에서는 마치 단 포도 같은 향기가 났다.

하늘에선 태양이 아름답게 빛나고, 달리는 말발굽마다 꽃바람이 일어나 두 사람을 감싼다. 품 안에 안긴 연인이 즐거운 듯 깔깔대고, 그의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 역시 작게 미소 짓는다.

아아, 이건 꿈이로구나.

로메인은 자각했다. 실로 현실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그가 이런 꿈을 꿀 리가 없지. 꿈은 이룰 수 없는 현실의 욕망의 반영, 그러하니 이 꿈은 그가 꾸는 몽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꿈을 깨는 대신 그 속에 빠져들었다. 현실에선 만져 보지 못할 먼 곳의 연인이, 이 꿈 안에선 품 안에 안겨 있지 않은가.

한참 말을 달린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귓전에서 마치 음악처럼 울려 퍼진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 자신의 품 안에 기대는 렉시의 체온. 자신이 숨을 죽이는 것을 안 건지 앞에 앉은 상대가 뒤를 돌아본다. 녹색 눈동자가 마치 달처럼 휘었다. 입술이 벌어지며 마치 하얀 진주알 같은 치아가 햇빛 아래 빛이 난다.

렉시가 노래하듯 물었다.

‘로메인. 여긴 어디인가요?’

‘이곳 말입니까?’

‘네, 퍽 아름다운데… 지명을 알 수가 없네요. 초원이 끝나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이고… 흰 백사장이 햇볕 아래 마치 진주처럼 빛나는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의 이름을 모르다니 억울할 일이에요. 로메인, 이곳은 어디인가요?’

그는 렉시가 가리키는 장소를 보며 눈을 좁혔다. 푸른 초원, 저 너머 끝도 없이 펼쳐진 하얀 백사장.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안쪽에 자리한 백사장은 몇몇만이 알고 있는 이 영지의 절경이다. 그는 렉시의 허리를 강하게 고정하며 대답했다.

‘이곳은 제가 가진 영지의 일부입니다.’

자신의 대답에 렉시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당신 영지?’

‘정확히는 델부르크라는 작은 마을입니다. 작은 해안과 맞닿은 목초지는 이곳이 유일하지요. 크게 부유한 지역은 아닙니다만 대신 평화롭습니다.’

제법 빠르게 달리던 말이 속도를 점점 줄인다. 로메인은 이제 거의 걷다시피 하는 말 위에서 렉시와 함께 유유자적 초원을 거닐었다.

‘아름다운 곳이네요. 로메인은 이곳이 좋은가요?’

‘가끔 이곳에 와서 말을 달리곤 했지요. 어쩌면 여생을 보내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무척이나 기쁘군요.’

‘다시 영지에 돌아와서?’

로메인은 작게 웃었다.

‘글쎄요. 그보다는… 전 당신과 함께 이곳을 함께 거닐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로메인은 부드러운 눈으로 렉시를 내려보았다. 로메인의 말에 렉시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랐다.

‘저와 …함께 있는 게 좋아요?’

‘네. 좋습니다.’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영원히라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로메인이 대답하자, 렉시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좋다면…. 왜 요즘은 제게 오지 않는 건가요?’

‘예…?’

‘왜 저를 찾아오지 않나요?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를 바라보는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흐려진 녹색 눈동자 사이로 살짝 이슬이 맺히는 것도 같다. 로메인은 갑자기 가슴이 꾸욱 눌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꿈이라고 하지만, 그가 이렇게 우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제가 싫은 게 아닌가요?’

‘―울지 마십시오.’

로메인은 방울방울 떨어지는 렉시의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어느새 말은 자리에서 멈추고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로메인은 나란히 앉아 있던 렉시의 허리를 잡고 앞으로 돌려 앉혔다. 작은 안장 탓에 허벅다리 위에 걸치듯이 앉힌 상대가 당황해 입을 벌린다. 그는 조심스레 벌려진 입술을 삼키며 울음을 조금씩 덜어 냈다.

꿈이지만 키스는 달콤했다. 짙은 포도향이 입안에서 느껴지며, 상대의 혀를 조심스레 삼키고 빤다. 작지만 뜨거운 살점을 잘근잘근 씹다가 매만지면,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떨며 숨을 헐떡인다. 집요하게 달라붙어 조금씩 흐르는 타액까지 마저 삼키고, 입술을 떼 퉁퉁 부은 그것을 혀로 핥았다.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영영 삼켜 제게 속하게 하고 싶다.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속인다. 그는 헐떡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제가 당신을 싫어할 날은 오지 않습니다.’

꿈에서조차 당신을 그리는 내가 그대를 어찌 미워할까. 그리워하고 사랑만 해도 모자랄 당신을 미워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쓰다듬는 손바닥에 렉시가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이 참으로 좋은 것처럼, 손바닥 전체에 얼굴을 천천히 부비며 가르릉대는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나른하게 감긴 눈동자가 그에게 묻는다. 눈꼬리에 맺혔던 이슬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럼 내가 좋아요?’

‘좋습니다.’

‘날 사랑해요?’

로메인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타는 것 같을까. 대답 없는 로메인에게 렉시가 다시 묻는다. 마치 물에 젖은 것 같은 목소리.

‘날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그를 바라보는 렉시의 얼굴이 환희로 반짝인다. 로메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시 달콤한 것이 입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두 번째 키스였다.

첫 키스가 달콤했다면, 두 번째는 뜨거웠다.

달래기 위해 한 입맞춤으로 어설프게 불연소한 불씨가 다시 피어올랐다. 욕망이 실체를 가지고 점차 몸집을 불렸다. 로메인은 자기 스스로도 모를 불만감을 잠재우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겹쳐 나갔다. 깊게 포개어진 입술 사이로 단물이 넘쳐흐른다. 작지만 탄력 있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때마다 상대가 움찔대며 신음을 내뱉는 게 퍽 기꺼웠다. 뜨거운 입김이 맞닿을 때마다 목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로메인은 견디지 못하고 렉시의 입술을 삼켰다. 맞닿은 부위가 불에 덴 듯 화끈댄다. 삼키면 삼킬수록 몸 안에 있는 커다란 불이 터질 듯이 확장됐다.

‘아….’

잠시 숨을 쉬기 위해 혀를 놓아주자, 렉시가 신음하며 헐떡였다. 붉게 부푼 입술 사이로 분홍빛 혀가 헐떡거리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로메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보았다. 붉은 입술 사이 흔들리는 혀가 이상하게 음란했다. 이 정도는 괜찮을까? 로메인은 속으로 셈을 해 보다 픽 웃었다.

나는 꿈에서조차 이러는군.

가벼운 자괴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결심이 섰다.

어차피 꿈인데. 그래 보았자 꿈인데.

실제라면 아마 여기서 그만두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갈급함을 감내하는 것쯤은 여러 번 해 보았다. 별일 아니다. 지금도 그만두라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다못해, 꿈에서만이라도 마음껏 그를 탐하고 싶었다. 현실의 그는 얽힌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물러섰지만, 꿈속의 그는 오로지 자신의 것이다.

‘아…읍!’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지.

그는 결국 그걸 다시 삼켰다. 갑자기 삼켜진 입술에 놀란 상대가 허덕댔다.

혀가 휘감기고, 안으로 깊게 빨아들이자 아랫배 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일며 몸을 덮는다. 숨이 거칠어질 때마다 렉시의 등줄기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쿵쿵, 심장이 엇박을 내며 미친 듯이 뛰었다.

‘으응…!’

달달한 한숨이 틈새로 새어 나온다. 서툴렀던 키스에 상대가 점점 적응을 하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는 한 손으로는 렉시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론 옷자락을 꺼냈다. 말을 달리기 위해 렉시가 입고 나온 옷은 가벼운 셔츠가 다였다. 바지에 끼워 넣었던 얇은 옷자락을 꺼내며,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자 비단처럼 매끄러운 피부가 손끝에 닿는다. 갑자기 닿은 차가운 냉기에 피부에 작은 소름이 돋았다. 로메인은 그 부분을 천천히 쓸며 상대를 안심시켰다.

천천히, 놀라지 않게.

처음엔 허리였고, 그다음엔 등을 쓰다듬는다. 그러다 서서히 위로 올라와 도톰하게 부풀어 있을 유륜을 건드렸다. 천천히 짚고 올라가자 끝부분에 도톰하게 부푼 것이 만져졌다. 그것은 흥분으로 단단하게 솟아 있었다. 얼마 전 보았던, 분홍빛의 유두를 떠올리자 바지춤이 묵직하게 부풀었다. 로메인은 엄지로 유두 끝을 건드리며, 가슴을 살살 쓸었다. 유두 끝을 살살 잡고 돌렸다. 동시에 품에 안겨 있던 렉시의 몸이 덜덜 떨리며 신음했다.

‘아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한숨이 뜨거웠다. 한숨이 거듭되어 쌓일수록 풀 수 없는 욕망이 눈 덩어리처럼 커진다. 바지 천으로 막혀 있었지만, 묵직해진 하반신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이대로 바지춤을 풀어낸다면 어떻게 될까.

로메인은 자신도 모르게 렉시의 엉덩이를 안아 자신의 허벅지 위로 더 가까이 올렸다. 렉시의 무게가 가볍게 성기를 압박하자, 드디어 로메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좌우로 벌어져 있던 다리를 넓게 벌려 틈을 찾았다. 그 역시 자신처럼 단단히 흥분해 있었다. 로메인은 천천히 발견한 부분을 쓰다듬었다. 두 개로 갈라진 틈, 아래 있는 회음부를 강하게 압박하자 흐릿해져 있던 렉시의 눈동자가 크게 튀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쾌락에 목소리가 튀었다.

‘아…아핫!’

‘좋습니까?’

로메인은 회음부 부분을 누르다가, 긁어내듯이 쓸어내렸다. 어떨 때는 회음부였고, 혹은 그 윗부분의 샅이었다. 렉시는 헐떡거리며 남자에게 매달렸다. 잔뜩 흥분한 렉시의 성기에서 무언가가 흘렀다. 사타구니 사이로 흘러내린 액체로 바지가 조금씩 젖어 들었다. 젖은 부위는 점점 넓어져만 갔다. 렉시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남자의 손이 거듭될수록, 다리 사이에 걸쳐져 있던 렉시의 허벅지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놀리지 말아요….’

렉시가 흐느끼며 입술을 뗐다. 자꾸 이렇게 건드리기만 하니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로메인의 어깨에 이마를 가져갔다. 로메인은 흐느끼는 렉시의 등을 매만지며 어깨에 입 맞췄다. 가련하게 매달리는 몸이 너무나 예뻤다. 하지만 손은 계속해서 사타구니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로메인의 손이 자신의 샅을 강하게 움켜쥐자, 렉시는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잘게 흔들고 말았다.

‘아아…!’

렉시는 간절한 얼굴로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열기로 잠식된 녹색 눈동자가 빠져들 것처럼 깊었다. 렉시는 로메인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쾌락의 가장자리에서 머물기엔, 쌓여 있는 욕망이 너무도 컸다.

‘로메인… 이러지만 말고….’

‘하아….’

로메인의 한숨이 렉시의 이마에 닿았다. 그는 렉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그걸 원하고 있다는 것 역시 매우 잘 알았다.

‘제발, 응?’

로메인은 이를 아득 물었다. 애절하게 애걸하는 애인 때문이 아니라도, 그 역시 한계였다. 그는 마치 화난 것처럼 짧게 내뱉었다.

‘저를 잠시 잡으십시오.’

‘앗…!’

짧은 순간, 몸이 들렸다. 갑자기 들린 몸에 렉시는 파르르 떨었지만 이내 바지를 잡아 오는 손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성인 남자였지만, 그에게 렉시의 무게는 무척이나 가벼운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렉시의 허리를 들어, 벨트를 풀어내고 바지를 벗겼다. 달리는 말 위에서 싸움도 하는 기사에게 일련의 일은 몹시 쉬웠다.

‘…아름답군요.’

로메인은 신음을 내뱉었다. 렉시는 부끄러움에 몸을 발갛게 물들였다. 순식간에 백옥 같은 나신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졌다. 로메인은 자신의 허리춤을 묶은 끈을 풀었다. 반쯤 벗은 바지 틈으로 성기가 튕겨 나왔다.

렉시는 자신의 배를 때리는 성기를 보고, 순간 얼굴을 붉혔다. 붉고 거대한 성기가 흉흉하게 위로 솟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것 역시 작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것에 비한다면 손색이 크다. 렉시가 머뭇거리는 사이 로메인이 렉시를 다시 앞으로 앉혔다. 렉시는 자신의 성기와, 로메인의 성기를 보고 입을 벌렸다. 그냥 보아도 비교될 정도로 흉흉한 것을 다리 사이에 매달고 다니는 로메인이 너무나도 신기했다.

‘너무 커요….’

‘제가 말입니까?’

‘이게….’

렉시는 입술을 핥다가 침을 삼켰다.

‘제, 몸에 들어갈까요?’

시선에도 열기가 존재한다면 필시 지금 렉시는 타들어 갔을 것이다. 시선이 순식간에 진득하게 달아오른다. 핥는 듯한 시선이 렉시를 타고 내려갔다. 남자를 앞에 두고, 저런 말은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실로 꿈이란 신기하여 연인이 할 법한 말만을 골라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로메인은 그런 렉시를 삼켜 버리고 싶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익숙해질 겁니다.’

‘어떻게요?’

‘…말을 타 본 적이 있습니까.’

예?

엉뚱한 말에 렉시가 로메인을 바라보았다. 로메인은 대답 대신 렉시의 몸을 안고 천천히 그의 다리를 벌렸다. 아까 흥분해서 젖어 있던 사타구니, 그 아래 조금 벌려진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로메인이 안은 몸이 빳빳하게 굳자 로메인은 쉬… 하고 달래며 안을 넓혔다.

꿈이어서인지, 구멍은 이미 충분히 젖어 있었다. 하지만 젖은 것과 달리 처음 누군가의 침입을 받은 곳은 긴장하여 빳빳했다. 로메인은 천천히 렉시의 내부를 덧그렸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밑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움찔 조여드는 안쪽이 부드럽게 손가락을 빨아들일 때마다, 로메인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꿈이라도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다.

‘흐음, 으응!’

손가락이 점차 늘어났다. 처음엔 하나만으로도 버겁던 것이 점점 수를 늘렸다. 두 개, 세 개…. 종내엔 몇 개인지 모를 손가락이 밑을 드나들며 안을 넓혔다. 렉시는 견딜 수 없는 감각에 신음하며 입을 벌렸다. 오싹한 감각과, 이상한 설렘이 가슴을 연달아 스치고 지나갔다.

