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라진 공작
제국은 기본적으로 장자 상속이다. 장자, 그리고 남아 우선.
여자들은 사랑을 받긴 하지만 가문을 잇기보단 결혼해 현모양처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게 현 귀족들의 풍조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사회는 남성 중심의 사회, 그곳에서 여자들이 하는 사회생활이란 사교계의 한 틈뿐.
하지만 아주 간혹, 아주아주 간혹.
이 여자가 남성들이 가득한 사회에 편입될 때가 있다. 그것은 당해 귀족의 자손이 딸밖에 없을 경우다. 이 경우, 세습 작위를 가진 귀족이 원하면 그 딸은 여자이되 여자가 아닌 존재가 되어 가문을 이을 수 있다.
카트린느 드 플로랑, 통칭 플로랑 후작은 이 예외적인 규정을 통해 후작이 됐다. 물론 반대는 컸다.
“각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영애를 후계자로 삼으실 수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영애가 재기가 넘치다곤 하나, 후작위를 잇기엔 부족한 감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각하, 후작위를 잇는 것이 과연 영애를 위한 선택일까요? 남자들 사이에서 여린 영애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영지 경영은 차치하더라도 정치란 남자들의 영역입니다. 영애가 어떻게 거기서 버팁니까?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각하.”
이렇게 말하면 영애가 가문을 잇는 게 대단한 예외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제국엔 이미 여자가 대를 이은 선례가 있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오로지 하나, 이 가문의 염원 때문이다.
플로랑 후작가의 전신은 한 산악 왕국에 있던 자작가다. 그들이 후작가로 격상된 것은 섬기고 있던 왕가가 사르칸트에 패망한 이후였다. 왕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기회를 잡은 그들은 전쟁 특수 속에서 상당한 돈을 모아 황제의 환심을 샀다. 그리고 대륙 전쟁이 끝났을 때, 그들은 황제에게 후작위라는 자리를 얻어 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돈으로 산 것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가히 인간 승리였다.
공후백자남, 후작 위에 공작이 있으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이건 상당히 별거다. 제국의 공작은 넷이요, 그 아래 존재하는 후작가는 단 32가문뿐. 그 아래 백작 자작 포함한 귀족의 수는 줄잡아 수천이니, 정녕 어디 가서 방귀깨나 뀐다고 할 수 있는 자리 아닌가. 작은 산악 왕국에서 거대 제국의 후작가가 되었으니 그 기쁨이 오죽이나 컸을 것인가?
헌데 그렇게 죽자 살자 이룩해 낸 가문이 여자 손에 넘어가다니…. 가문의 가신들이 살 맞은 짐승처럼 파르르 떨었다.
“냉정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영지가 황도에서 먼 우리입니다. 지금에야 중앙 정치에서 저희 가문을 쳐 주고 있긴 하지만 세상사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영애가 후작위를 받고 중앙에서 밀려나면 어쩌려구요?”
“지금이 대륙 전쟁 시기랑 어디 똑같은 줄 아는가. 밀려나긴 뭐가 밀려나, 후작 자리가 무슨 땅따먹기야?”
“자리는 따먹기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영향력은 똑같습디다. 전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긴 개뿔 뭘 알아! 자네들은 내가 어디서 쭉정이 같은 놈이라도 데려와 앉혀야 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근본 없는 짓을 내게 권할 수 있지?”
“아니 누가 양자를 들이랍니까? 저희는 그냥 각하가 아직 강건하시니…! 다, 다시 자손을 보시란 이야기죠!”
기가 막힌 이야기다. 이 소리를 들을 당시 후작의 나이는 무려 예순. 자식은커녕 손주를 봐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애는 무슨 애!? 실로 파렴치한 요구에 후작은 눈을 홉떴다.
“자네들 돌았나? 헛소리는 그만하게! 설령 내가 자식을 보더라도 다음 소후작은 카트린느 그 애밖에 없어. 자네들도 그 애가 얼마나 똑 부러지는지 잘 알잖나?”
알다 뿐인가. 사실 여기 모인 가신 몇은 소후작을 시험하려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전적이 있다. 후작이 괜히 딸을 후계자 삼으려고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 이것은 이것!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압니다! 하지만 그럼 뭐 합니까? 여자잖아요!”
“…이것들이 진짜…!”
후계자를 확정하기 위한 선대 후작의 노력은 치열했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가신들 반항 역시 강경했으니 후작은 날이면 날마다 고뇌에 몸부림쳤다.
아무리 재기가 넘치고 담대해도 여자는 안 돼!
왜 안 돼! 돼!
안 돼!
성별보다는 능력, 능력보다는 성별.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이 지지부진한 대치 상황은 제국이 망해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헌데 이 둘의 대립을 끝내 준 것이 바로 프로하우스 공작이었다. 후작가의 이 상황을 풍문으로 전해 들은 그는 황제를 독대하는 자리에 소후작을 데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소후작을 크게 칭찬하니,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엔 이만한 일이 없을 것이라. 이 일로 소후작은 결국 후계자로 우뚝 서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사실 공작은 플로랑 후작가와 전연 연이 없었다는 점이다.
프로하우스 공작, 그는 오로지 선의로 후작가를 도와줬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우리 가문이 공작가와 동맹을 맺은 건 알고 있을 걸세. 사실 충성을 맹세하고 싶었네만 전하께오서 받아들이지 않으셨지. 그런 걸 원하고 한 일이 아니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입은 은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은가? 나는 무엇도 필요 없노란 전하께 약속했어. 전하께서 명하신다면 무엇이건 하겠다고 말이야.”
현재 렉시와 로메인들은 후작을 의자에 앉혀 놓고 심문을 하는 중이었다. 아까의 소요 뒤 후작은 그림자의 감시하에 철창을 열고 이들을 밖으로 빼냈다. 어차피 그 모습으론 도망할 데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그림자가 사라지질 않았던 것이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고, 또 어떠한 꿍꿍이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저런 걸 뒤에 두고 일을 도모할 멍청이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도주 의지를 꺾고 공작이 자신에게 명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허면, 이 모든 게 전하의 뜻이었다는 겁니까?”
플로랑 후작은 숨을 골랐다.
“그랬네. 정확히는, 자기 그림자가 되어 달라 하셨어. 내가 어찌 그 말을 거절하겠나?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그녀는 자신을 빙 둘러싼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작은 마석이 박힌 반지가 손에서 희미하게 반짝인다. 멀리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검은 인영의 눈 또한 빛났지만, 후작은 눈치채지 못하고 손을 내렸다.
“이게 전하가 주신 마도구야. 대체 어떻게 전하를 가장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주신 거지.”
“…대체, 언제부터…!”
로메인이 신음하자 후작은 쓰게 웃었다. 사실 이 일은 시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첫 시작은 사오 년 전이야. 나도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말이야.”
“…뭐요?”
“이게 처음이 아니란 말이야…. 일 년에 한 두어 번 정도, 나는 전하의 대리를 했네. 길어 봐야 일주일 정도라 아주 감쪽같았지. 처음엔 무서웠네만 몇 년째 들키지 않자 나도 별 대수롭지 않게 전하 대신 공작 일을 수행하게 되었고.”
“맙소사….”
로메인은 이마를 짚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것도 유분수지 이 무슨 간 부은 짓이란 말인가? 후계자도 없는 작자가 이게 무슨 막장인가. 렉시나 필립이나 감상은 별반 다르지 않아서, 모두 어이없다는 눈으로 후작을 봤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에 후작은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이번 대리 일도 그렇게 시작했네. 몇 달 전, 전하가 쓰러진 건 자네도 알고 있지?”
“…그것도 당신입니까?”
기가 찬단 대꾸였다. 후작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내가 아니라 정말 전하네. 과로로 쓰러지신 뒤, 일어나신 전하는 날 몰래 부르셨어. 아무래도 당신 대신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며 내게 대리를 명하셨지. 나는 알겠노라 했는데…. 이번은 예와 조금 달랐어. 전하께서 이번 외유는 조금 길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거든.”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땐 대략… 한 달을 말씀하셨지.”
하, 한 달? 로메인이 숨을 들이켰다.
“제정신입니까? 그걸 그냥 한다고 했단 말이오?”
“아파서 쓰러졌던 사람이 부탁하는데 그럼 그걸 거절하나? 그때 전하는 정말로 초췌했어! 물론 병문안 한 번 안 온 자네는 몰랐겠지만!”
로메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놈의 병문안! 후작은 입매를 비틀며 비쭉였다.
“거기다 전하는 성에서 좀 떠나실 필요가 있었네. 자네도 아시다시피 전하는 성격상 성에 있으면서 휴식을 취하지 못해. 일이 있으면 해결하지 않곤 못 견디는 성품 아닌가?”
“…그것은 그렇습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로메인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이 길긴 하지. 하지만 전하의 요양을 위해서라면 내 한 몸 희생해 보자. 나는 그런 생각에서 응낙한 거였네.”
“…….”
주변이 숙연해졌다. 만일 이 모든 게 진실이라면 후작은 죄가 없었다. 약간 비뚤어진 방향이긴 했지만 실로 절절한 충정이 아닌가. 뭐 굳이 따지자면 공작을 제대로 보필 못 한 죄를 물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작이 한 일은 다 공작을 위해서, 그리고 공작이 명한 일을 수행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상황이 꼬여서 그렇지 의도는 선했구나. 자신들에게 핍박을 가한 상대였지만, 사정을 듣다 보니 딱하긴 했다. 렉시는 착잡한 얼굴로 후작을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저, 후작 각하. 그렇다면 전하는 사라지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그냥 외유 아닙니까?”
“…….”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말을 들은 후작의 얼굴은 나아지질 않았다. 아니, 점점 잿빛으로 변했다. 심상찮은 그녀의 반응에 렉시가 움찔하는데, 그녀가 피가 말라붙은 머리칼을 감싸 쥐며 앓는 소리를 냈다.
“…외유가 아니네.”
“한 달 뒤 오신다고 했다면서요?”
“…여섯 달이야.”
“네?”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게 벌써 여섯 달째란 말일세!”
“…….”
렉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여섯 달? 반년?!
물론 영지의 주인이 늘 그 영지에 머물러 있으리란 법은 없다. 지금 렉시도 이 년 넘게 외부를 떠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은 렉시가 집사라는 정식 대리인을 선정했고, 또 남작령의 일 자체가 영주가 크게 필요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작령은 남작령과 비할 데 없이 큰 곳이다. 그런 곳을 임시 대리만 놓고선 반년을 넘게 비우고 있었다니….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실로 사고가 나지 않은 게 기적 아닌가. 후작의 고백을 들은 렉시가 당황하는 사이, 로메인이 마치 악몽이라도 꾼 듯 되물었다.
“…뭐요?”
“…처음엔 연락 두절이라고 부르긴 조금 뭣하긴 했네. 아무래도 한 달보다 더 걸릴 것 같다고 연락이 왔었으니까. 뭐… 그래.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루 이틀, 아니 일이 주 정도야 늦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그게 두 달, 석 달이 넘어가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거야. 내 일도 하는 와중에 남의 일도 처리해야 해. 헌데 전하의 일은 또 오죽이나 많은가? 정말이지 혼자서 뛰다 죽겠다는 게 딱 이 짝이었네.”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로메인은 성질을 냈다.
“지금 일이 문젭니까? 한 달도 기가 막힐 지경인데, 뭐? 여섯 달!?? 당신 대체 그 긴 시간 동안 뭘 했습니까? 설마 전하가 스스로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었단 말입니까?”
사람이 안 오면 찾아 끌고라도 왔어야지 대체 뭣 하는 겁니까! 난리 치는 로메인을 향해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랬을 거네. 하지만 어딨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모셔온단 말인가?”
“하…!”
로메인은 자기도 모르게 허 소리를 냈다. 점입가경에 설상가상도 정도가 있다. 어쩜 이렇게 가면 갈수록 태산이란 말인가?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다 못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들끓는 속을 애써 다스렸다. 이미 벌어진 일, 화내 봐야 이득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연락하신 게 언젭니까?”
“두 달 전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이런 잠행에선,”
“―그건 저도 압니다. 추적당할 수 있으니 쌍방 연락은 불가하다는 걸. 분명 연락은 전하 쪽에서만 가능하겠죠! 그보다, 어디로 가신 건지 정말로 모르는 겁니까?”
“정말로 몰라. 물론 묻긴 했지. 하지만 알려 주질 않으시니 수가 없었어.”
“젠장…!”
로메인이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다. 한숨을 푹푹 쉬는 게 도통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모양이었다. 렉시는 그런 로메인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래 그거 힘들지. 나도 잘 알아.
스케일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사고 치던 아버지를 떠올린 렉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진하게 흘러오는 동병상련의 정이 렉시를 참으로 숙연하게 했던 것이다.
말짓하는 상사란 참으로 죽여 버리고 싶은 존재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렉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같이 사는 가족도 모르는 게 사람 속이지. 거기다 작정하고 속인 모양이니 눈앞이 깜깜할 거야. 근데 참 아리송하단 말야…. 여기 생각보다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 보였는데, 그 와중에 자리를 비우다니. 이런 건 우리 아버지처럼 생각보다 행동 먼저 하는 바보나 할 짓인데…. 이 잠행이 대체 뭐기에?’
렉시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후작이 공작의 잠행 목적이 뭐라 그랬지…?
‘자리를 비운 상황은 분명 설명을 했어. 말하는 걸 들어 보면 꼭 쉬려고 잠행을 나선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하지만 이상해, 이상하다구. 영주란 사람이 단지 요양만을 위해 영지의 안정을 포기할 수 있나?’
렉시는 공작을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영주도 영지보다 자기 건강을 우선시하지는 못한다.
렉시는 묘한 눈으로 플로랑 후작을 응시했다.
카트린느 드 플로랑, 프로하우스 공작의 왼손.
주절주절 말한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도 여자는 매우 유명한 존재였다. 비록 그 시작엔 말이 많았지만 그녀가 후작위를 이은 뒤, 그녀 가문의 중앙 세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지금은 저렇게 초라하게 앉아 있지만, 그녀는 말 한마디로 온갖 복잡 미묘한 정세를 몇 번이고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구나.
렉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진실을 모두 다 말하지는 않았군…. 일부러 허술하게 대화를 했구나. 이 잠행의 목적 쪽으로 시선이 쏠리지 않도록!’
하마터면 속을 뻔했어. 렉시는 순수하게 경탄했다.
이 얼마나 담대한 이인가.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을 겪고서도 중요한 정보를 숨기는 이 재기라니…. 세간에 떠도는 여인의 평은 실로 명불허전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목숨을 위협했던 이형의 것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다. 실로 경이로울 정도의 충심이었다.
‘그 뜻에 넘어가 주고도 싶긴 하지만.’
렉시는 의지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바람 오면 숙이고 바람 가면 고개 드는 갈대 같은 사람보다는 어떤 면에선 순수하기 때문이다. 식물로 따지자면 대나무, 사람으로 따지자면 고지식.
예전 같았으면 왕 되긴 그른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고로 왕이란 이런 자 저런 자 다 한데 아우를 수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지금은 과거가 아니고, 또 그는 왕도 아니다. 허니 이런 여유로움은 가져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렉시도 참아 넘기지 못하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었다. 내가 맞는 건 참아도 남이 내 애 때리는 건 못 참는 게 부모의 마음.
‘나 생각보다 쪼잔했나 봐.’
렉시는 비쭉 웃었다. 좋아, 한번 해 볼까.
“헌데 플로랑 후작 각하, 전하는 왜 이 잠행을 강행하신 겁니까. 대체 왜 그러신 건지 아십니까?”
“왜냐니…. 아까 말했잖은가?”
플로랑 후작은 지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그걸 또 말해야 한단 말인가? 대략 이런 뉘앙스였지만, 렉시는 그냥 웃었다. 뭣 모르는 렉시면 지금 이 말에 넘어갔겠지. 하지만 지금 이 말을 하는 렉시는 뭘 좀 많이 아는 렉시였다. 렉시는 고개를 일부러 갸웃거렸다.
“쓰러지신 뒤 당신께 대리를 명하고 종적을 감추신 것까진 알겠습니다. 하지만 왜 이 잠행을 강행하셨는지, 그 이유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요. 뭐 얼핏 듣기엔 요양이 목적으로 들리기도 했습니다만.”
“…….”
그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는다. 너무 따지듯이 몰아붙이면 안 된다. 부드럽게 돌리면서 도망갈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심문의 기본.
“하지만 후작 각하, 저기 로메인 경은 몰라도 저는 그런 말에 넘어갈 만큼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작긴 하지만 저도 한 영지의 영주니까요. 다스리는 자가 되면 아무리 어리석어도 본인 살을 깎는 선택은 피합니다. 하물며 공작 전하께서는 이 거대한 공작령을 통치하시는 분…. 헌데 요양이라니.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는 각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자네, 침소봉대가 과하군. 겨우 요양 따위로 이 공작령이 어찌 될 것이라 생각하나?”
