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9)
  • 4. LIAR (1)

    꿈을 꿨다.

    꿈속에서 준희는 주완의 대표실 문 앞이었다. 한 비서가 있어야 할 공간은 요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문은 현실보다 훨씬 거대하고 단단해 보였다. 준희는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열었을 때, 주완은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휴대 전화를 들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빛이 밝고 다정했다. 통화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문가 주변을 서성이며 망설이고 있는데, 주완의 고개가 뒤늦게 들렸다. 준희를 발견한 그의 눈동자에 상냥한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준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앞에 가서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여전히 휴대 전화를 들고 있는 주완의 미간이 좁혀졌다. 영 성가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강준희 씨, 내가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선명한 음색이 귓가를 할퀴고 지나갔다. 준희는 꿇어앉은 채 그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바지의 옷감이 왈칵 구겨진다. 준희는 그가 들고 있는 휴대 전화 너머의 상대방이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해 듣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계약이라면 일찍이 끝나지 않았나? 멋대로 찾아와 성가시게 구는 이유가 뭡니까? 날 엿 먹이려고?”

    “그런 게 아니…….”

    “나가세요.”

    차갑게 말하는 그의 음성이 이해진을 내쫓던 그때의 목소리와 오버랩 됐다. 준희는 긴장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젖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는 저에게 주어진 대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원치 않는 애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제가 전부…….”

    비참함에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 갔다. 준희는 상대를 올려다보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을 이었다.

    “제가 전부 잘못했어요. 세컨드여도 괜찮아요. 욕심 안 낼게요. 그러니까 제발…….”

    이해진이 했던 말들이 준희의 입을 통해 무조건 반사처럼 술술 튀어나왔다. 그러나 주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무심하고, 차갑고, 매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윽고 주완은 손을 뻗어 준희의 턱을 움켜쥐었다. 거센 악력에 턱이 얼얼하다 못해 뺨까지 짓눌렸다. 준희의 몸이 앞으로 약간 끌려갔다.

    “끝이라는 말을 얼마나 더 해야만 네가 나가떨어지려나.”

    “…….”

    “그동안 했던 말이 부족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너도 잘 알 텐데.”

    아……. 마음이 참담해졌다. 그 무렵 준희는 꿈을 꾸는 중임을 자각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더없이 아픈 말이었다. 상처가 될 것을 알고 하는 말이리라. 이전에도 주완은 상대방 몸의 상처에 그치지 않고 상처까지 즐기는 사람이라고 고백했지 않은가. 기어이 마음을 뒤집고, 저에게 떼 낼 요량으로 철저히 계산된 대사였을 것이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려 나락으로 추락하듯 마음이 아찔해졌다. 더는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준희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

    “헉…….”

    깨어났을 때는 오후가 다 된 시간이었다. 주완과 관계를 가질 때마다 온몸의 기력을 전부 소모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다음 날 늦잠을 자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준희는 부드러운 침구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몸을 꿈틀거렸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꿈을 꾸는 동안 악다물고 있던 이가 아릴 정도로 긴장한 모양이었다.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흥건한 것이 느껴졌다. 준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꿈의 여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심장이 아직 두근두근 뛰어 대는 것이 느껴졌다.

    꿈속에서 그는 강준희였지만 동시에 이해진이었다. 주완의 마음을 확실히 얻지 못한다면 이해진의 말로처럼 비참하게 버림받고 말 것이다. 타당한 불안이 심장을 좀먹었다. 초조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차주완은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준희는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지이잉- 하고 울리는 휴대 전화 진동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쩌면 주완의 연락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불안정하던 맥박이 서서히 정상 궤도를 찾았다. 이불을 턱 아래로 내린 그는 협탁에 올려져 있던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전화 발신인은 최시훈이었다. 준희의 얼굴에 실망감이 번졌다.

    “바쁘니까 무슨 일 있으면 지율이한테 연락하라고 했잖아.”

    […….]

    전화를 받자마자 톡 쏘아붙였더니 상대편에서 말이 없었다. 너무했나? 준희는 뒤늦게 눈을 굴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야, 최시훈. 듣고 있어?”

    [아, 형. 목소리 좀 들으려고 전화했죠. 그 정도도 안 돼요?]

    잠시 침묵하던 것이 무색하게 시훈은 밝은 목소리를 냈다.

    [차주완 대표가 어지간히 좋으신가 보네. 이러시면 저 질투 나요.]

    “네가 뭔데.”

    [저야 형의…….]

    또 엑스 보이프렌드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하려나? 준희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끼는 동생?]

    아무튼 눈치 하나는 빠른 녀석이었다. 어려서부터 성공을 위해 악착같이 매달린 탓인지 시훈은 영리하고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타입이다.

    그런 성격으로 성장한 데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준희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물었다.

    “어머니는 잘 계시지?”

    [그냥 뭐. 늘 비슷하시죠.]

    말마따나 ‘엑스 보이프렌드’ 시절에 알게 된 이야기는 그랬다. 시훈은 홀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집안의 가장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부터 자주 병원 신세를 지셨다. 지금의 소속사와 계약을 맺을 무렵에는 아예 입원하셔서 얼마간은 준희가 병원비를 지원하기도 했었다.

    “그래, 그런 거면 됐다.”

    최시훈은 떳떳하게 성공했고, 좋은 병실에 자력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병원비를 신세지던 처지에서 벗어나던 날, 준희는 그를 무척 대견하게 여겼다. 시훈은 그런 동생이었다. 전 남자 친구로 치부하기에는 조금 더 깊고 섬세한 사이였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준희는 이 관계를 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시훈아.”

    [네, 형.]

    “맞아, 형이 너 아껴.”

    […….]

    “그래서 사적인 연락이든 만남이든, 자제하고 싶어.”

    부연 설명이 길게 붙지 않아도 수화기 너머의 시훈은 이해할 것이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까. 그럴 것을 알았다. 준희는 죄책감을 느끼며 침대 헤드에 등을 툭 기대었다.

    [알았어요. 나도 그냥……, 그냥 목소리 들으려고 전화한 거예요.]

    말과 달리 서운함이 역력한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는 일부러 소리 내어 키득거리며 쾌활하게 덧붙였다.

    [형 가끔 되게 재수 없는 거 알죠? 못돼 가지고. 차주완 대표한테는 되도록 그런 모습 들키지 마요. 나 진짜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스읍, 혼난다. 아무튼 끊어. 나 할 일 있어.”

    [그래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요, 형. 청첩장이 나온다거나……. 알죠? 결혼식에도 안 부르면 완전 배신이야. 축가는 나야. 다른 놈이 축가 부르는 영상 떠돌아다니면, 어? 나 형 신혼집 앞에 자리 깔고 시위할 거야.]

    그것참, 오싹한 협박이었다. 준희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휴대 전화 너머의 시훈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잠시 웃다가 마지막 인사와 함께 통화를 끝냈다.

    고요한 공간이 더없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주변을 차단할수록 차주완 대표의 얼굴, 말투, 손길 같은 것들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마음은 쏟을수록 깊어졌다. 불가항력처럼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주완은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준희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는 쓰게 웃으며 휴대 전화를 들어 메시지 창을 띄웠다. 지난 플레이 내용에 대해 복기할 시간이었다.

    ***

    그의 메시지는 어김없이 금요일 저녁에 도착했다. 영화를 보자고 제안한 그는 좋아하는 장르가 있는지 물어보았고, 준희는 어떤 장르든 괜찮다고 대답했다. 실제로는 공포 영화에 취약했다. 다행히 주완은 로맨스 영화를 골랐다.

    「4시까지 집 앞으로 데리러 가겠습니다.」

    그러고는 그렇게 덧붙였다. 메시지를 받은 준희는 한참이고 그 한 문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전처럼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친절이었다. 잠시 얼어 있던 준희는 다급하게 손가락을 놀렸다.

    「전 너무 좋아요.」

    메시지는 거기에서 끊겼다.

    준희는 온종일, 그리고 다음 날이 되도록 어떤 옷을 입고 나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드레스 룸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지만 채택된 것은 단정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다소 평범했다. 단정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듯한 주완의 취향을 고려한 착장이었다.

    준희는 그 옷을 입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약속된 네 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한산한 거리에 오도카니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퍽 낯설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인기척이 꼭 주완일 것만 같아서, 마음이 빈번히 번잡스러워지곤 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

    주완의 차는 약속된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했다. 준희는 상기된 얼굴로 조수석에 올라타며 둘러댔다. 방금 나왔다고, 날씨가 좋다고, 중얼거리는 준희를 태운 주완의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의 차가 도착한 곳은 강욱진 회장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였다. 서울에서는 꽤나 규모가 있는 곳으로, 주말이니만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그걸 노렸을 터였다. 사람들의 눈에 띄고, 사진이 찍히고, SNS에 전시되는 것을.

    “사람 많은 곳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네요.”

    “자주 옵니까? 이런 곳.”

    “파티가 아니면 북적이는 곳에 올 기회는 많지 않지만…… 좋아하는 편이에요. 심심하지 않잖아요. 에너지도 넘치는 것 같고.”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데까지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들은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가며 영화관이 있는 층 버튼을 눌렀다.

    구태여 따지자면 준희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파티에 초대받으면 사양하지 않았고, 한가한 날에는 클럽을 찾았다. 그는 시끄러운 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무의미한 대화와 가식적인 웃음을 나누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주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주완 씨는요?”

    “나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조용한 곳을 선호하죠.”

    “아.”

    “그래도 가끔 나옵시다.”

    준희는 문득 고개를 돌려 주완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설마. 어쩌면 북적이는 곳을 좋아한다는 나를 위한 배려일까? 불쑥 고개를 내민 설레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싹둑 잘려 나갔다.

    “꽁꽁 숨어 만날 거라면 ‘계약’이라는 이름에 묶여 있을 이유도 없을 테니까.”

    “…….”

    “웃어요.”