‘아, 아아….’

‘이제, 넣겠습니다.’

동시에, 두꺼운 귀두 부분이 렉시의 입구에 와 닿았다. 렉시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로메인은 렉시의 허리를 잡고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리눌렀다. 덕분에 두꺼운 것이 입구를 파고드는 감각은 너무나도 선연하게 다가왔다. 렉시는 입술을 꼭 깨물다 결국 입을 벌려 흐느끼고 말았다.

‘흐, 으으, 읏!’

‘흣, 아, 픕니까…?’

로메인의 대답에 렉시는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아프기도 했지만, 그 반대의 감각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커, 커요. 너무 커…!’

‘천천히…!’

충분히 적시고 넓혔음에도 불구하고 안은 뻑뻑했다. 아마 로메인의 것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일 것이다. 게다가 현재 두 사람이 하는 장소는 말 위. 그나마 렉시의 체중이 조금씩 도와서 삽입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로메인은 이런 장소에서 첫 경험을 하는 자신의 파렴치함에 놀라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렀다. 햇빛은 적당히 강했고, 바람은 시원했다.

탁 트인 공간에서, 그것도 마상에서 상대와 나누는 정사라니…. 이 얼마나 파렴치한가.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있어 그는 도저히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로메인은 땀이 묻어나는 렉시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알 수밖에 없는 자신의 내면은 이러했던가.

‘그런가. 나는, 당신을….’

‘아아아앗!’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손을 놓쳤다. 그 통에 바들바들 떨리던 렉시의 몸에 로메인의 것이 모두 들어갔다. 갑자기 가해진 자극에 렉시의 허리가 휘었다. 드디어 자신을 온전히 머금은 렉시의 아래가 자신을 강하게 빨아들인다. 로메인은 머리가 멍해지는 쾌감에 눈을 흐렸다.

‘다, 들어갔습니다.’

‘아, 아흐!’

렉시는 로메인의 목에 손을 걸었다. 꽉꽉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로메인의 좆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잘게 경련하는 허벅지를 따라, 투명한 액체가 뚝뚝 흘러내렸다. 렉시는 쌕쌕거리는 숨을 간신히 몰아쉬며, 로메인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이상하게도 숨을 쉴 때마다 안에 있는 상대의 것을 꽉 조이게 된다.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낮은 신음 소리가 무척이나 관능적이었다.

‘절, 꼭 잡으십시오.’

짧게 내뱉듯 말하며 로메인이 렉시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는다. 렉시는 가물거리는 눈을 간신히 깜박였다. 그때 휙, 하고 귓전에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렉시는 깜짝 놀라 로메인을 바라보다 갑자기 움직이는 시야에 몸을 굳혔다.

‘아…아?!’

말이, 달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달린다기보다는 가벼운 경보에 불과했다. 허나 아래에 꿰어지듯 박혀 있는 렉시의 입장에서 가벼운 경보가 어떻게 다가올지는 뻔할 뻔 자였다. 내벽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좆을 물어뜯었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푹푹 소리가 나며 몸이 위아래로 박혔다.

‘아, 아, 아앗!’

꽝꽝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다. 눈앞이 희어졌다가, 검어졌다를 반복했다. 흔들리는 렉시의 몸을 로메인이 고정하듯 꽉 잡자, 압박감이 더욱 깊어져 흐느끼게 된다. 미치겠는 것은, 그렇게 매달리는 와중에도 서서히 찾아오는 쾌락의 존재였다. 안을 때릴 때보다 압박하듯 움직이는 것이 더 강렬했는지, 내벽 안이 로메인을 잡아먹을 것처럼 빨아들인다. 안쪽으로 미친 듯이 조여드는 감각에 로메인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움직여 렉시의 안을 쳐 올렸다.

흑! 으흑!

연달아 쳐 올리는 감각에 렉시의 허벅지가 버티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덕분에 내부로 더 밀려온 성기의 압박에 렉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안을 긁듯이 움직인다. 로메인의 숨 막히는 목소리가 렉시의 귓가에 쟁쟁했다. 렉시는 그만 허리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들쑤셔지는 안, 익숙하지 않은 쾌감이 무서울 정도로 선명했다. 성기에서 핏, 핏 하고 정액이 쏘아져 나왔다.

‘아아아!’

‘크읏!’

짧지만 강한 자극에 렉시의 몸이 요동친다. 견디다 못한 로메인이 그 강한 자극에 사정했다. 렉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파르르 떨었다. 아랫배 쪽으로 뜨거운 것이 퍼져 나가는 게 느껴진다. 무서울 정도로 또렷했다.

‘아흐흐흑!’

본능적으로 안을 조였다. 뜨거운 것이 연속해서 쏟아질수록 어딘지 모를 가슴의 공허가 충족이 된다. 로메인의 혓바닥이 렉시의 얼굴을 핥다 다시 입술로 향했다. 뜨거운 혓바닥 사이로 입술이 다시금 빨려 들어갔다.

‘하아….’

달게 녹아내린 한숨. 로메인은 달큰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렉시의 쾌락을 삼켰다. 잠깐 시들었던 성기가 다시 힘을 받는 것은 금방이었다. 정액이 윤활유가 되었는지, 빠듯하기만 하던 내벽이 자신을 완벽하게 머금는 게 느껴진다. 철벅대며 안을 몇 번 치대자, 그사이 다시 단단해진 성기가 안을 채운다. 욕망이 차오르자 새로운 욕심이 생기는 것은 금방이었다. 로메인은 천천히 걷고 있던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주인의 뜻을 들은 군마가 자리에 우뚝 서자, 흔들림이 멈춘다. 그는 허리를 세우지도 못하고 기대 있는 렉시의 허리를 바투 쥐었다. 까슬한 음모가 느껴질 정도로 바짝 붙은 상대가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왔다.

‘내려갑시다.’

‘으, 응?’

바들바들 떠는 렉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로메인은 대답을 듣는 대신 렉시를 안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아래는 박힌 채였다. 안장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충격에 이어져 있는 부분이 흔들려 머릿속이 진탕됐다. 무슨 정신으로 로메인의 목을 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과 배 속을 진탕시키는 남근의 형상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보기 좋았다.

웃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자신 때문에 우는 것 역시 보기 나쁘지 않다. 엉망으로 젖은 얼굴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라니 마음속이 뿌듯하며 충만감이 인다.

내 안에 이런 난잡함이 존재했다니… 로메인은 이런 자신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떠, 떨어져…!’

‘꽉 잡으십시오.’

미끄러질 일은 없었지만 그는 일부러 심술을 부렸다. 그 말에 바짝 붙어 오는 렉시가 이상하게 귀여웠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그는 일부러 조금 힘을 줘 말에게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안을 찌르는 성기에 반사적으로 내벽이 꽉 조인다. 박혀 있는 남근이 엇박자를 그리면서 안을 푹푹 찔렀다.

‘힉, 윽!’

숨 막힌 소리가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그가 다가서자, 몇 발자국 떨어져 있던 말이 반가운 듯 꼬리쳤다. 그는 말 뒤에 걸쳐 놨던 망토를 끄집어내 바닥에 던졌다. 둥근 궤적을 그리며 천이 바닥에 내려앉자, 네모지게 요처럼 펼쳐진다.

그는 렉시를 그 위에 눕히며 자세를 낮췄다. 바뀌는 체위에 끝까지 박혀 있던 성기가 희뿌연 액체와 함께 즉 소리를 내며 딸려 나왔다.

‘하아….’

접합부 근처까지 아슬아슬하게 빠진 좆은 체액으로 번들댔다. 뿌리 끝까지 묻혀 있던 것을 끝까지 빼내자, 잔뜩 긴장해 있던 다리가 조금 풀렸다. 꽉 막혀 있던 것이 나가자 그나마 숨이 쉬어진다. 아마 그만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리라.

미안한 일이었다.

로메인은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고, 렉시의 정강이를 붙잡아 가로로 벌렸다. 갑자기 벌어진 골반에 밑이 다시 드러났다. 렉시는 갑자기 벌어진 다리에 느껴지는 시선에 몸을 떨었다. 로메인은 절절 끓는 눈으로 렉시의 아래를 응시했다.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남자라면 응당 있을 사내의 상징도 예쁘고, 그 위에 엷게 난 터럭마저 예뻤다. 희뿌연 액체로 잔뜩 젖은 부위는 실로 경배 받아야 마땅한 것이었다. 자신의 성기와 구멍을 비교해 본 로메인의 눈이 나른하게 풀렸다. 눈꼬리에서 정염 어린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렇게 작은 것이 나를 머금다니, 이것이야말로 운명이 아니고서야 가능할 리 없다.

기특함과 동시에, 사랑스러움이 솟아오른다. 그는 한쪽 손을 들어 구멍을 만졌다. 방금 전 삽입으로 조금 붓긴 했지만 상처는 없었다. 로메인은 잔뜩 기립한 성기를 다시 구멍 위로 가져다 댔다. 금방 다물린 입이 천천히 선단을 삼킨다. 또다시 풀어야 할까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조금 더 안으로 들이밀자, 그것은 자연스럽게 아래를 빨아 삼켰다.

잔뜩 긴장해 있던 렉시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흑!’

방금 전까지 풀려 있었던 밑은 수월하게 로메인을 받아 물었다. 좁은 몸 안이 자지로 짓이겨질 것 같은 느낌에 렉시는 벌벌 떨었다. 퍽! 로메인은 긴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 성기를 처박았다. 퍽! 살갗이 부딪히는 음란한 소리가 재차 주변을 울렸다.

‘아, 앗, 흑, 읍!’

‘큭, 너무, 조르지, 마십시오!’

‘아, 아냐, 조르는, 아아!’

렉시는 잔뜩 풀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혓바닥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쾌락으로 곤죽이 된 것 같았다. 로메인의 것이 자신을 찌를 때마다, 몸 한켠에 쾌감이 점점 쌓여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렉시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합을 맞출 때마다 안의 예민한 곳이 찔리고, 그때마다 눈앞이 번뜩대며 희게 변했다. 로메인이 웃으면서 렉시의 뺨을 핥았다.

‘보십시오, 이렇게. 날 반기고 있잖습니까?’

‘아, 아아앙!’

‘이렇게, 날 조이면서, 응?’

난잡한 말이었다. 로메인의 처음 보는 모습에 렉시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냉정하고 점잖아 보이는 얼굴 뒤로 이런 모습이 숨겨져 있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렉시는 뭐라 말하려고 하다 흑,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퍽! 들이찬 선단이 내벽 안을 밀어내며 깊은 곳까지 밀려왔다. 들이키지 못한 숨이 헛바람처럼 씩씩 나왔다.

‘흐, 아흐…’

들이차는 성기가 자극할 때마다 안쪽이 반기듯이 그를 조이는 게 느껴졌다. 하고자 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몸이 저절로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 렉시는 자신의 골반을 잡고 허리를 흔드는 남자를 보며 헐떡대는 숨을 삼켰다.

고작 두 번째였지만, 렉시의 내벽은 빠르게 로메인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팽팽하게 벌어진 접합부 사이로 검붉은 성기가 빠르게 드나들 때마다 정액이 거품처럼 일어나 아래로 뚝뚝 흐른다. 사정한 액들이 새로운 침입을 도우면서 밖으로 밀려 나오고 있었다. 핏줄이 흉흉하게 일어난 성기가 내벽을 긁을 때마다 렉시의 입에서 의미 모를 비명들이 튀어나왔다. 움직이는 모든 행위가 그에게 자극이었다.

‘흐, 흥, 으, 아흐!’

커다란 손이 다리를 꽉 누른다. 철벅대는 소리가 빨라졌다. 반으로 접힌 다리가 로메인의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허공 위에 떠올라 있는 발가락이 쾌락으로 움찔거렸다. 배 속에 점차 고이던 쾌락이 점점 부풀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머리끝까지 치닫기 시작하는 쾌감은 렉시를 자비 없이 부숴 나갔다.

‘앗, 으, 아아, 아아아앗!’

‘크윽…!’

희게 명멸하는 시야와 함께 렉시는 사정했다. 위로 쏘아 올린 정액이 로메인의 가슴을 적셔 줄줄 흘렀다. 사정과 함께 조여드는 내벽에 로메인은 잠시 추삽질을 멈췄다. 순간 물어뜯을 것 같은 내벽의 움직임에 그조차도 사정할 뻔했다.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각을 견뎌냈다. 파들거리며 조이던 내벽이 서서히 울림을 멈춘다. 곧 다시 그는 움찔대는 렉시의 몸을 다시 잡고 추삽질을 이어 갔다. 멍하니 풀려 있던 렉시가 고개를 저으며 바닥을 쥐어뜯었다.

‘흐, 아아, 아, 안 돼…!’

연이은 사정과 다시금 이어진 쾌락은 고통과 닮았다. 렉시는 푹 젖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밀어내고 싶었지만 단단한 근육은 미동도 없다. 이미 다리엔 힘이 빠져 버티기 힘들었다. 로메인은 미끄러진 렉시의 한쪽 다리를 허리에 감게 했다. 집중하는 로메인의 이마 위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흐윽! 으응!’

정신은 피곤했지만 거듭된 자극은 렉시를 착실히 고양시켰다. 렉시는 억지로 치달아 오르는 쾌락에 결국 엉엉 울며 동조했다. 흐느끼는 렉시의 몸은 열이 올랐고, 그 흰 몸은 정체 모를 액체로 잔뜩 젖었다. 로메인은 번들거리는 렉시의 몸을 혀로 핥았다. 희한하게도 짜지 않고 그조차 다디달다.

마치 약에 중독된 것 같은 몽롱함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는 허리를 잘게 흔들며 렉시를 몰아갔다. 점차 빨라지는 허리 짓이 끝을 향해 내달았다. 하지만 한번 사정한 성기는 좀처럼 사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가 닳은 로메인은 귀두 끝까지 성기를 뽑아냈다. 즉, 음란한 소리를 내며 딸려 오는 내벽이 마치 나가지 말라며 잡는 느낌이다. 잠시 숨을 삼켰던 그의 성기가 단박에 안으로 내리꽂혔다.

퍽!

‘하, 아아아앗!’

견디지 못한 렉시가 결국 비명을 질렀다. 선단이 느끼는 지점만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렉시는 허리를 덜덜 떨었다. 이미 다시 한차례 사정을 한 성기 끝에서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연이어 이렇게 몇 번이나 사정한 적 없는 터라 쾌감이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사정하면 조금은 쉴 수 있을까. 렉시는 자신도 모르게 안쪽을 꾹 조였다. 마치 정액을 조르는 듯한 모양새였으나, 그런 것을 따질 정신은 없었다. 렉시의 조름을 알아챈 로메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내가. 흡, 싸 주었으면 합니까?’

