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약혼? 약혼!
신년의 밤.
공작령의 신년 축제는 올해도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이 신년 축제는 공작령에서만 열리는 게 아니라, 거의 전국적으로 열리는 행사다. 새해가 오면 제국 전역에선 이 신년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가 열린다. 각자 영지의 사정에 따라 작게, 혹은 크게 열리는 이 축제는 짧게는 사흘에서 길게는 한 달 동안 계속 이어졌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자리이니만큼, 영주들이 상당히 신경 써 축제를 여는 것이다. 때문에 가산이 상당히 소요되지만 그만큼 축제를 위해 온 상인들에게 세금을 걷으므로 크게 손해는 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상인들이 오지 않으면 골치가 좀 아플 것이다. 하지만 공작령은 워낙 사람이 많은 데다 올해는 큰 고객들인 귀족층 사이로 아주 재밌는 소문이 돌았다. 이 덕분에 상인들의 수는 줄지 않고 외려 배는 늘었으니, 그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란 바로―.
“각하, 각하! 데퓨탄 후작 각하!”
궁정의 대회랑을 걷는 데퓨탄 후작의 발걸음이 멎었다. 신년 연회라 평소보다 배는 빼입은 후작의 얼굴엔 화사함이 가득했다. 그는 뒤를 돌아 자신을 부른 자를 확인했다. 가끔 회의를 주재할 때마다 보이는, 공작파의 한 귀족이었다. 그는 잠시 기억을 뒤져 남자의 가문을 떠올렸다.
“오, 팔로피스 자작. 오랜만이로군.”
“예!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각하. 그간 제가 영지에 내려간 터라 좀 격조했습니다.”
“그래… 자작의 영지는 남쪽 해안가였지? 오느라 퍽 힘들었겠군.”
후작은 희미하게 풍기는 짠 바다 내음을 맡으며 대충 주워섬겼다. 팔로피스 자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별로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제 영지를 알고 계시는군요? 아주 작은 영지인데요.”
“하하하, 당연하지 않나. 자작의 영지는 늘 풍요롭고 평화롭다는 이야기를 늘상 듣는걸?”
사실은 하나도 모르지만 해안가 지역이란 늘 비슷비슷한 법. 후작의 능숙한 얼러침에 팔로피스 자작은 가슴을 뿌듯하게 내밀었다.
“하하, 부끄럽습니다. 제 부족한 가문에 이토록 금칠을 해 주시다니 영광일 따름이군요! 그나저나 후작 각하. 제가 오면서 소문 하나를 들었는데 말입니다.”
후작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어렸다.
“흐흠, 그래? 무슨 소문인가?”
“그게… 후작가에 관련된 이야기라 제가 여기서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괜찮습니까?”
“내가 죄지은 일이 없는데 좋고 말고가 어딨겠나. 왜, 안 좋은 소문인가?”
팔로피스 자작이 펄쩍 뛰었다.
“아니요! 아니요! 안 좋긴요. 아주 좋은 일이 있으시단 소문이었습니다.”
다만, 그게 너무 황당한 소문이라 믿기지를 않을 뿐. 팔로피스 자작은 조용히, 은근슬쩍 후작에게 물었다.
“그… 둘째 아드님이, 혼인하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로메인 경이요.”
오호? 후작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 갔다.
“이런, 그래? 그런 소문이 돈다고?”
혼인이라?
작게 읊조리는 후작을 본 자작은 속으로 헉 하고 욕설을 삼켰다. 아뿔싸, 역시 뜬소문이었단 말인가?! 안 그래도 작은 자식 장가 못 가는 걸로 사람 볶아 먹는 후작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팔로피스 자작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여, 역시. 아니지요? 하하하하,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 깊게 새겨들을 일이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감히―.”
주저리주저리 사과를 하는 자작을 보던 후작이 피식 웃었다.
“그래, 확실히 소문이 잘못되긴 했군. 걔가 하는 건 혼인이 아니라 약혼이니까.”
“혼인이 아니라 약혼, 아무렴요. 그렇죠…가 아니라? 예?!”
팔로피스 자작은 순간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뭐? 약혼?
“그렇지, 약혼이지. 아무리 그 녀석 나이가 있다고 해도 모든 일엔 순리와 순서가 있는 법이야. 어찌 약혼도 안 하고 혼인을 할 수 있겠나?”
무릇 제대로 된 귀족은 약혼 후 혼인하는 법. 후작은 훗 하고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은 얼굴로 팔로피스 자작에게 물었다.
“아, 자네가 들은 소문은 그냥 그것뿐인가?”
“그, 그, 네! 그 이외엔 저도 들은 바가 없어서요!”
여기서 더 말실수를 하면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 팔로피스 자작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후작은 약간 실망한 얼굴을 했다.
“흐으음, 그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는 자기 자식을 가지고 사람들이 뭐라 수군대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노총각, 고자, 철벽, 허우대만 멀쩡한 등신 등등.
이런 말을 듣던 자가 무려 서른 넘어서 하는 결혼, 아니 약혼 아닌가. 로메인의 상대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리 없다. 소문이 없다면 뜬소문이라도 만들어서 사방팔방 이야기가 떠돌아다닐 텐데, 정말로 아무 소문이 없다고?
‘그 외모가 그럴 외모가 아닌데?’
렉시의 외모가 어떤 미몬가. 무려 자기 같은 순애보가 한순간 흔들린 미모 아닌가. 물론 자신의 사랑은 오로지 엘자에게 향해 있지만, 그래도 미추 구별 정도는 할 줄 안다. 솔직히 렉시의 외모는 그런 사랑이 없었다면 혹할 정도의 그것이었다.
‘마치 사람 같지 않을 정도였지.’
한번 보면 눈을 비비고 두 번 보면 숨이 헐떡거리고 세 번 보면 그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은 아름다움. 그런 경이적인 미모를 본 사람들이 말을 옮기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후작이 자작을 말끄러미 바라보자 자작은 숨통이 벌렁벌렁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간신히 괜찮은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그, 그, 그러고 보니 딱 하나 들은 게 더 있군요. 각하의 그 예비 며느님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는 분이란 말은 들었습니다.”
“부끄러움?”
“네, 밖에 마실 다니실 때마다 늘 얼굴을 가리신다고….”
사실 이것 때문에 로메인이 혼인하는 게 거짓이 아니냔 소문이 돌았다. 혼인을 한다는데 왜 상대의 얼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 상대를 본 사람들이 얼굴을 가려서 그랬다고 변명했으나, 솔직히 그 변명이 좀 어설펐던 것은 사실이다. 기실 팔로피스가 이렇게 겁 없이 들이댄 것도 이 소문을 믿었기 때문이 컸다.
꽝이었지만.
“…아, 그런가.”
어쨌거나 팔로피스 덕에 상황을 이해한 후작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구나. 얼굴을 가리고 다녔군.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우리 새아가는 생각보다 품행이 방정하구나.’
안 그래도 시끄러울 약혼이니까 미리 약을 친 것인가? 과연, 내 아들이야. 현명한 반려자를 구했어!
노총각 아들 구제해 주니 엎어져도 이뻐 보일 판에 하는 행동거지마다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없다. 후작은 흐뭇하게 웃었다.
얼마 전, 후작저에 들른 아들이 혼인한다 말을 꺼냈을 때 후작 부처는 무척이나 놀랐다. 물론 결혼한다고 해서 놀란 건 아니다. 잊고 있겠으나, 후작 부처는 자기 아들이 공작에게 간 게 미리 예비 상견례를 간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안에서 이미 둘은 얼마 안 지나면 결혼할 예비 연인의 그것.
이들이 놀란 건 이 둘의 약혼 발표 장소가 공작저였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정말로 발표를 성에서 하라 하셨어?”
“네, 안 그래도 신년 연회가 있으니 그때 발표하게 도와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나….”
로메인의 어머니, 엘자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가의 첫 약혼 발표는 그 장소가 무지막지하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후작저가 아니라 공작의 성에서 그 모든 일체를 다 준비해 준다는 건 단박에 이 둘 약혼하는 두 사람과 가문의 격이 올라가는 일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자기 오라비가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엘자는 속으로 손뼉을 쳤다.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가서 오빠 왜 그러냐 약 먹었냐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괜히 좋은 일에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대신 얼른 비용을 물었다.
“비용, 비용은 얼마나 들 것 같니? 당장 내 주마!”
후작부인은 신이나 들썩였다. 안 그래도 티 파티를 중단하면서 예산도 남아도는 터. 그녀는 돈 쓸 생각에 희희낙락했으나 로메인이 정중히 거절했다.
“전하께서 신년 연회도 겸할 것이니 따로 비용은 필요 없다 하셨습니다.”
“그…그럼 예물이나 지참금이라도!”
“…그것도 이미 다 준비가 되셨다고….”
세상에 만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 엘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가 있니?”
“그, 없습니다.”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로메인이 말하자 두 부처는 경악했다.
“뭐?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알아서 일체 해 주신다고….”
“…세상에!”
엘자는 심장이 떨렸다. 뒤늦은 깨달음이 그녀의 머리를 쳤다. 그랬구나, 그렇구나, 오라버니. 그랬던 거구나?
‘오라버니. 조카가 노총각인 게 무척 걱정됐었던 거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더니!
그녀는 오라버니의 주책맞음에 몸을 떨었다. 늘 차갑고 쌩해 보이던 우리 오빠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어요 여보….”
엘자는 자기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편을 보며 두 손을 부여잡았다. 둘을 보는 로메인은 밀려드는 양심통에 애써 저항해 봤다. 하지만 뭐… 부질없었다.
로메인이 집에서 이렇게 양심통에 휩싸이는 사이, 렉시쪽도 나름 번잡했다. 물론 렉시 같은 경우는 혼인한다고 말할 부모도 없거니와 가문에선 어쨌거나 제일 큰 어른이다. 따라서 로메인처럼 허락받을 당사자는 없었지만―.
“으앙, 이 약혼 싫어요!”
약혼이 싫다며 데굴데굴 구르는 애 하나는 있었다. 렉시는 엎어져 좌삼삼 우삼삼 구르는 요수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수아, 일어나렴.”
“싫어요! 어헝헝헝!”
요수아는 으헝으헝 우는 시늉을 했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게 꼭 둥근 공 같다. 보다 못한 필립이 요수아를 덥석 안아 들자 요수아가 바둥거렸다.
“요수아.”
필립이 어르자 요수아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너도 알잖아, 이거 왜 해야 하는지. 거기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짜라고. 그런데 왜 이래?”
“알죠, 알죠! 그래서 하지 말란 소리는 안 하잖아요!”
요수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극의 주인공처럼 외쳤다.
“그럼 싫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정말 싫은 걸 어떻게 해요?!”
요수아는 필립 위에서 축 늘어졌다.
“필립 님은 정말이지 섬세하지 못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왜 모르세요?”
유부남 요수아에겐 소박한 꿈이 있었다. 우리 멋지고 아름다우시고 훌륭하신 영주님의 결혼 상대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분이어야 한다는 꿈.
돈이 많았으면. 권력도 좀 있었으면. 외모도 좋았으면. 성격도 좋았으면.
무엇보다 우리 영주님을 매우 매우 몹시 몹시 사랑하는 분이었으면.
당대 황제라도 맞추기 불가능한 조건들이었지만 원래 조건 따지는 사람은 그런 거 생각 안 한다. 거기다 요수아는 자기가 내건 조건이 상당히 너그럽다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 성별은 묻지 않았으니까.
요수아의 무지막지한 기준을 들은 두 사람의 얼굴이 황망해졌다. 필립이 물었다.
“…요수아, 니 황당한 야망은 잘 들었다. 지금 그게 니가 이 난장을 피우는 이유라 이거지?”
요수아는 필립을 흘겼다.
“필립 님은 제 맘 이해 못 해요. 파혼 경력은 미혼자에게 엄청나게 치명적인 결격 사유란 말이에요. 이 일 때문에 나중에 저 기준도 못 맞추는 꼴같잖은 것들이 영주님께 찔벅일 게 뻔한데, 제가 그 꼴을 어떻게 봐요?”
요수아의 발악에 필립은 골이 아프단 얼굴을 했다. 렉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그런 요수아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흑흑 그놈의 돈이 뭔지!”
요수아는 하늘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미 죽고 없는 베르크 전 남작을 향한 시위였다. 죽으려면 곱게 죽지 왜 이런 짐덩어리를 떠넘겨선! 요수아는 원독이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외쳤다.
“베르크 남작님 두고 봐요! 제가 속이 터져 죽으면 전 베르크 남작님부터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
공작성의 중앙 연회 홀에 귀족들이 가득 찼다. 마차들이 하나둘씩 도착할 때마다 알록달록한 귀족들의 옷들이 눈처럼 흰 성을 수놓았다. 아직 추운 겨울이었지만 귀족들의 옷은 가벼웠다. 공작성의 중앙 홀은 거대했지만, 마법으로 보호되는 터라 무척 따스했기 때문이다. 거의 일 년 만에 열린 홀로 들어온 귀족들은 연회의 규모에 깜짝 놀랐다. 많아 봐야 세 개만 개방하던 홀이 다섯 개 모두가 개방되어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죠.”
“그러게 말이오, 평년보다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봄도 아닌데 저 꽃들 좀 봐요….”
귀족 부인들은 때가 아닌데도 화사하게 피어난 꽃들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차가운 한겨울인데 갑자기 봄이 온 기분이다. 백합, 리시안서스, 작약, 방울꽃… 아니 어쩜. 이 계절에 여름 장미가 있을 수가 있지?
“저 탐스러운 꽃은 아마 공작 전하의 보물 창고에서 나온 거겠죠…? 저 들은 적 있어요, 전하께서 가진 어떤 창고는 사시사철 꽃이 시들지 않는대요.”
소문에 민감한 여인 하나가 말하자, 주변에서 감탄하며 수군거렸다.
“굉장하네요. 이 계절의 꽃은 보석보다 사치스러운데…. 과연 공작가의 부는 명불허전이군요.”
여인들은 부채를 부치며 감탄했고, 남자들은 그런 부인들의 말을 들으며 꽃들을 훑었다. 누군가 속삭였다.
“이렇게 화려한 장식이라니, 신년 연회치곤 과한 감이 있는데 말이죠…. 역시, 이번 연회에서 후계자가 정해진다는 게 사실일까요?”
“글쎄요. 아직 좀 지켜봐야 하지 않겠어요?”
가만히 듣던 누군가가 작게 말했다.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후계 구도가 아예 바뀔 텐데 속단은 금물이죠.”
“…….”
약간의 술렁임이 사람들 사이로 떠돈다. 일부러 지칭하지는 않지만 모두 다 알아들었다. 얼마 전부터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낸 그 소문. 누군가 흥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어머, 저는 물론 가짜일 거라 생각해요. 여러분도 아시잖아요? 그 철벽이 여자에게 넘어갈 리가 있나.”
한때 자기 딸을 들이밀었다가 대차게 까인 적 있던 부인이었다. 그녀는 부채를 팔랑대며 얄밉게 웃었다.
“그 목석보다 더한 자가 여자와 사고를 치고 혼인을 한다? 언어도단이죠. 제 조카 아서가 말하길, 그 철벽의 인생에 여자란 어머니밖에 없을 거라 하더군요. 그치는 평생 독신으로 늙어 죽을 게 틀림없다고―.”
“부인!”