    그럼 그렇지. 실망할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가 영화관 층에 도착했다. 철제문이 열림과 동시에 주완은 준희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누가 보아도 다정한 그림일 것이 분명했다. 준희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걸음을 떼었다.

    토요일 오후 네 시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붐비는 시간대였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주완과 준희를 알아본 몇몇의 사람들이 휴대 전화를 들어 소리 없이 사진을 찍었다. 준희가 주변을 흘끔거리는 동안 주완은 허리에 얹은 손에 힘을 주어 길을 안내했다.

    “이쪽으로.”

    미리 동선을 파악해 둔 것인지 프라이빗 상영관으로 향하는 주완의 걸음에 막힘이 없었다.

    프라이빗 상영관의 크기는 일반 상영관보다 약간 작았고, 좌석 수는 현저하게 적었다. 그마저도 텅텅 비어 있는 것을 보니 통째로 대여한 모양이었다. 가죽으로 된 커다란 소파 좌석은 지나칠 만큼 안락했으며, 좌석과 좌석 사이에는 스낵을 위한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은 주완은 상영관의 조명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SNS에 사진이 많이 퍼졌는지, 기사는 잘 올라왔는지, 홍보팀의 보고를 받는 듯했다. 둘 사이 테이블에 웰컴 드링크로 커피와 에이드가 놓여졌다. 준희는 차갑게 부서지는 탄산을 몇 모금 넘기는 동안에도 주완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오늘 하루 옆모습은 원 없이 보겠네.’

    속으로 불평할 무렵이 되어서야 주완은 휴대 전화를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맞부딪혔다. 눈을 피하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조명이 어두워졌다. 암전되는 사이 주완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영화 잘 봅시다. 내 얼굴 말고.”

    “…….”

    하여간 얄미운 남자였다. 준희는 그제야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조용한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심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종업원을 제외하고는 둘뿐인 아늑한 공간에서 잠시 바깥 풍경에 눈길을 빼앗긴 준희에게 주완이 문득 물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납니까?”

    “네?”

    “오늘 본 영화.”

    준희는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깨작거리며 눈을 굴렸다.

    “그, 그럼요.”

    “영화 제목이 뭐였는데요?”

    준희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걸렸다. 주완의 예상대로 그는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밝은 화면이 나올 때마다 고개를 돌려 남자의 옆얼굴이라도 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불이 꺼진 조용한 공간에서 차주완에게 눈을 돌리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목도 기억을 못 하는데 내용은 어지간할까.”

    “…….”

    “결말은 기억나요?”

    “……해피 엔딩?”

    대충 로맨스 영화였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해피 엔딩이지 않을까? 마침내 눈을 마주치며 대답하자 주완이 픽 웃었다.

    “두 주인공이 동반 자살 하는 게 어떻게 해피 엔딩이 됩니까?”

    “……천국에서 행복할 수도 있죠, 뭐.”

    준희는 입을 삐죽거렸다. 무릇 연인과의 데이트에서 영화관이라고 한다면, 영화보다는 같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아늑하고 뭉클한 분위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영화 말고 당신에게 집중한 게 뭐가 나빠? 솟구치는 불만을 꾹 삼키는 동안 메인 음식이 서빙되었다. 준희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포크를 들었다.

    대화는 거기에서 잠시 끊겼다. 나온 음식의 반도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주린 배를 채운 준희는 금세 집중력을 잃었다.

    “음료는 뭘로 하겠습니까?”

    “으음, 적당히 단것으로…….”

    “아니면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어때요?”

    바닐라 아이스크림. 달다고도 할 수 없고 달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맛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차가운 디저트보다는 속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음료가 적당할 것 같았다. 잠시 뜸을 들이며 망설이는 준희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완이 재차 물었다.

    “안 좋아합니까?”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지금은 따뜻한 음료가 더 나을 것 같아서요. 라테 마실게요.”

    주완은 끈질긴 시선으로 준희의 표정을 구석구석 살폈다. 준희는 그의 속을 알 길이 없어 다만 눈을 깜빡거렸다. 이윽고 주완이 직원을 불러 아메리카노와 라테를 한 잔씩 주문했다.

    테이블이 정리되고 정갈한 찻잔에 담긴 커피가 서빙되었다. 작은 쿠키를 담은 디저트 접시도 함께였다. 향이 좋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주완이 눈을 돌려 창밖의 야경을 응시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준희도 찻잔을 들었다. 적당히 고소한 라테의 풍미가 혀끝을 물들였다.

    직원들마저 자리를 비운 룸의 분위기는 퍽 고요했다. 이름 모를 재즈 피아노 곡이 작게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야경으로 관심을 돌린 남자는 수다스럽거나 번잡한 성격이 못 되었다. 그는 때때로 무뚝뚝했고 때로는 다정했으며, 종종 알 수 없는 언어로 준희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왜 그렇게 보지. 오늘도 잘생겨서?”

    그리고 오늘은 짓궂기까지 하다. 준희의 시선을 느낀 주완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이번에는 준희가 찻잔 위로 시선을 내렸다. 찻잔을 쥔 손가락이 딱딱한 표면 위를 어지러이 헤매었다.

    “그나저나 생각은 해 봤습니까?”

    딱히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는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그가 연이어 물었다.

    “네?”

    “일주일 동안 나에 대한 마음을 충분히 들여다봤느냐는 뜻이에요. 물론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나중에 정리가 됐을 때 대답해도 좋습니다.”

    아……. 준희는 그날의 고백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시간이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도리어 확고해지기만 했다. 그동안 감정에 이다지도 확신을 가졌던 일이 있었던가. 준희는 자신의 지나간 연애사를 짧게 회고했다.

    멋모르고 했던 풋내 나는 첫사랑부터 여러 차례 지나간 인연들을 통틀어 준희는 감정을 홀로 오롯이 품고 있었던 경험이 없었다. 대개는 상대편에서 먼저 관심을 보였고, 그렇지 않더라도 고백하면 쉽게 넘어오곤 했다. 그래서인가. 준희에겐 지금의 상황이 더더욱 안달 나고 초조하게 느껴졌다.

    “제 마음은 확고해요.”

    그의 마음을 현혹하기 위해 허투루 하는 고백이 아니었다. 무겁게 대답한 준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주완은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또각또각 느리게 두드렸다.

    “강준희 씨에 대한 소문은 굳이 알아보려 마음먹지 않아도 손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아니, 원하지 않아도 듣게 되는 편이죠. 공개 열애까지 하고 있으니.”

    “…….”

    “연애 경험이 많다고 질책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다만…….”

    준희는 침울해졌다. 하기야 저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전 남자 친구가 한 트럭이라더라. 연애 기간이 두세 달을 넘으면 오래 사귄 편이라더라. 그렇게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은 대부분이 사실이었다.

    주완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골랐다. 질책하는 투로 들리지 않을 방법을 고민하는 듯했다. 준희가 시름에 잠겨 있는 사이 주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봄처럼 한철 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한철 연애 감정으로 엮이기에 우리는 공유하는 것도, 잃을 것도 많은 사이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래서 더 신중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고작 한철이면 다행이었던 지난 연애 감정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준희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증명해 보일게요.”

    와 닿는 시선이 검고 깊었다. 준희는 시선을 비껴 테이블 위로 떨어트렸다.

    “오랫동안 옆에 두고 확인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당분간은 저를 옆에 두셔야 하고……. 그러니까 겸사겸사…….”

    정제되지 않은 진심들이 입술 너머로 앞다투어 쏟아졌다.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동안 주완은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입꼬리가 약간 올라갔지만, 준희는 알아채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

    “그럼 증명해 보세요. 강준희 씨가 말한 대로.”

    그의 말에 테이블 위로 떨어져 있던 시선이 주완의 검은 눈동자로 향했다. 준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주완의 허락을 제대로 해석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말뜻을 깨닫는 사이 주완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일어날까요.”

    “네? 아…….”

    주완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따라나서던 준희가 그의 뒤로 따라붙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런데, 그러면 저…….”

    “네. 해 보세요. 강준희 씨가 하고 싶은 대로.”

    “…….”

    “응?”

    “……좋아요.”

    제대로 묻기도 전에 주완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그를 따르던 걸음이 무심코 멎어 들었다. 준희는 중얼거리듯 대답하고는 멀어져 가는 주완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속이 묘하게 울렁거리는 듯했다. 진짜 연애를 허락받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들떠 올랐다. 앞서가던 주완이 덩달아 멈춰 서서 준희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가슴께가 묵직해졌다. 준희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빠르게 주완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

    그렇다면 이제 진짜 연인에 가까운 관계인 건가? 그저 계약에 얽매여 있는 딱딱한 사이보다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상태인 걸까? 채 캐묻지 못한 질문들이 수일 동안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관계의 정의가 뭐가 됐든 지금의 감정이 변화할 일은 없으리라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속도 없이 기분이 좋아지고 웃음이 피어나곤 했다.

    어느 햇빛 쏟아지는 오후에 침대 위를 할 일 없이 굴러다니던 준희는 문득 실소했다. 하루의 기분이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 유치하고도 신기해서였다. 연애라면 질릴 만큼 해 봤다고 생각했는데, 꽃가루가 스며든 듯 폐부까지 간지러운 감정이 퍽 낯설게만 느껴졌다.

    심지어는 뺨이 뜨겁기까지 했다. 푹신한 침구 위에 누운 채 준희는 제 손바닥을 들어 뺨을 눌러 보았다. 피부가 감전된 듯 저릿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의심 가는 구석이 있었다. 준희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몸을 뒤집었다. 엎드린 채 허공에 들린 발을 까딱거리며 달력을 확인했다.

    ‘그럼 그렇지.’

    히트사이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협탁 서랍 안에 들어 있는 억제제 약통을 떠올린 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곧 토요일이었고, 펜트하우스에서 주완을 만나게 될 터였다. 억제제에 대한 생각을 거둔 준희는 주완과의 메시지 창을 열었다. 몇 차례 주고받지 않은 메시지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었다.