‘흐, 으,응!’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엉망이었기에 자기가 무슨 말에 대답하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목전에 놓인 고통스러운 쾌락 앞에서 수치심은 사치였다. 렉시의 대답 아닌 대답에, 로메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다정했던 눈동자는 흉흉할 정도로 번들거렸다.

‘그렇다면, 기꺼이.’

‘으흡!’

즈윽, 순식간에 성기가 빠져나갔다. 로메인은 감겨 있던 다리를 풀고 렉시를 뒤로 돌렸다. 순식간에 엎드린 자세가 된 렉시의 엉덩이가 위로 들렸다. 벌어진 구멍 사이로 정액이 조금씩 흐르고 안이 벌어져 뻐끔댔다. 마치 로메인을 갈구하는 것 같은 자신의 반응에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메인의 웃음소리와 함께, 뜨거운 것이 구멍을 눌렀다. 입구 안을 쿡쿡 찌르던 것이 그대로 안쪽으로 처박혔다.

‘――!’

‘큭!’

바뀐 자세로 좁아진 내벽이 환희하며 로메인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뻑뻑해진 안쪽을 긁으면서 두꺼운 것이 안쪽을 빠르게 문질렀다. 빠르게 오가는 성기에 내벽이 화끈거렸다. 뜨거운 불길이 안쪽에서부터 아랫배, 그리고 온몸을 태우며 퍼져 나갔다.

‘아, 너, 너무 빨라!’

‘흡, 참아, 보십시오. 얼른… 끝내겠습니다.’

로메인은 토막토막 말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밀려오는 절정으로 그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쩍, 쩍, 하체가 서로 달라붙는 소리가 요란했다. 빠르게 진입을 반복하는 허리 짓은 점점 기세를 더해 갔다. 이를 악물고 무게를 견디던 렉시가 결국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그러자 로메인이 렉시의 몸 위를 덮치듯 끌어안는다. 결국 더 깊숙이 성기가 들이찼다. 로메인의 허리 짓이 보다 빨라지며 잘게 흔들렸다.

그리고.

‘―!’

마지막으로 거세게 들이박은 로메인이 드디어 사정했다. 뜨거운 것이 아랫배에 들이차다 못해 연결된 부위로 비어져 나왔다. 로메인의 입에서 거친 호흡이 새어 나왔다.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숨소리였다.

‘흐읍, 훕!’

빠르게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숨을 쉬며, 그는 렉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렉시는 덜덜 떨면서 그의 몸을 견뎌 냈다. 로메인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후희를 즐길 때마다 픽픽 성기에서 물 같은 것이 질질 흘렀다. 렉시는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로메인의 팔을 움켜쥐었다. 호흡이 떨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렉시….’

짐승 같은 커다란 숨을 내뱉으며 로메인이 렉시의 목을 잘근잘근 씹었다. 충만하다 못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기분에 그는 아직 움찔거리는 렉시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렉시가 칭얼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래는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렉시의 몸을 솜씨 좋게 돌려 헉헉대는 입술을 삼켰다. 나른하게 풀린 눈동자가 로메인을 바라보자 풀이 죽은 아래에 다시 힘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우우음…!’

천천히 입술을 빨고 혀를 빨자 눈동자에 다시 원망이 어룽어룽 맺힌다. 맞닿은 입가에서 푸슬푸슬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꿈이라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다. 이런 꿈이라면 몇 번이고 다시 꾸고 싶을 정도다. 그는 하하 웃으며 렉시를 끌어안고 풀 바닥에서 한 바퀴 굴렀다. 천천히 노을 지는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풀 더미가 튕겨 가며 멀리 굴러간다. 가슴 위에 몸을 기댄 렉시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졌다. 그는 렉시를 안은 채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갑자기 느껴지는 낙하감.

쿵!

그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여긴…?”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노을빛으로 빛나던 하늘이었는데, 왜 보이는 것이 모르는 방의 천장일까. 찬 기운이 올라오는 걸 보니 그가 누운 곳은 바닥인 것 같은데… 침대에서 떨어졌나?

뒤통수가 얼얼함과 동시에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애를 썼다. 분명 자신은 방에서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과 현실이 이상하게 뒤섞여 머리가 어찔했다. 그는 천천히 상황을 복기했다.

술을 마신 것. 그건 현실.

렉시와 한 정사, 그것은 꿈.

내방이 아닌 다른 방에서 깬 이 상황은 …꿈?

그는 눈을 끔벅거렸다. 그간 살아오면서 몽유병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누군가 자기를 옮겼다고 치기엔, 집안에서 자신의 몸에 허락 없이 손댈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가. 이건 꿈인가?

머리야 아플 수 있고 휘청거리는 것도 꿈에서 느낄 수 있다면, 그래. 그럴 수 있긴 하지. 그는 애써 지금을 꿈이라고 치부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이상했다. 특히 가슴 위로 느껴지는 이 무게감은… 사람?

“아흑….”

귀가 녹을 것 같이 달콤한 신음. 로메인은 몸을 퍼뜩 굳혔다. 자기 몸 위에서, 작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뒤척이는 상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상대는 현재… 벗고 있는 것 같았다.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이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이상했다. 촉감은 그렇다 쳐도…. 무게감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있나?

일단 뭐든 보아야 알 것 같았다. 시선을 내려 가슴 어림을 본다.

그리고.

“…렉시?”

흐리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희미하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려다 이상한 감각에 눈썹을 찌푸렸다.

“으음….”

움직이자, 렉시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아랫배 쪽이 꽉 조이면서 등줄기로 쾌감이 달렸다. 이럴 수가…. 그는 입을 벌렸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로메인은 덜덜 떨며 자신의 하반신에 손을 가져갔다. 자신이 무언가 착각했겠지, 그렇겠지.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명백했다.

“헉…!”

손끝을 더듬어 결합부를 만진 순간, 렉시가 다시 몸을 꿈틀댔다. 그 통에 질척한 액체가 꽉 다물린 여린 틈새를 타고 흘러내린다. 은근한 자극에 내벽이 크게 수축하며 이어져 있는 성기를 안쪽으로 빨아 당겼다. 사타구니에 힘이 들어가며 쾌감이 파도처럼 술렁거리며 다가온다. 솔직히 이쯤 되면 그 어떤 멍청이라도 상황 파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로메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내, 내가…!”

내가…내가 렉시와?

“맙소사…!”

실로 경악이었다. 로메인은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며 온몸이 붉게 변했다. 상황을 인지하자 무심히 넘겼던 감각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어떻게 이것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는지 모를 지경이다. 특히 개중 압권인 건 들큰한 살 냄새였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음란하고 동물적인 살 내음이 온 사방에 가득했다. 이대로 나간다면 백이면 백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며 돌아볼 것 같은 강렬한 향기가 비강을 자극했다.

“어, 어떻게….”

눈앞이 아찔하다 못해 까마득하다. 로메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더 미치겠는 건 그의 몸이 이 상황을 크게 기꺼워하고 있다는 거였다. 상대의 몸에 착실하게 묻혀 있는 아래쪽이 크게 부풀어, 좁은 내벽을 조금씩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반쯤 기절한 것 같은 렉시조차 조금씩 이 움직임에 헐떡대고 있었다. 아마 조금 더 있으면 싫어도 깰 것 같았다. 로메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어제 뭘 했더라. 술, 그래. 술을 마셨어. 렉시가 보고 싶어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고, 꿈을 꾸었다. 렉시가 그에게 웃으며 다가왔고, 그를 안았고…. 들판을 달리다, 그와 정사를…!

여기까지 생각하던 로메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샘솟았다. 불현듯,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고 말았는지 알 것 같아졌던 것이다.

…그렇구나. 그랬던 건가…!

“내…내가 술김에 사고를?!”

실로 절실한 깨달음이었다. 그래, 이 상황은 자신이 만든 것이 분명했다. 렉시가 보고 싶어 술에 미친 자신이, 결국 렉시를 찾아와 그를 덮친 것이다. 어쩐지 이상하게 꿈이 생생하다 했다. 그 이상하게 현실감 있던 꿈은… 꿈이 아니라 정말, 현실에서 벌어진 일인 것이다. 그가 꿈에서 렉시에게 벌인 추태와 치태가 모조리 생각이 났다.

말을 타고, 사랑한다 고백하며, 키스하고, 섹스했던 그 모든 것들이.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는 그도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섹스를 한 것만큼은 현실일 터. 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즉물적인 놈이었던가?

자연스럽게 일방적으로 몸을 숨기다 나타난 주제에, 사랑한다고 말하며 키스하는 자신이 렉시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보다… 설마 내가 억지로 한 것은 아닐까?

로메인은 지극히 불안해졌다. 생각만 해도 불쾌한 불안증이 온몸을 내달린다. 자신이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양식은 있겠거니 하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로메인은 울 것 같은 심정으로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연결되어 있던 부분을 서서히 빼냈다.

즈윽… 좁은 살 틈 속에 박혀 있던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음탕한 소리 끝에 굵은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번들거리는 성기가 빠지자, 구멍은 크게 벌어져 아물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설상가상 얼마나 쌌는지, 막아 놓은 성기를 빼자마자 밀려 나오는 액체가 진정 끝이 없다. 하복부 쪽으로 뚝뚝 떨어지는 애액으로 작은 웅덩이가 생길 정도였다.

허나 어처구니없는 건, 이 와중에도 자신의 물건은 너무나 성실했다는 것이다. 자지를 빼는 와중에 조금씩 힘을 받고 기립한 선단이 렉시의 회음부를 툭툭 건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안쪽으로 파고들고 싶은 듯 서서히 기립하는 자지는 애액으로 범벅이었다. 아찔함에 눈을 감았다 뜬 로메인이었지만 상황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아응….”

작은 신음 끝에, 결국 렉시가 부스스 일어나 눈을 떴다.

“!”

입술이 바짝바짝 타오른다. 로메인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렉시를 바라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녹색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간밤 잔뜩 괴롭힘을 당한 듯, 눈동자 어림이 붉게 변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천만다행인 것은 로메인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사랑스러움과 수줍음,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아아, 그런가. 로메인은 여기서 적이 안심했다.

적어도, 강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렉시.”

로메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간은 아니더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사고를 친 것은 사실. 허니 응당 죄를 청할 일이었다. 입을 떼는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천 근을 드는 것처럼 무거웠다. 목구멍을 죄는 것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렉시, 우리가….”

그러나, 그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로메인이 더 말을 하기 전, 렉시의 입술이 로메인의 입술 위로 떨어졌던 것이다. 마치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웃음이 함께인 키스는 짧지만 달콤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감각이다. 로메인은 신음을 삼켰다.

“으응….”

서툴지만 강렬한 입맞춤은 달콤하기까지 했다. 살짝살짝 입술을 빨아 당기는 상대의 입술에 그만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촉, 젖은 소리를 내며 입가가 떨어지자 로메인은 혼이 반쯤 나간 얼굴로 렉시와 마주했다. 볼에 희미하게 올라온 홍조, 밝게 빛나는 눈동자가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하아….”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리며 렉시가 품에 안겨 오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마주 안았다. 단련된 기사의 품 안은 사람 한 명 정돈 수월히 안아 들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로메인이 보듬자, 렉시의 어깨 정도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밤새 정사를 나눈 남자의 품에 안긴 렉시의 표정은 편안했다. 근육으로 단단한 가슴에 볼을 부비며, 렉시가 살그머니 물었다.

“좋았어요?”

“…예?”

뜻밖의 상황에 정신이 없어 무슨 말인지를 못 들었다. 로메인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조금 힘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전 너무 좋았어요. 당신은요?”

아무리 처음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싫었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건 그도 알았다. 로메인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도, 저도… 네, 좋았습니다.”

거짓은 아니다. 꿈에서의 기억이 맞다면, 정말로 좋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렉시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나자 로메인은 가슴이 뿌듯함과 동시에 죄책감이 차올랐다. 내가 이런 사람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런 죄악감이었다.

물론 현실은 반대로, 렉시가 로메인을 납치해 일을 친 거였지만… 그가 그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린 없었다. 로메인은 머뭇거리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떼는 입이 마치 죽을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렉시, 제가 아무래도 간밤 실ㅅ…. 아니, 아닙니다.”

이런 말이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았습니까?”

억지로 한 것이냐 물어본 것이지만 렉시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렉시는 잠시 얼굴을 붉히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네…. 당신이… 좀 버겁긴 했지만, 좋았어요. 많이.”

“…그렇군요.”

로메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평가를 조금 상향 조정했다. 로메인의 가슴에서 거센 풍랑이 이는 동안, 렉시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가슴에 계속해 얼굴을 부볐다. 눈을 뜨면 조금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다행이다. 생각보다 그가 이 상황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이 상황이 많이 당황스러울 거 알아요. 할 말도 많을 거 알고 있고요. 그래도 …일단 내 이야기부터 들어 주시겠어요?”

“무엇이건 경청하겠습니다.”

그가 무슨 입이 있어 안 된다 말을 하겠는가. 로메인의 즉답에 렉시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이미 정한 상태였다.

“당신과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당신이 많이 원망스러웠죠. 이해도 가지 않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이해가 가더군요. 당신이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 주변 상황이 싫어도 많은 걸 알려 줬죠.”

“…그랬습니까.”

누워 있는 남자의 가슴에 바람이 들었다. 훅 위로 올라온 가슴 안,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근육을 따라 덧그렸다. 슬쩍 배어 나온 땀방울이 궤적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이 관능적인 느낌을 주었다.

“당신이 없자 여기저기서 구혼장이 쏟아졌지요. 다들 한결같이 대단한 사람들뿐이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나니, 당신이 말하는 제 위치라는 게 뭔지도 알겠더군요. 하지만 로메인, 전 적어도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는 조건보다는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전 …이미 그런 사람을 찾았죠.”

“……렉시.”

마치 만류하는 듯한 음성에 렉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로메인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싫어요.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밤을 지새우고 싶지도 않고, 키스하고 싶지도 않아요. 전… 정말로 당신이 좋아요. 그냥 당신만 좋아요. 이런 짓까지 할 만큼 당신을….”

이런 비열한 납치를 할 정도로 당신이 좋다고.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도망치지 말아요…. 이미 전 당신 아닌 다른 사람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렉시.”

“…사랑해요.”

“…….”

“…정말로. 그러니까 나… 받아 주면 안 돼요?”

이것이 요수아가 알려 준 마지막이다.

