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9)
  • 4. LIAR (2)

    문이 열리자마자 머리채를 붙잡혔다. 머리카락이 죄다 뽑혀 나갈 듯한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거칠게 끌려 도착한 곳은 욕실이었다. 가는 도중 허우적거리다가 벗겨진 신발이 거실에 나동그라졌다.

    “아, 윽……, 주완 씨, 아프…….”

    마침내 욕실에 이르렀을 때에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완은 준희를 욕조에 밀어 넣은 채 샤워기의 수도꼭지를 열었다. 온도가 조절될 여유 없이 찬물이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몸에 걸친 옷가지가 어깨부터 빠르게 젖어 들며 체온을 낮추었다.

    본능적으로 턱이 떨려 이가 딱딱 부딪혔다. 차마 주완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 몸을 옹송그렸으나 다시 머리채를 잡혀 턱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주완은 발갛게 상기된 준희의 얼굴 위로 물줄기를 쏟아부었다.

    “읏, 프……, 헉…….”

    숨이 턱턱 틀어막혔다. 준희는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르다가 욕조의 양 끝을 동아줄처럼 부여잡고 버텼다. 물은 코와 입을 열고 우악스럽게 들이닥쳤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나서야 주완은 샤워기를 거두어 걸이에 매달았다. 물줄기는 폭포가 되어 욕조 안으로, 준희의 위로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악, 흡, 하으…….”

    “그러게 내가 분명히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막혔던 숨을 거칠게 내쉬는 준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주완이 서늘하게 말했다. 고저 없는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디차게 느껴졌다. 준희는 여전히 제 머리칼을 쥐고 있는 주완의 손목을 더듬으며 눈을 들었다.

    마침내 시선이 마주쳤다. 지은 죄가 있어서일까. 까맣고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하자 맹수를 맞닥뜨린 초식 동물이 된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주완은 그의 머리채를 놓아주고서 이번에는 옷깃을 잡아당겼다.

    젖은 재킷이 어렵사리 몸에서 벗겨져 나갔다. 단추는 풀어진 것보다 뜯어진 쪽이 더 많았다. 젖은 채 피부에 들러붙어 있던 흰 셔츠부터 바지와 속옷까지 줄줄이 벗겨졌다. 배려심이라곤 없는 거친 손길이었다. 단숨에 발가벗겨진 맨몸 위에 샤워젤이 쭉 짜였다. 정수리에도 마찬가지였다. 쏟아지는 물 아래에서 젤은 뭉게뭉게 거품을 피워 냈다.

    “주완 씨, 잘못……, 제가 잘못했…….”

    “입 다물어.”

    처음 듣는 반말과 냉소적인 말투에 혀가 마비되었다. 이런 식의 대화를 원하고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서러운 마음에 흐른 눈물이 뺨을 뒤덮었지만 쏟아지는 물줄기 탓에 주완이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대접을 받지 않으려거든 오질 말았어야지. 안 그래?”

    주완의 손바닥이 차갑게 식은 피부 위를 이리저리 비벼 댔다. 그 손길에 다정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투박하게 거품을 내던 손바닥이 이번에는 준희의 얼굴을 덮고 박박 문질렀다. 시야와 호흡을 동시에 차단당했다. 거품 향기가 코를 찔렀다.

    준희는 주완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본능적으로 팔에 매달렸다.

    “좋은 말로 할 때 손 떼는 게 좋을 겁니다.”

    “읍, 흐윽…….”

    “순종적일 때가 단 한순간이라도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과 푸닥거리나 하고 있을 이유가 뭡니까?”

    그의 매몰찬 비난에 준희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욕조를 부여잡았다. 거품 탓에 따끔거려 질끈 감은 눈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금세 거품에 쓸려 나갔다.

    “입 벌려요.”

    “으, 으으…….”

    “더러운 거짓말이나 일삼는 못된 입이 아닙니까. 두 번 말 안 하겠습니다.”

    그랬다. 그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서러움과 두려움을 꾹 눌러 참은 채 준희는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벌어진 잇새로 거품 묻은 손가락이 우악스레 비집고 들어왔다. 거품 세정제 냄새와 기분 나쁘게 미끄러운 촉감이 혀를 짓누르고 입 안을 휘저어 댔다.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역질이 치밀었다.

    “욱, 으흑, 우윽…….”

    “참아.”

    두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푹푹 목구멍 깊은 데까지 거칠게 쑤셔 댔다. 손가락이 드나들 때마다 잔거품이 꾸역꾸역 턱을 타고 흘렀다. 걸레라도 문 듯한 수치심에 얼굴이 온통 붉게 달아올랐다. 그간 느껴 본 적 없는 굴욕이었다.

    입 안쪽을 한참이고 희롱하던 손가락이 마침내 빠져나갔을 때 준희는 몸을 옹송그린 채 기침을 토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콜록, 콜록. 위액이라도 토해 내고 싶을 만큼 속이 역했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거품은 대부분 씻겨 나갔다.

    “엄살떨지 말고 기어 나와서 엉덩이 쳐들어요.”

    주완은 무미하게 말하며 욕실 서랍에서 철제 바스켓을 꺼내 생리 식염수 팩을 쏟아부었다. 식염수가 차오른 바스켓 안으로 커다란 주사기 하나가 툭 떨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준비물을 확인한 준희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용도는 분명했다. 관장을 하려는 것이다.

    “아랫구멍도 청소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인에게 핑계 대고 달려 나갈 정도로 애틋한 사이인데 무슨 일이 있었을 줄 알고 그냥 넘어갑니까.”