    일전에 연애할 때에도 그는 연락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내내 뜸하다가 내킬 때 별안간 애정을 갈구하고 떠나가는, 종잡을 수 없는 타입이었다. 그렇지만 잘 보여야겠다고 의식하자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전부 신경이 쓰였다. 연락을 많이 하면 많이 하는 대로 그를 성가시게 할까 걱정이 되었고, 적게 하면 적게 하는 대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비칠까 걱정이 되었다.

    ‘왜 답지 않게 사서 걱정을 하세요?’ 하는 지율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준희는 메시지 창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다가 픽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보고 싶다. 지금쯤 일을 하느라 바쁘겠지. 틈틈이 짬이 날 때마다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해 주려나. 그때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허락한 걸까. 상념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준희는 메시지 창 위로 ‘보고 싶은데’라고 글자를 써 넣었다가 이내 손가락을 멈추었다.

    “…….”

    너무 직설적인 표현인가. 준희는 망설이며 두 글자를 지웠다. 그러나 손가락을 삐끗해 백스페이스 대신 위 열의 전송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보고 싶」

    헉. 준희는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상대방이 읽기 전에 삭제 기능을 활용할까 잠시 갈등했지만, 그렇게 하면 오히려 관심을 끌려는 수작으로 읽힐 것 같았다. 그렇기도 하고……, 아무리 계약 연애라도 연애하는 사이에 이 정도 메시지는 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도 역시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준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후회를 거두었다. 애당초 깊게 고민하고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곧 볼 텐데요.」

    예상과 달리 답장은 금세 돌아왔다. 메시지 내용은 그다지 다정하지 못했지만, 답장이 빠르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공연히 가슴이 뭉클했다. 준희는 실실 웃으며 「그래도요.」라고 덧붙였다. 답장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톱스타를 좋아하는 소년의 마음이 이와 같을까. 준희는 어려서부터 연예인을 좋아해 본 경험이 없지만, 그래도 추측하건대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그는 응답 없는 휴대 전화를 던져 놓은 채 침대 위로 몸을 굴렸다.

    ***

    그의 말대로 토요일은 멀지 않았고, 곧 다가왔다. 약속 장소는 어김없이 펜트하우스에서였다. 준희는 떨리는 마음으로 호텔 최상층으로 몸을 옮겼다.

    계기판의 숫자가 한 층 한 층 높아져 갈수록 긴장이 되었다가 기대가 되었다가 두려워지곤 했다. 그와의 잠자리는 가학과 통제의 반복이었다. 고통은 몸을 무너지게 만들고 굴욕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지만, 그 끝에는 반드시 이전에 충분히 맛보지 못했던 열락이 존재했다. 그러나 주완은 극한의 쾌락마저도 스스로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그에게는 ‘적당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기어이 끝을 보게 만들었고, 보편적으로 멈춰 서는 선 너머로 온 감각을 몰아붙이고 지배했다. 침대 위에서 준희에게 결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두렵기는 하지만 자극적이고도 스릴 넘치는 방식이었다.

    “후으…….”

    문 앞에 도착한 준희는 짧게 심호흡한 다음 문고리를 당겼다. 안쪽으로 밝혀진 은은한 조명이 그를 반겼다.

    플레이를 시작하기 전의 주완은 특별히 다정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긴장한 그에게 따뜻한 음료를 준비해 몸을 녹이게 만들었고, “씻고 왔습니까?” 따위의 일상적인 질문으로 컨디션을 체크했다. 그 모습이 마치 진료를 보는 의사 같아서, 준희는 반사적으로 흰 가운을 입은 주완의 모습을 상상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다 마셨으면 일어나죠.”

    음료의 반도 비워지지 않았지만 준희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엉덩이를 뗐다. 준희의 어깨에 그의 다정한 손길이 닿았다.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 장소는 거실 가운데였다.

    “준비하고 있어요.”

    “네.”

    이제 준희는 ‘준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았다. 등을 돌린 주완은 2층으로 올라갔다. 남겨진 준희는 마른침을 삼키고 입고 온 셔츠의 단추를 손에 쥐었다. 잘게 떨리는 손이 단추를 툭툭 풀어 헤쳐 갔다.

    그는 빠르게 알몸이 되었다. 벗은 옷을 한편에 잘 개어 놓고는 대리석 바닥 위로 무릎을 꿇어앉았다. 대리석은 딱딱했지만 온도가 유지되어 있어 그다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쪽으로부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쭈뼛거리는 사이 목뒤의 솜털들이 바싹바싹 일어나는 듯했다. 오늘은 어떤 도구를 준비했을까, 상상하니 오금이 오싹거렸다. 무릎 위에 말아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툭, 툭. 무릎 꿇은 앞쪽으로 주완이 가지고 온 물건들이 놓였다. 분홍색의 기다란 양초, 가운데 긴 막대가 달린 가죽으로 된 족갑, 이음새가 사슬로 된 가죽 수갑, 딜도보다 작고 바이브레이터보다는 큰 크기의 애널 플러그가 그것들이었다. 그 옆으로는 로션이 놓였다.

    고작 준희의 내공으로는 준비물만으로 플레이 내용을 유추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주완이 가지고 온 물건들을 훑으며 흘끔흘끔 눈치를 보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주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주완은 마지막으로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거실 테이블 위에 그것을 따로 올려 두었다.

    준희는 그가 풀어 놓은 손목시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계의 정체를 깨달았다. 시계는 일전에 그가 선물한 액세서리들 중 하나였다. 그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눈을 굴리는 사이 주완은 다시 바닥에 늘어놓은 플레이 도구 옆으로 돌아왔다.

    플레이를 시작하기 전 주완은 양쪽 소매를 단정하게 접었다. 준희는 떨리는 마음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오늘 주완은 그가 선물한 손목시계를 차고 이 자리에 왔다. 이유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준희는 오늘만큼은 그가 결정할 고통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또 참아 내고 싶어졌다. 이윽고 주완이 가장 먼저 집어 든 것은 긴 막대의 양끝에 구속구가 달린 족갑이었다.

    “무릎으로 서서 다리 벌리세요.”

    “……네.”

    주완은 준희의 뒤로 돌아가서 명령했다. 준희는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엉덩이를 뗀 다음 무릎을 양옆으로 디뎌 가며 조금씩 벌렸다. 이만하면 되었나 싶을 정도로 벌어졌을 무렵 한쪽 발목에 족갑이 감겼다. 적당히 빠듯하게 발목을 감싸는 크기였지만, 가죽으로 되어 있어 안정감이 있었다.

    “더 벌려야 반대편을 채울 수 있을 텐데.”

    “아…….”

    족갑 사이에 달린 막대가 생각보다 긴 모양이었다. 준희는 조금 더 무릎을 벌려 세웠다. 붙어 있던 허벅지가 벌어지며 회음부가 시원하게 드러났지만, 애초에 그와의 관계에서 수치심을 챙기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내 반대편 발목에도 족갑이 채워졌다.

    “손은 뒤로.”

    이번에는 수갑을 집어 들며 주완이 연이어 명령했다. 무언가를 고민하거나 사고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되었다. 두 손을 뒤로 뻗어 허리춤에 얹기 무섭게 수갑이 채워졌다. 그러고는 뒷덜미가 잡혔다.

    “으윽.”

    대리석 위에 뺨이 붙었다. 엉덩이를 위로 쳐든 자세였다. 발목과 손목이 뒤로 구속된 까닭에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젤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들어오면서부터 페로몬 냄새가 진동을 하길래.”

    “아…….”

    페로몬 향기가 그렇게 짙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준희는 어쩌지 못한 채 허공에 드러난 구멍만을 달싹거렸다.

    “천박하긴.”

    주완은 부러 차갑게 말하며 허공을 향해 벌어진 긴장해 오물거리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수치스러운 분위기 탓인지 치부를 드러내야만 하는 상황 탓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이미 축축하게 젖은 내벽은 감도가 좋았다. 주완은 장미꽃 향기를 크게 들이마시고는 서서히 제 페로몬을 풀었다.

    “흐…….”

    짙은 교목 내음에 내부가 질척하게 물들었다. 손가락이 드나드는 대로 찌걱거리며 물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대리석에 맞닿은 뺨이 뜨거웠다. 준희는 달뜬 숨을 색색거리며 숨을 삼켰다.

    “아, 으…….”

    수갑에 묶인 손이 등 위에서 애처롭게 바르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주완은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단번에 손가락을 늘려 구멍을 우악스레 넓혀 갔다. 급작스런 침입에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골이 패였다. 주완은 그 희고 통통한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찰싹 내려쳐 힘을 풀게 했다.

    손가락은 내벽을 긁고 깔짝이면서도 전립선을 건드리지 않은 채 교묘하게 물러났다가 다시 들어오길 반복했다. 전부 알고도 일부러 애태우는 짓이다. 그걸 알고도 열락을 바라는 본능으로 허리께가 움찔움찔 떨렸다.

    안을 들쑤시던 손가락이 단번에 빠져나갔다. 긴장이 풀리며 무릎이 약간 더 벌어졌다. 준희는 제 눈앞에 놓여 있던 플러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아직 그만한 것을 삽입하기에는 덜 풀린 것 같은데…….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거렸다.

    “힘 풀어요.”

    주사 놓는 의사처럼 평이한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린다. 고무로 된 재질의 매끄러운 검정색 플러그는 입구가 뾰족하고 가운데가 뚱뚱했으며, 손잡이 부분이 동그랗고 평평한 판으로 되어 있어 마개 역할을 했다. 탄성 있는 플러그가 잔뜩 오므려진 입구를 열고 안으로 삽입되었다.

    “흣.”

    불편한 자세에서 이물감이 왈칵 느껴지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주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플러그를 끝까지 단번에 쑤셔 넣었다. 젤이 발린 안쪽으로 플러그가 깊이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흐으…….”