옆에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많은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다. 여자는 두 눈을 깜박거리다, ‘…그런 식으로 비유를 했답니다. 뭐, 그냥 그 정도로 목석이란 거죠. 호호호….’ 하고 말을 마무리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한 번쯤 로메인에게 거절당해 본 인사들이다.
“하지만 팔로피스 자작이 말하길, 진짜라고 하던데….”
오기 직전 팔로피스 자작과 말을 섞어 본 이가 말했지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먼 곳에서 온 치가 뭘 얼마나 알겠어요. 전 괜한 말을 하지 않는답니다. 진짜라면 누구인지 이미 밝혀졌을 거예요. 그런데 봐요, 그 상대의 얼굴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상태 아닌가요?”
귀족의 약혼 상대이니만큼 상대는 반드시 같은 귀족일 터. 하지만 로메인과 결혼할 수 있는 나이대의 귀족 처녀들은 죄다 자기는 아니라며 입을 모았다.
“거기다, 정말로 약혼이면 후작가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죠.”
사람들의 눈이 애매해졌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그래, 정말로 약혼이면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지. 아마 쉴새 없이 후작저로 마차들이 오고 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 후작가는 유례없이 조용한 터였다.
“정말 약혼을 한다 쳐 봐요…. 후작가가 저렇게 조용할까요? 하다못해 예물을 팔고 사려는 상인들이라도 드나들지 않겠어요. 하지만 누구, 후작가에서 보석을 사들이고 있다는 이야기 들어 본 적 있나요?”
상인들의 흐름에 정통한 몇몇 귀족의 시선이 바쁘게 오갔다. 아니, 들어 본 바 없지. 그럼 정말 그 소문은 그냥 헛소문인가? 귀족들의 얼굴들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렇게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메르디스는 입꼬리를 올렸다.
“잘하고 있군.”
그녀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딸이 모욕을 당한 이래 이를 갈던 저 부인은 어떻게든 로메인을 깎아내리려 노력하는 여자였다. 간단한 대화 한마디로 여자를 충동질하는 것쯤, 그녀에겐 일도 아니었다.
‘최대한 늦게 알려지는 게 좋지.’
여자의 말과 달리, 로메인은 정말로 약혼을 한다. 상대는 그녀도 몰랐다. 메르디스는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려 노력했지만, 공작이 뭘 눈치챈 건지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처리하는 바람에 그녀는 추적을 포기해야 했다.
‘아직 약혼 전이라면 시간은 있지.’
약혼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라 봐야 이달 말이나 내달일 터. 그녀는 이 신년 연회 기간을 최대한 활용해, 버나드를 소공작으로 올릴 작정을 했다.
‘생각보다 일이 빨라졌지만… 어쩔 수 없지. 그 녀석은 왜 이 시기에 결혼한다고 나선 거지?’
새삼 후계자 자리가 탐나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메르디스는 로메인이 후계자 자리에 큰 탐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가 위협적인 경쟁자인 것 또한 사실이다. 거기다 사람은 본래 확신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그가 지금은 탐욕이 없을지 몰라도 내년엔? 내후년엔?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연약하다. 늘 변하고, 깎이고, 흘러가는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
뜬금없이 결혼한다고 나선 로메인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긴 그녀는 눈앞에 누군가 다가온 걸 알고 얼굴을 바로 했다.
“오늘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우시군요. 공비 전하,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어머나, 이게 누군가.”
반가운 얼굴이었다. 메르디스는 최대한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 닿는다. 메르디스의 눈이 앞에 선 미남자를 향해 곱게 접혔다.
“기레스 백작.”
이름을 불린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패트릭 드 기레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백작으로 불렸으나 이제는 백작인 기레스의 이 영주는 상당히 잘생긴 미남자였다. 보는 관점에 따라선 눈이 뱀처럼 날카롭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입가에 늘 미소를 잃지 않았기에 대체적으로 평은 좋다.
거기다 그는 그냥 미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잘생길 뿐만 아니라 돈까지 많은 미남자였다. 광활한 영지에, 여기저기 알박아 놓은 광산도 여럿, 대리인을 두고 무역상도 몇 개 운영하는 미남 부호. 가문만 좋은 게 아니라 수단도 좋다는 의미이므로 그는 미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아주 하늘을 찌르는 신랑감 중 하나였다.
“간만이로군, 그대. 잘 지냈어?”
“덕분이지요, 공비 전하.”
기레스 백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상당히 격의 없는 행동이었지만 하는 자나 받아들이는 자나 얼굴 하나 까딱 않는다. 그녀는 질책 대신 자연스레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백작에게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혼잡한 인파들 사이에 슬쩍슬쩍 길이 생긴다. 화려한 귀족들의 틈바구니 안에서도 메르디스와 기레스 백작은 단연 눈에 띄는 한 쌍이었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찬탄과 질시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메르디스는 흡족하게 만끽했다.
“볼일이 있어 영지에 내려갔다 들었는데. 일은 잘 풀렸어?”
천천히 걸어가며 메르디스가 묻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
“…뭐, 잘됐다고 말씀드리고 싶긴 합니다만 꽝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을 좀 갈아치워야 할 것 같더군요. 요즘 바빠서 내버려 두었더니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지 뭡니까.”
백작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메르디스는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영지에 문제가 생겼나?
“흠, 별일이네, 백작 그대가 심은 자들은 퍽 충성심이 강한 자들일 텐데.”
“충심이 강한 것과 일을 잘하는 건 다른 일이더군요. 미리 그걸 알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지요. 기레스 백작이 분한 듯 입술을 깨물자 메르디스는 불쑥 호기심이 치솟았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
백작의 얼굴에 순간 난감한 빛이 스쳤다. 아무래도 자세한 이야기는 하기 싫은 눈치였다. 메르디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개도 안 물어 갈 자존심 때문이겠지. 역시 남자들이란.’
하긴 기레스는 그동안 영지의 내치에는 신경을 덜 썼다. 황도의 중앙정치에 맛을 들여 이리저리 바빴던 탓이다. 물론 대리인도 있고, 전 기레스 백작도 몸 성히 살아 있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영주가 지엄하더라도 본래 호랑이 없는 데선 여우가 왕인 법.
자기가 행한 일로 뒤통수 맞는 걸 남에게 보여 주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이겠지. 메르디스가 됐네, 하고 넘어가자 백작이 난처한 듯 웃다 낮게 속삭였다.
“그런데 공비 전하. 이젠 저를 작위로 부르시는군요.”
오호라? 메르디스는 고소를 지었다. 남자는 서운한 듯 눈 한쪽을 찌푸리고 입매 역시 딱딱하게 다물고 있었다. 그를 오래 봐 온 메르디스는 단박에 그게 꾸미는 건 줄 알아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그녀는 남자의 넉살에 깔깔 웃었다.
“호호, 이름으로 불러 달라 이 말인가?”
“예전엔 그러셨잖습니까?”
“그거야 … 그땐 자네가 백작위를 잇기 전이었지.”
백작위를 잇기 전이야 소백작이건 이름이건 불러도 상관없다. 하지만 백작위를 이은 이상 대접해 줘야 하지 않겠어? 메르디스의 말에 기레스 백작은 퍽 쓸쓸하게 웃었다.
“이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늦게 작위를 받을걸 그랬군요.”
“백작, 너무 서운해 말아. 설마하니 내가 늘 자네를 백작으로만 부르겠어.”
메르디스는 은근하게 웃으며 남자의 팔을 슬쩍 문질렀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이 퍽 기껍다. 메르디스는 촉촉한 눈으로 기레스 백작을 훑었다.
‘참 괜찮은 사내야.’
그녀가 공작과 결혼했을 당시 그녀는 창창한 십 대였다. 자신에게 싸늘한 부군에게 정절을 지키기엔 지난 30년 세월이 너무도 길었다는 의미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끌어모으며 틈틈이 사생활을 즐긴 그녀였지만, 눈앞의 남자는 지난 30년간 거친 내연남들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원래는 적당히 즐기다 헤어지기로 했지만….’
사람 살다 보면 원래 맹세란 옅어지는 법. 또한 질렸으면 모르되 이 젊은 백작이나 자신이나 아직은 열정이 남아 있지 않은가.
‘오늘 방을 열까?’
오랜만에 휘몰아칠 열락을 기대하던 메르디스는 문득 백작이 자기가 아닌 다른 쪽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와중에 다른 곳을 보다니…. 메르디스는 약간 짜증이 났다.
“지금 어딜 보는 거지?”
“…죄송합니다, 전하. 그런데 조금 신경 쓰이는군요. 버나드 공자 옆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지난번보다 적어진 것 같은데…. 공비 전하. 혹시 버나드 공자께서 무슨 일이라도 치셨습니까?”
뭐라?
반사적으로 뒤를 본 공비는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과연, 백작의 말대로 버나드를 둘러싼 귀족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역시 기레스 백작이군. 오자마자 세력을 확인하다니. 어디 보자…. 사람을 훑은 공비의 입에 비틀린 미소가 맺혔다. 어디서 대거 빠졌는지 너무나도 확연했다.
“하…과연, 철새는 철새야. 공작파에서 옮겨 왔던 사람들이 상당수 빠져나갔군. 로메인이 그렇게 무섭다면 오지나 말지 왜 왔나 모르겠어.”
로메인? 뜻밖의 이름을 들은 기레스 백작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로메인이라….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됐군요. 동문으로 쫓겨난 녀석 눈치를 왜 본단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로메인은 쫓겨난 게 아니라 스스로 갔다. 하지만 공비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뭐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는데 뭐라 하겠는가? 공비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혹시 오면서 소문을 듣지 못했나?”
“무슨 소문… 아, 혹시 그 황당한 그 소문 말입니까. 그놈이 혼인한다는?”
“알고 있었군?”
패트릭은 코웃음을 쳤다.
“들어 보기야 했지요. 하지만 그걸 누가 믿습니까. 그건 필시 데퓨탄 후작이 낸 소문일 게 뻔합니다. 제가 영지에 내려가기 전 그 영감을 좀 긁었거든요.”
“…후작을 긁어?”
기레스 백작은 큭큭 웃었다.
“나이 찬 자식을 둔 부모들을 긁는 방법이야 쉽죠. 더더군다나 로메인 같은 자식을 뒀다면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제게 한 방 먹은 걸 가지고 그 영감이 이를 갈더니 황당한 짓을 저질렀군요.”
메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언제 또 후작을 긁은 것인가. 고로 그는 저게 거짓말인 게 분명하단 투였지만…. 저런저런. 공비는 난처한 얼굴로 백작을 올려다봤다.
“후작을 긁다니 참 재미있는 일을 했군, 백작. 헌데 이 일을 어쩌지? 그거 사실이야.”
“…예?”
이죽거리던 백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메르디스는 부채를 팔랑대며 고개를 까닥였다.
“로메인 그 녀석, 정말로 혼인한단 소리지. 심지어 전하께서도 대찬성을 하셨다고 들었어.”
나도 버나드와 전하의 지근거리에 있던 시종이 말해 준 게 아니었으면 그대 같았겠지. 백작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맙소사, 진짭니까? 대체 누구와?”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더니 고자와 결혼해 주는 여자가 다 있단 말인가. 메르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는 나도 아직이네. 알아내려 했더니 참 만만치 않더군…. 누군지 알면 손이라도 써 볼 텐데 말야.”
“잠깐, 그럼 후계자 건은 어찌 되는 겁니까?”
당혹으로 굳어 있던 백작이 낮게 속삭였다. 메르디스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대는 버나드가 녀석에게 밀릴 거라고 생각해?”
백작은 잠시 침묵했다. 뭐라 말하기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글쎄요, 당장 공자가 밀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앞뒤 없이 버나드 공자에게 투자한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공비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공작 전하의 일파는 힘이 매우 강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나선다면 어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메르디스는 먼눈으로 버나드를 응시하며 백작의 말을 들었다. 백작은 로메인에게 이해 못 할 경쟁심을 불태우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남자는 아니었다. 당장은 밀리지 않는다지만 언젠가는 밀린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해 줄 사람이란 이 남자 말곤 없을 것이다.
“그대는 참 솔직하단 말이야.”
“솔직하다기보다는 이득에 밝다고 해 주십시오. 그게 제 장점이니까요.”
메르디스는 쓰게 웃었다. 어쨌거나 같은 배에 탄 자가 매사 냉정한 건 좋은 일 아닌가. 뭐 덕분에 백작에게 이번 연회 기간 동안 버나드를 소공작으로 만들자는 계획을 말하기엔 적기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말인데―.”
백작에게 일의 변경을 지시하려 메르디스가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빵빠라빵―
요란한 팡파레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기즈 드 프로하우스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나팔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호명관이 소리쳤다. 빵빠라빵빵빵! 홀은 넓고 시끄러웠지만, 나팔 소리는 그 큰 홀 끝까지 들릴 정도로 우렁찼다. 순식간에 소음들이 잦아든다. 홀 안에 서 있던 귀족들이 황급히 길을 만들었다. 전하께서 오셨대요, 전하께서!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던 메르디스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불청객이 오시는군.”
백작은 피식 웃었다.
“주인이 아니라요?”
“흥, 주인은 무슨. 좋은 연회 분위기가 파장 났잖아? 그게 불청객과 뭐 다를 게 있겠어.”
“하하하….”
공작령의 주인을 두고 불청객이라 표현하는 건 세상천지 이 여자밖에 없을 것이다. 사이에 아들도 뒀으면서 이렇게 관계가 안 좋은 것도 나름 재주는 재주. 기레스 백작은 고소를 삼켰다.
‘뭐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
공비와 함께하며 그가 얻은 이권은 많고도 많다. 평생 소원이었던 황도 정치의 끈, 황가와 관련된 사업으로 큰 이득을 얻은 것도 부지기수. 그의 아버지는 이런 자신을 두고 너 그러다 천벌 받을 거라고 역정을 냈지만 솔직히 가슴에 크게 와 닿지는 않는다. 공작을 대대로 섬겼건 어쨌건 사람이 상황이 달라지면 다른 줄도 설 수 있고, 뭐 그럴 수 있지 않나?
‘밤 좀 같이 지새는 게 좀 그렇긴 하지. 하지만 무릇 모든 투자엔 리스크가 있는 게 당연한 것을.’
솔직히 이런 이득이면 열정적인 어린 애인 노릇은 백번이고 해 줄 수 있는 패트릭이다. 물론 자신은 곧 혼인을 할 예정이니 그 전에 이 사이를 정리는 해야겠지만….
백작은 아직 소식이 없는 그의 예비 신부, 렉시를 생각하다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대체 어디 있는 걸까. 분명 멀리는 못 갔을 텐데.’
그를 처음 본 순간 알았다. 나는 이 사람을 위해 태어났고 저 사람도 나를 위해 태어났다고. 세상에 숱하게 흩어져 있는 마도구 구매자를 다 제치고 그가 자신을 만난 것은 실로 운명이라는 단어 말고는 설명할 수가 없는 일 아닌가.
물론 렉시가 기레스령으로 온 건 우연이고, 그를 선택한 건 그냥 그가 돈이 많다고 들어서다. 하지만 그가 뭐 그걸 알 리도 없고 알아도 무시했을 것이다. 그의 눈에 내린 콩깍지는 그만큼 거대했고 아주 질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까득 갈았다.
‘아무래도 이번 연회가 끝나면 내가 직접 내려가 찾아야겠어. 다들 내가 없으니 빠져서는…. 자기 일이 아니니 저리 허술한 것이지.’