    예견되는 플레이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주완의 싸늘한 태도였다. 준희는 헛구역질을 꾸역꾸역 삼켜 내며 들썩거리던 몸을 진정시켰다. 욕실의 대리석 위로 젖은 발자국이 찍혔다. 덜덜 떨며 욕조를 빠져나온 준희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등 돌리고 엎드려요. 엉덩이는 들고.”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지만 딱딱한 명령이 떨어질 뿐이었다. 엄격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온몸이 핏기가 사라진 듯 차가웠다. 그의 눈에 묻어 있는 질책이 가시가 되어 피부를 찔러 대는 것만 같았다. 준희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이프 워드는 통용되는 것일까. 주완이 형, 하고 부르면 차가운 눈빛을 거두고 안아 줄까. 약한 마음이 스멀스멀 당장을 모면할 수 있는 쉬운 길을 찾아 나갔다.

    ‘뭘 얼마나 혼났다고.’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평소의 플레이보다 크게 가혹할 것도 없었다. 달라진 것은 전제 조건뿐이다. 그동안은 이유 없이 서로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정해진 롤에 갇혔지만, 오늘은 그 이유가 명백하게 준희에게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힐난을 더더욱 견뎌 내기 어려운 것이다.

    준희는 잠시의 고민을 접고 뒤로 돌아 어깨를 바닥에 붙였다. 물기 어린 미지근한 대리석에 뺨이 닿았다. 주완은 어설프게 벌어진 준희의 무릎 사이에 발을 넣어 다리를 조금 더 벌려 세울 수 있도록 조정했다.

    “아…….”

    바세린 크림을 바른 손가락이 엉덩이 골 사이를 투박하게 스쳤다. 관장이야 혼자서 늘 하는 행위임에도, 곧 타인에게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허공에 드러난 주름진 입구가 긴장감에 오물오물 개폐를 반복했다.

    대용량 주사기에 철제 바스켓에 담긴 액체가 가득 담겼다. 기다란 주둥이가 엉덩이 사이로 쑥 밀려들었다. 주완은 서서히 주사기의 피스톤을 밀어 액체를 주입했다.

    “으, 흣…….”

    평소 관장할 때에는 이렇게 용량을 많이 쓰지 않았던 터라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이물감으로 배가 묵직해졌다. 그러나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는지, 주사기를 빼낸 주완은 철제 바스켓을 가까이로 당겨 왔다.

    “흐……, 주완 씨……, 이 이상은 무리예…….”

    “판단은 내가 합니다. 자세 제대로 하세요.”

    주사기가 액체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했다. 준희는 손톱으로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앓는 소리를 연신 뱉어 냈다. 이미 배 속이 가득 차서 더 이상 주입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준희는 머릿속으로 안 된다고 울부짖었지만, 주완은 액체가 가득 찬 주사기의 입구를 그의 아래 구멍 안으로 가차 없이 쑤셔 넣었다.

    “아, 싫, 으읍…….”

    미지근한 식염수가 엉덩이 안으로 꾸역꾸역 주입되었다. 자세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워 허벅지가 덜덜 떨려 왔다. 온몸의 근육에는 힘이 들어갔다. 허공으로 엉덩이를 들어 올린 적나라한 자세로 인한 수치는 금세 잊혀졌다.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뽁, 주사기의 주둥이가 느리게 뽑혀 나갔다. 그나마 구멍을 막고 있던 물건이 사라지자 당장이라도 참지 못하고 배설해 버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머릿가죽이 쭈뼛 서는 듯했다.

    “10분.”

    “으, 아으…….”

    “참으세요.”

    자세를 유지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이 자세가 아니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떡해, 어떡해. 속이 시끄러웠다. 준희는 대리석 바닥 위에 젖은 뺨을 비벼 대며 더운 숨을 토했다.

    “새지 않게 주의해야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안쪽에 머금고 있는 액체가 잘금잘금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주완은 나직이 경고하며 준희의 뽀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흑.”

    안 그래도 주름져 있던 입구가 연거푸 조여들었다. 안에 머금은 것을 흘리지 않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주완의 손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회음부를 타고 내려와 음낭을 주물렀다. 예민한 살덩이가 막무가내로 희롱당했지만 성적인 흥분을 느끼기엔 뒤쪽 사정이 좋지 못했다.

    “시, 시간이 얼마나……, 흣, 지났는지…….”

    “아직 5분도 안 지났습니다.”

    슬슬 등줄기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로 대리석 바닥이 차츰 데워졌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연신 잘근잘근 씹으며 바닥 위로 이마를 뭉갰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가며 관심을 돌리려 해 보아도, 아래로 향하는 신경을 끊어 내기란 불가능했다.

    주완은 준희의 머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아 줄까?”

    “네, 주완 씨……. 흐윽, 네, 제발……, 제발 막아 주세요.”

    준희는 눈앞에 보이는 주완의 발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런 준희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주완이 입을 열었다.

    “흘리지 말고 기다리세요.”

    매달린 준희의 손을 걷어 낸 채 주완이 욕실을 벗어났다. 잠시 자리를 떠난 그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고역이었다. 차라리 모래시계라도 눈앞에 있었으면 했다. 정확히 얼마나 남은 것인지 알면 카운트다운이라도 하면서 버틸 수 있을 텐데.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주완의 손에는 말캉한 재질의 애널 플러그가 들려 있었다. 그는 꼭 다물린 구멍 안으로 플러그를 단숨에 밀어 넣었다.

    “아, 흑.”

    “이제 5분 남았습니다.”

    주완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준희는 겨우 고개를 들고는 주완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잘못……, 잘못했어요…….”

    하얗게 질린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플러그를 뽑고 배변하고 싶은 욕구에 정신이 엉망으로 엉켜들었다. 준희는 그의 무릎에 매달려, 허벅지 위로 뺨을 묻고 아양 떨듯 비벼 댔다.

    “제가, 아, 흐윽, 주완 씨…….”

    “4분.”

    바지가 축축이 젖어 들었지만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주완은 손목시계를 흘끗 확인하며 무심히 시간을 잴 뿐이었다.

    “아, 못 참겠……, 싸게……, 싸게 해 주……, 흐윽.”

    “고개 들어요.”