    “잘 물고 있어요.”

    힘을 어느 정도 풀어야 이물감이 덜 느껴지리란 것을 알지만, 엉덩이와 양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를 지켜보던 주완이 손을 들어 잘게 떨리는 둔부 위로 손자국을 남겼다. 짝, 짜악. 가벼운 손찌검이었지만 힘이 들어갈 때마다 구멍을 조이게 되어 플러그의 모양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간간이 신음을 뱉으며 바닥에 뺨을 문지르던 준희의 뒷덜미가 다시 잡혔다. 주완은 그의 어깨를 잡아 상체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준희는 붉게 물든 얼굴로 처음처럼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반질반질하게 젖은 눈 주변까지도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더운 숨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다음으로 주완은 로션을 집어 들었다.

    로션이 듬뿍 담긴 손바닥이 단숨에 성기를 훑었다. 주완은 음모 없는 하얀 생식기 위를 군데군데 매만지며 로션을 발랐다. 로션은 피부를 매끄럽게 물들이는 동시에 뜨겁게 자극했다. 아랫배와 성기를 지나 회음부와 허벅지까지, 부드러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간지러운 자극에 다리를 움츠리고 싶었지만 족갑으로 속박되어 있는 탓에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다.

    준희는 끙끙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뒤로 묶인 손목과 허벅지가 불가항력으로 달달 떨렸다. 플러그를 꽂고 있는 엉덩이도 마찬가지였다. 앞이 자극되는 만큼 플러그를 조일 수밖에 없는 구조인지라, 앞과 뒤를 동시에 희롱당하는 듯했다.

    어느덧 몸을 세운 살 기둥을 축축하고 뜨거운 손으로 매만져 더더욱 곧게 만들고 귀두를 톡 건드린 손바닥이 아랫배를 느리게 문지르며 피부를 떠났다.

    “흐, 후으…….”

    준희는 거칠게 호흡하며 남아 있는 도구를 향해 눈을 돌렸다. 주완은 옅은 분홍빛의 양초를 집어 들었다. 길이가 길고 굵기가 얇은 것이었다. 주완은 라이터를 꺼내 심지에 불을 붙였다. 준희는 일렁이는 불빛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왁싱 플레이, 해 본 적 있습니까?”

    “……아뇨.”

    준희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초를 든 주완의 손이 가까워질수록 겁을 집어먹은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고 싶었지만 이내 한쪽 어깨를 주완에게 붙들렸다.

    주완은 준희의 한쪽 어깨를 붙든 채 타오르는 초를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예쁠 겁니다.”

    “뭐가…….”

    “잘 봐요. 꽃잎 같을 테니. 강준희 씨 페로몬 향기와도 잘 어울릴 겁니다.”

    어깨를 떠난 주완의 손이 준희의 뒤통수를 가볍게 눌렀다. 고개가 아래로 숙여지며 빳빳이 서 있는 제 성기가 보였다. 그제야 곧 어떤 일이 벌어질지 슬금슬금 감이 잡혔다. 두려움에 동공이 흔들렸지만 주완은 뒤통수에 손을 얹은 채 그대로 촛대를 기울였다.

    곤두선 성기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촛농이 떨어졌다. 물론 그래 보았자 주완이 주물러 로션이 번들번들하게 묻은 고환 위였다.

    “아읏……! 주, 주완 씨……!”

    준희는 덜덜 떨며 몸을 비틀었다. 준희는 강한 악력으로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는 속삭였다.

    “움직이면 혼나요.”

    “그, 그렇지만…… 으, 흐읍…….”

    발목이 구속된 채로도 허벅지가 절로 오므라들었다. 주완은 발로 무릎을 툭툭 차서 허벅지를 제대로 벌어지게 만들었다. 다시금 촛대가 기울어지며 높은 위치에서 촛농이 떨어졌다. 꽤나 많은 양의 촛농이 살 기둥을 지나 고환까지 스쳐 지나가며 연분홍빛으로 굳혀졌다.

    “아흑……!”

    삽시간에 눈물이 터졌다. 성기는 생전 겪어 보지 못한 홧홧한 고통으로 자극당했다. 아직 다하지 않은 남겨진 고통은 가히 공포스러웠다. 준희는 차마 제 앞섶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 떠요.”

    “으, 으……. 너무……, 너무 무서워요.”

    그러자 주완이 머리채를 붙들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채는 고통에 준희는 가까스로 실눈을 떴다.

    “말 안 들을 겁니까?”

    “흑, 아니, 아니요……. 볼게요. 볼 거예요. 흐윽.”

    대답을 받아 내고서야 주완은 준희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이윽고 그는 다정히 준희의 어깨를 짚고서 촛대를 기울였다. 준희의 온몸이 움찔거리며 발발 떨렸다. 눈가는 이미 터진 눈물로 붉게 젖은 채였다.

    촛농은 찰나의 텀을 두고 성기 위로 무자비하게 떨어졌다. 옅은 분홍의 촛농이 음경과 고환 위를 골고루 물들였다. 촛농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꽉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갔다. 장미꽃 향기 또한 점차 자욱해졌다.

    촛농이 떨어져 굳은 자국은 특유의 색감 탓에 얼핏 보면 그의 말마따나 흐드러진 벚꽃잎처럼 보였다. 그러나 성기 위로 쏟아지는 감각은 꽃잎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혹독했다. 덩달아 몸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뒤에 박힌 플러그가 조여들어 내벽을 뭉근하게 건드리기까지 했다. 죽을 맛이었다.

    “아, 흐윽…….”

    “강준희 씨는 예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윽, 아흣……, 흡.”

    “그래서 이렇게 물들여 주고 있는 겁니다. 조금은 귀찮지만, 그래도 기꺼이.”

    지속되는 고통에 성기가 서서히 힘을 잃었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께에 맺혔다가 허벅지 위로 톡톡 떨어졌다. 그 뜨거운 눈물 자국마저 민감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윽, 흐……, 너무 뜨겁……, 뜨거워요, 주완 씨.”

    성기는 더 이상 촛농을 떨어뜨릴 피부가 보이지 않을 만큼 벚꽃잎 자국으로 빼곡히 뒤덮였다. 딱딱하게 굳은 촛농에 뒤덮인 감각이 낯설고 선명해서 준희는 겁에 질려 눈물을 쏟았다.

    후, 주완이 짧게 초를 불어 꺼뜨리고는 짧아진 촛대를 내려놓았다.

    “엄살은.”

    “으흐, 읍……, 엄살 아닌……, 데에, 흐.”

    “얘기해 보세요. 강준희 씨 좆이 지금 어떤 꼴인지.”

    “…….”

    잡고 있던 어깨를 놓은 주완이 준희의 턱을 잡아채고 고개를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무미한 듯 열띤 눈길이 준희의 젖은 눈매를 집요하게 맴돌았다. 준희는 차오르는 울음을 겨우 목구멍으로 삼켜 내며 달달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주완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예…… 뻐요.”

    “어디 볼까.”

    그렇게 말한 주완은 준희의 손목을 묶어 놓고 있던 수갑을 풀어 주었다. 단단히 매여 있던 손목이 자유로워지자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뻑뻑했다.

    “누워요.”

    자유로워진 손으로 눈물 젖은 뺨을 닦을 시간도 없이 명령이 떨어졌다. 준희는 주춤주춤 대리석 바닥 위로 등을 눕혔다. 움직일 때마다 구멍에 박힌 플러그가 형형한 존재감을 전해 오는 통에 동작은 매끄럽지 못했다.

    간신히 등을 대고 눕자마자 족갑 사이를 가로막은 봉이 들어 올려졌다. 다리가 허공으로 쳐들리고 발목이 고개 위쪽까지 올라갔다. 몸을 접은 채 엉덩이를 허공에 드러낸 모양이었다. 주완의 눈앞에 그의 아랫도리가 훤히 보이게 된 꼴이었다.

    “흡…….”

    “아래쪽이 덜 물들었네요. 내가 세심하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주완 씨. 충분했어요. 정말이에요.”

    음경과 고환의 아래쪽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누운 채 다리 사이로 주완의 얼굴을 바라보는 준희의 눈가가 다시 눈물로 젖어 들었다. 그의 성기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건드려 가며 관찰하던 주완이 눈을 들어 시선을 마주쳤다.

    “그렇습니까?”

    “네, 네.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니 다시 초를 켜고 싶어지는데.”

    “으으…….”

    눈앞이 눈물로 흐려져서 주완의 얼굴이 시야에 선명히 담기지 않게 되었다. 정말로 초를 다시 켤 생각은 아니었는지 주완은 봉을 쥔 채로 그저 픽 웃고 말았다.

    “손 들어서 봉 잡아요. 자세는 이대로 유지하는 겁니다.”

    “네……, 잘할게요.”

    준희는 대리석 바닥을 더듬고 있던 손을 들어 족갑의 봉을 움켜쥐었다. 스스로 족갑의 봉을 잡아 엉덩이를 허공으로 쳐든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주완이 강제하는 것보다 배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주완이 준희의 성기를 건드리며 확인하는 동안 굳은 촛농은 반쯤 떨어져 나가 있었다. 주완은 벌어진 허벅지의 안쪽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쳤다. 몇 차례 반복해 손찌검을 하자 흰 허벅지에 불긋하게 손자국이 남겨졌다. 손찌검은 허벅지를 지나 살 기둥과 고환에까지 이어졌다.

    “읏, 흐읍……, 아흑……!”

    꽃잎 같던 촛농이 마저 떨어져 나간 피부 위로 붉은 손자국이 얼룩덜룩 뒤덮였다. 이미 신경이 곤두선 성기에 짜릿짜릿한 마찰이 떨어지자 봉을 쥔 준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손을 놓고 아랫도리를 부여잡아 아픔을 달래고 싶었지만, 주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조금 더 컸다.