호위 용병 둘 데리고 다니는 상인 잡기가 뭐 얼마나 어렵다고 저 지경인가. 도망 다니는 게 무슨 귀신같다고 부하들이 절절맸으나 솔직히 웃기지도 않았다.
‘말이 하늘을 날다니, 그게 말이 돼?’
변명을 하려거든 그럴듯하게 하던가. 니들은 내가 가면 다 죽었어. 단박에 부하들의 미래를 결정지은 백작은 슬쩍 메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연회 기간 내에 슬슬 이쪽 관계도 끝내고 말이야.’
기실 그는 공비와의 관계를 이렇게 빨리 끊을 예정은 아니었다. 버나드가 소공작이 되면 공비의 힘은 더 커지고, 자연 그가 얻어 낼 이권은 늘어날 터. 솔직히 지금 헤어지기엔 공비가 줄 이권들이나 그가 들인 시간들이 무척이나 아까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권은 나중에라도 얻을 수 있지만 사랑은 아니지. 내가 지지부진한 새 그를 누가 채 가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살리, 오오 그대를 위해서라면 나 뭐든 할 수 있다오. 이것은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행동의 전형이었지만 백작은 당당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면 없는 떡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으니까.
“난 슬슬 가야겠군. 그대는 어쩔 거지?”
메르디스의 물음에 그는 슬쩍 손을 놓았다. 곧 관계를 정리할 예정이지만 어쨌거나 아직 그는 그녀의 내연남. 부군이 등장했으니 내연남은 퇴장해야 할 시간이었다.
“저는 잠시 사람들 틈에서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비전하의 말씀대로면 사람들이 많이 흔들렸을 테니까요. 단속도 할 겸, 한번 정보를 휘저어 보도록 하죠. 되도록 이번 연회 기간에 일을 도모해야겠군요.”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안다. 메르디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좋아, 그럼 잠시 후에 보도록 해.”
메르디스의 눈이 슬쩍 백작을 향해 곱게 접힌다. 백작은 메르디스에게 눈인사를 하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메르디스는 백작이 사라진 자리를 보다 멀리서 들어오는 공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신년의 첫 연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공작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검은 바탕 아래 황금색 수실과 각종 보석이 박힌 예복은 무척 아름다웠고, 그것을 우아하게 걸친 공작의 모습은 실로 위엄있고 늠름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늠름한 태도로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있더라도 도저히 가릴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법.
전보다 확연히 깊어진 공작의 눈두덩이, 날카로운 턱과 위험할 정도로 솟은 광대를 본 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세상에….”
공작이 아팠다는 사실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옆에서 제대로 지켜본 건 의외로 몇 없다. 쓰러진 이래 공작이 공식 석상 참여를 거의 하지 않았던 탓이다. 세상에 만상에, 저게 다 뭐람. 사람들은 쑥덕쑥덕 동요했다.
“지금은 건강하신 걸까요?”
“글쎄, 그건 저도 잘….”
“어쨌거나 저렇게나 마르시다니 생각도 못 했지 뭐예요…. 후계자 건이 괜히 불거지는 게 아닌 것 같네요.”
공작이 천천히 걸어 나오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수다보다 공작에게 인사를 해야 할 때. 공작이 상석에 앉자 사람들은 예를 표했다. 공작이 그런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올해도 신년 연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주었군. 모두 오느라 고생들 했네.”
묵직하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 비록 살은 빠졌어도 그 특유의 울림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여전히 사람을 압도하는 웅변에 귀족들은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모두 작년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나는 잘 모르네. 누군가는 경사가 있었겠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애사가 있었겠지. 살면서 늘 경사와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다 내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네. 나는 작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어.”
홀 안의 공기가 살짝 위축된다. 다들 공작이 말하는 일이 뭔지 대충 눈치챘기 때문이다.
“세상 대부분의 일들은 권력과 재물로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거네. 실제로 그렇긴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것 말고도 사람에겐 중요한 게 너무 많다네…. 요 몇 달간은 그래서 내게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었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실수로 넘긴 부족한 것들을 깨닫는 나날이었거든.”
공작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세상은 늘 배울 일투성이인 것 같아. 내가 딱히 어리석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어떻게 보면 헛똑똑이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거든. 뭐 그래서 나는 작년이 그럭저럭 나쁜 한 해는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자신이 저지른 과오나 오판을 되짚어 볼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니 말이야.”
그는 왠지 모르게 숙연해져 있는 좌중을 굽어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쨌거나 신년이라네. 올해는 다들 가내 평안하고, 혹 좋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거기서 무언가 배우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이네. 물론 좋은 일이 있다면 기탄없이 기뻐하게! 그리고 여기저기 자랑도 해 주고 말이야.”
공작이 하하 웃자, 여기저기서 귀족들이 따라 웃었다. 덕분에 약간 숙연해졌던 분위기가 밝아지고 분위기가 환기된다. 공작은 싱긋 웃었다. 본래 사람이 가장 크게 놀랄 때는 이렇게 경계심이 풀리고 안심할 때다. 그는 웃음으로 무장 해제한 사람들을 향해 준비해 둔 폭탄을 터트렸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올해의 첫 기쁨은 내가 먼저 시작하도록 하지. 자고로 옛말에도 그랬지, 기쁨도 경사도 나눌수록 커진다고 말이야. 시종장!”
짝짝!
공작이 손뼉을 치자 시종장을 위시한 시종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귀족들의 손에 무언가를 안겼다. 귀족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선물인 줄 알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게 손에 담겨 있었다.
곱게 만든 생화 다발, 붉고 푸른 비단 뭉치, 번쩍번쩍거리는 색종이가 담긴 작은 바구니, 각종 꽃잎이 곱게 담긴 종이 상자 기타 등등등.
‘축하 용품?’
거의 모든 귀족들 머리에 똑같은 말이 스쳐 지나갔다. 대체 이걸 왜 주지?
공작이 준 것이긴 하니 의미가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참으로 의미 불명이 아닐 수 없다. 연회는 이미 시작했는데 뭘 축하한다는 거야? 한참 수군대던 와중 눈치 빠른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아! 전하, 혹시 오늘 깜짝 연회를 하는 겁니까?”
연회를 하며 가끔 깜짝 파티를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누군가의 말에 공작이 활짝 웃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오오,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건 신년이 온 기쁨을 서로 나누는 깜짝 파티?
“역시 전하십니다. 연회의 첫날은 흥겨워야 한다는 전하의 철학, 실로 감명이 깊,”
“거창한 말 고마운데 그런 거 아니야. 이거 약혼 축하 파티 용도거든.”
“…네?”
약혼? 무슨 약혼? 뜬금없는 말에 모두 두 눈 동그랗게 뜨는 가운데 공작이 다시 손뼉을 친다. 쿠쿠쿠쿠궁, 내성과 홀을 잇는 무거운 철문이 열린다. 귀족들의 시선이 갑자기 열린 문으로 향하자 공작은 활짝 웃으며 크게 외쳤다.
“자, 모두에게 소개하지. 내 친애하는 조카 로메인과, 그 약혼자 페르귄 남작이네!”
“!!!!”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홀은 순식간에 들쑤셔진 벌집처럼 시끄러워졌다.
두 사람이 천천히 지정된 장소로 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듯 쏟아진다. 사람들과 좀 동떨어진 자리였기에 두 사람은 마치 동상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왠지 모르게 불쾌해진 로메인은 자신의 몸으로 렉시를 가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배는 더 쏟아졌지만, 그는 꿋꿋하게 견뎠다. 그는 렉시를 지켜야 할 사명이 있었다.
‘괜찮으신가.’
앞에선 공작이 뭐라 뭐라 말하며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작이 적절히 윤색한 소개를 들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부는 슬쩍 그에게 다가오려고 했으나 그가 차갑게 노려보자 이내 포기하고 떠나갔다. 허나 이 짧은 순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로메인은 알고 있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궁금해하겠지.
로메인은 슬쩍 옆에 있는 렉시를 보았다. 불투명한 미색의 베일, 그 너머 보이는 녹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세상엔 숨기고 숨겨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 있다. 로메인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니….’
눈처럼 흰 예복에 미색의 베일을 두른 렉시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예복은 로메인이 마련한 것으로, 아무리 가짜라도 약혼자의 옷은 마련해야 하지 않냐는 요수아의 짜증을 몰래 듣고 허겁지겁 준비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옷을 받은 렉시는 무척 놀랐다.
“로메인 경, 저 옷 있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당황하는 렉시에게 로메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리 이게 가짜라도 제가 할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작님, 부디 입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요수아의 일침을 듣고 한 일이었지만, 로메인은 자기가 아주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주저주저하다 옷을 입은 렉시가 무척 아름다웠고, 또 자기가 준 옷을 렉시가 입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뿌듯했던 것이다. 이런 둘을 묘한 얼굴로 보던 공작이 킁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로메인, 너 이거 가짜 약혼이야. 알고 있지?”
“? 물론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짜 약혼이라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으래?”
최소한이라…. 코 평수가 이상하게 넓어진 공작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뭐 내가 뭐라 그러겠니?
그는 혼자 피식거리다 그냥 내친김에 그 베일도 벗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했지만, 이것은 렉시가 질겁하며 거절했다. 사유는 그랬다간 사고 난다는 것이었는데 사실 그건 로메인도 납득하는 바였다. 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얼굴 까면 정말로 큰일 난다. 그들은 공작을 불러오고 싶은 것이었지 렉시를 두고 벌어지는 결투와 사고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공작은 이들이 이렇게 질겁하는 걸 렉시가 퍽 못생겨 그런다고 착각한 모양이었지만….
‘흥, 눈이 어떻게 된 거지.’
로메인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못생겼다니, 저치는 눈이 삔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얼굴을 못 봤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렉시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어떠한 상황에 처했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 물이 흐르는 것 같은 우아한 몸놀림, 어떨 땐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는 부드러운 말솜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너그러운 마음씨.
비단 그 얼굴이 아니더라도 렉시는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 로메인은 이제 왜 요수아가 렉시의 얼굴을 두고 찬양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에게 있어 렉시는 그냥 존재 자체가 완벽하고 당연한 무언가였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태양은 낮에 뜨고, 달은 밤에 뜨며, 낮은 밝고, 밤은 어두운 그런 것.
이런 당연한 절대 명제를 가지고 동네방네 왜 자랑을 하겠는가? 요수아나 필립에게 있어 렉시는 그런 존재였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순간이 아름답고 귀하다.
로메인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이것이, 만일 진짜 약혼식이었다면….
‘…뭐?’
생각하고, 로메인은 퍼뜩 놀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했지?
심장이 순간 펄떡거리며 가슴을 조여 왔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부라렸다. 덕분에 멀찍이 또 오려던 사람이 도망갔다.
‘이, 이 무슨?’
그는 당혹을 감추지 않은 채 자기 자신을 질책했다. 이 무슨 허튼 생각인가…! 상대는 반 억지로 이 자리에 선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허나 한번 떠올린 생각은 도무지 머릿속에서 나가질 않고 그의 상념을 어지럽혔다. 그가 진짜 약혼자였다면 뭐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자꾸만 허튼 생각이 들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로메인은 에스코트하던 렉시의 손을 단단히 붙들었다. 처음 겪는 이 감정의 당혹은 무적의 기사도 압도당할 정도로 거셌다. 두근, 두근, 치밀어 오르는 심장의 떨림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붙들린 손의 주인이 이상한 듯 그를 불렀다.
“로메인 경?”
“…예?!”
“…할 말이 있으신가요?”
로메인은 흠칫 놀라 손을 떼려다 간신히 자리를 인식하고 힘만 뺐다. 그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답했다.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녹색 눈동자가 그를 말끄러미 바라본다. 로메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걱정스럽게 변했다가 이내 작게 휜다. 렉시는 왠지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로메인을 보며 입술을 열었다.
“괜찮아요. 로메인 경.”
“…예?”
“지금은 비록 사람들을 속이는 것 같지만, 결국 이것도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어쨌거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택한 길이시잖아요?”
뜬금없는 말, 그러나 그 내용을 곱씹던 로메인은 그것이 자신을 걱정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챘다. 푸른 눈동자가 크게 뜨이며 렉시를 바라본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그의 내부에서 휘몰아쳤지만, 그는 대체 이것을 무엇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렉시가 재차 말했다.
“네, 알아요. 이 일은 당신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걸. 당신이 정의로운 분이란 건 알고 있지만, 이번은….”
“―남작님.”
로메인은 렉시의 앞쪽으로 몸을 옮겼다. 그들을 관찰하던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둘을 바라보았지만, 로메인은 개의치 않고 렉시의 앞으로 우뚝 섰다. 렉시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렉시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터라, 위로 살짝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예?”
“저는 그저….”
로메인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간신히, 이렇게 말했다.
“…뭐든, 당신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예?”
뭔가 대단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렉시는 깜짝 놀랐으나 이번엔 로메인이 빨랐다. 그는 에스코트한 렉시의 손을 잡아 입에 가져다 댔다. 상대에 대한 지극한 경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렉시는 갑작스런 로메인의 행동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렉시의 눈동자를 보며 낮게 속삭였다.
“저는, 그저 …당신이 괴로우실까 걱정될 뿐입니다.”
렉시의 두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곧바로 연한 봄빛의 눈동자가 비를 맞은 것처럼 일렁거린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상하게도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로메인 경.”
“솔직히 말하건대, 저는 당신께 감사하고 또 미안합니다. 당신은 사실 이 제안을 그냥 거절하셨어도 되셨지 않습니까.”
후작이 마지막에 꺼내 든 카드가 있지만, 사실 그건 렉시가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자는 잃을 것 또한 많기 때문이다. 아마 렉시가 진심으로 그러길 원했다면, 후작은 결국 그에게 졌을 것이다.
“저는 외려 당신께서 이 일로 제게 실망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이 일로 절 싫어하면 어떻게 하나, 저를 경멸하시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로메인은 짐짓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바다처럼 서늘한 눈동자 위에 우수가 어린다. 렉시는 화들짝 놀랐다.
“실망이라니요, 경. 저는 경께 늘 도움만 받았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경에게 실망할 수가 있단 말인가요? 경 같은 훌륭한 기사를?!”
“아니요, 제가 정말 훌륭한 기사였다면 당신께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겠지요. 이 모든 것은 제 비겁함의 소치입니다.”
로메인의 말에 렉시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비겁하다니, 세상에 그것만큼 로메인과 안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경,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건 결국 제가 선택한 일입니다. 제발 그런 말로 본인을 상처 주지 마세요!”
렉시의 필사적인 말에 로메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 눈앞에 있는 렉시의 손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칠고 단단한 자신의 손과 달리 곱고 부드러운 렉시의 손끝. 그 흰 손을 본 순간, 배 속 깊은 곳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로메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세간의 평과 달리, 사실 저는 그렇게 잘난 자가 아닙니다. 제가 후계자 자리를 고사했던 것은 제가 그런 제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는 명령을 받는 쪽이 성정에 맞는다. 그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다스리는 일이 아닌 그것을 보조하는 것.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란 위에 서서 전체를 조망하는 식견이 필요하다. 자신은 생각보다 외골수적인 기질이 강하여, 대의보다는 하나의 정의가 우선이다. 만일 이 같은 자가 만인의 머리가 되면 그 영지는 필시 수많은 곤란에 휩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저는 앞으로 어떤 일이 당신께 벌어질지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런 제가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라곤 검을 휘두르는 재주뿐…. 당신을 번잡하게 하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뿐이라 참으로 면구할 뿐입니다.”