상대에게, 진심을 고백하고 사랑을 말할 것.

사랑해요… 한숨처럼 렉시가 마지막 말을 내뱉자 그를 안은 남자의 팔에 힘줄이 솟는다. 렉시를 보듬은 악력이 조금 더 강해졌다. 렉시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사랑 앞에서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이 순간 간절한 건 자신일 것이다. 이런 일까지 저지를 정도로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걸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자길 멋대로 포기하지 말아 줬으면 했다.

사랑은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다.

어떤 이는 상대가 보다 나은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상대를 놓아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자신의 곁에 영원히 얽매어지기를 원해 억지로 붙잡는다. 형태가 다른 사랑은 서로 마주하기 어려울 테지만, 지금 렉시는 억지로 그 두 형상 사이에 교접점을 만들었다. 렉시는 간절함을 담아 로메인을 마주 보았다.

내 이 마음이 닿았으면 좋겠다. 그가 내게 욕심내 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것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와 영원히 함께 있어 주었으면….

마주한 파란 눈은 맑았다. 모든 혼란이 비에 씻겨 내려간 것 같은 눈동자는 물에 젖은 사파이어처럼 아름다웠다. 그 안에서 렉시는 밝게 빛나는 불빛을 보았다. 그건 마치 오랫동안 헤매이다 난파 직전에 발견한 등대의 불빛이었다. 등대의 불빛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건질 정도로 밝았고, 멀리서 보일 정도로 명료했으며, 그리고―.

“…사랑합니다.”

보는 사람을 감동케 할 정도로 극적이었다.

렉시의 입이 벌어졌다.

“로메인.”

“사실은, 그렇게 당신을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자의 음성은 나른하고 낮았다. 마치 쉰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잠긴 것 같기도 한 음성이 렉시의 전신을 휘감았다.

“견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위한 일이니 무엇이건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저는 제 생각보다 더 욕심이 많은 작자라는 걸, 저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과 헤어진 뒤, 단 한 순간도 당신을 그리지 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꿈에서도 당신을 보고, 결국 이렇게 가증한 짓거리를 저지를 정도로….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이 가증한 짓거리를 저질렀음에도, 드디어 당신을 잡을 수 있다는 저열한 욕망에 가슴이 떨릴 정도로.”

로메인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사랑합니다.”

“…로메인…!”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렉시는 몽롱해졌다. 몸이 마치 둥둥 떠올라 날아갈 것 같았다. 가슴속에 새 한 마리가 들어가 홰를 치고, 온몸이 부풀어 뻥 터질 것 같은 느낌에 숨마저 가쁘다. 로메인이 렉시의 눈가를 매만졌다. 못이 박힌 손이 얼굴을 쓸어내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이 빠졌다. 죽 미끄러지는 몸을, 로메인이 다시 단단히 움켜쥐고 끌어 올렸다. 뒤이어 강철이 벼려지는 것처럼 뜨거운 시선이 렉시를 타고 흘렀다. 자기도 모르게 숨을 헐떡댔다. 헐떡대는 렉시를 강하게 품에 안고서, 로메인이 웃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흘렸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

“반지도 없고 꽃도 없는 멋없는 청혼이지만…. 감히 청하건대. 렉시, 저와 혼인해 주시겠습니까?”

멍하던 렉시의 얼굴에 조금씩 환희의 빛이 퍼져 나갔다. 한번, 두 번, 눈을 깜박일 때마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리고 종내 렉시의 만면에 새겨진 웃음과 기쁨, 행복을 본 순간―로메인은 숨을 죽였다. 눈이 부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마 이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자신이 온전히 담기는 순간, 그 역시 그를 온전히 자신의 품에 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숨이 섞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두꺼운 손가락이 천천히 렉시의 입술을 매만진다. 그 떨림 속에 숨겨진 간절함에 렉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도톰하게 부푼 입술이 다가올 기쁨에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서히 맞붙었다.

욕망에 불이 붙는 것은 금방이었다.

로메인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공주를 안 듯 렉시를 안았다. 침대에 내려놓고, 곧바로 자리를 잡은 로메인이 렉시에게 키스했다. 턱의 각도가 조금씩 바뀌며 렉시의 안을 파고들 듯 빨아들였다. 마치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키스는 무척 거칠었다. 까득, 치아가 맞부딪치자 입을 더욱 크게 벌려 혀를 삼킬 듯이 빤다. 여린 안쪽을 혓바닥으로 누르고, 입천장을 만지며 볼 안쪽을 맛보는 행위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흐아…..”

입술이 풀리자, 헐떡대며 숨을 들이쉰다. 아쉬운 듯 입술을 천천히 핥고 몸을 든 그가 렉시의 사타구니를 넓게 벌렸다. 시선이 렉시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열을 담은 시선이 몸을 응시할 때마다 시선이 닿는 곳이 바르르 떨렸다. 반쯤 솟아 있는 페니스, 다물렸던 좁은 틈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액체. 앞으로 있을 일을 잔뜩 기대하는 것처럼 구멍이 스스로 뻐끔대며 숨을 내쉰다. 로메인은 억눌린 한숨을 간신히 삼켰다.

그의 것은 이미 잔뜩 발기해 배꼽까지 닿을 정도로 솟아 있었다. 압박감이 들 정도로 거대한 성기였다. 선단 부근에선 이미 선액이 새어 나와 번들거린다. 로메인은 한 손으론 렉시의 구멍을 풀고, 다른 한 손으론 자신의 기둥을 잡고 자세를 낮췄다. 늘 냉정해 보이던 남자의 눈가가 흥분으로 벌게졌다. 렉시는 새빨간 얼굴로 로메인을 보다 결국 팔로 눈을 가렸다. 음탕하기 짝이 없는 자세를 하고, 남자를 기대하는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

렉시는 입을 벌렸다.

성기가 천천히 입구를 누르며 들어왔다. 밤새 내내 남자를 머금었던 것을 그새 잊었는지, 안은 맞물려 남자의 침입에 저항했다. 좁아진 내벽을 가르며 들어오는 것이 퍽 버거웠다. 하지만 천천히, 진퇴를 반복하며 묻어 오는 성기에 긁힌 내벽이 결국 쾌락을 기억해 내고 환희에 젖어 들었다.

“하….”

로메인의 입가에서 탄성이 샜다. 자지가 밀려올 때마다 반기듯 빨고, 나갈 때는 아쉬운 듯 오물대는 내벽에 로메인의 입가가 흐뭇하게 풀렸다. 성기가 다물려 있는 내벽을 밀며 안을 긁듯이 벌렸다. 렉시는 깊어지는 삽입에 숨을 헐떡거렸다.

몇 번이나 했지만,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크기의 것이었다. 그것이 몸을 가르고 끝까지 들어온다. 배 속이 들이차는 감각에 머리가 아찔했다. 발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아랫배에 힘이 들어왔다. 핏줄을 타고 독 같은 쾌감이 서서히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더, 조금만 더, 조금 더.

“흐…으읍!”

까슬한 음모가 느껴질 정도로 깊게 박혔다. 하반신이 딱 붙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숨이 헐떡대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다. 로메인은 끝내 자신을 다 머금은 렉시를 보며 흥분한 기색으로 속삭였다.

“느껴지십니까?”

“으, 아흣!”

렉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란 숨에 머리가 점점 몽롱해지고 있었다. 몸의 가장 여린 부분이 남김없이 드러나 남자의 손아귀에 놓였다.

“다 들어갔습니다. 모두 다….”

그저 가만히 있자, 내벽이 보채듯이 로메인의 것을 빨아 당긴다. 더 안쪽으로 와 달라는 듯한 음탕한 초대에 로메인은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천천히 추삽질이 시작됐다. 온몸을 꽉 채운 로메인의 성기가 움직이자, 달아오른 내벽이 꿈틀대며 안을 꽉꽉 조였다.

“아!”

렉시는 몸을 파드득 떨며 허리를 조였다. 선단이 계속해서 예민한 부분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배 속이 꿈틀대며 성기를 물어뜯듯 조였다.

“아, 아, 앗, 아!”

스치듯 지나치는 쾌감, 렉시는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움직였다. 동조하듯 움직이는 렉시의 움직임에 결합이 더욱 깊어진다. 묵직한 것이 더 이상 깊어질 수 없을 곳까지 틈을 벌리고 박혀 들었다. 도톰하게 안쪽이 막힌 부분에 선단이 닿자 렉시의 몸이 퍼뜩 떨렸다.

“흐, 흐아!”

렉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온몸이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거리면서 순간 정신을 잃을 뻔했다.

“아, 안 돼. 거기… 아아!”

처음 겪는 격렬한 반응에 로메인은 렉시의 몸을 누르듯이 하며 안쪽을 둥글게 긁었다. 방금 느낀 지점까지 닿기 위해 몸을 낮추자, 조금 볼록하게 솟아오른 아랫배 위로 성기가 움직이는 윤곽이 보였다. 느끼는 부위를 짓이기듯 문지르는 로메인의 성기에 렉시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흐, 아아아!”

느끼는 지점만을 꾹꾹 누르니 눈앞에서 번개가 친다. 허벅지가 벌벌 떨리며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밀려드는 쾌감에서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자 도망치지 말라는 듯 로메인이 몸을 더욱 붙여 온다. 그는 렉시의 허리를 들고 아래에 쿠션을 가져다 댔다. 엉덩이가 더욱 높아진 자세에 렉시가 멈칫한 사이, 잠깐 멈추었던 로메인이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흐, 아앗!”

퍽!

아까와는 다른 각도로 파고드는 성기가 퍽 거칠었다. 바뀐 자세 탓에 보다 더욱 깊은 곳으로 자지가 닿는다. 막다른 곳이 깊숙이 눌릴 때마다 전신이 요동치며 헐떡거린다.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눈앞이 번쩍거렸다. 내벽이 물결치며 성기를 안으로 빠는 감각에 로메인이 신음했다. 철썩대던 감각의 파도가 순식간에 수위를 높였다. 렉시는 넋을 놓은 채 흐느꼈다. 입 밖으로 나오는 모든 말들이 흐느적거렸다.

“아, 아아, 아응, 좋, 아냐, 아흐흐흑!”

“크윽…!”

빠르게 박혀 오는 자지가 몸의 형태를 바꿀 듯이 때린다. 철썩, 철썩, 안쪽으로 빠르게 처박히는 감각에 렉시는 입을 벌렸다. 이젠 신음조차 내뱉기 힘들었다. 푹푹 쑤셔오는 아래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질척한 소리가 귓전에서 울릴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내벽이 헤집힐 때마다 성기에서 물이 흘렀다. 잔뜩 진탕된 안쪽에서 거품 섞인 정액이 비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이제, 그, 아, 아아아앗!”

퍽!

허리가 깊게 눌리면서, 로메인이 드디어 사정을 시작했다. 배 안쪽으로 뜨거운 것이 퍼지는 감각에 렉시는 몸을 떨었다. 철벅, 철벅, 사정을 하면서도 천천히 움직이는 성기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렉시는 할딱거리며 로메인이 사정을 멈추길 기다렸다. 반쯤 세워진 허리가 덜덜거리며 떨렸다. 깊게 싼 정액 때문에 안의 것이 조금씩 밀려 나온다. 로메인은 흐릿해진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성기를 뽑았다.

지익… 선뜩한 느낌과 함께 빠져나가는 자지는 정액과 애액으로 번들거렸다. 붉게 달아오른 자지에선 보는 것만으로도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한차례 사정으로 조금 풀이 죽긴 했지만 여전히 거대한 것이 빠질 때마다 내벽이 조금씩 딸려 나가는 게 느껴진다. 안을 긁듯이 하며 나오는 감각은 지금의 렉시에게 지나친 쾌감이었다. 렉시는 입술을 꼭 깨물고 한차례 몰려온 쾌감을 견뎌 냈다.

“아, 응, 아….”

성기가 완전히 빠졌다. 몸을 한껏 비틀며 목을 울렸다. 솟아올랐던 허리가 천천히 내려오며 몸 위로 묵직한 무게가 내려앉는다. 강하게 몸을 끌어안는 남자의 품에 렉시는 한껏 안겼다. 매달리듯 안기는 남자의 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애액과 땀으로 젖은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동물적인 냄새가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로메인….”

속삭이자, 로메인이 화답하듯 렉시의 얼굴에 입을 맞춘다. 잔뜩 만족한 야수가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핥듯이 지분댄다. 지분대던 그의 입술이 렉시의 입술을 덮치기까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으음….”

헐떡이던 숨도, 온 세상에서 울리는 것만 같던 젖은 소리도 모조리 사라졌다. 그저 남은 것은 터질 듯이 울려 오는 고동과 서로의 체온뿐.

목에 팔을 걸고 강하게 끌어안았다. 점점 밝아 오는 새벽빛이 두 사람을 비추자,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아 놓은 천이 침대 안을 완전히 가린다.

지금 막 맺어진 연인의 밀월은 이제서야 시작이었다.

******

황도의 밤은 아름답다.

제국의 기틀이 잡힌 이래, 단 한 번도 불이 꺼진 적이 없는 이 도시의 밤은 불야성이란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 거주하는 귀족가의 저택에선 하루걸러 늘 연회가 벌어지고, 그 연회에 참석하는 이들 때문에 온 도시가 들썩인다. 수도를 끼고 도는 강은 낮엔 조업을, 밤이면 횃불을 들게 해 수상 연회를 즐겨 어두워야 할 강조차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귀족의 거주구도, 평민들의 거주구도 상황은 똑같다. 낮에는 낮의 일을, 밤에는 밤의 일을 하는 자들로 도시는 잠이 들지 않는다. 밤이 없는 도시, 늘 해가 떠 있는 것 같은 곳, 보석 같은 환영이 끊이지 않는 제국의 보석.

사르칸트 제국의 수도, 사르타.

“아름답군.”

그 모든 장면을 한 단어로 일축하며 남자는 술을 한 모금 넘겼다. 푹신한 쿠션들이 즐비한 침상 위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무료한 기색이었다. 휘잉, 찬바람이 불며 남자를 가린 장막을 위로 쳐 낸다. 불어온 바람 때문에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 위로 우뚝 솟은 콧대, 방금 마신 술로 젖어 있는 붉은 입술이 선명하다. 붉게 빛나는 머리칼 사이엔 세월의 흔적이 드문드문 보였으나, 대리석같이 매끈한 얼굴은 아직 퍽 젊어 보인다. 휘잉, 다시 바람이 불며 장막을 벗겨 낸다. 일부러 낮춘 조도의 불빛 아래, 빛을 받은 눈동자 위로 빛이 흘러가듯 고였다.