    무심한 눈으로 성기를 손찌검한 주완은 그 위로 젤을 뿌려 놓았다. 이어 그의 손길이 닿자 흥분이 가라앉은 음경이 다시금 딱딱하게 몸을 세웠다. 다소 투박한 수음에 허리가 빳빳하게 굳고 구멍이 움찔움찔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지만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아, 흐응…….”

    방금까지만 해도 가차 없이 매 맞던 성기가 이번에는 그의 손아귀에서 뜨겁게 흥분했다. 요의가 치미는 동시에 아까 맞은 허벅지 안쪽이 욱신거려 왔다. 고통과 흥분이 번갈아 찾아든 아랫도리는 신경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인 듯했다.

    꼿꼿하게 쳐들린 살 기둥 위를 젤로 젖은 손바닥이 여러 차례 쓸어 올려 대며 자극했다. 엄지로 단단히 붙들린 귀두가 마구 문질러지자, 준희는 고개를 마구 저어 댔다. 으응, 흑. 울음에 가까운 신음을 뱉어 내면서도 봉을 잡은 손은 풀이라도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봉과 함께 손을 가냘프게 떨어 댈 뿐이었다.

    붉게 물든 피부 위로 핏줄이 섰다. 만질만질한 귀두 끝에서 맑은 애액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희뿌연 정액이 툭툭 터져 나왔다. 주완은 끈질기게 귀두를 매만지고 문질렀다. 사정하는 과정이 오늘따라 아프고 쓰리게 느껴졌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눈물이 대리석 위로 톡톡 떨어져 내렸다.

    “흐, 후……, 아!”

    숨을 고르려는 찰나 와인의 코르크 마개가 벗겨지듯 준희의 안을 채우고 있던 플러그가 쑥 빠져나갔다. 그것을 가차 없이 빼낸 주완은 버클을 풀고 준희의 선홍빛 구멍 위로 제 페니스의 선단을 맞추었다.

    아무리 플러그를 머금고 있다 한들, 충분히 풀어지지 않은 내벽을 열고 주완의 성기가 다짜고짜 욱여넣어졌다.

    “아……! 주완, 주완 씨……, 아흣……!”

    “힘 빼요. 후……. 너무 좁습니다, 강준희 씨는.”

    “그, 흣, 아흐…….”

    “봉에서 손 떼도 좋습니다.”

    주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준희는 손바닥으로 대리석을 팡팡 때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허공에 떠오른 봉은 주완의 손에 잡혔다. 주완은 족갑의 봉을 고개 위쪽으로 더 밀어내어 엉덩이를 위로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페로몬을 풀어, 그 향기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몸이 너무 뜨거워.’

    교목 내음이 몰려들며 소름이 끼쳤다. 온몸이 성감대가 된 것처럼 뜨겁고 저릿했다. 주완의 성기가 밖으로 슬쩍 빠져나갔다. 선단만 삽입한 상태로 애태우듯 허리를 돌리자 준희는 숨을 헐떡이며 애원했다.

    “아, 아……, 더, 으응, 더 박아 주세요. 응, 으응……!”

    그가 깊은 곳까지 들어와 저를 짓이겨 주기를 바랐다. 그의 페로몬을 흩뿌려 주기를 바랐다. 본능이 차오른 숨이 헐떡여졌다. 그러나 주완은 쉽게 허리를 쳐올려 주지 않았다. 서늘한 눈으로 준희를 내려다보며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제발, 제발……. 끝까지……, 으, 흐윽.”

    “말은 제대로 해야지, 강준희 씨.”

    “아, 으……. 더 깊이, 더 세게……, 박고 흔들고…….”

    물기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흥분에 젖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뱉는 애원이었다. 봉을 쥐고 있던 주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성기를 수직으로 처박으며 추삽질 했다.

    “아흑! 아, 흐, 아아, 아으응……!”

    단단히 도드라진 귀두가 전립선을 뭉개고 짓이기며 끊임없이 구멍 안팎으로 왕복했다. 그의 물건이 안을 들쑤시고 지나갈 때마다 뜨겁고 질퍽한 쾌락이 삽시간에 온몸으로 번져 나갔다. 대리석을 더듬던 준희의 손이 봉을 단단히 쥐고 있는 주완의 손목을 부여잡았다.

    “흐, 아, 좋, 응……, 으, 흐으응……!”

    더 깊숙이, 더 오래도록 괴롭혀 주었으면 하는 열망과, 표정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한계까지 몰아붙여지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머릿속에서 맞부딪혔다.

    눈이 질끈 감기고 얼굴이 일그러졌으며 비음 섞인 신음이 입 밖으로 마구 흘렀다. 준희는 상대의 손목에 매달린 채 아이처럼 울었지만 주완의 허리 짓은 멈춰지지 않았다. 먼저 절정을 맞은 쪽은 준희였다. 배 위로 정액이 흩뿌려졌다.

    격렬한 허리 짓에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점차 질퍽해졌다. 젖은 엉덩이가 따가울 정도였지만 오르가슴에 사로잡힌 준희에게 그 정도의 자극은 사소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추삽질 한 뒤에야 주완의 허리 짓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구멍 밖으로 거의 빠져나가다시피 했던 성기가 마지막으로 깊은 곳에 퍽 처박혔다.

    “아으으…….”

    주완은 사정하는 동시에 준희의 안에 박은 상태로 엉덩이를 느리게 돌렸다. 성기를 꽉 물고 있는 붉은빛 주름이 움찔움찔하며 뜨겁게 반응했다. 마침내 교목 내음이 완연해지고, 페로몬과 페로몬이 섞이며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몰리는 듯했다.

    준희는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뜨고 주완을 마주 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준희의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일순 짓궂은 표정을 띤 주완이 한 차례 허리를 놀려 성기를 박았다.

    “히익.”

    철컥, 몸을 떨고 있는 사이 족갑이 풀렸다. 속박되어 있던 허벅지가 양옆으로 벌어지며 주완의 허리를 감았다. 족갑을 마저 풀어 바닥에 던져 버린 주완이 준희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성기가 삽입된 채였다.

    준희가 내려놓아진 곳은 1인용 소파 위였다. 주완은 양 팔걸이를 짚고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체액과 정액으로 더럽혀진 준희가 허벅지를 활짝 벌린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다시금 아래가 형형해졌다. 주완은 고개를 숙여 준희의 턱 끝, 목덜미, 쇄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젖꼭지였다.

    흥분해 도드라진 유두 위를 부드럽게 감쳐물자 허공에 달랑달랑 걸려 있던 준희의 다리가 다시 한번 주완의 허리를 감으며 재촉했다. 주완은 입술 사이로 혀를 놀려 단단한 꼭지를 희롱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그 느린 움직임에 성기의 결합부로 찌걱찌걱 체액이 비집고 흘러 아래를 적셨다.

    “하……, 아, 으……, 흐응…….”

    “부드럽게 하는 게 좋아요?”

    “그냥 다……, 흐……, 다 좋아요.”

    “성가시긴.”

    타박하는 말과 달리 주완은 잠시 뗐던 입술을 가슴에 묻고 부드럽게 빨아 당기며 뜨거운 내벽 안쪽으로 성기를 문질렀다. 전립선이 살살 긁힐 때마다 전류가 오르는 듯 온몸이 파들파들 떨려 댔다. 준희는 그를 더 깊숙이 안기 위해 허리를 안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원래, 읏, 이렇게 부드럽게도 하세요?”

    가슴을 빨던 혀가 멈추었다. 주완은 고개를 떼고 손을 들었다. 짝, 가벼운 손찌검이 뺨 위로 떨어졌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퍼뜩 정신을 차릴 정도는 되었다. 준희가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자 주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빨고 있는데 말 시키지 마세요. 짜증 나려고 하니까.”

    “네…….”

    “매를 벌지.”

    “그게 아니……, 아흑.”

    가슴에 입술을 묻은 주완이 이번에는 준희의 젖꼭지를 아플 정도로 깨물었다. 긴장을 느슨하게 풀고 있던 몸이 파드득 튀었지만 주완은 제 무게로 반항을 제압하며 유두를 잘근잘근 씹고 빨았다. 그는 기어이 가슴이 빨갛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애무한 다음 입술을 뗐다.

    ***

    그는 소파에서 두 차례 더 사정한 뒤에야 준희를 놓아주었다. 관계 후에는 여느 때처럼 따뜻한 물에 몸을 풀었지만 긴장한 상태로 수갑과 족갑에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근육이 뭉쳐 있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의 상태를 확인한 주완은 그를 소파에 앉혀 놓고 몸 곳곳을 주물러 안마해 주었다.

    반신욕과 안마로 노곤해진 몸은 금방이라도 잠들어 버릴 듯 하염없이 늘어졌다.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려 애쓰며 눈을 굴리던 준희의 시선이 거실 테이블 위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거기에 놓인 손목시계를 향했다. 지난날 그가 선물해 주었던 바로 그 시계였다.

    “…….”

    알은체를 하려다가도 혹시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우려되어 흘끔 눈치를 보았다. 무심한 얼굴로 허벅지를 주무르던 주완이 그의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기울였다.

    “할 말이라도?”

    “저기, 저 시계요.”

    “잘 쓰고 있습니다. 마음을 담아 산 선물이었을 테니까.”

    몸보다 마음이 먼저 눅진하게 흘러내렸다. 준희의 시선이 손목시계에 가서 닿았다. 스멀스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이야 꾹 눌러 참았지만 홍조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붉어진 뺨 위를 주완이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뭘 그렇게 좋아해요? 차라고 준 시계 아니었나?”

    “그래도 진짜 사용하는 걸 제 눈으로 보니까 기분 좋아서요.”

    그의 대답에 주완이 픽 웃고는 다시 손을 놀렸다. 주완은 안마에 탁월했다. 뭉친 근육을 귀신처럼 찾아내 살짝 아프다 싶을 정도로 주물러 긴장을 풀어 주었다.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원래 선물하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까?”

    “그렇기는 한데요.”