때아닌 자기 고백에 굳었던 렉시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는 자신을 붙든 로메인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경,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사람은 자신의 모자람을 알 때 더 발전할 수 있고, 본인이 완벽하다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경계해야 할 대상인 것을요. 그리고 이 일은 경께서 제게 부채감을 가지실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이 일은 제가 선택했고, 이후로는 오롯이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
사람은 살아가며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 그 일들이 오롯이 자신의 선택인지 타인의 강요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벌어진 일은 남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저는 경의 고귀한 마음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는 것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리 자책하지 마세요. 그것은 경의 책임도 아니거니와, 저는 그 일로 경께서 괴로워하시는 게 더 마음이 아프니까요.”
왜인지 모르게 눈가와 광대가 약간 뜨겁다. 렉시는 자신이 베일을 써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베일이 없다면 자신은 저 로메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았어야 했을 것 아닌가. 어딘지 모르게 따뜻하고, 또 이상하게도 가슴이 설레는 기묘한 시선.
베일 속 자신의 얼굴은 필시 무척 이상하게 변해 있을 것이다. 로메인이 말했다.
“그 말씀은 …저를, 미워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미워를 왜 해요, 전 경을 좋아하는걸요.”
“저를… 예?”
렉시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경,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면 그건 제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처럼 훌륭한 기사를 제가 어떻게 원망할 수 있겠어요. 경은 제게 경애와 동경의 대상인걸요.”
경애, 동경…. 기묘한 울림의 단어였다. 로메인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바다처럼 깊어졌다. 베일 너머 보이는 렉시의 눈동자, 그 아래 자리할 얼굴선과 입술…. 마치 그 너머를 보는 것처럼 지그시 렉시를 훑던 로메인의 시선은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을 끝으로 멈추었다.
이 약혼은 피차 목적이 있는 약혼이다.
서로 적절히 합의하여 내린 결론이므로 사적인 감정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다. 그가 그걸 모르겠는가.
허나, 이상하게도…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 끌리는 자신이 있었다.
상대의 시선을 끌고 싶은 나.
상대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 속하게 하고 싶은 나.
그에겐,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다른… 혹은 나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나.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로메인은 전율했다. 또한 동시에 당혹했다.
왜 잘 보이고 싶은지, 왜 남들과 조금 달라 보이고 싶은지, 왜 자꾸 옆에 있으면….
“로메인 경.”
로메인은 순간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마치 이정표가 되는 것 같은 음성. 그는 혼란한 눈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자신에게 빛을 가져다준 상대를 바라보았다. 단지 이름을 불렸을 뿐인데… 그게 너무 좋았다. 그 부름으로 로메인은 그 자신이 비로소 그라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갈망과 행복이 동시에 그를 엄습했다.
사람을 부르는 이름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그 상대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 허나 가끔 아무런 의미 없는 이름이, 어떠한 거대한 의미가 되어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순간을 여러 가지 단어로 이야기하곤 한다. 운명이 바뀌는 접점, 영혼의 반쪽을 발견한 순간.
허나 가장 짧고 명확한 단어 하나로 이 개념을 표현하라면 그것은 단 하나뿐일 것이다.
―사랑.
로메인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영주님, 제 맹세를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
맹세?
“그, 제 영지로 오신다는 건 이미 허락을 했을 텐데요.”
“그것과는 다릅니다. 예전의 것은 제가 당신께 몸을 의탁한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것은 제 이름과 명예, 생명, 이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로메인은 천천히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잡고 있는 렉시의 손을 천천히 자신에게 이끈다. 렉시의 손등 위에 로메인의 입술이 닿는 순간 렉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손등 위에 떨어진 입술 자국 위로 순간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경, 지, 지금…?”
“부디 받아 주십시오. 받아 주시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렉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로메인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날이 맑은 가을날 보던, 청명하고 깨끗한 푸른 눈동자. 순간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고양감이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단숨에 꿰뚫는다. 렉시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뭐, 뭐야 이건?’
순식간에 내 몸을 관통하고 사라진, 이 기묘한 느낌이 대체 뭐지?
렉시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고 싶었지만,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그걸 탐구하기란 불가능했다.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마치 안개처럼 희미해진다. 심지어 늘 명확하게 돌아가던 그의 이지마저도 덜컹덜컹 헛발질했다. 렉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머리 한구석이 뿌옇고 불투명했다. 그는 자신이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 리 없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웃음이 번지는 이 기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할 리 없을 것이다.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기가 고개를 끄떡이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 겪는 감정의 발현에 당황해, 지금 로메인이 청하는 것이 레이디의 맹세라는 것조차도.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은 그걸 보는 귀족들뿐이었다.
‘저, 저게 뭐지.’
많은 기사들이 레이디에 대한 맹세를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기 배우자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라고 있는 맹세가 아니건만, 근래 기사들은 이 레이디의 맹세를 출세의 수단으로 삼았다. 진정 맹세를 바치는 대상을 찾기보다, 상관이나 상급자의 배우자에게 맹세를 하고 점수를 따는 것이다.
따라서 둘의 이 모습은 세기에 보기 드문 아름다운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할 일과 못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이 둘의 약식 맹세를 보던 귀족들은 그야말로 온몸이 불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왜 여기서 저러는 걸까요. 그냥 저건 둘이 있을 때 하면 안 되나…?”
“여기가 어딘지 잊은 건가 봐요.”
아아, 보는 사람이 다 부끄러운 이 광경은 무엇일까. 그들은 상석에 있는 공작을 흘끔거렸다. 설마, 이것도 공작이 의도한 걸까? 하지만 상석 위의 공작을 본 순간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서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공작은 툭 건드리면 파스스 먼지가 될 것처럼 보인다. 누가 봐도 이 일을 아는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치솟는 혈기에 저지른 일이로군.
그들은 피식 웃었다.
하기야 젊은 애들이 다들 그렇고 그런 법이지. 아무리 공작이 지엄하다지만 젊은것들 치기가 이거저거 구분하며 발산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피식거리며 잡담을 했다.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대체 누구길래 저 철벽을 저렇게나 빠지게 했을까.”
“헌데 대체 남자인가요 여자인가요?”
저 대단한 광경에 공작이 말을 하다 말았기에 사람들은 렉시의 성별을 몰랐다. 그들은 앞다투어 렉시의 성별에 대해 갑론을박을 했다.
“키가 큰 거 보면 남자 아닌가?”
“글쎄올시다. 그냥 키가 큰 여성분 같기도 한데….”
예복과 베일로 온몸을 가린 렉시는 기실 성별을 짐작하기엔 조금 모호한 면이 있었다. 노린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이날 입은 옷 또한 어딘지 모르게 중성적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약혼 발표에 어떤 여자가 저런 옷을 입고 오나요? 아무리 검소하게 입고 오더라도 드레스를 입겠죠.”
“…아아!”
드레스는 여자의 자존심, 드레스는 여자의 무기. 이런 중요한 자리에 여자라면 드레스를 입을 것이다. 고로 저이는 남자다! 하는 말에는 모두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 그렇구나, 여자는 드레스…!
“허면 남자와 약혼을 했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피차 상상치도 못했던 사태였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대체 어디 출신이죠? 아까 뭐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남작이라 그랬나?”
“그렇소, 페…페 뭐 남작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혹 공작이 다시 말해 줄까 흘끗거렸으나 공작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듯 뻣뻣했다. 퍽이나 놀란 모양이지. 저래서야, 말을 걸긴커녕 위로나 건네야 할 판이다. 사람들은 쯔쯔 혀를 찼다. 그나저나 저게 대체 누구람.
“뭐 누군지가 중요한 건 아니지요. 혼인할 거라는 게 중요하지. 데퓨탄 후작께선 소원 성취하셨네요. 둘째 아들 장가보내려고 그렇게 이리 뛰고 저리 뛰더니….”
“성취하면 뭣하오? 상대가 남잔데. 자손을 못 보는 결혼이 무슨 소용이지?”
“그런 말 마세요. 후계자야 아래 그거만 정정하면 뭐 밖에서 어떻게든 볼 수 있죠. 거기다…. 사실 로메인 경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요?”
여자를 멀리하는 태도로 인해 은연중 성 기능 장애가 예상되던 과거 일을 생각해 보면 이 일은 더욱 명확하다. 세상에 아무리 지위와 돈이 좋아도 고자와 결혼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절로 나오는 비웃음을 삼키던 귀족들은 문득 떠오른 사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이상하다?
“저, 그런데 로메인 경이 약혼했다는 건….”
“…그, 거기가 정상이란 소리라는?”
사람들은 당혹한 얼굴로 사이좋아 보이는 두 남자를 응시했다. 홀에 나오다 말고 서로만의 세상에 빠진 둘은 아직까지도 그 세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했구나. 했어.’
물론 세상엔 플라토닉이란 게 있는 법이고 둘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성생활 없는 사이가 저렇게 불타지는 않을 것이다. 실로 깊은 오해였으나 그들은 그리 생각했다. 그리하여 묘령의 신비남을 홀린 듯 바라보는 로메인을 보는 순간, 그들은 불현듯 깨달았던 것이다. 그간 왜 로메인에게 여자 소문이 없었는지.
그래, 그렇군. 바로 그래서…!
“…남자 취향이었구나.”
“그랬군, 그래서 여색을 멀리한 거였어…!”
“불능이 아니라… 어머, 어머 세상에.”
사람들은 즉시 납득했다. 사유를 알고 나니 모든 것이 불 보듯 뻔했던 것이다.
‘남자가 좋은 사람에게 주야장천 여자만 들이밀었으니 일이 진척이 없지. 다들 큰 착각을 했던 거야.’
그가 고자라는 소문 때문에 눈물지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신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그게 거시기라니 조금 너무 가혹한 일 아닐까. 하지만 그 모든 게 그들의 착각이었다니 신은 아직 일말의 인정이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해를 정정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등장한 새로운 가능성에 전율했다.
로메인이 고자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후계 구도가 바뀐다!’
버나드 홀로 독주하던 후계자 전쟁에 새로운 참가자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그냥 일반 참가자가 아니다. 과거 가장 유력했던 후보의 재등장이었다. 세력이 없으면 모르되 세력도 크고 또 일신에 갖춘 모든 것이 버나드보다 나은 새 후보의 등장은 사람들을 크게 경도시켰다. 새 후보자, 새 후계자.
로메인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얼굴에 흥분과 탐욕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일엔 이면이 있듯, 같은 현상 같은 결론으로 정반대의 반응을 하는 자들 또한 존재했다. 이들은 물론 공작과 반대되는 공비파의 귀족들. 그들은 살짝 우거지상을 한 채 앞선 이들과 조금 멀리 떨어져 사태를 관망했다. 여기엔 스리슬쩍 사라졌던 기레스 백작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기껏 약을 칠 준비를 해 놨더니 상황이 초를 친다. 기레스 백작의 중얼거림에 옆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귀족들이 슬쩍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아까 말씀하셨던 계획은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앞서 공비파의 귀족들 사이로 사라졌던 패트릭은 몇 가지 계획을 짰다. 그중 하나는 로메인 고자설을 은밀히, 최대한 자주 흘릴 것, 또 다른 하나는 로메인이 결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고 말하고 다닐 것.
사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점적으로 흘릴 것은 로메인의 하반신 사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론을 흔들 때 가장 좋은 말은 이처럼 노골적이고 직관적인 말이다. 고자인지 아닌지, 성불능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주 접하고, 입에서 오르내리게 하는 것일 뿐. 설령 그게 거짓이라 해도 사람들의 뇌리에 인상이 박히면 여론전은 성공이다.
한번 인지된 사건은 다시 재반박되기 어렵고, 또한 반박하더라도 그게 널리 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본다. 그들에게 자신이 알던 것이 가짜인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일차적으로 재미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소문으로 세뇌한다 한들,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행위를 이길 수는 없었다. 시각은 다른 모든 감각들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기레스 백작은 이를 까득 갈았다.
‘당했군.’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저 장면 하나로 계획한 게 모두 아작 났다. 패트릭은 밀려오는 열패감에 이를 악물었다.
‘초장부터 이렇게 치고 나오다니 제법이야? 로메인.’
설마하니 신년 연회를 약혼 발표에 이용해 먹을 줄이야. 물론 이 일엔 공작이 깊이 관여를 했을 것이다. 늘 상대를 정공법으로 억제하던 공작이 왜 갑자기 이랬나 궁금했지만, 상황이 급하니 본성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 패트릭은 왜 자기가 이 일을 예상하지 못했는가 매우 분했다.
‘이제 어쩌지?’
어쨌거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 기막힌 촌극으로 사람들은 로메인을 선명히 각인했다. 패트릭이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다음 수를 계산하기 시작할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타나 기레스 백작의 어깨를 툭 쳤다.
“이봐.”
백작은 흠칫했다.
“뭘 그렇게 놀라?”
“…공자.”
순간 얼굴이 일그러진다. 백작은 가까스로 입술을 올린 뒤 뒤를 돌았다. 돌아본 곳엔 공비와 똑 닮은, 붉은 머리칼에 금빛 눈을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버나드였다.
“…언제 오셨습니까?”
“파티장 말인가. 오기야 진작에 왔지. 자네도 참, 봤으면서 뻔한 걸 묻는단 말야. 일부러야?”
버나드는 킬킬 웃었다. 어쩜 이렇게 말 한마디 한마디를 얄밉게 하는지. 속에서 순간 짜증이 치솟아 오르는 걸 참아 낸 그의 눈동자가 버나드 옆을 본 순간 확 커졌다.
아니, 왜 아무도 없지?
“공자, 제가 붙여 놓은 이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이런 파티장에서 홀로 다닌다는 건 말도 안 될 일이다. 당사자의 인맥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걸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틈에서 은밀히 작업하는 자신조차 최소 두셋 정도 사람을 달고 다니는 마당이다. 하물며 버나드는 말해 무엇할까?
게다가 그들은 그냥 붙여 놓은 자들이 아니었다. 백작이 열심히 작업한 끝에 붙여 놓은 최강의 바람잡이들로, 언변이 뛰어나 불려온 사람들을 버나드 곁에 붙여 두는 역할을 했다. 즉 이들만 있어도 버나드의 세가 커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경악한 백작의 지적에 버나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딨긴? 귀찮아서 화장실 다녀온다고 하고 떼어 놨지.”
“예? 공자!”
“이봐, 백작. 오늘처럼 영지의 레이디들이 다 모이는 날이 얼마나 드문지 알아? 헌데 그렇게 몰려다니면서 어떻게 여자를 만나란 말인가. 레이디들은 예민한 꽃사슴 같은 존재야. 좌우에 사람 열댓 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말 걸면 다들 화들짝 놀라 도망친다고. 그놈들 덕분에 이 내가 지금까지 여자 한 명도 꼬시지 못했어! 이게 말이 돼?”
기레스 백작은 잠시 침묵했다. 순간 대체 뭐라고 해야 하나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여자? 이 중요한 자리에, 여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간만에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여자와 만나는 것이야 큰 흠은 아닙니다만…. 꼭 이런 날 그러셔야 합니까? 거기다 제가 붙여 놓은 사람들을 다 떼 놓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홀로 돌아다니시면 필시 비웃음을 사실 겁니다.”
“흥, 잔소리는.”
버나드가 흥흥대자 패트릭은 얼굴을 굳혔다.
“…공자, 자꾸 이러시면 저도 실례를 무릅쓰고 공비 전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시길 원하십니까?”