    “네, 주완 씨. 네…….”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모를 정도로 본능적으로 입술이 여닫혔다. 벌벌 떨며 애원하다가 주완의 말에 고개를 들자마자 따갑게 뺨을 얻어맞았다. 짝, 뜨거운 손바닥이 피부에 감겼다가 떨어지며 붉은 자국을 남겼다.

    “해결하고 씻고 2층으로 올라오세요.”

    “…….”

    그제야 혼미하던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준희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고는 땅에 손바닥을 짚었다. 그에게서 돌아선 주완이 욕실을 벗어나는 뒷모습이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아른거렸다.

    엉망이었다. 식은땀으로 뒤덮인 몸과 들끓는 배설 욕구, 비누 냄새가 남은 입 안까지……. 꼴은 또 얼마나 형편없을까. 이렇게나 고생해 놓고 그가 요구한 10분을 채우지 못했다니 비참하고 서러웠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비통에 잠겨 있을 여유는 없었다. 준희는 닫혀 있는 변기를 향해 가까스로 기어갔다.

    ***

    입구를 막고 있던 플러그를 스스로 빼고 배변한 뒤 샤워까지 꼼꼼하게 마치고 나니 당장이라도 탈진할 것처럼 온몸이 무기력해졌다. 침대에 눕는다면 당장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정도였다. 준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2층으로 향했다.

    옷은 입지 않았다. 샤워 가운이 눈에 띄는 곳에 걸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에게 허락된 옷가지는 없는 듯했다. 그는 알몸으로 2층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도망가.’

    본능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주하고 있는 문이 무겁고 커다랗게만 느껴졌다. 준희는 가만히 눈을 감고 주완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봄처럼 한철 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이렇게 쉽게 마음을 내려놓게 될까 봐, 그가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자신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준희는 나약해진 마음을 다잡고 눈꺼풀을 올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완은 선반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 중앙에 놓인 카펫 위에는 기묘한 모양의 벤치가 놓여 있었다. 벤치의 좌판은 짧은 직사각형인 데다가 허리 높이쯤 되었고, 사다리꼴 다리가 바닥을 지탱하고 있었다. 좌판의 가운데에 벨트가 양옆으로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구속이 가능한 가구인 듯했다.

    “강준희 씨.”

    “……네.”

    “뭘 잘못했습니까?”

    그의 질문에 준희는 고개를 바싹 들었다. 어쩌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를.

    준희는 무작정 그의 앞에 꿇어앉아 간절한 얼굴로 주완을 올려다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본 주완과 눈이 마주치자 전율이 일듯 뒷덜미가 저릿했다. 그를 마주할 때면 종종 육식 동물을 마주한 초식 동물의 기분을 알 것 같아진다.

    “주완 씨한테 거짓말했어요. 전 남자 친구를 도우러 가느라 약속을 깨야 한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관계가 틀어질 것 같아서요.”

    “거짓말이 들통나면 얼마나 더 틀어질지는 예상하지 못한 겁니까?”

    “저도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둘러대느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 거예요. 잘못했어요.”

    주완이 한 발자국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는 벤치와 한 걸음 가까워지며 물었다.

    “그리고 또?”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다. 준희의 흔들리는 동공을 지그시 관찰하던 주완이 입술을 뗐다.

    “또 나한테 거짓말한 게 뭐가 있냐고 묻는 겁니다.”

    “어, 그게……, 또…….”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그에게 둘러댄 거짓말이야 찾아내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많았다. 애초에 혼나는 걸 좋아한다며 계약 관계를 제안한 것도, 본래 이쪽 성향이었다고 둘러댄 것도, 언제부터 좋아한 건지 모르겠다고 발뺌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거짓말이었으니까.

    다만 하나의 거짓말을 고백하고 나면 엉킨 실타래가 풀려 나가듯, 베일에 싸여 있던 강준희라는 존재가 낱낱이 발각당하게 되겠지. 준희는 입을 꼭 다물었다.

    “아직 말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나 보네요.”

    “…….”

    “그럼 좀 맞아야지.”

    주완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옆에 놓인 벤치를 톡톡 두드렸다.

    “올라가세요.”

    준희는 엉거주춤 일어나 벤치를 마주 보고 섰다.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 것인지 단번에 감이 오지는 않았지만 ‘맞아야 한다’고 했으니 이 벤치는 체벌을 위한 가구일 것이다. 준희는 골반보다 살짝 높은 좌판 위로 배를 붙이고 엎드렸다. 벤치는 그렇게 엎드렸을 때 힘껏 발돋움을 해야만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이였다.

    주완은 좌판 중앙에 있는 벨트를 준희의 허리 위로 올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이어 팔과 다리가 사다리꼴 벤치 다리에 하나씩 각각 묶여 자세가 고정되었다. 준희는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준희를 단단히 묶어 둔 주완은 방에 진열된 체벌 도구를 둘러보며 매를 골랐다. 마침내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무시무시한 모양의 나무 패들이었다. 길쭉한 직사각형 나무판 가운데에는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 생각날 때까지, 열 대씩 맞을 겁니다.”

    “주완 씨…….”

    매를 확인한 준희의 목소리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저런 어마어마한 도구로 매를 맞으면 엉덩이가 터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벌써부터 엉덩이가 아린 듯해서 손으로 비벼 주고 싶었지만, 팔다리가 구속되어 있는 탓에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엉덩이 위로 주완의 손바닥이 가볍게 내려쳐졌다. 매질에 앞서 적당히 열을 돋우려는 행동이었다. 약하게 서너 대를 때리고 지나간 손이 패들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준희는 제 뒤에 선 주완의 표정이나 행동을 읽을 수 없었지만, 세기를 가늠하기 위해 허공을 가르는 패들의 바람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세지 않아도 됩니다.”

    카운팅을 놓친 벌 매는 없으리란 뜻이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기약 있는 매질이냐 한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준희는 신음을 터뜨리지 않으려 입을 꼭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패들이 엉덩이 위로 떨어졌다.