“공작령에 처음 들어올 때, 흔들리는 문장기가 두 개더군요. 하나는 이 제국의 문장, 나머지 하나는 공작가의 문장.”
제국 귀족의 성에 달린 문장기는 통상 셋이다. 제국의 문장, 그 귀족 가문의 문장,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후계자의 현재 작위. 후계자의 기가 빠져 있다는 건, 아직 공작가에 소공작이 없다는 의미였다. 렉시의 지적에 후작의 입이 다물렸다.
“제가 이곳에 걸음을 한 건 제 영지에 중한 일이 생겨섭니다. 만일 그 일이 아니었다면, 저 또한 이렇게 돌아다닐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요. 제 가신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았을 테니까요. 로메인 경만 해도 저 난리 아닙니까.”
“그래서 자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막지 못한 내가 불충하다고? 그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표정이 사라진 플로랑 후작을 향해 렉시는 방긋 웃었다.
“영주가 영지를 벗어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섭니다. 사유야 많긴 하지만… 보통은 이 셋으로 압축되곤 하지요.”
렉시는 손가락을 들었다.
“하나, 황실의 부름이 있을 때. 둘, 영지전이 닥쳐 영주관이나 성이 함락 직전일 때. 셋, 이 외 기타 불명의 사항으로 영지가 존폐의 기로에 섰을 때. 저는 이 셋 중 무엇이 이유일까 생각하다 문득 당신이 충실한 전하의 신하라는 점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나니 문득 제가 여기 잡혀 오게 된 경위에 눈이 가더군요.”
사라진 공작가의 인장.
후계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비운 공작.
그런 공작을 곱게 보내 준 공작의 신하.
“세상 모든 일은 인과로 이루어집니다. 인이 있으면 과가 있고, 과가 있으면 반드시 인이 있지요. 서로 상관없는 사실들이 한데 모이면, 놀랍게도 그 본모습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황당한 얼굴로 렉시를 보던 후작은 뒤이어 이어진 말에 얼음처럼 굳었다.
“각하, 혹시 전하께 사생아가 있습니까?
밀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뭐, 뭐, 무어…?”
후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가 붉게 달아오르길 반복했다. 피곤하고 힘들다 축 처졌던 것이 마치 거짓인 듯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파들파들 떨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세상에서 렉시의 이 말은 사람에 따라선 전쟁도 불사한다. 아무리 자리에 없다지만 감히 공작에게 사생아를 운운하다니…!
“너, 너! 네 이놈!”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렉시의 모가지를 비틀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림자 덕분으로, 그것이 멀찍이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렉시를 아주 요절을 냈을 것이다. 타오를 것 같은 후작의 얼굴을 보며 렉시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일단 앉아 보시지요.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명? 우습구나!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냐?”
노여움은 칼처럼 서슬 퍼렇다. 하지만 렉시는 눈 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외려 가슴속엔 어떠한 확신이 솟아올랐다. 이렇듯 펄펄 뛰는 것은 필시 자기가 제대로 짚었다는 이야기…. 비밀을 들킨 파수꾼이란 무릇 포기하기 직전까지는 시끄러운 법이다.
탁, 렉시의 손이 탁자를 쳤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아마도 몇 개월 전. 전하께서 쓰러지시면서 시작됐을 겁니다. 전하께선 본래 신체가 상당히 강건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태껏 후계 구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말이 별로 나오지 않은 건 그 탓이 크겠죠…. 로메인 경, 제 말이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렉시의 폭탄 발언에 얼어붙어 있던 로메인은 혼란한 얼굴로 의문에 답했다. 대답이 약간 늦은 것은 연정과 혈육의 정 사이에서 표류했기 때문이지만, 아직 본인도 잘 모르는 일을 남들이 눈치챌 리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원하는 대답을 들은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해합니다. 때 이른 후계자 선정은 권력자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당사자가 건강하다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어도 괜찮지요. 헌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건강했던 전하께오서 갑자기 쓰러지셨으니….”
자기 건강 과신하는 사람치고 뒷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고로 공작은 퍽 곤란했을 것이다. 렉시는 혀를 찼다.
“이곳의 상황이 얼마나 복잡한지, 또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저는 제삼자라 잘 모릅니다. 어쨌거나 전하께서 쓰러질 정도로 일을 해야 했다면 무언가 외부인은 모를 내밀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어쨌건 이럴 때 영지를 비우는 건 말이 안 돼요. 소공작도 없는 마당 아닙니까. 그런데 전하께선 뭘 하셨습니까? 임시 대리인을 몰래 선정한 뒤, 영지를 벗어나셨죠.”
“…아까 나는 분명 말했다. 전하가 영지를 벗어나신 건 나라는 대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또한 그냥 가신 것도 아니고 마도구까지 놓고 가셨다. 보면 알지 않나?”
“네, 그 마도구는 과연 대단했지요. 하지만 각하. 아무리 마도구가 있더라도 당신만큼은 전하를 막았어야 했습니다. 아까 각하께서 말해 준, 그 일 때문에라도요.”
“…그 일?”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내가 저치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후작의 당혹이 눈에 잡힐 듯 선명하다. 그래, 이게 정상이겠지. 자기도 자칫하면 놓칠 뻔했다. 렉시는 그런 그녀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인장 말입니다.”
“인장?”
“각하께선 아까 분명히 말씀하셨잖습니까? 현재 이 영지엔 공작가의 인장이 없다고 말입니다.”
“…!!!”
덜컹. 후작이 순간 뒤로 물러섰다. 자고로 꼬리가 길면 밟히고 말이 많아지면 실수하는 법. 그녀의 소리 없는 경악 사이로 렉시의 녹빛 눈동자가 현기를 발하며 반짝였다.
“영주, 후계자, 인장. 이 셋은 영지의 정통성을 의미하는 것이죠. 셋 중 하나만 있어도 영지는 온존되지만, 반대로 이건 꼭 하나는 안전한 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작령엔 셋 다 없어요.”
공작이 인장 분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동안 사들인 마도구만 해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갔다. 그 정도 돈이 나가는 일을 주인이 몰랐다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일 것이다.
“헌데 전하께서는 영지에 인장이 없음을 알면서도 후계자 지정 대신 당신이란 대리만을 놓고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작령의 정통성이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이 없어질 걸 알면서도 말이죠. 이건 상식을 벗어난 일입니다.”
정통성은 중요하다. 개와 고양이 같은 정적들도 정통성이 걸려 있는 문제 앞에선 다 함께 손을 잡는 마당이었다. 헌데 공작은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자리를 비운 것이다. 최악의 경우, 공작령이 무주공산이 될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전하께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이곳은 무너집니다. 설령 가까운 피붙이가 공작위를 잇게 될지라도, 인장이 없다면 그 정통성은 계속해 공격받겠죠. 후계자를 자처하는 친인척들 사이에서 공작령이 사분오열될 미래가 눈에 보이는 것 같군요.”
렉시는 후작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전하를 얌전히 보낸 당신의 생각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신이 전하께 가진 충심이 진실이기에 더욱더. 제가 가지고 온 것이 드로셀로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절 끌고 온 당신 아닙니까?”
아무리 마도구가 있다지만 그녀는 가짜다. 언제 올지 기약 없는 공작을 대신하기에 그녀는 어지간하면 튀는 행동을 자제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드로셀로나를 앞에 둔 순간, 그녀의 결심은 허물어졌다. 공작의 부재로 흔들리는 공작령을 지탱할 수 있는 무언가가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이리라.
“주군이 하는 행동을 막지 못할 것이면 후계자라도 정하고 가라 잡는 게 참된 신하의 도리죠. 특히 당신 같은 사람은 더할 것이고요. 헌데 왜 그걸 안 하고… 이제 와서 안달할까? 여기서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말이죠.”
전자는 가능해도 안 한 것, 후자는 아예 불가능했다는 것.
렉시의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후계자 지정이… 불가능했다?
“전 로메인 경이 그려 준 공작가의 계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공작가엔 실로 자손이 귀하더군요. 계승이 가능한 항렬에 있는 사람이 채 열이 안됐으니…. 그중 가장 직계와 가까웠던 건 셋인데, 그중엔 전하의 아드님도 있었습니다.”
렉시는 로메인에게 들은 공작가의 사정을 떠올렸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부자, 그리하여 끝끝내 후계자로 삼지 않은 공작의 행동. 얼핏 보면 이해가 갈 것 같으나 사실은 그건 이상한 행동이었다. 사이가 아무리 좋지 않다고 해도, 공작령을 위험 속에 내모는 것? 그건 영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장성한 아들이 있는데도 왜 후계자 지정을 안 했을까? 왜 전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여기서 왜에 이 가설 두 개를 끼워 놓으면 모든 점들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집니다.”
하나.
“현 공작의 아들은 공작가를 이을 수 없는 자다…. 즉, 공작의 친자가 아니다.”
둘.
“현 공작에겐―다른 후계자. 사생아가 있다.”
쿵,
묵직한 무언가가 사람들의 머리를 쳤다. 렉시는 놀라다 못해 까무러칠 것 같은 사람들을 응시했다. 렉시의 이 말은 사람이 아닌 무언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멀찍이 있던 검은 그림자가 순간 확 부풀어 올랐다 꺼지는 것을 렉시는 똑똑히 목격했던 것이다.
“각하가 전하의 외유를 저지하지 못한 게 당연합니다. 이 외유는 공작가의 후계자를 데려오기 위한 것이니까요. 남을 시킨 게 아니라 전하께서 직접 간 이유는 보안을 위한 것일 테지요. 혹여라도 새어 나가면 그 사생아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테니까요. 자 어떻습니까, 각하. 제 설명이 맘에 드십니까?”
“…….”
기나긴 침묵이 사위를 메웠다. 모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대체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한단 말인가? 이중 가장 놀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물론 로메인일 것이다. 공적으로 곧 헤어질 관계라도 공작은 그의 친척이었다. 외삼촌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것도 모자라, 사촌이 외삼촌의 친자가 아니라니?
‘말도 안 돼!’
그는 후작의 입에서 뭔가 부정의 말이 나오길 바랐지만, 후작의 입은 접착제로 붙은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속이 마르다 못해 바짝바짝 탄다. 견디다 못한 그는 후작에게 물었다.
“플로랑 후작…! 뭔가 말을 해 보십시오. 지금 남작님이 말씀하신 게 정말입니까?”
간절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와 눈을 마주한 후작은 시선을 회피할 뿐이다. 실로 확실한 대답에 로메인은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맙소사! 아연실색한 그를 보며 렉시가 슬쩍 물었다.
“로메인 경… 그, 공작 전하는 경의 외삼촌이시죠. 이건 경도 몰랐던 건가요?”
당연하지!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로메인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했다.
*****
그렇게, 공작가의 밀실에서 각종 음모와 경악과 반전이 피어오르던 그 시각.
공작의 명으로 잠깐 자리를 비웠던 시종장은 밀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늘 온화하던 얼굴에는 오만상을 지고, 발 또한 평소와 달리 재게 놀린다. 덕분에 그와 마주친 시종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결과를 낳았지만 정작 시종장은 그 사실을 몰랐다. 이 심부름 직전 겪은 일에 그는 온 신경이 다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장이 사라졌다니, 몰랐어. 전하에 관한 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극심히 자책했다.
아, 내가 그걸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참 쓸데없는 자책이었다. 원래 인장이란 공작만 꺼내 쓰고 일 없으면 안 쓰는 물건 아닌가. 하물며 요 몇 년간 공작은 인장을 빼 쓴 적이 없었고 그런 이상 시종장은 이걸 모르는 게 맞다. 허나 공작의 시종장은 그런 건 죄다 변명이라 여기는 성격이었다. 즉, 쓸데없이 성실했다. 거기다 그는 자신이 공작과 가장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만의 착각이지만.
아아, 전하. 그런 일이 있는데 못 알아채고 있는 내가 얼마나 한심하셨을까…?
깊어 가는 죄책감에 그는 가슴을 쳤다.
‘전하께서 괴팍해진 이유엔 필시 이 일도 있었겠구나. 내가 진작 알았으면 어떻게든 해결을 했을텐데…!’
이 얼마나 심각한 시종장 실격인가. 그는 매우 반성했다. 그나마 그가 석고대죄하지 않고 있는 건 공작이 직접 도둑을 잡고 인장 역시 찾았기 때문이다. 이미 일을 해결했는데 죄를 청하면 그것이야말로 공작에 대한 불경일 것이다.
그는 남작과 함께 끌려간 로메인 경을 생각하고 혀를 찼다. 어쩜 운도 없지, 어쩌다 도둑에게 홀려서…. 운이 없어도 뭐 저렇게 없냐 싶지만 그래도 로메인은 곧 죽어도 공작의 외조카다. 그러니까 그는 괜찮을 것이다. 거기다 도둑인 줄 알고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외려 문제는 전하가 끌고 간 그 남작이겠지….
‘대관절 무슨 사연일까.’
얼굴을 가린 것은 도둑이라 가린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태도가 떳떳한 게 마음에 걸렸다. 자기 가문이나 지위를 알려 주는 사기꾼이라니 참으로 듣도 보도 못한 일 아닌가.
거기다 정말 이상한 건 그가 가지고 온 물건들이다. 사기 치려고 가지고 온 줄 알고 압수한 물건들은 놀랍게도 진짜 마도구였다.
주인인 남작이 사라지자 바닥에 딱 붙은 그것들을 옮기기 위해 시종장은 결국 바닥 돌을 아예 들어내야 했다. 덕분에 그걸 옮기려고 그 이하 시종들이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어떤 사연이기에 애인인 상대를 속인단 말인가?’
그는 아직까지도 두 사람이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여러모로 알쏭달쏭해 그는 매우 답답했다. 그는 결국 서둘러 밀실을 향해 갔다. 자기가 없는 사이 상황이 끝나면 이 궁금증을 해결하는 건 더 뒤로 미뤄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으리라. 그의 오늘 나쁜 일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는 것을….
평소에는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하는 누군가가 그 시각 성의 회랑을 우연히 지나가고 있었던 것은, 오늘 있던 그 어떤 일들보다 가장 큰 불운이었다. 그 누군가는 시종장의 발을 잡을 정도로 권력이 있었고, 또 피차 사이가 상당히 사이가 안 좋았으며 당사자의 성격 또한 매우 꼬였기 때문이다.
“어머나? 지금 내 앞을 지나가는 건 우리 성의 시종장인가?”
카랑카랑하고 높은 여성의 목소리.
제국식 특유의 우아한 억양과 높은 톤의 울림.
누군가는 그 울림이 매우 아름답다고도 하지만 사실 그건 매우 아부다. 기실 공작성 사람들에게 이 목소리는 기피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시종장은 자리에 우뚝 섰다. 그의 등 뒤로 순간 오한이 스쳤다.
‘이, 이 목소리는?’
“역시, 자네가 맞군? 이거 참 오랜만이지 않아?”
또각또각, 바닥을 울리는 여자의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황급히 뒤를 돈 시종장의 눈이 부릅뜨였다.
“메…메르디스 전하!”
“오호호호!”
여자, 메르디스는 자리에서 소리 높여 웃었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옷은 노출도가 심했다. 크고 하얀 가슴은 반 이상이 드러났고 몸을 휘감은 붉은 비단옷은 풍만한 몸매 위에 딱 붙어 분명 몸을 가리는데도 관능적이었다. 그 위를 흰여우털 망토가 가리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그래서 더 몸매가 부각된다.
누가 봐도 공식 석상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이 여자가, 바로 현 프로하우스 공작의 하나뿐인 비였다.
메르디스 드 프로하우스, 공작의 하나뿐인 비이자 현재 가장 강력한 정적의 이름이다.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살결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시종장은 눈을 바닥에 깔았다.
‘저, 저, 저분이 왜 여기에?!’
아들을 둔 사이라지만 이 부부의 사이는 최악 그 자체였다. 애를 만들 일을 하긴 했으니 처음엔 사이가 괜찮았을 텐데, 어느 순간 두 사람은 마치 개와 고양이 같은 사이가 됐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이 둘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로 어쨌거나 둘은 서로 보기 싫어서 상대의 영역엔 오질 않았다. 그런 여자가 왜 여기에 있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맘 같아선 무시하고 가고 싶지만 그러면 일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여자는 공작의 비이자 황제의 조카딸인 데다 성격 한번 매우 훌륭하다. 얼마냐 훌륭하냐면, 자신을 모욕한 자에겐 대놓고는 아니어도 은밀히 암살자를 초빙할 정도?
똥 밟았구나!
그는 떫은 심정을 감춘 채 깊이 읍했다.