너 자꾸 이러면 니네 엄마한테 이른다? 곱게 포장한 패트릭의 엄포였다. 버나드의 입이 못마땅한 듯 비틀렸다.
“내, 내가 그 말에 겁먹을 것 같나?”
“정말 그래도 됩니까?”
“……알았어, 하면 되잖나 하면!”
왈칵 성을 내는 버나드는 솔직히 누가 봐도 한심했다. 눈으로 사라진 바람잡이들을 찾으며, 그는 이를 악물고 웃었다.
‘참자. 참아야 한다.’
솔직히 말해 버나드가 항상 이렇게 한심한 것은 아니다. 아주 글러 먹은 놈이었으면 그도 애저녁에 손을 뗐을 테니까.
공작처럼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일단 시키면 뭐든 보통은 넘게 했다. 검도, 정무도, 행정도 평균 이상 정도로 상당히 우수한 편이다. 하지만 딱 하나, 여색만 엮이면 이 미친 색골은 앞뒤를 따지지 않고 멋대로 했다.
한쪽은 여색에 초탈해 문제, 이쪽은 여색에 환장해 문제.
물론 이해는 한다. 아버지는 공작, 어머니는 황제의 조카이니 세상 뭐가 두렵겠는가. 혈통으로 치면 그보다 나을 자는 당금 황제밖에는 없을 것인데.
하지만 아무리 피가 푸르다 한들 그는 아직 일개 공자이지 소공작은 아니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았기에 소공작이면 으레 받곤 하는 다른 작위조차 없다. 그런 주제에 이렇게 오만하면 안 되지 않나?
‘작위도 없는 천둥벌거숭이 주제에, 내 존대를 받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인지.’
따지고 보면 그는 찬탈자로 매사 긴장해야 하는 위치. 헌데 그런 자가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굴면 그는 가끔 버나드를 때리고 싶었다. 공작이나 공비나 어쩜 자식 농사를 이따위로 지어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빠 닮지 않았다 치자. 하지만 하다못해 모친을 좀 닮으면 안 됐던 걸까?
‘공비 전하께서도 시름이 크시겠어.’
솔직히 시름이 깊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남과 부모 속이 같을 리는 없다. 아들 때문에 목하 고생인 공비 전하께 삼가 묵념을.
그렇게 속으로 쯧쯧 혀를 찬 기레스 백작이었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이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말은 똥으로 아는 그와는 달리, 버나드는 어쨌거나 엄마 말은 잘 듣는 개였기 때문이다.
뭐 어쨌거나.
저 멀리서 바람잡이를 발견한 기레스 백작이 눈짓으로 그들을 부른다. 버나드는 일부러 백작과 조금 떨어졌다. 방금 전의 논쟁으로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마주하지 않고 등 뒤를 돌아보는 자세부터가 솔직히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것. 버나드는 그렇게 먼 산을 보는 척하며 코를 흥흥거렸다. 솔직히, 배알이 아주 많이 꼴렸다.
‘흥, 겨우 어머니 때문에 등용된 주제에….’
그가 여자에 미친 색골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백치는 아니다. 사실 여자에 미쳤기 때문에 그는 이 젊은 백작과 어머니의 관계를 제일 먼저 눈치챈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저 뱀 같은 놈 어디가 좋다는 거야?’
남자는 같은 남자가 봐야 아는 법. 그가 보기에 저놈은 앞뒤가 서로 다른 엉큼한 자였다. 그는 적어도 여자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과 정반대로, 필요하다면 거짓말 정도는 능란하게 할 자였다. 솔직히 말해, 아무리 단기적인 관계라도 추천하고 싶은 남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뭐, 서로 상부상조하며 짧게 즐기는 관계라곤 했지만….’
버나드는 쳇 하고 혀를 찼다. 그가 공비의 아들이긴 하지만 이것은 사생활이다. 지금으로선 그간 어머니가 과거 수집했던 정부들 목록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예쁜이들을 그냥 놔둬야 한다 이거군.’
아아 이렇게 아까울 데가. 버나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지만 참았다. 이미 자기가 한 말도 있었고, 또 생각해 보면 기회는 또 있었다. 멀리서 온 귀족들이 오늘 단 하루만 연회를 즐기고 갈 리는 없을 것 아닌가. 덕분에 그는 조금 여유로운 표정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오늘은 그냥 탐색하는 날로 하자. 그는 천천히 시선으로 연회장 안을 수놓는 아름다운 레이디들을 훑었다. 새빨간 장미 같은 여자, 물먹은 수레국화 같은 여자, 가녀린 백합 같은 여자, 그리고….
그렇게 여인들을 바라보던 버나드는 순간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백작. 기레스 백작! 내가 지금 보는 저게 내 사촌이 맞나?”
“예… 보시는 대로, 로메인 경이지요.”
버나드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런 미친, 저놈이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
“…저, 혹시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말했잖아! 나 화장실 다녀왔다고. 이럴 수가, 내가 없을 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
어쩐지 생각보다 더 놀란다 했다…. 어쨌거나 이 비상 상황을 몰랐다면 빨리 알려 주긴 해야 했다. 백작은 최대한 간결하게 상황을 요약했다.
“로메인 경이 약혼 발표를 했습니다.”
“…약혼 발표?! 오늘?”
“네, 덕분에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버나드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그의 눈이 로메인과, 그 앞에 있는 여자를 향해 번뜩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버나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하…. 이거 재밌군, 오늘 약혼 발표를 해? 저게 아주 일을 크게 쳤는데?”
아무런 욕심이 없는 척하더니 이런 짓을 했다라.
버나드는 흥 하고 생각에 잠겼다. 점잖은 척 고상한 척 이성적인 척 원칙주의자인 척 온갖 척을 다 하던 로메인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라면 역시, 그를 약올리고 사라졌던 그 여자의 존재뿐일 터. 하기야 고래부터 여자란 존재는 남자를 휘두르는 요물 아닌가. 하물며 여태 고자 소리를 들은 로메인이니, 그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여자의 속살거림에 넘어갔나 보군.”
그는 슬슬 그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여자길래, 그 철벽을 꼬드기고 이런 짓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이봐 백작, 저 여자는 출신이 어떻게 되나?”
“남작이라고 들었습니다…. 페르귄의 남작이라고 하더군요.”
“작위를 가진 여자라고? 페르귄?”
렉시의 성별을 눈치챈 귀족들도 많았지만, 눈치채지 못한 자들도 제법 됐다. 기레스 백작은 후자였고, 그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제 생각엔 중남부 쪽 지역에 있는 숱한 소영주 중 한 명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별 볼 일 없을 공산이 큽니다. 그 근처는 산맥이 많아 커다란 영지들이 자리할 수 없으니까요.”
페르귄 영지는 대륙의 중남부를 얽는 기도라스 산맥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기레스 백작은 몰랐지만, 그건 거의 실제에 가까운 추론이었다. 백작의 말에 버나드는 입매를 비틀었다.
“작은 영지라 가능했던 건가. 허나 여인의 몸으로 작위를 이었다…. 쉬운 일은 아닌데 말야. 그래서 그렇게 시건방졌군.”
자신을 비웃으며 굽어보던 그 모습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겠다. 아무리 남작위라도 여자가 작위를 이었으니 세상 무서운 게 별로 없을 터. 자만심을 가진 이의 상승욕이란 퍽 당연한 일이다. 버나드는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로메인을 택했는지 짐작했다.
“작은 영지에서 벗어나고 싶은 야심가로군. 남작 대신 공작 부인이 되고 싶은 모양이야.”
“글쎄요, 그것까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사항은 넘겨짚지 않는다. 기레스 백작은 완곡하게 말했지만 버나드는 훗 하고 비웃었다.
“이봐 백작, 척하면 착이야. 그게 아니면 저렇게 복잡한 상황의 남자를 뭐 하러 꼬시겠어?”
“…하지만,”
“백작, 생각해 보게. 저 녀석은 고자란 소문이 나 있던 녀석이야. 지금 보면 그건 헛소문인 거 같긴 하지만…. 자네가 여자라면 그런 남자에게 다가갈 거 같나?”
“…….”
기레스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럴듯했다. 남녀 관계에 있어 섹스란 상당히 중요한 요소. 굳이 세우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는 남자를 꼬드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저게 보통 놈이야? 유혹한다고 막 넘어가는 놈이었으면 여태 고자 소리도 듣지 않았을 거라고. 그런 목석같은 놈을 유혹하다니…. 꿍꿍이가 없을 리 없지.”
버나드의 얼굴이 흥미진진해졌다.
“뭘로 꼬드긴 걸까. 여자치곤 키도 크고 몸매도 별로인데.”
버나드가 킬킬 웃는다. 그는 음탕한 눈빛으로 렉시의 몸을 은근히 훑었다.
“얼굴을 가린 거 보면 그쪽으로 자신은 없는 거 같기도 한데 말야.”
자신의 매력을 다 내보여도 말이 나오는 자리다. 거기서 굳이 얼굴을 가렸다는 건 그것이 약점이라 그래서일 터. 드레스가 아닌 옷을 입은 것도 그 연장이라 생각하면 또한 납득이 가능하다. 그렇다는 것은….
‘치고 빠지는 심리전에 능란한 여자란 건가. 이거 제법 까다로운데.’
머리 쓸 줄 아는 여자는 번거롭다. 하지만 이런 타입이 또 함락되면 그만큼 양순하고 귀여운 법이지. 버나드는 피식 웃었다.
“…한번 흔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겠는데.”
“흔들다니요.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백작의 질문에 버나드는 씨익 웃으며 렉시 쪽을 눈짓했다. 기레스 백작의 얼굴이 순간 심각해졌다. 설마….
“남작을 죽인다는 말입니까…?”
버나드가 정색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유혹한단 이야기잖아!”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백작을 비난했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건 백작 역시 매한가지였다. 잠깐, 누가 누굴 유혹해? 지금 제정신인가? 그는 식겁한 얼굴로 성큼성큼 나서는 버나드의 앞을 막아섰다.
“공자, 잠시 멈추십시오. 지금 진심입니까?”
대체 뭘 어떻게 생각하면 저 여자를 유혹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건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머릿속이었으나 버나드는 당당했다. 그는 말했다.
“공작 부인이 되고 싶은 여자야. 고자도 유혹해서 넘길 정도로 야심이 만만한 여자라고.”
“아, 예. 그래서 새로운 먹잇감으로 당신을 던져 준다, 지금 이겁니까?”
“바로 그거야! 결국 저놈이 약혼한 게 문제 아닌가? 파혼시키면 나는 여자를 얻고, 또 소공작이 될 시간도 벌 거야. 훌륭한 작전 아닌가?”
버나드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기레스 백작은 기가 차단 얼굴로 그런 그를 보았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군요. 대체 …자신은 있으십니까?”
“여자를 알아도 내가 더 잘 알고, 겪어 봐도 내가 더 겪어 봤다네 백작. 내가 저놈 하나 못 이길 것 같아?”
두고 보게, 버나드는 잽싸게 앞으로 나갔다. 말이 갔다지 거의 튀어 간 수준이라 차마 잡지도 못했다. 제기랄, 그는 입술을 깍 물고 은밀하게 그의 뒤를 좇았다. 어쨌거나 저치를 혼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큼성큼.
사람들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버나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 연회의 주빈은 로메인과 렉시였지만, 그렇기에 버나드의 존재 역시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버나드가 가는 방향을 확인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소란스러웠던 연회장의 소음이 순식간에 잦아든다. 사람들은 긴장 어린 얼굴로 로메인에게 향하는 버나드를 보았다. 둘 사이가 영 좋지 않은 것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이것은 다시 나타난 경쟁자에게 무언의 경고를 하려는 수작인 걸까?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버나드, 이제 그 앞엔 렉시와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선 로메인뿐이었다. 간신히 둘만의 세계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난데없이 나타난 버나드의 모습에 당황한 눈치였다. 뭘 좀 아는 사람 눈엔 실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일 때였다.
“여, 사촌.”
버나드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로군, 내 친애하는 사촌 로메인 경. 그간 잘 지냈나?”
“…네, 오랜만입니다. 공자께선 잘 지내셨습니까.”
생각보다 평연한 응대에 버나드가 피식 웃었다.
“나야 뭐 잘 지냈지. 동문에서 그 고생을 하는 자네만 할까. 자네의 위명은 퍽 놀라워서 내가 있는 곳까지도 들어오더군.”
“별것 아닙니다. 위명이라 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래?”
“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굳이 고생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비슷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버나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사람이 공치사를 하면 받아먹을 줄을 알아야 한다. 이쪽을 칭찬했으면 저쪽도 좀 칭찬해 주고, 오고 가는 말에서 싹트는 정이나 뭐 그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로메인 같은 사람은 공치사를 공치사로 보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친다. 버나드와 로메인 사이가 괜히 안 좋은 게 아닌 것이다.
‘하여간 이 벽창호 같은 놈!’
평소와 같았다면 이미 여기서 둘의 조우는 끝이다. 하지만 아직 목적이 있기에 버나드는 참았다. 그의 목표는 이 벽창호가 아니라 그의 약혼녀! 버나드는 두 주먹 불끈 쥐고 과장되게 웃었다.
“그나저나 자네도 참 너무하지 않은가?! 이렇게 놀라운 사실을 이제야 알려 주다니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친척 아닌가?”
“무엇이 말입니까.”
“뭐긴! 이렇게 덥석 약혼 발표를 했잖아. 미리 좀 알려 주지 그랬어. 정말로 놀라워. 나는 자네가 결혼에 영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딱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로메인이 불편한 듯 대꾸하자 버나드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수줍어하는 자네를 보다니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역시 제수씨 때문인가? 어떻습니까, 제수씨?”
엄밀히 말하자면 제수씨가 아니라 형수님이다. 허나 버나드는 로메인이 굳이 그런 걸 따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렉시를 훑었다. 그가 훑자, 여태 평연하던 로메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는 무시했다.
“아직은 약혼 발표지만, 곧 약혼을 할 테니 그럼 나의 친척도 되는 것이겠지요. 뭐 아시겠지만 저는 이 녀석의 사촌입니다. 프로하우스 공작께서 제 부친 되시고요.”
“…예. 안녕하세요.”
“오, 목소리도 아름다우시군요. 이토록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을 배우자로 맞이하게 되다니, 제 사촌은 참 복이 많은 녀석 같습니다. 그래, 대체 이 녀석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
렉시는 눈을 깜박대며 입을 다물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뭐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맙소사, 이자는 그 상인 아닌가?
‘저게 그 버나드란 사촌이었어?’
알현실의 그 상인이 설마 그 사촌이었다니! 렉시는 자기가 큰 착각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덜 약 올리는 건데!
‘무슨 꿍꿍이지?’
천만다행으로 알현실의 조우는 없던 일로 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렉시는 등에서 땀이 났다.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다가오는 자치고 속이 시꺼멓지 않은 이는 없다. 저자는 무얼 원하길래 나에게 말을 거는가? 렉시는 말을 하는 대신 수줍은 척 눈만 내리깔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휘몰아쳤다.
‘로메인 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이 친한 척은 뭘 위한 걸까?’
렉시는 살짝 눈을 들어 번쩍거리는 예복을 입은 남자를 관찰했다. 얼굴은 그럭저럭 잘생겼지만, 야비하게 올라간 입매나 살짝 날카로운 눈초리 같은 것들이 전체적인 인상을 깎아 먹는다. 게다가 연회의 주인 공작보다 더 화려하게 입은 저 꼴을 보라지. 렉시는 설령 이자가 진짜 자식이었어도 공작이 싫어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과시적인 성격은 나중에 일을 크게 친다는 게 정론이었다.