    짜악, 따가운 감각이 둔부 전체에 물들었다. 흣, 준희는 숨을 삼키며 아픔을 참았다. 짝, 짜악. 매는 아픔이 가실 틈을 주지 않고 연거푸 떨어졌다.

    “힘 풀어요. 안 그럼 다칩니다.”

    “아, 으…….”

    쉴 새 없이 달라붙는 매질에 힘을 푸는 방법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엉덩이 골이 패일 정도로 잔뜩 힘이 들어간 엉덩이 위로 패들이 떨어졌다. 따악, 단단한 마찰 음과 함께 통각이 골반까지 전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주완은 말로 경고하는 대신 매질을 잠시 멈추고 엉덩이를 거칠게 주물러 억지로 힘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힘이 풀려 통통해진 엉덩이 위로 다시금 패들을 휘둘렀다. 짜악, 붉게 물든 살갗 위로 패들의 면이 따갑게 감겨들었다.

    “주완, 씨……, 너무 아파요, 아……!”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 매를 피하고 싶었지만 팔다리가 묶여 있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결박된 손목과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려 왔다. 벌써부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주완은 남은 대 수를 모두 채우고서야 패들을 거두었다.

    임무를 마친 패들이 준희의 허리 위에 놓였다. 감각이 예민해져 있는 준희의 몸이 작은 자극에 움찔 떨렸다.

    “흡, 흐윽…….”

    “이야기할 생각이 생겼습니까?”

    “그……, 아으…….”

    무슨 이야기라도 해서 시간을 벌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문장을 완성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준희는 당장이라도 주완의 마음을 열어 읽어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거짓말을 눈치챈 것이고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인지. 그게 가늠이 되지 않으니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준희가 대답하지 못하자 주완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허리 위에 얹혀져 있던 패들을 가져갔다. 손이 결박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저 싹싹 비비며 바지춤에 매달렸을 것이다. 맺혀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네가 아직 버틸 만하지.”

    “아니, 아니에요. 주완 씨…….”

    앓는 목소리를 내었지만 스스로도 통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주완은 패들을 들어 준희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하얗던 엉덩이는 발갛게 물든 데다가 피부가 거칠게 일어나 있었다. 허공에 드러난 선홍빛 구멍이 본능적인 두려움에 한껏 오므라들었다.

    짝, 날카로운 마찰 음과 함께 다시 체벌이 시작됐다. 이미 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떨어져 나갈 듯 아려 왔다. 매는 아까와 같이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떨어졌다. 살이 넓적한 나무 판에 매 맞는 소리가 방을 거듭 채웠다.

    꼭 불이 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얼얼한 고통에 아찔해지기 무섭게 매가 날아들어 몸을 절로 비틀리게 만들었다. 묶여 있는 팔다리의 피부가 발버둥 치는 통에 붉게 쓸려 나갔지만 그쪽의 아픔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흣, 아파요. 흐읍, 아……! 흐윽, 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떨어진 눈물이 카펫 위를 적셔 나갔다. 준희가 울음을 터뜨리며 애원하자 주완은 그의 허리 위에 손을 얹어 고정하고선 남은 매를 마저 다 때렸다. 엉덩이는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붉어져 있었다. 피부 위가 소름으로 가득했다.

    열 대의 매질을 마친 주완은 패들을 흐느끼느라 움찔움찔 흔들려 대는 허리 위에 얹어 놓았다.

    “그러니까 뭘 잘못했냐고 물었습니다.”

    바들바들 떨어 대는 통에 올려져 있는 패들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준희는 손목 아래 벤치 다리를 긁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힘겹게 발돋움하고 있던 발이 절로 오므라들었다. 더운 숨을 뱉어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사이 주완이 준희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눈이 마주쳤다. 검고 깊은 눈이다. 언제나 그를 설레게 했던 교목 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준희는 당장이라도 눈을 질끈 감아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맞는 게 즐거워서?”

    “아니, 흐윽, 읍……. 주완 씨, 아니에요.”

    “아니면 속으로 재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동안 뱉어 놓은 거짓말이 많아서, 어느 것을 골라 말해야 덜 혼날까 계산이라도 하고 있어요?”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비아냥에 준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계산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한 거라면 내가 벌어 주겠습니다.”

    “아, 으으…….”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주완이 차갑게 말했다. 허리 위에 올려져 있던 패들의 무게가 사라졌다. 준희는 벤치 다리를 꽉 부여잡고 하염없이 먼 바닥에 발끝을 디디고 섰다.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어 얼굴까지 붉어진 채였다.

    “제발, 주완 씨, 제발…….”

    “나를 멈출 방법을 본인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지 않나?”

    “…….”

    그의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패닉에 빠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물고 있는 입술이 달달 떨렸다.

    주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패들을 엉덩이에 툭툭 대어 보며 위치를 가늠했다.

    “흐윽, 으응…….”

    감추고 싶은 울음소리가 꾸역꾸역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못나고 본능적인 소리였다. 어른이 된 후로 이토록 엉엉 목 놓아 울어 본 적이 있었던가. 눈물에 젖은 눈가가 차츰 따끔거렸다.

    그냥 다 거짓말이었다고 실토할까. 처음부터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당장의 고통을 모면할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이 관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세이프 워드라도 외쳐야 하는 걸까.

    ‘주완이 형.’

    그 말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건 당장의 체벌을 멈추기 위한 수단이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마법의 열쇠가 아니었다.

    짜악-. 패들이 엉덩이를 갈기고 지나갔다. 유난히 힘이 들어간 피부에는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 얼룩이 졌다. 제 피부 사정을 알 길 없는 준희는 더럭 겁이 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엉덩이가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묶여 있는 몸이 벌벌 떨려 벤치까지 영향을 줄 정도가 되자 주완이 다시 그의 허리춤에 손을 얹고 패들을 휘둘렀다.