    “솔직해서 좋네.”

    고민 없는 대답에 주완의 손길이 다소 투박해졌다. 윽, 윽. 준희는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이다 대답했다.

    “평소보다 더 좋은 것도 사실이에요.”

    타이밍이 수상하게 느껴졌겠지만 그래도 진심이었다. 말없이 안마에 집중하던 주완은 그의 몸을 충분히 풀어 준 다음에야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선물은 고맙지만, 지난번에 받은 걸로 충분합니다.”

    “……네.”

    대답이 흐릿했다. 마뜩잖은 기색이 분명했다. 주완이 눈썹을 흘끗 올리며 재차 설득했다.

    “그런 거에 익숙하지도 않고. 또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사는 편이니까 강준희 씨가 살림 더할 필요 없어요.”

    “알아요.”

    “그래요.”

    “원하면 다 가지실 테고, 싫으면 가진 걸 버릴 수도 있으실 테죠. 잘 아는데…….”

    “그런데?”

    주완을 향해 돌아앉은 준희가 눈을 마주쳤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눈치를 보았다. 주완은 뜸을 들이는 준희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말끝을 흐리던 준희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오롯이 맞추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래도 좋을 것 같거든요.”

    아까까지 눈치 보던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맞닿은 시선에는 드물게 확신이 배어 있었다.

    “제가 얼마나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주완 씨가 주는 거라면 뭐든지요.”

    그러자 약간의 침묵 끝에 주완이 입꼬리를 당겼다. 사소한 변화였지만 분위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 근사한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사이 주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했다.

    “일리가 있네.”

    별것 아닌 한 마디에 바다에 파도치듯 마음이 일렁인다. 준희는 시선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주완의 표정이 한결 더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럼 기왕 고를 거 살롱에서 골라 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강준희 씨가 원하는 플레이 도구를 선물로 받고 싶은데.”

    주완의 손이 준희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는 스쳐 지나가 뒷덜미를 주물렀다. 뜨거운 온기가 전해지며 순식간에 분위기가 전복되었다. 입고 있는 샤워 가운을 당장이라도 벗겨 버릴 듯 노골적인 시선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주완의 손길과 눈길이 동시에 거두어졌다. 망설이는 시간도 사치였던 모양이었다. 준희는 뒤늦게 입술을 비죽거렸다.

    “내키지 않으면 숙제라고 생각하세요. 소감문은 그만 제출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 안 했어요.”

    볼멘소리로 중얼거리자 주완이 낮게 웃었다.

    ‘어쩐지 전보다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장난스러운 웃음에 준희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금까지 주완의 온기가 닿아 있던 뒷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

    데이트가 약속된 다음 토요일에는 주완이 바빠 얼굴을 오래 볼 수 없었다. 그는 서울의 한식집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한 뒤 빠르게 사라졌다. 정말로 바쁘기는 한 모양인지 간간이 지속되던 메시지도 그날부로 답장이 뚝 끊기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끊어졌던 메시지가 도착한 건 수요일이 다 되어서였다.

    차주완 대표는 뭘 할까. 아직도 바쁠까. 혹시 연락하고 싶지 않아 핑계를 댄 것은 아닐까.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었을까.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의문과 불만이 고작 그 다섯 글자에 사르르 녹았다. 스스로 구제 불능이라고 자책하며 준희는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요.」

    「토요일에 봅시다.」

    간략한 용건만 달랑 남겨진 메시지에 구태여 말을 붙여 이어 갈 힘이 나지 않았다.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불만스레 머리카락을 헤집던 준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율을 호출했다. 그는 켜켜이 차오르는 불만을 ‘건강하게’ 해소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한 목적지는 그때의 그 호텔이었다. 19층에 SM 살롱이 자리하고 있는 그곳. 플레이 도구를 선물로 받고 싶다는 주완의 숙제가 기억났던 까닭이다.

    “회원 확인되셨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의 취향을 조사하기 위해 지율을 시켜 일찍이 가입해 두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그날처럼 중세풍 턱시도를 입고 작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직원이 안내를 도왔다.

    직원은 벨벳의 커튼을 걷고 미지의 영역으로 앞장섰다. 대기 공간의 카펫을 넘어가자 나무로 짜인 바닥재가 삐걱삐걱 뒤틀린 소리를 내며 준희를 맞이했다. 숍은 주완의 펜트하우스 2층 다락방을 대규모로 확대해 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거대한 쇼핑몰을 방불케 하는 규모에 준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약간 벌리고 감탄했다.

    “자유롭게 둘러보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안내한 직원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섰다. 가까운 벽면 유리 진열장에 형형색색의 가죽 채찍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이자 문득 아찔해졌다.

    벽면 전시장 말고도 숍 공간에는 커다란 진열대가 일렬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준희는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진열대 위의 물건들을 훑어보았다. 그곳에는 체벌 도구뿐만 아니라 각종 구속 도구들과 정조대 따위의 기구들이 즐비했다.

    준희는 적당히 흐린 눈으로 그것들을 보아 넘겼다. 어떤 물건에도 흔쾌히 손이 가지 않았다. 기구를 직접 사다 바친다니, 저를 얼마든지 괴롭혀 달라는 애원으로 읽힐 것 같아 공연히 뺨이 후끈거렸다. 아마도 바로 그 지점을 노린 것일 터였다. 준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적거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선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부드러운 가죽 재질의 목줄이었다. 꼭 사냥개의 목에 걸어 놓을 것만 같은 투박한 모양새였다. 옆에 같은 재질의 리드줄이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영 다른 목적으로 쓰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준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줄을 만지작거렸다.

    목줄을 걸고 무릎을 꿇으면, 그가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예뻐해 줄까?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까지 치밀어 올랐다. 마치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듯했다. 준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목줄에서 손을 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정말로 강아지 어르듯 다정하게 대해 줄지도 모르지.

    준희는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을 떠올렸다. 걸음이 멈춰 선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는 몸을 살짝 돌려 문제의 목줄 근처로 살며시 다가갔다. 멀찍이 선 직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걸로 주세요.”

    지시를 받은 직원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서 준희가 가리킨 제품의 품번을 기록했다.

    “사은품으로 플러그가 함께 나가는 제품입니다. 나가시는 길에 같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포장도 되나요?”

    “예, 포장해서 준비하겠습니다.”

    깔끔하게 정리한 직원은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준희는 마지막으로 목줄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개운하고도 찝찝한 기분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 선반에 진열된 것은 저온초들이었다. 주완이 사용한 종류의 양초도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어 빠르게 지나쳤다.

    바이브레이터나 딜도 따위의 평범한 기구들도 있었지만, 주사기라든지 의료 도구로 보이는 듯한 수상한 물건들도 잔뜩 있었다. 숍 전체를 헤집고 다니며 샅샅이 구경하고 나니 성인 용품에 대해 무척이나 박학다식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숍의 한편에는 플레이용으로 개조된 가구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벤치 모양의 나무 가구부터 X자 모양의 구속대와 용도가 불순해 보이는 나무 목마 등 종류도 각양각색이었다. 준희는 공연히 제 엉덩이가 얼얼한 것 같아 바지 위쪽으로 슬쩍 살을 문질렀다.

    쇼핑은 싱겁게 끝이 났다. 백화점에서는 내키는 대로 결제하면 그만이었는데, 직접 사용할 도구라고 생각하니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쇼핑을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가자 직원이 미리 포장해 놓은 상품을 건넸다. 비밀스럽게 포장된 종이백은 손잡이마저 벨벳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부드러운 촉감이 손바닥을 스치는 기분이 공연히 낯설게 느껴졌다.

    ***

    가져갈까, 말까.

    살롱에서 준비한 선물을 책상 위에 올려 둔 채 준희는 토요일 오후까지 고심했다. 집 앞에 차를 대어 두고 기다리던 지율이 쫓아 올라와 문을 두드렸을 정도였다. 안쪽에서 말이 없자 문을 열고 들어온 지율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러다 늦겠어요. 뭐 하세요?”

    “……고민.”

    “잘 보이고 싶은 거라면 선물을 가져가느니 시간에 맞춰 나가는 걸 택하겠어요.”

    “맞는 말이야. 가자.”

    준희는 선물을 집어 들고 지율의 뒤를 따라나섰다. 차에 오른 준희는 쇼핑백을 옆자리에 앉히고도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오늘따라 도로에는 유난히 차가 많아 체증이 심한 듯했다. 룸 미러로 준희를 관찰하던 지율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오늘 왜 그래요?”

    “뭐가?”

    “평소보다 더 불안하고 초조해 보여서요. 차주완 대표랑 싸웠어요?”

    “그럴 리가. 좋은데, 우리?”

    준희가 의아해하며 대답했으나 지율은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전화는 왜 안 받으세요? 아까부터 진동 울리는 것 같은데.”

    “……어?”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준희는 일이 무언가 꼬여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휴대 전화를 꺼내 보았다.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은 주완이 아니었다.

    「최시훈 님의 부재중 전화 (2)」

    알림을 확인한 준희는 골몰했다. 분명히 연락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 뜻을 못 알아들을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때의 부탁을 불사할 만큼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에 휴대 전화가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잉, 지이잉. 휴대 전화는 받아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듯 준희의 손바닥 위에서 질기게도 몸을 떨었다. ‘최시훈’이라고 떠오른 화면을 가만히 응시하던 준희는 진동이 끊기기 직전에 전화를 받았다.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

    […….]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따져 물었지만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준희는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고 화면을 응시했다. 전화는 연결되어 있었다. 준희는 다시 휴대 전화를 뺨에 붙이며 상대를 불렀다.

    “야, 최시훈.”

    [……형.]

    휴대 전화 너머로 풀 죽은 기색이 전해졌다. 준희는 그 낮게 잠긴 목소리에서 불행의 기척을 읽고 말았다. 어쩌면 조만간 이런 날이 오리라고 여러 번 짐작했던 탓이다. 시훈의 어머니는 그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언제 잘못되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병들고 약한 상태였다.