‘왜 여지껏 인망을 못 얻었는지 확연하네. 거의 백로와 참새 수준이잖아.’
물론 참새는 저쪽이다. 이쪽은 백로고. 홀로 독주한 시간이 삼 년인데 아직까지도 공작의 세력이 팽팽하다는 건 그만큼 저쪽이 모자라단 이야기다. 아무리 사이가 좋지 않다지만 공비의 유일한 아들의 세력이 경쟁자가 없어도 팽팽할 지경이면…. 아마 보는 것 이상의 문제가 다발적으로 존재하겠지. 과시적인 성격이라면 눈치도 없을 거고, 성격도 급할 거고. 아마 모시기 쉬운 상전은 아닐 테니 다들 고민이 많을 듯했다.
렉시는 그렇게 흘끗거리며 버나드를 관찰했다. 그런 관찰의 시선이 생각보다 집요하게 변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리하여, 버나드의 코는 슬슬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훗, 역시 내 생각대로야.’
버나드는 훗 하고 입꼬리를 미묘하게 위로 올렸다. 자기가 누군지 알자마자 바뀐 이 태도라니. 저 멀리서 자길 보고 있을 백작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이것 보라고, 이 여자가 지금 자길 보는 눈을 보라고. 은근슬쩍 아름답다 매력 있다 공치사하는 한마디에 이렇게 정신없이 훔쳐보는데 무슨 꼬실 자신이 있고 없고를 찾는단 말인가.
‘하긴 내가 뭐 좀 잘나긴 했지.’
그는 뿌듯하게 시선을 음미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번 할 때마다 여자들이 죽고 못 사는, 본연의 매력을 한껏 내뿜는 자세였다.
‘이거 봐, 이거. 아주 솔직하잖아?’
유일하게 드러난 눈동자, 긴 속눈썹이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나비처럼 팔랑거린다. 다년간 여자들을 섭렵하신 버나드는 이런 눈을 한 여자들의 끝을 아주 잘 알았다. 다들 흥하며 아닌 척해도 결국 자신의 품으로 와 꽃이 된 그녀들. 이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은 비록 로메인 뒤에 살짝 숨어 있지만, 뻔했다. 거는 말에 대답도 못 하면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저 모습. 저건 누가 봐도 관심 있는 상대를 보는 여인의 수줍음이다.
버나드는 로메인을 흘끗 보았다. 옆에서 무뚝뚝하게 서 있는 로메인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기사 그런 눈치가 있었으면 여태까지 저놈이 혼자였을 리 없지. 그는 속으로 로메인을 비웃었다.
‘흥,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군.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눈앞에서 여자가 한눈을 팔아도 몰라봐?’
자고로 연애 사업이란 부익부 빈익빈, 능력 없는 자란 도태되기 마련인 법. 약육강식인 연애 세계에서 약한 자는 눈앞에서 여자를 빼앗겨도 하는 수 없다. 때문에 그는 사촌의 여자를 탐한다는 죄책감 없이 대놓고 렉시를 살폈다.
‘가까이 보니 키가 제법 크군.’
어지간한 여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것 같다. 물론 그래 봤자 여자이니 그보다는 작았지만, 그래도 큰 키는 맞았다.
‘뭐 땅딸막하니 작은 것보다는 큰 게 낫지. 근데 가슴이 좀 그렇군. 너무 판판해.’
여자의 매력은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라 생각하는 버나드에게 이것은 상당한 비보였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그래도 나머진 괜찮았다. 일단 허리는 제법 가늘었으니까.
그러니까 대체적으로 낭창한 버들가지 같은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큰 키, 판판한 가슴,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아, 눈이 예쁜 편이군.’
고전적인 파란 눈은 아니지만 봄의 새싹 같은 녹색 눈은 그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쾌락으로 잔뜩 물먹은 눈을 보며 안으면 제법 돋는 맛이 있을 것 같다. 흠 좋아, 좋아. 그는 흐뭇해졌다. 적어도 체격 쪽보단 그의 취향이 맞는 것이 등장했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저 베일 속 얼굴은 어떨까?
“하하하…. 제수씨는 생각보다 말이 없으시군요. 이 녀석과 어떻게 만난 건지 더욱 궁금해지네요. 제 사촌이 좋은 녀석이긴 하지만 말주변이 없어서 말입니다.”
침묵하는 렉시를 향해 버나드가 은근히 미소를 흘린다.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가 코치여도 이상함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옆에 있는 로메인의 얼굴이 슬슬 떨떠름해졌다. 느끼한 웃음이 슬슬 신경에 거슬린다. 사실 그가 기분이 나쁜 건 강제로 깨진 달콤한 분위기에, 남자가 멋대로 렉시를 훑어보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지?
“공자, 저야 상관이 없습니다만 이분은 순진한 분입니다. 초면에 너무 그렇게 놀리지 말아 주십시오.”
“으응? 놀리다니?”
“어쨌거나 처음 만난 자리 아닙니까. 부담스러운 질문은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봐, 로메인. 나는 정말로 궁금해서 그랬을 뿐이야. 부담이라니? 난 단지 새로 내 친척이 될 분이 오셔서 인사를 했을 뿐이야. 난데없이 자네가 약혼한다고 나서면 누구라도 할 질문 아닌가. 이거 참 서운하군.”
실로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자세였다. 하지만 이런 공작에 있어서 버나드는 로메인보다 나았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걸 안 그는 일부러 앞부분은 작게, 뒷부분은 크게 말했던 것이다. 사실 맨 처음 친근하게 대한 인사도 이것을 위한 공작이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로메인이 버나드에게 퍽 야박하게 굴었노라 착각했다.
“그래, 어쨌거나 공적인 자리 아닌가. 저렇게 사람을 무안 줘선 안 되는 거지.”
“친인척 간에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어차피 만날 사람 아닌가.”
약간 뜨뜻미지근해진 사람들의 눈총 속에서 버나드는 일부러 흐릿하게 미소했다.
“그간 나와 자네 사이는 좋지 않았지. 그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로메인, 내가 아무리 그래도 경사를 앞둔 사람에게 해 될 일을 하겠나?”
“…허나.”
웅성대는 사람들 소리에 로메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묘하게 저쪽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보지 않은 사이 상대는 조금 더 교활해진 모양이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가 다시금 한마디 하려고 하던 그때였다.
“로메인 경은 제가 걱정되어 한 말이실 겁니다. 제가 너무 당황해하여 하신 말이니, 공께선 너무 노여워 말아 주세요.”
렉시였다. 버나드는 눈을 크게 떴다. 아까까지 로메인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자가 남자를 헤치고 앞으로 왔다. 이대로 로메인을 몰아가려 했었는데 설마 당사자가 나설 줄은 생각지 못했다. 버나드는 당황했다.
“제가 사실 보기보다 …수줍음을 많이 탑니다. 공께서 물어보신 것은 아무래도 조금 사적인 일이지 않습니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거기다 제가 로메인 경과 약혼 발표를 하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 친척 될 분과 깊은 대화를 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랍니다. 이 점을 보아 공께서 부디 널리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크, 으흠.”
바르고 곧은 태도, 청아하고 맑은 음색.
렉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방금 전 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끈 탓에 들은 자가 제법 됐다. 로메인의 태도에 눈을 찌푸리던 사람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렇지, 약혼자가 수줍다면 저렇게 나서도 무리한 일은 아니지. 순식간에 바뀌는 평가에 버나드는 기가 찬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버나드 공자에 대해선 여러모로 많이 들은 바가 있답니다. 무척 훌륭하신 분이라고 들었지요. 늘 어떤 분인가 궁금했는데,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사실 제가 로메인 경과 약혼을 급하게 한 터라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답니다. 헌데 이렇게 절 반겨 주시는 공자를 보니 제 걱정이 참 쓸데없었다는 걸 깨닫게 되네요. 이토록 저를 반겨 주시다니 … 공께선 참 마음이 넓으시군요.”
하고 방긋 웃는 렉시의 말에 그만 흐물흐물 녹고 말았다. 입에 발린 소리인 걸 알아도 자기 칭찬 싫어하는 사람이란 없다. 거기다 버나드, 그는 사실 여자들의 칭찬에 무척 약한 남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다, 당차다!’
버나드는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진 지위와 무력이 워낙 대단하니 여자들이 줄을 잇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는 좀 당찬 여자를 좋아했다. 헌데 지위가 지위다 보니 그가 만나는 여인들은 수동적인 여자들이 대부분.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맞서는 여성이란 생전 처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알현실에서도 조금 그런 면모가 있었지.
산뜻한 충격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구나, 이런 매력에 빠졌구나!’
로메인이 대체 어떤 매력에 빠졌나 했더니 이것이었나? 실로 깊은 착각이었으나 그는 진지했다. 버나드의 눈동자가 맹렬하게 타오른다. 렉시는 그걸 보며 살짝 눈길을 떨어뜨렸다.
“역시, 화가 많이 나신 거군요.”
버나드는 펄쩍 뛰었다.
“화는 무슨! 제수씨, 전혀 화나지 않았습니다.”
버나드는 성큼 다가가 렉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뒤에서 보고 있던 로메인이 놀라 다가왔으나 렉시가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로메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버나드는 싱글거리면서 렉시의 손을 만지작댔다.
“제수씨는 모르시겠지만 그래도 제가 저놈과 한때 퍽 친했답니다. 물론 요 몇 년간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래도 사촌 아닙니까. 물론 기분이 상하긴 했습니다만, 이 버나드. 농 가지고 진지하게 화내는 그런 놈은 아닙니다.”
“그럼…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용서. 순간 버나드의 눈이 번뜩 빛났다.
“용서라고 할 만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만…. 대신 저와 춤 한번 춰 주시겠습니까?”
“…춤이요?”
“별것 아닙니다. 그저 당신과 제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나 할까요.”
누가 들어도 개수작에 개소리였다.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걸 보여 주는 방식이 꼭 춤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이 자리가 약혼을 발표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고로 그가 첫 춤을 춘다면 로메인과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저, 죄송합니다만….”
렉시가 웃으며 거절하려 했지만 버나드는 싱긋 웃으며 렉시를 잡아끌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이어짐이었다. 자고로 여자란 선수 필승, 일단 시작하면 뭐든 장땡인 법. 그는 악단을 향해 손짓하며 렉시를 플로어로 끌고 갔다. 실로 창졸지간 벌어진 일이라 렉시도 로메인도 반응이 늦었다. 대경한 렉시가 작게 소리쳤다.
“공자!”
“아아, 이런 실수를. 제가 무심결에 당신을 그만 끌고 왔군요.”
제가 이런 일에 거절을 당해 본 일이 없어서.
싱그럽게 웃는 버나드의 모습 뒤로 악단의 왈츠가 시작됐다. 버나드는 솜씨 좋게 렉시를 플로어 중앙으로 데려가 홀드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춤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진 난입하지 못하는 것이 사교계의 룰. 게다가 이 춤은 이 연회의 첫 춤으로, 연회를 여는 춤은 방해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빌어먹을.”
로메인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이를 아득 갈고 자신을 막은 자를 노려보았다. 로메인의 푸른 눈동자에서 불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노여움을 감추지 않은 채 남자를 응시했다.
“…기레스 백작. 이게 무슨 짓이지?”
“오랜만이야, 로메인 경.”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백작! 대관절 무슨 꿍꿍이인가?”
“뭐, 글쎄. 이 연회를 수호하기 위한 처절한 몸짓?”
“…뭐?”
기레스 백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주변을 살피다 시의적절하게 막은 탓에 버나드를 잡지 못한 로메인의 분노가 백작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조금쯤 움찔했겠지만, 지금은 글쎄…. 삼 년간 자리를 비운 허수아비에게 겁먹을 정도로 그가 약하진 않아서. 백작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뭐 그리고, 나는 공비 전하를 모시고 있으니 그분의 뜻에 따를밖에.”
“공비 전하라고?”
“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돌아왔으니 우리도 그에 맞는 선물은 줘야 하지 않겠어? 뭐 지금은 고작 첫 춤이긴 하지만….”
“…네놈!”
“좋은 표정을 하라고, 로메인. 삼 년간 우리도 놀지는 않았으니 말이야.”
모인 이들 중 반은 우리 쪽이란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여기서 난동 부려 봐야 우리 쪽에 이득이란 말이지. 백작의 말에 로메인은 이를 악물었다. 홀의 중앙에서 버나드의 손에 이끌린 렉시가 불편한 기색으로 그의 몸짓을 따라 춤을 시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궤적을 따라가는 로메인의 눈이 달군 쇠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렉시는 당황한 채 손을 빼려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상대의 악력은 거세지기만 했다. 렉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놓아주십시오, 공자. 이게 대체 무슨 무례입니까?”
“곧 친척이 될 사이 아닙니까.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렉시는 입을 벌렸다. 누가 봐도 괜찮지도 않고, 절대 괜찮을 리도 없다. 실제로 이 둘이 이러는 걸 보는 사람들은 지금 눈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허나 버나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움직였다. 맘에 드는 여자는 무조건 수집하고 보는 버나드의 뇌엔 이미 이성은 없었던 것이다. 렉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이 천둥벌거숭이를 뭐라고 하고 떼어 놔야 하는가.
“공자, 놓아주십시오. 저는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오, 그렇습니까? 의외로군요…. 약혼자와도 춘 적이 없겠군요?”
“예. 그러니까 놓아주십, 이, 이봐요?”렉시는 자신의 허리를 잡아 오는 버나드의 손에 기겁했다. 하지만 한쪽 손을 잡은 채 허리를 더듬는 바람둥이의 마수란 진실로 무서운 것이었다. 대체 왜 빠져나가려는 몸이 안으로 더 파고드는 것인가. 렉시는 기함했다.
“그거 아십니까? 원래 춤이란 건 일정한 격식이 없었습니다. 그저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춤의 기원이었지요.”
“갑자기 무슨…!”
“그러니 춤을 모른다고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대는 그냥 나에게 맞추면 되니까요.”
땅, 피아노의 시작음과 함께 버나드가 발을 뗐다. 그는 일부러 몸을 딱 붙이고 렉시를 이끌었다. 이렇게 하면 싫어도 상대의 발을 따라가야 한다.
“공, 공자!”
“쉿, 자 따라와 보십시오. 어렵지 않다니까?”
버나드가 스텝을 밟을 때마다 렉시는 허우적댔다. 농담이 아니고, 그는 정말로 춤을 못 춘다. 애초 사교계에 나선 적도 없으니 춤을 춰 봤을 리가 없는 것이다.
“너… 넘어집니다!”
“하하하, 귀여우시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온갖 여자를 섭렵하신 바람둥이는 춤 솜씨마저 뛰어났다. 렉시가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는 자태가 춤처럼 보일 정도로 버나드의 춤 기술은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렉시는 땀을 흘렸다.
‘이자, 미쳤나? 갑자기 이게 무슨!’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싶어 나섰더니 이게 무슨 횡액인가.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데 도무지 놔줄 기미가 아니었다. 따각따각 발을 옮길 때마다 사각대는 옷자락이 다리에 감기고, 우연인 듯 스치는 무릎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허리를 워낙에 딱 잡고 있는 통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아니 무슨 춤이 이렇게 딱 붙어? 렉시는 얼굴이 불타오를 것 같았다.