    얼룩진 엉덩이 위로 패들이 쉴 새 없이 감겨들었다. 얼얼해 감각이 없어졌다고 생각이 들 무렵에는 더 따갑고 가혹한 매질이 준희의 감각을 번쩍 깨웠다.

    “어읍, 흑, 아으응……, 주완 씨이이…….”

    “나라면 그렇게 울 시간에 머리를 굴리겠습니다. 답은 이미 강준희 씨 안에 있을 텐데.”

    한 마디 한 마디 끝낼 때마다 패들을 휘둘렀다. 허공을 둔탁하게 가르고 날아온 패들은 어김없이 살갗을 통째로 할퀴고 지나갔다.

    묶여 있는 상태에서 맞는 매는 다른 것보다 가혹했다. 스스로 자세를 취하고 맞을 때는 조금씩 반동을 주거나 엉덩이를 흔들어 아픔을 달래 볼 수라도 있었는데, 팔다리를 단단히 묶인 상태에서는 불가능했다. 그저 묶인 손목을 흔들고 벤치 다리를 긁어 대며 울음을 토해 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제스처였다.

    “흐윽, 흡, 아흐으…….”

    벌써 서른 대를 맞은 엉덩이는 욱신거리다 못해 불타는 듯했다. 주완은 그의 허리 위에 패들을 내려놓는 대신 카펫 위에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말해요.”

    “아흑, 흐……. 흐으, 으응……. 모르, 흐, 잘못했…….”

    “도대체 언제까지 버틸 겁니까? 내가 그쪽 엉덩이를 다 터뜨릴 때까지? 피를 볼 때까지 맞아야 직성이 풀리는 하드한 취향이었습니까, 강준희 씨?”

    “아니, 아니요……, 아으, 흐…….”

    제대로 된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연신 흘러나오는 신음 탓에 불가능했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지만 쥐어짜는 듯한 울음소리만이 입 안에서 감돌다 바깥으로 새어 나왔다. 끄윽, 끄응. 상기된 뺨은 이미 눈물로 뒤덮인 뒤였다.

    “그렇게 해 봐.”

    주완은 성큼성큼 벽면으로 다가가 기다란 케인을 집어 들었다. 두께와 탄성이 제법 있어 패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도구였다.

    준희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선 주완은 케인을 허공에 가볍게 휘둘러 탄성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울긋불긋하게 물든 엉덩이 아래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위치를 조절했다. 휘익, 탄성 좋은 회초리가 허공을 가르고 허벅지 위에 가늘고 붉은 자국을 남겼다.

    “아! 아흑……!”

    엉덩이로 맞을 때보다 배로 따끔했다. 패들과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내어 피부 위를 싹싹 문질러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준희는 반쯤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덜덜 떨렸다.

    짜악, 짝. 패들보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케인이 그의 희고 말랑한 허벅지를 가차 없이 괴롭혔다. 선명한 붉은 줄이 세 개, 네 개로 늘어나며 나중에는 서로 겹쳐졌다. 허리를 들어 올리고 싶어 몸을 움직이는 통에 벨트로 묶인 부분이 쓸려 나가 붉게 물들었다.

    이제 그의 몸에서 붉은 부분을 찾지 않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었다. 뺨과 코끝은 선홍빛이었고 잘근잘근 깨물어 터진 입술은 핏빛이었다. 가죽 벨트로 벤치에 고정되어 있는 팔다리와 허리는 몸을 흔드는 족족 쓸려 붉어진 채였고, 엉덩이와 허벅지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발을 딛고 섰다가 오므렸다가 쉴 틈 없던 발바닥도 붉은빛이었다.

    “아, 으. 흣, 아아……!”

    케인이 허벅지 위로 떨어질 때마다 울음 섞인 신음 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튀었다. 주완은 무심하고 일정한 손길로 케인을 휘둘러 상처를 남겼다. 휙, 휘익. 케인 자국은 허벅지의 아래쪽을 향해 점차 번져 나갔다.

    자국이 겹쳐질수록 통증은 심해졌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하루 지나고 나면 붉게 딱지가 되거나 멍이 들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울음을 토해 내느라 입 안은 눈물과 침으로 범벅이었다. 젖은 소리가 연거푸 흘러나온 끝에 준희는 움직일 수 있는 한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짜내듯이 외쳤다.

    “윽, 아흐, 주완……, 흣, 주완이 형…….”

    쉼 없이 내려오던 케인이 허공에서 멈춰 세워졌다. 어느덧 주완의 호흡도 거칠어져 있었다. 전에 없이 흥분 상태였다. 주완은 눈살을 찡그리곤 케인을 바닥에 던졌다.

    “아, 으으……, 흐으응…….”

    울음소리가 여운처럼 남아 공기를 물들였다. 잠시 숨을 고르며 감정을 다스리던 주완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서 준희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던 벨트를 풀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손목이 자유로워졌지만 준희는 차마 벤치 다리를 꼭 부여잡고 있는 손바닥을 펼치지 못한 채 파르르 떨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던 거 알고 있습니다.”

    “흐으, 읍…….”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에 설움이 복받쳤다. 주완은 차분하게 구속을 하나씩 제거했다. 이번에는 반대편 손목이, 그다음에는 허리를 묶고 있는 벨트가, 그러고는 허벅지와 발목께를 속박하고 있던 벨트들이 순서대로 풀어졌다.

    “이쪽 성향이 아니라는 것도,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

    “전부 거짓말이었지.”

    꼭 삐걱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벤치를 밀어내자마자 다리가 풀려 무릎이 꺾였다. 준희는 그대로 카펫에 주저앉아 고개를 들고 주완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알…….”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

    “그렇게 속여서라도 그쪽이 취하고 싶었던 건, 취해지던가요?”

    당연히도, 그렇지 않았다. 뼈아픈 실책이었다. 준희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아 내렸다.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젖은 뺨에 번졌다. 너무 울어 눈도 입술도 퉁퉁 불었을 것이 분명했다. 카펫 위로 주저앉힌 엉덩이가 못 견딜 만큼 뜨겁게 따끔거리기도 했다.