“…공비 전하, 아름답고 우아한 오후이옵니다. 아직 찬바람이 채 가시기도 전 어찌 본성에 무거운 발걸음을 다 하셨는지요?”
“어머나. 내 집에서 내가 돌아다닌다는데 뭐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보지? 호호호… 그런 말을 들으니 마치 내가 못 올 곳에 온 느낌인데.”
그녀가 남들의 기피의 대상인 이유는 이러한 황당한 어법에 있다. 남들은 에둘러 말하는 걸 그녀는 대놓고 후려치는 것이다. 물론 시종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바람이 찬 계절 아닙니까. 얼마 전 고뿔에 걸리셨다 들었사옵니다. 헌데 이렇듯 나와 계시니 당연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그는 메르디스의 뒤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이처럼 수행 시녀도 몇 없이 다니시다니…. 고귀하신 분을 뫼시기엔 인원수가 적합해 보이질 않아 한 말일 뿐이니 부디 노여워 마소서.”
“…흐흥. 오랜만이지만 그 혓바닥에 기름칠한 건 여전하구만.”
가시 돋친 말이었지만, 메르디스의 얼굴은 약간 풀려 있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지만 고귀한 몸 운운을 듣고도 화를 낼 정도로 꽁하지는 않다. 그녀의 공격을 간신히 벗어난 시종장이 한숨을 삼키는 사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침병은 이미 다 나았네. 자네도 눈이 있어 보면 알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병 때문에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더니 어찌나 답답하던지! 결국 큰마음 먹고 나온 것이지. 수행인을 적게 데려온 건 조용히 산책을 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고…. 내가 시끄럽게 다니면 전하께서 싫어하실 것 아닌가?”
시종장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셨습니까.”
“흥! 자네가 무슨 생각인지 알 것 같군. 내가 전하를 위한다니 그게 이상하다는 거겠지?”
“…….”
조용한 시종장에게 메르디스는 코웃음을 쳤다.
“뭐 내가 전하와 사이가 안 좋다는 건 딱히 비밀도 아니지. 하지만 시종장, 곧 있으면 버나드가 작위를 잇게 될 것 아닌가? 자식이 큰 경사를 앞뒀는데 어미가 되어서 자식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나?”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그 아들도 미워할 것 같지만, 사실 메르디스는 자기 아들을 제법 아낀다. 가뜩이나 부자간에 사이도 안 좋은데 자신마저 거기에 한 다리 걸치면 좋지 않은 평판이 더 나빠질 터. 작위를 잇는데 부자간은 물론이고 그 모친마저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단 소문이 돌면 이래저래 골치 아플 뿐이다. 그녀는 마침 잘됐다는 듯 시종장에게 흉금 아닌 흉금을 털어놨다.
“그래서 난 슬슬 그분과 화해할 생각이야.”
시종장은 정말로 놀랐다.
“…예?!”
인사를 마친 시종장이 뒷걸음질하며 길모퉁이 쪽으로 간다. 어느 정도 사이가 벌어지자 꾸벅 인사한 시종장의 모습이 벽 너머로 사라지고, 새침한 얼굴이던 메르디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뭔가 생각하는 얼굴을 한 그녀는 옆에 다소곳이 서 있던 시녀장에게 물었다.
“알로라. 지금이 몇 시지?”
“오후 세 시가 약간 넘었사옵니다.”
“…그래?”
답을 들은 그녀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맺혔다.
“전하께서 알현을 하실 시간에 저 시종장이 밖을 돌아다닌다라…. 참 별일이로군. 그럴 인사가 아닌데 말이야.”
공작과 금붕어 똥처럼 붙어 다니는 개인 호위만큼은 아니어도, 시종장은 어지간해선 공작과 떨어지질 않는 걸로 유명하다. 메르디스의 눈이 흥미로 가늘어졌다.
“뭔가 아주 재미있는 냄새가 나는데.”
“…몰래 뒤를 캐어 볼까요?”
“흐흥, 어떨까?”
메르디스는 잠시 고민했다.
공작성에 있는 시종들은 다루기 매우 힘든 종류들이다. 오랫동안 한 왕가를 모신 자들이라 매수도 힘들어서 그녀는 데리고 온 시녀들도 독자적인 선을 구축해야 했다. 물론 그들은 매우 충직하지만, 문제는 그 충직이 메르디스만의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그녀가 무언갈 알면, 반드시 황제도 그 사실을 알게 될 터. 전 황제가 살아 있었다면야 별문제가 안 될 테지만 현재 황실의 주인은 선황제가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냉정하고 무서운 사촌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일단 두고 보지. 일단 전하와 화해하기로 맘먹지 않았니? 조사는 나중에 해도 충분할 거고….”
메르디스는 발을 돌렸다. 또각또각 걷는 그녀의 얼굴에 설핏 짜증이 스며들었다.
“그보다 어서 내 아드님이나 보러 가자꾸나. 대체 무슨 일로 아까부터 성을 뒤집어 놓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공작의 성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다 그 주인의 귀에 들어간다. 현재는 공작이 정무, 특히 사람들을 알현하는 시간이기에 아직 버나드의 일을 모르는 것일 뿐. 아마 정무가 끝나고 나면 그는 버나드가 성을 휘젓고 다닌 일을 알고 대노할 것이다. 자기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공작은 참 버나드에게 박했다. 메르디스의 구둣발 소리가 빨라졌다. 자고로 이런 일은 선수 필승이다. 심각한 일이라면 그녀가 먼저 나서서 어느 정도 진화를 해 놓아야 했다.
“고, 공비 전하!”
화려한 음각이 아로새겨진 문. 그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메르디스를 보고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메르디스는 반사적으로 시종들의 수를 훑었다.
“…….”
평소보다 적은 수다. 나머지는 죄다 어디로 갔을까? 메르디스의 얼굴이 봄날 고양이처럼 변했다. 손대면 갸르릉댈 것 같은 묘한 얼굴. 기분이 좋은 것 같지만, 사실 그녀는 기분이 나쁠 때 웃는다. 주변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내 아드님은, 지금 방에 있니?”
“예, 예! 전하.”
바들바들 떨면서 말하는 시종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구타의 흔적이 있었다. 누가 때린 건지는, 뭐 따로 꼭 물어봐야 알까? 메르디스의 눈썹이 한쪽으로 삐죽 올라갔다.
“그래? 그럼 문을 열어.”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럼 잠시―.”
“아, 노크는 말고.”
그녀는 문을 두드리는 시종의 손을 제지했다.
“그냥 열어.”
“하, 하오나….”
메르디스의 말에 시종은 머뭇거렸다. 심각한 선택의 기로였다. 법도에 어긋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가 아까 전 이 문 안으로 여자들을 들여놨다는 것이다. 혈기 왕성한 남자의 방에 여자가 들어갔는데 그 안에서 무슨 짓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할 뻔 자.
어떻게 하지? 갈대처럼 흔들리던 시종이었지만 그는 곧 마음을 정했다.
어쩌긴 어째, 까라면 까야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그는 눈앞의 주먹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안에 있던 사용인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공비의 존재에 눈이 커다래졌다. 저, 전하다! 어찌 이 시간에 여길 오셨지?
경악하는 시종들을 지나친 그녀는 내실 끝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아응, 아! 고, 공자!”
“헉, 윽, 헉!”
퍽, 퍽, 난데없는 살색의 향연에 메르디스는 순간 지금이 밤인가 했다. 캐노피도 내리지 않은 침상 위에 남녀 둘이 격렬히 얽히고 있었다. 여자는 모르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 위에서 열심히 허리를 놀리는 남자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
“…….”
그녀는 순간 말을 잊었다. 사고 치고 반성하는 건 뭐 기대조차 안 했지만 설마 대낮부터 여자를 끌어들일 줄은 몰랐던 메르디스다. 그녀는 황황한 얼굴로 둘을 보다 침대 한쪽에 이미 까무라친 여자 셋을 확인하곤 결국 머리를 짚었다.
맙소사.
“음, 흑, 헉, 누가… 왔나?”
당황하는 시종들에게 메르디스는 쉿 하고 손가락을 올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대답 없이 조용하자, 이내 신경을 끈 버나드의 몸이 빠르게 흔들렸다.
“아, 꺄, 꺄아아악!”
“크윽!”
짧은 비명 끝에 여자가 털썩 쓰러진다. 잠시 몸을 굳힌 버나드도 곧 허물어지듯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중간부터 끝까지 아들의 정사를 지켜본 메르디스는 참 지랄도 풍작이라고 생각했다. 성을 뒤집어 놓는 것도 모자라 대낮부터 그 짓을 하셔…? 너 아주 잘났다? 그녀의 눈이 둥글게 호선을 그렸다.
“아드님?”
“…와아아아악!”
쿠당탕탕!
놀라서 벌떡 일어나다 바닥에 떨어지는 그녀의 아들을 보자니 가슴 깊은 곳에서 한숨이 밀려온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지만, 아들이 여태 소공작이 못 된 건 다 이유가 있다. 이렇게 한심해서야! 메르디스는 밀려오는 두통을 감내하며 허둥지둥 바지를 입는 아들을 기다렸다. 어째 이야기가 길어질 듯했다.
“아드님, 지금 제정신입니까?”
“…그, 죄송합니다. 오셨다는 말을 못 들어서 그만….”
버나드는 쭈글쭈글한 얼굴로 메르디스를 맞았다. 아무리 성격 나쁜 그라도 이런 상황에선 성질을 부릴 수 없었다. 메르디스는 그의 어머니이기 이전 그의 가장 큰 방패이자 무기였다. 아버지의 냉대에서 여태껏 그를 보호해 준 건 다름 아닌 그녀와 그 뒤에 있는 황가의 힘.
메르디스는 쭈그러진 아들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혀를 쯧쯧 찼다.
“참으로 잘났습니다. 어쩜 이렇게 믿음직스러운지! 성을 뒤집어 놓길래 무슨 일인가 놀라서 왔더니…. 참으로 상상 그 이상을 보여 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메르디스는 빙긋 웃으며 뜨거운 차를 마셨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버나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참으로 가당찮았다.
“제가 말했지요. 얌전히만 있어 달라고…. 앞으로 몇 달만 버티면 드디어 우리가 고대하던 자리를 얻게 될 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조용히 있어 달라고 했잖습니까.”
“…예.”
“그런데 아는 분이 지금 이런 일을 해요?”
아직 공작파가 내부에서 힘을 쓰는 건 자신의 아들이 그들 눈에 못 미덥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이지 최대한 잡음 없이 그녀의 아들을 소공작으로 만들고 싶었다.
“설마 가신의 절반 이상이 우리에게 붙었으니 문제없다― 이딴 생각을 또 하는 겁니까?”
움찔. 버나드의 몸이 튕겨 오르는 걸 본 그녀의 웃음이 사나워졌다.
“아드님. 이들을 아예 버리고 갈 수 있다면야 참으로 좋겠죠. 하지만 그들은 공작가의 가신들입니다. 앞으로 아드님이 거두고 다스려야 할 세력들…. 언젠가는 화해를 해야 할 대상들이라 이겁니다.”
“…꼭 화해해야 합니까?”
메르디스의 눈이 살벌해졌다.
“아니, 어차피 말 안 듣는 것들 꼭 끌고 가야 합니까? 뭐 이 기회에 다 물갈이해도 좋을 것 같은데요.”
“아드님! 그게 지금 무슨 소립니까!”
메르디스의 일갈에 버나드는 흠칫했다. 메르디스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우리의 세가 강해졌다고 한들 우리는 아직까지 이곳에서 외부인에 불과합니다. 전하께서 약해졌기 때문에 우리가 비집어 들어간 것이지 그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인 게 아니란 거예요. 어쩜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할 수가 있죠? 이 어미의 말이 그렇게 우스운가요?”
“아,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그런 것이 아니라―.”
“닥치세요!”
“…죄, 죄송합니다.”
메르디스는 숨을 가다듬었다. 반항기 어린 아들의 얼굴이 어쩜 이다지도 답답한지. 아무리 뭘 모르고 하는 말이라지만 이 천하태평한 자를 두고 어찌 대의를 도모할 수 있을지 앞날이 깜깜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낳고 키운 자식 속에 도로 넣을 수도 없고, 이런 절제 없고 어리석은 자라도 그녀가 낳은 아들이다.
그녀는 짜증스러운 숨을 내쉬며 찻잔을 내려놨다.
“그런 안일한 생각이 모든 일을 망친다는 걸 기억하세요. 소공작이란 자리는 단지 교두보일 뿐…. 궁극적으로 그대는 공작령의 모든 것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반쪽짜리 공작이 되고 싶은 건가요? 전하께오서 아무리 약해지셨다 한들 그분을 뒷받침하는 세력은 무시할 바 못 됩니다.”
“…알겠습니다.”
“좋아요. 그 대답 잊지 말도록 하세요. 다음번엔 이렇게 끝나진 않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묻는 걸 깜빡했군요…. 아드님, 오늘 성은 왜 들쑤시고 다녔나요?”
이미 한번 경을 친 탓인지 말하는 것이 굼뜨다. 슬금슬금 눈치 보는 행동에 그녀는 혀를 찼다.
“말해 보세요. 이유를 알아야 이 어미가 처리를 할 것 아닙니까?”
“―성에, 로메인이 돌아왔습니다.”
“……로메인이?”
달칵. 차를 마시려던 메르디스의 손가락이 순간 미끄러졌다.
“예, 삼 년간 이 근처에도 오지 않던 놈이 성문을 통과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전하를 알현하기 위해 알현 신청까지 넣고 말입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알고 싶어 간 것인데…. 혼자 온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 보는 여자를 한 명 데리고 왔더군요.”
“여자…요?”
메르디스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롭다. 그녀의 반응을 눈치 못 챈 버나드는 부루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 무척 건방진 년이었습니다. 그 녀석 옆에서 잔뜩 으스대더니 절 발견하고 비웃더군요. 감히…. 대충 보아하니 로메인과 보통 사이가 아니어 보였는데 그걸 믿었겠지요. 그 철벽을 넘어뜨린 걸 보니 여간 요사한 년이 아닐 겁니다! 그년의 정체를 캐어 보려다 그만….”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요?”
메르디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여자라고? 로메인 그놈이?
그 녀석, 고자가 아니었어?!
*****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일뿐이군요. 맙소사! 사생아도 놀랍지만 버나드가 전하의 자식이 아니라니…. 그 말이 사실이면 왜 여태 진실을 밝히지 않은 겁니까?”
귀족가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대가 끊기는 일이다. 하물며 이건 어떻게 보면 그보다 더 악질이다. 아버지가 다른 자식을 공작의 자식이라 키우다니 완벽한 뻐꾸기 짓 아닌가? 공작가의 후계자 선정이 다른 곳과 달라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했으리라.
“그래. 나도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사정을 들어 보니 말하시지 못할 만하더군. 일이 여러 가지가 꼬였네.”
대체 뭐가 얼마나 꼬였길래 저게 내 아들이 아니란 말도 못 한단 말인가. 모두의 얼굴에 의혹이 서렸다.
“귀족가의 결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네도 알리라 믿네. 부부가 합방하고, 그리고 그 합방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혼인이 성사되지.”
“…? 그게 이 일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물론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아니, 연관이 있어. 다른 곳과 달리 공작가의 합방 의식엔 참관인이 없거든.”
혼인의 참관인제는 주로 고위 귀족이나 황가 쪽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프로하우스 공작가는 참관인제를 채택하지 않았다. 공작가는 그 참관인제가 상당히 미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합방 후 혈흔을 그 증거로 삼는 정도는 하고 있었는데, 공작 역시 그 수순을 거쳐 혼인을 했다.
“참관인이 없는 점을 이용해서 전하는 공비와 혼인했네. 공비는 자신이 전하와 진정한 합방을 한 적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어.”
“……?”
혼인은 했는데 합방을 안 했다니 이건 무슨 소리? 모두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하기사 설명이 너무 간결하긴 했다.
후작은 흠흠, 하고 목을 울렸다.
“…두 사람이 성교한 걸 속였단 말이야. 요컨대 그 둘은 잔 적이 없단 말일세. 이제 이해 가나?”
잠시의 침묵. 생각보다 적나라한 후작의 말에 자리에 있던 총각 둘이 불에 덴 듯 펄쩍 뛰었다.
“무, 무, 무, 무슨?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를!”
“서, 성교라니요?”
여기서 말하는 총각 둘은 물론 로메인과 렉시다. 놀라운 기지로 후작의 거짓을 알아낸 렉시라도 아직 이런 일엔 초보나 다름없는 것이다. 때문에 질문은 다른 사람이 했다.