“거보십시오, 잘하시는군요. 생각보다 춤에 소질이 있으십니다?”
“이거나 놔주십시오, 버나드 공자. 이게 대체 …저는 당신의 사촌과 결혼할 몸입니다. 이, 이건 정말 너무… 너무 난잡하잖습니까?!”
베일 너머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버나드는 폭소했다. 아아, 이럴 수가, 이렇게 귀엽다니!
“하하하!”
버나드는 싱글거렸다.
“과연, 이래서야 저놈을 멍청하다고 욕 못 하겠는데. 남자 홀리는 솜씨가 그대, 아주 제법이야?”
“…뭐요? 당신 지금…!”
렉시의 눈이 위로 치솟았다. 갑작스레 어투까지 존대에서 하대로 바뀌었다. 묘한 웃음이 버나드의 입가를 가로질렀다. 그는 뾰족하게 솟은 눈동자를 핥듯이 바라보며 응큼한 미소를 흘렸다.
“과격함 속의 순진함이라. 그래, 아주 도발적이야. 이 정도나 되니까 저런 벽창호를 홀린 것이겠지. 아주 마음에 들어.”
“뭐, 뭐?”
“왜, 속이 들켜 놀랐나? 허나 걱정 마, 나는 그대 같은 사람이 좋거든. 당차고 과감하고 도전적인…. 그런 야망 넘치는 여자는 늘 날 매혹시키지.”
휙, 버나드가 렉시를 뒤로 눕힌다. 렉시는 헉 하고 숨을 내뱉다 이를 악물었다. 미친,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그는 파르르 떨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질 모르겠구나. 도발? 야망? 여자?!’
이것은 자신을 모욕하기 위한 작태인가. 설마, 이 약혼을 파혼시키려고 일부러 그러나? 렉시는 입술을 짓씹으며 버나드를 노려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버나드 공자. 지금 저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아, 눈치챈 사람이 내가 처음인가? 하지만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그 정도야 귀여운 수준 아닌가?”
휙, 눕혀졌던 몸이 다시 위로 올라온다. 버나드는 속삭였다.
“공비가 되고자 저 녀석을 유혹한 건 꽤 괜찮은 선택이었어. 덕분에 나는 이 지지부진한 쟁탈전을 이어가게 됐지만 말야.”
“…공비라니요? 전 그런 의도로 로메인 경과 만난 게 아닙니다!”
“그대를 탓하는 게 아니야. 이미 벌어진 일로 화를 낼 만큼 나는 졸렬하지 않다고.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대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기 위해서야. 그대가 깜박한 다른 선택지를 돌이켜 봐 달라는 거지.”
다른 선택지?
“그대, 약혼자를 바꿔 보지 않겠나? 물론 상대는 나. 조건으로만 따지자면 내 쪽이 저놈보다 나을 텐데.”
“…?”
렉시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당신도 저런 재미없는 사내보다는 내가 나을 거야. 당신 같은 여자와 춤 한번 안 춘 놈이야. 그런 자에게 무작정 인생을 맡기는 건 좀 무모하단 생각 안 드나?”
“…뭐, 뭐라고요?!”
이게 미쳤나. 렉시가 경악하는 걸 본 버나드는 느른하게 웃었다. 악덕을 뒤에 감춘 검은 미소가 소름 끼치게 징그러웠다.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설마, 농담이라니. 내가 그렇게 실없어 보였나? 원한다면 계약서라도 써 줄 수 있는데.”
“…맙소사! 공자는 사람들의 비난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아직 약혼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발표한 것 아닌가?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법이야. 물론 처음엔 말이야 좀 있겠지. 하지만 모두 내가 공작이 되면 다 수그러들 비난이야. 그 잠깐의 시간도 감내 못 할까?”
말문이 막힌다. 렉시는 간만에 질린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물론, 렉시도 저쪽이 이 약혼을 순순히 봐 넘기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저들도 머리가 있다면 어떻게든 약혼을 파혼시키려고 하겠지. 기회를 보아 무언가 하리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타파하려 하다니 실로 생각지도 못했다.
이 새끼 정말로 창의적인 진상이구나…! 렉시는 헛웃음을 켰다.
“저는 그런 비난 감내 못 합니다. 할 생각도 없구요. 방금 일은 못 들은 셈 치겠습니다. 그러니 이만 절 놓아주세요 공자.”
거절은 단호했다. 버나드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렉시와 함께 몸을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덥석 받아들이긴 좀 곤란하다는 건가?”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저는 이미 거절했습니다.”
“하긴, 무작정 받아들이면 그것도 좀 그렇지. 한 세 번 정도 더 권하면 될까?”
“…….”
렉시는 침묵했다. 과연 진상은 이렇게 말해도 떨어지지 않으니 진상이란 건가.
“…공자, 아무리 권하셔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대체 왜 제가 로메인 경과 파혼하고 경과 혼인해야 합니까.”
“뭐 내 제의가 뜻밖이겠지. 무슨 생각인지 의심스럽기도 할 거고. 하지만 딱히 나쁠 건 없지 않나? 로메인 저 녀석은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란 말이야. 그런 불행한 혼인을 감내할 각오는 되어 있어?”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시군요. 로메인 경에게 좋지 않은 소문이 있다는 건 저도 들어 압니다. 허나 그것은 뜬소문일 뿐입니다!”
“뜬소문이긴? 내 앞에 증거가 있는데.”
“…증거라니요?”
“그대, 저놈과 잔 적도 없잖아?”
노골적인 말. 렉시는 기함했다.
“뭐, 무, 무슨, 무슨 그런!”
“봐, 내 말이 맞지? 나 원 참, 반응이 이렇게 솔직해서야….”
버나드가 씩 웃었다. 실로 알 만하단 투였다.
“아니라고 할 생각은 마. 함께 밤을 보낸 자들은 분위기부터가 다르니까. 한눈에 알았지, 당신은 저자와 성적인 관계를 한 적이 없다는 걸. 설마 모를 줄 알았나?”
“그, 그게, 그것은, 그러니까…!”
사실 여기서는 거짓말이라도 해야 한다. 너 참 보는 눈이 없다거나 사실 우리는 매우 찐한 사이라거나 너 참 농담도 잘하는구나 기타 등등등. 하지만 렉시에게 이건 매우 무리였다. 비경험자가 어설프게 진도 나간 티를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렉시의 음성은 점점 기어들어 갔다.
“평생 과부처럼 살 셈이라면 뭐 저 녀석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당신 같은 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나? 고행이 취미야?”
버나드는 쯧쯧 혀를 찼다.
“나도 물론 순수하게 당신에게 이런 제의를 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이런 말도 안 했을걸. 안타까워서 그래, 아까워서. 당신처럼 매력적인 사람이 왜 그래야 하지? 인생이 아깝지 않나?”
악단이 조금씩 음률을 바꾼다. 버나드는 느릿하게 발을 끌며 스텝을 밟아 갔다. 허둥지둥 따라가는 렉시의 눈앞은 새까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말 못한다 소리를 들어 본 적 없건만…. 여, 여기선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무리 옆에서 남의 연애를 봐 왔던들 이론과 실제의 차이란 이토록이나 크다. 렉시는 고민하다 간신히 대답했다.
“…로메인 경은 좋은 분입니다.”
“그대는 참 너그러운 사람이로군. 하지만 좋은 사람과 좋은 남편은 천지 차이야. 거기다 그대, 인생은 짧아. 그 짧은 인생을 고자와 살 거야? 진짜?”
“고, 고자 아니거든요! 그분은 점잖아서 그런 겁니다!”
미치겠다. 렉시는 그야말로 새빨개졌다. 버나드는 그 소리를 들으며 큭큭 웃기만 했다.
“그대가 그렇게 믿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남자는 다 늑대야. 맘에 드는 이가 있다면 손대지 않고는 못 배긴단 말야.”
그 말을 하며 은근히 허리를 쓰다듬는 버나드는 진심으로 느끼했다. 소름이 오싹 돋는다. 렉시는 진저리치며 버나드를 밀어냈다.
“그간 로메인 경이 결벽한 생활을 하신 건 압니다. 하지만 그건 그분이 그간 마음에 둔 분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앞의 말은 실제로 로메인이 한 말이다. 렉시는 기억력을 총동원해 후작과 로메인의 대화 내용을 복기해 냈다.
“경도 그렇지만… 저 역시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그, 그래서 제가 경께 순서를 지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순서?”
“네, 순서요.”
렉시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다. 렉시가 말을 할 때마다 버나드의 얼굴이 기괴망측하게 변해 갔기 때문이다. 렉시의 말을 다 들은 버나드의 얼굴은 그야말로 신기와 경악과 놀라움과 당혹의 어드메였다. 그가 말했다.
“이봐 그대. …설마, 정말로 처녀였나?”
렉시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니 얘는 왜 아까부터 자꾸 날 여자 취급해?
“…저 처녀 아닙니다. 그보다 저를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부르시는 겁니까? 듣기 거북합니다. 하지 말아 주세요.”
렉시가 팽하니 시선을 회피한다. 버나드는 그런 렉시를 홀린 듯보다 침을 삼켰다. 맙소사.
“그렇군,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거였군. 그래, 그러니까 그런 무지막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거야.”
상황이 재미있어졌다. 버나드의 눈이 번뜩였다.
“남작, 순진한 그대를 위해 내가 진실을 알려 주지. 그대는 저 교활한 놈에게 속은 거야.”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래 봤자 저는 마음 바꾸지 않습니다, 공자.”
“아니, 내 말이 맞아. 저놈은 그대가 처녀인 걸 알고 그대를 속인 거야. 사지 멀쩡한 남자에게 순서를 지키라고? 그래서 그걸 들어줬다라. 맙소사, 그대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버나드의 말에 렉시는 눈을 치켜떴다. 세상에 너같이 부도덕한 사람만 있는 줄 아나? 물론 순서 어쩌고는 자기 창작이긴 하다. 하지만 로메인 경의 인격을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로메인 경의 고매한 인격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이 모두가 다 공자같이 허랑방탕하지는 않습니다.”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남자의 천성은 사냥꾼이다. 맘에 드는 여자를 발견하면 어떻게든 닿아 사냥하고자 하는 것이 남자의 본성. 막바지로 향하는 무도곡을 들으며, 버나드는 슬슬 이 순진한 여인에게 진짜 남자를 알려 주기로 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렉시를 내려다봤다.
“그대가 로메인을 만난 지 얼마인지는 잘 몰라. 하지만 진정한 남자라면 맘에 드는 여자를 두고 무심히 있지 못해. 남자는 늑대고, 사냥꾼이야. 특히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그 사냥본능이 깨어난단 말야. 숨기면 숨길수록, 피하면 피할수록….”
“공자가 세상 모든 남자를 다 안다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엔 여러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대, 한 가지 알아 둘 게 있어. 사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건 이거거든.”
“…그게 뭐죠?”
“적어도, 그대 앞의 이 나는 늑대라는 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버나드가 렉시를 뒤로 눕힌다. 갑자기 바뀐 자세에 밸런스가 무너졌다. 깜짝 놀란 렉시가 버나드의 가슴을 잡자 그는 깊이 몸을 숙여 렉시의 팔을 사이에 가뒀다. 버나드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스쳤다.
“말했지? 숨기면 숨길수록 앗고 싶다고.”
“…!”
얼굴을 가린 베일에 버나드의 손이 닿는다. 렉시는 당혹해하며 버나드를 밀어냈다. 하지만 자세가 무너진 상황에서 힘을 쓰는 것은 힘들다. 바르작대는 여인의 다급한 눈동자. 렉시가 외쳤다.
“놔, 놔두세요. 공자, 안 됩니다!”
“―늦었어, 그대.”
나지막하게 웃는 음성. 버나드의 눈이 번뜩인다. 그리고 동시에 툭, 베일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아, 이럴 수가. 얼굴을 덮는 천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렉시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크게 벌어졌다.
*****
렉시가 나타났을 때, 그를 본 사람들은 저마다 갖가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돈이 많나.’
‘집안이 좋나?’
‘신비주의 전략인가.’
하지만 생각이 저마다 다른 가운데 모두 똑같이 생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어쨌거나 얼굴은 별론가 보네.’
저 로메인 경이 데리고 온 상대니까 뭔가 특별한 것은 있겠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놀라운 것일 거야. 하지만 다들 다른 걸 생각했지 그걸 외모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선택을 한다. 예쁜 얼굴을 가졌으면 왜 굳이 그걸 왜 가린단 말인가? 본래 장점이란 드러내어 자랑하는 것이 보통인 법. 특히 미인은 자기 아름다움을 내보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기의 미인으로 유명한 레아누 황녀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현 황제의 말이 아니더라도 굳이 안 꾸며도 될 자리에 화려하게 꾸미고 나서는 그녀의 명언은 이것이다.
예쁘다는 소리? 짜릿해, 늘 새로워, 예쁜 게 최고야!
본래 아름다움에 있어서 겸손함이란 없다. 그들은 철저히 일반인의 관점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했었다.
“…….”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저건 대체 뭘까?
신이 빚어 낸 것 같은 곡선의 얼굴. 이목구비는 그림보다 더 완벽하고, 피부는 희다 못해 빛이 난다. 최상급의 옥보다 더 투명한 피부 위로 스치는 것은 장미수를 뿌린 것 같은 홍조와, 꽃잎을 떨어트린 것 같은 붉은 입술.
코끝은 누가 일부러 만들래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곱고, 커다란 눈동자는 겨울눈 위에서 솟아나는 여린 잎처럼 선명하다. 눈썹은 누가 그리려도 못 그릴 정도로 날렵하고 피부엔 심지어 그 흔한 점 하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로 젖힌 목은 꺾일 듯 가녀리고, 어깨선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흰 목덜미는 어쩐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어렴풋했다. 암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칼은 어두웠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마저도 아름답다.
진정한 미인이란 무엇을 걸쳐도 아름답다. 사람들은 깨달았다. 위에서 비치는 샹들리에의 빛이 렉시의 위로 떨어지는 순간, 그 주변으로 어리는 후광을 보며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졌다.
환한 빛 속에 잠긴 렉시는 마치 그 속에서 태어난 천사 같았다. 손을 뻗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날아갈 것 같은 그러한 아름다움. 신이 실수로 떨어트린 아름다움의 한 조각처럼.
사람들은 생각했다.
저게 사람일까?
엉뚱하나 실로 합당한 의심이었다. 사람인 이상 모난 구석이 한 군데라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베일을 벗은 렉시에게 하자란 없었다. 일부러 찾고 싶어도 하자는 고사하고 그 아름다움에 끌리는 자신이 있는 것이다.
저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완벽한 아름다움의 이데아였다. 세상에 신이 공들여 빚은 것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저 이일 것이다. 단언할 수 있었다.
누군가 신음을 내뱉었다.
“신이여….”
홀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미 끝나 있었다. 예정된 무도곡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그랬다. 음을 연주하는 악단들도 연주를 멈추고 한 방향만 보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을 탓할 자들조차 모두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처럼 렉시의 외모는 이들에게 거대한 충격이었다. 드넓은 홀 안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다 가타부타 말 없는 것만 봐도 그랬다.
침묵은 많은 것을 함의했다.
황홀, 충격, 경악, 흥분, 불신, 질투, 경탄, 탐욕, 욕망….