“아름다운 밤이야. 그렇지 않나?”

남자는 훗 하고 웃으며 어느샌가 다시 채워진 잔을 목으로 넘겼다. 시선은 밖을 향해 있지만 누굴 향해 묻는 것인지는 명확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인영이 얼핏 흔들렸다.

“…폐하.”

“사석이니 예를 차리지 않는 것은 용서하지. 오랫동안 궁을 벗어나 있던 자에게 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니.”

“!”

등줄기로 싸늘한 것이 흐른다. 그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무릎을 꿇었다. 내리깔기 전 본 황제의 얼굴엔 미소가 맺혀 있었지만 그는 속지 않았다. 남자는 웃으면서 사람의 목을 치고, 또 그걸 즐겨 보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맘에 들지 않으면 일부러라도 실수를 하게 해 벌을 주고도 남는다.

“죽여 주시옵소서, 폐하. 신이 어리석어 감히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혔나이다.”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이 절한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주인에게 올리는 극상의 예였다. 금안 안쪽, 검은 동공이 가늘게 좁혀졌다. 미미한 웃음을 더욱 짙게 흘리던 황제가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일어나라.”

“폐하.”

“오늘 밤이 아름다운 것을 행운으로 여기거라. 덕분에 내 기분이 오늘은 퍽 좋으니.”

황제는 서서히 일어나는 수하를 보다 눈을 돌렸다. 간만에 맑은 날씨 덕에 먼 곳까지 도시의 불빛이 흐르는 장관을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소신, 폐하께 긴히 올릴 것이 있사오나…. 부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받아 주시길 청하옵니다. 밤바람이 퍽 차니 옥체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밤바람이 아니라 타인의 눈과 귀가 두려운 것이겠지.”

“폐, 폐하.”

한순간에 내심을 짚인 이가 몸을 떨자 황제는 웃었다. 뭘 저리 놀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가 각지에 숨겨 둔 정보원들이 다 하는 짓거리가 이것이거늘.

“알로라, 짐을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거라.”

…펑!

황제가 말을 함과 동시에, 강에서 쏘아 올린 불꽃이 터지며 하늘을 수놓았다. 녹색, 붉은색, 황색, 푸른색… 숙숙 터지는 불꽃을 따라 황제의 얼굴에 묘한 음영이 진다. 그는 침상 아래 부복한 이를 보며 희게 웃었다. 하얗게 드러난 이가 마치 육식 동물이 웃는 것처럼 보인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다 혀가 없는 것들이란다. 네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가지고 왔건, 상관없다. 내가 이곳에서 듣고자 하니 너는 이곳에서 말을 해야지.”

그는 목을 뒤로 젖히며 하늘을 향했다. 마치 좀이 쑤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그가 부복한 사내를 향해 사납게 웃었다.

“그래 알로라. 무슨 일이냐?”

알로라의 말이 이어질수록 황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날카롭게 빛나는 금안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진다. 자신의 뜻을 숨기기 위해 늘 짓던 미소를 잊을 만큼, 현재 듣는 보고에 심취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로라는 침을 삼키며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그가 오랫동안 지켜봐 온 영지의 일이니, 많은 질문들이 쏟아질 것임은 명약관화했기에.

“역시, 공작이 자리를 비운 것이 맞았던 것이냐.”

“예, 폐하. 폐하께서 하명하신 것이 그대로 맞았습니다.”

알로라는 힘주어 말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진짜 공작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공작은 자리를 비웠고, 그를 대신한 것이 플로랑 후작이었습니다. 프로하우스 공작은 호위와 함께 제국 전역을 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역시 그랬군.”

황제는 턱을 쓰다듬었다. 혹시 몰라 살펴보라고 한 일이었으나 그것이 진실로 밝혀지니 그조차도 어이가 없다.

“그 바보가 공작의 옆에서 떨어질 리가 없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지…. 허나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야. 설마 공작이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니. 내 그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속하가 미진한 탓에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됐다. 설령 누군들 눈치챌 수 있었겠느냐? 전혀 전례 없던 일이니 알아내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겠지. 아이라….”

하지만 아깝구나.

황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실로 아깝기 그지없는 일 아닌가. 그가 그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 제국의 황후 자리는 다른 자로 채울 수 있었을 것을. 프로하우스 령의 온전한 복속은 황가 대대로 이어지는 숙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당치 않은 상대와 공작을 결혼시킨 것도 다 그 일환 아니었던가.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고개를 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 쏟은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서, 공작가의 후계자는 그 새로 나타난 사생아가 되었다 이건가?”

“…네, 폐하. 이미 황가에 이혼장이 제출되었고, 현재 해당 문건이 행정청에서 계류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답지 않게 일 처리가 급하다 했더니…. 벌써 이혼장을 제출했나. 하긴, 그런 짓을 저지른 이와 더 이상 한곳에 있기 싫겠지. 하지만 짐에게 묻지도 않고 이혼장을 제출하다니 참 건방지단 말이야.”

황제의 입매가 차게 굳었다. 금색 눈동자가 안으로 침잠하듯 깊어진다. 알로라는 조심스레 황제에게 질문했다.

“허가…하실 겁니까?”

황제는 피식 웃었다. 감히 황제에게 발칙한 질문 짓거리를 하고 있지만, 스무 해를 넘게 충성한 충신의 질문이라 치면 못 물어볼 것도 아니다. 그는 한쪽 팔로 얼굴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허면 메르디스 님은….”

“메르디스의 아버지 쪽 가문이 이하트 가문이었던가?”

황제는 뚱한 얼굴로 얼굴을 긁었다. 오래전에 시집보낸 여동생이 돌아온단 소리에 이하트 가문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등청해 황제를 알현하게 해 달라 떼를 쓰는 중이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한두 번은 실수할 수도 있다. 헌데 어떻게 아이까지 낳은 본부인을 그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는가? 고위 귀족의 혼인은 황제의 명이 떨어져야 할 수 있다. 허니 그들로선 이혼이건 재혼이건 안 된다고 해 달라는 것이 최종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 짐은 바쁠 예정이다. 해서 그들의 알현 역시 이루어지지 않겠지. 짐은 그들의 알현 전 이혼을 허가할 것이고, 또한 재혼 역시 허가한 뒤에서야 이하트 일족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늦었음을 알고 땅을 치게 되겠지만 이미 허가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그들은 좋건 싫건 돌아오는 여동생을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문에 씻을 수 없는 불명예가 새겨지겠지. 흠… 어쩌면 영지전을 벌일 수도 있겠군.”

“네, 그렇습니다. 이하트 가문의 사람들은 명예를 중시 여기지요.”

“흠, 하지만 짐은 영지전은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병충해가 휩쓸고 간 재해를 간신히 극복한 것이 불과 재작년의 일. 프로하우스 영지의 곡창 지대에서 나온 밀로 제국 신민들이 굶지 않고 살았다. 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곡창 지대를 전란에 휩쓸리게 해서야 쓰겠느냐?”

줄줄 나오는 말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것처럼 보였다. 알로라는 잠시 침묵했다. 황제의 뜻은 알겠으나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외람되오나, 폐하. 공작에게, 그렇게까지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유가 메르디스에게 있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결혼은 황제가 주선한 결혼이다. 그것을 반려하는 것만으로도 공작은 황제에게 큰 불충을 저질렀다. 물론 이유 있는 이혼이므로 황제가 받아들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기분이 좋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이 일로 공작가와 황가가 크게 반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가 웃었다.

“네가 황궁에 오랫동안 오지 않았지만 감은 여전하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짐은 이 이혼이 크게 기껍지는 않다.”

“허면 어째서 그런….”

“과거, 짐은 공작에게 목숨을 한번 빚진 적이 있다. 내가 황제의 위를 받기 이전의 일이지.”

빚이라고? 알로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북쪽 야만인들과의 전쟁 막바지에 있었던 일이다. 아마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거의 다 이긴 전쟁 마지막 전투에서 기습당해, 퍽 많은 가문의 후계자들이 죽고 말았지.”

황제가 말하는 것은 그 역시 아는 전쟁이다.

전쟁은 이겼으나 막판 전투에서 불러온 후계자 부대 반이 전사했던. 그래서 다들 이긴 전쟁이지만 크게 기뻐하지 못했던.

“소규모 전투에서 연전연승한 것에 심취한 우리들은 녀석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녀석은 기색이 이상하니 뒤를 쫓지 말자고 했지만 내가 묵살했지. 당시 부대의 우두머리는 나였고, 녀석은 전투 능력이 참 떨어졌거든. 어쨌거나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는 도망치는 적을 따라 진지를 벗어나고 말았다. 그게 유인책이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지….”

황제는 눈동자를 가늘게 내리깔았다. 참으로 드물게 보이는 쓴웃음이 입가에 머물렀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전황이 변했지.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다 건 놈들의 기세는 매서웠다. 부대가 둘로 갈라지면서 반은 잡히고, 반은 도망쳤지. 천만다행으로 나는 도망치는 부대에 속했지만 따라붙는 녀석들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때 공작이 나서서 미끼가 되었다.”

당시 마지막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황제의 명으로 철저히 불문에 부쳐졌다. 기록을 하는 사관들조차 해당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사초에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식 사서에는 등록되지 않은 이야기다.

“솔직히 죽을 줄 알았다. 실제로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헌데 결국은 살아남았더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리고 제국의 요직에 있는 몇몇 인사들도 현재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다.”

황제는 한숨을 삼켰다. 여전히 떠올릴 때마다 입을 쓰게 만드는 기억은 남자에게 유쾌하지 못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반이나 죽었지만, 덕분에 반은 살았다. 당시 그 어떤 치하도 해 주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그러한 공이 있는 자이니, 이 정도 상은 내리는 것이 옳겠지.”

황제가 피식 웃었다. 알로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다고 속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수하를 웃는 눈으로 보던 황제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네 입에서 메르디스 이야기가 나오다니 놀랍구나. 오랫동안 내 사촌을 보면서 정이라도 든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전 그저…. 그분이 이렇게 물러나게 되면, 폐하께서 도모하신 모든 일이 어그러지는 것이 아닙니까.”

“도모라….”

황제는 고개를 기울여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제국의 황제들이 대를 이어 벌이는 사업 중 프로하우스 복속은 중요도가 퍽 높다. 힘으로 밀어낼 수 없는 상대이니만큼, 접근은 보다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모한 것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였지. 그나마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독만 잔뜩 오르게 한 마당이다. 일단은 두고 봐야 할 거다. 메르디스가 너무 일을 크게 벌렸어.”

그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말썽꾸러기 사촌을 생각하자니 살짝 머리가 아파 왔다.

“실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녀석 아닌가. 그저 얌전히 있었으면 적어도 제 지위는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을….”

제 욕심 많은 사촌 누이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조금은 더 버텨 주었으면 했는데.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것이니 내가 손댈 범위는 이미 넘어섰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어야겠지. 도망친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확보했나?”

도망친 자들. 알로라의 이마로 식은땀이 맺혔다. 사실 이것이 가장 문제였다. 제일 먼저 확보해야 할 자들을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공작의 영지 밖으로 나간 흔적은 있는데, 이후 흔적이 뚝 끊겼다. 한때 기사 수업을 받은 자들이라 그런 것인지 추적이 쉽지 않았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고개를 숙였다.

“…남긴 흔적을 추적자들이 쫓고 있습니다. 아직은 잡지 못했지만, 도망하는 방향이 기레스 백작가의 영지 쪽이었습니다. 현재 백작의 영지로 가는 길목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못 잡았나? 생각보다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는 걸 잘하는군.”

황제는 못마땅하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살짝 이지러진 눈동자에서 기분 나쁜 티가 뚝뚝 떨어졌다.

“선대가 계획한 탁란은 당사자가 있어야 증명이 되는 것. 비록 공작이 그 사실을 먼저 알리긴 했지만…. 그 일은 당사자가 없다면 증명이 불가능하지.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그 애를 확보하도록. 공작보다 먼저 확보해야 한다. 알겠나?”

“예, 폐하. 반드시 잡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너도 궁으로 돌아오거라.”

“……!”

“그 여자 몸은 이제 그만하고, 제 몸으로 돌아오렴. 키로스 시종장이 슬슬 후임을 찾는 눈치였으니 그 자리에 가면 딱 맞겠구나.”

알로라는 예법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동자에서 경악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폐, 폐하. 신은… 감히 폐하께오서 하명하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헌데 어찌 감히…!”

황제의 금안이 가느다랗게 접혔다.

“플로랑 후작은 남장을 하고 반년을 견뎌 낸 충신 중 충신이지. 실로 타인의 귀감이 되는 가신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허나 짐은 그런 가신을 가진 프로하우스 공작이 부럽지는 않구나. 내겐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여장을 하고서 기약 없는 명을 수행한 네가 있으니 말이다.”

“폐하…!”

감히 생각지도 못한 치하에 알로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황제의 면전이 아니라면 아마 통곡하며 울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어룽해진 눈망울에 황제가 미소했다.

“짐의 곁에 신하는 많고 많으나, 그대 같은 충정 어린 자들은 많지 않지. 충정 어린 자를 멀리 둘 정도로 짐이 어리석은 암군은 아니다. 알로라, 짐은 충정 어린 자를 매우 좋아한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 자국을 보며 그는 시선을 멀리 두었다. 다시금 들어온 도시의 전경에 잔뜩 뒤틀린 마음이 조금 풀어진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들이 모인 것 같은 도시의 전경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 중 하나다. 점점이 모여 있는 불들이 모여 빛의 물결을 이룰 때마다 그는 속절없이 그 장면에 빠지고 만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결국은 그의 치세, 그의 도시를 아름답게 밝혀 주지 않는가.

“그들도 결국은 짐의 치세를 밝히는 빛이 될 것이다. 용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 인간의 역사란 실로 그런 법이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버텨 내고 있으나… 결국 작은 것은 더 큰 것에 속하게 되어 있다.”

비록 지금은 용 때문에 어쩌지 못한다지만….

“제국은 오래갈 것이다. 그러니 설령 짐이 아니더라도 짐의 후대, 그 후대엔 그 땅의 진정한 주인이 바뀌는 날이 오겠지. 당장은 기뻐하는 것을 내버려 둬도 좋을 것이다. 결국 승리는 짐의 것이 될 것이므로.”

사멸해 가는 용의 피에 축복을.

한없이 빛나 갈 제국의 미래에 신의 가호를.

그는 남아 있는 술잔을 흔들며 하늘을 향해 건배했다. 찰랑, 유리잔에 맺힌 불빛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다.