“헐, 섹스를 안 했어요? 첫날밤에? 아니 그럼 혼인 성사는 어떻게 한 건데요? 섹스를 안 하면 흔적도 없잖아요? 무엇보다 안 했다는 걸 여자가 모를 수도 있어요? 하면 아플 텐데?”
나이만 어렸지 그쪽 방면으론 옛날 옛적 어른이 된 요수아는 이런 질문에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낯부끄러운 질문에 모두가 얼굴을 붉히는 사이 후작은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밤 마시는 술에 미약을 넣었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부분은 성기 대신 다른 걸 이용해서 그… 혈흔을 만들었다고 하셨네.”
숫총각들은 여기서 또 공백 상태가 됐다. 물론 기혼자 둘은 알아먹었다.
“아하 그럼 기구로…. 거기에 미약을 먹었다면 정말로 속았긴 했겠네요. 그럼 공비 전하는 자기가 전하랑 섹스했다고 생각하고 바람을 피우고 아이를 임신한 건가? 그런 수순이에요?”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다 정황상 공비가 부정을 저지른 건 혼전이다. 이 성의 보안은 생각보다 철저해. 공비는 이곳에서 전하 외의 남자는 철저하게 배제했다. 즉 다른 씨를 밴 몸으로 혼인을 한 거야! 이 얼마나 간악한 년인가?”
“이야….”
대단한 배짱이다. 임신한 채 시집을 와? 대체 어떤 간덩이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
요수아가 진심으로 감탄하는 사이 두 총각의 멍청한 얼굴에도 서서히 이지가 깃들었다. 각종 음모와 모략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둘이었다.
“그, 그런 일이.”
“황가는 이 프로하우스 공작가를 호시탐탐 노려왔어. 전하께선 선황제의 꾀에 넘어가 어쩔 수 없이 공비와 혼인을 하셔야 했지. 하지만 전하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볼 생각이 없었던 거네. 공비는 철저하게 황가의 사람으로 교육된 여자야. 선황제가 그년을 끼고 딸처럼 키운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나? 그런 여자의 아들이 공작이 된다면 이 프로하우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령이 돼 버리겠지.”
군신의 관계로 품은 프로하우스지만, 사실 이곳은 황가의 오랜 근심거리였다. 시황제는 일단 제국의 이름만 달면 서서히 공작령이 제국에 흡수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프로하우스는 자치령의 형태로서 공작령을 유지했다. 심지어 황가 다음으로 부유한 마당이니 황가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선황제가 조카딸을 공작에게 시집보낸 건 황가에서 벼르고 벼른 공작가 공략 사업 중 하나였다.
“헌데 그런 공비가 회임을 하다니…. 전하가 얼마나 놀랐겠나? 더더군다나 그녀가 사실을 알린 건 혼인 후 삼 개월 뒤였네. 혼례 의식이 가짜인 건 전하만이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다 제대로 혼인했다고 생각했어. 허니 거기서 그 사실을 밝힌다 한들 누가 믿겠나?”
“…그렇겠군요.”
로메인은 어렵사리 인정했다. 하기야 말해 봤자 누가 믿을까. 지금 이렇게 듣고 있는 자신도 믿기지가 않는 이야긴데 말이다. 거기다 당시엔 선황제도 살아 있었던 마당이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이라 할 만했다.
“그래서 전하는 약간 길을 돌아가시기로 한 거네. 공비와 아들을 당장 쫓아내지 못할 양이면 철저히 배제하자고…. 어차피 이곳의 소공작 자리는 우수한 자를 선택하니, 어려울 것은 없다고 생각하신 거지. 그리고 그분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네. 뭐 …후보 당사자가 열심히 전하의 권유를 피하고 다닐 거라는 건 그분도 미처 예상하지 못하셨지만 말이야.”
“……그것은.”
로메인은 대번에 머쓱해졌다. 니 탓은 아니지만 너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다는 말 아닌가. 물론 그가 뭘 알고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그를 탓할 것도 없었다. 하기 싫은 일 하기 싫다고 도망 다닌 것에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말을 듣는대서야 뒤가 켕기는 것은 사람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후작의 입매가 약간 삐뚤어졌다.
“됐네. 죄책감 느끼라고 한 말은 아니야. 솔직히 자네가 나섰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지지는 않았겠지만…. 이미 전하께서 다른 후보를 데리러 가신 마당이니 따져야 뭣 하겠나.”
‘음, 역시 그랬구나.’
둘의 공방을 듣던 렉시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저렇게 직접 맞다고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다. 하긴 공작이 눈이 삐지 않았다면 저런 인재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쩐지….
렉시는 로메인을 흠모의 눈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그를 은근히 갈구는 후작을 흘겨봤다.
‘기사가 자기 꿈을 향해 걷는다는데 갈구긴 왜 갈궈? 정황을 알았다면 모를까, 알지도 못한 사람에게 그러는 건 아니지 않나?’
사람은 원래 자기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기 마련. 평소 기사를 동경한 렉시는 소공작 안 한다고 로메인을 갈구는 후작이 괘씸하기만 했다. 너 왜 우리 로메인 경 구박해요. 그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긴 채 퉁명스레 말했다.
“흥, 그랬군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허면 그 사생아가 오면 곧바로 소공작이 되는 겁니까?”
여기 소공작 자리 능력제라면서 그래도 되나 보죠? 렉시의 물음에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후 일을 어떻게 하실 건지는 나도 제대로 들은 바 없네. 일단 오신 뒤 모든 일을 밝히시겠노라 했으니…. 나도 그 사생아가 얼마나 뛰어날까 그것이 걱정이긴 하네.”
“그럼 본질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텐데….”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자는 전하의 피를 이은 이가 아닌가. 전하의 피를 이은 자가 평범할 리가 없지. 거기다 전하께서 직접 데리고 온다고 결정하신 것만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네. 확신해.”
단지 공작의 피를 이었으니 유능할 것이란 말은 어폐가 있었지만 렉시는 지적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하겠는가. 거기다 공작가의 후계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그가 알 바도 아니었다. 그게 로메인만 아니면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일. 그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쩌실 계획입니까?”
“…나 말인가?”
후작이 잠시 렉시를 흘낏거린다. 왜 내 눈치를 보… 아니, 아니구나. 렉시는 후작이 보는 게 자기가 아니라 멀리 있는 그림자라는 걸 깨달았다. 맹약을 지키기 위해 나왔던 그 그림자다.
‘그러고 보니 맹약의 오류는 해결되지 않았나? 그런데 저건 왜 사라지지 않는 걸까.’
보통 이런 건 일이 해결되면 사라지는데…. 뭔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는 걸까?
후작은 저게 렉시가 불러낸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렉시로서도 저건 알 도리가 없었다.
일단 적의는 확실히 사라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렉시는 일단 저것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굳이 언급해 봐야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으니까.
“저것이 당신에게 위해를 끼칠 거면 이미 했을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슬쩍 언급해 주자, 후작의 얼굴에 살짝 핏기가 돌았다. 렉시가 말을 해 주니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잠잠히 있다 입을 열었다.
“난… 하던 일을 계속할 거네. 그게 원 목표였으니까.”
여태 후작이 하던 일?
“…아, 그러니까 그 변장 후 신분 사칭?”
“…대리라고 하게. 사칭은 조금 어감이 그렇지 않나?”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뻗으며 반지를 만지려다 머뭇거렸다. 그녀는 렉시와 로메인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비, 비밀은 지켜 줄 거지?”
이제 와서 무슨…. 렉시는 허탈하게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말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어차피 저도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여기 있어야 하기도 하구요.”
무엇보다 아직 마도구를 못 팔았다. 렉시가 어깨를 으쓱하자 후작이 이상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왜 굳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후작은 돈은 되는 대로 다 줄 예정이었다. 헌데 그냥 돈만 받고 가면 될걸 왜 굳이 공작을 본다 그러지? 후작의 의문에 렉시가 답했다.
“그게, 팔 마도구 중에 당사자가 소유권 이전을 받아야 하는 물건이 있어서요. 각하께선 전하가 아니시잖습니까.”
“……알았네. 자네 일행의 처우는 내가 최대한 보장하지.”
“참, 도둑 누명도 벗겨 주시구요.”
“근데 그거 정말로 자네 집안 물건인….”
참 끝까지 이러시네.
모두가 후작을 지긋이 노려본다. 후작은 흠칫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알았네 알았어. 결국 그녀는 미적미적 손을 휘두르며 정해진 시동어를 읊었다.
〈환영이여, 그 주인에게 그림자를!〉
동시에, 마나가 흔들렸다.
반짝이는 빛이 바닥에서부터 일어났고, 후작의 반지가 시동어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이 이루어지기 위해 마나가 모인다. 후작 주위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반지를 향해 쏟아졌다.
웅웅웅, 거대한 마나가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파지직.
반지가 깨졌다.
“…응?”
그녀는 이상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도구는 어지간해서는 깨지지 않기에, 그녀는 처음에 자기가 뭘 잘못한 줄 알았다. 후작이 시동어를 다시 읊었다.
〈환영이여, 그 주인에게 그림자를!〉
파지지직.
〈환영이여―〉
챙!
과부하 된 중앙의 핵이 결국 부서졌다. 후작의 손을 따라 반짝이는 돌가루가 여기저기 비산했다.
텅 비어 버린 반지의 중앙.
후작의 얼굴이 그만 아뜩해졌다.
“……바, 반지가?”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아니 왜 반지가, 반지가 부서지지? 그녀는 거의 비는 듯한 몸짓으로 반지를 만졌지만 그렇다고 이미 부서진 반지가 돌아올 리는 없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후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안 돼!”
그녀는 절규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 반지가 없으면 그녀는 공작이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여태 공작의 그림자를 할 수 있었던 건 이 반지 덕분이었다. 그녀도 사람이니 가끔 공작 같지 않은 행동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행동해도 그 얼굴은 공작 본인. 허니 공작이 그냥 노망 좀 났다고 여기고 넘어갈 수 있었던 거다. 헌데 이게 여기서 깨져 버리다니…. 대체 이게 무슨 횡액이란 말인가.
“어째서 이런 일이! 안 돼, 안 된다고!”
“헉…!”
그럭저럭 침착함을 유지하던 후작의 절규에 로메인과 렉시 역시 깜짝 놀랐다. 그들은 당혹한 얼굴로 후작의 손을 확인했다.
“지, 지금 반지가 깨진 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맙소사…. 마도구는 어지간해선 깨지지 않을 텐데…?”
당황하는 렉시를 보며 로메인이 물었다.
“혹시 마도구는 스스로 복구가 되기도 합니까?”
“…아뇨, 불가능해요.”
마도구를 보수할 수 있는 건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뿐. 마나가 있다 한들 마법사가 없으니 저건 이제 못 쓰는 거다. 안타까운 눈으로 후작을 응시하던 렉시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멀찍이서 그들을 관조하던 그림자가 갑자기 그 앞으로 쑥 이동해 왔던 것이다.
“히익!!!”
반지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던 후작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그림자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림자가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 무슨!”
―그것을 이리 다오.
로브 안에서 새파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후작의 손가락. 후작의 얼굴은 숫제 백지장처럼 질려 버렸다.
“내, 내 손가락을 달라는 것이오?”
―손가락이 아니라, 그 마도구를 달라는 것이다.
“이… 이걸?”
후작이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짚자 그림자가 크게 기꺼워했다. 그녀의 얼굴에 짙은 경계심이 서렸다.
“이것을 왜…? 이 반지는 지금 부서졌소.”
―나도 알고 있다. 바로 그래서 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부서진 건 바로 내 탓이니.
그림자는 주저앉은 후작의 손을 들어 올렸다. 시체처럼 차가운 색과 달리 맞닿은 손끝엔 온기가 있었다. 그림자가 후작의 손에서 반지를 빼 가자, 후작은 소스라치며 뒤로 멀어졌다.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이 마도구의 기만을 부수었기에 핵에 상처가 났다. 마법이 저물어 가는 이 시대에 이 정도의 기만을 행하는 물건은 실로 기물이었을 터…. 아마 내가 아니었다면 이것은 이토록 허무히 부서지지 않았겠지.
그림자의 손가락에서 반지가 흰빛을 내며 떠오른다. 모두 숨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는 자식을 낳지 않는다. 대신 제자를 들이거나, 그 스스로의 힘을 부여한 마도구를 제작했지…. 마법사들에게 마도구란 인간이 가지는 자식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그런 마도구를 부수었으니 땅에 묻힌 마법사도 눈을 감지 못할 터. 허니 어찌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겠나?
그림자가 말할 때마다 빛이 점점 강해진다. 한낮의 태양보다 더 강렬하고 뜨거운 빛에 밀실 안의 사람들은 손으로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반지가 행여나 어찌 될까 응시하던 후작마저 눈을 감으니, 밝게 빛나던 빛무리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비산했다.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 존재와 느낌만은 강렬했다. 그 고요한 엄숙함 속에서 그림자가 선언했다.
―받으라.
후작은 떨리는 손으로 위에서 떨어지는 반지를 받았다. 아직 선연히 남아 있는 빛 속에 그림자는 물처럼 잠겨 있었다. 그것은 마치 검은 어둠이 빛으로 화하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빛이 어둠으로 빠져드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이 희미한 안개처럼 흐려지는 가운데 그림자의 마지막 말이 모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같지는 않지만 같은 것이다. 원하는 자의 기만을 떠올리고 외치라.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이로 분할 것이다.
*****
시종장은 밀실에 도착했다. 밀실 밖에는 공작에게 쫓겨난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대부분 공작을 따라다니는 호위병들이다. 그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여기서 뭣들 하는 겁니까. 공작님은 어디 계시지요?”
“아, 시종장님. 오셨습니까.”
근위대의 부대장격인 시안이 시종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호위들 중 가장 연차가 높은 이 기사는 그 직위는 높지 않았지만 유한 성격으로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인사였다. 즉 비뚤어진 시종장의 기분을 받아 줄 적절한 인선이다. 시종장은 불쾌한 표정을 애써 풀었다.
“시안 경. 전하께선 어디 계십니까.”
“전하께선 이 밀실 안에 계십니다.”
시안이 문을 가리켰다. 시종장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자 시안은 서둘러 덧붙였다.
“범인 심문 중이십니다. 저희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셔서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잠깐. 설마… 지금 전하 혼자서 심문하시는 겁니까?”
아니 이것들이 미쳤나? 시종장의 표정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감정에 시안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그, 아시잖습니까. 전하께서 한번 강경하게 나가시면 누구도 못 말린다는걸요.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시종장은 기가 찼다. 근래 들어 공작의 성격이 지랄맞아진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시안 경!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짓을!”
시종장은 벌컥 성을 냈다. 아니 아무리 전하가 원했다고 해도 할 일 안 할 일을 못 가리나? 어떻게 범인 심문 혼자 한다고 말한 걸 곧이곧대로 따를 수가 있는가!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범인들은 모두 철창 안에 가둬 놨습니다. 무기는 모두 몰수하였고 전하께 위해가 갈 만한 것은 없도록 조치한 뒤 나왔지요. 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같이 기다리십시다.”
“…맙소사. 당장 비키시오! 나라도 들어가야겠으니!”
시종장은 시안을 옆으로 밀쳐 냈다. 억지로 밀려난 시안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필시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것일 테지만, 시종장은 콧방귀만 뀌었다. 그가 공작가에서 일한 기간만 근 사십 년, 겨우 근위대 부대장 따위에 밀려 겁먹을 리가.
‘흥, 낙하산들이 자존심만 세서는!’
본래 공작의 호위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창공의 기사단, 만들어진 지 약 오 년이 조금 넘은 신생 기사단으로 본래 호위인 영광의 기사단들보다 그 격이 조금 떨어졌다.
영광의 기사단들은 왕가일 때부터 창설된 기사단인 데다 각 기사단들 중 가장 강한 기사들이 뽑히기에 대대로 공작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전면적으로 교체된 건 공작이 쓰러진 뒤 공비의 입김이 들어갔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일종의 벌이다. 공작이 쓰러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명목하에 영광의 기사단원들은 창공의 기사단들이 담당하던 자리로 맞바꿔 일하게 되었다. 솔직히 억지였다.
‘말이 좀 험하고 눈치는 없었어도 바뀌기 전 것들이 백배는 나았지. 나 원 참!’
자고로 기사란 좀 뻗대는 맛이 있어야 한다. 시종장이 보기에 이들은 기사치곤 유약하기 그지없었다. 주군이 멋대로 행동하면 뻣뻣하게 아니되옵니다를 외쳐야지 어디 감히 알겠사옵니다 하며 뒤로 물러선단 말인가. 재수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접시 물에도 빠져 죽는 세상. 세상엔 갇힌 범인 말고도 위험천만한 것투성이다. 시종장은 흥흥 콧방귀를 뀌며 밀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전하! 어찌 이런 험한 일을 홀로 하십니까!”