너 나 할 것 없었다. 모두 다 똑같았다. 그리고 모두 뼛속 깊이 절감했다. 왜 로메인이 저 이의 얼굴을 가렸는지를….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워서 말을 잊지 못하게 하는 저 미모는 사람들의 이성을 허물었다. 비현실적인 미모를 본 충격은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로 살며 쌓아 올린 도덕과 법률을 한순간에 까부쉈다.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상대를 소유하고 함락하고 싶은 본능. 심지어 남녀노소 불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로메인은 참 대담한 결정을 한 셈이었다. 아무리 가렸다고 해도 저 미모를 사람들 앞에 내어놓는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그 외모의 소유자는 렉시고, 로메인은 당사자가 아닌 약혼자의 신분. 따라서 결정을 했다면 그건 아마도 렉시가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로메인의 입장이라면, 그들은 결사적으로 약혼자의 외유를 막았다.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온갖 사유를 들어 홀로 볼 것이다. 필요하다면 감금도 불사하고 온갖 불법적인 짓을 저지르리라. 상대가 싫어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것을 홀로 차지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본성 아닌가?
‘아,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는가.’
‘사람이 맞나? 그렇지? 맞겠지?’
‘부럽다… 로메인 경이 부럽다. 너무 부러워서 미워!’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들이 렉시를 응시한다. 하지만 단지 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다. 보는 눈이 많아서다. 만일 여기가 공식 석상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좀 달랐으리라. 현재 이성이 간당간당한 몇몇은 이미 달려가 렉시의 옷 한 자락 잡아 보고자 별의별 추태를 다 부렸을 테니 말이다.
‘위험한 미모야. 무서울 정도야!’
귀족들이 체면을 버리게 하는 미모라니, 이렇게 무서울 데가! 사람들은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이것은 그들이 그나마 렉시를 멀리서 보았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것을. 그들이 약간이나마 렉시를 가까이서 보았다면 그들은 일단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싶겠으나 본래 아름다운 것은 가까이 볼수록 사람을 홀리는 법. 실제로 이 불가해한 미모를 코앞에서 맞닥뜨린 한 사람은 현재 생각이란 것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
풀린 눈, 헤 벌린 입, 제멋대로 풀어진 얼굴.
아까의 날카롭고 야비하기까지 하던 사람은 현재 한 마리 바보였다. 가까운 곳에서 정면으로 렉시의 얼굴을 본 순간, 그는 황홀과 경악과 혼란 등의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것이다. 온갖 감정들이 뒤섞인 그의 얼굴은 어떻게 보면 공포를 목도한 것처럼 보였다. 본시 충격과 공포란 한 끗 차이긴 하니, 뭐 나름 이해 가는 상황이긴 했다.
어쨌거나 이렇게 심신상실이 된 버나드 때문에 렉시는 무척 곤란했다. 얼굴을 드러낸 것도 그렇고, 이렇게 서서 있는 것도 힘들다. 이렇게 선 채 굳을 거면 힘이나 뺄 일이지 뭐 하자고 이렇게 날 꽉 잡고 있는담? 렉시는 난감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자 어디서 오오오 하는 감탄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탄성이었다.
“오오….”
“찌푸린 것도 아름답다니!”
누군가가 외쳤다. 렉시는 등 뒤로 땀이 흘렀다. 실로 가슴이 써늘해지는 외침이었다.
‘일 났다.’
그것도 그냥 일이 아니라 아주 큰일이다.
렉시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슬금슬금 눈을 돌리니 자길 보고 입을 헤 벌리는 사람 떼거지가 보인다. 대체 저게 몇 명이냐. 뒤늦게 이 자리가 어떤 자린지 떠올린 렉시는 순간 다리가 풀릴 뻔했다.
‘미쳤다. 미쳤어!’
이 똘추의 막무가내 때문에 순간 깜박했다. 여기는 공작의 홀, 귀족들 앞에서 자기소개하던 장소. 참고로 여기 군집한 귀족들은 그냥 귀족들이 아니다. 다들 어디서 한가락씩은 하는 영주들의 모임이었다.
‘패트릭 하나도 버거운데 수백이라니…!’
몇 년간 당한 스토킹이다. 렉시는 자신의 얼굴이 불러일으키는 참사에 아주 익숙했다. 심지어 패턴도 외웠다.
아마 저들은 한동안 멍청하게 자기 얼굴을 구경하겠지. 그러다 슬슬 정신을 차리기 시작할 거다. 그럼 이제 자기의 불행은 시작이었다. 지옥의 스토커 군대가 나타날 테니 말이다. 귀족쯤 되면 어지간한 욕망은 자제하지 않는다.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실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렉시는 아직까지 굳어 있는 버나드를 성난 눈초리로 쏘아봤다. 이 돌아 버린 자식 때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일단 여기서 피하자.’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약혼 발표고 지랄이고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렉시는 버나드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허나 어찌나 단단히 끌어안았는지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작게 입술을 깨무는 렉시는 문득 휙 하는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몸이 가뿐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누군가 이를 갈며 속삭였다.
“돕겠습니다.”
“로메인 경!”
로메인은 버나드의 품에 있는 렉시를 가볍게 빼냈다. 한참 끙끙대던 렉시가 순간 무색할 정도로 가뿐한 몸놀림이었다. 렉시는 로메인의 품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천의 시선이 쏟아지는 와중인데도, 그가 오자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됐다. 마치 수만의 대군이 자신의 뒤에 있는 것 같은 든든함. 렉시는 로메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을 가다듬었다. 짧은 위안과 안도감, 그리고 정체 모를 감정이 안온하게 몸을 감싼다. 버나드가 만졌을 때 느낀 소름 돋던 불쾌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예?”
“제가 어리석어 당신이 이렇게 곤란에 빠졌습니다. 제가 옆에서 보고 있었는데도….”
이게 무슨 소리람. 고개를 떼고 남자를 본 렉시는 순간 흠칫했다. 그를 내려다보는 로메인의 벽안이 무척이나 침중했다. 그는 이를 갈며 자신을 탓했다.
“어쩜 이렇게 한심한지…. 당신을 지키겠다고 했는데.”
“경, 그건….”
로메인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에스코트하는 약혼자를 두 눈 뜨고 빼앗기다니. 그 어떤 기사가 이런 수치를 당한단 말인가. 누군가 막았다지만 그건 사실 변명이다. 그 무엇보다 용서되지 않는 것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분명 자신은 버나드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렉시를 만나면 분명 무언가 획책할 성격이라는 걸.
헌데 왜 나는 왜 두 사람이 춤을 추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던 걸까? 일이 이렇게 되기 전 그가 가서 렉시를 데려왔다면 렉시가 이렇게 얼굴을 노출할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이렇게 로메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건 그가 어리석다기보다 습관에 졌다고 해야 함이 옳았다. 본래 원리 원칙을 금과옥조 삼는 로메인이다. 그런 그가 이미 시작된 춤이 끝나기 전 끼어들 생각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왜냐.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자기의 원칙을 고수하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그 이상 벗어난 행동을 잘 하지 못한다. 딱딱한 사상을 가진 자가 유연해지기 위해선 거의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고행을 겪어야 가능한 것. 그런 의미에서 로메인은 이번이 그 첫 고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단에 목맨 나머지 목적을 잃었구나.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누군가 그랬다. 너 그렇게 살다가 크게 실수할 날이 있을 거라고. 누구였는지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허나 그는 그게 그냥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더러 융통성 없다고 욕한 게 어디 한둘이던가?
허나 오늘 이 일을 겪고 보니 자기가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한 자였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 사는 데 있어 절대라는 것은 없다. 예의와 격식을 지킨답시고 정작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지 못하다니…. 아, 이 얼마나 통렬한 주객전도인가.
이제 보니 그건 헛소리가 아니라 예언이었다.
그는 말간 얼굴로 자신을 보는 렉시를 보다 이를 악물었다.
‘그래, 내가 너무 안이했던 것이다. 지킬 것이 생겼으면 응당 과거의 생활을 벗어 던졌어야 하는 것을….’
로메인의 가슴 속에 큰 풍랑이 인다. 큰 풍랑이었다.
원칙주의자가 자기의 원칙을 버릴 생각을 할 정도의 거대한 폭풍.
이에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로메인을 보던 렉시는 고개를 저었다. 사과라니. 여기서 사과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저 똘추지 로메인은 아니었다. 거기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않은가!
“경, 사과건 뭐건 일단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우리 지금 이 자리를 떠야 해요.”
로메인은 모르지만 렉시는 알았다. 조금 전 둘이 붙을 때부터 시선의 온도가 변했다는 걸…. 아까까지만 해도 약간은 찬탄이 섞였던 감정들이 죄다 사라지고 없었다. 렉시라는 예쁜 떡이 남의 떡인 걸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들을 향한 시선은 현재 모두 질투와 질시와 욕망 덩어리뿐이었다.
로메인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래도 됩니까? 하지만 아직 약혼 발표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어쩌다 보니 대충 목적은 달성했네요.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렉시는 버나드를 짜증스럽게 쏘아봤다. 렉시를 빼앗기고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아직도 넋이 나간 채였다. 그 멍청한 얼굴을 보니 화가 배가 되는 기분이다. 렉시는 고개를 휙 돌렸다.
“저 못된 놈 때문에 제 얼굴이 들통났으니…. 덕분에 경의 약혼 소식은 제국 전역으로 퍼질 거예요. 물론 방점은 약혼이 아니라 제 얼굴이겠지만요.”
렉시는 혀를 찼다. 솔직히 제국 전역이 문젠가. 산 넘고 물 건너 외국까지 퍼질지도 모른다. 정치 관련 소식은 몰라도 미인 관련 가십은 시골 똥개도 관심 가지는 세상. 더더군다나 그 미인의 상대가 고자로 유명했던 그 로메인 아닌가? 이건 세상사에 둔감한 성직자라도 궁금해서 자리 박차고 나올 만한 소문이었다.
여기서 그나마 다행인 건 딱 하나였다. 설령 공작이 산골 벽지에 있어도 로메인의 소식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됐다는 것. 렉시의 단호한 말에 로메인의 얼굴이 퍼뜩 굳었다.
“…그, 그럴 수가.”
렉시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됐어요, 경. 솔직히 말해서 각오하긴 했어요. 어떻게든 한 번쯤은 겪을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생각보다 시기가 조금 빠르게 오긴 했지만….”
잠시 미간을 찌푸린 렉시는 로메인을 툭툭 건드렸다.
“그것보다 어서 자리를 떠요. 제가 이런 일을 몇 번 겪어 봐서 아는데 여기서 더 미적거리다간 아예 도망도 못 가는 수가 있어요.”
도망의 전문가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그간 렉시가 온갖 스토커를 떼 놓을 수 있었던 비결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렉시의 말에 로메인은 얼굴을 굳혔다.
“남작령으로 모실까요?”
“저도 맘 같아선 그러고 싶군요. 하지만 지금 거길 어떻게 가겠어요? 후계 일이 해결될 때까진 머물러야지.”
어쨌거나 그는 후작과 약속했다. 적어도 공작이 올 때까진 버티고 있겠다고 말이다. 거기다 렉시는 아직 지참금도 못 받은 상태였다. 이렇게 얼굴까지 팔렸는데 목적한 돈도 못 받으면 그는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것이다.
그보다…. 렉시는 후작이 서 있는 쪽을 슬쩍 봤다. 안 그래도 푹 꺼진 얼굴은 놀라다 못해 기절 직전이었다. 하지만 놀라 해쓱한 얼굴에 자신을 향한 욕망은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천만다행이었다. 렉시는 조금 안심했다.
“다행히 전하는 그럭저럭 제정신이신 것 같네요. 그럼 일단 우리 방으로 가죠.”
“알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경비대장 시절 가락이 있기에 로메인은 궁 안의 지리를 잘 안다. 성 밖으로 간다면 골치 아프겠으나 성안이면 도주하는 게 쉬울 터였다. 그가 은밀히 숨겨진 통로로 렉시를 이끌고 자리를 피하려 하던 바로 그때였다.
덥석!
“자, 잠깐만!”
“앗!”
렉시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버나드가 떠나는 렉시의 옷자락을 잡아챘던 것이다. 그토록 넋이 나갔어도 눈앞에서 미인이 사라지려 하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미인에 대한 열망만큼은 가히 제국 제일이랄 만했다. 렉시는 당황해서 옷자락을 흔들었다.
“놓, 놓아요!”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잠시만!”
버나드는 절절 외치며 바닥을 기었다. 무릎을 꿇은 채 렉시의 옷을 잡고 잠깐만을 외치는 버나드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얼마나 가관이었냐면, 렉시에게 홀린 사람들의 시선이 순간 버나드를 향할 정도였다.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선 사실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자기 모습이 문젠가? 난생처음 보는 초특급 미인이 이렇게 사라지려고 하는데!
그는 당황하는 둘, 아니 렉시를 보며 외쳤다.
“그, 그대! 그대는 사람인가, 요정인가?”
렉시는 기막힌 얼굴을 했다.
“뭐요?”
“아아, 아니야. 설사 요정이라도 그대 앞에선 고개를 숙여야 할 거야. 그대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어. 첫눈에 반했어! 그대, 부디 내 사랑을 받아 줘!”
이런 미친놈! 진상 놈은 끝까지 진상이었다. 렉시는 차갑게 대꾸했다.
“아니요. 싫어요. 저리 가세요. 매우 아주 단호히 거절합니다.”
렉시는 단호히 남자를 거절했다. 툭, 거절을 듣는 남자의 손가락에서 옷자락이 빠져나가 펄럭거린다. 그 끝에서 흔들리는 버나드의 얼굴이 절망스럽게 일그러졌다. 거절이라니. 거절이라니?
“…왜, 왜? 어째서?”
“이봐요. 사랑 고백을 하면 다 받아 줘야 합니까? 전 공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걸 왜 들어줘야 하나요?”
사람이 고백하면 다 받아 줘야 하나. 상대의 마음만 마음이고 내 마음은 아무것도 아닌가? 그러나 버나드는 칼 같은 거절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재차 일어나 렉시에게 매달렸다.
“안돼. 드, 들어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어!”
그리고 다시 덥석. 이번엔 옷자락이 아니라 아예 발목이었다.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렉시가 기함하며 발을 터는 바로 그때였다.
“악!”
퍽!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버나드가 갑자기 뒤로 날아갔다. 렉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까지 뒤에 있던 남자가 눈 깜짝할 새 자기 앞에 서 있었다.
“한번 그냥 넘어가니 두 번째도 참을 거라 생각했나?”
로메인의 새파란 벽안이 푸르게 빛난다. 일렁이는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상급 기사만이 가지고 있다는 유형 투기였다.
“너, 너…!”
버나드는 얼굴을 부여잡으며 벌벌 떨었다. 갑자기 얻어맞은 것이 노여웠지만, 기사의 투기를 정면으로 맞닥뜨리니 두려운 것도 사실. 자존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휘청이는 버나드의 얼굴은 참담 그 자체였다. 로메인은 그런 버나드를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내 약혼자에게 그 더러운 손을 대지 마라, 버나드. 다음에는 주먹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내 약혼자에게 손을 댔다간 주먹이 아니라 칼이 널 상대할 거다. 이건 네놈 포함 다른 모든 이에게 하는 경고다. 알겠나?”
실로 살벌한 경고였다. 동시에, 홀이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럴 수가.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고 그들이 목도한 이 믿어지지 않는 장면을 향해 두 눈을 비볐다.
로, 로메인 경이 버나드를 …쳤어!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