    서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그를 안아 욕실로 옮겨 주지 않는 모습이, 손등을 내어 눈물을 닦아 주지 않는 냉정함이,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말을 뱉는 차주완 대표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몰랐겠지만,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차라리 솔직했으면 좋았을 겁니다.”

    “…….”

    “나는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다소 허무해 보이는 어투가 마음을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그를 체념하고 포기한 듯한 목소리였다. 주저앉은 채 울고 있는 준희에게 주완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충분히 휴식하다 나가세요. 하루 묵어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처음으로, 관계가 끝나고도 저를 안아 주고 다독여 주지도 않은 채 방을 떠났다. 눈을 연신 깜빡거렸지만 눈물이 흘러넘치는 탓에 시야가 흐렸다. 대신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 문이 여닫히는 소리, 그리고 찾아든 고요에 준희는 몸을 옹송그렸다.

    “으으, 으. 흐으…….”

    그는 무르팍에 이마를 묻고 남은 울음을 마저 토해 냈다.

    ***

    차주완이 떠났다. 다정 한 자락 남겨 두지 않은 채로.

    한참이나 기력을 쏟고 나서야 준희는 비척비척 지친 몸을 일으켜 발을 내디뎠다. 묶인 채 바둥거리느라 힘을 소진한 몸 곳곳이 쑤시고 아렸다. 엉덩이와 허벅지는 더 심했다. 준희는 차마 손을 대지 못한 채 힘겹게 걸어 아래층 욕실에 다다랐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예상보다 형편없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땀과 눈물에 잔뜩 젖은 얼굴은 붓지 않은 곳이 없고 눈, 코, 입이 전부 붉었다. 준희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매 맞은 부위를 살폈다. 피가 나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여겼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피멍이 들 것처럼 핏빛으로 붉은 자국들이 군데군데 남겨져 있었다. 준희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더듬었다.

    “아…….”

    가볍게 스쳤는데도 통증으로 엉덩이 전체가 욱신거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준희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주완은 2층 방뿐만 아니라 펜트하우스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준희를 두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 듯했다. 애프터 케어를 기본 매너처럼 여기던 남자의 돌변에 심장이 낮게 내려앉았다.

    혹시 정이 아주 떨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나를 보지 않기로 결정한 거라면 어떡하지. 이대로 우리의 관계가 망가지고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는 처지가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몸을 씻어 내는 사이에도 끔찍한 상상은 계속됐다. 머릿속 영사기는 파멸의 순간만을 끝없이 상영했고, 그럴 때마다 준희는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로 정수리를 밀어 넣었다.

    “…….”

    그는 몸을 씻고 입고 온 옷으로 다시 갈아입었다. 옷은 아직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찝찝함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욕실에서 빠져나온 준희는 넓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잠시간 넋을 잃었다. 그 아름답던 야경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을 정도로 공허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불길한 예측을 해 본 적은 많았지만 현실로 벌어지니 예상보다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이미 벌어진 상황도, 헝클어진 머릿속 사정도.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는 사이 젖은 재킷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 전화가 미미하게 진동했다. 그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준희는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발신인은 박지율이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최시훈 군 관련해서 내일 오전에 보도 자료 나가기로 했고요. 기타 필요한 사항들은 저희 쪽에서 최대한 협조하기로…….]

    “어, 그래.”

    사무적으로 설명하던 지율은 준희의 잠긴 목소리를 듣고는 말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프세요?]

    “지율아.”

    [네.]

    “나 여기, 호텔 어디인지 알지?”

    [알죠. 무슨 일 있으세요? 차주완 대표랑 싸우셨어요?]

    지율이 자초지종을 물었다. 당연했다. 그러나 준희는 뭐라고 둘러대야 좋을지 머릿속이 까마득해졌다. 이 길도 저 길도 거짓말하고 변명하고 핑계 대는 일투성이였다.

    준희는 가까스로 생각 회로를 돌렸다. 이런 꼴로 펜트하우스에 남겨져 있을 수는 없었다. 실례가 될 것 같기도 했고, 여기에서 잠들어 봐야 악몽만 실컷 꾸게 될 게 분명했다. 손끝이 차갑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준희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묻지 말고 이 호텔 아무 호수나 예약해 줘. 그리고 옷 편한 걸로 가져다주고 퇴근할 수 있어?”

    [바로 예약하고 제가 갈게요, 지금.]

    지율은 준희의 마음을 빠르게 캐치하고 전화를 끊었다. 거실에서 황망하게 얼을 탄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지율로부터는 예약된 호실의 번호가 도착했다. 곧 갈 테니 카드키는 로비 데스크에서 받아 가면 된다는 친절한 안내와 함께였다. 그는 그제야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펜트하우스를 나서기 전에 잠시 내부를 돌아보았다. 손님의 흔적이라곤 보이지 않는 깔끔한 거실이 눈에 담겼다. 준희는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들어올 때 그러했듯 나갈 때에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

    주완은 바닥을 사랑했다.

    경박하고 비열한 취향이었다. 최후의 자존심까지 끝끝내 무너뜨리고 마지막의 마지막 밑바닥까지 드러내 보이는 남자를 선호했다. 그저 취향일 뿐이라지만 보편적일 수는 없었다. 이해받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강준희가 그와 정반대의 남자라는 사실에 속이 끓는 것일까.

    흡연 구역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쌓였다. 제대로 태우지 않은 장초들이 신경질적으로 짓이겨졌다. 주완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비스듬히 옮겨 높은 건물의 호텔을 올려다보았다.