총총총, 빠른 발걸음으로 들어간 시종장은 고개 돌린 공작과 마주하고 벙긋 웃었다. 잠시 안 본 사이 창백한 안색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선연했다.
‘어째 얼굴이 창백하신데.’
심문하느라 힘을 써서 저런 것인가, 아니면 심문하는 내용에 문제가 있었나? 자기가 멋대로 들어와 놀라서 저런 거라곤 생각 안 하는 게 또 시종장답다. 어딘지 모르게 해쓱한 표정의 공작이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는 마른세수를 마친 뒤 더듬더듬 말했다.
“…제퍼슨, 여긴 무슨 일인가.”
“아이고 전하, 그 무슨 섭한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 계시는 곳엔 당연히 제가 있어야지요!”
시종장은 불쾌한 듯 일그러진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아프고 난 이후 까다로워진 것은 기실 공작뿐은 아니다. 그를 모시는 시종장 또한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었다. 모시고 있는 분이 과로로 쓰러졌다는 건 시종장에게 있어 크나큰 불명예. 옆에서 얼른 처치해서 큰일은 모면했다만 그렇다고 쓰러진 일이 사라지진 않는다.
그렇게 촉각을 곤두세우다 보니, 현재 시종장의 풍성했던 머리숱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기민하게 살핀 공작의 모습은 …뭔가 좀 이상했다. 공작이 공작이 아니란 게 아니라, 뭔가 이질적이었다는 뜻이다. 두 눈은 형형하고, 볼살은 움푹 파였으며, 광대는 높고 턱과 이어진 하관은 평소보다 배는 날카롭다. 그래, 전체적으로 성마르고 사나워 보였다.
‘…살이 빠졌어?’
그는 두 눈을 비볐다. 자세히 보니 살이 빠진 건 얼굴만이 아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적당히 탄탄하던 공작의 몸은 전체적으로 한 석 달 열흘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헐렁하게 말라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시종장은 입을 벌렸다. 대관절 심문이 얼마나 힘들었길래 그 짧은 시간 동안 살이 저렇게 빠진단 말인가. 장시간 공연한 무용수가 공연이 끝난 뒤 꼭 저렇게 살이 빠진다고 했는데 심문이 그토록 고된 일이었나?!
“전하! 몸도 성치 않은 분이 이게 무슨 망극할 일입니까? 심문이 그렇게 힘드셨으면 다른 사람을 시키셨어야죠!”
저라도 기다리시지! 시종장은 울부짖었다. 공작은 당황했다.
“뭐? 자네 대체 무슨 소린가?”
“아닌 척하지 마십시오. 차라리 귀신을 속이세요! 어떻게 저를 속이려 합니까? 이게 뭡니까 이게. 대체 뭘 어떻게 하시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얼굴이 반쪽이 되십니까?”
맙소사, 전처럼 또 쓰러지고 싶으십니까? 시종장은 절절히 외치며 가슴을 쳤다. 그는 멀뚱히 서 있는 공작에게 달려가 어깨와 가슴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형편없음에 크게 놀랐다. 아아 전하의 탄탄했던 근육이, 열심히 먹여서 불려 놓은 딴딴한 어깨가! 이렇게 볼품없어지다니!
“이, 이, 이, 무슨! 제퍼슨! 자네 미쳤나?”
퍽!
놀란 공작이 시종장의 등허리를 주먹으로 치다 말고 멈칫했다. 순간 손을 쓴 자기에게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시종장은 이 폭력 사태에도 굴하지 않았다. 아니 외려 더 슬퍼했다.
아아니, 이럴 수가.
“주먹까지 솜방망이 같아지셨어…!”
공작과 아웅다웅한 지 수십 년, 나이 먹고 나서는 그런 일이 없지만 예전 시종장은 가끔 공작과 주먹다짐을 했었다. 공작은 몸 쓰는 데 재능은 없었지만 주먹은 제법 매웠고, 시종장은 둘 다 못했지만 맷집이 셌다. 물론 지금은 자기도 늙었고, 공작도 나이를 먹었으니 피차 장점은 약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창나이 때인 공작의 주먹이 이렇게나 약해지다니….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시종장은 결심했다.
“안 되겠어요, 안 되겠습니다. 조만간 전하께 새로운 보약을 올릴 겁니다.”
약? 공작이 기겁했다.
“약? 아니 갑자기 왜 약 타령인가!”
“단시간에 이렇게 체력이 축나시는데 이거라도 해야죠! 저는 전하께서 또 쓰러지는 꼴 못 봅니다. 일을 못 줄이실 거면 약발로라도 버티세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정상일세!”
공작은 버럭했지만 시종장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원래 아픈 사람은 자기 아픈 줄 모르는 법. 그는 긴말하는 대신 공작의 팔뚝을 들어 그의 눈앞에 가져다 댔다.
“전하, 보십시오. 전하는 이게 정상처럼 보입니까?”
“…….”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직접 자기 참상을 보니 과연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나절만 해도 나름 근육이 자잘하니 박혀 있던 탄탄한 팔이 무슨 여윈 갈대 같았다. 뼈대는 잘 타고나 모양은 보기 나쁘지 않았지만…. 뭐지 이건. 공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이게, 왜 이러지?”
“아이고, 얼마나 상태가 심각하면 본인이 이렇게 되신 것도 눈치 못 채십니까. 왜 이러긴요, 심문하시다 살이 빠지신 것이지요!”
시종장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공작을 바라보다 그의 등 뒤를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옥 안에 가둬 뒀다 한 인물들이 밖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한둘도 아니고 모두 다 나와 있었다. 로메인을 필두로 그 남작과 부하 둘, 모두다. 심지어 그중 둘은 검까지 허리에 도로 찼다.
‘…철창 안에 가두고 검도 빼앗았다며?’
그는 즉시 뒤를 돌아 히스테릭하게 밖을 향해 외쳤다.
“시안 경! 이게 뭡니까! 다 가두고 검도 빼앗았다면서!”
저것들이 일을 제대로 안 했구나! 그래서 전하가 이렇게 됐구나! 시종장의 일갈에 밖에서 안을 흘낏흘낏 훔쳐보던 기사들이 안으로 우르르 밀려들어 왔다. 그들은 철창 안에 가두었던 범인이 밖으로 나와 있는 걸 보고 크게 당황했다. 이, 이상하다. 분명 가둬 놨는데? 당황하는 그들을 보는 시종장의 눈에서 귀화가 뚝뚝 떨어졌다.
“그래, 내 이럴 줄 알았지. 뭐가 어쩌고 저째? 철창문 닫고 검도 빼앗고 뭐? 안전하게 하고 나와?”
“죄, 죄송합니다!”
쩔쩔매는 호위 기사들이 황급히 넷을 도로 구류하려 다가가자 당황한 것은 공작이다. 그는 황급히 그들 사이를 몸으로 가로막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하지 말게.”
“전하?”
“이들 탓이 아니야…! 감옥 문은 내가 열어 줬네. 오해가 있었어.”
모두의 시선이 공작에게 쏠린다. 쏟아지는 시선이 매우 따가웠다. 공작은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둑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인장 도둑이요.”
“그래, 그런 줄 알았지. 그런데 아니야. 내가 잘못 알았네.”
모두 내 크나큰 오해였어.
공작의 말에 모두 당혹했다.
지위가 높은 이는 실수를 해선 안 된다. 설령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많은 숙고 끝에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당사자의 행위에 대한 신뢰 때문으로, 하물며 지금의 공작은 아프다고 여겨지는 상태였다. 이게 공적인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하기에 적절하지는 않았다. 창공의 기사단은 공비의 입김이 상당수 닿아 있는 기사단이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직접 자신의 실수를 거론하다니….
이분이 왜 이러시나. 시종장이 더듬거리며 재차 물었다.
“오해요? 하지만 인장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저자가 가진 물건이―.”
“아냐. 내가 착각했네. 자세히 말을 듣고 보니… 공작가의 인장이 아니었어. 내가 큰 착각을 해서 남작에게 결례를 한 걸세.”
“어떻게 그럴 수가….”
그는 공작의 명으로 따로 보관한 보석함을 떠올리며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인장이라 말했던 그 반지는 현재 공작가의 금고 안에 들어 있었다. 물론 거기엔 아까 압수한 물건들도 함께 있다.
실수라… 그렇다면 그걸 다시 빼내야 하는 건가?
물론 그건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넣는 게 어려웠지 빼는 건 이들이 할 테니까, 그냥 들여보내서 물건 찾아오라 하면 되는 일이다.
헌데 참 이상했다. 그의 등줄기에서 뭔가 차가운 것이 올라오며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공작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도 자꾸 석연찮은 이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은 기실 갑자기 변모한 공작의 상태로 인해 그간 눈이 가려졌던 시종장의 본능이 주인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아마 여기서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시종장은 공작의 정체에도 의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때 렉시가 나섰다.
“괜찮습니다, 전하. 저도 실제로 전하의 설명을 듣고 크게 놀랐으니까요. 제가 가져온 물건이 우연찮게도 전하의 인장과 흡사하고, 또 그게 극히 희귀한 것이라 오해가 불거졌던 것이겠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아마 제가 전하라도 별반 다른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흠, 흠. 그러한가?”
“물론이지요. 전하의 영민하심에 어찌 저 같은 촌사람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오해하신 건 처음뿐이고, 이후 금방 오해를 푸시어 저희의 구류 상태를 풀어 주신 것 아닙니까. 잘못을 범하는 군주는 많지만, 실로 전하처럼 그것을 인정하는 군주란 드뭅니다. 전하의 신하들은 실로 훌륭하신 주군을 섬기고 계십니다.”
실로 청산유수 같은 말이었다. 거기다 그냥 하는 말 같지만, 이 말 곳곳엔 렉시의 노림수가 숨겨져 있었다. 첫째로는 자신의 무죄를 명시하고, 둘째론 공작의 실수를 감싸며, 마지막엔 이것으로 공작이 행한 일에 대한 불신을 종식한다.
시종장은 이 말에 홀딱 넘어갔다.
“이거야 원, 남작께선 보는 눈이 있으시군!”
아까까지만 해도 도둑이라더니 남작으로 호칭이 급격히 바뀐다. 잡아먹을 듯 보던 시선도 마치 따스한 봄바람처럼 훈훈했다. 사람이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도 되나. 시종장의 태도 변화는 상당히 극적인 면모가 있었지만 렉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목적은 달성했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걸로 내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군.”
내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네만…. 공작이 멋쩍은 듯 중얼거리자 렉시는 싱긋 웃었다.
“금칠이라뇨, 저는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로메인 경, 제 말이 틀린가요?”
옆에 서 있다 갑자기 이름이 불린 로메인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게 맞는 것이겠지요. 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요! 누가 있어 저 말이 거짓이라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그간 공명정대히 모든 일을 처리하신 게 이렇게 돌아오는 것이지요.”
시종장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는 호감 어린 눈초리로 남작과 로메인을 바라봤다.
사실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공작이 실수했단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아까 일별했던 공비와의 대화로, 버나드가 소공작이 될 날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진통 아닌가. 그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공작이 이런 실수를 했다는 게 알려지면 공작의 입지는 줄어들 것이다. 공작은 버나드가 소공작이 되더라도 실권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아픈 와중에도 일을 계속 놓지 않았던 건 그가 단지 일 중독자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아직 자신이 정정하다는 걸 잔뜩 과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헌데 그 와중에 이런 큰일이 벌어지다니….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던 시종장은 남작이 한 말 덕분에 거의 죽다 살아난 것 같았다. 말 몇 마디로 이 상황을 반전시켜 주다니 저이는 마법사가 아닐까? 거기다 적절하게 대답해 준 로메인 덕분에 이 말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그는 진심으로 남작이 고마웠다.
‘역시 로메인 경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어쩜 저렇게 재수가 없냐고 혀를 끌끌댄 건 이미 잊고 없다. 실로 편리한 두뇌였다. 데리고 온 애인이 도둑이다란 말에서 뒤의 도둑이다가 빠지니 남은 것은 애인이란 단어. 시종장의 뇌리에 남아 있던 두 사람 사이는 곧 이렇게 발전했다.
‘전하와 곧 친척이 될 작정을 한 거겠지? 그러니 이렇게 내조를 해 주지.’
시종장은 이 일이 렉시가 로메인을 보아 넘어간 내조의 일종이라고 파악했다.
‘그러니까 남작은 마도구를 팔려고 후견인을 찾다가 로메인 경과 만나 정분이 난 것이야. 로메인 경은 애인이 마도구를 판매하는 걸 도와주고자 공작성에 함께 온 것이고. 남작이 이렇듯 대범하게 넘긴 걸 보면 둘 다 서로 간의 마음이 보통이 아닐 것이 분명해. 이런 역경과 고난을 함께 이겨 낸 애인 사이는 끈끈해지기 마련이니…. 후작가에 곧 큰 경사가 있겠구나!’
이래저래 비약인 논리 전개였지만 위기에서 벗어난 사람의 의식이란 본래 이렇게 비논리적이다. 곧 있을 경사에 만면이 싱글벙글한 시종장을 본 렉시는 두 눈을 깜박였다.
‘…내가 말을 그렇게 잘했나?’
아무리 렉시라도 시종장의 내부에서 저런 망상이 자라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잠시 숙고하다 생긋 웃었다. 뭐가 어쨌건 이런 건 숨기는 게 있는 그들에게 매우 도움이 된다. 그는 시종장의 호감에 편승해가기로 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이렇게 잡혀 올 때도 저는 전하께서 모든 일을 명명백백히 밝혀 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지요.”
“아무렴! 우리 전하께서 어떤 분이신데!”
“전하께선 제가 그간 만난 그 어떤 귀족들보다 더 귀족적이고 훌륭하신 분입니다. 그렇지. 제가 이 마도구를 판매하기 위해 제국 전역을 돌아다닌 걸 혹 알고 계십니까?”
“허어…. 그랬습니까?”
렉시의 말에 시종장의 얼굴이 흥미롭게 변했다.
“네, 물경 이 년 반을 넘게 돌아다녔지요. 참으로 고된 시간이었습니다.”
렉시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년 반? 듣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동그래지는 가운데 시종장이 참으로 희한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게나 말입니까? 거 참 이상한 일이로군요. 남작의 마도구는 문외한인 제 눈에도 제법 잘 팔릴 물건 같았는데요…?”
“네 그건 그렇습니다. 저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게 정확히 말하자면… 이 물건을 〈잘〉 매입해 줄 매입자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여기서 더 깊은 이야기를 하려면 필연적으로 외모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자고로 미인의 얼굴이란 만인이 궁금해하는 법이고, 그러면 필시 얼굴을 내보여야 할 터. 렉시는 재수가 없는 날에 더한 사고를 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대신 열심히 아부를 떨었다.
“전하께선 제가 가지고 온 물건의 가치를 절하하지 않은 분입니다. 또한 위력으로 보물을 탐하지 않은 유일한 분이기도 하지요.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를 핍박하지 않고 정도를 행하는 건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당연한 걸 행하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전 제국 전역을 돌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었습니다만 이렇게 전하로 인해 그걸 다시 회복했습니다. 전하, 저는 전하라는 분을 만나 이렇게 연을 맺게 된 것을 일생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절절하고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아첨이었다. 허나 누군가에겐 이것이 아첨이 아니라 진실이다. 시종장은 기분이 좋은 얼굴로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일은 다 마무리된 것인지요?”
“물론이지요. 저는 이미 전하와 묵은 감정을 털어 내기로 한 지 오래입니다.”
“그렇군요. 허면 남작께선 앞으론 어찌하실 예정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들은 앞으로 내 성에서 얼마간 머무를 거다.”
“네?”
공작의 말을 들은 시종장의 눈이 순간 반짝하고 빛났다.
“머무르실 곳이… 공작가란 이야기입니까?”
“그래, 이들 모두 여기에 머물 테니 자네가 알아서 방을 좀 내주도록 하게.”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하. 영주님 일행은 저희 후작가에서 머물러도 됩니다.”
로메인은 공작의 말에 살짝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이것은 논의에 없었던 일인데. 허나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비좁은 후작가보다야 넓은 공작성이 여러모로 낫지 않겠느냐?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있을 텐데.”
“하지만….”
로메인은 렉시의 얼굴을 흘낏 바라보았다. 후작가면 몰라도 공작성에서 저 외모를 숨길 수가 있을까? 그를 바라보는 렉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 말대로 한다는 의미이리라.
이것은….
그는 짧게 고민하다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허면 저도 머무르지요.”
“…네가?”
공작은 이상한 눈으로 로메인을 보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살고 있으면서 네가?
“제가 모시고 온 분을 어떻게 이곳에 홀로 두고 가겠습니까. 남작님이 이곳에 계신다면, 저 또한 이곳에 있을 것이니, 그리 아십시오.”