    [돌아가셨대요.]

    “…….”

    [어머니가요.]

    준희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마침 건널목에서 차는 멈춰 섰고, 지율은 룸 미러를 통해 준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정해진 약속과 돌발 상황을 저울질하게 되는 본능적인 갈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윽고 자책했다. 순수하게 슬픔을 공감해 주지 못한 찰나의 간극이 커다란 죄책감으로 불어났다.

    “어디야? 형이 갈게.”

    휴대 전화를 쥐고 있는 손끝이 차갑게 물들었다. 준희는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

    「오늘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갑작스럽게 죄송해요. 누나한테 일이 생겨서요.」

    아무리 너그러운 남자라도 사귄 전적이 있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 거짓 변명을 선택한 건 그래서였다.

    어쩌면 쉽게 들통날지도 모를 핑계였지만 그것 말고는 특별히 떠오르는 변명거리가 없었다. 집안일이라고 하면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넘어가 주리라 나이브하게 판단했다.

    「그렇게 하세요. 급한 일 끝나면 연락하세요. 걱정되니까.」

    「기다리겠습니다.」

    답장으로 돌아온 의외의 진심에 양심이 따끔거렸다. 준희는 답장하지 않은 채 휴대 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장례식장 복도를 밟았다. 구둣발이 대리석을 밟는 소리가 차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시훈은 검은 양복을 입은 채 분향실 구석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가족도 없이 혼자였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동안 친척들과의 얄팍한 연도 끊겨 나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것 같다. 늦은 시간에 돌아가시게 되어 아직 조문객 한 명 도착하지 않아 공기가 썰렁하고 쓸쓸했다.

    “최시훈.”

    준희는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시훈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미끄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시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준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도리어 건조했다. 울음기 한 점 없어 보이는 녀석의 얼굴은 초췌하고 창백해 보였다.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해요.”

    “야, 너는 그딴 소리를…….”

    “…….”

    시훈은 힘없는 목소리로 죄책감을 자극했다. 준희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시훈은 가볍게 웃었다. 핏기 없는 마른 입술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준희는 곧 인상을 펴고 물었다.

    “어머니는 잘 보내 드렸어?”

    “그냥요. 그냥.”

    “마음은, ……괜찮고?”

    이럴 때 위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또한 부모님을 잃었지만 너무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그에게는 조부인 강욱진이 큰 어른으로 있었기에 지금의 시훈과는 처지가 많이 달랐다.

    가만히 마주친 눈빛은 서글퍼 보였다. 아무리 오래도록 마음을 준비했다고 한들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심정이 괜찮을 수가 없겠지. 준희는 이성으로 그를 이해했다.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시훈이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야.”

    어깨를 당겨 품에 안은 팔이 뒤이어 허리에 감겼다. 시훈은 준희를 끌어안은 채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뜨거운 온기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준희는 그를 떼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들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깨가 차츰 젖어 드는 것이 느껴져서이기도 했다.

    텅 빈 분향소에서 한참이나 시훈에게 안겨 있었다. 안겨 있는 자세에서는 밝은 영정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생전 젊은 날의 얼굴은 후일의 고난이라고는 모르는 표정으로 환히 웃고 있었다. 공연히 입 안이 씁쓸해져서 준희는 시훈을 빠듯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야 시훈은 준희를 놓아주었다. “죄송해요.” 쓸데없는 사과와 함께였다. 준희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말했다.

    “지율이 죽 사 오라고 보냈어. 밥 챙길 새도 없었지? 얼굴이 딱 피죽 하나 못 얻어먹은 꼴이네.”

    “못생겼어요?”

    “그걸 말이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느덧 꽤나 잠겨 있었다. 준희는 장난스레 그의 창백한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그제야 시훈은 입꼬리를 올렸다.

    “죽 오기 전까지 좀 자 두든가 해. 보내 드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깨 좀 빌릴게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벽에 기대앉은 채 시훈이 준희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어깨에 얹힌 무게감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밤새운 나날이 비단 어젯밤 하루뿐이지는 않겠지. 뜬눈으로 여러 밤을 보낸 뒤에야 보내 드렸을 것이다. 정황은 듣지 못했어도 눈 밑 거뭇한 안색을 통해서 그쯤은 유추할 수 있었다.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드나드는 것이 느껴졌다. 준희는 고개를 기울여 시훈이 잠깐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지난밤 충전기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는지 배터리가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었다.

    빙글빙글 도는 손가락 끝에 주완의 마지막 메시지가 아른거렸다. 뭐라고 답장해 둘까. 고민하는 사이 휴대 전화가 방전되었다. 야속한 타이밍이었다.

    “도련님.”

    마침 지율이 포장된 죽을 들고 분향소 안으로 들어왔다. 준희는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지율은 준희 어깨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시훈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흘끗 보고는 죽집 종이백을 근처에 내려놓았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혹시 휴대 전화 충전기 가지고 있어?”

    “차에 있어요. 가져다드릴까요?”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준희와 잠시 사귄 뒤로 사촌 형제처럼 지낸 사이이기 때문에 지율 역시 시훈을 잘 알았다. 준희는 꺼져 버린 휴대 전화 화면과 시훈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따 차에 가서 충전하지, 뭐.”

    “네. 그리고 오는 길에 강희미 대표님이랑 이야기해서 최대한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쪽으로 단속하는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어, 발인까지 네가 붙어서 서포트해 줘.”

    소속사 대표이자 준희의 셋째 누나인 강희미에게도 시훈은 오래 함께하고 싶은 아티스트였다. 지율은 조곤조곤 상황을 알리며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라도 사다 드릴까요? 언제까지 계실 거예요?”

    “잠깐 재우고 죽 먹는 거 보고 일어날까 싶어. 지금 몇 시야?”

    “벌써 일곱 시 넘었죠.”

    휴대 전화로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방전된 것을 깨닫고 묻자 지율이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준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더 편한 자세로 벽에 등을 기댔다.

    연락을 기다리겠다던 주완의 메시지가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애써 지워 버렸다.

    ***

    시훈이 다시 깨어난 건 열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준희는 주방에 양해를 구하고 이미 식은 죽을 데워 요기를 하게 했다. 오늘은 집에 갔다가 내일 아침 일찍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지만 시훈은 분향실에 붙어 있는 대기실에서 눈을 붙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것까지 꺾을 의지는 없었기에, 준희는 두 번 권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가 이미 자정이었다.

    “고마워요.”

    장례식장을 나서는 준희와 지율에게 시훈이 나직이 말했다. 희미한 미소도 함께였다.

    “내일부터는 안 올게. 대신 3일 동안 지율이가 도울 거야. 필요한 거 있으면 계산하고 예의 차릴 것 없이 바로바로 얘기하고.”

    “그렇게 할게요.”

    “쉬어요, 시훈 군.”

    지율 역시 마지막으로 그렇게 인사하며 시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를 놓아두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뒷좌석에 몸을 싣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아서, 준희는 차에 오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 전화를 충전시켜 주완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은 차에 시동을 걸며 넌지시 던진 지율의 질문 덕분이었다.

    “아까 휴대 전화 충전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맞아.”

    “주세요, 연결해 드릴게요.”

    지율은 차를 출발시키기 전 다시 주차 기어로 바꾸고 뒷좌석 충전 단자에 준희의 휴대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방전되어 있던 휴대 전화 화면에 하얗게 배터리 그림이 띄워졌다.

    전원은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차가 출발하고 십여 분 넘게 밤길을 드라이브할 때까지 끈질기게 준희의 애간장을 녹였다. 최소한의 배터리가 충전되었을 무렵 몇 차례 시도 끝에 휴대 전화가 켜졌다.

    “아…….”

    화면이 켜지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알림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차주완 님의 부재중 전화 (12)」

    뜻밖의 흔적에 아찔할 정도로 눈이 따끔거렸다. 준희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지막 전화의 흔적은 11시 40분쯤, 멀지 않은 시간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한 걸까? 아니면 둘러댄 핑계가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챘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지는 사이 손가락이 허공을 맴돌았다.

    “어두운 데서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눈 안 아파요? 조명 켜 줘요?”

    “아니, 아니…….”

    돌이켜 보니 들통날 게 뻔한 변명이었다. 대략적으로라도 뭐라고 둘러댈지 정해 놓지도 않고 저지른 일이었다. 시훈이 자는 사이에 잠깐 빠져나와 이실직고했으면 모르겠지만, 당황해서 거짓말했다고 털어놓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패닉에 빠져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휴대 전화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눈앞에 울긋불긋 빛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리고 곧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늦게라도 연락하세요.」

    주완이 보낸 그 짧은 메시지에 준희는 더 이상 망설이면 안 될 시점에 왔다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나 통화 좀 해야겠다.”

    시시각각 변화해 가는 준희의 표정을 룸 미러로 흘끗 확인한 지율이 인도 근처에 차를 세웠다. 밤이 늦어 도로와 인도에 차도 사람도 드물어 다행이었다.

    “편하게 통화하고 끝나면 알려 주세요.”

    안전벨트를 푸르고 운전석을 떠나며 지율이 말했다. 그는 잠시 주변을 서성이며 바깥 공기를 마실 계획이었다. 준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라고 이야기하지? 집안일이라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갑자기 바빠진 데다가 휴대 전화 배터리가 나갔었다고, 거짓으로 둘러대는 게 나을까? 아니면 이제라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쪽이 나을까? 마음을 결정하기도 전에 손가락이 제멋대로 주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을 시도한 지 오래되지 않아 주완은 전화를 받았다.

    […….]

    “……주완 씨, 너무 늦었죠.”

    전화를 받은 쪽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결국 준희가 먼저 건조한 입술을 떼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변명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저녁에 회장님께서 안부 전화를 걸어 주셨습니다.]

    “…….”