    최상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나 했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기회는 흔치 않았는데. 씁쓸한 자조가 입 안에 감돌았다. 담뱃갑을 열어 보니 어느새 돛대였다. 흡연가이기는 해도 애연가는 아니었는데, 짧은 시간 내에 줄줄이 담배를 동 낸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기야 처음인 것이 이것뿐이랴. 주완은 쓰게 미소 지으며 담배를 물고 불을 당겼다. 알싸한 연기가 입 안에 가득 빨려 들어왔다가 폐를 지나서 공기 중으로 되돌아갔다. 매캐한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으며 주완은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어쩌면 곧장 따라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끝끝내 뻔뻔하게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어도 그 모든 행동은 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했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현관에 이르기 전에 저를 뒤쫓아 와 준다면, 마지막으로 매달려 잘못했다고 애원해 준다면, 용서해 줄 용의가 있었다. 비겁하게도.

    ‘그래 봤자 여기까지였던 거지.’

    이쪽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폐쇄적이다. 경계심이 많은 것도 당연했다. 본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선이 중요한 바닥이었다. 그러한 긴장감을 오래도록 유지해 온 주완은 어쩔 수 없이 자기방어적인 남자로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왜 이토록 더러운 건지, 주완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알고도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고고한 장미 넝쿨의 뿌리가 그토록 깊게 박혔을 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서야 그는 흡연 구역을 뒤로했다. 흡연 구역에서는 호텔의 정문 안으로 로비의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가 담뱃갑을 비울 동안 준희는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뒤늦게 옷을 주워 입고서라도 내려오지 않은 것이다.

    주완은 그를 이해했다. 오늘의 플레이……, 아니, 플레이라고 명명하기 민망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일방적이던 대화의 양상은 일반인이 감내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포기할 거였다면 그날,

    -그런 거 아니에요. 증명해 보일게요.

    그렇게 확신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주완은 마음을 잘라 내며 걸음을 빨리했다.

    ***

    그날 지율은 호텔로 찾아와 외출복과 잠옷을 건네주고 떠났다. 누가 보아도 서럽게 운 것이 분명한 몰골이었지만 지율은 호기심을 삼킨 채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같은 호텔의 다른 룸으로 몸을 옮긴 준희는 다시 한번 따뜻한 물로 몸을 씻어 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잠을 설쳤다. 조명을 어둡게 만들고 푹신한 침구 위에 몸을 눕혔지만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또렷해진 탓이다.

    그래도 오늘 충분히 벌을 받았으니까 어쩌면 다시 대화할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세이프 워드를 외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혹하게 대했으니까, 마음이 풀어지고 나면 다시 다정한 눈으로 그를 보아 줄지도 모른다. 준희는 막연한 낙관으로 정신 승리를 이룩했을 때에야 비로소 잠들 수 있었다.

    낙관이 무너진 건 다음 날 오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준희를 옮기기 위해 호텔로 픽업을 나온 지율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 봉투 때문이었다.

    “이게 뭔데?”

    “유성기획 대표실에서 온 서류니까…… 차주완 대표가 보낸 거겠죠?”

    준희를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석에 오른 지율은 그렇게 대답하며 차를 부드럽게 주행했다. 준희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떨리는 손끝으로 봉투를 개봉했다. 봉투의 입구는 깨끗하게 뜯겨져 나갔다. 준희는 안에 있는 것을 허벅지 위로 쏟아 냈다.

    모서리가 규칙 없이 찢겨진 종잇조각들이 쏟아졌다. 준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조각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건 두 사람이 한 부씩 나눠 가진 계약서였다.

    주완의 손에 찢겨졌을 종잇조각의 일부가 무릎 위로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그 장면을 망연히 응시하던 준희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발끝까지 서늘하게 내려앉는 듯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선명하게 깨어났다.

    “유성기획으로 가, 지율아.”

    “……네?”

    “지금 당장 차 돌리라고.”

    그 찢어진 종잇조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준희는 잘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기반으로 쌓아 올린 계약을 무효로 돌리자는 뜻이었다.

    무릎 위로 떨어진 종잇조각들을 쓸어 모으는 준희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조각들을 봉투 안에 도로 밀어 넣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흔들리는 시선이 차창 밖으로 달아났다.

    안일하게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걸든 직접 찾아가든,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해 마음을 돌려놓았어야 했다. 아니, 호텔에 머무를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등을 돌려 나가 버린 주완의 뒤를 쫓아 기분이 풀릴 때까지 하염없이 매달렸어야 했다.

    준희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리를 떨었다. 습관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허벅지 전체의 근육이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지난밤 혹사당한 결과가 제법 처절했던 탓이다. 근육통은 물론, 제대로 처치해 주지 않은 엉덩이와 허벅지에는 피멍과 딱지가 내려앉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안절부절못하는 준희를 룸 미러로 흘끗흘끗 지켜보던 지율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신 거예요?”

    “응.”

    준희는 말간 얼굴로 짧게 대답한 뒤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의 배경으로는 고층 빌딩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유성기획 최고층에 그가 나타났을 때, 한도일 비서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가 막무가내로 찾아온 경우는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퍽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도일은 그를 잠시 대기실에 앉혀 둔 다음 사내 메신저를 통해 대표실에 보고를 올렸다.

    「강준희 님 방문해 계십니다.」

    「들여보내세요.」

    다행히 껄끄러운 방문은 아니었는지 메시지를 보낸 지 1분이 채 되지 않아 대답이 돌아왔다. 도일은 고개를 들고 준희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준희는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대표실의 문을 열었다.

    대표실 내부 인테리어는 전과 같았다. 블랙 톤에 정갈하고 심플한 구조, 먼지 한 톨 없을 듯한 깨끗한 인상. 차주완 대표와 꼭 닮은 대표실 말이다. 그러나 전과 달리 이번에는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 주완이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바른 자세로, 테가 얇은 안경을 쓴 채였다.

    “올 필요까진 없었습니다. 할 말은 내가 보낸 서류 봉투 안에 다 들어 있었을 테고.”

    “…….”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준희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주완은 보고 있던 모니터에서 눈길을 떼지도 않은 채 차갑게 물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준희는 대표실의 문을 끝까지 닫고 소리 나지 않게 잠갔다. 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보폭으로, 주완이 앉아 있는 책상 앞까지 걸어갔다.