공작이 렉시를 묶어 두는 이유는 알 법했다. 이 셋은 같은 배를 탔으나 아직은 서로를 믿기엔 어렵다는 것일 터. 피로 엮인 로메인은 모르나, 이쪽의 입은 믿기 어려우니 애초에 단속한다는 의도일 것이다.
로메인이 형형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자, 그는 곧 시선을 피하며 혀를 찼다. 아마 자기 생각이 어느 정도 간파되었다는 걸 눈치채서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그는 로메인의 의사를 거절치 못할 것이다. 그는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감사합니다.”
*****
밀실에서 나온 렉시와 로메인 일행은 시종장을 따라갔다.
“이곳입니다.”
“…오.”
렉시는 방을 둘러보며 슬쩍 감탄했다.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부유하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방이다. 급한 대로 마련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방은 화려하고 컸다. 응접실과 침실이 따로 분리된 것은 물론이고, 시중드는 시중인이 머물 곳까지 붙어 있다. 확실히, 후작가보다 공작가의 거처가 좋긴 좋구나. 감탄하는 렉시를 보며 시종장이 으쓱거렸다.
“사실 지금 시기엔 방문하는 객들이 많지요. 전하께서 영지에 머물기 시작하신 이후 그 수는 계속 증가했기에 본래는 방이 없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을 위해 매년 객실 몇 개는 이렇게 따로 빼놓곤 한답니다.”
“아, 그렇지요. 확실히 신년엔 방문객들이 많아지니….”
영주인 렉시는 그의 설명을 곧바로 이해했다. 렉시의 작은 영지도 신년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농번기에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이 시기에 해치우기 때문이다. 세금 문제, 결혼 상담, 주민의 이주 대책, 무너진 제방 수리나 축사 보수 등등등….
뭐 공작령에 오는 사람들의 목적은 물론 남작령의 것과는 다를 것이지만. 시종장은 가슴을 쭉 펴고 코끝을 올렸다.
“이 방은, 황가의 분들이 머무시는 방을 제외한다면 가장 좋은 객실용 방입니다. 즉 이 방을 사용하시는 것 자체가 공작가의 큰 우방이자 친분의 증표라는 것이죠.”
“…후의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생각보다 설명이 거창하다. 렉시가 반사적으로 고맙다 하자, 물끄러미 보고 있던 로메인의 얼굴이 아주 약간 불퉁해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작게 말했다.
“…후작가도 이 정도 방은 있습니다.”
“네?”
렉시가 눈을 깜박였다.
“일전에 머무신 곳은 너무 급하게 마련한 곳이라 초라했던 것뿐입니다. 공작가의 성에 비한다면야 작을지도 모릅니다만, 후작가의 저택은 절대 좁은 편이 아닙니다.”
“…?”
렉시의 눈썹이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로메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남작님을 홀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돌아가시면 더 좋은 방으로 드릴 계획이었….”
“로메인 경.”
렉시는 싱긋 웃으며 로메인의 손을 잡았다. 크고 단단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가슴까지 따뜻하게 올라온다. 렉시는 로메인의 푸른 눈을 보며 작게 미소했다. 렉시가 이곳에서 태평하게 구경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다 로메인의 존재 때문인 걸 아직 모르는 걸까.
그는 자신이 아까 얼마나 감동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렉시가 말했다.
“로메인 경. 이곳이 화려하긴 하지만, 저는 후작저도 충분히 좋았어요. 제가 혹시 기분이 좋아 보인다면… 그건 공작가가 화려해서가 아닐 겁니다. 이건 경이 저를 따라 이곳에 함께 있어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저, 말입니까?”
“아까 경이 나서 주셨을 때 얼마나 안심했는지 몰라요. 저는 그저 경을 믿었기에 전하의 성에 머무는 데 거침이 없었을 뿐인걸요.”
이곳에서 제가 믿는 것은 오로지 경뿐이랍니다.
렉시의 웃음에 로메인의 귀가 슬쩍 빨개졌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시종장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올랐다.
미혼인 시종장이지만 그도 한때 저럴 때가 있었다. 짙은 노을 아래 펼쳐진 붉은 머리칼, 마치 귀여운 고양이 같았던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 그땐 참 좋았지, 아무렴. 아스라이 떠오르는 첫사랑의 그림자를 생각하던 그는 순간 앗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이쿠,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이곳에 오기 전 정무실에 가겠다는 공작을 떠올린 시종장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몸으로 일을 보시겠다는데 그 자리에 내가 없다니! 그는 감상을 지우고 이 보들보들한 공기 밖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옆의 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만찬 시간은 한 시간 전 시중인을 보내 알려 드리도록 하겠노라. 이 말을 끝으로 시종장은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다 발을 멈췄다. 그는 께름칙한 얼굴로 뒤를 돌아 방에 남은 이들을 응시했다.
“아니 나오십니까?”
“…예?”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변했다. 나오라고? 여기 우리 방이라면서?
“혹시 곧 만찬 시간입니까?”
조금 이르지만 밥 먹는다면 나가야지.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걸. 렉시 이하 일행들이 주섬주섬 옷매무시를 정돈하자 시종장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는 로메인을 콕 찝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아니라 로메인 경을 말하는 겁니다. 로메인 경. 경은 따라 나오셔야죠. 경의 방은 따로 있습니다.”
내 방이 따로 있다니… 아니 왜 그런 낭비를? 로메인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저는 다른 방은 필요 없습니다만….”
이 말에 시종장이 불에 덴 듯 펄쩍 뛰었다.
“아아니 경! 마음이 급하신 건 알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지킬 건 지키셔야죠! 같은 방이라니요?”
시종장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어떻게 백주 대낮에 당당히 둘이 방을 같이 쓴다고 말한단 말인가. 그는 무섭게 로메인을 질책했다.
“사람 입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아무리 기정사실이 됐더라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요. 다른 사람들이 경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어떻게 보냐니…. 방을 같이 쓰는 게 그렇게 문제인가?
“사람들 사이에 무슨 뜬소문이 들 줄은 모르겠으나… 뭐든 곧 가라앉을 겁니다. 소문이야 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 않습니까. 조금 귀찮긴 하겠지만…저는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로메인의 말에 시종장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아아니 이분 좀 보게. 누가 들으면 정말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아니 경만 좋으면 답니까? 경이야 소문이 어떻게 나건 신경 안 쓰시는 분이죠. 하지만 남작님은 무슨 죕니까? 그분을 비방의 한가운데 놓아서야 쓰겠습니까?”
나… 나? 렉시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로메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 일이 영주님께까지 폐가 된단 말입니까.”
“말해야 무엇합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소문은 그렇게 쉽게 사그라들지도 않을 겁니다. 요즘 세상이라고 뭐 다를 것 같습니까?”
“그, 그런…?”
그는 시종장이 말하는 게 두 사람 사이의 혼전 야합이라는 걸 알지 못한 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종장이 그런 그의 고민에 쐐기를 박았다.
“고민 마십시오. 아직 한창때인 두 분을 멀리 떼 놓을 만큼 이 제퍼슨, 야박한 자는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흉볼 것만 피하자 이겁니다. 로메인 경의 방은 바로 이 옆방으로 안내해 드릴 테니…. 제발 절 좀 따라와 주십시오. 저 혼자 좋자고 하는 일입니까? 두루 좋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같은 방이나 옆방이나 그게 그거 아닐까. 정말 그거로 돼?
로메인은 생각했지만, 시종장은 소문의 전문가였다. 방을 나눠 쓰는 것만으로 말이 나지 않는다니….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크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로메인은 엉거주춤 서 있는 렉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영주님, 저는 아무래도 옆방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네, 로메인 경. 저는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필립과 요수아가 함께 있으니까요.”
렉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로메인의 얼굴엔 어쩐지 수심이 가득했다.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터벅터벅. 로메인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종장을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너 나 할 것 없이 퓨― 하고 한숨을 내쉰다. 요수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툭툭 주물거렸다. 아이고, 아이고.
“필립 님, 저 시종장 할아버지 꼭 우리 성 집사님 보는 거 같아요. 어쩜 저렇게 말이 많지?”
“동감이다. 잔걱정 많은 것도 똑같은 것 같군.”
필립은 주저앉은 요수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렉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저게 대체 뭔 말입니까? 소문이 어쩌고 하는 거 저는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던데. 알아들으신 겁니까?”
“…아니, 전혀.”
렉시는 머리를 긁었다. 사실 그도 도통 뭔 소리를 하는지 알아먹지는 못했다. 그냥 뭐라고 말을 하기에 장단을 맞춘 것일 뿐. 대충 이 성안의 특수 언어라고 생각한 그는 혀를 쯧 찼다.
“뭐, 큰 상관은 없겠지. 뭐 얼마나 큰일이겠어?”
생각보다 큰일이었지만 렉시는 모른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셋 다 몰랐기 때문이다.
“맞아요. 거기다 영주님은 지금 그것보다 큰일이 남아 있잖아요.”
큰일? 렉시가 굽어보자 요수아가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만찬장에 그 얼굴 어떻게 하고 가실 거예요?”
“……!!”
만찬장은 무언가를 먹는 장소. 고로 얼굴을 가리지 못한다. 아뿔싸, 이를 어쩌지? 요수아의 지적에 모두의 얼굴이 싸악 하고 굳었다.
“어서 오게.”
이날의 만찬은 공작의 개인 만찬실에서 이루어졌다. 외부인의 침입을 엄금하기에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 제격인 장소였다. 시종의 안내로 만찬실에 온 렉시는 깜짝 놀랐다. 공작, 그러니까 플로랑 후작이 먼저 도착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저희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쓸 것 없다는 태도였다.
“그럴 것 없네, 이 자리는 자네들을 위해 마련한 거니까. 나도 방금 도착했어. 거기 앉게나.”
그녀는 렉시에게 자리를 권하다 말고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참으로 괴상한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네, 얼굴의 그건 또 뭔가?”
“…….”
렉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긴 그냥 넘어가기엔 좀 눈에 많이 띄지. 솔직히 하고 오면서도 좀 많이 쪽팔렸다. 쪽팔림에 잠깐 숨을 멈춘 렉시는 곧 한숨 쉬듯 말했다.
“…복면입니다.”
“…복, 뭐?”
그녀는 순간 쿨럭, 하고 기침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그건 복면이라기보단 누더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로메인이 매어 줬던 베일을 겹치고 겹쳐, 눈 부분만 대충 도려내 뒤로 묶었다가 콧구멍까지 판 그건 …사실 매우 웃겼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놓고 온 짐이 있다면 이것보단 나은 걸 썼을 테지만 아무것도 없으니 대강 할 수밖에. 사실 렉시도 알았다. 이 누더기가 굳이 복면과 같은 점이 있다면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정도라는 걸.
뭐 당사자가 그걸 복면이라고 우긴다면야 그렇게 봐 줄 용의는 있긴 하다만….
그녀는 혼란한 얼굴로 렉시를 보았다. 이쯤 되면 슬슬 궁금한 게 인지상정. 대관절 저 이는 왜 저렇게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 처음 봤을 때도 기이하게 생각했었다. 말을 안 했을 뿐이지…. 그녀는 치솟아 오르는 궁금증을 못 이기고 결국 묻고 말았다.
“이보게. 내 정말 이해가 안 가서 물어보는데…. 그건 자네가 사는 지역의 풍습인가?”
“예?”
“뭐 그런 것 있잖은가. 외지에 나가면 이야기는 같은 성별만 나눌 수 있다든가, 윗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같은 신분의 사내만 가능하다든가. 혹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 때는 꼭 다리를 외로 꼬고 이야기해야 한다거나…. 뭐 이런 거 말이네. 그게 그건가?”
제국에는 일원화된 예법이 있다. 하지만 제국이 워낙 넓은 터라 널리 퍼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가 방금 예시로 든 것은 실제로 어떤 지역에서 행해지는 일부 예법 중 하나다. 공작은 그가 하는 행위가 그런 예법 중 하나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진지하고 독창적인 의견이다. 렉시가 어설프게 웃자 플로랑 후작은 참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그냥 하고 싶어서 한다는 말인가.”
“네… 굳이 말씀드리자면 제 얼굴이 조금 남달라서요. 생활하기 불편해서 이렇게 가리고 다닙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남다르게 예뻐서 가리고 다니는 거니까. 하지만 보통 빼어나게 잘난 사람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경우란 많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플로랑 후작은 렉시 얼굴이 생각보다 좀 못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눈동자나 입술을 보면 그렇게 못나 보이진 않는데. 아, 혹시 조화가 망한 경우인가? 하긴 아무리 예쁜 눈과 입이라도 배치가 잘못되면 못생겨 보이기 마련이지. 얼굴에 흉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에둘러 말하기보단 흉이 있다고 말을 했을 테니…. 뭐 어쨌거나 로메인은 저자의 내면을 보고 끌린 거란 말이 되는군.’
허, 그런가. 후작은 납득했다. 그간 로메인에게 여자를 붙이려다 허탕친 작전들이 왜 실패했나 이제야 이해가 갔던 것이다. 이럴 수가, 그랬던 건가?!
‘성별을 막론한 지성미가 넘치는 게 취향이었을 줄이야…!’
실로 생각지도 못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남자는 미녀를 좋아한다는 고정 관념에 휘둘려 다른 방면으론 시도도 못 한 게 패인이었던 것이다.
나 원 무슨 취향이 저렇게 독특해?
“거참….”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간 접근하거나 접근시킨 여자들을 떠올리니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다. 과연, 모두 한결같이 미인이었지만 지성이 반짝이진 않았었지….
그녀는 렉시의 옆에 서서 시선을 고정하는 로메인을 몰래 흘겼다. 윗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넋을 잃을 정도로 그 사람이 좋단 말이지?
그녀는 로메인을 도끼눈 뜨고 바라보다 단념했다. 그래, 이제 와서 취향이 다 무슨 소용인가. 기분이 복잡해진 후작은 일단 밥이나 먹기로 했다.
“…그래, 알겠네. 그러지 말고 모두 편히 앉게나. 이제 만찬을 시작하지.”
“네,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종들이 줄줄이 접시들을 들고 왔다. 돔 형태의 뚜껑을 열자 뜨거운 음식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식전 빵, 수프, 샐러드, 생선, 다리가 넷인 육류와 하늘에서 나는 새 요리…. 사람 수는 다섯인데 나오는 음식은 스물이 먹어도 남을 양이다. 식탁 한가득 음식을 내려놓은 시종들이 각자 일행 옆에 자리하자, 공작의 음성이 그들을 내쳤다.
“이만 너희는 나가라.”
‘시종들을 내보낸다라.’
밀려 나가는 시종들의 맨 꼬리 뒤에 선 폴은 생각에 빠졌다. 올해 그가 성에서 일한 지는 만 3년 차. 공작의 사석 만찬은 성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고참들만 들어가는 곳이다. 이제 겨우 3년인 그가 오늘이나마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솔직히 우연이었다. 본래 이 자리에 있을 고참 시종이 바로 직전 배탈을 일으켰는데, 때마침 그 옆에 있던 게 폴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공작의 사실은 고사하고 얼굴조차 제대로 못 볼 직분이었다. 폴은 생각했다.
‘만찬에서 굳이 내보낸다는 건 굉장히 비밀스러운 일을 의논한다는 건데.’
만찬에서 시종들은 그냥 지키고 서 있기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만찬장에서 귀족들의 손과 발이 된다. 시종들이 멀리 있는 음식을 날라 주고, 경우에 따라선 직접 먹여 주기도 한다. 헌데 이런 시종을 만찬에서 일부러 내보낸다? 이건 지금부터 누가 알아선 안 되는 은밀한 무언가가 논의된다는 이야기다.
‘좋은 걸 알아냈어.’
처음 공작성에 들어왔을 적, 폴에겐 아주 야심찬 꿈이 있었다. 시종들 틈에서 두각을 나타내 공작의 신임을 얻고, 나아가 시종장의 자리까지 올라가겠노라 하는 그런 꿈. 그를 교육했던 자는 그런 폴에게 다른 귀족 가문에 들어가라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자고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 그런 마음이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다. 공작가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다른 귀족 가문과는 달리 이곳은 기존 시종들끼리의 연대가 대단히 강했고, 새로 온 시종들을 시험하는 기간이 무척 길었다. 사람은 항시 뽑고 있었지만, 공작가의 업무를 보조하는 건 오랫동안 근무했던 자들의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폴은 시종장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 공작의 옆에서 정무 일을 같이 보는 시종장은 종신직. 즉 죽고 나서야 가능한데, 여기엔 폴 같은 사람이 수도 없었다.
‘아무리 지금 시종장이 나이가 먹었다지만 최소 이십 년은 더 살 거야. 거기다 내 위엔 선배들이 너무 많지.’