******

겨우내 바짝 메마른 황야에선 물 한 방울도 사치였다. 사람은 하루에 일정 이상의 수분을 섭취해야 하건만 요 며칠 그는 물을 마시지 못했다. 그가 며칠간 섭취한 물은 엊그제 바위틈에 맺힌 물방울이 다였고, 그마저도 아쉬워 바위를 싹싹 핥았다.

문득 며칠 전 잡았던 토끼가 그리워졌다. 모자란 수분을 섭취하기 위해 잡은 짐승의 피를 마셨다가 역겨워서 버렸던 그때가 천국이었지.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해진 남자의 모습은 과거 그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희고 귀티 나던 살결은 까맣게 텄고, 남자답게 떡 벌어졌던 체격은 옷이 펄럭일 정도로 말랐다.

기약 없는 도피에 피로는 날이 갈수록 누적됐다. 마음에서 여유는 이미 사라진 지도 오래다. 도망자의 삶이 실로 그렇지만, 그저 곱게만 자란 그로서는 이 일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는 아직 젊었고, 죽음은 생각하기도 두려운 것이다. 그나마 그가 이 생활을 버티는 건 그가 기사 수업을 받을 때 받은 훈련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마저도 없었다면, 그는 도망치는 도중 말라 죽거나 잡혀 죽거나 했을 것이다.

젠장! 그는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왜 이렇게 된 걸까. 무엇이 문제인 걸까.

무거운 머리를 흔들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자리에 걸터앉아 아까 간신히 발견한 선인장을 꺼내 입을 축였다. 황야를 한참 헤매다 간신히 발견한 선인장 군락에서 그는 환호성을 내지르며 이것들을 캤다. 메마른 지역의 선인장은 훌륭한 식수 공급원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선인장을 살폈다. 몇몇은 바짝 말랐지만, 몇 개는 상당히 생생했다. 그는 그가 들고 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선인장을 조심스레 챙겼다. 뾰족한 가시를 제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며칠간 마실 물이 확보됐다.

그는 한참 선인장을 입에 물었다. 조금씩 배어 나오는 물기가 마치 감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과육에서 나오는 물기가 많았고, 또 생각보다 달았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을 감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일순 잊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있는 곳이 황야가 아닌 성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이를 악물었다. 가슴에서 모멸감이 솟아올랐다.

얼마 전 같았으면 입에도 대지 않을 것을 가지고 이딴 상상이나 하고 있다니.

급작스레 찾아온 나락은 그에게서 이성마저 앗아 간 모양이었다. 썰물처럼 밀려온 비참함에 그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까칠하게 말라 드러난 턱이 바르르 떨리며 모래를 떨궈 낸다.

“흐….”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온다. 그는 뻑뻑한 눈가를 가리며 애써 욱 받치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다. 눈시울이 뜨거워졌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수분을 구하기 힘든 환경에서 몸이 적응이라도 한 것일까. 차라리 악 소리를 내며 울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은 그래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 그자들이 나타나 자신을 잡아갈지 모르는 지금에서는. 소리 없이 나타나 숨을 낚아채 가는 자들이 사방에 산적해 있다. 큰 소리를 내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 자신을 잡아갈지 모른다.

“무서워….”

그는 손을 덜덜 떨며 몸을 얼싸안았다. 두터운 로브 아래 감싸인 몸이 덜덜 떨리며 간신히 눌러 놨던 공포를 터트린다.

“무섭다고… 제기랄!”

버나드는 바위 아래 몸을 웅크린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영지에서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수십 명이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며칠 전의 기억이 그의 몸의 체온을 앗아 갔다. 사람들이 지르던 비명 소리, 비탄에 빠진 신음 소리, 귀기 섞였던 그것들의 고함….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앞에서 나선 길잡이가 나지막하게 외쳤다. 그가 손을 뻗어 까닥대자, 신호를 받은 자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팔다리에 생채기가 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움직여야 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나무 울타리만 벗어나면 공작령의 밖. 그들을 잡기 위해 사람을 푼 공작도 타 귀족의 영지까지 기사들을 보내지는 못한다.

“조심!”

억눌린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몸을 멈췄다. 동시에 멀리서 다그닥 소리와 함께 몇 필의 말이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을 찾기 위해 파견된 기사들이다. 훅훅, 말들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맨 앞에 있는 기수가 고개를 쭉 빼며 그들이 있는 자리를 훑는 것이 눈에 보였다. 사람들은 숨을 바짝 죽였다. 기수에 있던 기사가 뒤를 향해 묻는 것이 바람결을 타고 드문드문 들렸다.

“…사! 이곳은…! 확인했나?”

“그쪽은…! 아직…. 허나…!”

“단…! 저쪽에… 흔적이!”

“좋다…일단 …자!”

히이이이잉!

날카로운 말의 울음소리, 달리던 기수를 따라 감시하던 인원들이 사라졌다. 숨죽이고 있던 자들이 웅크린 몸을 황급히 폈다.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그들로선 지금이 기회였다.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기어가는 자들, 그 안에 있던 버나드는 이를 악물었다.

“제길….”

마치 개처럼 바닥을 기는 이 꼬락서니라니!

빠득, 사리문 턱이 아파 와 그는 힘을 뺐다. 대신 그는 자기 바로 옆에서 기어가는 기레스 백작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요 며칠 겪은 일로 날카로워진 백작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거렸다.

“백작…! 대체 이 빌어먹을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일단 이곳만 벗어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일단…?”

버나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 일단은 자기도 좀 참아 보자. 어쨌거나 예까지 온 이상 같은 배를 탄 것 아닌가.

“그 일단은 소리를 대체 몇 번 한 줄 알긴 하나? 이번은 정말이겠지?”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제 영지입니다. 굳이 이쪽으로 돌아온 건 여기가 영지와 제일 가까운 지름길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저들도 그래서 저렇게 돌아다니는 겁니다. 물론 공자께서 갈 만한 다른 장소가 있다면야 그쪽으로 가셔도 됩니다만…. 지금은 제 영지가 다잖습니까?”

그러니 닥치고 기기나 해라. 보채지도 좀 말고. 어차피 너 갈 데도 없지 않냐?

백작은 그런 투로 대답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젠 비위마저 맞추기 귀찮다는 태도였다. 버나드는 기가 막혔다. 감히 나를 이런 꼴로 만들고서 뭐가 잘났다고 저리 고압적인가!

‘저놈이 감히… 날 이런 상황에 처박아 놓고!’

과거 그에게 이 상황을 말했다면 너 꿈꾸냐 했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 후보였다. 비록 후계자는 못됐지만, 사실 그거 아니더라도 그는 무시 못 할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외할머니는 황녀요, 어머니는 현 황제의 사촌이다. 공작인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외가 쪽 핏줄만으로도 그는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랬던 내가… 이런 신세로 전락하다니…!

‘자기만 믿으라고 하더니, 이따위 결과를 가지고 온 게 누군데?’

사실 상황으론 백작도 조금 억울한 구석이 있긴 했다. 어쨌거나 그가 짰던 간계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꽤 괜찮게 흘러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결정적으로 그의 계산이 어긋난 건 바로 용의 존재 때문이었으니…. 설마하니 그 자리에서 용이 나타날 것이라 어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사람은 본래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라. 버나드는 막상 일이 이렇게 꼬이고 나니 맨 처음 자신을 선동했던 상대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오로지 그 때문에 어긋난 것 같아 환장하기 딱 직전이다. 마음이 시시각각 온갖 데로 튀어 나갔다. 수십 개의 생각이 휙휙 바람처럼 왔다 갔다 했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어리석게도 백작의 말에 휘둘렸다고 하면….’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면 어떨까. 그래도 아들인데 설마 죽이지는 않으실 거 아냐?’

‘기사들도 죽이려기보단 끌고 가려고 하는 것 같단 말이지….’

얼결에 함께 도망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와 백작은 상황이 다르다. 백작은 잡히면 즉결 처형은 아니더라도 최소 징역형은 될 정도의 죄를 지었다. 그러니 저렇게 미친 듯이 도망가는 것이고. 허나 자신은 일단 친자식이니, 그 목숨까지 앗아 가지는 않을 것 아닌가?

누가 봐도 정치적인 고려가 뒤떨어지는 생각에 자기 위주의 합리화였다. 남들이 보기엔 그나 백작이나 그게 그거란 걸 그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인 감각을 갈고 닦는 대신 타인에게 그걸 일임한 자의 어리석음.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늘 자신들이 지혜롭다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버나드는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매달았다.

‘…좋아. 일단 지금은 어려우니, 밖에 나가면… 몰래 도망치자. 설마 저들도 내가 도망치리라곤 상상하지 못하겠지. 애초 그럴 것이면 아예 함께 오지 않았을 테니까.’

버나드는 어머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또한 자신이 없는 공작성에서 무슨 소문이 도는지도 몰랐다.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현재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그저 그들을 쫓는 자들이 있고, 따라서 도망가야 한다는 수준 정도다. 정보통 백작의 수족들이 공작성 내에서 축출되는 중이었기에 벌어진 참사였다.

만일 버나드가 자신을 둘러싼 진실을 알았다면 그는 도망칠 생각을 즉시 접었을 것이지만…. 어쨌거나 이미 마음은 정해졌다. 그는 두 눈을 빛냈다.

경계선을 넘어 한참을 달린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폐허였다. 주변엔 작고 큰 언덕이 있었고, 관목은 무성했으며 폐허는 반쯤 허물어졌다. 백작은 사람들을 데리고 주변을 훑다 큰 바위 아래로 다가갔다. 쿵쿵 다리를 굴러 본 그가 사람들을 향해 명령했다.

“이 아래를 파라.”

저게 무슨 헛짓이지?

버나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데 놀랍게도, 헛짓이 아니었다. 얼마간 파내자 거기서 큰 항아리가 나왔던 것이다. 거기엔 짧은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한 물건들이 묻혀 있었다. 마른 식량, 이불 대신으로 사용할 수 있을 두꺼운 모포, 옷가지, 기타 상비 약품들.

급히 도망친 탓에 제대로 된 정비를 하지 못한 이들에겐 유용한 물건들이다. 다들 반색하며 물건들을 살피는 사이, 길잡이와 짧게 이야기하던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여기서 야영한다. 다들 짐을 풀도록!”

백작이 손뼉을 치자 다들 부리나케 짐을 풀어놓았다. 몇은 식사 준비를 하고, 몇은 주변 언덕에서 땔감으로 쓸 가시나무를 주워 온다며 떠났다. 버나드는 멀뚱하니 서 있다가 백작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원래 땅을 파면 저런 물건이 나오나? 도망갈 생각이 만만이다 보니 도움이 될 만한 건 뭐든 들어 둬야 했다. 그는 슬쩍 백작에게 물건의 연원을 물었다.

“저 물건들은… 자네가 미리 숨겨 놓은 건가?”

“제가 숨겨 놨다면 저거에 말도 가져다 놨겠지요. 원래 있던 물건입니다. 이리저리 떠도는 행상들이 파묻어 놓은 거죠.”

“행상?”

“상행을 하다 보면 피치 못할 사고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도적이나 뭐 강도들도 그렇고…. 그런 사고를 당한 자들더러 쓰라고 남겨 놓은 겁니다.”

“…그런 걸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버나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말이 맞다면 이건 귀족들이 알 만한 장소가 아닌 거 같은데. 버나드의 질문에 백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대리인을 쓰고 있지만, 어쨌거나 저도 상단을 가지고 있죠. 운영하다 보면 이거저거 주워듣게 마련이니까요. 헌데….”

백작은 심드렁하게 물건들을 들어 올리며 혀를 찼다. 약간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은 덤이다.

“제 생각보다는 남은 물건이 적군요. 원랜 이거보다 더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저희 말고 다른 선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게 여러 개면 거기서 가져오면 될 것 아닌가.”

“그래도 되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은 관도에 가깝고, 거긴 상인들이 자주 다니는 곳이라… 좀 곤란합니다.”

“왜?”

“안 그래도 쫓겨 다니는 마당에 시체까지 챙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시체?”

뜬금없는 말에 버나드의 눈동자가 커졌다. 시체를 왜 챙겨?

“우리 얼굴을 보면 죽여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시체 처리까지 하기엔 시간이 좀 촉박하단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반문하는 백작의 말에서 느껴지는 피 냄새에 버나드는 얼굴을 굳혔다. 시체라니…. 설마 농담인가…?

허나 바라본 백작의 얼굴은 진지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한 소리였던 것이다. 애초 상행을 하는 자들은 살인에 익숙한 자들이다. 더더군다나 백작 같은 경우는 상행하면서 은근히 많은 범법을 저질러 왔기에 죽음을 입에 담는 게 거리낌이 없었다. 버나드가 아무리 성격 사나운 자라고 해도 사람을 설렁설렁 죽일 정도는 아니다. 버나드는 어쩐지 조금 기분이 나빠져 입을 다물었다. 백작은 그런 버나드를 내버려 두곤 슬슬 나타나는 별을 보며 방위를 짚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내일부터 북으로 달릴 겁니다. 저기, 저 별 방향이 북이니… 한 열흘 정도면 제 영지에 다다르겠지요.”

“으음.”

국자 모양으로 빛나는 별의 꼬리 쪽이 북쪽.

버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여기서 백작가의 영지까지 열흘이라면, 공작가까지 돌아가는 데는 시간이 또 얼마나 걸릴까 싶어서였다. 물론 백작은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다.

“불평은 하지 마십시오. 말이 없으니 어쩔 수 없으니까요. 어쨌거나 오늘은 조금 일찍 자 두십시오. 내일부턴 강행군이 될 겁니다.”

불평불만 따위는 들어주지 않겠다는 강경함이 가득한 말이다. 버나드는 속으로 흥흥대며 욕을 했다.

‘흥, 강행군은 개뿔! 절대 안 간다!’

당장 오늘이라도 기회 나면 도망칠 건데 강행은 무슨?

하지만 그는 일부러 조금 툴툴대 주었다. 괜히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가 도망칠 생각이란 걸 들키면 큰일 아닌가.

“…흥,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내가 겁을 낼 것 같아?”

“내일도 부디 그러시길 바랍니다.”

백작은 가타부타 하지 않고 자리에 정좌한 뒤 눈을 감았다. 어느샌가 피어오른 모닥불로 주변이 조금 환해져 있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정돈한다. 버나드는 눈을 감은 백작을 뒤로한 채 머리를 굴렸다.

‘어디로 가야 조금 더 효과적으로 도망칠 수 있을까.’