    이제라도 어제 못다 빌었던 용서를 구해야 할까. 안일한 선택에 대한 죗값을 치르겠다 매달려야 할까. 이 관계를 포기하려는 그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돌릴 수 있을까. 미처 입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는 동안에도 주완은 이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구구절절한 말들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화나게 한 포인트는 명확했으니까. 얼마나 처절하게 후회하고 있는지, 관계의 끝을 앞둔 마음이 처참한지, 증명해야만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준희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완은 그제야 모니터에서 준희에게로 눈을 느리게 돌렸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시선이었다. 준희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각오한 일임에도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당장이라도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는 울먹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지난밤 내내, 그리고 차 안에서 내내 생각했다. 이토록 가혹한 취급을 받고도 관계를 그만두고 싶지 않은 이유는 무얼까. 혹여라도 끊겨 나갈까 안달복달하게 되는 이유가 무얼까. 사실 고민할 것 없이 답은 뻔했다.

    처음에는 관심이 동했을 뿐이다. 그다음으로는 혹했다. 발기 부전까지 걱정할 만큼 무미건조하던 일상에 사고처럼 끼어든 근사한 남자는 심지어 그를 자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반했다. 그날의 그 엘리베이터에서. 진부한 멜로 영화 그 어떤 장면보다 특별하게 기억될 순간이었다.

    그 후로는 속수무책이었다. 비 내리는 오후에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어린애처럼, 쏟아지는 감정을 온몸으로 감당했다. 눈에 들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다.

    “좋아해요, 차주완 씨를. 어쩌면 처음부터 좋아했어요. 정확히는 그때 호텔 엘리베이터에서부터요.”

    “…….”

    “그래서 거짓말했어요. 어떻게든 옆에 잡아 놓으려고. 그렇게 하고 나면 방법은 차차 생길 거라고, 얄팍하게 생각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담담하게 털어놓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흔들리는 눈빛이 가까스로 주완에게 가 닿았다.

    “옆에 있다 보면…… 그리고 노력하면,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강준희 씨.”

    꿇어앉아 있는 준희를 내려다보던 주완이 나직이 그를 불렀다. 준희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처음에 말했듯이 결국 나를 감당할 수 없게 될 겁니다.”

    피곤이 스며 있는 목소리가, 준희를 설득하듯 말했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내려놓으며 준희를 올곧게 마주 보았다.

    “강준희 씨는 끝내 본인의 자존심을 지키게 될 겁니다.”

    “왜 그렇게 속단하세요?”

    “…….”

    “아마도 제 마음을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이랬던 적이 없어요. 제 마음이, 이렇게 절제되지 않았던 적이…….”

    주완의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준희는 말끝을 흐렸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설득력이 없을 것 같아 자신감이 떨어졌다. 방탕했던 과거와 거짓으로 쌓아 올린 관계의 폐해였다. 준희는 붉게 얼룩진 아랫입술을 습관처럼 씹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그렇지만 저는 주완 씨랑 해 왔던 플레이들마저…… 좋았어요. 이건 진짜예요. 정말 괜찮았어요. 싫은데 꾸역꾸역 참았던 게 아니라……, 그냥 그걸로도 괜찮아서…….”

    “그래서.”

    “…….”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랍니까?”

    주완은 딱딱하게 물었다. 설움이 왈칵 차올랐지만 준희는 가만히 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기회를 더 주세요. 그동안의 믿음이 전부 무너졌다면, 바닥에서부터 다시 세울게요. 한 번만 더…….”

    “기회는 충분히 더 주지 않았나. 도대체 어떤 식의 기회를 말하는 건지.”

    “그건…….”

    “지금 당장 내 구둣발이라도 핥으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는 감정에 호소한다고 하여 너그럽게 용서를 베푸는 남자가 아니었다. 마음의 빗장을 열어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위로 상대를 몰아붙일 수도 있는 남자였다.

    꿇어앉은 무릎이 어느덧 저릿저릿했다. 꼼지락거리는 만큼 종아리와 겹쳐진 허벅지와 뒤꿈치 위에 올려진 엉덩이가 고통을 호소했다. 준희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네. 할게요.”

    주완은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말로 해 보라는 듯,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상체를 숙여 네발짐승처럼 엎드린 준희는 시키지도 않은 사족 보행으로 주완의 무릎 바로 앞까지 기어갔다. 주완은 그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응시했다.

    막상 의자 아래 내려진 주완의 구둣발을 보니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광이 흐를 정도로 깨끗하고 뾰족한 코였지만 혀를 내어 거길 핥는 것은 모멸감을 동반하는 행위였다.

    준희는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구두의 표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수치심이나 낭패감 같은 쓸데없는 감상들은 목구멍 안쪽으로 깊숙이 삼켜 냈다. 그는 마치 키스하는 것처럼 고개를 틀어 조심스럽게 입술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강준희 씨.”

    “…….”

    구두를 핥기 직전에, 주완은 그를 불러 세웠다. 톡, 고여 있던 눈물이 그의 구둣발 위로 떨어졌다. 준희는 기어이 그걸 핥기 위해 고개를 더욱 숙이려 했지만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주완이 그의 머리채를 쥐어 고개를 들어 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뭐가 강준희 씨를 이렇게 맹목적으로 만든 겁니까.”

    강하게 잡히지 않아 두피가 아프지 않았다. 준희는 젖은 눈으로 주완을 올려다보았다. 한 뼘 거리를 둔 채 마주 본 얼굴에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붓고 싶어졌다. 그는 충동과 함께 혀 위에 고인 침을 삼키곤 입술을 뗐다.

    “차주완 씨가요.”

    “…….”

    “주완 씨가 저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균열 없던 주완의 입술에 자그만 미소가 맺혔다. 준희의 눈가에 왈칵 열이 몰려 뜨거워졌다.

    “사랑해요.”

    물기 어린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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