시종장이 죽더라도 그에겐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거의 백 단위를 넘어가는 선배들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그가 찾은 것은 다른 끈이었다. 공비, 그리고 버나드로 대표되는 공비파로. 물론 지금은 공작파가 득세하고 있다. 하지만 미래엔 공비의 아들이 공작이 될 것 아닌가. 특히 요즘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그날이 곧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폴은 줄을 갈아탄 자기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처음 명대로 데려가지는 못하지만….’
폴은 자기 앞에 앉아 있던 여자의 뒷모습을 생각했다. 얼굴을 가렸기에 누구도 보지 못한 여자는 볼품없는 몸매의 소유자였다. 키는 겅중하니 컸고, 가슴은 절벽. 즉 여성스러운 구석은 한 군데도 없다. 그저 입은 옷만 아니면 남자로 착각할 정도였다.
‘본인이 말한 바에 따르면 얼굴도 못났다는 거 같은데 말야. 대체 뭐가 매력이길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저 여자가 로메인 경의 정인이라는데…. 참, 저런 여자를 만난다는 로메인 경은 눈이 바닥에 달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뭐가 어쨌건 로메인 경은 그 여자와 함께 공작의 만찬에 초대받았다. 거기다 그냥 만찬도 아니고 비밀 만찬에.
‘둘 사이를 전하께서 인정했다는 거지. 저건.’
로메인 경이 누군가를 데려왔고 공작이 그걸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 둘이 만나 논의할 일은 하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어서 가서 알려야겠어.’
시종들의 무리에서 폴은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고참을 대신해 잠깐 자리를 지킨 터라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다 하니 막는 사람은 없었다. 폴은 그렇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척하며 버나드의 방으로 달려갔다. 달빛 받은 그림자가 어두운 꼬리처럼 그 뒤를 따라붙었다.
“이제야 제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줄줄이 시종들이 나가고, 사실의 문이 닫히자 공작은 긴장을 풀었다. 뜻밖의 사건들이 연속된 탓에 공작, 아니 플로랑 후작은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는데, 아마 이건 비밀을 향유할 동지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밀을 들킨 것은 큰일이다. 하지만 그 들킨 자가 입이 무거운 상대라면 그건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었다. 자고로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법이라. 그간 혼자 뛰다 죽을 뻔한 과거를 생각하니 그녀는 오늘 일을 일종의 전화위복이 아닌가 하고 여기고 있었다.
‘뭐 그 괴물은 정말로 무서웠지만.’
대제의 칙령이라니.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오한이 든다.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눈앞의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일단 같은 배를 탄 동지가 된 기념 축배라도 들까.”
후작의 말에 렉시가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그리고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후작만 들리게 작게 물었다.
“헌데 여기 방음은 제대로 됩니까?”
“…여긴 마법사가 마법을 건 곳이네. 즉 이 방 자체가 일종의 마도구 안이란 거지. 내가 괜히 자네를 여기에 데려왔겠나?”
놀라울 정도로 영리한 주제에 이상한 데서 멍청한 질문을 한다. 후작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말하자, 렉시는 약간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돌다리도 두드려 봐야 하지 않습니까. 저도 혹시나 해서 여쭌 겁니다.”
그리고 후작을 따라 술잔을 든 렉시는 술을 마시다 말고 도로 뱉어 냈다. 엄청난 독주다. 향이 달콤하고 단박에 마시길래 단 술인 줄 알았더니 뭐야, 이거. 엄청 독하잖아? 새빨개진 얼굴로 허둥대는 렉시를 보던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후후…아직 어리군.”
“제가 술에 약하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어린 건 아닙니다.”
좀 이르게 결혼하는 집안 같았으면 결혼해서 애도 있을 나이. 렉시가 정색하자 후작이 난처하게 웃었다.
“음, 놀리는 걸로 들렸는가? 그렇다면 미안하네. 결단코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그냥 좀… 새삼 놀라워서 한 소리였을 뿐.”
실제로 그녀는 조금 감탄하는 의미로 이 말을 했다. 술맛도 모르는 젊은이에게 단 몇 마디 말로 전체 상황을 읽혔다. 자연스럽게 자신과 그를 비교해 본다. 만일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어느 정도 이상한 기색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 같은 재기는 발하기 힘들 것 같았다.
딱히 서로 지략을 겨룬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패배한 기분이 드는 것은 그녀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혈기가 넘쳤던 젊은 날의 자신이라면 여기서 호승심이 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과 반추다. 후작은 피식 웃었다.
‘내가 정말 늙긴 늙었나 보군.’
이래저래 로메인은 참 재미있는 사람을 택했다. 대제의 칙령에, 페르귄의 남작이라….
그녀는 남아 있는 술을 들이켰다. 반 정도 차 있던 포도주가 한순간 사라진다. 단박에 술 한잔을 넘기는 후작의 주량은 상당히 호쾌한 면이 있었다. 그런 후작을 보며 렉시는 약간 질린 얼굴을 했다.
‘체력 진짜 대단하다.’
오늘 그 난리통을 겪고서도 정무를 보고, 만찬장에 와서 독주까지 마시다니. 공작은 아무래도 저 체력을 보고 대역하라고 말한 게 아닐까? 실로 합당한 의문이었다. 저렇게 마셔도 몸에는 이상이 없나? 아, 그러고 보니…. 렉시는 궁금한 얼굴로 질문했다.
“헌데 각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몸?”
“네, 그 변하신 것 말입니다.”
아, 그것 말인가. 후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 그 질문이 나오나 했지. 그녀는 까칠하게 말라 버린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난 괜찮네. 솔직히 말해 괜찮다 못해 날아갈 기분이야. 사실 이전의 마도구는 신묘하긴 했으나 사용자의 편의를 봐주는 건 아니었거든. 전하로 변모를 시작하면 몸이 마치 불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꽉 조여 숨이 막히곤 했지.”
마치 맞지 않는 옷에 몸을 억지로 맞추는 기분? 후작은 그에 비하면 이 마법은 이상할 정도로 편하다고 평했다.
“헌데 이건 마치 내 몸 그대로인 것처럼 자연스럽네.”
인위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 중 어려운 것은 당연히 후자 쪽이다. 변화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건 그게 더 뛰어난 마법이란 뜻이었다. 렉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마법이 더 고위 마법이란 이야기군요. 다행이긴 합니다만 이상하네요. 그것의 마법이 기존의 것보다 못하다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더 나은 마법을 부릴 수 있는데 왜 몸을 이렇게 변화시켰을까요? 전하의 모습을 못 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법을 부리고 간 그림자는 새 마도구를 만들어 준 뒤 곧바로 사라졌다. 때문에 이 질문은 대답할 자가 없었다. 부서진 마도구를 고쳐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눈에 띄게 달라지게 만들어 놓는대서야 골치가 아플 뿐이다. 다년간 연기력을 갈고닦은 후작이 아니었다면 아마 큰 곤욕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이 마법을 부리고 간 그림자를 생각하며 렉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자기가 실수한 걸 해결하고 가네 어쩌네 하더니 순 말뿐이네. 그 그림자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인간이 아니라서 사람에 대한 관점이 다른 건가. 아니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곰곰이 생각하던 둘에게 돌파구를 마련해 준 건 잠잠히 있던 로메인이었다. 팔짱을 끼고 묵묵히 있던 그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게 현재 전하의 모습일 거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예?”
“현재 모습?”
네, 그렇습니다. 로메인은 약간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두 분처럼 마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과거 전하가 그렇게 형편없이 마르셨을 때를 기억하고 있지요. 제가 어릴 적 있었던 북방의 야만인 정벌 사업 때 꼭 그런 모습이셨었습니다.”
로메인의 눈동자가 가늘게 변했다. 그는 과거를 되짚는 것처럼 먼 곳을 응시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로메인의 말을 들은 후작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그때라면 …, 한 이십 년 전 일이던가?”
“그보다 더 된 것 같습니다만, 대충 그렇습니다.”
“그래,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폐하께서 대대적으로 벌인 사업이라 차출된 인원도 많았고…. 헌데 그때 자네 퍽 어렸을 텐데. 그게 아직 기억이 나나?”
“어리지만 어느 정도 인지 능력은 있었을 때니까요. 더더군다나 정벌 사업은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돌아온 걸 알고 인사하러 갔다 큰 충격을 받았었지요.”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지금도 잊기 힘듭니다. 로메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지금 전하의 모습은 그때와 거의 흡사합니다. 게다가 …우리 논리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전하는 벌써 반년째 야인이지 않습니까?”
용의 피를 이어받아 건강체라도 사람의 체력엔 한계가 있다. 거기다 공작은 이미 나가기 전 한 번 쓰러진 상태 아닌가. 로메인의 말에 후작의 얼굴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럴 리가…. 전하와 함께 간 놈이 그걸 두고 볼 놈이 아닌데.”
“같이 간 사람이 누굽니까?”
“자네도 알 거네. 그 전하의 금붕어 ㄸ… 이 아니라, 시라노 경 말이야.”
“…아, 그 시라노 경. 그렇군요. 그분이라면 과연 전하를 따라갈 만한 사람이지요.”
전쟁터에서 공작의 목숨을 구한 이 기사는 평민 출신으로 공작의 개인 호위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비록 태도는 평민이라 건들거렸지만, 그 검 솜씨만큼은 일류에 충심 역시 대단해서 다들 호위가 되는 걸 반대하지 못했다. 로메인은 말했다.
“시라노 경이 함께 있다니 안전하시긴 하겠군요. 하지만 그래도 상황은 다를 바 없습니다. 애초 기사와 일반인의 체력은 다릅니다. 시라노 경이 아무리 고군분투하더라도 전하께서 체력 소모하는 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 마른 모습이 전하의 현재 모습이라, 이 말인가.”
“예전의 마도구는 전하가 공작저에서 나가기 전의 모습을 본뜬 것일 겁니다. 과거의 마도구보다 현재의 것이 그렇게 뛰어나다면… 그게 전하의 현재 모습을 반영하는 바람에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논리정연한 의견이었다. 렉시는 로메인의 말을 듣고 아까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 남긴 말을 떠올렸다.
‘같지는 않지만 같은 것이다…라고 했지.’
마법사라 수수께끼를 좋아해서 그렇게 말하고 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둘 다 너무 마법적으로 꼬아서 생각하다 보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복잡한 실타래가 단박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것은 후작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약간 올라왔던 핏기가 도로 쭉 하니 빠져 버린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내뱉듯 말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큰일 아닌가. 이 정도면 필시 건강에 문제가 있단 의미인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시라노 경이 있으니 목숨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하지만 각하, 전 더 이상 이렇게 미적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로메인은 강경하게 공작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작 역시 로메인의 의견에 대부분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렉시는 애매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헌데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수가 없을 텐데요. 일단 어디 계시는지 지금 아무도 모르지 않나요?”
“네 영주님, 실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떻게든 찾아내야죠.”
어떻게든 찾아낸다? 렉시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떠보듯 물었다.
“저기, 혹시 경이 직접 나가서 찾고 그러실 건 아니지요?”
“…일단 그럴 계획이었습니다. …안 됩니까?”
이 무슨 꽃밭인가. 당연히 안 되지! 렉시는 입을 쩍 벌렸다.
“경! 전하가 왜 나가셨는지 잊었어요?”
공작의 사생아 건은 아무도 모르는 극비다. 렉시의 만류에 로메인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찾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소고 자시고 원래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새어 나갑니다. 나갈 때 경이 혼자 나가지는 않을 것이고, 누구를 데리고 가실 것 아닌가요. 경,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경처럼 훌륭한 기사의 표본은 아니에요.”
사람의 입이란 간사한 것이다. 렉시는 이득이 달려 있으므로 이 상황을 말하지 못한다. 렉시의 부하들 역시 똑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어떠한 이득이 있는가?
사람의 다짐은 돈과 권력과 이득 앞에선 무용지물이기 십상. 로메인 같은 기사가 또 있다면 모르지만 그런 자가 많았다면 렉시가 로메인에게 그토록 감탄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렉시의 만류에 로메인의 단단했던 표정이 약간 허물어졌다.
“…영주님께서 저를 그토록 평가해 주시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찾으러 나가는 건 나도 반대네. 전하께서 기껏 나가신 일을 망칠 수야 없지.”
복잡한 얼굴로 둘의 공방을 보던 후작이 혀를 차며 덧붙이자, 로메인은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로 후작을 노려보았다. 왜 요놈아. 말 끊으니 기분 나쁘냐? 후작은 콧김을 흥 내뿜으며 이죽거렸다.
“허면 어쩌실 계획입니까?”
누가 찾으러 나가는 건 안 된다. 하지만 전하는 찾아야 한다. 등치가 불가능한 두 가지 명제를 두고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로메인의 사나운 표정에 후작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우리가 찾으러 갈 수는 없어. 오시는 걸 이대로 기다릴 수도 없지. 그렇다면 그분이 직접 오시게 만들 수밖에.”
플로랑 후작은 잠시 숨을 멈추다가 곧바로 말했다.
“로메인. 자네 장가가게.”
모두 순간 얼이 빠졌다.
장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로메인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게 무슨 엉뚱깽뚱한 소린가? 장가? 저게 지금 내가 아는 장가가 맞지?
“장가 몰라? 남자는 장가, 여자는 시집, 통틀어 결혼. 이거 말이네, 이거.”
“그 정도는 저도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설마 단어 뜻을 몰라 여쭌 것 같습니까?”
사람이 기가 차면 숨이 막힌다더니 자신이 딱 그 짝이다. 로메인은 정말로 난생처음 겪는 어이없음에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장가라니요. 장난치지 마십시오, 후작. 제가 왜 장가를 갑니까?”
“이유 말인가? 방금 말했잖나. 전하를 찾기 위해서라고.”
평소 로메인은 감정 표현이 격렬하지는 않은 편이다. 기사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감정적 혼란이 있더라도 얼굴에 그것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데, 지금은 그조차 까먹었다. 그는 동문에서 자기 배경 자랑하다 얻어터진 귀족을 보는 얼굴로 후작을 응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수작이지?
“…아, 지금 전하를 찾기 위해 저더러 장가가라고 하신 겁니까?”
“오, 이제 이해했군. 바로 그거야.”
“이해요? 지금 이게 이해하는 걸로 보입니까? 후작! 대체 무슨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는 겁니까?”
로메인은 결국 화를 냈다. 하지만 후작은 덤덤했다. 그녀는 외려 한심하다는 듯 로메인을 보며 한탄했다.
“엉터리라니…! 자네 오랜만에 성에 돌아와서 머리가 안 돌아가는군. 지금 이 상황에선 정말 이것만 한 돌파구가 없다네. 자네가 결혼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는 전하를 굳이 찾을 필요가 없어! 전하께서 알아서 돌아오실 테니까.”
로메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의 연속. 그의 혼란한 표정에 후작은 혀를 끌끌 찼다.
“아아 로메인. 자네는 사람들이 왜 자네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나? 설마 고작 동문으로 가서 포기한 걸로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
당연한 것 아닌가. 그것 외의 다른 것이 있나? 후작은 어리둥절한 로메인을 보고 콧김을 내뿜었다.
혹시 했더니 역시나였어. 저건 동문 가면서 정치적인 머리는 아주 바보가 돼서 돌아왔다. 누구는 혼자 뛰느라 하루하루가 늙어 가는데…. 어떤 면에선 참 인생 편하게 산다.
후작은 잔뜩 비비 꼬인 내심을 숨긴 채 팔짱을 꼈다.
“뭐, 좋아. 나름 그것도 한 이유는 될 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로 자네를 지지하길 포기한 이유는 따로 있다네. 그게 뭔 줄 아는가?”
“…그런 게 있었습니까?”
아아 그럼, 있고말고!
후작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씩 웃었다.
“사람들이 자네를 포기한 결정적인 이유는, 자네가 고자라는 소문 때문이야. 생각해 보게! 공작가는 후손이 유독 적은 가문이야. 씨 없는 자에게 한 가문의 존속을 맡길 수는 없지 않겠나?”
“…!!!!”
로메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실로 상상치도 못한 말이었던 것이다. 고, 고자라니. 대체 누가 고자란 말인가? 그는 기겁하여 외쳤다.
“미쳤습니까?! 누가, 고, 고, 고자라구요?”
그는 당혹해함과 동시에 거의 반사적으로 렉시를 살폈다. 왜 그 표정을 살폈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냥 일단 살피고 싶었고, 그래서 했을 뿐. 그리고 예상대로 거기서 혼란과 민망의 어드메에 있는 렉시를 본 순간, 원인 모를 노기가 배 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로메인의 두 눈이 불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아닙니다! 대체 누가 그런 망발을!”
“오, 아닌가?”