급하게 도망 나왔지만 그런 것치고 일행은 제법 많았다. 백작이 이래저래 데리고 온 수하들 수만 대략 서른을 넘는다. 그것도 죄다 전투가 가능한 전투 인원들이다. 모두 다 허리에 검이나 활을 멘 자들이기에 신변 걱정을 덜 했는데, 막상 도망치려고 하니 저들이 참 방해꾼들이었다. 저들 사이사이를 벗어나려면 꽤 골치가 아플 게 뻔했다.

‘평지보다는… 역시 산으로 도망가서 숨을 죽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한데.’

앞으로 가는 도중 평지만 있다면 골치가 아플 거다. 되도록 이런 지형이 있는 오늘 밤 일을 처리해야 할 텐데.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작고 큰 언덕 위에 무성하게 자라 있는 나무들 사이로 흐르는 어둠이 짙다. 어딘지 모르게 은근히 피어오르는 것 같은 차가운 안개들이 슬슬 바닥을 향해 기어온다. 캥―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에 희한할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는다. 잘 살펴보니 군데군데 무너진 벽돌들도 좀 보이고….

폐허라 그런가?

‘생각보다 조금 많이 음산한 것 같은데.’

요 며칠 도망 다니며 야외 취침 정도는 별것 아니게 된 지 오래다. 기사 수업을 받을 때도 이런 훈련도 제법 받았고. 하지만 이상하게 이 장소는 사람의 신경을 건드렸다. 내가 도망치기로 마음먹어서 그런 건가. 은근히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에 그는 중얼거렸다.

“헌데 여기 어쩐지 좀…스산한 장소군.”

말로 내뱉으니 어째 더 스산한 느낌이다. 그가 팔로 몸을 비비는데 기레스 백작이 툭 내뱉었다.

“기분 탓은 아닐 겁니다. 원래 이곳은 예전에 한 왕가의 묘지터였으니까요.”

“…묘지?!”

버나드는 입을 벌렸다. 묘지라고?

“묘지라니…? 우리가 시, 시체 위에서 잠을 잔단 말인가?!”

“걱정 마십시오. 그 왕가는 사라진 지 오래고, 그 이후 묘지로 쓰는 자들도 사라졌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사람 묻은 게 이백 년 전인가 그럴 겁니다. 있어 봐야 해골 정도겠죠.”

“!”

버나드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백작을 보았다. 아니 지금 그런 문제는 아니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묘지터에 저렇게 자리를 잡을 생각을 다 한단 말인가. 저이는 겁도 없는가, 아무리 예전 일이라지만 사람 시체 묻은 골짜기에서 잠을 잘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어떻게 묘지에서…! 불경하게…!”

“죽은 사람보단 산 사람이 더 무서운 법입니다. 쫓기는 와중에 찬밥 더운밥 가릴 게 아니잖습니까?”

“하, 하지만…!”

버나드는 억눌린 목소리로 백작에게 물었다.

“하! 저들도 이 사실을 아는 건가?”

“제 수하들입니다.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그, 그런…!”

수하들이 모른다고 하면 소란을 피워서라도 다른 데 잡을까 했던 계획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버나드의 얼굴을 본 백작이 쯧쯧 혀를 찼다.

“고작 해골이 무서워서 그럽니까?”

“그런 게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묘지는 죽은 자들이 눕는 곳이야. 거기에 산 사람이 누우면 피차 불편할 것 아닌가?”

버나드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었다.

“자네는 어쩔지 몰라도 나는… 죽은 자의 잠은 방해하고 싶지 않다.”

“나 원 참….”

한심한 듯 혀를 차는 백작은 귀찮은 듯 보였다. 버나드는 떫은 얼굴로 그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사람은 오래 겪어 봐야 안다더니….

‘저렇게 안하무인에 불경한 자인 줄은 몰랐어. 죽음은 신성한 것이고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어머니는 왜 저런 자를 총애한 거지?’

과거엔 어머니 때문에 이자가 싫었다. 허나 지금은 어머니가 아니라, 이자 자체만으로도 꺼려진다. 영지 안에 있을 땐 그냥 여자 좋아하고 권력을 좋아하는 경박한 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겪어 보고 말을 나누어 볼수록 곁에 둬서는 안 될 자처럼 느껴졌다.

‘저자가 나를 데려가는 것도 이상해. 과연 내가 좋아서 데려가는 걸까?’

한번 의심이 들고 나니 새로운 의심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가리워진 베일을 벗겨 내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면서 팽팽 돌아간다.

저들이 자신을 데려가는 이유는 과연 한 배를 탄 자라서일까? 저런 성정의 자가 왜 툴툴대는 나를 끝까지 데려가는 걸까. 혹시… 저자는 날 인질로 쓰려고 데려가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쩐지 오한이 들었다.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이 이상하게 싸늘하게 느껴진다.

그저 희미한 불만으로 시작했던 도망이 필연적인 것으로 변했다. 버나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백작을 강하게 응시했다.

“난 이곳에서 자지 않겠다. 다른 자리를 알아보겠어.”

“공자. 이곳은 야산이고, 짐승들도 종종 나옵니다. 모여 있어야 안전하지요. 아까 늑대 소리 듣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기사 수업을 받았다, 백작. 내가 내 몸 하나 못 지킬 것 같나?”

백작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이처럼 굴지 마십시오.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아이가 아니라서 하는 소리야. 내가 내 잠자리까지 자네한테 감독받아야 하나?”

전에 없이 강경한 태도에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버나드를 보고,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여기 말고 다른 평지는 없습니다…. 어디서 주무실 겁니까?”

“모포를 하나 주면 알아서 하겠다.”

“모포…? 아하.”

백작의 얼굴 위로 비웃음이 내달렸다.

“해먹이라…. 좋을 대로 하십시오. 대신 멀리 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애인 줄 아나?”

버나드는 기레스 백작이 건네주는 모포를 받아 챘다. 바짝 쫄아든 속을 애써 숨기며 그는 부러 코웃음 치며 뒤를 돌았다.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다 피식대는 백작의 시선을 애써 흘리며 그는 성큼성큼 걸었다.

낮은 야산이었지만 관목들의 키는 제법 컸다. 근처 도시나 마을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수령이 있는 나무들은 없었을 것이다. 영주 관할 지역이 아닌 야산의 숲은 몰래 벌목하는 자들이 많다. 버나드는 기둥이 제법 크고 단단한 나무를 골라 위로 올라갔다. 우거진 나무 사이 해먹을 치고 자리에 눕자 자리가 제법 편안했다. 자리는 야영지가 다 굽어보이는 자리였다.

얼핏 보면 쳐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잘 쳤다. 백작과 길잡이 몇이 버나드의 자리를 확인하고 가면서 살짝 놀란 눈까지 했을 정도다. 하지만 뻐기고 싶은 맘은 들지 않았다. 아닌 듯하면서 은근히 감시하는 태도가 영 거슬렸다.

‘역시 꿍꿍이가 있는 게 맞아.’

버나드는 숨을 죽이며 해먹에 누웠다.

‘깊은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자. 그때 도망치는 거야.’

“어때. 자?”

“어, 완전히 곯아떨어졌어. 들어 봐. 코까지 고는데?”

드르렁, 코를 고는 버나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남자가 바닥으로 내려갔다. 턱턱 바지를 터는 소리, 자갈을 밟는 소리가 뒤이어 들린다. 둘로 이루어진 순찰조는 낄낄대며 잡담을 했다.

“우리 백작님 눈치가 한 눈치 하는데… 이번은 틀리셨네?”

“요즘 예민할 일이 어디 한두 개냐. 백작님도 피곤하셨던 거지.”

“많이 피곤하신 거지. 생각해 보라고. 저 멍청한 자식이 이제 와서 도망갈 리가 없는데 말이야!”

순간 버나드의 눈꺼풀이 움직거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둘 다 보지 못했다. 순찰조는 툴툴대며 버나드의 욕을 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새끼, 그냥 자던 대로 자지 예민 떨고 지랄이야. 귀찮아 죽겠네. 이게 뭐냐 대체? 쉬지도 못하고. 야, 우리 다음 턴부턴 올라가지 말까?”

“…솔깃하긴 한데, 들키면?”

“새끼, 저 겁 많은 등신 때문에 계속 야밤에 뺑이를 치는 게 좋나 보네?”

“…누가 그렇대? 만에 하나 도망가면 어떻게 하냐 이거지!”

“코까지 골면서 자는 놈이 퍽이나 깨겠다. 그간 자면서 깬 적 한 번도 없잖아! 그리고 그냥 얼굴만 보지 말자는 거야. 밑에서 보면 다 보이는데 꼭 이 개고생을 해야 할 이유가 있어?”

“…그런가?”

오네 안 오네 시시덕대던 두 놈이 양단간의 결정을 내렸다.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자는 척하고 있던 버나드는 눈을 번쩍 떴다. 밤중에도 보일 정도로 확연하게 낯빛이 똥색이다. 방금 들은 말 때문에 짜증이 절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 찢어 죽일 놈들! 뭐, 멍청이? 등신?!’

없는 데선 나라님 욕도 한다지만 그게 화가 나지 않는다는 건 아닌 법. 자고로 밑의 것들의 태도는 상급자의 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그는 그간 백작이 자기 욕을 오지게 하고 다녔을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백작이 얼마나 자신을 하찮게 여겼으면 아랫것들까지 저 지경이란 말인가. 그는 이를 갈았다.

‘다들 두고 보자. 백작도, 그리고 네놈들도! 내가 돌아가기만 하면 다 죽었어!’

내가 니들 얼굴은 모르지만 목소린 다 기억해 놨다. 그는 이를 갈며 머리를 야영지 쪽으로 돌렸다. 타닥거리는 모닥불 사이사이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젠장, 대체 언제들 자는 거야?’

중앙의 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둥글게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근처에서 곁불을 쬐며 앉아 있었다. 타닥대는 모닥불 뒤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이 무너진 폐허 위로 늘어졌다. 불이 움직일 때마다 허우적대는 게 꼭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껌벅거렸다. 몸도 피곤한데 심기까지 상했더니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체력이 떨어졌군.’

체력은 국력이라는 어머니의 닦달 때문에 훈련은 짬짬이 했다. 하지만 실전과 훈련은 응당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잠력까지 꺼내 쓰고 있는 지금과, 적당히 놀며 하는 훈련이 같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잠시 있다 입술을 삐죽거렸다. 갑자기 떠올린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가까스로 들었던 소식 중엔 어머니가 연금되었단 것도 있었으니까.

‘어머니는… 잘 계시겠지?’

괜찮긴 할까. 그 성격에 연금을 견딜 수 있을 리 없는데.

‘아니야. 잘 계실 거다. 설마하니 아버지가 어머니를 어떻게 할 리 없지.’

둘 사이가 나쁘다곤 하지만 죽일 정도는 아니다. 일이 더럽게 꼬였지만 그는 공비가 어떻게 되었을 거란 상상이 잘 안 갔다. 그가 아는 어머니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찾을 사람이었다. 돌아가면 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심란한 생각을 애써 떨쳐 냈다. 일단 내 코가 석 자니, 걱정은 나중에 해도 좋지 않은가.

멀리서 바람이 불 때마다 불똥이 작게 튀어 오른다. 옆에서 불을 지키는 자가 모닥불이 작아질 때마다 모아 온 나뭇가지를 집어넣는 게 보였다. 너울너울, 불이 점점 힘을 얻으며 하늘 위를 붉게 물들인다. 활활 타오르며 위로 솟아오르는 불꽃이 바람을 타고 솟구친다. 그의 눈이 점점 나른하게 변했다.

잦아든 바람에 바스락대는 마른 풀 소리.

때때로 휙 하고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모포로 둘러싼 몸이 따스한 반면, 바람만은 차갑게 얼굴을 때린다. 빠르게 깜박거리던 눈이 조금씩 느려졌다.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스르르, 결국 눈이 감겼다. 그 자신조차 인지 못 한 잠이었다. 워낙 도망의 의지가 강해 잠깐 눈이 떠지려고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본래 눈꺼풀을 이기는 장사란 없는 법.

버나드는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

잠이 깬 것은 순간이었다.

버나드는 느리게 눈을 껌벅대며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중천에 떠 있는 달이 이상할 정도로 가깝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이 요사스러울 정도로 환했다. 잠이 덜 깬 머리로 생각이 느리게 흘러갔다. 서서히 잠겨 있던 정신이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

버나드는 눈을 부릅떴다.

‘…헉!’

잤어?!

그는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몸을 밧줄에 감아 놔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말로 추락했다. 그는 아찔한 감각을 추스르며 시간을 가늠했다. 자기 자신이 이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설마 날이 샌 건 아니지?!’

황황하게 하늘을 바라본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천만다행이게도 시간은 아직 깊은 새벽이었다. 주변은 어두웠고, 사위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그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돌아 버리는 줄 알았네. 그는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야영지를 굽어봤다. 보초가 몇이나 있나 확인하려던 것이었는데…. 불 대신 뜻밖의 것을 본 버나드의 눈동자가 급하게 좁혀졌다.

‘…저건?’

그건 안개였다. 밤사이 희뿌연 안개가 땅바닥에 은근하게 깔려 있었다.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에 호수도 없는데 어디서 이렇게 안개가 올라온 것일까? 아무리 산이라도 우기도 아니고, 건기에 생기는 안개라니. 하물며 며칠간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그는 이 안개가 생긴 이유가 조금 궁금해졌지만, 이내 의문을 지웠다. 뭐, 이상하긴 하지만 어떻단 말인가.

‘밤에, 안개라. 이거야말로 못 도망가면 바보지!’

어차피 그의 도망을 도와주는 거면 뭐든 좋은 것을.

물론 안개는 아주 짙진 않았다. 정말 짙은 안개는 눈앞 손도 안 보이게 마련. 하지만 이렇게 엷은 안개라도 사람 한 명 정돈 능히 감출 수 있었다. 그는 득의에 찬 미소를 지었다.

‘하늘은 나의 편인가!’

이렇게 되고 나니 존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는 재빨리 베개 대신 벴던 등짐을 짊어지고 내려갔다. 내려오자, 안개가 생각보다 아주 옅지는 않다는 걸 알아 기분이 좋아진 그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가기 직전 뒤돌아본 해먹이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은근히 불어오는 바람에 걸린 천이 좀 심하게 펄럭대고 있었다.

펄럭, 펄럭.

“…돌이라도 올려놔야 하나…?”

어쨌거나 지금 이대론 가면 안 된다. 그는 쯧 하고 혀를 차고 주변을 살폈다. 어디. 무게를 잡아 줄 게 뭐가 없을까?