    [둘러댄 집안일이라는 건 거짓일 테고, 혹시 가족에게 알릴 수 없을 만큼 난처한 처지에 놓이기라도 한 겁니까?]

    입술을 떼기도 전에 퇴로를 차단당했다. 주완이 선수를 치는 것은 예상에 없었던 일이었기에 더욱이 말문이 막혔다.

    “그게요, 주완 씨.”

    [목소리를 들어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고.]

    “…….”

    [무슨 일이었길래 가족까지 팔아 가며 나를 속이고 약속을 취소한 겁니까?]

    휴대 전화를 넘어오는 목소리가 차갑고도 차분했다. 준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차창 밖의 지율을 흘끗 보았지만 그 역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누군가와 통화 중인 듯했다. 준희는 어쩐지 따끔거리는 듯한 목덜미를 연거푸 더듬었다. 손바닥의 열감이 피부에 전해졌다.

    이제는 정말로 사실을 말해야만 하는 마지노선이 아닐까. 남아 있는 한 자락의 이성이 그를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할 생각이 없는 겁니까?]

    “거짓말해서 죄송해요. 큰일이 생긴 건 아니었어요. 그게…….”

    [큰일도 별일도 아닌 일인데 나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을 이유가 뭡니까. 남자 문제?]

    “…….”

    왜 이렇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해 버린 걸까. 속으로 자책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질끈 감았다가 뜬 눈덩이마저 뜨거웠다.

    뭐라도 말해. 말하라고. 그는 마음으로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스스로를 다그치는 사이 주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꿀 먹은 벙어리 된 거 보니까 이것도 사실입니까? 내가 넘겨짚는 족족 다 맞아서 할 말이 없어진 겁니까? 듣고 있기는 한 거예요?]

    “듣고 있…….”

    [입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강준희 씨는 내가 얼마나 실망했을지 가늠이 안 됩니까?]

    아…….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길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제는 정말로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준희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끼는 동생이…… 상을 당했어요. 솔직하게 말했어야 하는 거 아는데…… 괜한 오해를 만들까 봐 저도 모르게 둘러댔…….”

    [그냥 아끼는 동생이 아닐 것 같은데. 그랬으면 애당초 솔직하게 말했겠지. 그게 뭐라고.]

    “……어릴 때 잠깐 사귀었던 사이예요.”

    기어이 고백해야만 하는 심정이 참담했다. 진작 털어놓았으면 달라졌을까? 최시훈의 존재에 대해 잘 설명하고 허락을 구했으면 괜찮았을까? 그가 고르지 않은 무수한 선택지들이 머릿속에 빼곡하게 펼쳐졌다.

    [강준희 씨.]

    “…….”

    [그쪽은 지금 신뢰를 무너뜨리는 짓을 한 겁니다.]

    어느덧 사뭇 격양되었던 목소리에 얼핏 자조적인 기색이 섞였다.

    [증명해 보이겠다더니.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마음이었나?]

    증명해 보이겠다고 자신했던 것이 고작 3주 전의 일이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실망시킬 다짐이었던 것이다. 준희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관계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가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주완 씨, 지금 집이에요?”

    [아니, 아직 펜트하우스입니다.]

    “제가 지금 갈게요. 얼굴 보고 이야기…….”

    [오지 마세요. 얼굴 마주하고 화 누를 자신 없습니다.]

    전화로는 한계가 있었다. 보는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주완은 딱딱하게 거절했다.

    “그래도…….”

    [경고했습니다. 지금 오면 내가 강준희 씨를 진짜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아요.]

    매몰차게 말한 주완이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를 허망하게 들고 있던 준희는 재빨리 차창을 내리고 지율을 불렀다.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던 지율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준희를 바라보았다.

    “우셨어요?”

    “호텔로 가 줘. 지금 당장.”

    걱정하는 지율에게 제대로 상황을 설명할 여유는 없었다.

    ***

    어쩌면 정말로 처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쪽 성향과 동떨어진 바닐라일지도 모른다.

    주완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상대방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좋아, 해요. 주완 씨를 좋아해요!

    맞선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는가 싶더니 19층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그날 이후 병원에서 계약 관계라도 되자고 매달렸던 것도, 저에게 반했기 때문이라면 이해가 되었다. 기껏 해 봐야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라거나 이쪽 성향을 눈치채 호기심이 동한 일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낭패였다.

    그동안 감정을 앞세워 주완에게 접근하는 사내들은 왕왕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적당한 거리에서 선을 긋고 관계를 정리해 나갔다. 그러나 강준희에게는 저도 모르게 방심했다. 가진 게 많은 남자인 데다 밤 생활 소문도 심심치 않아 쉽게 마음을 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계약에 감정이 얽히면 일 처리가 복잡해진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어때요?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지금은 따뜻한 음료가 더 나을 것 같아서요. 라테 마실게요.

    이쪽 용어로 반응을 떠보고 나서는 이쪽 세계에 관심조차 없었던 일반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동안 여러 번의 플레이를 하면서 눈치껏 변죽을 맞춰 왔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걸 알아챘을 때 단칼에 정리했어야 하는 건데, 어째서…….

    -그럼 증명해 보세요. 강준희 씨가 말한 대로.

    밀어내지 못한 걸까. 그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사내를.

    어쩌면 더 곤란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확실히 원초적인 본능이 기승을 부리곤 했다. 더 화를 내고 엄격하게 몰아붙여서 한계에 치달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매몰차게 밀어내도 끝끝내 매달려 오는 간절한 눈동자에 현혹된 것일지도.

    길들여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쪽 성향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강준희에게는 분명히 ‘끼’가 있었다. 마음에 들어 보기 위해 변죽을 맞췄다고 하기에 그는 분명히 플레이를 즐겼다. 주완은 파트너가 관계 중 순수하게 고통만 느끼는지, 아니면 그 고통에서 스스로 희열을 찾아 반응하는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준희는 후자에 속했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답지 않은 낙관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준희에게서 도착한 메시지 한 통은 들떠 있던 감정을 평소 수위로 끌어 내려 주기에 충분했다.

    -오늘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갑작스럽게 죄송해요. 누나한테 일이 생겨서요.

    거짓말이라는 것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강욱진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강욱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어투로 일상적인 안부를 물었다. 혹시 댁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에둘러 물었으나 그저 무탈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피가 차게 식는 듯한 기분이었지만 주완은 가까스로 예의를 갖춘 채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난 뒤에도 걱정이 앞섰다. 강욱진 회장이나 저에게까지 털어놓지 못할 봉변에 처한 것은 아닐까 우려했지만 주완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상위 0.01%의 인생을 살고 있는 강준희에게 그럴 만한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지.

    주완은 찬물이라도 끼얹힌 듯 갑작스럽게 현실로 복귀했다. 그들의 관계는 낙조 심한 해변가에 세워진 모래성과 같았다. 지반이 약할뿐더러 하루 두 차례씩 만조와 간조가 교차해 언제 무너질지 예측이 되지 않는 위태로운 성이었다.

    -좋아해요.

    -……혼나는 거.

    -맞는 것도, 괴롭힘당하는 것도요.

    어설픈 거짓말에서 기인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휴대 전화를 내려놓은 주완이 한숨을 토해 냈다. 시작부터 거짓말이었던 준희는 번번이 거짓말을 일삼았다. 플레이할 때마다 처음이 아닌 척 둘러대야 했으며, 눈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을 숨기기 위해 태연한 척했을 것이다. 그런 데다가 오늘, 기어이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어 버리고 말았다.

    -……어릴 때 잠깐 사귀었던 사이예요.

    고작 그런 과거를 숨기기 위해, 가족까지 팔아넘기는 거짓 핑계로 둘러댄 것이다.

    “강준희 씨. 그쪽은 지금 신뢰를 무너뜨리는 짓을 한 겁니다.”

    고작 이런 사람과 어떻게 해 볼 마음을 먹었다니. 전조 증상도 충분히 있었는데. 불행의 기척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할 정도였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신뢰를 동반해야 한다. 신뢰를 기반하지 않는다면 범죄와 폭력으로 전복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선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강준희와는 애초에 성립되어서 안 되는 관계였다.

    “증명해 보이겠다더니.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마음이었나.”

    이 바닥에 오래 머무르며 그는 선을 긋고 관계를 끊어 내는 데 익숙했다. 이번에도 그저 전화를 끊고 상대를 무시한 채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이었을 텐데, 본능적인 비난이 잇새를 가로질렀다.

    [제가 지금 갈게요. 얼굴 보고 이야기…….]

    “오지 마세요. 얼굴 마주하고 화 누를 자신 없습니다.”

    [그래도…….]

    “경고했습니다. 지금 오면 내가 강준희 씨를 진짜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내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아요.”

    마지막 경고는 진심이었다. 주완은 통화를 종료시킨 뒤 휴대 전화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 상태로 상대방을 보았다간 분명히 상처 입히고 싶을 것이다. 감정적인 상태에서의 플레이는 위험했다. 게다가 이제는…… 훈육을 통해 그에게서 얻어 낼 것도 마뜩지 않았다. 정리해야만 하는 관계였다. 주완은 찬물을 들이켜며 되뇌었다.

    “하…….”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으나 들끓는 화를 무시하기란 어려웠다. 그는 거실로 자리를 옮겨 야경을 응시하며 거칠어진 기분을 삭이기 위해 오래도록 숨을 골랐다.

    초인종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전화를 끊은 지 20분은 되었던가. 이곳을 찾을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경고를 무시하고 펜트하우스를 찾아올 남자, 강준희 말이다.

    주완은 가만히 눈을 내리며 고민했다. 문을 열어 줄까, 말까. 그는 평정심을 잃은 상태였다. 그러나 드물게 본능이 이성을 앞질렀다. 곧이어 가파른 보폭이 현관을 향했다. 성큼 다다른 현관에서 문을 열어 주었을 때, 주완은 불청객을 보기 위해 고개를 약간 숙여야 했다. 펜트하우스를 찾은 준희가 복도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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