“저는 멀쩡하다 못해 건강합니다! 대관절 누가 그런 망언을 내뱉었습니까? 제 허리 아래 사정을 저보다 더 잘 안다고 지껄인 그 미친 자들을 당장 알려 주십시오. 당장 달려가 그 쓸모없는 혓바닥을 쪼개 놓겠습니다!”
아무리 고매한 기사라도 그 본질은 남자다. 관심 있는 상대 앞에서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힌 로메인은 격노했다.
“뭐 아니라니 다행일세. 하지만 로메인, 이런 소문이 도는 데엔 솔직히 자네 탓도 있어.”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저는 엄연히 피해잡니다!”
“아아, 로메인. 자네가 여태 염문 한 번이라도 낸 적이 있다면 과연 이런 소문이 돌았겠는가? 자네 나이가 곧 서른이야. 그 나이 먹도록 약혼녀는 고사하고 여자 하나 없었다는 게 정상은 아니지.”
후작의 말에 로메인은 진심으로 욱했다. 그는 이를 닥닥 갈며 음산하게 대꾸했다.
“제가 아직 약혼하지 않은 건 제가 진심으로 마음을 바칠 만한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염문이 없었던 건 그의 연장선상이구요. 맙소사! 그렇다고 고자라니. 그럼 제가 짐승처럼 아무하고 밤을 지새워야 했단 말입니까?”
그라고 쾌락을 모르겠으며 밤의 일을 모르겠는가? 남자들만 모여 있는 장소에선 심심하면 오고 가는 이야기가 음담패설이다. 실전은 몰라도 그 역시 이론이라면 빠삭했다. 여자의 유혹도 매한가지. 허우대 멀쩡한 귀족에 기사단장이기까지 한 로메인이니 여체의 유혹이 없었을 리 없다.
다만 그는 참았을 뿐이었다. 아래가 동한다고 아무하고나 자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하는 짓. 몸과 몸을 나누는 행위는 부인과 하는 일이며, 또한 창녀를 안고 유흥을 즐기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도 않다. 더더군다나 그런 건 미래의 사랑하는 이를 배신하는 행위 아닌가? 그는 미래의 부인을 위해 신의를 지켰을 뿐이다. 그런데 그걸 두고 고자라니!
그런 로메인의 말에 후작은 잠시 침묵하다 폭소했다. 세상에, 어쩜!
“로메인, 이 벽창호 같으니! 그게 왜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인가? 누구나 다 과거는 있어! 자네 설마 부인의 과거에도 그런 깐깐한 잣대를 댈 건가?”
제국은 제국민의 연애사에 관대한 편이다. 평생 살 상대가 자기와 맞지 않으면 그만한 고행이 없는 법. 귀족가의 연애결혼이 터부시되지 않는 데엔 이러한 연유가 있다. 로메인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는 왜 묻습니까? 이건 제 맹세이자 의지인데 그걸 왜 기사도 아닌 자에게 요구한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은 되네만, 참으로 갑갑하군. 로메인, 기사는 성직자가 아니야. 아니 성직자도 자네보다는 방종할 걸세. 그런 맹세를 왜 하나 대체?”
“제 인생입니다. 내버려 두십시오. 딱히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무엇보다 저는 버나드 같은 인간이 되기 싫습니다. 로메인의 딱딱한 말에 후작은 결국 입을 다물었지만 한번 터져 나온 웃음은 제법 오래갔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이고 참으로 가지가지로군.’
“그래, 자네 말대로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싶다니 내 더 이상 말하지 않음세. 자네가 그렇게 산다니 내가 뭐라고 하겠나? 열심히 해 보게. 그나저나 자네가 고자란 소문을 그렇게 싫어하니 더 잘됐군. 장가가면 그 소리 싹 들어갈 테니까. 자네 장가가야 할 이유가 더 늘었어.”
“저는―!”
로메인이 다시 소리치려 하자 후작은 재빨리 손을 들었다. 잠시 자기 말을 들어 보란 뜻이다.
“알아, 아네. 안다니까? 그러니까 내 말을 잘 들어 보게. 내가 자네에게 장가가라고 하는 데엔 다 깊은 뜻이 있어요. 자, 자네가 결혼한다고 나서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자네가 고자란 설이 사라지겠지? 그럼 자네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자네를 두고 다시 뭉칠 거야. 자네를 소공작으로 밀기 위해서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바로 그거네.”
세력? 흥분하던 로메인은 곧 진정했다. 그 시끄러운 자들을 왜 또 뭉치게 한단 말인가?
“저는 소공작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헌데 그들이 뭉치는 게 왜 필요하십니까?”
후작은 가슴을 쳤다. 아이고 이 답답한 놈 같으니. 예전엔 안 이랬던 거 같은데 왜 하나를 말하면 착착 못 알아듣지? 그때였다.
“과연, 묘안이군요. 괜찮은 생각이시네요.”
렉시가 손뼉을 쳤다. 렉시는 감탄 서린 얼굴로 후작을 응시했다.
“전하가 사생아를 찾으러 가신 이유는 후계자 때문이죠. 전하의 아드님은 진짜 아들이 아니고, 로메인 경은 후계자가 되길 거절했으니까요. 하지만 경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모든 상황이 달라지겠군요.”
“그래,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야.”
후작은 싱글벙글 웃었다.
“거기다 남작,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신년에 버나드 그자가 소공작이 될 거라고 하는 의견이 파다한 판이지. 하지만 로메인이 결혼한다고 나서면 사람들은 크게 흔들릴 거네.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누가 봐도 버나드보다는 저 녀석이 낫거든. 거기다―.”
“사생아를 찾건 못 찾건 전하께오선 이 소식을 들으면 일단 돌아오실 수밖에 없겠지요. 계획하신 후계자 구도가 흐트러지는 건 아주 큰 일이니까요.”
“그렇지! 이제 좀 속이 시원하군!”
버나드가 공작이 되는 걸 막고, 전하가 돌아오게 만들며, 로메인의 고자 소문까지 단박에 일소되는 최적의 수. 그제야 후작의 장가가란 소리의 진의를 이해한 로메인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진작 그렇게 말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다짜고짜 장가가라고 하니 놀랐잖습니까?”
“미안하네. 설마 자네가 결혼하란 소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라서 그랬어.”
물론 고자 소리에 그렇게 펄펄 뛸 줄도 몰랐지만. 후작의 중얼거림에 로메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는 한참 안절부절못하다 문득 떠오른 의문에 얼굴을 굳혔다.
“플로랑 후작. 제가 혼인하는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했습니다. 헌데 일단 혼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누구와 혼인하란 말입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아까 말한 이유로 로메인은 친한 여자는커녕 아는 여자도 몇 없었다. 실제로 하는 혼인이 아니니만큼 여자에게 많은 것을 설명한 후 동참하게 해야 한다. 허니 아무나에게 이런 일을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로메인의 질문에 후작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로서는 퍽 뜬금없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누구라니… 옆에 있잖나?”
후작은 로메인의 옆에 앉아 슬슬 식사를 시작한 렉시를 가리켰다. 열심히 고기를 썰던 렉시의 손이 딱 멎었다.
누구?
렉시는 당황했다. 그리고 로메인도 당황했다. 덧붙여 밥 먹던 요수아와 필립까지 먹던 걸 딱 멈췄으니 이 자리에서 당황하지 않은 건 후작뿐이라 하겠다. 렉시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저 말입니까?”
“로메인 옆에 자네 말고 다른 사람 또 있나?”
후작은 시니컬하게 맞받아쳤다. 기색을 보아하니 장난은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렉시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각하. 저는 남자인데요.”
“나도 아네. 자네가 비록 여자같이 옷을 입고 있지만 자네처럼 가슴 없고 키가 큰 여자가 어디 있겠나.”
…이것은 성희롱? 렉시가 떨떠름한 얼굴로 후작을 응시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만큼 자네가 남자답다는 이야기야. 칭찬일세!”
“…제 남성적인 면을 칭찬해 주시니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런데 제가 남자인 걸 아시는 분이 왜 헛소리를 하십니까?”
렉시는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제국에선 법적으로 동성혼을 허용한다. 이 자리엔 페르귄 영지 최초 동성혼인 당사자들이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제국 귀족들이 통상 하는 혼인은 이성혼.
명예도 명예지만, 집안과 집안이 결합하면 생기는 재산 문제 때문에라도 둘 사이엔 후계자가 생기는 게 좋다. 사랑에 미쳤다면 모를까, 생산성 없는 동성혼은 귀족들에게 크게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렉시의 반발에 후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가짜인데 그런 걸 뭣 하러 신경 쓰나?”
“가짜 여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로메인 경은 귀족이고, 저 또한 귀족입니다. 둘이 혼인한다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렉시의 주장은 타당했다. 하지만 후작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자네 생각보다 저 녀석을 잘 모르는군.”
후작은 두 사람 사이를 살피며 속으로 히죽댔다. 둘 다 똑같은 당혹이지만 한쪽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한때 세간을 주무르던 바람둥이의 눈치는 로메인의 속내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뭔가 좋은데, 좋긴 한데, 참 좋긴 한데 그러면 안 되는데 왜 이러는지 나도 알 수 없어라의 그것.
그녀는 엄숙한 표정으로 로메인을 가리켰다.
“남작, 아까 말했다시피 저 녀석은 무려 서른이 다 되도록 여자와 염문이 없던 처지네. 그냥 염문이 없던 게 아니야. 이 녀석을 쓰러뜨리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는지 아는가?”
뒷세계에서 소문이 자자한 창녀는 물론이고 온갖 귀부인과 처녀들이 덤벼들고 돌진했지만 아무도 성공 못 한 무적의 철벽. 후작이 한마디 할 때마다 렉시의 얼굴은 달아올랐고, 로메인의 안색은 나빠졌다.
“저놈은 대륙제일미녀인 레아누 황녀조차 그냥 보고 넘긴 놈이야. 그런 놈이 갑자기 여자와 혼인한다고 나서 보게. 과연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지 않겠나? 공작령이 문제가 아니라 온 대륙의 시선이 그 여자에게 향할 걸세. 진짜 결혼이면 또 모르겠으나 가짜로 하는 혼인 아닌가? 후엔 반드시 파혼해야 할 텐데, 그 수치를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후작은 짐짓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진짜도 아니고 가짜로 저 녀석과 혼인하겠노라 나설 여자는 없을 걸세. 설령 찾는다 해도 문제야. 정말 어지간한 여자 아니고선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지.”
무려 대륙제일미녀를 깐 남자의 선택이 이렇게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후작의 말은 제법 그럴듯했다. 렉시는 반론하는 대신 그녀의 말을 조금 더 듣기로 했다.
“하지만 저 녀석이 혼인한다는 상대가 남자라고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은 간단하지. 저 녀석이 그 어떤 여자와도 염문이 없었던 건 바로 남자 취향이라 그랬다는 의미가 되니까. 이 얼마나 심플한 결론인가?”
그간 저 녀석에게 염문이 없던 것은 들이대던 상대가 여자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자신의 성향을 뒤늦게 깨닫고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것은 사람들의 의심은커녕 일종의 깨달음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후작은 주장했다. 상당히 조리 있는 의견이었다.
‘그, 그런가?’
렉시는 흔들렸다. 로메인도 솔깃했다. 그래서 남자가 혼인 상대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물론 여기엔 약간의 뻥과 자의적 해석이 가미되어 있다. 하지만 후작은 아예 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로메인이 결혼하면 여기저기서 여자의 뒷배경을 캘 사람들이 1234567명은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거기엔 로메인에게 자기도 모르게 까인 레아누 황녀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자존심이 저 하늘을 찌르는 그녀에게 앙갚음이 없었던 건, 그간 로메인이 성불구자라 그렇다는 소문이 돌아서였던 것이다. 물론 로메인은 몰랐지마는.
하여 렉시는 물론이고 로메인마저도 이 주장이 제법 그럴듯하다 여기게 되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렉시가 질문했다.
“로메인 경은 생산성의 문제 때문에 후계자 이야기가 자연 소멸된 것 아닙니까?”
“아니지. 정확히는 저 녀석이 성불구라는 소문이 돌아서 소멸된 거지. 성관계가 불가능한 것과 가능하다라는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네. 덧붙여, 남자와 결혼하기 때문에 저 녀석 주위엔 더더욱 개미 떼가 꼬일 거야.”
일부다처제가 안 되는 거지 이혼 후 재혼은 가능한 게 제국의 법도. 또한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게 통설이었다. 하물며 둘 다 귀족 남자 아닌가. 단지 사랑으로 모든 걸 감내하기엔 두 사람 다 가진 짐이 크고도 무겁다.
또한 남자를 좋아하는 사내라도 고자가 아니라면 억지로 여자에게 세워 쌀 수도 있었다.
“남자라는 생물이란 참 서글프지. 여자와 달리 자극하면 세울 수밖에 없거든. 사랑하지 않아도 흥분할 수 있다니 참 이래저래 편리… 아차.”
왕년에 숱하게 남자를 따드신 밤의 여제는 음침하게 웃다 말끝을 재빨리 돌렸다.
그간 로메인은 아예 세울 수 없는 자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일단 성관계가 가능하다는 게 밝혀진 이상 그 씨를 훔치려고 하는 사람은 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며 후작은 설명을 마쳤다.
“사람들은 로메인에게 다가가지 못해 안달 낼 거야. 내 장담하지. 얼마나 시끄러울지 가늠이 되나? 거기다 가장 좋은 건 파혼해도 무리가 없다는 점일세. 다들 할 만해서 했겠거니 하고 의심조차 안 할 테지!”
렉시는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잠깐, 이 사람 보게.
“잠깐요. 지금 그런 군중들에게 저희를 먹잇감으로 던져 준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로메인 경이 무슨 종마인 줄 아십니까?”
어쩜 로메인 경을 그렇게 다룰 수가 있죠? 렉시의 항의에 로메인 역시 동조하며 낯을 붉혔다.
“맞습니다. 거기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저는 파혼해도 문제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몸을 던지는 여자들이라니.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하다. 어쩜 이렇게 사악할 수가!
두 사람이 몸을 떨자 후작은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같은 배를 탔지 않은가? 우리는 최대한 소요를 일으켜 전하를 오게 만드는 게 목적 아닌가. 그러니 이 정도 미끼가 돼 주는 건 감수해야지.”
후작은 상큼하게 웃었지만 겉은 남자인 고로 웃음은 응큼했다. 둘은 동시에 소리쳤다.
“너무합니다!”
“너무고 자시고 하는 게 좋을걸세. 특히 자네, 페르귄 남작. 자네는 특히 그래야 해.”
후작은 당당한 얼굴로 의자 뒤에 꿍쳐 놨던 서류를 몇 장 빼 들었다. 렉시는 그녀가 뭘 빼어 드나 보다 서류 앞면의 발신인을 보고 크게 동요했다.
“그, 그것은 설마…?”
후작은 흐흐흥 하고 웃었다.
“자네의 가문과 공작가 사이에 혹시라도 뭔가 연관이 있을까 싶어 서류 뭉치들을 뒤졌지. 헌데 몇 달 전 온 편지 중에 이게 있지 뭔가?”
발신인, 제국중앙은행.
렉시의 얼굴이 하얘졌다.
“자네도 대충 이게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는 모양이로군.”
“…네.”
무엇을 속이겠는가. 렉시의 얼굴에 탈력감이 자리하자 후작은 혀를 쯧 하고 찼다.
“이건 제국 중앙은행에서 자네와 금융 거래를 하지 말아 달란 완곡한 청이네. 사실 우리는 이쪽과 큰 거래는 안 해서 여태 몰랐네만….”
아마 서류를 찾으려고 뒤집지 않았다면 저 편지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운도 없지, 쯔쯔쯔. 후작은 서류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허면, 어쩌실 겁니까?”
“뭐 나는 자세한 연유는 모르겠네. 다만 자네가 마도구를 팔러 다니는 걸 보아하니 일종의 채무가 있는 모양이고. 제국은행에서 그 채무 지급 받는 걸 꺼리는 걸 보니 담보로 맡긴 물건이 제법 귀한 것인 모양이지?”
“…비슷합니다.”
“자네의 불운이 안됐긴 해. 하지만 맘에 들지 않아도 일단 이런 서류를 받은 이상 대충 눈가리고 아웅은 해야 한단 말이야.”
렉시의 얼굴이 칙칙해진다. 옆에서 로메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본 후작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나는 이 마도구의 대금을 지참금의 형식으로 자네에게 줄 거야. 자네가 내게 준 마도구는 예물조가 되겠지.”
“…지, 지참금?”
예물? 지참금?? 렉시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래! 그러니까 자네는 이 가짜 약혼을 반드시 해야 해. 아무리 제국은행이라도 지참금 가지고 지랄은 하지 못해. 혼인시 지참금으로 받은 거라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