다행스럽게도 주먹만 한 돌멩이가 몇 개 보였다. 그는 돌 서너 개를 주워 다시 위로 기어 올라갔다. 눈대중으로 머리와 어깨, 엉덩이가 있을 만한 부분에 요소요소 배치하고 나니 제법 그럴 듯해 보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 정도면….’

해먹 문제는 이제 해결했고.

그렇게 서둘러 내려간 뒤, 도망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원래 인생은 예상대론 되지 않기에 인생인 법. 막 그가 내려가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에 그의 몸이 퍼뜩 굳었다.

―절그럭. 절그럭.

“!”

듣는 순간 뭔지 알았다. 저건 돌과 돌이 맞부딪치며 내는 파열음. 즉, 누군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소리였다. 한 시간 후면 모를까 벌써 들키면 모든 것이 만사휴의다. 그는 즉시 몸을 숙여 뒤로 눕혔다. 놀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보초가 벌써!’

그는 황급히 모포를 다시 둘러썼다. 해먹 때문에 올라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모포를 둘러쓰고 눈만 빼꼼 꺼냈다. 소리가 난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니, 그제서야 희미한 안개를 뚫고 일렁이는 빛이 보였다. 횃불이었다.

‘안개 때문에 나도 저쪽을 못 본 것이군.’

자연 지물을 이용하는 일이란 늘 이런 맹점을 지닌다. 그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는 속으로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확인만 하고 가라. 제발 확인만. 올라오지 마라!

발소리가 완연히 가까워졌다. 절그럭, 절그럭 소리가 점차 격하게 변한다. 그는 입을 꼭 다물고 가까이 오는 상대를 관찰했다.

그리고, 그대로 파랗게 굳었다.

그것은 마치 뱀 같았다.

길고 굵은 몸통, 징그러울 정도로 빽빽하게 박혀 있는 비늘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돌 위를 지나간다. 뱀을 닮은 머리에선 쉭쉭대는 소리,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에선 불이 뚝뚝 떨어진다. 버나드는 자기가 본 횃불이 실제 불이 아니라는 걸 바로 깨달았다. 그가 본 횃불의 정체는 바로 저 눈이었다.

맙소사. 그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저게 대체 뭐지?

말 두어 마리를 합친 것 같은 몸체의 그것의 입은 사람 한두 명은 한꺼번에 삼킬 정도로 컸다. 심지어 한 마리도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의 것이 한데 모여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바다를 헤엄치는 바다뱀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가 본 그것이 차마 뱀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보는 순간 알았다. 거의 본능의 영역이었다.

―저것은 뱀이 아니다.

―아니, 심지어 살아 있는 생물조차 아니다.

저것은 생물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생기가 일절 없었다. 그저 차가운 얼음 같은 한기만을 두르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 버나드는 그들이 향하는 방향이 야영지임을 알고 덜덜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것들이 좋은 의미로 야영지로 갈 리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경악성을 내질렀다.

‘…저게 대체!’

―죽음….

―죽음을 농락한 자의 냄새가 난다….

―대가를…!

―금역을 탐한 자들에게 마땅한 대가를…!!

마치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외침에 버나드는 빳빳하게 굳었다. 듣는 순간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몸이 얼어붙을 것 같다. 사람의 말을 하는 괴물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는 모포 안으로 필사적으로 숨었다. 무섬증을 느낀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그 누가 저런 끔찍한 것들을 보고 태연할 수 있을 것인가?

‘뭐야. 저게 대체 뭐냐고…!’

이젠 도망치는 것은 뒷전이다. 중요한 건 저것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들의 속삭임을 들을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고 심장이 떨어진다. 버나드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야영장을 향해 사라지는 괴물들의 행렬을 바라봤다. 그리고.

“으아아아악!”

“적이다! 적! 모두 일어나!!!”

엷게 깔린 운무 너머, 피나는 사투가 시작됐다.

처음 백작과 수하들은 그것이 추적자들인 걸로 착각했다. 엷게 깔린 운무 너머, 보이기 시작하는 수십 수백 기의 횃불들이 그런 착각을 일게 했다. 그들은 재빨리 모닥불을 끄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어두운 장소에선 어두운 편이 운신하기 좋기에 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안개를 헤치고 시야권 내로 들어온 순간.

“뭐냐 저것이…!”

그들은 목구멍을 쥐어짜며 간신히 말이란 것을 내뱉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불타는 눈의 괴물들을 본 순간 그들은 마음속에 있는 호승심이 순식간에 꺼져 드는 것을 느꼈다.

“배, 뱀?!”

“너무 커…! 괴물이다…!”

추운 겨울이기에 그들은 야영지 주변에 백반 가루를 뿌리지 않았다. 거대한 뱀들은 음산한 소리를 내지르며 백작 일행을 에워쌌다. 그들은 자신들이 끈 불을 필사적으로 다시 붙이려 노력했다. 정체는 모르나 자고로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동물이란 없는 법이므로.

“불을 지펴라. 어서…!”

“젠장, 누가 물을 부었어! 장작 다시 가져와!”

가까스로 횃불 몇 개가 만들어졌다. 백작은 불을 가진 자들을 앞에 세우라고 바락바락 소리쳤다.

“불로 위협해라. 불로…!”

“일단 진지를 구축해…! 저것들과 최대한 거리를 벌려!”

“역청을 가져와라. 기름도!”

괴물들이 다가서는 속도는 느릿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몸이 시시각각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주춤댔다.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몇몇 지휘자 때문에 공포가 전염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백작은 그중 하나였다.

“다들 정신 차려! 저 괴물과 싸워 보지도 않고 이대로 죽을 텐가?!”

“그래 봤자 거대한 뱀일 뿐이다. 뱀!”

“불화살을 만들어라. 역청에 담가 불을 쏘면 된다!”

사람들은 지휘자의 말에 자동적으로 움직이며 화살을 만들었다. 공포에 질렸지만 시키는 대로는 움직인다. 어쨌거나 정점에 선 권력자란 지위는 이 상황에서도 유효했던 것이다. 거대한 뱀들의 몸들이 화살들을 보고 전진을 멈췄다. 백작은 득의만면하여 공중에 칼을 휘둘렀다.

“봐라, 저것들은 불을 두려워한다! 모두 저것들을 향해 활을 쏴라. 가까이 오기 전에 쏴! 눈을 맞춰!”

와아아아!

커다란 함성과 동시에 활이 시위를 떠났다. 끝에 역청을 바른 불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뱀의 몸에 박혀 들었다.

―캬아아아악!

―키이이이…!

뱀의 몸에 불이 붙었다. 화살 박힌 것들이 몸을 비틀고 괴로워했다. 불이 통한다. 물러서고 있어!

“더 쏴라. 화살은 아직 많다!”

“저 마물도 불사는 아니다! 도망치고 있다고!”

“어쨌거나 미물이다. 어서 쏴라!”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검은 뱀들이 결국 조금씩 뒤로 밀려 나갔다. 전선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뱀들은 분하다는 듯 두 눈을 번뜩이며 입을 쉭쉭댔다. 그리고 순간, 노란빛으로 빛나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파랗게 변했다. 그 푸른 불이 뱀들의 몸을 태운 것은 순간이었다.

“배, 뱀이…!?”

기괴하게 발광하는 뱀들이 쉭쉭거리며 속삭거렸다. 이윽고 사람도 짐승도 아닌 자들의 울음소리가 계곡에 웅웅대며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

―모두 일어나라. 일어나 싸워라…!

―낙인이 있다….

―죽음의 낙인이 찍힌 자가 저기 있다. 모두 일어나 저자를 지하로…!

―낙인의 주인을 데리고 가는 자에게 죽음의 가호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이 희게 변했다.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방금 외침을 들었다.

“저 괴물들이… 말을 한다고?!”

듣도 보도 못한 괴사였다. 짐승이 말을 하다니?

그러나 놀랄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괴성이 끝나기 무섭게 땅 위로 작은 동산이 수백 개가 생겼던 것이다. 마치 무덤처럼 생긴 동산에 사람들은 뒤로 물러섰다. 싸늘한 긴장감이 그들 머리 위를 맴돌았다.

“!! 바닥이!”

푸스스스… 쿠르르… 동산이 올라올수록 사람들은 점차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공터엔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퍼석….

급기야 동산이 무너지며, 무언가가 툭 하니 튀어나온다. 가장 가까이 있어 제일 처음 목격한 남자 하나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으, 으아아아악!”

텅 빈 눈, 반쯤 썩어 덜렁거리는 살점. 희게 드러난 뼈와 갈기갈기 찢어져 옷가지만 남은 것들.

시체였다. 사람들은 기겁하며 뒤로 달아났다.

“시, 시체다. 시체가 살아났어!”

“신이여…!”

끼기기기긱…!

이해할 수 없는 괴사는 사람들을 혼돈으로 빠트렸다. 재빠르게 방어하던 전선이 순간 주춤했다. 시체들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크아아아악!

“불, 화살, 불화살을 쏴!”

“검이다. 검을!”

“안 됩니다. 뱀이, 아니 시체가…–아악! 사람 살려!”

“아아아아악! 어머니!”

그것은 사냥이었다.

그 말 말곤 설명할 그 어떤 단어가 없었다. 시체가 찢고, 뱀들이 삼킨다. 백작과 부하들은 살기 위해 분전했다. 그러나 죽지 않는 적은 겁을 먹지 않았다.

“아아아악!”

잠시만 눈을 떼면 주변 부하들의 수가 줄어 있다. 백작은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뱀들을 노려봤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절규했다. 여태까진 부하들을 방패 삼아 어떻게든 살아남아 있었지만 그 부하들도 곧 있으면 다 죽게 생겼다. 그 많던 사람들이 이젠 고작 열 명 남짓으로 줄어 있었다. 저들이 사라지면 마지막은 그 차례였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어.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다고…!”

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공작가의 저 바보를 데리고 백작가로 간다.

거기서 적당한 공물을 마련해 버나드가 직접 황제에게 바치게 할 것이다.

황제는 받으려 하지 않겠지만 친척인 점을 앞세우면 어떻게든 가능할 터.

그럼 적어도 그의 재산과 가문은 버나드를 통해 온존할 가능성이 열린다. 황제는 공물을 받은 자에겐 그만한 대가는 보장하는 자였다.

그럼… 그다음엔!

“아, 안 돼!”

마지막 부하가 뱀의 아가리에 잡힌 순간, 기레스 백작은 절규했다. 그를 둘러싼 시체들의 행렬이 백작의 몸을 잡고 찢어발겼다.

“크아아아아아악! 아아악!”

백작의 몸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갈기갈기 찢겼다. 뱀들은 백작을 삼키지 않고 시체들의 손에 맡겼다. 지켜보는 뱀들의 눈들이 번들대며 반짝였다. 그건 마치 유희 거리를 보는 인간들 같았다.

―낙인

―낙인

―죽음!

인간의 비명, 괴물의 고함이 산어귀를 웅웅 울렸다. 백작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자, 환희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메워 울렸다.

끔찍한 밤이었다.

―휘이이잉

버나드는 파랗게 언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짧았던 그림자가 점차 길어진다. 해가 지고 있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오늘 잠을 잘 곳으론 가기 힘들다. 해가 떠 있을 때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것들은 그날 날이 새기 직전 사라졌다. 그는 날이 꽤 밝고서야 해먹에서 내려와 공터로 갔다. 혹시라도 살아남은 자가 있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지만, 그곳엔 흥건한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모닥불의 잔해와, 야영했던 흔적들뿐. 사람의 형체를 지닌 것은 단 한 조각도 없었다. 그것이 더 끔찍한 상상을 하게 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때로는 더 큰 공포를 불러온다. 그는 그 끔찍한 장소를 서둘러 떠났다.

되돌아가는 방향이었지만 쉬울 것 같던 귀향길은 어려웠다. 이번에 겪은 일로 그는 산을 꺼리게 되었기에 산을 피해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공작령으로 가는 길엔 곳곳에 야산이 있었다. 그걸 넘어가면 훨씬 빨랐을 것이지만, 그는 죽으면 죽었지 산으로 갈 수는 없었다. 산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또다시 그것들이 나올지 나오지 않을지는 그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만의 하나라도 그것들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고 싶지 않았다. 그 끔찍한 것들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 그는 필시 죽을 것이다.

살고 싶었다.

절대, 그렇게 죽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죽으면 영원히 안식하지 못해. 사람은 제대로 죽어야 안식을 취할 수 있으니까.’

제국에는 공식적인 종교는 없었으나 죽음과 관련한 신앙은 존재한다. 거기엔 죽은 자가 어떻게 해야 안식을 얻게 되는지에 대한 것도 있었다. 죽은 자의 시신은 태우거나 제대로 장례해야 안식을 맞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면, 죽은 백작과 부하들의 혼은 구원받을 수 없었다.

경로가 달라진 만큼 귀향길은 멀어졌다. 덕분에 꼴은 점점 엉망이 되어 갔지만, 괜찮았다. 어쨌거나 그것들과 만날 수 있을 만한 길을 피해 가는 것 아닌가.

어떤 곳이건 산은 피한다.

밤에는 움직여선 안 된다.

죽은 자들이 있을 것 같은 장소를 찾아가지 않는다.

그가 지금 쉬고 있는 바위는 그런 의미에서 나쁜 곳은 아니었다. 허나 이 메마른 평원에서 딱 하나 바위는 눈에 너무 띈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이 필요했다. 사람 한 명 정도는 숨어도 눈치채지 못할 은밀한 곳이.

“도망쳐야 해…. 돌아가야 해.”

버나드는 중얼거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생기를 잃지 않던 눈빛은 탁했다.

그날 이후, 그 전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던 버나드는 죽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공포와 피로와 모멸감에 시달리는 비루한 사람일 뿐이었다.

버나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어딘가 망가졌다. 공포로 짓눌린 이성은 더 이상 명민하게 반짝이지 않는다. 담대하던 성격 역시 반대로 변했다. 그가 평소 저급하다 생각하던 자들처럼 소심하고 조심스럽게 바뀌었다.

“돌아가서… 돌아가면….”

아버지께 용서를 빌자. 그저 살려만 달라고 하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이다. 그는 살고 싶었다.

그는 잊지 않는다.

그것들은 해가 떠오르기 직전까지 그가 머물고 있던 관목과 나무 부근을 샅샅이 뒤지다 돌아갔다는 것을. 뱀은 땅을 보고 시체는 이지가 없기에 하늘을 보지 않는다. 때문에 그가 살 수 있었다. 그중 단 한 명이라도 위를 올려다볼 줄 알았다면….

그는 지금 이 자리 대신 그들의 배 속에 있을 것이다.

확실했다.

…날이 새기 직전까지 그들이 찾고 있었던 건, 버나드.

바로 그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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